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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10. 바틀비 또는 상투어/공식(Bartleby, ou la formule, 1989)
출전: Preface a Melville, Bartleby, Ed. Flammarion, 1989.
Gilles Deleuze, dans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 8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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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논문은 두 편인데 한편으로 연결된 것 같다. 하나는 바틀비에 관한 것으로(89-99) 소수자 문학 작품으로 카프카의 작품만큼이 중요한 작품이며 카프카보다 일찍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론이며, 멜빌론으로 작가 멜빌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인데 이 작품을 통해 당대의 미국 풍토와 작가 의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작가 의식에서, 프랑스에서 맑스가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듯이,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전에 사회주의의 실현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글을 쓰다보니까, 멜빌의 작품은 정신분석학의 가부장적 혈통주의(filiation)보다 인민들의 동지애를 강조하는 동맹(alliance)을 표현하여 분열분석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멜빌이 남북전쟁 이전에 소설을 쓰고, 전쟁이후에 미연방에서 공무원이 되는 시기에는 시들을 썼다. 들뢰즈는 멜빌이 공산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멜빌이 공동체의 동맹, 동지애, 인류애 등의 실현을 소설로 표현하려 했다고 본다.
그런데 왜 들뢰즈는 프랑스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과 글이 있었을 것인데 영미작가들 중에 몇몇 작가들에서 이런 관점을 강조하면서 영미문학에 대해 칭찬했을까?
프랑스의 혁명과 변역의 과정에서 인물들을 아래 참조에 우선 정리해 보았다. 이들이 문학가는 아니지만 공동체의 동지애의 발상을 영미문학가들 보다 먼저 했던 것이 아닐까? 또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가졌던 혁명가들이 소설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54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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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선생님은 철학은 자료의 총체를 다룬다고 한다. 내가 이 말을 수업에서 했을 때, 학생들은 그걸 어떻게 다해요? 너무 바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자료들의 전부를 다룬다는 것은 인간들 삶의 모두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극한에서 분류하면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처럼 선분의 4등분과 선의 이데아들 보태어 다섯으로, 그리고 0과 9사이에 10등분으로 또는 0을 제외한 1에서 9까지 아홉 등분으로 다룰 수 있다. 이런 공간화된 방식의 등분은 일반적으로 위계 질서상으로 상위로 올라가는 의미로 파악한다. 위상의 방식에서는 벤다이아그램 식으로 크게 둘로 구분하면, 네 가지 경우(사건)가 생기고, 셋으로 구분하면 8경우가 생기며, 넷으로 구분하면 16경우가 생기는데, 주역에서는 이럴 경우에 16경우를 단위로서 또는 개념으로서 설명하기 어려워, 셋으로 8 경우(사건) 겹쳐서 64괘를 만든다. 삶의 터전에 대한 설명방식은 여럿이지만, 인간의 지성 또는 직관은 하나, 둘, 셋으로 가거나 하나 둘 넷으로 펼쳐지고, 여기에 좀 더 깊이 있는 듯하지만, 법칙(규칙)을 넣어서 10진법과 12진법으로 나누어 해명 또는 해석하려 든다. 하나를 전체로 보아, 둘로 구분은 경험적으로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셋의 구분에는 경험이지만,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하늘의 운행에서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둘과 셋의 등분도 인간이 살기 위해 자연의 변화에 대한 해명을 위한 방편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늘의 12진법이 왜 지상의 10진법과 함께 어우러지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고대 그리스 수학사의 난문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원형의 말(두, 斗)의 용량이 정방형의 되(말의 1/10)의 용량의 열배가 될까?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인간, 천인지(天人地)의 문제가 있고, 하늘과 땅은 유구한 것 같은데 인간의 각각은 소진한다는 수수께끼가 들어 있을 것이다.
철학이 총체를 다룬다고 하면서도, 총체를 다루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구분 하고, 그 구분된 것을 분류 또는 체계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0(영)과 무한이라는 것은 나중의 것일 것이고, 양쪽으로 갈라놓으면 두 극한이 있을 것이다. 두 극한의 플라톤의 경우에 페라스와 아페이론이라 할 것이다. 이 둘의 성질 또는 고유성을 파악하면서 인간의 삶에 비추어 전자에는 완전함을 후자에는 불완전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면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개별성들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개별성을 어떤 성질로서 묶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개별성에 대해 각각의 고유함을 정의하는 경우에 일반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할 것이다.
두 극한 사이에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개인적 삶의 양식이라 보면, 일반성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삶을 일반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삶의 양태에서 두 극한을 구별하는 것은 쉽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무와 무한 사이의 경우는 철학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적으로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사고는 이런 무답(無答)에 대한 해명으로 여기지만, 조금만 숙고해 보면, 무(無)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생명이 일정하게 유한한데 무한을 안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있는 것 또는 있었던 것, 또는 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있을 것에 대해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있는 것, 즉 현존하는 것에 대한 구분과 분류가 학문의 길이며, 인류가 반성하고 성찰하고 숙고하여 자료들 전체를 관통하는 규칙(코드) 또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에서 극한의 두 구분에서 출발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불러보자. 형이상학의 아리스토텔레스 개념보다, 현존들과 사건들을 사유하는 근원 또는 기원으로서 형이상학을 받아들이자. 현존의 나열과 배치에서 코드가 먼저 있을 것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이 나름으로 운행 질서와 층위 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그 각각이 자체로서 코드가 있다고 여긴다. 우선 하늘의 운행은 일정한 법칙, 정확하게 원은 아니지만 360일이라는 코드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면 땅에서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것으로 흐르는 것으로 보아, 물체들이 자기 위치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하늘의 운행은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지만, 땅의 변화에는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다는 점에서 인간 또는 생명체가 땅과의 불가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체라는 것이 특히 식물의 변화는 땅이라기보다 하늘의 운행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봄에 잎이 나고 여름에 열매를 맺고 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겨울에 앙상한 가지에서 숨죽이며 봄을 기다리는 변화에서, 땅에 소속된 많은 것들의 변화가 또는 사건이 하늘에 영향 없이 이루어지 않는다는 것을 반성과 성찰을 하게 될 것이다.
땅에서 변화와 사건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관계 또는 연관에서 둘 사이의 차이 또는 양극이라는 경험적 관찰과 사고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사고의 발생은 인류사에서 철기시대라고들 하지만 천문과 시각의 결정은 철기시대 훨씬 이전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의 배치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천문과 시각의 규정이 일반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여러 경험적 방식들을 거쳐서 360도와 24시각이라는 결정체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결정체를 만드는 것은 인류의 사유가 어느 정도 정리와 규칙을 이해했을 경우이다. 하늘아래 땅위에 사는 인간이 땅의 변화보다 하늘의 불변하는 듯 한 항상성으로 되돌아 올 수는 없을까? 규칙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상상으로 항상성과 불변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의 별들이 천구가 되돌아오더라도 그에 붙어있는 별들이 항상성, 불변성, 동일성, 고정성, 게다가 불멸성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런 성질과 사건들의 개념을 나열할 수 있는 것은 지성이 스스로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을 경우인데, 이런 시대에 전승과 신화의 이야기를 넘어서 지성의 체계와 일반 법칙의 추구하는 철기시대에 와서 일 것이다. 그 시대를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탈레스로 꼽고 있고, 아마도 동양에서 주역을 정리하고 그 주석(계사)를 달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공자시대에서 일 것이다.
천문과 지리라는 경험적 구분을 넘어서 사고 결정체로 만들면서 철학은 형이상학이라는 분야를 만들 것이다. 이 형이상학의 중요한 구분이 경계있는 것(페라스)와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아페이론)이라고 보면 플라톤은 이 둘의 관계를 다루려고 노력했다는 박홍규의 설명이 타당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페이론을 물질이라 규정하고 물질 속에 페라스를 넣는 사고를 하면서 쉽게 사물을 분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의 2천여년이 지나 르네상스 이래로 아페이론도 독자적으로 고유성이 있고(운동성, 자발성), 우선은 독자성의 고유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 구분된 개별성의 기능에 관심에 머물렀다면, 19세기 초반에는 개별성의 능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문제를 자연의 고유함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400여년 그리고 깊이 있게 성찰한 것은 200년이 채 안 된다. 그 자연이 인간의 본래적 성질이라고 여긴 것이 흄과 루소에게서 라고 하더라도 270여년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인간본성(the human nature)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계몽기시대에 흄은 무신론자로 찍혀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본성, 즉 자연성은 무엇인가? 자연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여전히 우주가 자연이라고 하는 쪽이 있고 지구라는 삶의 터전에서 자연이라고도 한다. 우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자연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약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여기는 사고가 여전하다. (55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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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의 두 차원 제도 속에서 코드와 본성상으로 탈코드가 있을 수 있다.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이중화현상에 매우 흥미로워한다. 그 흥미로운 점을 미국 문학에서 특히 멜빌에게서 보았다는 것이다. 멜빌이 만든 작품의 주인공들을 현상에서 이중화의 서술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로웠을 것이다. 물론 읽고 있는 나도, 그가 작품에서 이렇게 이중화와 그 이중화 사이에 또 하나를 설정하면서 자연성(본성)의 위상들을 주인공들을 통해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주름(1988)을 읽고 난 다음이라, 여기서(이 논문 1989) 이런 방향의 분류의 지도를 그리는 들뢰즈를 이해할 것 같고, 멜빌에 한정시키지 않고, 유사한 작가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주름의 형이상학 측면의 토대 위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55LKH)
들뢰즈는 이 둘의 결정체를 영미 철학에서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고, 미국이라 이민자의 나라에서는 두 극의 결정체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있다고 본다. 정치에서 아버지(부권)를 또는 가부장제의 정립과 공고화가 필요했을 것이지만, 대부분의 이민자들의 고유성은 하나의 권력 또는 절대자에 귀착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미국의 소설가들과 시인들이, 마치 노마드들처럼, 미국의 다양한 현상들을 협의와 계약적으로 만들어 가는 공동체(공산사회)의 성립에 어떤 기대를 했을 것이다. 작가들은 자신들의 삶을 부분을 공동체와 연관 속에서 작품으로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작가들이 미시시피강을 따라 여행한 것에 대해 서술이라든지, 제도 속에 사회가 아닌 바다로 나간다든지, 그리고 이들 다음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는 미국에서 거꾸로 유럽 본토에서 떠돌이가 되는 풍토를 그린다. 그 되돌아온 떠돌이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 역시 노마드일 수밖에 없는 삶. 아마도 이들은 아버지와 국가권력이 절대적으로 하나의 기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체험하고 느꼈을 것이다. 들뢰즈가 이런 이야기를 양면적으로 끌어내는 긴 논문은 철학이 서술할 수 없었던 부분을 문학이 해낸 것으로 보았을 것 같다.
