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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희극적인 것의 의미에 대하여 (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
앙리 베르그손, 김진성, 류지석 역, 파이돈, 2022, P. 270.
김진성(金振聲, 1947-1984) 베르그송 연구(문학과 지성사, 1985)
류지석(柳智錫, 1960-) <멜랑쥬의 역사적 분석에 관하여(2000, 릴대학, Pierre Trotignon)
이 번역은 독자가 읽기 쉽게, 즉 가독성 있게 번역하였고, 주들도 선배님보다 더 많이 단 것이다. 참 오랜 만에 김진성, 류지석이란 이름이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다. 나로서는 김진성 선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여, 이 번역서가 살갑고 기쁘다. 오래 전에 내가 웃음(RI, 1900)에 관한 논문을 쓸 때도, 대학원 시절에 선배님이 나의 주제로서 “무관심과 공감”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 했던 부분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망각 속으로 사라지려던 차에 또 다시 추억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베르그손의 웃음은 옮긴이가 잘 설명한대로 베르그손의 예술론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물론 베르그손은 그의 전 작품 속에서 곳곳에 예술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전 저술에서 사례 예시에는 예술이 빠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베르그손 자신이 만년에 1936[일흔일곱]에 인터뷰에서 좋은 문장을 하나 읽어 달라고 했을 때, 이 웃음의 3장에 나오는 문장을 읽었다고 하니, 베르그손의 예술에 대한 애정은 뿌리 깊다고 할 수 있다. 딱 하나 남아있는(‘유투브’에서 들을 수 있다: Bergson sur l'art : l'unique archive de sa voix - #CulturePrime) 기록이 베르그송의 음성이 늙었을 때 것이어서, 학창시절이나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에서 전해지던 전설 같은 이야기와 차이가 난다. 베르그손의 글씨와 목소리는 또박또박하고 분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가 에콜 노르말을 다닐 때, 수업 중에 교수는 주제를 주어서 베르그손과 조레스 사이에 라틴어로 논쟁을 하게 하였는데, 조레스의 유창하고 정열적인 논변과 베르그손의 부드럽고 논리적 대담은 동기들 사이에 화제로 남아있다고 한다. 말로서 표현만이 질서 정연한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의의 문장은 노벨 문학상을 탈 정도이고, 글씨는 어느 누구도 잘 읽을 수 있는 수려한 글씨체로 유명하다. 게다가 저술을 하면서 문장을 써 놓고서 수정한 곳이 몇 곳 안 될 정도로 거의 완전하게 써나갔다는 것은 아직도 원고의 일부가 그 대로 남아있다. 덧붙이면, 베르그송의 콜레주 드 프랑스 이전의 바칼로레아 예비반이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불러준 노트가 남아있어서 강의록을 낼 수 있었는데, 그 판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이 또박또박 받아쓰고 보관하고 있던 노트들이 서로 비교해보아도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있는 느낌이 날 정도로 별 차이가 없어서 강의록 판본(4권)을 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다시 예술에 관해서, 베르그손이 예술에 관한 저술을 구상했으나 나이 상으로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은 죽 일관성이 있게 전개 되었다. 의식, 기억, 생명, 그리고 도덕, 종교 인데 이것을 하나 보탠다면 지속의 상하에서 예술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뽑은 문장을 보자.
