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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베벡(Bebek)은 이스탄불 여행에 있어서 이미 핫 플레이스로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듯 하다. 특히 한국 여행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세계 3대 커피 숍' 중의 하나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커피 숍'으로 선정되었느니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베벡의 스타벅스 매장)은 지금 톡톡히 유명세를 치루고 있다.
'글쎄다.'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결코........ 아니올시다' 이다.
이 세상에 풍광이 빼어나고 시설이 아름다운 커피 숍이 어디 베벡의 스타벅스 뿐이겠는가? 우리나라에만도 가평이나 제주도나 사방으로 여기저기 쌔고 쌨으며, 적어도 베벡의 스타벅스 보다 훨씬 멋진 커피 숍들이 무수히 많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그저 몇몇사람의 하는 소리 같으니........
같은 브랜드의 스타벅스 매장 중에서도 파리의 스타벅스를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물론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아님 뉴욕이든가.......
베벡만 해도 그렇다.
'글로리아진스'나 '카페 네로'만 해도 '스타벅스'에 비해서 모든면에서 나으면 나았지 모자랄것이 하나도 없는 멋진 커피 숍들이다. 거기에다 '베벡 바'나 '루카'나 '베벡 카흐베'까지를 포함 시킨다면......... 어쩌면 베벡 안에서도 스타벅스는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어디까지나 커피 숍 하면 가장 먼저 흔하게 떠오르는 스타벅스가 최고지' 하는 한국인들의 선입견이 만들어 낸 개운치 않은 해프닝이 아닐까?
베벡이 유명한 이유는 엄연히 따로 존재하는데....... 한국인 여행자들에게는 '세계적인 명품 커피 숍'이 있다는 이유로 베벡이 유명하다니.......
이탈리아 여행에서 베네치아의 물가가 최고로 비싸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미 잘알고있고 나름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한적하고 외진 시칠리아의 한 구석텡이 산자락에 위치한 (타오르미나)의 물가가 베네치아 보다도 더 비싸다고 했을 땐 다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아해 한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이스탄불의 물가가 여타의 다른 터키 지역에 비해서 다소 비싸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이스탄불 중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외곽의 작은 동네 베벡의 물가가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비싸다고 하면 별반 수긍이 덜 가는 표정들이 된다.
그런데 정말이다. 베벡 이라는 동네의 물가가 터키 전체에서 가장 비싼것으로 드러났다.
왜?
베벡 이니까.
그리고 베벡의 물가가 터키에서 최고였던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져 왔으니까.
베벡은 수세기 전, 콘스탄티노플이 비잔틴 제국의 심장부였을 때부터 이미 그 당시의 가장 지위가 높고 부자였던 사람들이 한적한 곳으로 부러 떨어져 나와 조용히 살고자 했던 아주 특별한 지역으로 시작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잔틴이나 오스만의 주체 세력들이 아니라, 그리이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 이었다.
권력자와 군인과 정치가들은 이스탄불의 왕궁 근처에서 피터지는 암투를 벌여왔지만, 부를 이루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인간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던 소수의 계층들은 세속의 전쟁터에서 서너걸음쯤 물러나, 조금은 멀리 떨어진 이 호젓하고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자신들의 여유롭고 넉넉한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베벡에 산다는 것은........ 지위나 권력과는 떨어진......... 최고의 선과 삶을 지향하는 엘리트들이 살았던 장소였던 것이다.
베벡은 본래 그런 곳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그리이스. 유대. 아르메니아 인)들의 가치관과 생활관이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그들의 삶에서 금전적인 문제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고 또한 너그러웠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돈을 쫓는 무리들이 이곳을 찾아 들었다.
또 어느 정도 살만하다 싶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적어도 베벡 사람들처럼' 하는 열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굳이 이곳을 찾아 '베벡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흉내내보기' 시작했다. 그런 심정이나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 시대적 흐름들이 지금의 베벡 번화가를 만들어냈고, 지금 여행자나 베벡인처럼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차다 못해 넘쳐나고 있는것이다.
베벡의 커피 숍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진짜 베벡인을 만나보기는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닐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베벡을 그렇게 특별하게 느끼게끔 만들었을까?'
이런 물음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비잔틴을 점령한 오스만제국 술탄의 눈에도 '베벡만의 특별함'이 전하여 졌던 것일까?
그리이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저들끼리만 모여서 사는 아주 특별한 동네 베벡............ 술탄의 눈에 띈 것은 이들 세 국가 사람들이 저들끼리만 모여살고, 또 그들 모두가 부자라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종교가 다른것만도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고, 또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희망을 꿈꾸는 방법이 달랐고, 보다나은 삶을 위해서는 서로가 공평한 선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고뇌하고 결과로 최선을 찾아내는 방법이 달랐고, 이런 모든것이 종교가 결론까지를 강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 부터 교육을 통하여 하나하나 인간 스스로가 자각하고 소질을 개발해 나간다는 것을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 술탄이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차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깨닫게 되었다.
술탄은 이들의 방법을 나름 이슬람식으로 제도화 하여 세상에 실행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자신은 이해하고 깨닫게 되었지만........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은 깨닫질 못했고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교육을 통한 개혁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술탄은 절감하게 되었다.
하여 술탄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스탄불 심장부에 살고있던 오스만은 젊은 엘리트들에게 이삿짐을 싸들고 베벡으로 이사할 것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지원을 팍 팍 해 줄터이니 베벡으로 아예 거주지를 옮겨서 그리이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과 섞여서 함께 생활하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그런 그들이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개혁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것이 오르타쿄이를 시작으로 점차 베벡쪽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낡았지만 거대한 옛 오스만식 건물들이 바로 이 술탄의 정책에 의해서 이곳으로 옮겨온 오스만 엘리트들이 거주하던 장소들이다.
갈라타사라이 대학과 바흐체세히르 대학과 보스포러스 대학 등 터키의 명문대학들이 이곳에 즐비하게 들어선 이유가 그 모든것을 말해준다.
격변의 시대 흐름속에.......... 유대인들은 핍박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또는 훗날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이곳을 떠나고......... 그리이스 인들은 터키와의 국경 분쟁의 결과로, 수많은 그리이스인들이 무작정 고향으로 떠나야 했고 반대로 수많은 터키인들이 그리이스에서 돌아오게 되고, 근대의 디아스포라 사건으로 불리는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인종 청소 사태의 결과로 아르메니아 인들도 모두 베벡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빈 공간을 소위 부와 지성을 갖춘 터키의 상류층들이 속속들이 몰려들어 오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베벡은 그저 흔한........ 급작스레 유명세를 떨치는 핫 플레이스가 아니라........ 그렇게 역사적으로 커다란 영광과 아픔이 내재된 그런 곳이다.
비잔틴제국의 후반기에서 시작해 오스만제국의 중반부까지 이곳에 살던 베벡인들.
그리이스인. 유대인. 그리고 아르메니안인들로 이루어진 당시 시대의 엘리트들...........
그들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로......... 오스만의 입장에선 이방인이자 이교도들 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 의해서 '중세시대 암흑기 1천년의 세월'이 변화되는, 일대 시대적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베벡(Bebek)을..........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런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1452년 가을...... 그리고 어느날.
말을 탄 한무리의 아랍인들이 예기치 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듯 불시에 들이닥쳤다.