왜 문학인가라는 문제거리를 나는 죽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의 민주정이 전개와 발달 시기가 그리스 비극의 시대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플라톤이 연극의 형식을 빌어서 철학적 대화편을 썼다. 19세기 후반에 소설과 단편들은 철학적 체계(네오스콜라철학)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차히들(세분화)들이 무수히 분출하는 시기이다. 들뢰즈가 용출선(탈주선)이라 말하는 것을 19세기말의 파라노이아 현상에 대해 스키조의 발현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19세기 초 영국의 빅토리아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무너지면서, 마찬가지로 네오스콜라철학이 무너지면서, 부권과 성직권에 허물어진 폐허에 등장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라고 보여 지지만, 그 정신분석학이 파라노이아를 대변하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종교에서 반동, 애국주의, 그리고 기계기술의 대량생산의 기초에 있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목사와 사제를 대신하려는 과학자와 정신분석가. 이런 방식의 등장은 이미 있어왔다. 통치체제를 넘어서 훈육체제를 받들고 있었던 것은 수학과 논리에 기댄 과학자들이었다. 이 과학자들은 새로운 권의 통치로서 국가에 거의 무한히 그리고 열렬하게 봉사하려고 포섭되고 있는 중이었다. 20세기 초에는 국가에 포획되거나 투항하는 것을 애국 또는 종교인으로서 자랑으로 여길 정도에 이르렀다. 하이데거가 그 부류들 중의 하나였으리라. (55LKJ)
**내용 중에서 ***
# CC10. 바틀비 또는 공식(Bartleby, ou la formule, 1989) 89-117.
바틀비는 작가의 은유도 아니고, 무엇인가의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강력하게 웃음거리의 원문이며, 웃음거리(le comique)는 항상 글자 그대로이다. 이것은 클라이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카프가, 베케트의 단편소설과 같다. 이 저자들과 더불어 웃음거리는 지하[심층]의 특권적인 계통을 형성한다. (89)
상투어(la formule), 즉 난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I would prefer not to, Je prefererais ne pas). (89)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일 없네^”, “관 둘레^”, 관심없다는 표현으로 “몰~랐다”며 관여하지 않을 의사 표현에 가깝지 않을까?]
언어학자들은 사람들이 “비문법성(agrammaticalité)”이라는 것을 철저히 분석해 왔다. (89)
미국 시인 커밍스(Edward Estlin Cummings, 1894-1962) ... [벨기에 언어학자] 뤼베(Nicolas Ruwet, 1933-2001) ... [영국 수학자]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90) [비문법적 상투어를 작가들..]
바틀비 상투어의 정상적인(normale) [문법적] 구축에도 불구하고, 그 상투어는 마치 별종(une anomalie)처럼 반향하다. (90) [별종은 비정상(anormal)과 다르다. 별종은 용출선을 그리는 자이며, 게다가 정상인이 삶과 다른 새로운 삶을 사는 방식을 창안한다. 특히 별종이란 예술가, 자연철학자, 산중선승, 강호고수, 상산사호(商山四晧)등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 이 상투어에는 여러 변이들(des variantes)이 있다. .. “나는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는 이 상투어는 단 한번(une fois pour toutes) 그리고 매번(dans toutes les fois) 존속한다. (90) [들뢰즈가 자주 쓰는 이 두 용어: 특이성은 생성 속에서 단 한번 일어난다. 그럼에도 매번 반복하지만 동일반복이 아니라 이질반복이다. 그것이 영혼이다.]
상투어는 중요한 10개의 출현(dix occurrences, 경우들)이 있다. .. 첫째 출현, 소송대리인이 두 서기가 쓴 사본을 대조하고 다시 읽어보라고 말할 때이다. 둘째, 소송대리인 자신이 직접 작성한 사본을 다시 읽도록 그에게 말할 때이다. 셋째, 소송대리인이 개인적으로 그와 머리를 맞대고 다시 읽자고 권할 때. 넷째, 소송대리인이 그를 심부름 보내고자 원할 때. 다섯째, 소송대리인이 그에게 옆방에 가라고 요구할 때. 여섯째, 소송대리인 일요일 아침 자기 연구실에 들어가자 원했고, 거기서 바틀비가 자고 있을 때. 일곱째, 소송대리인이 몇가지 질문을 제기하여 만족될 때. 여덟째, 바틀비가 복사하기를 끝내고 모든 복사를 거부했을 때, 그가 그를 쫓아냈을 때. 아홉째 소송대리인이 그를 쫓아내려고 둘째 시도를 할 때. 열째,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완전히 쫓겨나 층계의 난간에 앉아 있을 때 그리고 미칠 지경인 소송대리인이 바틀비에게 기대치 않은 직업들을 제안할 때(잡화상 계산, 술집의 점원, 현금교환일, 회사의 직원…). 상투어는 싹이 돋고 번식한다. (91)
각 출현( 경우)에서 사람들은 광기(folie)가 증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별나게” 바틀비의 광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주위의 광기, 특히 소송대리인의 광기이다. 여러 가지 낯선 제안들 속에, 그리고 보다 낯선 품행들 속에 던져져 있는[빨려 들어가는] 소송대리인의 광기이다. (91) - [이 문단은 들뢰즈가 “바틀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한 것인데, 정상으로 보이는 소소대리인이 은연중에 자기의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풍토 또는 영토에 대한 비판이다. 들뢰즈는 바틀비가 별종으로서 그 사회의 의사이라는 것을 마지막 문장에서 보여줄 것이다. 대선정국에서, 예전에 ‘콩사탕이 싫어요’ 이래로, 이번에 정용진의 멸콩(멸치와 콩자반)에 이어 윤석열의 멸치와 콩의 출현에 최재형, 나경원, 김연주 등이 보탠다.대선정국이 늙은 광기를 불러온다. 이분법의 사고가 광기의 역사라고. (55LLA)]
의심할 바 없이 상투어는 피해를 입히고 황폐화하게 하고, 그 상투어 뒤에는 아무 것도 존속하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선 상투어의 전염병적 성격을 주목한다. (91)
사람들은 “나는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상투어가 긍정도 아니었고 부정도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했다. “바틀비는 거부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전진하고 그 전진된 것 속에서 물러선다. 그는 말투의 가벼운 후퇴 속에서 약간 자신을 드러낸다.”바틀비는 더욱 받아들이지 않고, 복사를 계속하기를 선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그는 단지 그것의 불가능성만을 제시한다. .. 간단히 상투어는 분간불가능성의 지대를, 비결정성의 지대를 파고든다. (92) [아페이론 속에도 깊이와 세분화가 있으며, 다양체이다. - 멜빌(1819-1891)의 바틀비(1853), 카프카(Kafka, 1883-1924)의 「단식광대(1922)」, 한강(韓江, 1970-)의 채식주의자(2007)- 관료사회의 탈피, 문명화의 방하(放下), 성관심의 이탈 등이다. 이는 원효가 만담하는 광대의 박을 보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에서 따온 무애(無碍)라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페이론의 심층은 노래하고 춤추는 노마드이다. 니체도 디오니소스 찬가(1889)에서 이런 경지를 노래했을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 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선호하지 않으리라. 이 말은 무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무의 증가이다. .. 블랑쇼가 말하듯이 참을성 있는 순수한 수동성이다. (92) [아페이론은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이라고 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우선 상투어가 마치 외국어의 나쁜 번역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투어를 보다 잘 이해하면, 그것의 화려함이 이런 가설을 반박한다. (93)
커밍즈의 비문법성에도 있고, ... 이런 종류의 절차들은 프랑스에서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 장-삐에르 브리세(Jean-Pierre Brisset, 1837-1919), 미국에서는 루이스 볼프슨(Louis Wolfson, 1931-)에게 나타난다. (93)
멜빌에게서는 .. 모비 딕에 관한 흥미 있는 연구에서, 모비 딕은 숫자들과 철자들, 그리고 이것들의 비밀스런[지하동굴의] 의미에 기대고 있어서, 적어도 비인간적 또는 초인간적 기원의 입말의 골격을 구분해낸다. (93)
모비 딕 뿐만 아니라, 삐에르에서 이자벨에게도 ... 빌리 버드에서 [빌리 버드에게도] ..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에서도 .. (94)
바틀비 또한 천사와 아담 같은 본성(une nautre) 이고, 그러나 그의 경우는 다른데, 왜냐하면 그는 언어를 다룸에서, 말더듬이 있다고 할지라도, 일반적 절차(un Procédé)로 다루지 않는다. (94)
바틀비는 멜빌이 들어가게 될 긴 침묵을 알린다. 시와 음악에 의해서 단절된 채 있다가, 그리고 빌리 버드를 위해서만 나오게 될 것이다. (94) ㅇ
상투어 다음에 말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상투어는 절차(un procédé)상 가치있고, 그것은 그것을 개별적 외관을 극복한다. (94)
소송대리인 그 자신은 이류들의 이론을 만든다. 그 이유들 때문에 바틀비의 상투어가 언어를 황폐하게 한다. 소송대리인이 암시하기를 모든 언어는 참조들과 선전제(des présupposés, assumptions)를 갖는다. (94)
말투의 작동들은 자기 지시적이다(나는 “내가 당신에게 …라고 지시한다”고 말하면서 효과적으로 명령한다), 반면에 확정적인 명제들은 다른 사물들과 다른 단어들을 참조한다. 그런데 바틀비가 황폐화하는 것은 이런 이중 지시체계이다. (95) [자기 지시적이거나 참조적인 두 체계를 무시하고 부정하듯이 황폐하게 만든다.]