<예술의 대상(l’objet)은 무엇인가? 만일 실재가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직접 와 닿는다면, 만일 우리가 사물이나 우리 자신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예술은 무용한 것이 되리라고, 아니 차라리 우리 모두가 예술가가 되리라고 나는 진정 믿는다. 왜냐 하면 그럴 경우 우리의영혼은 끊임없이 자연과 일치하여 감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기억의 도움을 받아 모방할 수 없는 그림들을 공간 속에서 도려내고 시간 속에서 고정할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고대 조각만큼이나 아름다운 조상(彫像)의 단편이 우리 인체의 살아있는 대리석에 조작되어 있음을 한 눈에 포착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때로는 즐거운, 도다 흔히는 애조를 띤, 그러나 언제나 독창적인 음악처럼 흘러나오는,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주위에, 우리 내부에 실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명료하게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과 우리 사이에는, 아니 우리와 우리 본래의 의식 사이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데, 보통 사람에게는 두꺼운 장막이, 예술가나 시인에게는 거의 투명하게 엷은 장막이 사이에 놓여 있다. > [유투브의 화면에는 프랑스어 자막이 뜨는데 인용은 여기까지 이다. - 고딕체는 천야가 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의식, 기억, 생명, 그리고 도덕, 종교, (예술)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스스로 완성체로 나가고자 하는 노력과 도약에 관한 벩손의 열망 같은 것도 이 작품 속에 있다는 것이다. 뻣뻣하고 고착된 고정(부동) 사회에 대한 저항과 봉기 같은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웃음은 이런 거품처럼 생겨난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외부에서 피상적 봉기들을 알린다.”(원문 152, 번240, 천야가 약간 수정한 것이다) 저항이란 개념은 나중에 도덕론(MR 1장)에서 쓴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잡지에 연재할 때는 드레퓌스 사건이 전 프랑스를 흔들던 시절이다. 그는 유대계 프랑스인이지만 당대의 유명 철학자로서 에밀 졸라의 청원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질문을 받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벩송은 학문의 길을 갔다. 졸라는 망명 후 귀국하여 의문사 하였다. 그 후에도 극우의 준동은 심하여 나중에 벩송의 동기인 장 조레스는 극우파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잘 이야기 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이 책은 이런 사정은 말하지 않고서도 저항과 봉기의 뜻을 드러낸 것이라고 나는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도, 책장 뒷 갈피에 이런 문구를 제시한다. “웃음이란 경직된 것과 기성적인 것, 그리고 기계적인 것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자 징벌이다.”라고 옮긴이가 뽑아서 조합하여, 굵게 쓰여진, 글귀 때문이다.
김진성 선배님을 잊지 않고 이어가고자하는 류지석 선생의 노력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혹시 김진성 선배에 대한 소회에 관심이 있는 분은 아래 <참조2>를 찾아보기 바란다. (55MKH)
### 남기고 싶은 몇가지 문장들....
# 1993년판 옮긴이의 말[김진성] (249-254)에서
이 책에 전개된 웃음의 이론에 대한 소개는 정말 군소리가 될 듯하다. 명석한 분석, 우아한 문체의 이 흥미진진한 책을 한번 읽으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하자. 그것은 웃음이라는 조그만 인간 현상에 대한 베르그손 분석의 시점이 그의 온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이원론적 방법론과 원리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50)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웃음에 관한 저서가 아니다. 이 책, 특히 3부는 베르그송의 예술론에 해당한다. 과학적 분석과 함께 예술적 직관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그의 철학이 20세기 초반기 프랑스 문학과 예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깊고도 넓은 것이었다. (251)
그리고 학구에 바쁜 나날 속에서 미심쩍은 곳은 일일이 원문과 대조해 가며 꼼꼼하게 원고를 정리해 준 성대 대학원 철학과생 류지석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254, 마지막 문장)
개정판 옮긴이의 말[류지석](pp. 255-265)에서
1884년 2월 18일 저녁,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 페랑 대학의 대강의실에서 .. “우리는 무엇에 대해 웃는가? 왜 웃는가?”[Le Rire, De quoi rit-on? Pourquoi rit-on?]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었다. .. 한 지방신문에 실린 이 강연에 대한 기사를 보면, 사람들은 몰리에르와 세르반테스, 오지에와 라비슈의 작품들을 여행하면서 웃음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와 강연자의 명료한 논리에 매료되었고, 이날의 강연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웃음(1900), 유지석, 파이돈, 2022, p. 255)
웃음(1900)을 이끌어가는 핵심적 내용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바로 희극적인 것은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이라는 문장일 것이다. (258)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은 집단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의 요구에 유연하게 응해야 하는데, 방심이나 경직성 때문에 개인적이나 집단적 차원에서 제대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 이러한 결점에 대한 즉각적인 교정을 요구하는 징벌이 바로 웃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베르그손의 접근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에서 제시된 사회의 보존을 위하여 그 바탕에 금지와 의무를 깔고 일종의 사회적 습관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닫힌도덕의 이념을 떠오르게 한다. (261)
이 책에 나오는 예술과 예술가에 관한 내용은 또 다른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베르그손의 육성 녹음이 바로 웃음(1900)에 나오는 예술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1936년 6월에 한 방송국에서 노년의 철학자를 인터뷰하기 위하여 디스크형 녹음 장비를 가지고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시험용 녹음을 위하여 베르그손에게 짧은 글 하나를 읽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이 때 베르그손은 이 책 웃음(1900)의 3장에 나오는 예술의 대상에 관한 문단을 읽는다.(263) [(RI 115)]
# 참조1: 책의 차례
웃음 희극적인 것의 의미에 대하여 (Le Rire :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
목차
머리말
1장 희극적인 것 일반에 관해서
I. 희극적인 것 일반의 의미
II. 희극적인 것의 근원과 기능: 기계적 행위와 부주의
III. 형태에 있어서 희극적인 것
IV. 움직임과 몸짓에 있어서 희극적인 것
V. 희극적인 것의 확산력
2장 상황에 있어서의 희극적 요소와 말에 있어서의 희극적 요소
I. 상황과 행위에 있어서의 희극적 요소
1. 어린이의 놀이
1) 디아볼로 2) 꼭두각시 3) 눈덩이
2. 상황에 있어서의 희극적 방식
1) 반복 2) 역전 3) 계기들의 상호 간섭
II. 말에 있어서 희극적인 것 [Le comique de mot 78-100]
[1. Idée absurde et phrase consacrée]
[2. Propre et figuré ]
[3. Inversion, l'interférence, se transporter(transposition).]
