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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선한 목자(요10장)
2020. 3. 27. 이현래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0장 생명의 목장, 생명의 목자에 대해 말씀 드리겠다. 우리 출판부에서 나간 책 가운데 제일 많이 팔린 책이 이라는 책이다
요한복음 말씀이다. 옛날 책이므로 보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워서 보기 바란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고치는 사건을 통해 말이 많았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겠는가? 선지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하겠는가? 별 말이 다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안식일에 이런 것을 하는 것을 보니까 진짜가 아닌 것 같다 등 하여간 별 말이 다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그 사람 어디 교단 사람이냐? 어느 신학교 나왔냐?’ 이렇게 묻지 않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옛날 이야기 같지만 오늘날도 똑같은 유형이 반복된다. 미국에서 무슨 신학교를 나왔다, 박사 학위를 가졌다거나 혹은 못 가졌다는 것이 목사의 자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있는 시대니까 그때보다 오히려 더 타락했다 할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았던 것과 지금이 판이하게 다르다. 해방 전후를 통해서 그때는 항일투쟁, 신사참배, 이런 문제가 많았다. 그것 때문에 교단이 갈라지기도 했다.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것들이 다 같은 것이다. 그 후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갈라지며 또 상종할 수 없다고 갈라졌다. 자기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유대인들이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다. 냉철한 이성주의도 아니고, 감성적인 것이 너무 강하다고 할까 그런 뭐가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부터 있던 하나의 풍습이라기보다는 민족성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색당파가 있어서 무조건 하고 다른 당에서 집권하면 안 되니까 결사적인 투쟁을 했다. 이런 문제들이 모두 복음 외적인 문제들이고, 본질에서 빗나간 문제들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순수하게 본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감성적인 것이라기보다 이성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이니까 지식은 지식으로 받아들이니까 선악과를 받아들인 것 같다. 생명은 생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명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 생명나무이다. 지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식과 생명이 다른 점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지식으로는 생명을 이해하고 소화한다는 것이 무리한 일이다. 금붕어 새끼 하나도 지식으로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하물며 어떻게 이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판단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하겠는가? 짐승도 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이 있다. TV에서 봤는데 개같이 생긴 것이 늑대도 아니고 하이에나도 아닌데 몸이 얼룩한 것을 보니 하이에나 같은데 꼬리를 보니 하이에나 같지는 않다. 영락없이 개다. 새끼를 많이 낳았는데 젖을 먹어야 하니까 사냥을 못나간다. 누가 사냥을 해오는가 하면 지금 낳은 새끼들의 형들, 일 년 전에 낳은 형들이다. 일년생 개들이 사냥을 해서 먹이를 가져오는데 신기했다. 일년생 형들인데 막 태어난 동생들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 어미가 새끼를 좋아하듯이 좋아한다. 사냥을 해서 자기들이 먹지 않고 가지고 오면 어미가 그것을 먹고 젖을 내서 새끼들이 먹게 한다. 짐승들의 세계에 이런 것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들이 동생들을 위해서 일 년 된 자식들이 그 어머니를 위해서 사냥을 해서 온다는 것이 도덕이라고 해야 되겠는가?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이것이 생명이다. 누가 가르쳐서 그러겠는가? 새끼들을 데리고 있다가 위험하면 옮겨야 하는데, 안전한 지대로 옮기려면 새끼들이 따라와야 하는데, 중간쯤 따라오다가 지치면 안 가려고 한다. 그런데 놔두면 안 되니까 형들이 이것들을 하나씩 물고 같이 옮긴다. 보면서도 짐승들도 저럴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세계는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무슨 이성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하겠는가? 선악과는 왜 그렇게 빨리 먹었는가? 이성으로 받아들이니까 빨리 받아들인 것 같다. 요즘 젊은 아이들을 상대해보면 논리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근원이 어디서 왔는지는 문제시 하지 않고 논리가 맞냐? 안 맞냐? 이것만 중요시 한다. 이성적이라는 그 말이다. 인간은 점점 원초적인 생명력은 약해지고, 이성은 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교회를 보는 관점이 옛날과 많이 다르다. 내가 어려서 본 교회와 지금 교회는 많이 다르다. 어렸을 때 목사상과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목사상은 아주 다르다. 시대 시대를 주름잡던 목사님들이 있다. 해방 후로 6.25를 겪으면서 크신 분이 한*직 목사이다. 그분들의 목자상과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60년대 들어오면서 굉장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5.16 이후로 사회가 산업화 되고 급격히 변화하면서 교회도 급격히 변화했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다. 내가 64년도에 서울에 올라갔는데 그때 이미 그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삼박자 구원, 성령 충만을 받는다,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이런 문제들이 교회문제였다. 