난 하지 않으련다(I prefer not to)라는 상투어는 모든 대안을 배격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과 틈이 생기는 것 못지않게 간직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삼켜버린다. (95)
희망들은 전제들의 논리에 근거하며, .. 반면에 바틀비는 새로운 논리를, 즉 언어의 선전제를 파들어 가기에 충분한 선호의 논리를 발명했다. 랭동(Mathieu Lindon, 1955-)이 주목했던 대로, .. 바틀비는 참조 없는 인간이며, 자기에 참조도 없고, 다른 사물에도 참조가 없는, 솟아났다가 사라지는 인간이다.그 때문에 그것의 똑바른 어조에도 불구하고, 상투어는 마치 진솔한 비문법성처럼 기능한다. (95)
바틀비는 독신자이다. 카프카(Kafka, 1883-1924)가 그자에 대해 말했다. “그는 땅으로부터만 자기의 두 발에 필요한 것을 갖는 것이고, 자기의 두 손이 덮을 수 있는 것을 받침대로부터만 갖는 것이다.” - 그자는 마치 어린애처럼 얼어서 죽기 위해 겨울에 눈 속에 잠드는 자이며, 행해야할 산보들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고 어떤 장소에서든 산보를 행하는 자이다. (96)
무질(Musil, 1880-1942)의 소설 또한 이런 탐문을 추구할 것이다. .. 그 중에 특성 없는 인간(L’Homme sans qualités, 1930, 1932)는 사상가인 동시에 생산물이다. ... 울리히와 아가트(Ulrich-Agathe.)라는 근친상간의 커플 ... 삐에르에서 삐에르와 이자벨(Pierre et Isabelle) 을 다시 다루는 것과 같다. (96)
아마도 바틀비는 미치광이(le fou), 정신착란자(le dément), 정신질환자(le psychotique)일 것이다(영혼을 치료할 수 없는 또한 천성적 무질서). 그러나 소송대리인의 별종짓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바들비)를 알겠는가? 소송대리인은 끊임없이 매우 이상하게 처신하는데 말이다. (97)
법원장 슈레버(Le président Schreber)또한 승진하고 나서야만 자기 자신의 망상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97) [프로이트가 슈레버 사례를 1911년 분석하였다.]
바틀비의 참여[채용]은 알종의 협약(pacte)이다. 이는 마치 소송대리인이 자신의 승진에 이어서, 객관적 참조 없는 이 인물을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신뢰의 인간으로 만들려는 결심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98)
소송대리인은 방랑하기 시작하는데 비해, 바틀비는 조용히 머문다. 그러나 바틀비가 마치 방랑자처럼 취급될 것은 조용히 남아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98) [들뢰즈가 노마드를 설명하면서, 움직이지 않고서 저항과 항거 또는 항쟁과 혁명이 노마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소송대리인과 바틀비 사이에 동일화(identification)의 연관이 있는가? .. 아주 자주, 동일화는 세 가지 요소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고 교대할 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개입하게 하는 것 같다. 형상들, 즉 이미지 또는 표상, 초상 모델; 적어도 잠재적 추체; 형태를 취하고 이미지를 사로잡아 이미지에 적용하고 또 이미지를 주체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복잡한 조작작업이다. (98-99) [이데아와 그 이미지 조작작업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파라노이아에 빠지거나 강박에 빠질 것이다.]
이 조작작업은 항상 신경증에 빠지거나 나르시즘으로 바뀔 위험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방적 경쟁관계(rivalité mimétique)” 이 경쟁관계는 아버지 기능 일반을 동원한다. (99) - [멸콩 놀이: 공산당을 악으로 규정하는 민주당과 국짐당은 아버지(미국)를 동원하여 나르시즘(국짐당)도 신경증(민주당)도 아닌 척한다. 자생적으로 공산당을 만들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려는 것을 이 두 환자는 서러 합쳐서 적극 반대하고 있다. 즉 그들은 각각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서로 말싸움(사투)를 왜하냐? 공동체를 옹호하는 자들과 사투를 해야지. 그래서 이 둘은 환자이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같잖은 자들 즉 별종들은 이 시대의 의사이다. 그 의사가 드물고, 병든 자들에 대한 치료는 어렵고 힘들다. (55LLA)]
[[여기서부터 멜빌론: 작가 멜빌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다. - 이는 다른 한편의 논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들뢰즈가 분열분석을 멜빌의 작품을 통해서 탐색해 본는 것 같다]]
확실히 멜빌의 많은 소설들은 이미지들과 초상화들에 의해 시작하며 부권적 기능 아래 형성작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레드번이 그러하다. 삐에르 즉 모호성들도 아버지의 이미지에 의해, 즉 조상과 회화로부터, 시작한다. 모비딕도 ... 바들비도 .. (99)
모든 것은 영국 소설에서처럼, 런던에서 또한 디킨즈(Dickens, 1812-1870)에게서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낯선 어떤 것이 매번 생산된다. 그것은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이미지를 본질적인 불확실성으로 충격을 주며, 형상을 갖추지 못하게 한다. (99) [디킨즈 작품의 예를 제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참조 사항들은 상실하고 인간의 형성과정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요소에게, 즉 비형태적이고 비인간적 삶의 불가사의에게, 즉 “스퀴드(un Squid, 오징어)”에게 자리를 내준다. (99) - [디킨즈의 소설과 멜빌의 모비 딕의 공통성으로 들뢰즈는 아버지 형상을 무너뜨린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면 자식들의 결합방식은 패치워크와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고, 족장살해 후의 부족들의 제의(祭儀)와 닮은 것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공동체(공산주의)의 형성을 의미하려 한다. 아버지 없는 사회, 생성의 사회에 대해 들뢰즈가 프랑스의 초기 공산주의자에서 찾지 않고, 미국의 작품들(미시시피 강변의 일화들)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노마드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뿐일까?]
