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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권
1)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는 결과적 상태로서 드러난 유위제법(즉 苦諦)의 보편적 특성(즉 共相)으로,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이나 『구사론』『현종론』 등에서는 모두 무상을 비상(非常)으로, 무아를 비아(非我)로 전하고 있다.
2)
3의관은 온ㆍ처ㆍ계의 뜻을 관찰하는 것이다. 7처선이란 색 등의 5온은 고(苦)이고, 집ㆍ멸ㆍ도ㆍ애미(愛味)ㆍ과환(過患)ㆍ출리(出離)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앞의 네 가지는 4제를 관찰하는 것이며, 뒤의 세 가지는 색의 집ㆍ고ㆍ멸제를 거듭하여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3의관과 7처선은 별상념주(즉 4념주)를 관찰하고 나서 총상념주의 가행으로서 닦아야 한다.
3)
16행상이란 고제의 진리성인 무상ㆍ고ㆍ공ㆍ무아, 집제의 진리성인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멸제의 진리성인 멸(滅)ㆍ정(淨)ㆍ묘(妙)ㆍ리(離), 도제의 진리성인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 본권 ‘4선근’에서 상론한다.
4)
16행상에 대한 이해는 갖지만, 결정적(확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정적인 ‘혜’는 4제를 현관하는 견도에서 생겨난다.
5)
이상의 부정관과 지식념, 4념주, 그리고 총상념주를 3현위(賢位, 현자의 세단계), 또는 외범위(外凡位, 깨달음 밖의 단계), 또는 순해탈분(順解脫分,해탈에 수순하는 단계)라고 하는데, 이 같은 과정을 『대비바사론』 제188권(한글대장경125,p.290-1)에 의거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정관ㆍ지식념(염주의 가행)--자상(또는 別相,즉 不雜緣)념주 중의 신ㆍ수ㆍ심ㆍ법념주--잡연(雜緣)의 법념주--3의관(義觀)ㆍ7처선(處善)--총상념주의 가행(즉 고ㆍ집ㆍ도제의 4상을 반연하는 문소성의 신념주--이와 무간에 3제의 각 4상을 반연하는 문소성의 수념주와 심념주--이와 무간에 4제의 4상을 반연하는 문소성의 법념주--이와 무간의 문소성과 동일한 형식의 사소성의 신ㆍ수ㆍ심ㆍ법념주)--고제의 4상을 반연하는 수소성의 법념주(總緣 共相의 법념주). 이 같은 법념주의 상상품에서 마침내 순결택분(順決擇分)으로 일컬어지는 4선근(善根)의 첫 번째 단계인 난위(煖位)로 들어가게 된다.
6)
유위 제법의 공상(共相, 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을 반연하는 법념주(즉 총상념주)를 수습함에 있어 처음의 하하품으로부터 점차 상상품으로 승진하여 관지(觀智)가 차례로 성숙하면, 그러한 상상품 염주의 다음 찰나에 순결택분의 첫 번째 단계인 ‘난법(uṣmagata)’이라는 선근이 생겨난다. 이는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킬 때 먼저 따뜻함이 생겨나듯이 성도의 불길이 일어나기 전의 따뜻한 상태이기 때문에 ‘난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후술)
7)
5취온 등의 현행의 결과[苦果, 즉 고제]는 인연 생기하였으므로 무상한 것(anitya)이며, 본질상 변괴 핍박하는 것이므로 괴로운 것[苦, duḥkha]이며, 실체성이 없는 것이므로 공(śūnyatā)이며,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아(anātmaka)이다.
8)
5취온 등의 현행의 원인(苦因, 즉 집제)은 언젠가는 발아할 씨앗처럼 당래 고과(苦果)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인(hetu, cause)’이며, 번뇌와 업이 동등하게 결합하여 고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집(samudaya, arising)’이며, 씨앗에서 싹ㆍ줄기 등이 연속하여 생겨나듯이 끊임없이 3유의 과보를 상속하여 낳기 때문에 ‘생(prabhava, successive appearance)’이며, 진흙ㆍ물ㆍ막대ㆍ물레 등의 조건이 화합하여 항아리가 생기하듯이 고과의 두드러진 조건이 되기 때문에 ‘연(pratyaya, efficient condition)’이다.