거기에 같이 부응하지 못한 교회들은 신자들을 다 잃었다. 처음에 그런 것을 반대하다가 반대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지 않는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커진 이유는 주로 장로교에 있던 사람들이 장로나 평신도 할 것이 없이 다 그곳으로 몰려 들어갔다. 내가 서대문 쪽에 있었는데 그 교회가 가까웠다. 처음에는 몇 천 명이 모였다. 그것도 그때로는 많았지만 그것이 차고 넘쳐서 여의도 부지를 샀다. 그런데 그것도 지금은 넘치고 있다. 조*기 목사가 제일 후회하는 것이 그때 여의도 땅을 더 못산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그때는 그것이 굉장했는데 그것이 부족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내가 보기에 한국의 모든 교단의 교회들이 오순절 운동에 젖지 않은 교회는 없다. 그것이 없으면 교회가 잘 안되니까 겉으로는 장로교라고 해도 안에 들어가면 전부 그런 신앙적인 흐름이 주동하고 있다. 나도 그때 서울에서 목회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에 휩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나도 어떻게 하든 맛을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어서 나는 실패자다. 그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정말 맞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시골에 있는 친구에게 상세히 편지를 해서 이번이 이런 집회가 있으니 올라오라고 했다. 옛날 것을 하면 안 되겠다고 했더니 올라왔다. 이 사람은 첫날 와서 맨 앞자리에 앉더니 대번이 방언을 하는 것이다. 나는 몇 달을 공을 들여도 안 되는데 이 사람은 첫 시간에 방언을 한다. 그때 내가 별 것을 다 구경했다. 나는 결국은 되지 않아서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체질이 안 되어서 안 되나보다 하고 접었다. 그래도 항상 속에 찝찝한 것이 있다. 어제도 성경을 보다 찜찜한 것이 발견되었다. 안디옥 교회에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19:2)고 했다. 그래서 바울이 안수를 하니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받은 것이 그냥 믿음으로 속으로 받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 어떤 표적이 드러났다. 그래서 옆에서 보는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가 처음 들을 때와 똑같다고 했다. 이런 것이 그때는 굉장히 걸렸다. 도저히 해결이 안 되니까 아무리 다른 말로 해봐도 시원치 않고 실제로 만나보면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열심히 있으니까 아니라고 도저히 부정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 이것을 체험 없이 말하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金목사님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해보지 않은 사람은 또 모를 것이 아니겠는가? 해보지 않았는데 알겠는가? 요한복음 10장에 선한목자 이야기가 나온다.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 복잡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놓고 나온 말이 선한 목자 이야기가 나왔다. 누가 참 목자냐? 이 문제인데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10:11,12)라고 했다. 당신은 선한 목자냐고 물으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나는 선한 목자라고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는지, 상당히 부담된다. 요즘 이런 일이 표면적으로는 없지만 6.25 때는 이런 일이 많이 있었다. 실제로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문제가 되었다. 지금 고신 측 ○○○목사가 시무하는 이것 때문에 갈라진 것이다. 신사참배 한 사람들과는 상종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갈라진 것이다. 고신 측 사람들을 만나보면 특색이 있다. 나는 아주 교리적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생활에 대해서 철저하게 그것을 주장한다. 대학교에는 SFC라는 단체가 있다. 우리 교회에 그 단체에 다니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SFC를 알게 되었는데 아주 생활이 철저하고 순교적 신학을 따르자는 것이 SFC 목표이다. 어떤 교리를 따르자는 말이 아니고, 순교적 신학을 따르자는 것이 모토이다. 다는 모르지만 생활이 굉장히 경건하다. 내가 아는 평신도 한분도 있는데, 돈도 많이 버는 분인데 대단히 검소하다. 집에 가보니 너무 검소하게 산다. 돈을 많이 벌어서 대부분 교회들을 도와주고 있다. 집에 가보니 겨울에 불도 안 떼고 산다. 한번은 그 집에 갔는데 추워서 혼이 났다. 온돌인데 불을 떼지 않는다. 그래서 전기장판을 켜주는 데도 방이 차니까 추워서 혼이 났다. 코트도 다 낡은 것을 입고 다닌다. 유명한 가문의 출신이고 돈을 잘 번다. 치과를 하는데 기술이 좋다. 치과를 가봤는데 그렇게 잘하는 데를 처음 보았다. 나도 아주 예민한데도 치아를 새로 했는데도 새로 했다는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잘한다. 다른 곳보다 가격이 1.5배 비싼데 아는 사람은 다 그곳으로 오고 손님도 많고 인기도 많은데 생활은 아주 검소하다.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도 존경받는 분들이다. 그분이 지금 우리 교회 말씀을 아주 오랫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다. 수십 년 듣고 있고 여름집회도 한번 오셨다. 일본에서 자기 동생이 목회를 하고 있는데, 자기가 듣고 동생에게 테이프를 다 보내준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일본에도 사실은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 어디가도 기독교인이 저만하면 존경받겠다 싶은 그런 분이다. 누가 봐도, 일반 사람이 봐도 저런 사람은 크리스찬이라고 할 말 한 그런 분이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주*철 목사가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았는데,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한편에서는 또 아니다, 하면 어떠냐 하고 신사참배를 해서 크게는 그렇게 두 파로 갈라졌다. 