터번을 쓰고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하나 차림새의 값지고 화려함이나 소지하고 있는 각종 병장기를 볼 때, 이들 무리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패거리라고 볼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보였다.
그들이 말을 멈춰선 곳은 아시아 대륙의 한 끝자락이자 바다 건너 유럽대륙이 건너다 보이는 전망이 아주 빼어난 곳으로, 그리이스의 신탁에서 장님의 도시라 일컬어졌던 황금도시 칼케돈(현 카드쿄이)의 부둣가였다.
'콘스탄티노플이 그야말로 코 앞에 있구나. 지금 내가 바다 건너로 저들을 바라보고 있듯이 어쩌면 저들도 지금 내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지? 그렇지 않을까?'
'워낙 지척인지라, 갑자기 나타난 우리에게 경각심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폐하께서 이렇게 모든 절차를 생략하시면서 친히 나서셨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니야. 아닐것이야. 어찌되었 천년의 세월을 굿꿋하게 지켜온 왕국인 것이다. 숱한 영웅이나 무수한 왕조들이 하나같이 죄다 천년왕국을 꿈꾸었지. 하지만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조차도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말지 않았느냐? 천년 이상을 굳건히 버텨 온 비잔틴인 것이야. 쇠락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난공불락이고 현재의 왕은 그 누구보다도 용맹하고 슬기로운 통지자인 것이야. 아마도 저 건너 어딘가에서........ 내가 저들을 거너다 보듯이, 그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비잔틴의 허울을 쓰고는 있으나 저들은 분명 유럽의 꾹두각시인 변방의 라틴 왕조에 불과합니다. 쇠락해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변방의 일개 우두머리를 어찌 위대한 폐하에 배견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오로고스는 비잔틴의 그 어느 왕들 보다도 훌륭한 군주다. 이번 전쟁에서 누군든지 그를 마주치게 되거든 마치 나를 대하는것처럼 최고의 예의과 존경을 받치고 나에게 모시고 오도록 하라. 내가 친히 그를 접견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자 한다. 명심하여라. 비잔틴의 황제를 만나거든 나를 대하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라. 술탄으로서의 명령이다.'
자신을 에워 싼 무리를 찾찬히 둘러보면서 무리중에서도 가장 젊어보이는 청년이 그렇게 엄중하게 하명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유럽 전체를 공포에 떨게하고 하루 다르게 무섭게 솟아오르는 신흥 강국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 술탄이었다.
'2백 오십년 전, 파렴치한 인간 하나가 근본과 도리를 저버리고 친구이자 형제의 등에 칼을 꼽고 비겁한 방법으로 테오도시우스 성문을 잠시 열었던 적이 있었지. 그 이교도 놈은 지금 어찌되었다고?'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입니다. 유럽의 연합군을 데리고 네번째 침공을 감행했던 자입니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팔레스타인 침공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실제로 감행한 자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부를 약탈하여 베네치아로 가져가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을 저버렸고 친구이자 동료의 등에 칼을 꼽은 결과였는지라....... 약탈은 성공하였으나 정작, 자신의 고향 베네치아에서 마저 패륜아로 낙인찍혀 추방 아닌 추방을 당해 영원히 교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어찌되었든 비잔틴 제국이 그 단돌로에 의해서 멸망당한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국을 차지한 저들을 저들의 입맞대로 허수아비 라틴 국가를 세우고 역시 허수아비 왕을 옹립하였는데....... 일등 공신 단돌로는 내심 욕심은 있었으나 주변국의 따사로운 눈총에 의해서 끝내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본격적으로 비판과 힐난이 빗발치자........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끝내 객지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무덤 쓸 땅 쪼가리 하나 없는 신세가 되자........ 그래도 허수아비 정권일망정 라틴왕국이 나름 그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로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례를 치루어주었습니다. 지금 하기야 소피아 성당 2층에 무덤을 쓰고 잠들어 있습니다.'
'신의 성소를 더럽히고 동료의 등에 칼을 꼽은자가 아무리 이교도들의 망쪼가 든 나라일망정 신의 처소에 잠들어 있단 말이냐? 그것이 말이 되느냐? 그것이 이교도들 세계에선 신앙의 자비라더냐? 아니면 살아서의 치세가 하늘나라까지 이어진다는 말이냐? 저들에게는 신 앞의 두려움이나 신의 단죄나 속세의 정의라는 것이 아예 없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개나 짐승들과 다를것이 무엇이더냐? 아니되겠다. 비록 이교도이지만.......... 신의 지엄하심과 진노가 이교도일망정 그릇됨에는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하겠다. 기억해 두어라. 이번에 알라의 은총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다면........ 그자에게 신의 분노하심과 역사의 정의를 여실히 증명해 주도록 하라. 그것이 알라께서 말씀하시는 정의니라.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여라.'
'폐하의 명을 맏들겠습니다.'
술탄의 명은 지엄했다.
불과 반 년도 지나지 않아........ 어찌되었든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게 되었고, 이슬람 군사들에 의하여 하기야 소피아 성당 2층에 잠들어 있던 단돌로의 무덤은 파헤쳐졌다. 군사들은 남아있는 단돌로의 시신을 수습해서 길거리의 개들에게 내던져 주었다. 하짐난 어지된 일인지......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들도 단돌로의 뼈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후....... 성난 무슬림들에 의해서 단돌로의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하여지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텅 빈 무덤이 있을 뿐이다.
다만, 텅 빈 그의 무덤은 아직 하기야 소피아 성당 2층에 버젓이 남아있으며........ 영화 '천사와 악마' 편에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지금 이 자리가 그 엔리코 단돌로가 저기 저 바다건너 콘스탄티노플을 건너다 보면서 전쟁 계획을 세우던 자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이 자리가 베네치아 원정대가 병영으로 진을 치고 있던 자리입니다. 단돌로도 이곳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그 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조건 쳐들어 간다는 생각 뿐이었을 것입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굳건함이나 골든 혼의 쇠사슬이나 그리이스의 불을 염두에 두었을테니까요. 어쩌면 두려웠겠지만....... 차마 주변의 좋지않은 상황들을 떨쳐내지 못하고 죽지못해 싸울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지금의 나는?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신의 영광을 위해 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싶은데 말이다.'
'어찌 그런 비교를............ 폐하께서는 대 제국 오스만의 술탄이십니다."
'그럼 말해보라. 어떻게하면 저 바다를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알라의 영광 아래 정복할 수 있겠는가?'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감히........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참다 못한 메메트 2세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구나. 베네치아의 대신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게 불충은 아니었을 것이야. 왜냐면 단돌로 자신도 해결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겐 방법이 있거든.............'
'하명하시옵소소. 신들이 페하의 명을 끝까지 받들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끝까지 따를 자신이 있느냐?'
'조상과 자손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페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모든 영광을 알라께..............'
긴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술탄이 입을 열었다. 아주 짧고 단오한 어조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지금 즉시 나의 모든 군대를 무장시켜서 은밀하게 아나돌루 히사르(Anadolu Hisar)로 집결 시켜라. 오늘밤 우리는 저 바다를 건넌다. 이 모든것은 나의 선택이며, 우리는 반듯이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모두 알라께 받치고자 한다. 내가 앞장서서 저들의 땅에 가장 먼저 첫 발을 내딛을 것이다. 즉시 이행하라.'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예견된 전쟁이었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인간사의 전쟁이었지만........ 언제나 처럼.........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이었다.
