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1883–1885)(Ainsi parlait Zarathustra) 해제
Champromis,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005-2006. (P.2190.)
샹프로미(Pierre Champromis, s.d.) 프랑스인으로 니체 탐구자. 독일 본에서(1952-1953)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에서(1954-) 가르쳤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니체에게서 미래란 마치 열린 세상에서 주사위가 공중에 던져진 채로 있는 것과 같이 다음에 무슨 숫자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운수와 같다고 여겼다. 우리는 미래를 발명(창발)하는 인간을 ‘아제인간’이라 부르고자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현실에서 우수한 인간들을 만났지만 그들이 진실을 듣기를 두려워하여 떠나고, 짜라투스트라는 진솔한 자기 제자들(이민들)을 만나러 간다. 상층의 인간이 말하는 여론의 허구를 떠나 진솔한 인민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라는 것이 아닐까.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에서 짜라투스트라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보이겠지만, 나은(여론주도층)의 이야기야 말로 망상과 착란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서 진질로 생에의 긍정의 소리를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 인민들이 우상과 허구를 물리치고 스스로 노력하여 “아제인간”이 될 것이다. (52NKD)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1883–1885)(Ainsi parlait Zarathustra)
니체의 생산작업 중에서 따로 한 작품이 중요하다. 작가의 이중 영광인 현자의 “담론들”(des discours,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저술은 [한편으로] 그의 목가(서정시)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 그의 상징적 발명의 풍부함에 의해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 책은 영원회귀(Retour Eternel)의 관념으로 기초를 놓았다. 우리는 우리의 현존을 무한히 여러 번 미래[아제] 속에서 다시 산다. 마치 우리가 우리 현존을 과거[어제] 속에서 무한히 여러 번 살았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온우주의 모든 사건들이 그것들 자체들과 동일하게 영원히 반복되는 하나의 주기로(en un cycle)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낯선 관념[생각]은 – 적어도 근대 사유에서는 낯선 – 마치 계시처럼 니체를 사로잡았다. 이런 생각은 니체에게 압도적으로 억누르기도 하고 동시에 호기심을 부추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게서 ‘억누름’이라는 그 생각은, 만일 그 인간이 아제적 인간의 상태로 고양된다면, 그에게 ‘부추김’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마치 그가 그의 주석들에서 말했듯이, 니체는 그 아제인간(le Surhomme)를 발명했다. 이 자는 상위의 종(une espèce supérieure[류적존재])을 표상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인간이 스스로 극복하도록 자극하는 이미지[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더군다나 이 책의 도식[계획]이 설명 된다: 이 책의 첫 두 부분에서 “아제(다음)인간을 교육시키고 난” 후에 만이, 짜라투스트라는 나머지 두 부분에서 영원회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예비적 담론(이야기)에서, 니체는 아제 인간으로 향하여 스스로 극복하기를 인간들에게 격려(설득)할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인간은 앞질러가야(추월해야)만 할 어떤 것[무엇]이다: 그의 존재(son être) 전부는 가련한 자기도취(pitoyable suffisance)일 뿐이다. 만일 이제 그가 자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지막[어제] 인간”의 형식으로, 즉 안락한 쾌적함 속에서 결정적으로 작은 존재로, 고정(고착)될 것이다.
첫째 부분의 서두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예고한다: 그는 인간들에게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사랑이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고 알린다. 그는 인간들에게 새로운 가치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가치들의 창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가치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치들은 개인들에 의해 창조되기 이전에 인민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창조자의 길은 어렵다[지난하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 창조자 속에서 사회의 탁자들에 대한 범죄적 파괴자만을 볼 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에 대해, 자기들 차례가 되어 자기들의 고유한 가치들을 [미래에] 창조하려고 하는, 자기 제자들에게 경고한다. 이런 창조를 위하여 그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지침[강령]을 부여한다: 자기 자신을 넘어섬(le surmontement)과 토지에 충실성.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넘어서야 한다면, 그것은 그 모델(표본)로서 지상의 저 위에 있는(supraterrestre) 성스러움을 향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죽었다’[고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뒤에 오는 세상(l’arrière-monde)의 주장자들”은 해독을 끼치는 자들[풍습 교란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체에 대해 경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는 인간의 실재성이며, 인간을 인도하는 “위대한 이성”이다. 이로부터 출발하여, 짜라투스트라는 비판적 작업을 진행하고 또한 가치들에 본능들에 인간적 연관들에 근거하는 변형의 작업을 진행한다. 가치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타주의(l’altruisme)인데, 이타주의는 타자 속으로 자기 자체의 탈주(une fuite)이며, 그때 그는 “주어져 있는 덕목”에 있는 타자들을 향하여 그 다음으로 자신의 풍부함[풍요로움]을 퍼뜨리기 위하여 자기자체로 있어야만 한다. 본능들을 고려하는 짜라투스트라는 본능들이 교육되어야하고 교육될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한 표본들[모범인물들]을 근거로 하여, 제시한다. 인간적 연관들에 관한 한에서, 짜라투스트라는 국가, 여성,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국가는 “새로운 우상”이며, “차거운 괴물들 중의 가장 차거운 괴물”이다. 여성은 전사의 휴식(le repos du guerrier)이지만, 그러나 여성과 더불어, 남자(l’homme [인간])는 회초리(le fouet, 질책)를 잃지 않도다! 여성들 그 위에 친구(l’ami)가 있다. .