선한 목자라는 것이 어떤 기준에서 보면 우리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문제이고 말이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말씀이나 행하신 것은 그때 당시 주류를 이루는 유대인들,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죽어 마땅한 일이다. 조금도 여유가 없이 마땅히 저런 사람은 죽여야 된다는 것에 속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을 무릅쓰고 했으니까 이것을 본받으려고 생각을 하면 어디까지 본받아야 하는지 정말 참 어려운 문제들이다. 이 시험에 합격하려면 대한민국 목사들 중에 십분의 일이나 남을지 모르겠는데 참 어려운 일이다. 다들 정말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옛날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노력을 하는데, 성경에 있는 데로 하려면 정말 어렵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린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다. 아무리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하더라도 물론 그때는 천당을 간다는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6.25가 나니까 나는 그때 내가 어렸지만 은근히 그런 생각이 났다. 만약 인민군이 와서 교회 다니느냐고 물으면 교회 다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는 성경책을 불 질러 버렸다. 혹시 와서 들키면 안 된다. 그때는 잘못하면 죽는다. 전쟁이 나니까 재판도 없다. 경찰도 그렇고 인민군도 그렇고 재판 절차라는 것이 없다. 죽이려고 하면 그냥 죽여 버린다. 법이고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전쟁시대이다. 한국 근대사에 양민 학살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양민 학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민군도 와서 죽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경찰이 와서 양민 학살한 것만 부각되어 있는데, 인민군이 학살한 사람은 얼마겠는가? 김*곤 목사도 학살 현장에서 도망하여 산 사람이다. 그때 가족을 다 잃었다. 아버지, 어머니, 부인과 자기까지 네 명이 다른 이유 없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가다가 거기서 어떻게 빠져 나와서 간신히 살아서 거기서 민족복음화라는 발상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고, 민족의 심성이 오기와 성깔로 차 있으니까 이것을 바꾸려면 복음을 전하는 것 밖에 없다고 승화한 것이다. 어린 아기를 놔두고도 그랬다. 옛날 말에 어린 자식 두고 상처하라는 말보다 더 저주스런 말이 없다고 한다. 어린 자식이 딸인데 딸을 두고 부인이 죽었으니까 재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부인은 본 부인이 죽고 재혼한 부인이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끝이 없다. 원수 갚을 것이 아니고, 민족의 심성에 그리스도를 심자고 한 것이 민족복음화 운동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에 아부를 했느니 어쩌니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할까 해서 조찬기도회도 만들고 전군신자운동도 하고 했던 것이지 그분이 정치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분을 만나면서 저런 분이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애국자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 본 헤퍼를 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데, 그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책을 읽어보면 한 마디도 원망이 없다. 나는 거기에 놀랐다. 젊은 시절에 그것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게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가? 잡혀서도 한마디라도 원망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 순수한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 이러저러 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순수하지 않다.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나라를 위한 것인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지 잘 모른다. 참 목자, 선한 목자, 이런 데서 많은 오해가 생겼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3)는 이런 말도 나오고 여러 가지 말이 나온다. 나는 그냥 살다보니 목사가 되었다. 어디 가서 목사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목자는 어떤 것이 참 목자이겠는가? 순교한 분들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교파가 되었든지 간에 말할 것도 없지만 예를 들어 꼭 그 순교만이 선한 목자냐 하면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저러나 어찌 되었든지 간에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거기에 기준을 둔다면 합격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목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양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낮에는 밖에 내놓아서 풀을 뜯게 하고, 밤에는 다른 짐승들의 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양 우리에 가두는 것이 목자가 하는 일이다. 다윗도 그 일을 했던 사람이다. 양들에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참 목자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다.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도 꽤 훌륭한 분에게 성경도 배우고 영향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분밖에 존경하는 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른 일도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다. 