아버지 기능은 보다 막연하고 애매한 힘들을 이용하여 상실한다. 주체는 자기의 고유한 직물(texure)을 상실하는데, 무한히 불어나는 패치워크(un patchwork)를 이용해서 이다. 미국식 패치워크는 중심에서 또 겉과 안에서 벗어난 멜빌작품의 법칙이 된다. (99)
[마치 패치워크(un patchwork)처럼] “무서운 뒤틀림들”에 따라 움직이는 ‘가는 가죽 끈들’(les lanières mouvants)과도 같은데, 이런 [꼬인 가는] 끈들이 고정된 동아줄을 관통하여 지나가고, 또한 선원을 바다로, 주체를 죽음으로, 항상 끌고 갈 위험에 처하게 한다.삐에르에서 알려지지 않은 청년의 불안한 미소는 마치 하나의 표현 특성처럼 기능한다. (100)
이는 또한 동일화 과정(un processus d’identification, 정체화, 주체화)이다. 그러나 동일화 과정은 신경증의 모험들을 따라가는 대신에 심리질환이 되었다. 약간의 정신분열증은 늙은 세계의 신경증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는 분명한 3가지 성격을 다시 모을 수 있다. (100)
[과정에서] 첫째, 비정형적표현 특성은 이미지 또는 표현된 형태와 대립된다. 둘째,주체는 더 이상 없는데, 성공하거나 또는 실패하면서 이미지에 까지 올라가는 주체는 없다. 사람들은 불분명함의, 분간불가능성의, 애매성의 지대가 두 항목들 사이에 설정되었다고 말했으리라. 두 항목 중에서 모방성(une similitude)이 아니라 미끄러짐(un glissement)이며, 자연적 부자관계((filliation, 위계관계)가 아니라, 반-자연적 동맹(alliance)이다. 그것은 “북극(hyperboréen, artique)” 지대이다. 미메시스(모방) 문제가 아니라 생성(devenir)의 문제이다. (100) [홈패인 공간 대 매끈한 공간]
클라이스트는 거의 동물적인 비정형적 표현 특성들을, 즉 말더듬들, 끽끽거림, 비죽거림 같은 특성들 발[설]한다. 셋째, 정신병은 자기의 꿈을 추구하고, 그 꿈이란 보편적 형재애의 기능을 세우는 것이다. (101) [멜빌 소설의 특성: 형재애, 동포애, 동지애로 과정을 겪으면서 공동체(공산주의)에 대한 정체화 또는 주체화의 과정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이, 새로운 동일화(정체화)와 새로운 세계를 혼성하는[조성하는] 미국식 꿈의 세 가지 성격들이다: 세 가지란, [표현] 특성, [북극] 지대, [동지애] 기능 이다. (101)
우리는 에이헤브와 바틀비 만큼이나 몇몇 인물들을 뒤섞고 있는 중이다. 멜빌적 정신의학은 줄 곧 두 극을 환기한다: 편집증 환자들(les monomaniaques, 조증)과 우울증 환자들(les hypocondres, 울증), 천사들과 악마들, 학대자들과 희생자들, 민첩한 자들과 느린 자들, 격렬한 자들과 굳은 자들. (101)
일등 항해사 [“모비딕”에서]스타벅(Starbuck)이, 불충실한 선장을 심지어는 죽이고자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이 괴물 같은 선호(préférence)이다. 그것은 특히 선택하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죄이다.이는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의 사례(경우)인데, 즉 여성되기인 에이헤브[펜테질레아]는 자신의 적을, - 아마존 여전사들은 적을 선택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법률을 무시하고 - 마치 자신의 분간불가능한 분신으로서 아킬레스를, 선택했었다. (101-102)
멜빌 그 자신은 조증의 다른 악마를, 즉 그의 마지막 작품인 빌리버드에서 검술사범[하사관]인 클라가트를, 등장시킨다. 클라가트의 하급직 기능은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더군다나 선장 에이헤브도 착각하지 않아야 하듯이, 그(클라가트)는 심리학적 사악성(邪惡性)의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적 도착의 사례이다. 그는 자기 먹이감을 선택하는데 또한 일종의 사랑으로 선택된 희생자를 더 선호하는데 있지만, 동일한 규율을 모두들에게 적용하라고 명령하는 함선의 법칙을 지배하게 하는데 있지 않다. (102)
그것은 화자가 암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사드(Sade, 1740-1814)에게서 진술을 발견했던 고대의 불가사의한 이론을 상기하게 한다. 즉 법칙, 제2의감각적 본성(une nature)에 명령하는 법칙들이 있고, 반면에 타고난 본성에 의해 타락된 존재들이 무서운 온본성(Nature)에, 제1의초감각적, 독창적, 대양적인 온본성에 참여하는데, 이 온본성은 존재들을 관통하여 자기의 자신의 비합리적 목표를, 즉 무(Néant), 무(Néant)를, 추구하고, 그리고 [이 온본성은] 법칙을 알지 못한다. (102) - [페라스(부동의 원동자)의 편집증은 법칙을 모르고 또는 무시하고 아페이론을 조작-조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부동의 원동자로부터 받았다고 여기는 이런 제1의 초감각적 천성은 편집증에 덧씌여진 타락된 존재들의 것이라고, 이런 진술을 사드가 말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계몽기에서는 부동의 원동자(신)로부터 천성의 사악함 또는 도착성을 사드가 보았다는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이미 루소가 타고난 천성의 자연(본성)을 이야기했었다. 이런 진술들이 19세기에 독일의 낭만주의(클라이스트)와 미국의 공동체주의(멜빌)에서 (또한 러시아에서 도스토에프스키) 다시 등장한다고 들뢰즈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인민의 성장은 혁명 또는 사회변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비해, 독일과 미국에서는 선각자로서 소설가들이 등장하고, 20세기에는 카프카도 있다는 논의를 들뢰즈가 한다. - 그러면 첫 문단에서 네 명 중에 베케트를 포함한 것은 영국 문학에서도 이런 점을 볼 수 있다는 의도일 것 같다.]
심연의 물고기와 같은 모호한 존재들에 대해 멜빌이 말하기를, 예언자[선각자]의 눈만이, 심리학자의 눈이 아니라, - “타락의 불가사의(mystère d’iniquité)”라는 이 모호한 존재들의 미친 기획을 경고 할 수 없음에도 …- 이것들을 예견할 수 있고, 이것들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2) - [아페이론의 방황하는 원인, 즉 타락의 불가상의를 아는 것은 심층 속에서 일 것이다. 심층 속에서 능동성을 보게 되면, 들뢰즈가 말하는 ‘왕관을 쓴 무권위주의’, 즉 응집면이 보일 것이다. 그 선각자가 소설가이다.]
이때 우리는 멜빌의 중요 등장인물들 분류 할 수 있다. 한 극에서는 조증(편집증, monomaniaque)자들 또는 악마들이로서 에이헤브, 클라가트, 바보가 있고, 다른 축에는 거의 우둔하고 울증(hypocondre)인 천사들 또는 성자들이 있는데, ... 세레노, 빌리 버드, 바틀비가 있다. (102-103)
멜빌이나 클라이스트의 글에서처럼, 이 두 유형은 교대로 나타난다. .. 두 유형의 등장인물들, 에이헤브와 바틀비는 제1자연(Nature première)에 속한다. 이 둘은 거기에 살고, 거기에 구성한다. .. 에이헤브와 바틀비의 관계는, 클라이스트에서 무서운 펜테질리아와 부드럽고 작은 케트헨(Käthchen 카트린 Catherine),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 암늑대처럼 울부짖는 의식(conscience)과 차라리-말하지 않는 것을-선호할 의식과 같다. (103)
[[멜빌의 세 유형의 등장인물: 셋째는 별종으로 시대를 “보는(Voir)”이며, 의사인 셈이다.]
에이헤브, 클라가트, 바보: 모비 딕(1851), 빌리 버드(1891),「베니토 세레노(1855)」의 작품에서 - 제1자연 상층(조증) <- 클라이스트의 펜테젤리아
세레노, 빌리 버드,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1855)」, 빌리 버드(1891),「바틀비(1853)」에서 – 제1자연의 심층(울증) <- 클라이스트의 케트헨(카트린)
이스마엘, 베레, 소송대리인, [델라노(노예반란에 포로 된 선장) 예언의 눈을 상실한 자]: 모비 딕(1851), 빌리 버드(1891), 「바틀비(1853)」, 「베니토 세레노(1855)」 - 제2자연(예언자, 선각자).- 제삼의 인물, 즉 별종들이다.
- 이런 삼단구분은 제삼의 인물의 등장으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를 상기하게 한다.]]
멜빌에게는 제3전형의 등장인물이 있다. 이들은 법칙의 측면의 인물들인데, 제2자연의 신적이고 인간적인 법들의 수호자(gardien)이며, 예언자이다. 「베니토 세레노(1855)」의 델라노 선장은 특이하게 선지자의 눈이 부족하다. 그러나 모비 딕(1851)의 이스마엘, 빌리 버드(1891)의 베레 선장, 「바틀비(1853)」의 소송대리인은 “보다(Voir)”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103)
베레(Vere)선장은 빌리 버드의 이름을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죽을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끝내기 위하여 소송 대리인의 마지막 단어들은 “아, 바틀비여! 아, 인류애여”이다. (104)
이 두 온자연 사이에서 인물들은 증인들이자, 이야기꾼들이자, 해명자들이다. 이 제3인 유형의 인물을 피하는 것이 한 문제 인데, 다른 둘 사이에서 스스로 규제되는(규칙화되는) 가장 높은 문제가 있다. (104) [증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 현존자이다. 이들이 현실에서 풀어야 할 문제를 들뢰즈는 아래 두 가지 성찰과 셋째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공동체(공산주의)를 제기할 것이다. - 동포애, 동지애로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사기꾼: 그의 가장(The Confidence-Man: His Masquerade, 1857)(fr. Le Grand Escroc, 1950, ou Medicine-man),는 소설에 관한 멜빌의 반성들로 심어져 있다. 이 반성들 중의 첫째는 고등비합리주의의 권리들을 주장하는데 있다(14장). .. 삶이 정당화하는 것이며, 삶은 정당화될 필요 없다. (104) [19세기의 특성 중, 영혼에 관해서도 첫째 심층으로, 안으로 파고든다.]
심리학이 아마도 합리주의의 마지막 형식이다. 서구 독자는 종말이라는 단어를 기다린다. 정신분석학은 이점에서 이성[이유]의 주장들을 다시 던진다. (104) [심리학이 합리주의의 막을 내릴 때, 정신분석학이 신스콜라처럼 다시 이유(합리)를 내세울 것이다.]
멜빌이 말하는 주인공들의 영혼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텅 빔”이며, 에이허브의 육체는 “빈 조개껍질”이다. 만일 이들이 상투어를 갖는다면, 상투어는 분명히 명시적이지 않고, ‘난 안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지하인간(Homme au souterrain)의 상투어와 만큼이나 카발라적인 상투어로 남는다. 지하인간은 2+2=4라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그것에 굴복하지는 않는다(그는 2+2=4가 아닌 것을 선호한다). (105) [멜빌에게서 카발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리라.]
멜빌, 도스토이에프스키, 카프카, 무질 같은 위대한 소설가로서 간주하는 것, 그것은 사물들이 여전히 수수께끼 같지만 그럼에도 임의적이 않다는 것이다. 간단히 새로운 논리, 완전히 하나의 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유[이성]로 인도하지 않는 논리이고 또한 삶과 죽음의 내밀함을 파악하는 논리이다. (105)
소설이 온대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북극지대, 찾겨진 지대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삶도, 소설도 정당화되어야 하지 않았다. (105) [새로운 자연(본성), 얼어붙어 있던 미지의 지역에 탐색이 있기 전까지, 삶(생명)도 소설도 정당화될 필요가 없었다.]