둘째 부분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생명을 권능의 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로서 정의한다. 그 권능[생명]은 끊임없이 보다 높은 가치들을 창조하면서 더 큰 권능으로 고양되기를 원한다. 그는 생명의 적들을 고발한다. [1]사제들[성직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에서 자연[본성]을 죽인 자들이다. [2]평등의 설교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성이 정도에 따라 고양되는 것을 막는 자들이다. [3]전복의 심부름꾼(les suppôts, 주구(走狗)들)이 있다. 이들은 지칠줄 모르고 자신들의 거짓말을 부르짖는 자들이다. [4]마지막으로 허무주의가 있다. 오늘날의 세상을 경멸하는 짜라투스트라는 미래를 향하여 사유(思惟)상으로 날아오르지만, 동시에 인간들 가운데 남아있기를 원하며, 그들의 심장[심정]들 속에 끼어들기를 바란다(거기에는 그의 가정적 두 동물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데, 독수리와 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세 가지 노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지혜를 의심한다; 즉 그는 사랑 없이 고독 속에 묻혀있다. 그의 현존은 생명으로부터 잘려져 있으며, 자신의 젊은 열정(l‘enthousiasme, 열광)은 죽었다.
셋째 부분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자신 속에서 회귀의 사유를 상기시키려 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여러 지불유예[연기]와 긴 준비과정 이후에야 회귀를 실행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결국에는 이런 사유에 직면[대치]할 때, 그는 무너진다. 그러고 나서 그가 설명하기를 자신을 쓰러뜨린 것, 그것은 영원히 동일자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관념이며, 허무주의적 형식 하에서 회귀의 사고(la pensée du Retour)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물들이 대답하는 이 회귀는 또한 아제인간을 교육하는 짜라투스트라 그 자신의 회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한 짜라투스트라는 ‘[영겁]회귀로 그래(oui)’라고 말한다. 그 ‘그래’는 새로운 노래 속에 설명될 것이다. 생명과 화해했던 그는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환희가 영원성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그가 영혼의 침묵 속에서 들은 “한 밤중(자정)의 종(鍾, la cloche)”이 이렇게 말한다.
짜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의 관념에서 발견했던 구원(le salut), 그는 넷째 부분에서 허무주의에 위협받는 “나은(우월한) 인간들”에게 그것(구원)을 가져다주고자 시도할 것이다. 이 인간들의 탐색에서 출발했던 그는 일곱 가지 만남(상봉)을 겪는다. [1]첫째 만남은 은 두 왕과 만남이다. 두 왕은, 하나는 오른편에서 다른 하나는 왼편에서, 인민을 상징하는 무겁게 짐을 지고 있는 당나귀를 몰고 간다. [2]둘째 만남은 “정신적인 면에서 양심적인 자”와 만남이다. 그는 학자이며, 그가 아는 영역에 경계를 의지적으로 세우는 자이다. [3]셋째 만남은 “늙은 매혹적인 자(enchanteur 마법사)”와 만남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신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의 속죄자”가 된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의 경우이다. [4]넷째 만남은 “은퇴하고 있는” 최후의 교황(le dernier pape)과 만남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은 죽었기 때문이다: 이 신은 그의 늙어감 속에만 사랑의 창백한 신일 뿐, 즉 꺼져가야 하는 신일뿐이었다. [5]다섯째 만남은 “가장 추한 남자(l’homme le plus laid)”와 만남이다. 그는 역사의 거울 속에 그 자신이 보여지는 대로의 남자이다. [6]여섯째 만남은 “의지적 걸승(un mendiant)”과 만남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부처(le Boudha)를 재인식할 수 있다. [7]일곱째 만남은 “어둠(l’ombre, 그림자)”과의 만남이다. 이 어둠은 니체의 잠재적 허무주의를 표상한다. 최후의 만찬(une Cène)과정에서 이 우월한 인간들은 짜라투스트라의 강장제 영양제들을 맛보게 될 것이다. 더욱 즐겁게 된 그들은 삶에서 “그래(ouin)”를 말하지만, 당나귀의 “이-아(le I-A, 그래)”처럼 ‘모르면서 그래’를 말한다. 또한 짜라투스트라는 “취한 노래”에서 그들에게, 영원회귀에서 자신에게 ‘생명에 그래(긍정)’라고 가르쳤던 종소리를, 듣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 무서워서 떨던 나은 인간들은 달아났고, 그리고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진실한 제자들을 만나러 떠난다. (P. Champr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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