9)
5취온 등의 소멸(즉 멸제)은 일체의 온갖 유루온의 상속이 다한 것이므로 ‘멸(nirodha, extinction)’이며, 탐ㆍ진ㆍ치의 3재(災)가 종식된 것이므로 ‘정(śānta, calm)’이며, 어떠한 괴로움(혹은 內憂)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묘(praṇīta, excellant)’이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혹은 外患)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리(niḥsaraṇa, salvation)’이다.
10)
5취온 등의 소멸을 획득하는 번뇌대치의 성도(즉 도제)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므로 ‘도(mārga, path)’이며, 정리(正理)에 계합하는 것이므로 ‘여(nyāya, truth)’이며, 올바른 열반의 획득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행(pratipatti, obtaining)’이며, 현행의 고과를 영원히 초출(超出)하는 결정적인 방법이므로 ‘출(nairyāṇika, difinitive release)’이다.
11)
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名義)’ 참조. 참고로 여기서는 고제의 4상을 비상(非常)ㆍ고ㆍ공ㆍ비아(非我)로 전하고 있다.
12)
원문은 ‘以起彼時, 蘊相多故.’이지만, 『현종론』(제30권)에 따라 ‘蘊相’을 ‘蘊想’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3)
정법(mūrdhan) 또한 난법과 마찬가지로 4제의 16행상을 닦는 단계이지만, 난법보다 더욱 뛰어나기 때문에 특별히 ‘정법’이라고 이름하였다.
14)
‘움직일 수 있는 것’, 즉 동선근(動善根)이란 난(煖)ㆍ정(頂)의 두 상태로서, 이러한 상태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즉 동선근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정’이다. 그리고 ‘움직일 수 없는 것’ 즉 부동선근(不動善根)은 다음에 설할 인법(忍法)과 세제일법(世第一法)으로, 이 두 가지 상태에 이르면 상위(上位)로 승진할 뿐 뒤로 물러나는 일은 없다.
15)
“동선근(動善根) 중에서 이 법이 가장 뛰어나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기 때문에 ‘정법’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혹은 이것은 [더 높은 산으로] 나아가거나 [하위로] 물러나는 것이 산의 정상과 같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정’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구사론』 제23권, 고려장27,p.622상; 대정장29,p.119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40)
16)
‘인(kṣānti)’이란 4제의 이치를 인가(認可) 자증(自證)하는 것으로, 이는 난법에 비해 그 강도가 강할 뿐더러, 다음의 세제일법 역시 뛰어난 인가이지만 그것이 고제에 국한되는 것임에 반해 이것은 4제 전체에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4제 이치의 인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17)
이에 반해 난ㆍ정법은 처음에는 법념주에서 출발하지만 증진위에 이르러 4념주가 현전하게 된다.(전술)
18)
앞에서 설한 난ㆍ정법 역시 두말할 것도 없이 욕ㆍ상계의 4제 16행상(즉 32행상)을 반연한다는 뜻이다.
19)
이는 문장 상으로는 간단하지만, 그 뜻은 매우 복잡하여 고래로 감연감행(減緣減行)의 금두(金兜)라고 하여 유부 법상 상의 가장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여기서 ‘소연’이란 욕계와 상 2계의 4제소단법 여덟 가지를 말하고, 행상이란 그러한 여덟 가지 소연 각각의 4행상 즉 32행상을 말하는데, 이러한 32행상으로써 상ㆍ하 8제를 관찰함에 있어 점차 줄여 관찰하는 단계를 ‘감연감행’의 중인(中忍)의 수행이라고 한다. 먼저 욕계 고제의 4상을 관찰하고, 상2계 고제의 4상을 관찰하며, 나아가 욕계 도제의 4상을 관찰하고, 상2계의 도제에 있어 마지막 ‘출(出)’ 행상을 줄여 관찰하는 것을 제1회[周]의 감행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제4회의 감행(상계의 도제 4상을 줄여서 관찰하는 것)에 이르게 되면 1소연을 줄여(즉 ‘감연’) 관찰한다. 이리하여 욕계 도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3회 감행하고 제4회 째 감연하며, 계속하여 마침내 31회에 이르러 남은 욕계 고제의 ‘무상’의 행상을 심려(審慮)와 결정(決定)의 두 마음(고법지인과 고법지의 상태와 같은 경우임)으로 관찰할 때를 중인이 원만하게 성취된 상태라고 한다.