멜빌은 빌리 버드(1891)에서 편집증 환자들(les monomaniaques, 조증자)을 이유(근거)의 대가들이라고 정의하고, ... 그리고 우울증 환자들(les hypocondres, 울증자)을 이유(근거)의 배제자들이라고, ... 심지어 예언자들은 단지 이유(근거)로부터 [바다에] 난파된 자들이라 한다. (105) [대가들과 배제자들은 과거 철학자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망망대해에 난파선을 탄자(Naufragés)라는 의미는 흥미롭다. 19세기 후반 형상형이상학고 신학의 영혼이 전복당하고 나면, 진솔한 현자는 무엇을 탐구하겠는가? 난바다에 떠있는 가랑잎과 같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서구의 한계일 것이다. 울나라에서는 궁궁(활활)살자는 의미를 창안할 것이다. (55LLB)]
그러나 멜빌의 둘째논평(44장)은 소설의 등장인물들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을 도입한다. 멜빌은 진솔한 독창적 인물들(les véritables Origiaux)을 단순히 주목할 만한 또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인물들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 반대로 사람들은 독창적인 인물(l’original)이 절대적으로 현존하는지를 조자 알지 못한다. .. 각각의 독창적인 인물이 설명할 수 있는 형태를 벗어나는 능력있는 인물(Figure)이다. (106) [독창적 인물 = 아제 인간 = 새로운 인물들을 의미할 것이다.] 대
바틀비는 개별적인 것도 전혀 아니고 일반적인 것도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독창적인 것(인물)이다. (106)
독창적인 인물들은 제1자연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세계와 또는 제2자연과 분리할 수 없고, 거기서 존재들의 효과를 실행한다. .. 예언자의 역할은, 그들 자신이 독창적인 인물들이 아니고, 세계 속에서 독창적인 인물들의 항적[행적]을 재인식하게 하는 유일한 자들이다. (106) [역사 속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재인식)은 예언자들의 몫(제2자연)이다. 19세기 중반의 미국 미시시피강의 유역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탐색과 실행의 영토였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일까?]
때로는 새벽의 희미한 빛에 결박 당한 채 매달린 빌리 버드, 소송대리인의 사무실에 서있는 바틀비, 때로는 번개같은 궤적, 평범한 눈으로 뒤쫓아 가기에는 너무나 빠른 운동, 에이허브[모비딕]와 클라가트[빌리버드]의 벼락, 이것들은 멜빌 작품에서 사람들이 발견하는 두 큰 인물[형상]들, 파노라마 촬영(Panoramique)과 이동촬영(Travelling)이다. (107)
파노라마 촬영과 이동촬영 사이에는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고다르(Jean-Luc Godard, 1930-)가 영화의 이름으로 주장했을 때,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 그러나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 할지라도 동시에 한명 이상의 독창적 인물을 창조할 수 있을까? 에이헤브 또는(ou) 바틀비‥…그것은 화가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중요한 형상들과 같은 것이다. 베이컨은 동일한 화폭에서 둘을 재통합하는 수단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그럼에도 멜빌은 찾아낼 것이다. .. 빌리 버드에서 두 독창적인 인물, 악마같은 인물과 화석처럼 굳어 버린 인물....(107)
(만일 베니토 세레노가 그걸 이미 시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델라노의 근시안적이고 흐릿한 시선 하에서는 불완전한 방식일 뿐이다.) (107) [세레노 선장과 선원은 흑인 노예의 반란으로 포로가 되어 있었다. 구조물을 요청한 이 배에, 델라노 선장이 올라가서 마주친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고 선의로 보았다는 작품이다. ‘전경과 후경 그림’처럼 선상의 상황을 보는 델라노 선장이 독창적인물일 수 있을까?]
[셋째] 따라서 멜빌의 작품을 시달리게 한 가장 높은 문제는 어떤 것일까? 예견된 동일성을 재발견하는 것? 아마도 두 독창적인 것을 화해하는 것(réconcilier),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독창적인 것과 제2인류성을, 즉 비인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화해하는 것이다. (107)
만일 인류성을 구출될 수 있다면, 독창적 인물들이 화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아버지 기능의 분해와 해체에서 이다. 이것은 또한 아버지 그자신이 잃어버린 아들이 고아이라는 것을, 반면에 아들은 아무것도 아닌 아들, 즉 모든 사람의 아들, 즉 형제(un frère)라는 것을, 아이헤브가 발견하는 중요한 순간이다.조이스(James Joyce, 1882-1941)가 말하듯이, 부성은 현존하지 않으며, 그것은 빈 것, 무, 또는 오히려 형제들에 의해 형제와 자매들에 의해 시달리는 불확실의 지대이다. (108)
인간을 아버지의 기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새로운 인간 즉 개별성없는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것, 형제들의 사회를 새로운 보편성처럼 구성하면서 독창적인 것과 인류성을 재통합하는 것. 그것은 형제들의 사회에서 동맹(l’alliance)이 부자관계/혈통(filiation)을, 피의 협약(le pacte de sang)이 혈족 관계(la consanguinité)를 대체하는 것이다. .. 그것은 멜빌에 따르면 독신자들의 공동체이며, 그 구성원들을 무한한 생성으로 이끄는 것이다. (108) [들뢰즈가 멜빌이 공산사회를 바랐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 ]
이것은 가장 불가사의한 연관이며 삐에르와 이자벨을 데려가는 연관이며,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 익명 출판)(fr. Les Hauts de Hurlevent)의 “바위(Roc)”와 카트린을 끌어가는 연관이며, 각각은 차례로 에이헤브와 모비딕과 같다. (108)
어떻게 이런 공동체(cette communauté)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 그것은 개체적이거나 또는 개별적인 업무가 아니라 오히려 집단적 업무[사업]이다. 그것은 외디푸스 환상이 아니라 정치적 프로그램이다. (109)
무엇보다 우주[세상], 형제들의 사회, 인간들과 재화들의 연맹,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소로(Thoreau, 1817-1862), 멜빌의 영향을 입은 무정부적 개체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모비딕(1851)의 선언이다(26장). .. 독창적 인간. 이미 레드번(1849)(33장)에서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미국인의 피 한방울을 흘리게 할 수 있다면 전세계의 피를 뿌리게 될 것이다. 미국인에 대해 비웃는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덴마크인, 스코틀랜드인, 유럽인도 자기 형제에게 ‘라까(Raca, 바보야)’라고 말하고, 최후의 심판의 날에 자기 영혼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속좁은 인간, 즉 헤브류의 민족적이고 편협한 종족도 아니다. ... ” (109) [19세기 중반 미국의 상황]
19세기 프롤레타리아의 화폭은 다음처럼 소개된다: 공산주의 인간의 도래또는 동지들의 사회, 즉 미래의 소비에트이며, 왜냐하면 소유 없는, 가족 없는, 민족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는 인간 존재, 즉 호모 탄툼(Homo tantum,지고한 인간)이외 다른 규정작업이 없다. (110)
미국을 혁명할 생각이었고, 혁명의 힘은 보편적[범세계적] 이민화, 즉 모든 나라로부터 온 이민자들일 것이다. 그런 만큼이나 볼세비키 러시아도 그런 혁명을 생각할 것이고, 혁명의 힘은 범세계적 프롤레타리아화, 즉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 계급 혁명의 두 형식이다. 만일 19세기 메시아주의가 두 개의 선두를 가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미국의 프라그마티즘(pragmatisme)에서도 결국에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에서도 표현된다. (110) [흥미롭다. 프랑스 바뵈프주의의 공산주의와 생시몽주의의 공동체의 형식이 미국에서 이민자들 공동체에서도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서도 흐르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프랑스 공동체주의를 이 논문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 사실 미시시피강 유역은 프랑스 공산주의의 영향이 크다고들 한다.]
사람들은 프라그마티즘에서 미국인들에 의해 제작된 간략한 철학적 이론을 볼 때, 사람들은 프라그마티즘을 이해하지 못한다. (110)
미국적 선험주의(transcendantalisme américain)의 에머슨과 소로와 동시대인인 멜빌은 자신을 앞으로 밀고 나갈 프라그마티즘[실용주의]의 특성들을 이미 그렸다. (110)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패치워크(를 발명했으며, 마찬가지 의미에서 사람들은 스위스인들이 뻐꾸기시계를 발명했다. (111)
열도[아메리카]의 형제들은 인식을 신념(la croyance, 믿음)에 의해, 오히려 신뢰(la confiance)에 의해 대체했다. 다른 세상의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신뢰이며, 신을 믿는 만큼이나 인간을 신뢰이다(“나는 신앙(la foi)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오포(Ofo)의 상승을 [앞으로] 시도할 것이고… 내가 나의 길로 갈 것이고…”) (111)
프라그마티즘, 그것은 열도와 희망이라는 이중 원리이다.진리(la vérité)가 가능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공동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진리(truth)와 신뢰(trust)이다.프라그마티즘은 이 두 경계[전선]에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111)
로렌스가 말했듯이, 거기에는 새로운 메시아주의 또는 미국 문학의 민주적기여가 있었다. 즉 구원(le salut)과 사랑(charité, 자비)의 유럽적인 도덕[크리스트교 윤리]에 대해 반대하여, 삶(la vie)의 도덕이 그것이다. .. 멜빌 또는 로렌스에 따른 형재애는 독창적 영혼의 업무[사업](une affaire)이다. ...아마도 형재애는 아버지 즉 신의 죽음과 더불어서 만이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형재애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업무[사업]이다. - “수많은 영혼 모든 미묘한 공감들, 즉 가장 쓰디쓴 증오에서부터 가장 정념적인 사랑에까지”
거기[공동체의 형재애, 공산주의의 동지애]에는 새로운 전망(une nouvelle perspectives)이, 즉 열도의 전망주의(le perspectivisme, 원근법)이 필요하다. 이 전망주의는 마법의 섬들에서 처럼 파노라마 촬영과 이동식 촬영을 결합한다. (112)
소로(Thoreau, 1817-1862)의 말하듯이, 감옥이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 명예롭게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가 형제인데, 동생 헨리는 단편 데이지 밀러(Daisy Miller, 1878)에서 여주인공 데이지 밀러는 새로운 미국 처녀인데, 약간의 신뢰(la confiance)을 요구하고, 그리고 죽어간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요구했던 그 약간을 얻지 못했다. (112) [실용주의가 도덕적, 사회적 신뢰가 아니라, 편리와 이익으로 전환기가 아닐까? 1880년대 이래로 영국이 식민지 수탈에서 좋은 시절(벨 에포크)를 구가하던 시절에 헨리가 영국에 있지 않았던가.]