3장 성격에 있어서 희극적인 것
I. 성격에 있어서 희극적인 것
II. 순수한 희극적 성격: 허영
III. 직업과 관련된 희극적 요소
IV. 부조리의 논리
V. 웃음과 공감: 희극적인 것의 도덕성과 사회성
23판의 부록: 희극의 정의와 이 책에서 사용된 방법에 관하여
참고문헌
1993년 판 옮긴이의 말 [김진성]
개정판 옮긴이의 말 [유지석]
(4:10, 55NKH) (4:20, 55N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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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2: 천야가 쓴, 김진성 선배님에 대한 약간의 소회가 들어있다.
{구마라습(344-413), 유마경(維摩經, Vimalakirti Sutra)} - (53TLD)
- https://cafe.daum.net/milletune/MHQ0/9
## 참조3: {인철D1859벩송1941MM} 긴 파일의 일부이다.
-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전 저작에 나온 중요인물들과 관련 연표}
- https://cafe.daum.net/milletune/REM3/12
* 벩송(Henri Louis Bergson, 1859-1941) 관련 연대표
베르그송 가계
Sonnenberg(Ber)할배 - Gabriel 맏 (1790-1844) [베르(곰)는 저항의 의미라 한다]
+ Tamerl 할매 . . . . - Jakob 둘째 베를린 정착
. . . . . . . . . . . . . . - Michael 세째 (1818-1898) -- Henri Bergson(1859-1941)
. . . . . . . . . . . . . . - Leopold 넷째
[맏이와 나이 차이(28살)가 너무 많이 나니깐?]
***,
Michael 부 : 미셀 벩송(Michel Bergson)[1818-1898]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 .
+ Kaete(Käte) 모 : 카트린 레빈선(Cathrine Levinson)[1830-1928] 영국의 던캐스트 출생
. . . - Julliette (1858-?) 자식이 없다.
. . . - Henri (1859-1941) -- 딸 Jeanne Bergson(1893-1967)
. . . . + Louise Neuburger (1871-1946)
. . . - Moïra (comtesse MacGregor [théosophe] - (영국)심령과학연구회, 자식이 없다.
. . . - Renée(Ray)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폴그스톤(Folkestone)에서 살았다.
. . . - Joseph 상인
. . . - Philip 배우, 문학비평가.
. . . - John(ou Jack) 은행가. 남아공화국, 두 아들이 있다.
** ** 벩송 생애
1859년 10월 18일, 베르그송은 빠리, 라마르틴느 거리(18, rue Lamartine)에서 폴란드 출신 유태인이며 작곡가인 아버지 미카엘 베르그송과 아일랜드계 유태인으로 영국인 어머니 캐서린 레빈슨 사이에 4남 3녀 중에 둘째이자 아들로서는 맏이로 태어났다. 앙리-루이 베르그송이다.
1863(4세) 이 가족은 스위스로 이주하다. 처음에는 쟁쟁(Gingin)에서 거주하다가 나중에는 제네바(Genève)로 갔다. 여기 살 때 주소는 Boulevard des Philosophes(철학자들의 거리)이다.