인류 역사에 수없이 많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그리이스 신화에서 처럼......... 신이 직접 관여한 전쟁은........... 아무튼 없었다. 인간들의 오만과 탐욕으로 얼룩진 전쟁들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신이 직접 관여하는 전쟁은 없을 것이다.
그날 밤, 메메트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보스포러스 해를 건너기 시작했다.
지난 날,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가 그리이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건넜던 바로 그자리였다.(현 보스포러스 대교 자리)
유럽과 아시아의 실제거리가 약 700m에 불과한 거리로 마주하고 있는, 대신 골이 깊고 해류가 거친 이 바다를 다리우스는 거룻배들을 모아서 부교를 설치하고 건넜었지만....... 그리이스 원정에 실패한 페르시아 왕은 조각배를 타고 겨우 이 바다를 건너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패배는 곧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소리를 죽여가며 브스포러스 해를 건너는 뱃전에서 예견할 수 없는 적들의 대항에 긴장하면서도 메메트 2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리우스 처럼 살아서 쫓겨 도망쳐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는 않으리라. 반듯이 알라의 이름으로 이 전쟁을 승리하리라.'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이 건너다 보이는 아시아 지역 해변에 정벌을 위한 전초기기로 성채를 쌓았다. 그것이 바로 (아나돌루 히사르)였다. 전초기지이자 정별 연합군의 집결지였다.
700 미터 강 건너편에는 바로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라는 로마시대의 성채가 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까지 루멜리 히사르는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성채라기 보다는 등대의 역왈을 수행하며, 보스포러스 해를 오가는 선박들을 감시하고 세금 징수를 위한 관원들이 묶는 관리 숙소 형태였다.
그날 밤, 바다 건너 유럽지역엔 빛이라고는 루멜리 히사르의 등불만이 유일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이용해 오스만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진격을 개시한 것이다. 오랫동안 갈고 닦고 준비했던 오스만의 군대가 이제 본격적으로 첫 유럽의 영토에 발걸음을 내딪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었을까?
맨 앞장을 섰던 메메트 술탄이나 오스만의 군데에게 그 어떤 저항이나 전투가 생겨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혈입성이라고나 할까.
루멜리 히사르에 있던 등대 관리인들은 해변의 낌새가 이상하게 느껴지자 모두 앞다투어 도망쳤다.
메메트와 오스만이 걱정했던 비잔틴의 방어군이나 최정예병은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 비잔틴의 군대는 오스만의 군대가 반듯이 보스포러스 해를 건너와 침공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여 그들의 예상 침략 지점에 최선의 방어망을 구축했었다. 하지만 오스만 군대의 위용이 부풀려지고 확대되어 소문으로 번져나가자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도망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광범위한 방어벽이 사실상 통제하기조차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여 그는 외지로 전략상 벙어진지에 파견되어 있는 모든 군대를 콘스탄티노플 성 안으로 은밀하게 철수시켜 버렸다. 천년을 지켜 온 케오도시우스 성벽에 제국의 운명을 걸고 한바탕 전쟁을 불사해 보기로 결정했던 때문이다.
한편, 유럽의 영토에 처음으로 교두보를 확보한 메메트 2세의 마음은 다급하기만 했다. 언제 비잔틴군이 기습이나 역습을 감행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략상 진지로서의 확실한 교두보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루멜리 히사르' 였다.
최 측근의 핵심 장군들을 서로 경쟁시켜서 불과 4개월만에 굳건한 성채 '루멜리 히사르'를 재건했다. 실로 기적같은 일이었다.(실제 보면 기가찰 노릇이다)
그런데 곧 이 모든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이 된고 만다.
지금의 루멜리 히사를 돌아보면 전초기지로서의 성채 역활로는 굳건하다고 보기가 좀 그렇지않나 생각된다. 다만 전망이 대단히 빼어난 지역에 아름답게 지어졌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페리를 타고 보스포러스 바다 위에서 올려다보는 루멜리 히사르의 풍광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중요하게 서둘러 완공한 이 성채는 아무런 용도로도 쓰이질 못했다.
왜?
ps : 일부 주장들로는 단돌로의 무덤을 소피아 성당에 쓰게한 사람이 바로 메메트2세 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자의 입장에서, 소피아를 아꼈고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입장에서 이교도의 파렴치한을 술탄이 자신의 성소에 뭍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는 나의 생각에 준해서 위에서 처럼 써 본것이다.
< 지지난 여행때의 루멜리 히사르 사진. 이번엔 우천 관계로......>
'베벡(Bebek)'.
어딘지 모르게 운치가 느껴지는.......... 조금은 낭만이 느껴지는 그런 이름이 아닐까? 지난간 아픔은 저기 저 보스포러스 물결에 쓸려내려간.........
챠밍여사의 소망중에 (커피 숖)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세월이 좀 더 흘러서 우리가 모두 현장일을 계속하기에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게되면, 그때는 미련없이 물러나서 한적한 곳에 아담한 커피 숖 하나 열어보자는 소망이다. 하나뿐인 아들가족은 번듯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라 걱정할 일이 없겠고, 비바람 피해줄 집 하나 있으니........ 죽는 날까지 아둥바둥 일과 생활에 치어 살 이유는 없을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분위기는 그저 중년 노년의 사람들이 편히 쉬었다 갈만하면 되고, 가격은 무조건 현재 시중가격의 절반 정도면(베벡 벅스 요금 정도) 되겠고, 주변 풍경이 나름 정감있고 주자장이 있으면 좋겠다. 전제는 오로지 한가지...... '돈 벌 욕심 없이' 노년을 나름 의미있고 유익하게 보내고 싶어서 생각해낸 바람일 뿐.
운영은 오로지 챠밍여사의 몫이고.........
나는 커피 숖 분위기를 '여행 갤러리'로 꾸며서 수시로 엎그레이드를 해주기로....... 그리고 나서....... 한구석에서 노트북 펼쳐놓고 평생 버킷리스트 최우선인 (전업작가) 폼을 잡으면서 책을 썼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런 일이 자연스레 우리에게 펼쳐지고 다가오기를......... 챠밍여사 커피 숖의 이름은 내가 이미 정해 놓았다.
'베벡의 벅스처럼'.
아직 2020년 1월 정초, 우리가 지난 여행에서 돌아 온지 이제 20여일 지난 시점에서.........
어쩌면 그 유명한......... 베벡의 스타벅스 직원들은 우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동양인이라 헷갈릴래나?
왜냐면.......... ?
우리가 베벡의 스타벅스에서 엄청난 사고를 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ㅎㅎㅎ
ㅋㅋㅋ
사고의 발단은 텀블러(tumblur) 때문에 생겨난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함께 여행중인 조카의 지인이 세계 각지의 텀블러를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고 했다. 십분 무엇인가를 모의는 취미에 열정을 다받치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때 나도 책이랑 레코드 수집에 열정을 쏟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텀블러를 취미로 모으는 사람에게 '베벡의 스타벅스 텀블러'라.......... 가뜩이나 한국여행자들에게 워낙 유명한 명소 대접을 맏고있는 핫 플레이스다보니 베벡 스타벅스의 텀블러라면 참으로 값진 선물이 될꺼란 생각이 들었다.