20)
세제일법(laukikāgradharma)은 무간에 견도의 무루지를 인기하는 유루지로서, 그같은 무루지의 동류인이 아니기 때문에 ‘동류인을 떠난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무루지는 세제일법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사용의 힘으로써’라고 말한 것이다.
21)
즉 유여사(有餘師)는, 그것을 성취하면 선근을 끊을 리가 없는, 선정과 상응하는 염주 등을 세제일법이라고 하였지만, 제바달다(天授)는 비록 신경통 등의 수승한 공덕을 획득하였지만 선근을 끊고 무간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여기서 신경통(神境智證通의 줄임말)이란, 말하자면 뛰어난 선정[神]에 의해 경계의 변화[境]를 도모하는 신통이다.(본론 제76권 ‘6통’ 참조)
22)
세제일법위에서는 선근을 끊지 않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하였다면 세간의 이욕도도 ‘제일’이라고 해야 하며, 세간의 이욕도의 경우 물러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제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에 의하는 한 세제일법위에서도 물러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제일’이 아니라고 해야 하며, ‘제일’이 아니라면 선근을 끊을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인가?
23)
즉 어떤 이는 “선정에 머물면서 4제를 관찰하는 유루의 법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이름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럴 경우 이미 세간을 떠나 견도에 든 이가 선정에 머물면서 세속지로써 4제를 관찰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세간의 ‘제일법’이라고 해야 한다. 물론 세제일법은 견도(正性離生)에 드는 마지막 방편으로서 이생(異生)의 법이지만, ‘선정에 머물면서 4제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라는 논거가 동일함에도 제한을 두어 이생의 경우는 ‘제일법’이고, 성자의 경우는 ‘제일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다.
24)
나무는 제일 끝부분 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제일 뛰어난 이보다 더 뛰어난 이가 없는 것처럼, 세간에서 세제일법보다 더 높은 후변(끝)은 없으며, 더 뛰어난 법이 없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25)
세제일법이 고법지인에 대해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생겨나는 순간과 후법에 대해 연이 되는 순간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세제일법이 다 찰나에 걸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라는 뜻이다.
26)
이상 어떤 이의 첫 번째 힐난(일찍이 이같이 설한 적이 없기 때문에) 비판. 여기서 인용한 주장은 앞서 (1)항에서 비판된 유여사(有餘師)의 설(즉 “선정과 상응하는 염주 등의 차별[적인 상태]를 세제일법이라 이름한다”)로서, 결국 앞의 유여사와 여기서의 어떤 이는 동일한 그룹의 이사(異師)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의 주장 역시 성교에서 설한 적이 없음에도, “능히 고법지인의 등무간연이 되기 때문에 일 찰나를 설정하여 세제일법이라 이름하였다”는 유부의 종의를 성교에서 설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힐난은 자기모순이라는 뜻이다.
27)
이상 어떤 이의 두 번째 힐난(차별하여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비판.
28)
예컨대 유루법과 무루법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후술)
29)
여기서 ‘개피’란, 서로 상위하는 제법의 경우 어떤 한 법이 생겨나려면 다른 법이 그것의 생기를 열어주기 위해 피하는 것(다시 말해 과거로 落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생기의 조건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본론 제19권 ‘등무간연’(특히 주9)를 참조할 것.
30)
이상 어떤 이의 세 번째 힐난(異類에 대해 연이 되는 과실을 성취하기 때문에) 비판.
31)
주25) 참조.
32)
이상 어떤 이의 네 번째 힐난(일 찰나라면 [등무간연이 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비판.