1866(7세) 다시 파리로 이사 오다. (154, Boulevard Magenta)
1868(9세) 보나빠르트 고등학교 (후에 꽁도르세(Condorcet, 1870년 10월 22일) -> 퐁탄(Fontane, 1874년 5월 1일) -> 꽁도르세(1883년 1월 27일) 고등학교로 개칭되기도 한다.) 7학년으로 입학하다. 그는 프랑스 국비 장학생이자, 유태계 슈프링어 기숙사에서 기숙사의 장학생이 된다. [이 당시는 아직 교육 제도가 완비되지 못하여 명칭이 고등학교(lycée)이지만 초등학교를 겸하는 것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의 대랍비인 베르트하이머(Joseph Wertheimer, 1833-1908)의 추천으로 이스라엘 기숙사의 장학생이 되었다. ]
기숙사 주인 아들(Maurice Springer, s.d.)와 친하게 지냈다.
1869(10) 앙리만 파리에 남기고, 가족 모두 영국의 런던(Shirland Road 21)으로 이주하였다. 파리에서 영국으로 보낸 편지 속에, 그가 얼마나 어머니의 영향을 입었는지 알 수 있다. [앙리는 일요일마다 편지를 쓰고 수요일마다 어머니의 답장을 받았다.]
1873 [아버지가 폴락(M. Paulhac, s.d.)에게 보낸 편지(1874년 3월)] 중등학교 2년차까지 매년 1등 했다고 자랑한다. [중등학교 내내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1875(16) 그는 전국 학력 경시대회 라틴어 작문 1위, 영어 1위, 우주 형상과 기하학 2위, 그리스어 작문 4위를 차지한다. [퐁딴(Fontanes) 고등학교 시절이다 - 1874-1877 퐁딴(Fontane) 고등학교 시절 교장, 르그랑(Ch. Legrand, s.d.)이다]
1876(17) 전국학력 경시대회 불어 작문 1위, 수학 1위, 역사 4위를 차지하다.
1877(18) 전국 학력 경시대회 수학 1위를 차지하다. 이때 제시된 문제에 대한 베르그송의 해법은 수학연보(Nouvelles annales mathématiques, II, XVII, 1878)에 실렸으며, 그의 스승 데보브(Adolphe Desboves, 1818-1888)는 자신의 책 빠스칼과 현대기하학자들에 대한 연구(Etude sur Pascal et les géomètres contemporiains, Delagraves, 1878)에 파스칼이 제시한 “세 개의 원”에 관한 베르그송의 해법도 한 방식이라고 소개한다. [10년째 리쎄(lycée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하기보다, 초등에서 고등까지 겸한 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의 정비는 1880-1881년 쥘 페리(Jules Francois Camille Ferry, 1832-1893)에 와서야 정비된다고 한다.]
1878(19) 파리 고등 사범학교(에꼴 노르말 쉬페리외르 Ecole normale supérieure, ENS)에 3등으로 입학하다. 이때 공교육에 10년 이상 복무할 것을 서약하다. [이 때 2등을 차지한 죠레스(Jeans Jaurès, 1859 Castre, Tarn-1914 Paris)는 프랑스 사회당(1919년 성립)의 선구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당」이 「프랑스 공산당」보다 먼저 성립하기도 하고, 또한 전통적인 쟈꼬방 좌파의 형태를 띠고 있다.]
1879 여름 방학 부모가 있는 영국에서 보내다.
1880(21) 11월 15일 파리 5구 구청에서 프랑스를 국적으로 선택한다고 선언하고 정식으로 프랑스 인민이 된다. 이것은 귀화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사람이 성인이 되었을 때 본인의 선택에 따라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당시의 법률에 따른 것이다.
1881(22) 철학교수 자격시험(Agrégation)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여름) 벩송은 칸(Albert Kahn, 1860-1940)을 개인적으로 가르쳤다. 그 후 죽을 때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알사스계 유태인. - 가족관계
9월 20일 생 브리윅(Saint Brieuc) 고등학교 교수로 발령났으나 거부하였다.
10월 5일 앙제(Angers) 고등학교 교수로 임명되다.
1882(23)
4월 4일 앙제(Anger) 여자 고등학교 문학 담당 교수를 겸임하다.
8월 3일 앙제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전문성(spécialité)」이란 제목의 강연을 하다.
1883(24) 셜리(James Sully, 1842–1923)[영국 심리학자]의 감각과 정신의 착각들(Les illusions des sens et de l'esprit, Bailliere et Cie, 1883, 원판----)을 번역하고, 라틴어 강의를 위하여 작성하여 사용했던 노트를 루크레티우스 초록(Extraits de Lucrèce, Delagrave, 1883)으로 출판하였다. 까르까손느(Carcassone) 고등학교에 지명되었으나 거부하였다.
9월 28일 프랑스 중부의 산악도시인 끌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고등학교에 교수로 가다. 이 1883학기에 엘레아학파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시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잡기 시작했다.