진열장에 전시된 다양한 상품들을 요리조리 구경하다가, '베벡 스타벅스'라는 표시가 들어간 텀블러를 하나 고르게 되었다. 이거면 되었다 싶어서 구매하기로 결정을 하고 수북히 쌓여있는 포장된 텀블러를 색깔때문에 유심히 살피다가 진여장 안쪽에서 하나를 골라 집었다. 포장지의 구석에 가격을 표시한 작은 라벨이 붙어있는데 50TL(터키화폐 50리라, 우리 화페로 약 만원 정도)이라 적혀있다. 그보다는 한참 비쌀거라 생각했었는데(한국과 비교하여서)...... 가격마저 착한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상품을 골라들고 카운터로 가서 게산을 하려는데....... 바 코드를 찍어 본 직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면서 안절부절이다.
'뭐가 잘못되었나?'
자기들 말로 뭐라뭐라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내가 터키어를 어떻게 알아듣는 담? 직원은 정말로 사력을 다해 나에게 이해를 구하는 표정이고...... 옆에 선 동료직원이 역시 터키어로 열심히 부연 설명을 하면서 중간중간에 떠듬떠듬 영어를 섞어서 열변을 토하는데........ 아하! 그제야 어느정도 알아듣겠다.
문제의 텀블러가 불과 사나흘 전인 2019년 말까지는 개당 50TL에 판매가 되었었는데, 2020년(불과 나흘전부터) 들어서 개당 가격이 올라 60TL에 판매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여 모든 제품에 새 가격표를 붙여 놓았는데........ 세상에나...... 진열대 안쪽에서 무심코 하나 집어든 것이 글쎄......... 하필 가격표 교체를 빼먹은 희귀한 녀석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장황한 설명이었다. 가격 차이 10TL 이래 보았자 우리 화폐로 2천원 정도이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100리라 지폐를 내밀었다. 무슨 상황인지 다 이해하고있으니 걱정말라고........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열심히 설명을 했다.
포장해서 자리로 가져다 주겠다기에 그러라고 하고 테이블로 돌아와 남은 커피를 마시는데.........
얼씨구......... 직급이 조금 높은듯한 사람이 또 와서는 거듭 사과를 한다. (이런...... 이렇게 까지 안해도 되는데........)
조금 있다가 차림새가 써빙하는 직원과는 딴판이고 가슴에 명찰까지 달고있는 서른줄의 여성이 포장된 텀블러와 잔돈을 가지고 왔다. 여성은 자신이 스타벅스 베벡 매장의 최고 책임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방금전의 해프닝에 대해서 거듭 거듭 양해를 구한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또 건네온다.
'자신들의 실수로 고객에게 불편과 오해의 소지를 안겨주었다면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서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감사하다면서 커피든지 다과류든지 보답으로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매우 정중하게 그 호의에 거절 의사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보여주신 성의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충분하다고.........
그런 해프닝을 뒤로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 스타벅스를 나오면서 보니....... ㅎㅎㅎ. ㅋㅋㅋ. 헐.........
2층 뿐만이 아니라, 1층 매장은 물론........ 화장실 옆 물류 창고까지....... 보유중인 스타벅스의 모든 판매물품의 가격표시를 하나하나씩 전수조사를 하고 있었다.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그 풍경은.........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고객으로 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야 말겠다는 스타벅스 기업의 이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것 같아서 얼떨결에 벌어진 해프닝에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나름은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랍니다. 살다보면 그런일 이라는것이 어디 하나 둘 뿐이겠어요?'
오르타쿄이(Ortakoy)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신촌이나 홍대 앞쯤 된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리스인들과 유대인,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모여살던 아주 특별한 지역인 (베벡)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할 수도 있겠다. 베벡인들을 끌어내려다가 되지않자 오스만의 엘리트들을 직접 보내서 베벡인들에게 배우고 깨닫게 하기 위하여 술탄의 지시로 생겨난 매우 의미있고 특별한 장소가 이곳이다. 하여 고급 주택가와 대학들과 연구소들이 하나 둘 속수고 모여들고 지역을 확장해 나가 마침내 베벡까지 연결하게 되었다.
터키를 대표하는 대학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덕분에 젊은이들로 붐비는 로맨틱한 부둣가와 시대적 감성을 연출하는 갤러리나 클럽들과 바들이 가득하게 들어서 있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부둣가 진입로 주변으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주말이면 미술학도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주얼리들을 펼쳐 놓고 흥정을 벌이는 모습이 이채롭기까지 하다.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브런치를 전문으로하는 카페들이 늘어 서있고, 당연히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만큼 분위기도 맛도 뛰어나지만 그만큼 가격대 또한 보편 타당한 선의 이스탄불 물가와 비교하자면 상당히 비싼편이다. 그러다보니 젊은 데이트족들은 맛있고 간단한 길거리 음식을 주로 선호하는 편인데......... 적어도 오르타쿄이 왔다면....... 굼피르나 와플을 먹어보지 않고는 오르타쿄이를 제대로 다녀갔다고 할 수 없겠다.
굼피르는 다양한 민족의 특수성이 혼재된 이곳에서 시작된 매우 독특한 주점부리이자 충분한 한끼 식사가 되는 음식이다. 현재에는 이스탄불이나 여타의 다른 지역에서도 맛볼 수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굼피르는 원조인 오르타쿄이에서 맛보는 것이 최고라 하겠다.
거의 웬만한 호박 크기의 통감자를 오븐에 구워서 반을 딱 달라서는 속을 절반 이상 파 낸다. 남은 감자 위에 버터와 치즈를 베이스로 깔고....... 그 위에다 유리 진열장에 가지런히 놓인 다양한 토핑들을 얼마든지 골라 올려서 나중에 함께 섞어서 먹으면 된다. 샐러드나 피클, 건과류와 다양한 소시지 등이 있는데......
토핑을 잘 고르는것이 굼피르를 맛있게 먹는 최선의 방법이라 하겠다. 토핑을 잘 못 선택하게되면......... 그 엄청난 부피를 어찌 감당할런지가..........
오스만 터키 최고 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술탄은 특별하게도 이곳에 (베벡인)들의 신앙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도록 지시하였기에, 이곳에는 오스만 시대에도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나 동반 정교회의 교회들이 여럿 들어섰다. 한마디로 중세시대에 등장한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가 바로 ;여기 오르타쿄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술탄은 베벡인들과 이곳에 새롭게 터전을 연 오스만의 엘리트들을 위하여,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추앙받는 미마르 시난으로 하여금 이곳에 이슬람식 목욕탕인 하맘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곳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그 하맘이다.
그렇게 다양하고도 의미심장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오르타쿄이지만, 누가 뭐라해도 이곳의 랜드마크는 바로 (부육 메지디예 자미)라 하겠다. 흔히 현지인이나 여행자들은 쉽게 '오르타쿄이 자미'라 부른다.
드넒은 보스포러스 해를 바라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이슬람 사원은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로 아주 유명하다. 압뒬메지트 술탄의 지시로 건축가 니코스 발얀이 지었다. 보스포러스 교와 출렁이는 보스포러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오르타쿄이 자미의 풍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그야말로 압권이다.
아주 작은 사원인지라 그 내부 또한 아주 작은 편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형용키 어려울 정도로 낯선 이방인이자 이교도이며 그저 잠시 지나가는 여행자에게도 잠시나마 아주 평안한 위로와 뭇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을 안겨준다. 매우 독특한 경험이라 하겠다.
