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관련된 토지는
궁극적으로 그린란드에서 가장 좋은 땅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결과로 발전햇다.
특히 동쪽 정착지에서는 3분 의 1가량이 교회와 관련된 땅이었다.
십일조를 대신한 물건들과 그밖의 수출품들은 가르다르를 통해 유럽으로 건네졌다.
따라서 지금도 성당의 남동쪽 귀퉁이에 허물어진 커다란 화물 창고를 볼 수 있다.
가르다르에는 그린란드에서 가장 큰 창고가 았었고,
다른 목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가축과 훙요로운 땅이 있었다는 점에서,
가르다르를 지배한 사람이 곧 그린란드의 지배자였다,
그런데 가르다르를 비롯해 그린란드의 교회 목장들이 교황청의 소유였는지,
아니면 그 교회가 세워진 땅 주인의 소유였는지 아지고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권한과 소유권이 주교에게 있었든 족장에게 있었든 간에
그린란드가 계급 사회였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에 투자하는 액수가 달랐던 만큼 교항청은 빈부의 격차를 인정했다.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린란드 사람들이 청동종의 수입을 줄이고 연장을 만들 수 잇는 철을 더 많이 수입했더라면,
이누이트족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수입햇더라면, ,
위기를 맞앗을 때 이누이트족의 고기와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을 수입했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유산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닥친 비극만을 두고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이외에, 그린란드 사람들은 유럽인이라는 정체성도 유지하려고 애썼다.
유럽의 청동 촛대, 유리 단추, 금반지 등을 수입한 것이 대표적 증거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유럽 풍습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스칸디나비아와 그린란드의 교히 묘지에서 발굴된 시신에서 확인되듯이 장례식이 한 예이다.
중세 노르웨이 사람들은 유아와 사산아를 교회의 동쪽 박공 근처에 매장했다.그린란드 사람들도 그랬다.
중세 초에 노르웨이 사람들은 관을 사용했고, 여자는 교회 묘지의 남쪽에, 남자는 북쪽에 묻었다.
그러나 중세 말에는 관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천으로 감싸거나 수의(壽衣)를 입혔고,
교회 묘지에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순서대로 묻었다. 그린란드 사람들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똑같이 바뀌었다.
중세 내내 유럽 대륙에서는 시신의 머리가 서쪽 , 발이 동쪽을 향하도록 똑바로 뉘였다.
그러나 두 팔의 자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1250년경에는 두 팔을 약간 굽혀서 골반 위에 올려놓앗고, 그 후에는 더 굽혀서 배 위에 올려놓앗으며,
끝으로 중세 말에는 완전히 접어서 가슴에 올려두었다.
그린란드의 공동묘지에서는 이런 팔의 변화까지 그대로 관찰된다.
그린란드의 교회 건축은 노르웨이 교회를 본땄고, 그 후의 변화까지 어김없이 모방했다.
긴 본당, 서쪽으 주 출입구, 동쪽 끝의 성단소(성가대와 사제가 앉는자리), 남쪽과 북쪽의 익랑(翼廊) 등
유럽의 성당 구조에 익숙한 관광객이라면 가르다르 성당의 옛터에서 그 모든 특징을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발세이 교회는 노르웨이의 에이드피오르 교회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그린란드 사람들이 같은 건축가를 데려왔거나, 설계도를 베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200년 과 1225년 사이에, 노르웨이 건축가들은 과거의 척도법('국제 로마식 피트법')을 버리고
더 짧은 그리스식 피트법을 택했다. 그린란드 건축가들도 이런 변화를 그대로 따랐다.
빗과 의복 등 사소한 것에서도 예외 없이 유럽 모델이 모방되었다.
노르웨이 빗은 1200년경까지 한쪽에만 빗살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이런 빗이 사라지고 양면에 살을 가진 빗으로 바뀌었다.
그린란드의 빗도 거의 같은 시기에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Walden』에서, 멀리 떨어진 땅의 패션 디자이너가 최근에 발표한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사람들은 "파리에서 왕 원숭이가 여행자 모자를 쓰면, 미국에서는 모든 원숭이가 따라한다"라고
빈정댔던 말이 떠오를 지경이다.).
그린란드가 붕괴되기 얼마 전이지만 헤르올프네스 교회 묘지의 영구 동토층에 묻힌 까닭에
완벽하게 보존 된 시신의 옷에서 그린란드 사람들의 의상에서도 유럽의 유행을 따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린란드의 추운 날씨를 감안한다면 세련된 유럽식 의상보다,
소매와 후두가 달린 이누이트의 모피 옷이 훨씬 어울렸을 텐데 말이다.
그린란드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유럽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여자는 허리가 좁고 목이 낮은 긴 가운을 입었고,
남자는 '우프랑드(houppelande, 길고 헐렁한 외투로서 벨트로 허리르 조였지만,
소매가 헐렁해서 바람이 스며들 수 있었다)라 불린
스포티한 외투와 앞을 단추로 여민 재킷을 입었고 원통형의 높은 모자를 썼다.
그린란드 사람들이 유럽의 패션을을 예의 주시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따라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모방에는 "우리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누구도 우리를 이누이트족과 동일시하는 것은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무의식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내가 1960년대 처음 방문했던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보다 더 영국처럼 보였듯이,
유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린란드도 감정적으로 유럽에 속해 있었다.
그 감정의 끈이 양면의 머리빗이나 시신의 팔 위치로만 표현되었다면 애교로 보아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인이다"라는 집착은
그린란드의 기후에서도 고집스레 소를 키웠고,
건초를 수확해야 할 여름에 사람들을 노르드르세타 사냥터로 보냈으며,
이누이트족의 유용한 처세법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결국 굶어죽는 비극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그린란드 사람들에게 닥친 곤경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헤아리기란 힘들다.
그러나 그들이 생물학적 생존만큼 사회적 생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교회에 투자하는 시간과 자원을 줄였을 것이고, 이누이트족을 모방하거나 그들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붕괴라는 비극을 맞지 않고 지금도 이 땅에서 겨울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유럽 기독교 문화에 대한 그린난드 사람들의 집착은
앞에서 언급한 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도 관계가 있었을 지 모른다.
요컨대 유럽인보다 더 유럽인처럼 처신한 까닭에 ,
그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생활 방식의 파격적인 변화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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