1884(25)
2월 14일 끌레르몽 페랑 대학교에서도 강의를 맡다(Charge de cours)
2월 18일 “웃음(Le rire)”에 대한 대중강연을 행하다.2월 18일 저녁,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 대학의 대강의실에서 “우리는 무엇에 대해 웃는가? 왜 웃는가?”[Le Rire, De quoi rit-on? Pourquoi rit-on?]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었다. 지방 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몰리에르와 세르반테스, 오지에와 라비슈의 작품을 다루면서 청중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1885(26)
8월 15일 끌레르 몽 페랑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정중함(La politesse)」란 제목의 강연.
1886(27)
9월 첫 논문 「최면 상태에서 무의식적 허위조작에 대하여(De la simulation inconsciente dans l'état d'hypnotisme)」을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에 발표하였다. [이 잡지는 인식론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잡지이다. 형이상학과 도덕 잡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는 제명 그대로 형이상학과 인간에 관한 잡지이다.]
1888(29)
9월 11일 파리에 있는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 고등학교와 앙리 4세(Henri IV) 고등학교 보충교수(professeur suppléant)로 지내다.
1889(30)
8월 24일 롤랑(Rollin) 중학교 [현재 쟉끄 드꾸르(Jacques Decour)고등학교] 교수로 부임하다.
12월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주 논문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DI) 이 논문은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에게 헌정하였다. 그리고 부논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론(Quid Aristoteles de loco senserit, 1889)을 발표하고, 주 논문(DI)은 알칸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1890(31)
10월 14일 앙리 4세 고등학교 교수로 임용되다 (8년간 근무했다).
1891-1892 학기 쟈리(Alfred Jarry, 1873-1907), 그의 학생이었다.
1892(33)
1월 7일 루이즈 뇌뷔르제(Louise Neuburger, 1873[1871?]-1946)(당시, 19세)와 결혼. [술레즈, 전기, 100] 재종이종인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가 나이[같은] 많은 화동(garçon d'honneur)이었다.
7월 30일 앙리 4세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정중함(La politesse)」이란 제목의 강연(1885년 강연을 수정 첨가)을 하다.
1893(34)
3월 16일 딸 쟌느(Jeanne Bergson 1893-)가 태어나다.
1894(35) 소르본느 대학에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후보명단에 고대철학사 전공인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와 칸트에 영향을 입은 프랑스 철학사가 세아이유(Gabriel Séailles 1852-1922)가 있었다. 브로샤르가 뽑혔다.]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1894–1906) 1894년 9월 ].
보르도 대학 전임강사로 지명되었으나 거부하였다.
1895(36)
7월 30일 전국 학력 경시대회 시상식에서 「양식과 고전 연구(Le bon sens et les études classique)」란 제목의 강연을 하다.
1896(37)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à l'esprit, 1896)(MM) 이 알깡(Alcan) 출판사에서 나오다.
1897(38)
11월 꼴레즈-드-프랑스(College de France)에서 와병중인 샤를 레벡(Jean Charles Lévêque, 1818-1900)을 대신하여 강의를 하다.
1898(39)
2월 24일 모교 고등 사범학교(ENS)에서 전임강사(maître de conférence)가 되다. 「플로티노스 강의」(1898-1899)를 강의 했고, 강의록이 남아있다.
소르본느 대학에 두 번째로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아이유(Gabriel Séailles 1852-1922), 칸트의 영향을 입은 예술에서 천재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génie dans l'art, 1883)(부트루 성향과 맞다), 철학사: 문제들과 학파들(Histoire de la philosophie. Les problèmes et les écoles, 1887(avec Paul Janet). 세아이유가 뽑혔다]
9월 9일 런던에서 아버지(Michael Bergson, 1818-1897) 사망하다.
웃음에 관한 글을 한 잡지(파리잡지(Revue de Paris))에 세 차례 발표하다.
1900(41)
5월 17일 샤를 레벡(Jean Charles Lévêque, 1818-1900) 후임으로 꼴레즈-드-프랑스에서 그리스-라틴 철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되다.
8월 3일 “국제 철학자 대회” 섹션: 철학일반과 형이상학, 이 분과는 9시에 열렸는데 벩송이 주제했다. 발표자들 중에 브링슈비끄, 르 르화가 있다.