로마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서유럽의 중심에 위치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북부연안지역과 리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서 멀리 잉글랜드까지를 정복하고 다스렸다. 하지만 4세기에 로마는 둘로 나뉘었고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럽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던 서로마는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무심하게 사라졌다.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동로마는 그 이후로도 1천년 이상을 굳건하게 존립했던 것이다. 동로마는 사라진 서로마의 영역이었던 영토회복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동쪽의 소아시아 지역에도 세력을 넓혀 그 누구도 가져보지 못했던 대제국을 새로이 건설하였으며, 이 시기를 가리켜 동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보다는 우리에게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다가 왔다.
로마는 분명 지리적으로 볼 때도, 그리고 역사적 위상으로 볼 때도 분명 유럽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서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아니었다. 그곳은 변방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극단의 끝자락이었던 것이다. 그 지리적 역사적 위치의 콘스톤티노플을 놓고 '유럽세계의 중심'이라고 부른다면......... 웬지 무엇인가가 석연치 않고 합당하지 못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콘스탄티노플은 어딘지 모르게 '유럽의 중심'이라고 하면 맞지않는것 같으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것이 분명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다.
유럽의 중심이 아니면서도 세상의 중심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유럽은 결코 세상의 주류가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유럽이 여타의 다른 대륙이나 인종들에 비해서 특별할 것도 뛰어난것도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는 말이다. 수없이 오랜세월동안 '유럽이 세상의 중심'인 양 주지되어왔고 수긍해 왔던 이제까지의 그 모든 양태들이 모두 올바른것은 절대 아니었다는 말이다. 백인의 문화나 역사라 해서 특별히 가산점을 줄 이유가 특별히 없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과 생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다.
'이스탄불이 유럽일까? 아님 아시아일까?'
유럽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터키가 유럽 전도에 포함되어 있다.
터키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예선도 분명하게 유럽지역의 국가들과 경쟁을 치루고 있다.
하지만 터키는 (정치적 역사적인 문제로) EU(유럽연합)의 출발에서 부터 현재까지 회원국이 되지 못하고 있다.
대륙별 지리 부도를 펼쳐놓고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살피다 보면........ 그 누구도 터키를 유럽국가로 분류하지 않을것만 같다.
방대한 터키의 영토 중에서 이스탄불을 포함하여 유럽지역에 포함되는 면적은 고작 터키 영영의 3%에 불과하다. 수도 앙카라를 비롯해 97%의 절대다수 영역이 분명하게 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터키 영토의 아시아 지역 한복판에 대한민국 영토 크기의 약 8배나 되는 광활한 평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을 '아나톨리아 평원(Anatolia)' 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렇게 이름지어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그 의미는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다.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그리스 사람들 입장에서 수도 아테네에서 바라보자면 해가 뜨는 동쪽에 있는 땅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부터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인 '아나톨리아'를 후대에 라틴어로 번역하여 사용한 말이 바로 '오리엔트' 이다. 그러니까 아나톨리아가 다시 오리엔트로 번역되어 사용된 것이다. 이 '오리엔트'를 영어권에서 '서양'에 반대되는 개념인 '동양'의 의미로 해석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에 근거하여 살펴보아도........ 아나톨리아(터키)는 분명 동양 지역이라 하겠다.
혹, 유럽의 역사사관에서 볼 때. 유럽 영토의 지극히 까마득한 변방의 근원을 아시아에 둔 투르크라는 민족이 1천년 이상 유럽의 백인사회를 지배했다고 치자니 자존심 문제가 걸려서 저런 억지를 쓰는것은 아닐까? 하여 억지로라도 완전한 유럽에 뿌리를 둔 비잔틴이라 치장해 주면서도...... 현대의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다분히 아시아와 혼혈된 레벨이 한 두계급 아래의 열등 민족으로 폄하하려드는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3%의 유럽인종과 역사가 97%의 아시아계를 누루고 지배하고 있다'고 위안 삼고 싶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의 터키인(비잔틴 이후의 오스만 제국)들은 유럽의 상당부분 영토를 점령하고 오랫동안 지배했다. 당시 그들의 모든 영역(정치 의학 천문학 문학)에서 세상을 이끌었으며, 유럽의 개화와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엔 동양(오리엔트)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기원을 두고 이어내려와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유럽인들은 과거의 그런 사실들을 철저하게 외면하여왔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백인 우월주의'에 뿌리를 두게된 원인이 된다.
'르네상스 산책'을 이제 시작하고 있음에도........ 유럽의 그릇된 백인 의식과 사관에 대해서는 군데군데에서 분명하게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터키는 국민의 98% 정도가 이슬람교를 믿는 엄연한 회교 국가이다.
그들의 절대다수는 수니파 무슬림이다. 하지만 터키의 헌법 어디에도 이슬람교가 터키의 국교라는 조항은 없다. 그들의 역사와 생활과 전통 속에서 굳이 특정 종교를 법률에 명시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핏줄과 유전인자 속에서까지 철저하게 무슬림인 것이다.
터키의 역사적 정통성을 찾아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아득한 고대 시대에 우리나라의 백두산 이북에서 활동하던 흉노족을 자신들 민족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흉노족이 한나라와 진나라와의 대결에서 밀려 점차 남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현재의 아나톨리아 평원에 정착하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이나 고고학 입장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심지어는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주장을 펴고 있을만큼,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기마형 유목민족을 모두 터키인들의 조상이라는 다소 억지스런 주장을 모두 이해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극동 지방의 최북단에서 시작된 일개 부족국가 터키의 조상들은 언제부터 이슬람 종교를 접하게 되어 회교국가가 되었을까?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페르시아 제국은 소아시아 지역을 넘어 지중해 연안을 따라 그리스 영토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북아프리카 연안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하지만 그리스 원정에 거듭 실패를 했고, 신흥강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함으로써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제국이 분열을 거듭하자 새로운 왕조들이 재등장하면서 다시금 명맥일망정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를 이어나갔다.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왕조라 할 수 있는 사산 왕조가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에 의해서 멸망한 것이 서기 7세기경이었다.
이슬람의 기원을 (예언자 모하메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정적들의 위협을 피해 피난한 사건인 ‘헤지라’에 두고 있으며, 그 시기가 바로 서기 632년 이다. 하지만 모하메드는 미처 후계자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결국은 이 급작스러운 선지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슬람은 분열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 분쟁의 시기속에서 시작이나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모하메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우마르’는 수많은 정복전쟁을 성공함으로써 ‘위대한 정복자’라는 칭호와 더불어 초대 ‘칼리프’에 오른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슬람은 유럽의 중심이자 당시 세상의 중심이었던 비잔틴 제국과 첫 대면을 하게 된다.
이미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를 맛본 이슬람의 군사들이 파죽지세로 아르무크 강을 건너 진격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이슬람군의 파상공격에 비잔틴의 군사들은 허둥대다가 도망치기에 바빴고, 결과적으로 시리아를 내주고 말았다. 거기에다 비잔틴을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 정통파들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받고 있던 동방의 많은 정교회와 소국가들이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스스로 이슬람 군을 향하여 성문을 열었다. 교권(敎權)을 움켜 쥔 같은 기독교의 박해와 핍박이 어느 정도 신앙 활동의 자유와 관용을 베풀고 있는 이슬람만도 훨씬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기세를 타고 이슬람 군은 승리를 이어나갔다. 마침내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를 멸망시켰고, 비잔틴 제국의 최고 동쪽의 요충지였던 아르메니아를 합병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리 지역까지를 점령해 버렸다.