내가 그 길을 얻고 나서 보니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고, 경건한 생활도 많이 보고 많이 했는데, 내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존경했는데, 나한테 길을 알려주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지금 목자들이 해야 될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활이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에 표준을 두며 누가 합격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양들로 하여금 길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나 혼자 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나 혼자 존경받는 것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양에게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된다. 생명의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야 되고, 위험하지 않는 곳으로 인도해야 된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 같다. 어디로 가는지를 인도해야 된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인도하겠는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수렁에 빠진다. 내가 옛날을 생각하니까 영락없이 그렇다. 내가 8년 동안 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10년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는가? 굉장히 많이 했다. 할 때마다 나는 내가 말씀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나대로는 전할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히 성경을 성경대로 전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냥 쉽게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뒤로 가서 생각해 보니까 도대체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라 했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만약 나에게 길잡이가 없었더라면 나도 그냥 그렇게 평생을 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냥 좋은 말씀을 하다가 가는 것이다. 좋은 말씀이 어디 설교에만 있는가? 다른 데도 얼마든지 많다. 사서삼경은 굉장히 수준 높은 말씀들이다.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은 자기가 쓴 것이 아니고 전부 대화다. 제자들과의 대화, 왕들과의 대화, 이런 것들이 논어를 형성하고 있다. 맹자는 왕들과 국사를 논하는 책이다.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되는지 백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또 대학은 왕들이 보는 책이다. 왕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말하는 책이다. 윤리 도덕이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만 해도 충분하고 더 몰라도 된다. 그 정도만 실행한다면 다 성인군자다. 그리고 중용은 딱 적당하다는 뜻이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과유불급인데, 넘어가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적합하다는 뜻이 중용이다. 그 책을 평생 읽고 외우고 하는데, 더 좋은 말씀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 좋은 말씀은 없다. 왜 예수가 중요한가? 우리에게 길이니까 중요하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 되니까.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양이라고 생각되면 양떼에 대해서 나도 같은 양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생명의 목장 안에 같이 살아야 된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양들에게는 풀을 먹일 수 없다. 나도 같이 풀을 먹고, 양도 풀을 먹어야 된다. 왜냐하면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한 길로 가는 것! 그것이 참 목자가 아니겠는가? 한 길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은 좀 모자랄지라도 길은 한 길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길은 제시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는 알려주어야지 어디로 갈 것인지 모르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내가 모르면 할 수 없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면 목자라고 하겠는가?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길은 확실히 잡았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 사역의 정점이 십자가다. 그런데 십자가가 나에게 의미가 없어져 버리면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좋은 말씀은 성경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많이 있으므로 성경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분이 우리의 길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도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들에게 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잘 가든지 못 가든지 길이 있어야 가지 길이 없으면 아무리 좋아도 못 간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길 때 일화를 들으니까 그랬다. 그때 독일의 수상이 박*희 대통령을 좋아하여 아들처럼 생각했는데, 귓속말로 히틀러가 다 잘못했는데 딱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뭔가 하면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만든 것은 정말 잘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와서 경부고속도로를 계획했다고 한다. 그때 사실은 고속도로를 만들 만 한 돈이 없었다. 차관을 들여다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다. 다 미쳤다고 했고, 다 안 된다고 했다. 차도 없는데 무슨 고속도로냐고 했다. 차 한 대도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무슨 고속도로냐고 했다. 