8월 4일 파리에서 국제 철학자 대회(Congrès international de Philosophie)에서 「우리가 원인성의 법칙을 믿는 심리학적 기원들에 관한 노트(Note sur les origines psychologiques de notre croyance a la loi de causalite)」발표
이해 웃음(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RI)을 알깡(츨판사)에서 출판하다.
1901(42)
3월 26일 심리학 일반 연구소(Institut général psychologique)에서 「꿈(Le rêve, 1901)」을 강연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1900년에 나왔다]
5월 2일 “프랑스철학회”(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에서 「심신 평행론과 실증형이상학(Le parallélisme psycho-physique et la métaphysique positive, 1901)」의 발표와 토론(Me 463-502)이 있었고, 중단되었던 토론을 이어서 1901년 5월 23일에 「Discussion à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Me 502-507)으로 수록해 놓았다.
12월 14일 정치-도덕과학 학술원(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회원으로 선출되다.
1902(43)
1월 논문 「지적 노력(L'effort intellectuel, 1902)」을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에 발표하였다.
7월 22일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의 5등 훈장(Chevalier)을 받았다.
7월 31일 볼테르 고등학교 표창식에서 「지성에 대하여(De l'intelligence)」를 강연하다.
12월 14일 미국 철학자 제임스(W. James, 1842-1910)의 편지를 받다?
1903(44)
1월 긴 논문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1903)」을 형이상학과 도덕 잡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RMM)에 발표하다.
1903-1904 기억이론의 역사(Histoire des théories de la mémoire)(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3-1904) 2018년 출간, P. 377.
1904(45)
2월 20일과 27일 정치-도덕과학 학술원에서 「라베송에 관한 간략한 소개(Notice sur Ravaisson, 1904)」를 낭독하였다.
9월 제네바의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심리, 생리학적 오류추리(paralogisme psycho physiologique, 1904)」를 발표하였다.
11월 19일 가브리엘 따르드(Gabriel Tarde, 1843-1904)의 후임으로 꼴레즈-드-프랑스의 근대 철학 담당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04-1905 자유문제의 진화 강의록(L'évolution du problème de la liber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4-1905) (2017년 출간)
1905(46) 5월 28일 빠리에서 윌리엄 제임스와 처음으로 만나다.
1906 「무의 관념(L'idée de néant, 1906)」, Revue philosophique(LXII, 1906, pp. 449-466).
1907(48) 레지옹 되뇌르 4등 훈장(Officier)을 받다.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 1907)(EC) 알깡 출판사에서 출판하다.
1908(49)
1월, 보렐(Émile Borel, 1871-1956)에 논문 「기하학적 지성의 진화(L'évolution de l'intelligence géométrique, 1907)」에 대한 보고서(RMM)(Me 753-758). (창조적 진화에 대해 보렐의 오해를 지적한 것이다)
12월 논문 「현재의 추억과 거짓 재인식(Le souvenir du présent et la fausse reconnaissance, 1908)」을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에 발표하였다.
1910-1911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 「인격의 이론(Théorie de la personne)」. 유명한 이중인격과 4중인격의 예를 다룬다.
1911(52)
4월 10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철학자대회(Congrès de philosophie)에서 「철학적 직관(l'intuition philosophique, 1911)」(PM)을 발표하였다.
이해에는 영국을 여행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변화의 지각(La perception du changement, 1911)」(PM) 그리고 버밍엄 대학에서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 1911)」(ES)을 강연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과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 제임스의 실용주의의 프랑스어 판 번역을 위하여, 서문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관하여(Sur le pragmatisme de William James, 1911)」(PM)를 쓰다.
1912(53) 신앙과 생활(Foi et vie)이라는 학회에서 논문 「영혼과 신체(L'âme et le corps, 1912)」를 발표 하였다.
1913(54) 미국을 방문하였다.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였다.
5월 28일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런던에 들러 기꺼이 회장을 수락한 심리탐구학회(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에서 「생명있는 것들의 환영(Fantômes des vivants, 1913)」(ES)을 강연하다.
꼴레즈-드-프랑스에서 의학자 베르나르(C. Bernard, 1813-1878)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La philosophie de Claude Bernard, 1913)」을 발표하다.
1914(55)
1월 10일 도덕정치과학 학술원 원장(임기 1년)에 취임하다.
2월 12일 프랑스학술원(Académie française) 회원으로 선출되다. [라 고르스(Pierre de La Gorce, 1846-1934) 까쀠(Alfred Capus, 1857-1922), 벩송 3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1918년에 정식으로 취임하다)
4월 21일, 그리고 5월 22일 다시 영국을 방문하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좌에서 「인격의 문제(The problem of personality)」를 강연하였다.