지중해에서 이슬람의 해군이 비잔틴 해군을 전멸시킨 것은 실로 엄청난 여파를 남기게 된다. 이제 비잔틴은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해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변방의 신흥 세력이었던 이슬람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성장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왜 수많은 기독교 국가와 사람들이 이교도인 이슬람에게 앞 다투어 스스로 투항하게 되었을까? 비잔틴의 통치자 집단과 비잔틴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이면에는 적지않게 '로마 카톨릭(바티칸)'이 실질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흔히 중세시대를 '암흑의 천년'이라고 역사학자들이 정의내리는 이유에는 로마 카톨릭의 전횡과 과욕과 파행과 타락으로 얼룩진 천년이었으며 그 핵심에 바로 교황이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보면 교회에서의 지위가 높으면 높은 사람일 수록 지옥의 가장 깊은곳에서 가장 극렬하고 참혹한 형벌을 받고 있는것으로 쓰여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범 종교계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처지는 신곡에 등장하는 성직자들과 처지가 달라졌을까? 글쎄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절대다수의 상당수가 속된 표현으로 중세의 종교계를 (개판)이라고 주제넘게 평가하다면....... 현재의 종교계 처지는 (개판만도 못한 쫑판)이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하지만 너무도 급격한 제국으로의 눈부신 성장에 과부하가 걸렸음일까?
서기 661년, 네 번째 칼리프 (알리)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로지 앞만 내다보며 정복전쟁에 몰두하느라 잠시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던 이슬람의 내부문제가 기어코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크게 보아서 이제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졌다. 이 분열에서 시작된 다툼과 피의 보복은 오늘날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던 정복전쟁은 잠시 주춤해졌고 피와 공포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점차 이슬람은 사분오열되어 나뉘어졌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지배한 우마이야 왕조시대(632~661)가 대표적 시작 사례라 할 수 있고, 이라크에 거점을 두고 중앙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회교 세력권을 보다 광범위하게 펼친 아바스 왕조(750~1258)가 독특하면서도 찬란한 업적을 역사에 새겼다. 그다음으로 셀주크 투르크에 이어서 등장한 오스만 튀르크(현재의 터키)가 중세시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논하지 않고서도 이슬람은 분명 그들만의 역사와 문화와 후세에 남겨준 책과 유물과 업적만으로도, 그 어떤 민족이나 문명이나 국가에 비해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하나도 없는 이상적인 선진 문명국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급격한 제국으로의 눈부신 성장에 과부하가 걸렸음일까?
서기 661년, 네 번째 칼리프 (알리)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오로지 앞만 내다보며 정복전쟁에 몰두하느라 잠시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던 이슬람의 내부문제가 기어코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크게 보아서 이제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졌다. 이 분열에서 시작된 다툼과 피의 보복은 오늘날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던 정복전쟁은 잠시 주춤해졌고 피와 공포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점차 이슬람은 사분오열되어 나뉘어졌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지배한 우마이야 왕조시대(632~661)가 대표적 시작 사례라 할 수 있고, 이라크에 거점을 두고 중앙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회교 세력권을 보다 광범위하게 펼친 아바스 왕조(750~1258)가 독특하면서도 찬란한 업적을 역사에 새겼다. 그다음으로 셀주크 투르크에 이어서 등장한 오스만 튀르크(현재의 터키)가 중세시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논하지 않고서도 이슬람은 분명 그들만의 역사와 문화와 후세에 남겨준 책과 유물과 업적만으로도, 그 어떤 민족이나 문명이나 국가에 비해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하나도 없는 이상적인 선진 문명국이었다. 12세기 전후의 이슬람을 현재의 선진국에 비유한다면...... 유럽은 개발도상국에 이제 막 눈을 뜨는 정도의 후진국이었다. 유럽의 백인주의자들은 바로 이 시기에 대해 트라우마를 심각하게 가지고 있는것으로 보여진다.
유럽에 훨씬 앞선 선진문명국 이슬람의 역사적 사료 중에서도 유독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아바스 왕조 시대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그 기록들 중에서 깨닫게 된 일련의 작은 사건들이 결국은........ 중세 유럽에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최종적 결론이다.
이번 유럽 여행을 시작하면서 챠밍여사에게 ‘르네상스 산책을 시켜주고 싶어’라고 제의 했었고, 그 시작으로 여기 터키 이스탄불을 찾아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르네상스는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 콘스탄티노플의 베벡 사람들에 의해서 처음 그 씨앗이 뿌려졌다.> --- 피안재의 생각과 주장.
문제는 날씨였다.
오르타쿄이에 머무는 시간에도 세찬 빗줄기가 잠시 쏟아붓다가 또 어느샌가 멈추기를 수시로 반복하고........ 세찬 바람은 완전한 겨울바람이다.
결국 (루멜리 히사르)는 일단 포기하기로 한 마당이었고, 오르타쿄이에서 돌마바흐체 궁전까지는 해변을 따라 걸어 볼 생각이었는데 그 마저도 포기해야만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탁심광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남은 오늘의 여행을 좀 간략하고 편리한쪽으로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탁심 광장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한여름 소낙비 같이 세차게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탁심광장(Tasim Maydan)은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는 터키인들의 주체성과 자부심에 아주 인연이 깊은 장소이다. 크고 작은 국가차원의 행사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열린다. 비록 정치와 행정이 대부분 내륙의 수도 앙카라로 옮겨갔지만, 현지인들에게 있어서 탁심광장은 여전히 터키라는 국가의 중심인 것이다.
탁심이란 말은 본래 '분배'를 뜻하는데, 이곳이 본래 이스탄불의 모든 지역에 수돗물을 분배하던 배수장이 위치해 있던 자리로 그 지리적 이유로 붙여진 지명이다. 광장의 한복판에 있는 공화국 기념비에는 터키 공화국의 탄생에 헌신한 아타튀르크와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조각되어 있다. 북쪽면은 군 지휘자로서의 아타튀르크가, 그리고 남쪽면에는 정치가이자 대통령으로서의 아타튀르크가 새겨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터키 제국은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느닷없이 독일을 지지하는 역사적인 오판을 하게된다.(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또 한번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게 되지만) 결과는 패전국으로 당시 승리자인 강대국들의 불합리한 전리품 나눠먹기 식의 종전 처리의 결과로 이즈미르를 비롯한 이오니아 지방의 영토를 숙적인 그리스에게 내어주게되는 수모와 참혹한 댓가를 치른다.
하지만 이같이 혹독한 시련속에도 터키에는 바로 '그'가 있었다.
파렴치한 강대국들의 처사에 격분한 '케말 파샤'는 청년장교단을 이끌고 분연히 일어나 쿠데타를 감행한다. 이들 젊은 신군부는 오스만터키 왕정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터키공화국을 선포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숙적 그리스를 쳐들어가서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아 터키에 다시 안겨주었다.
열화와 같은 전 국민의 절대적 지지와 성원속에 마침내 케말 파샤는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자 뜨거운 전국민의 성원으로 그에게 '아타튀르크(國父)'라는 칭호를 헌정하기에 이른다. 1938년 11월 10일에 사망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국부'이자 '호국 영웅'으로 가슴속 깊은곳에 새겨져 있다.