“아버지 없는 사회”의 위험들은 자주 고발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회귀[복귀] 이외 다른 위험은 없다. (113) [크게 보아, 상층에서 왕권(참주권) – 교권 – 국가 – 자본으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위계 제도의 연속은 아버지 복귀가 아니라 항상 환상처럼, 즉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처럼, 아서왕의 이야기에서 바위에 꽂힌 칼처럼 존재해 있었다. - 이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쉬케의 생성과 세분화의 길을 깨닫고 재인식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두 개의 혁명, 미국식혁명과 소련식 혁명, ... 마찬가지로 많은 볼셰비키들은 문을 두드리는 곤란한(diabolique) 권능을 1917년부터 들었듯이, 프라그마티스트들과 이미 멜밀은 형제들의 사회를 이끌어갈 위선적 행위(la mascarade)가 오는 것을 보았다. 로렌스에 앞서서, 멜빌과 소로는 미국적인 서툼(le mal)을, 즉 부권적 권위와 추잡한 자비[크리스트교의 사랑]이라는 벽을 복구하는 새로운 시멘트를 진단했다. 따라서 바틀비는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둘 것이다.처음부터 피뢰침 장수인 위선자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미국식 매혹적인(magnétique) 감옥을 세운다. (113)
형재애[동지애]들에 관하여, ... 장루에서 망보는 선원에게 남아있다(흰 재킷(White-Jacket; or, The World in a Man-of-War, 1850)) .. 부유한 독신자가 가난한 노동자를 착취한다(독신자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The Paradise of Bachelors and the Tartarus of Maids, 1855)). 멜빌의 작품 도처에서 미국적 사기꾼이 등장한다. .. 「엔칸타다스: 마법에 걸린 섬(The Encantadas or Enchanted Isles, 1854)」에서 개들의-인간(Homme aux chiens, [Dog-King])에 의해 건설된 고약한 “보편 국가”만큼이나 잔인한 기업[상회]을 신뢰로부터 만들었던 것은 어떤 간악한 권능인가? (113) [들뢰즈는 자본주의 발생과정의 사악함과 잔인함을 보면, 현대 사회가 계승한 광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진단하고 치료하자고 하는 것이다. - 돈 때문에, 검찰의 강압으로 자살, n번방으로, 무차별 여성 살해 등으로 이어지는 광기의 치료는 문화론과 더불어 도덕론을 포함하는 인문학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인류가 이런 과정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에 대해, 용출선과 노마드의 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리라.]
너무 과도하게 믿음[신뢰]을 주는 미국인에게 그의 힘[권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곤란한(diabolique, 악마같은) 아버지가 보낸 것은 두 형제들로부터 인가? 그러나 소설은 매우 복잡해서 사람들은 반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4)
카프카가 소수자 문학들에 대해 [다음에, 미래에] 말할 것, 그것은 멜빌이 이미 그의 시대의 미국 문학에 대해 이미 말했다. (114)
미국에서 작가가 별로 없기도 하지만 좌초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작가는 그 만큼 더 잘 집단적 언설의 운반자이며, 아제(미래에 올) 인민의 또는 인간적 생성의 권리들을 보존한다.정신분열증 소명이다: 긴장병(catatonique)과 식욕부진(anorexique, 거식증) 환자인 바틀비는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의 의사, 인간-의사(le Medicine-man), 새로운 크리스트, 즉 우리 모두의 형제이다. (114) (17:32, 55LLD) (18:16, 55LLE)
# 인명 **
1706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미국 정치가, 과학자. 피뢰침 원리 발견(1752), 1783년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승인을 받는 파리조약의 대표의 일원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 중 한 명이라 한다.
1740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1740-1814) 프랑스 문필가, 소설가, 철학자. 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 1785), 규방에서 철학(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 (1795), 새로운 쥐스틴, 덕목의 불행(La Nouvelle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suivie de l'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1799)
1743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미국 3대 대통령, 미국독립선언문 작성자 중의 1명. 미국 철학회 회장.
1768 샤또브리앙(François-René, vicomte de Chateaubriand, 1768-1848) 프랑스 작가, 회상록작가 정치가.
1776 발랑쉬(Pierre-Simon Ballanche, 1776-1847), 프랑스 작가, 철학자. 사회적 윤회(Palingénésie sociale(여섯 권 중에서 속죄의 도시(La Ville des expiations, 1832)가 있다). 사회적 윤회론(Essais de palingénésie sociale, 1820)(1827-1829에 출간되었다.)
1777 클라이스트(Bernd Heinrich Wilhelm von Kleist, 1777-1811)[마흔넷] 독일의 극작가이다. 판테질레아(Penthésilée (Penthesilea, 1808)(écrit en 1805-1807, publié en 1808), 홈부르크 공(Le Prince de Hombourg (Prinz Friedrich von Homburg)(écrit en 1808-1810, paru et créé en 1821), 인형극 시론(Essai sur le théâtre des marionnettes (Über das Marionettentheater), 1810, 미카엘 콜하스(Michael Kohlhaas, 1810)(역사적 인물 콜하제(Hans Kohlhase. 1500경-1540)를 대상으로 삼았다.)
낭만극, 캐트핸(Käthchen of Heilbronn (Das Käthchen von Heilbronn) (1808),
그는 1809년 음악가인 포겔(Henriette Vogel, née Keber, 1780-1811, 1799년 결혼)부인과 만났고 사랑의 편지를 교환하였으며, 1811년 동반 자살하였고 같이 묻혔다.
178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1803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시인, 사상가. 자연(Nature, 1836)(수필), 선험주의자(The Transcendentalist, 1842)(인간과 자연 사이에 내재하는 선함(goodness)이 있다고 여긴다.)
[1808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08-1889) 뉴올리언즈 출생, 미국 장교, 미국남북시민전쟁 때 링컨의 통합에 반대한 연맹국 대통령.]
1812 디킨즈(Charles Dickens, 1812-1870) 영국 소설가.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유명한 소설가이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1837-1839)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Un chant de Noël, 1843), David Copperfield (1849-1850), ,
[1813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 작곡가, 지휘자 작가, 독일 낭만주의 시대 논쟁가. - 파르지팔(Parsifal, 1882)바그너가 이름 붙인 “성스런 페스티발 극/무대신성제전극(« festival scénique sacré »: en all. Bühnenweihfestspiel)”. 1882년 바이로이트 둘째 축제에서 공연되었다. 이 극은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 1170-1220)의 중세 궁정문학 서사시인 “파르찌발(Parzival, 1210)”을 토대로 하고 있다.]
1817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 자연주의 철학자, 시인. 시민 불복종(La Désobéissance civile (1849), 월든(Walden ou la Vie dans les bois, 1854).
1818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ë, 1818-1848)[서른] 영국 여성 소설가.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 익명 출판)(fr. Les Hauts de Hurlevent),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이라 한다. [Heathcliff: 황야+절벽, 즉 황량한 곳의 절벽이라는 뜻일까? // “Roc” - “Mon amour pour Heathcliff est semblable au roc immuable qui est au-dessous de nous, il est nécessaire.” (인용문인데 쪽 수가 명시되어있지 않다.) - 들뢰즈의 인용, “Mon amour pour lui ressemble aux rocs éternels du sous-sol, source de peu de joie visible, mais nécessaire… Je suis Heathcliff! ...”(쪽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1819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미국 소설가, 수필가, 시인. 오무(Omoo: A Narrative of Adventures in the South Seas, 1847), 백경(모비 딕, Moby-Dick, or The Whale (1851)(135장(chapters)으로 되어 있다), 피에르, 혹은 모호함(Pierre: or, The Ambiguities, 1852)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 1853), 유작: 빌리 버드(Billy Budd, Sailor, 1924). - 광장 이야기(The Piazza Tales (1856), comprenant : The Piazza, Bartleby the Scrivener, Benito Cereno, The Lightning-Rod Man, The Encantadas, or Enchanted Isles et The Bell-Tower (1856)
[위버(Raymond Weaver, 1888–1948) 컬럼비아 대학 비교문학 교수(1916–1948), 허먼 멜빌: 뱃사람 그리고 신비주의자(Herman Melville: Mariner and Mystic, 1921) - 이 작품으로 멜빌이 재조명되었고, 들뢰즈는 멜빌 소설의 3위상을 읽은 것 같다.]
1821 도스토에프스키(Fiodor1 Mikhaïlovitch Dostoïevski 1821-1881) 러시아 소설가. 이중인격(Le Double 1846), Souvenirs de la maison des morts 1860...