6월 1일 웃음(1900)을 제외하고 그의 저작은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들어간다. [이 목록은 1968년 인종편견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더 이상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 1968년까지 그의 저작들은 금서 목록에 죽 올라있었다.] / [쟈끄 마리땅이 쓴 벩송의 철학: 비판적 연구(La Philosophie bergsonienne: études critiques 1913)의 심한 비판으로 근거를 삼았을 것이다. / 이에 대해 뻬기가 강하게 반대하였다. 뻬기는 벩송과 벩송철학에 관한 노트(Note sur M. Bergson et la philosophie bergsonienne, 1914)를 썼다. (48RMJ)]
6월 16일 꼴레즈 드 프랑스 강의를 에뒤아르 르 화(Eduard Le Roy, 1870-1954)가 대신하게 된다.
[7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8월 2일 세계 충돌[1차대전]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Me 1101)
11월 4일 프랑스 학술원 회원 자격으로 이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해 「낡아 가는 힘과 낡지 않는 힘(La force qui s'use et celle qui ne s'use pas, 1914)」을 발표하였고 공화국 군대 회보(Bulletin des armées de la République)(42호, 1914)에 실려있다.
12월 12일 도덕 정치과학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공식 회기 연설을 하다.
1915(56)
5월 15일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française)」을 파리잡지(Revue de Paris)에 발표. (데카르트부터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개요이다.)
1916(57)
4-5월 첫째 임무: 프랑스에 대한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려는 임무를 띠고 여러 학술원 회원들과 함께 사절단으로 스페인에 파견된다. 그곳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하다.
1917(58)
2-5월 둘째 임무: 외무부 장관인 브리앙(Aristide Briand, 1862-1932)의 추천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위해 당시의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을 설득하러 미국에 파견되다.
1918(59)
1월 24일 프랑스 학술원 회원에 정식으로 취임하다. 그는 관례대로 그의 좌석의 전임자 올리비에(Emile Ollivier, 1825-1913) 장군에 대한 평가와 찬사의 연설을 하다. 르네 두믹(René Doumic, 1860-1937)이 답사를 하다.
6-9월 미국으로 두 번째 파견을 가다.
1919(60)
3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3등급(Commendeur)을 받다.
11월 28일 공교육 고등 협의회(Conseil supérieur de l'Istruction publique)에 위원으로 선임되다.
정신적 에너지(L'énergie spirituelle, 1919)(ES)을 출판하다.
1920(61)
9월 24일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회 개회사로서 「가능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Le possible et le réel, 1920)」을 발표하다. [이 강연에 예고된 제목은 「예견과 새로움(prévsion et la nouveauté, 1920)」이었다] - 이 논문은 1930년 11월 스웨덴에서 노벨상 수상 기념으로 발표할 때 개작한다.
1921(62)
1921년 7월 9일 지이유앙(René Gillouin, 1881-1971)의 새로운 근대프랑스 역사철학(Une nouvelle philosophie de l'histoire moderne et française, 1921)에 대한 보고서 (Me 1333-1336).
12월 19일 꼴레즈 드 프랑스 교수직에서 퇴임하다. (나중에 후임자는 르 르와이다)
1922(63)
1월 4일 국제연합에서 유네스코(UNESCO)에 해당하는 기구인 국제연맹의 국제 지식 협력 위원회(CICI, Commision internationale de coopération intellectuelle)의 회원이 되었고,
4월 6일 프랑스 철학회에서 아인슈타인과 토론을 벌이고, 그 결과로 지속과 동시성(Durée et Simultanéité, 1922)(DS)을 출판하다.
8월 1-6일 제네바 첫 회의에서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다.
정치과학 학술원에서 「고전 연구와 교육개혁(Les études classiques et la réforme de l'enseignement)」을 제출하다.
1923(64)
8월 9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2등급(Grand officier)을 수여 받다.
8월 18일 레지옹 도뇌르의 심사 위원회(Conseil de l'Ordre) 위원이 되다.
1924 벩송이 제임스에 대한 번역 책에 서문을 쓰다. 「서문(Préface)」(Préface a "W. James, Extraits de sa correspondance", shoisis et traduits, par Fl. Delattre et M. Le Breton) (Me 1470-1474)
1925(66)
9월 9일 건강상의 이유로 국제 지식 협력 위원회(CICI)에서 물러나다.