하여 터키 여행을 하고자 함에 있어서는 3가지 가장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 저들의 신앙인 이슬람의 '알라'에 대해서 일절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말이나 행위를 금해야 한다.
둘째. 터키인들은 특히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사방에 내걸려있는 터키 국기에 대해서 태극기를 대하듯 존중할 필요가 있다. 절대 훼손 금지.
셋째. 여하한 이유나 상황을 불문하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폄하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아타튀르크가 곧 터키이며 또한 저들의 자존심 전부이다.
비나 눈이 와도 대부분 우리는 그대로 걸어서 여행을 강행하는 편이다.
아주 세찬 비 정도면 잠시 어디 커피 숖에서 비를 피하면서 커피를 마시던가, 때가 되었을 땐 그 시간을 이용해 식사타임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비를 대비한한 우산이나 우비를 준비하거나 가지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 숙소에 놓고 나온 배낭의 맨 아랫부분에 들어있는 비닐 우비가 근 10년도 넘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챠밍여사는 비는 개의치 않아도 뜨거운 햇쌀은 걱정하는 편이라 겨우 손바닥만한 양산 하나는 늘 휴대하고 다닌다.
탁심광장에 당도하자마자 소낙비는 쏟아지고 앙증맞은 양산 하나조차도 세찬 바람때문에 무용지물이다. 여기저기 우산들이 뒤집어지고 난리다.
어쩌겠어?
그냥 빗속을.......... 낭만 가득한 코리아의 선남선녀 같은 태리할메 할아부지의 오기와 끈기로 태연한 척 계속 걸어서 아스틱랄 거리를 향 할 밖에........
아이고야............ 빨간 미니 트램을 태워주려고 했더니만........ 비 때문에 어찌나 만원이던지 신발 한짝 꾸서서 넣을 자리도 없어보인다.
여적 이런적이 없었는데......... 날씨가 날 배반해?
19세기 '페라대로(Grand Rue de Pera)'를 따라 약1.5KM 구간을 오가는 빨간 노면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곳은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이스탄불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의미이자 곧 이스탄불이라는 역사적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 페라대로를 따라 현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현대식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이곳을 찾아드는 자동차의 수효가 점차 증가하자 1961년 급속한 시대변천에 밀려 노면전차는 사라지고 말았다. 아스틱랄 거리는 그후로도 급속도로 초현대식 도시로 거듭났다. 이는 곧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교통대란과 소음공해와 쓰레기 문제로 이어졌다. 이스탄불 당국은 이 해결책으로 페라대로를 '이스틱랄 카데시(Istiklal Caddesi)란 보행자 전용도로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다시 과거의 역사를 떠올려 빨간 노면저차를 다시 증장시켰던 것이다.
트램이 다니는 이 직선도로를 따라 사방으로 새끼를 치듯이 뻗어나간 골목골목마다 각기 개성과 특색이 차고넘치는 새로운 상권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그얌말로 터키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핫 플레이스가 되다보니 이 굿은 날씨 속에서도 어찌나 오가는 행인들이 넘쳐나는지.........
'도대체 이 날씨에 어디서 모를 하려고 이렇게 쏟아져 나온거지? 여행자들인거여? 현지인들인거여? 많다......... 정말 넘쳐난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매장들이 대로변을 길게 늘어서 듯 차지하고......... 근데 더 놀라운 것은.......... 같은 브랜드의 매장이 같은 지역에 또 있다. 한 브랜드만이 아니다. 어떤 명품 매장은 여기 이스틱랄 거리에만 3개나 되는 매장이 들어서 있다. 뭐여 이건?
특색있고 멋진 카페나 바들이 즐비하고 밤이면 빌딩 루프탑에 들어선 클럽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스틱랄 거리는 낮과 밥의 풍경이 전혀 다르고......... 밤문화가 훨씬 더 화려하다고 들었는데......... 에고..... 에고....... 생물학적 한계치가 이미 무심하게 나이를 먹을만치 먹었을께로......... 깨.몽.
이스틱랄 거리를 따라 들어선 니샨타쉬 쇼핑가는 물론 북동쪽의 함부르게 거리가 독일풍의 분위기로 유명하고, 여기에 견주어 프랑스 골목도 결코 뒤지지않는다고 들었었다. 우리나라 인사동을 연상시키는 추클주마는 내가 즐겨 찾는 동네이고 터키식 선술집이 빼곡한 네비자데 골목 또한 이스탄불에 오면 꼭 한번 들러야만 하는 명소이다.
그런 명소들을 챠밍여사에게 찬찬히 모두 보여주고 싶어서 계획하고 찾아 온 이스틱랄 거리인데..........
당장은 그 어떤것도 여의치가 못하다.
어쩐다..........
'그래. 이대로 오늘을 마치기엔 너무나 억울하잖아? 하나라도 건지자. 그래. 그래서 선택했어.'
'오늘은 갈라타 타워까지......... ㅎㅎㅎ. ㅋㅋㅋ. 날씨야. 너 미쳤니? 나에게 왜그래?'
결론은 비를 쫄쫄 맞으면서 한참에 한참을 기다려서........ 결국엔 기어코 타워에 오르긴 올랐다.
'갈라타 탑(Galata Kulesi)'은 서기 528년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시르케지 지역이나 올드타운에서 건너다 볼때 금각만(공든 혼) 뒤로 유럽 지역의 또 다른 언덕 위에 중세풍의 원뿔형 뾰족한 지붕이 있는 길쭉한 탑이 바로 갈라타 타워이다.
오늘날 이 타워는 비잔틴의 유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탈리아 제노바 상단이 이스탄불에 유일하게 남겨놓은 유물로 여겨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 일대를 갈라타 라고 부르는 이유는 켈트족의 일파인 갈라타 부족인 기원전 3세기에서부터 약 600년간 이 일대를 주무대로 삼아 실제로 생활을 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비잔틴의 1천년 역사중에서 지중해 연안은 물로 발칸 지역이나 소아시아 지역에서 준동했던 수많은 민족이나 국가들 치고 비잔틴 제국을 탐내거나 실제로 침공해 보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코스탄티노플의 주위는 늘 군대의 주둔지이자 전쟁터였다.
1년 12달 질 좋은 빵을 무상으로 무제한 공급하고, 그 빵에 치즈와 캐비어를 얹어서 와인과 함께 늘 상 마시며 생활하는 비난틴은 한마디로 지상낙원이었다. 거기에다 수많은 금은보화에 동양으로 부터 들어오는 각종 향신료와 비단과 도자기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그들 무리속에는 아랍인들도 있었다.
마호메드 사후에 왕성하게 정복사업을 펼치던 이슬람이었으니 그들에게도 어찌 콘스탄티노플의 부귀와 번영이 탐이 나지 않았겠는가? 하여 기어코 이슬람 세력도 서기 715년에서 2년 정도를 이곳 갈라타 언덕에 진을 치고 이제나 저제나 콘스탄티노플 성문이 열리기를 고대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슬람의 바람은 끝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위용에 짖눌려 포기를 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원정을 시작하였을 때, 직간접으로 십자군에 참여한 베네치아 상단의 '엔리코 단돌로 도제'의 설득과 회유에 넘어간 십자군 지도부는 어처구니 없게도 같은 기독교 왕국인 콘스탄티노플로 칼을 뽑아들고 쳐들어 왔다.