우리 교회 한 형제가 그때 당시 고속도로 공사의 현장 책임자였던 사람이 한 사람 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랬다. 고속도로를 할 때 불철주야로 밤을 새워가며 일을 했다고 한다. 야당도 극렬하게 반대했다. 김*중, 김*삼, 두 사람이 와서 공사를 못하게 하려고 공사장에 그냥 드러누웠다고 한다. 방송국에서는 그 사진을 찍고 나니까 가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극렬하게 반대했다. 신문도 굉장했다. 두 40대 기수론이라고 해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대통령 하기 전이니까 그 두 사람이 현장에 와서 드러눕는 사진이 나갔으니까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그것을 강행했다. 공사하면서 사람도 많이 죽었다고 한다. 장비도 시원치 않은데도 뚫자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처음에는 무슨 동맥을 뚫는다고 했는데, 저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뚫고 나니까 물류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부산에서 서울에 가려면 12시간인가 걸렸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4시간 혹은 5시간 만에 부산에서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 내가 그때 서울에 올라갔을 때인데, 처음에는 해산물 시장에 가면 인천에서 올라오는 해물밖에는 없었다. 갈치, 조기, 이런 대표적인 그런 것밖에는 없었는데, 고속도로가 뚫리고 나니까 멍게가 다 올라온다. 나는 이 멍게라는 놈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도로가 아니면 어떻게 올라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멍게는 동해안 그쪽 밖에 없다. 서해안이나 남해안에는 멍게가 없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본 것인데, 무슨 어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긴 것인데 멍게가 길가에서 팔리는 것이다. 도로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물류가 왕래 하니까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일이 생긴다. 그 후로 코로나 자동차가 일본에서 수입이 되었다. 포니라는 현대에서 차가 생산되기 전에 두 가지 자동차가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자동차 생산국가가 되게 된 것이다. 길이 중요하다. 길이 아주 중요하다. 길이 없으면 뭘 하고 싶어도 안 된다. 멍게가 어떻게 서울까지 올라오겠는가? 12시간씩 기차 타고 올라와서 먹을 수 있게 되겠는가? 처음에 저게 뭔가 싶어서 길가에 있는 것을 하나 사서 먹어 봤다. 세상에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못 먹겠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좋다고 먹는가 했다. 그래서 멍게는 생전 안 먹으려 했다. 그랬는데 C.C.C.에서 거제도를 갔다. 구조라 해수욕장이라고 유명한 데를 가니까 사람들이 멍게를 사놓고 먹는 것이다. 나는 멍게를 안 먹는다고 했더니 왜 그것을 안 먹느냐고 해서 나는 도저히 그것을 못 먹겠다고 했더니 한 번 먹어보라는 했다. 그런데 싱싱한 것을 먹으니까 맛있는 것이다. 지금은 나도 멍게를 좋아한다. 옛날에 12시간씩 싣고 온 그 멍게가 맛있겠는가? 도로가 참 중요하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것도 도로가 참 중요하다. 아브라함을 단순히 믿음의 조상이다. 믿음을 본받자고 하면 안 된다. 아브라함은 길이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브라함이 알았다면 ‘나는 예수께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는 예수를 모르니까 그렇지만 그 길이 예수께로 가는 길이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야곱도 마찬가지다. 모세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예수께로 가는 길이다. 길을 놓느라고 그랬다. 그 길로 들어서면 결국은 누구든지 예수께로 간다. 그 길로만 들어서면 된다. 부산에서 서울에 올라오려면 정거장이 많다. 바로 올라왔으면 훨씬 빠른데 경주를 돌아올라 오도록 설계가 되었다. 왜냐하면 경주가 관광지이기 때문에 거기를 빼놓으면 안 되기 때문에 돌아서 경부고속도로가 좀 멀게 되어 있다. 경주로 해서 대구로 거쳐서 김천으로 해서 대전으로 해서 간다. 그것이 다 부산이 아브라함이라면 경주는 이삭인 셈이다. 다 길을 만드느라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하고 나오면 그 계보가 다 예수께로 오는 길이다. 그냥 육신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계보를 잘 보면 이것이 길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길이구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이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구나. 옛날에 천당에 간다고 하는데 애매하다. 믿음이 얼마나 좋으면 천당에 가는 것인지, 행실이 얼마나 바르면 천당에 가는 것인지, 이것이 막막한 일이 아닌가? 구원파가 우리나라에 와서 지각 변동을 일으킨 일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은 지금 구원을 받았습니까? 당신은 지금 천당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것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갈지 못 갈지 어떻게 알겠는가? 내 행실을 볼 때 천당에 간다는 보장이 안 된다. 또 믿음을 보더라도 내 믿음이 정말 순수하고 완전한가?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바람에 그 말에 흔들려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조금 가니까 너는 이제 죄를 안 짓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교리적인 것은 조금 있으면 탄로가 난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 다섯 여자까지 다 예수에게로 연결된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는 길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목자의 일이다. 예수께로 가게 하는 길, 마지막에 십자가로 가게 해야 하는 일, 그 일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제자들을 보라. 예수를 기껏 믿었는데 십자가에 가서 돌아섰다. ‘목숨이라도 버리고 따라가겠습니다. 우린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다 버릴 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아니구나.’ 