1832 캐럴(Lewis Carroll, 1832-1898) 영국 수학자 본명 찰스 럿위지 더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다. 사진가이기도 하다. un mot-valise
1837 브리세(Jean-Pierre Brisset, 1837-1919) 프랑스 작가. 파타피지크의 달력의 성자로서 동시에 문학적 광인으로 알려졌다. 인간의 기원들(Les Origines humaines, 1913)
1842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 심리학자, 철학자. Les principes de psychologie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 Les formes multiples de l'expérience religieuse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1901-1902)
1843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 미국 작가. Daisy Miller (nouvelle, 1878) Portrait de femme (roman, 1881)
1844 니체(Friedricha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철학자, 작가, 문화비평, 작곡가, 시인, 문헌학자.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r der Moral, 1887)(La Généalogie de la morale.
1855 로이스(Josiah Royce, 1855-1916) 미국 철학자. 관념론 철학자로서 브래들리와 헤겔을 가깝고, 미국 대학에 독일 관념론을 확산시켰다. The Religious Aspect of Philosophy 1885, The Conception of God, a philosophical discussion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Divine Idea as a Demonstrable Reality 1897, The Philosophy of Loyalty 1908
1861-1865 미국 남북 전쟁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1877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 프랑스 작가, 극작가, 시인. La Doublure, 1897(roman en vers), Comment j'ai écrit certains de mes livres, 1935
- 푸꼬(Michel Foucault)의 레이몽 루셀(Raymond Roussel, 1963)(Gallimard, 256 p.)
- [Gilles Deleuze, 비평과 임상(Critique et clinique, 1993), Ch 2. Louis Wolfson, ou le procédé pp. 18-33.에서, 루이스 볼프손을 다루면서, 레이몽 루셀과 장 삐에르 브리세를 다룬다.]
1880 무질(Robert Musil, 1880-1942), 오스트리아 기술자, 작가, 수필가, 극작가. 특성 없는 인간(L’Homme sans qualités)(Der Mann ohne Eigenschaften, 1930년 1부, 1932 2부)
1882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작가,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Les Gens de Dublin, 1914),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Portrait de l'artiste en jeune homme, 1916), 율리시즈(Ulysse, 1922)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1939)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마흔하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일기(Journal)(23 sept. 1912, Grasset, Les Cahiers Rouges, p. 289) [내밀한 일기(Journal intime 1937(première publication française : 1945)]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마흔다섯], 영국 작가. 하얀 공작(The White Peacock, 1911; Le Paon blanc, Lady Chatterley et l'Homme des bois (John Thomas and Lady Jane, 1927(publié en 1972), 둘째 판본 (Lady Chatterley's Lover), 1928; L’Amant de lady Chatterley. 고전 미국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Benjamin Franklin, Hector St. John de Crevecoeur, James Fenimore Cooper, Edgar Allan Poe, Nathaniel Hawthorne, Richard Henry Dana, Jr., Herman Melville, and Walt Whitman를 다루고 있다)
1894 커밍스(Edward Estlin Cummings, 1894-1962), 미국 시인, 작가, 화가. 시집에 ≪튤립과 굴뚝 Tulips and Chimneys (1923)≫, 소설 〈거대한 방 The Enormous Room (1922)〉. - 생각의 탄생: [그는 자기가 했던 대로 춤췄다(He danced his did). ]
1898 뒤메질(Georges Dumézil, 1898-1986), 프랑스 문헌학자, 종교사가, 인류학자.
1901 마이유(Jean-Jacques Mayoux, 1901-1987) 프랑스 문학비평가, 영미문학전공, 소르본 대학 교수(1951-1973). 멜빌 그 자체(Melville par lui-mêeme, 1958)
1905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프랑스 소설가, 수필가, 철학자, 화가. 사드, 나의 이웃(Sade mon prochain, Paris, 1947), 니체와 악순환(Nietzsche et le cercle vicieux, 1969
1906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작가, 시인, 극작가. 프랑스와 영어로 글을 쓰고 1969년 노벨 문학상...
1907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프랑스의 소설가, 문학비평가, 철학자. 아제의 책(Le Livre à venir, 1959), 파산의 글쓰기(L'Écriture du désastre, 1980)
1907 레리스(Pierre Leyris, 1907-2001) 프랑스 영어 번역가. 특히 셰익스피어, 멜빌, 엘리어트, 예이츠, 디킨즈, 스티븐슨, 호오손, 퀸세이, 밀튼 등 번역하였다. 멜빌의 빌리 버드(Billy Budd, 1891)(1924 출판)를 번역했다.
1908 미철리히(Alexander Mitscherlich, 1908-1982) 독일 의사, 정신분석가. 영혼신체학(la psychosomatique)에 관해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 없는 사회를 향하여(Auf dem Weg zur vaterlosen Gesellschaft. Ideen zur Sozialpsychologie. 1963(fr. Vers la société sans pères : essai de psychologie sociale, Paris, Gallimard, 1969)
1909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아일랜드 출신 영국 화가. 동성애자. “삼단제단화(triptyque)”로 유명하다.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 Trois études de figures au pied d'une crucifixion」, 「루시앙 프로이트의 삼면연구(Trois études de Lucian Freud, 1969)」. - [루시앙 프로이트(Lucian Freud, 1922-2011) 독일 출신 영국 화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의 손자.]
[불가능의 예술(L'art de l'impossible. Entretiens avec David Sylvester. 1976- 실베스터(David Sylvester, 1924–2001), 영국 작가, 예술 비평가. 프랑시스 베이컨의 대담자.)
1921 델달(Gérard Deledalle, 1921-2003) 프랑스 철학자. 퍼스와 듀이 번역자이며, 주로 남프랑스의 대학들에서 교수를 지냈다. 미국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américaine, 1954). Théorie et pratique du signe, Introduction à la sémiotique de Charles S. Peirce, 1979.
1929 사쉬(Viola Sachs, 1929-2020) [유태계] 폴란트 출신 여성 프랑스인으로 미국문학전공, 특히 멜빌전문. 1968년 이래 파리로, 파리8 대학센터 교수. 멜빌의 성경반대: 암호해독 된 모디-딕(La Contre-bible de Melville: Moby-dick déchiffré, 1975).
1930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프랑스 분열분석가, 철학자. 보르드 병원(la clinique de La Borde)에서 생애 내내 작업했다. 여러 해 겨울(Les années d'hiver : 1980-1985(recueil d'articles, 1985), 분열 분석적 지도(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s, 1989(comprend des essais sur Genet, Witkiewicz, Balthus, Tahara et l'architecture).
1930 샤라시제(Georges Charachidzé, Giorgi Sharashidze, 1930–2010) 프랑스-조지아인으로 코카서스 문화 전문가. 뒤메질의 지도로 박사학위: Le système religieux de la Géorgie païenne: analyse structurale d’une civilisation. 1968, 프로메테우스, 즉 코카서스 (Prométhée ou le Caucase, 1986)(뒤메질이 서문을 썼다).
1930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스위스 영화인,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몽타쥬의 대가. Une histoire d'eau 1958(coréalisé avec François Truffaut), À bout de souffle 1960
1931 울프슨(Louis Wolfson, 1931-) 뉴욕 출생, 프랑스어로 글쓰는 미국 작가. 스키조와 말쌈들(Le Schizo et les langues. Connaissance de l'inconscient, 1970(1970년 프랑스 출판, 갈리마르 출판에서, 입문(Introduction)을 들뢰즈가 썼다). « L'épileptique sensoriel schizophrène et les langues étrangères, ou Point final à une planète infernale », dans Change, octobre 1977, p. 119-130 (remaniements et ajouts au Schizo et les langues) 음악가인 나의 어머니는 죽었다.(Ma mère, musicienne, est morte de maladie maligne mardi à minuit au milieu du mois de mai mille977 au mouroir Memorial à Manhattan. 1984)(그녀의 어머니는 자궁 종양(une tumeur ovarienne)으로 죽었다) 그는 전자 로또가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되어 프에르토리코에 산다. (54OLI)
1933 뤼베(Nicolas Ruwet, 1933-2001). 프랑-벨기에 언어학자. 생성문법 입문(Introduction à la grammaire générative, 1967), 언어, 음악, 시(Langage, musique, poésie, 1972).
1936 꼬스(Michèle Causse, 1936-2010) 프랑스 작가, 번역가. 신조어(le néologisme)을 발명했다. 존업사 협회에 의한 자살. 그녀의 바틀비에 대한 글은 세 종류가 있다.
Herman Melville, Bartleby, traduit de l'anglais par Michèle Causse, Cahier no 35. Le Nouveau Commerce, Paris, 1976
Petite réflexions sur Bartleby, éd. Le Nouveau commerce, 1980.
Herman Melville, Bartleby. Les Îles Enchantées. Le Campanile, traduit de l'anglais par Michèle Causse, Flammarion, Paris, 1989
1941 뒤랑(Régis Durand, 1941-) 파리3대학 국가 박사, 대학강의, 예술 비평, 사진영역 전시 주관자. 멜빌: 기호들과 은유들(Melville: signes et métaphores, 1980)
1949 파라쉬(Armand Farrachi, 1949-), 프랑스 작가. 소설: Descendance, 1982(388 p.), 수필집: 침묵의 부분(La Part du silence, 1984)
[1949?], 자보르스키(Philippe Jaworski, s.d.)[1949?], 미국문학전공, 특히 멜빌과 피츠제럴드 전문. 파리-디드로 대학 명예교수. 학위논문: 사막과 제국(Le désert et l'empire: Melville et l'écriture : essais(1982, 박사논문, 1986년 출판), sous la direction de Michel Gresset, 1982. Thèse de Doctorat : Études nord-américaines : Paris 7 : 1982 / 1986 Presses de l'École normale supérieure, 출판.