성전(聖戰)은 어디에도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탈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넘쳐나는 재화를 약탈함으로써 그 약탈로 기울어져 가는 베네치아를 재건해 보겠다는 도제 단돌로의 그릇된고 허망된 욕심과 만행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얄굿은 운명은 그들에게 그릇된 승리를 안져주고 말았다.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 양민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미처 그 시체를 다 치우지 못해서 건물 안에다 수북하게 내던지고 그대로 불을 질러 버렸다.
성문과 성벽은 허물어졌고, 도시는 철저한 약탈 후에 대부분 불태워졌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가득 채웠던 보물들은 모조리 약탈 되었다. 상당부분의 약탈물들이 배에 실려 베네치아로 이송되었다.
약탈자들은 비록 지금은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다시금 콘스탄티노플이 가지게 될 무한한 잠재력과 여전히 동방으로 부터 들어오는 교역에서 생겨나는 부를 차지하기 위하여 허수아비 위성왕조를 만들어 내세워 비잔틴의 명맥을 그대로 이어나가게 해주기를 바랬다. 하여 그들은 비잔틴 제국의 역사 끝자락에 '라틴 왕국'이라는 자신들을 위한 허수아비 왕조를 만들어 냈다. 이 같은 모든 일을 기획한 엔리코 단돌로가 새로운 라티 왕조의 주인이 될 생각을 처음엔 했었지만, 이미 95세를 넘긴 고령임에다가 베네치아로 약탈해 간 자원의 관리와 효울적 이용을 위해서도 자신은 베네치아로 돌아가야만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여 새로운 꾹두각시를 찾아서 허수아비 왕조를 시작시켰다. 하지만........ 희대의 협잡꾼 엔리코 단돌로는 그토록 눈부신 승리와 어마어마한 약탈물을 베네치아에 안겨주었음에도 곧........ 베네치아에 의해서 버려진다. 팽 당했던 것이다. 그는 그후 여러곳을 떠돈다. 노년의 열망은 오로지 '고향 베네치아에 돌아가는것'이었지만, 끝내 베네치아 사람들은 만년의 단돌로를 거절한다.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고 결굴 버져진 채 사망했다.
그리고, 엔리코 단돌로에 의해서 세워진 괴뢰정권 '라틴왕국'도 불과 5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비잔틴 제국은 비록 베네치아 상단의 흉계와 몰염치한 십자군에 의해서 멸망했지만, 살아남은 귀족들과 일부 백성들은 달아나 니케아(현 이즈닉)와 흑해 지방의 폰토스를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라틴왕국은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재화는 모두 약탈되었고, 도시와 왕궁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기능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거기에다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는 동방과의 교역에서 생겨나는 이익은 그때그때 약탈자들이 계속해서 선수를 치듯이 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왕국은 결코 한 국가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허울뿐인 세금 지이수원 정도에 머물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동서교역로인 흑해 지역은 한 작은 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세금 징수를 거부한 사태가 생겨난 것이다.
이 사태가 혹시 주변을로 번져나가게 되는 것을 염려한 라틴 왕국에서는 서둘러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을 시작했다. 군대라야 애시당초 라틴왕국 스스로의 군대가 없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를 위해 파견되어 있는 베네치아 상단의 일부 군대가 전부였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왕실 수비군을 반란 진압군으로 급하게 파병을 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방어가 텅 비게 되었다.
1261년 7월 25일 새벽에 비잔틴 제국의 부흥군이 미하일 8세의 지휘하에 느닷없이 콘스탄티노플로 들이닥쳤다.
아주 손쉬운 승리였다. 이로써 57년 만에 비잔틴이 다시 부활하게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지중해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베네치아가 이 노른자위 콘스탄티노플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늘이 도와주어서 뜻하지 않게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기는 했지만, 절대 군사강국 베네치아를 상대로 벌여야 하는 수성전이 점차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통치자 미하일 8세는 베네치아의 최대 라이벌인 베노바 상단을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사자를 막으려니 당장 호랑이라도 불러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지중해와 보스포러스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동방무역의 최대 거점을 제노바 상단에게 위탁 양도함으로써 베네치아의 침공을 막기위해 마침내 제노바의 군대가 대거 콘스탄티노플로 몰려왔다. 미하일 8세는 무장한 적의 군대를 가가이 끌어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모험인지를 임 충분한 경험으로 하여 깨닫고 있었다. 하여 그는 몰려 온 제노바 군대를 성에 들이지 않고 금각만 건너 갈라타 지역에 병영을 설치하고 머물도록 했다.
이제 갈라타 일대는 제노바의 조차지가 되었다. 그들의 영토나 다름 엇었던 것이다.
제노바 군대는 갈라타 지역의 외곽으로 삥 둘러서 외벽(성벽)을 쌓았다. 그 외벽의 중간 중간에 방어용 감시탑이자 군사시설로 이미 수세기 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세웠던 탑(갈라타 타워)과 똑같은 모양의 탑을 여러개 세웠다. 탑 하나의 높이가 66.9M에다 벽 두께만도 3.75M에 이르는, 오늘날의 아파트 11층 높이에 이르는 대형 탑 여러개가 갈라타 언덕에 뾰죽뾰죽 솟아났던 것이다. 그들의 그 탑에 뾰족하고 둥근 지붕을 씌웠다.
성채 안으로 군대가 주둔하는 병영과 지도부 건물과 상인들의 사무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빼곡히 창고가 들어섰으며 창고마다 동방에서 들어 온 고귀한 물품들로 가득찼다. 갈라타는 이제 새로운 제노바의 왕국이었다. 그들은 점차 카라쿄이 지역을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무역사무소와 세관과 은행과 보험회사들이 이 일대를 가득 채웠다. 그런 시절이 거의 2백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엔리코 단돌로의 천인공로 할 만행의 댓가로 베네치아는 이곳에서 57년 동안 호사를 누렸다.
그런 베네치아의 만용 때문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거져 콘스탄티노플을 파지한 제노바는 이후 정말로 알차게 200년 동안 꿩도 먹고 알도 먹게되었다.
하지만, 1453년 메메트2세가 이끄는 이슬람의 정예군이 쳐들어 왔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들은 이곳 갈라타 타워 인근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자신들 방식의 전진 기지로 삼아 금각만 건너의 테오도시우스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였다. 적진을 관측하기 위하여 탑 하나(현 갈라타 타워)만을 남기고 머두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 남은 탑은 한때는 천문 관측소로 사용되다가, 기독교인들을 가두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후대에 소방탑으로 쓰여지다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다. 복원되어 지금의 유명 관광명소로 탈바꿈 된 것이다.
이스탄불 전경을 내려다 보는 최고의 뷰 포인트이자 낭만 넘치는 최고급 레스토랑을 가진 최고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은은하게 보랏빛 조명으로 빛나는 갈라타 타워는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속소에 도착했다.
잠시 뒤를 돌아보며 오늘 우리가 보냈던 시간과 장소를 생각해 보아도........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여전히 툭 툭 떨어지는 빗방울하며........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을 뿐인데 감기 조심해야지.
고마워 이스탄불.
알 럽 트래블.
--- 다음 이야기로 여행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요즘 장기 출장이 반복되다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