하고 다 돌아섰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길로 안 오면 가다가 돌아설 데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돌아서 버린다. 그 길로 오면 꼼짝 못한다. 갈 데가 없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것이다. 딱 거기로 가게 되어 있다. 목자 되신 여러분!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여러분도 길이 되고, 길을 열어주는 사람, 그것만 되어도 만족한다. 혹시 다른 문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부족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천성이 참 너그러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오늘 아침에 나도 우리 집사람과 한바탕 했다. 나는 지금 급해서 죽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내 속을 모르니까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한기가 들어서 이렇게 되면 큰일 나니까 응급으로 콜을 했는데 농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 소리를 꽥 질렀다. 아내는 깜짝 놀랐다. 평생 화를 안 내고 살겠는가?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사과를 하고 왔다. 왜냐하면 제물을 드리려거든 미리 사과해야 한다. 우리가 늘 엎치락뒤치락 할지라도 길은 확실히 가야 된다. 길은 확실해야 된다. 이 길이 흐트러져 버리면 아무리 내가 모범적인 생활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우리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훌륭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유교 안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다. 불교에도 가면 그렇다. 훌륭한 분들이 없는가? 얼마든지 있다.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설사 우리가 존경받는 사람들이 못 되더라도 길만은 확실히 잡고 가야 된다. 내가 그렇게 가야 길이 되는 것이지, 내가 안 가고 길만 안내할 수는 없다. 생명의 길은 저게 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한 것처럼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길을 말할 수 없다. 길을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는 길이다. 이성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이성으로 말하려다가 교리가 생긴 게 아닌가? 교리로는 길이 안 된다. 교리는 어떤 교리를 만들어도 길이 될 수 없다. 흩어지지 않으려고 예배시간마다 사도신경을 외우고 한다. 그렇다고 길이 되는가? 아무리 해도 그것은 안 된다. 내가 길이어야 된다. 내가 길이어야 길을 인도하지 내가 길이 아니면 도저히 길로 인도할 수가 없다. 나는 주님이 길이 되어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또 나를 보고 길이 되어서 오는 것이다. 맨 처음에 말한 개가 누구에게 배웠겠는가? 교리가 있겠는가? 자기 동생들이라고 끔찍이 사랑한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데 걸어가다 못 가니까 물고 간다. 자기들은 못 먹어도 먹을 양식을 끌고 온다. 그것이 이성으로 배워서 된 것이겠는가? 생명이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 계속해서 새끼를 다 데리고 살 수는 없을 것인데, 어떻게 하는가? 궁금한데 아마 1년씩 그렇게 하고 나면 그 후에는 자기도 결혼을 해야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가는 것 같다. 어미가 새끼를 키우는데 그런 식으로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서 되겠는가? 우리의 삶이 그냥 길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목표는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그것 때문에 만족한다. 다른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가 확실하게 길이 되는구나. 내가 이것을 평생 사는 동안에 말해야 되는구나. 이것을 전해야 되는구나. 이것만 확실해졌다. 오순절 운동이 좋은지 나쁜지 그것은 나는 모른다. 못해도 상관이 없고, 되도 상관이 없다. 한 사람을 보고 잘못한다고 할 수 없고, 한 사람을 보고 잘한다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은 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가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워치만 니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 보여진 것이 나를 길로 인도해준 것이었다. 그 세 사람을 설명할 때,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설명하지 못한다. 처음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 그것이다. 어떻게 이 사람이 이렇게 성경을 볼 수 있을까? 나도 성경을 평생 연구하신 분 밑에서 공부한다고 했는데,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다르구나. 아브라함이 아니면서 어떻게 아브라함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겠는가? 그래서 내가 딱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책을 본 사람이 많은 데도 별로 모르겠는 모양이다. 나는 거기서 길을 잡은 것 같다. 그 길을 잡아서 계속해서 그 길로 오다 보니까 결국에는 예수 앞에 부딪치게 되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거기에 부딪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가? 내가 온 길이 그 길로밖에 안 왔으니까 이 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부산에 가면 멍게를 먹게 되었는데, 멍게를 못 먹게 되었으니까 문제가 아닌가?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부산에 가면 멍게가 있다고 출발했는데, 부산에 왔는데 막상 멍게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께로 오면 반드시 십자가 앞에 부딪치게 된다. 거기서 부딪쳐서 해결이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다 헛일이다. 공자를 믿은 것이나 석가를 믿은 것이나 매 한가지다.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