1955 랭동(Mathieu Lindon, 1955-) 프랑스 기자, 작가. 그는 23살에 미셀 푸꼬를 만나 영향을 입었다(1978-1984). 동성애자이며, 약물중독에서 손상없이 빠져나왔다고 한다.
Mathieu Lindon, “Bartleby”, Delta6, mai 1978, p. 22. [“Description d'un Combat: H. Melville 'Bartleby.'” Delta, 6 (May) 1978, pp. 5–27.]
Postface à Bartleby, une histoire de Wall Street et autres récitsd'Herman Melville, éditions Amsterda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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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장 슈레베(Le président Schreber) 사례.
슈레버(Daniel Paul Schreber, 1842-1911)[예순여덟] 독일 법률가. 과로로 인한 불면증(les insomnies)으로 고생했다. 몇 달 후에는 여러 환각(les hallucinations)에 시달렸다. 1900년에 요양원으로 가면서 신경병환자의 회상록(Mémoires d’un névropathe)을 썼다. 여기서 망상(le délire)을 상상하게 서술했는데, 편집자가 몇몇 구절을 삭제했다. 정신병( psychose, 영혼병)의 진화과정에서, 신이 빛을 비추어서 기적적으로 자기를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마침내 믿었다.
칼 구스타프 융이 프로이트에게 책을 전달하여, 프로이트가 연구하였다. 프로이트는 편집증에서 “전이”의 사례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1911년 학회에 « Remarques psychanalytiques sur l'autobiographie d'un cas de paranoïa : Le président Schreber 1911»를 발표했다. 융 주변의 심리학 저술들에서는 정신착란/조기치매(la démence précoce)로 보았다. 또는 심기증(hypochondria, 心氣症, 자기의 건강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는 상태. 심기신경증, 건강염려증)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
1949년 홀란드 정신분석가 카탄(Maurits Katan, 1897-1977)이 해석하고 독일 정신분석학자인 니더란트(William Guglielmo Niederland, 1904–1993)와 논쟁을 벌였다.
1962년에 아틀란틱 시티(Atlantic City)에서 슈레버 사례 학회가 열렸다.
1980년대부터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라깡(Jacques Lacan), 데리다(Jacques Derrida), 푸꼬(Michel Foucault), 들뢰즈(Gilles Deleuze) 등이 다루었다. 라깡은 1932년 파라노이아에 관한 의학 학위를 제출했다. 그리고 1955-1956년에는 정신병 이론의 정교한 틀의 예시로서 주장했다. 1970년대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L'Anti-Œdipe, 1972에서 정신분열증으로 다루었다. 1975년에 회상록이 불어로 번역되었다.
1979년과 1981년, 이스라엘스(Han Israëls, 1951-)와 드브레스(Daniel Devreese, s.d.): 전자는 가족사의 혈통을 연구했고(슈레버 아버지의 교육), 후자는 독일 역사 속에서 “영혼 살해”로 재 위치시켰다. 이 두 저자에 콰켈빈(Julien Quackelbeen, 1935-2016)이 가담하여 정신병의 발전을 더 잘 이해하게 했다.
1993년에 스리지-라-살(Cerisy-la-Salle)에서 슈레버에 관한 국제 학술대회가 있었다.이 주제에 관한 작업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아직도 수많은 작업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들 중에 샤틀(M. Chatel, s.d.)과 아주리(C. Azouri)가 Revue du Littoral학술지의 특집호 속에 다른 저자들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55LKH)
(13:01, 55LKJ) (23:24, 55LLD) (24:08, 55LLE)
#참조1, 프랑스에서 변역(變易)의 사조.
1743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쉰]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
1757 카바니스(Pierre-Jean-Georges Cabanis 1757-1808) 프랑스의 철학자, 생리학자.
1757 에베르(Jacques-René Hébert 1757-1794) 필명은 Père Duchesne.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언론가. 극좌 혁명파(untra révoluionaires)의 지도자.
1758 로베스피에르(Maximilien-François-Marie-Isadore de Robespierre 1758-1794)[서른여섯]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로 프랑스 혁명의 주요인물.
1759 당통(Georges-Jacques Danton 1759-1794) 프랑스의 혁명가․웅변가.
1760 바뵈프(François Noël, dit Gracchus, 1760-1797)[서른일곱] 프랑스 혁명가이자 이론가이다. 1760년 프랑스 생깡땅(Saint-Quentin) [프랑스 북동부 삐까르디 지방(Picardie)의 에슨(Aisne, 02)의 부도시, 즉 제2도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이 사그러지는 1797년에 방돔(Vendôme) [프랑스 중서부 오를레앙지방(Orléanais)의 르와르 에 셰르(Loire et Cher, 41) 도의 부수도]에서 사형 당했다. [소작농층의 해방을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물의 국가 관리에 의한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1760 생시몽(Saint Simon, 1760-1825) 프랑스 철학자, 경제학자, 군인. 1817년 꽁트(Comte 1798-1857)가 생시몽의 비서였다. 제자들: O. 로드리게, P. 앙팡탱, SA. 바자르
1771, 브리오(Pierre-Joseph Briot, 1771-1827) 프랑스 혁명가, 정치인물. 브장송 프랑마송회원, 카르보나리 회원(des Bons cousins charbonniers du rite du Grand Alexandre de la Confiance)
1772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자유로운 생산자의 협동조합인 팔랑지(phalanxes)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1778 카베(Etienne Cabet 1778-1856) 프랑스 사회주의자, 1788년에 프랑스 디종(Dijon)에서 태어나 1856년(68살) 미국의 미주리(Missouri)주의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에서 세상을 떴다. 카르본느리 당(Charbonnerie)의 신봉자로서 그는 1830년(52살)에 군주제에 반대하여 봉기운동에 가담하였다. 이카리 여행(Voyage en Icarie, 1842), 난 공산주의자(Comment je suis communiste, 1840)
1789년 베르사이유에서 랑쥐네(Jean Denis, comte Lanjuinais, 1753-1832)와 르 샤플리에(Isaac René Guy Le Chapelier 1754-1794) [둘 다 브르타뉴 지방의 렌느(Rennes) 출신이다]에 의하여 브르똥 클럽(Club breton)이란 이름으로 창설된 혁명 조직(Société révolutionnaire)이 생겼다. 이 클럽이 쟈꼬방당이 된다.
1789년 9월 마라는 인민의 벗(Ami du Peuple)지(紙)를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참여를 고취하였다.
1789년 10월. 제헌의회(Assemblée constituante)와 동시에 파리에서 세워진, 이 혁명조직(Société révolutionnaire)은 헌법동지회(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이란 이름을 취했으며, 생-또노레 거리의 도미니크 수도원의 구내식당에서 집회를 가졌다. (여기서 쟈꼬방(jacobin)이란 이름이 유래한다.)
1797 르루(Pierre Leroux 1797-1871) 프랑스 철학자 정치가, 한때 생시몽주의자.
1805 블랑끼(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 법학과 의학을 공부. 19살에 카르보나리.
1809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5) 프랑스 사회주의자이다.
1811 블랑(Louis Blanc 1811-1882), 역사가, 정치가, 사회주의 프랑스 이론가이다.
1814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 러시아의 혁명가,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동맹을 설립,
1818 맑스 (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으로 독일인이다.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1821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Mikhail Petrashevsky, Mikhaïl Petrachevski 1821-1866) 러시아 공상주의 활동가. 1844년부터 자신의 아파트에서 매주 금요일 서클(Le cercle de Petrachevski)을 조직하였다. 1849년 체포되었다.
1824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東學)의 창시자.『용담유사(龍潭遺詞)』『동경대전(東經大全)』
1825 라살레(Ferdinand Lassalle 1825-1864) [유태인] 독일정치인물.
(25:28, 55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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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2: 커밍스(Cummings, 1894-1962)의 시
- 영어에서 번역됨- “누구나 예쁘게 마을에 살았다”는 E. E. Cummings가 쓴 시(詩)이다. 1940년에 처음 출판 된 이 시는 이름이 없는 마을의 주민들의 삶을 자세히 설명한다. 커밍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는 실제로 제목이 없으므로 비평가는 첫째 줄을 사용하여 시 제목으로 삼는다.
“참으로 멋진 도회에 산 누구나(anyone lived in a pretty how town)”
anyone lived in a pretty how town
(with up so floating many bells down)
spring summer autumn winter
he sang his didn't he danced his did
Women and men (both little and small)
cared for anyone not at all
they sowed their isn't they reaped their same
sun moon stars rain
From "anyone lived in a pretty how town" (1940)
["anyone lived in a pretty how town" at the Poetry Foundation]
첫댓글 한강 멍때리기 대회(2014년 이래) :
*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2023년 5월 21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잠수교에서 제6회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즉 서울 서초구 반포한강공원 잠수교에서 ‘2023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방식으로 하염없이 ‘멍’을 때렸다. 90분간의 적막 끝에 배우 정성인(31)이 우승을 차지했다. - 멍때리기 대회는 2014년 처음 열렸다.
** 잠시 열외로 있기 이다. 항상 열외로 있기로, 또는 살아가기로 작정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 사람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드물지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드문 방식이 인간이 스스로 파라노이아를 치유하고, 스키조로서 창안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56P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