1926(예순일곱)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1934)에 실릴 두 개의 철학에 관한 입문을 썼다(Introduction I, II). 우리가 “방법후설”이라 부를 이 두 서문에서 철학에서 올바른 문제제기, 철학의 정확성을 강조한다.
1928(69)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다.
1930(71) 「가능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Le possible et le réel, 1930)」을 발표하다. [이 강연은 옥스퍼드 대학 강연 「예견과 새로움(prévsion et la nouveauté, 1920)」을 수정 개작한 것으로 1930년 11월 스웨덴에서 노벨상 수상 기념으로 발표하였다.]
3월 29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1등급(Grand croix)을 수여 받다.
1932(73)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MR)을 출판하다.
- 스피노자 탄생 300주년기념 학술대회에 프랑스 철학회 회장 자격으로 편지 보내다.
1933(74) 10월 9일 레지옹 도뇌르의 심사 위원회 위원직을 사직하다.
1934(75) 사유와 운동자(La pensée et le mouvant, 1934)(PM)를 출판하다.
「프랑스 철학과 프랑스 정신」에 대하여 라디오 방송을 하다.
1936(77) 8월 「나의 임무들(Mes missions)」.
___ 벩송은 스위스 레만 호수 북쪽 변에 위치한 보이 보(Vaud)의 마을의 엘의 성(chateau d l'Aile)에서 쟝 드 라 아르쁘(Jean de La Harpe, 1892-1949)와 대담에서 자기 추억들을 상기했었다.
1937(일흔여덟) 벩송의 유언장(le testament de Bergson du 8 février 1937) (사후 발표): 카톨릭에서 유대교의 완전한 완성을 본다. 반셈족의 물결에서 나는 개종할 수 없을 것이다. 추기경-주교의 허락이 가능하지 않다면, 나의 도덕론이 카톨릭에 동의함을 감추지 말고 랍비에게 부탁한다. [독일 점령하에서, 벩송부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종 후에 지역 신부가 도착했다고 한다. - 개종의 의사는 없고 임종 의례를 부탁한 것으로 본다.]
7월 31일-8월 6일, 아홉째 국제학술 대회: 데까르트 학술회의(Congrès Descartes)에 발표
1940(81)
7월 투르 시와 인접한 작은 도시 생 시르 쉬르 르와르(Saint-Cyr-sur-Loire)에서 여름을 지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정령하자, 피점령지인 보르도 부근의 랑드(Landes)지역의 도시 닥스(Dax)로 피난 갔다가,
11월 빠리로, 보세주르 대로(Bd. Beauséjour) 47번지 아파트(1929년 이래로 거주)로 오다.
1941(82) 1월 3일 빠리에서, 전시의 석탄 배급의 부족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다가 폐렴(congéstion pulmonaire, 폐충혈)으로 사망하다. 전시 중에 랍비가 없어서 카톨릭 신부를 불렀으나 신부가 도착하기 전에 벩송이 운명했다고 벩송의 부인이 증언했다. 즉 벩송은 카톨릭 교도인 적이 없다.
그의 임종 전 마지막 말은 “여러분, 5시입니다. 강의가 끝났습니다.”(Ses derniers mots sont célèbres : » Messieurs, il est cinq heures, le cours est terminé «)이다.
1월 6일 전쟁 중이며, 독일의 파리 점령하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학술원 장례로 치르지 못하고, 조촐한 가족장으로 파리 교외 가르슈(Garches)묘지에 묻히다. - 이 보고는 프랑스아카데미 간사였던 시인 뽈 발레리가 전했다.
*
1946 뇌뷔르제(Louise Neuburger, 1871-1946) 사망
1959 전집(Oeuvres, 1959)(1959 초판, 1970 수정판) 앙드레 로비네 편집.
1967년 프랑스 만신전(Pantheon)의 표석 명단에 올랐다.
1967 이 해 딸(Jeanne Bergson, 1893-1967)은 벩송의 소장품들을 기증했다.
1972 잡문집(1972) 벩송. 앙드레 로비네 편집
1990 벩송 강의록 1(Cours de Bergson I),
1992 벩송 강의록 2(Cours de Bergson II),
1995 벩송 강의록 3(Cours de Bergson III)
2000 벩송 강의록 4(Cours de Bergson IV)
2016 시간 관념의 역사(2016),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1902-1903)
2017 자유 문제의 역사(2017),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1904-1905)
2018 기억이론의 역사(2018),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1903-1904)
2019 시간 관념(L’idée de temps)(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1-1902), 2019, 25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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