33)
다시 말해 견도에 든 성자는 그것의 가행도인 4선근을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득’을 4선근과 그 조반(助伴)이 되는 법의 본질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34)
원문은 ‘有說, 此二俱非過失, 得雖煖等攝, 如異生性故.’ 여기서 ‘이 두 가지’란 앞서 논설한 유부와 유여사가 주장하였던 “4선근은 성자에게 거듭하여 획득되지 않는다”와 “획득될지라도 이생의 법에 근거하여 현행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
35)
이생성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 ‘비득(非得)의 제문분별’ 참조.
36)
일찍이 가행위(加行位)에서 난법 등과 함께 생겨나 상속하여 성자의 소의신 중에 성취된 ‘득’을 난법 등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 왜냐하면 그것은 성자의 소의신 중에 난법 등을 성취하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현행(現行)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후술)
37)
승과도란 향도(向道)를 말하는 것으로, 선행된 과도(果道) 보다 뛰어난 도라는 뜻이다. 예컨대 불환향의 도는 앞의 일래과의 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승과도이다.
38)
다시 말해 “난위 등의 세 단계는 상속하는 것임에도 ‘득’은 그것의 본질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이다.
39)
“이를테면 색계 계속(繫屬)되는 선근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하하품과 하중품과 하상품을 난법이라 이름하며, 중하품과 중중품과 중상품을 정법이라 이름하며, 상하품과 상중품을 인법이라 이름하며, 상상품을 세제일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전술한 ‘세제일법의 명의에 대한 이설 비판’ 참조)
40)
원문은 ‘後得非, 故前亦應非.’ 세제일법의 본질에 이와 구생하는 ‘득’이 포함될지라도 이는 다음 찰나(견도 첫 찰나)인 고법지인(苦法智忍)의 ‘득’으로 상속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41)
이는 본송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4선근의 행수(行修)와 득수(得修)를 밝힌 것으로, 여기서 ‘행수’란 현재 실제로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하며, ‘득수’란 그러한 현재의 수행력에 의해 획득하게 되는 미래의 수습[未來修]을 말한다. 먼저 3제를 반연하여 현재 닦는 법념주의 수행력은 미래 4념주를 인발하는 힘으로 장양되기 때문에 미래의 득수는 4념주 전체에 미치게 된다. 또한 현재 닦는 한 행상에 의해 미래 4행상만을 득수할 뿐 16행상 전체에 미치지 않는 까닭은, 이 단계에서 처음으로 4제를 관찰하였으므로 관지(觀智)가 아직 약해 동분(自界 自諦의 행상) 이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42)
“이러한 종성(種性)은 일찍이 아직 획득된 일이 없었으므로 요컨대 동분(同分)이 되는 것만을 비로소 능히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3권, 고려장27,p.622중; 대정장29,p.119하; 권오민 역,p.1043)
43)
“이러한 종성은 앞서 일찍이 획득한 일이 있었으므로 동분이 되지 않는 것도 역시 능히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구사론』, 앞의 책)
44)
주19) 참조.
45)
이는 『구사론』 제23권(고려장27,p.622하; 대정장29,p.120상; 권오민 역,p.1044) 상에서의 정설이다. “더 이상 이분(異分)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견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46)
‘세제일법의 명의에 대한 이설 비판’:주39) 참조.
47)
혹 ‘원(遠)’은 ‘근(近)’의 오사(誤寫)가 아닐까? 4선근은 결택분(즉 견도)의 가장 직접적인 방편이다. 『구사론』(제23권, 고려장27,p.623상; 대정장29,p.120상; 권오민 역,p.1046)에서는 다만 “오로지 등인지(等引地, 선정의 단계)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고 논설하고 있다.
48)
견도는 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견도의 권속(가행)인 4선근 역시 그것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즉 무색계의 정심(定心)은 일찍이 욕계의 고제를 두루 알았고 집제를 끊었기 때문에 욕계법을 반연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색계에는 견도가 없고, 견도가 없기 때문에 4선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49)
원문은 ‘--不能牽引衆同分故, 極厭諸有欣圓寂故.’이지만, 『구사론』(제23권, 고려장27,p.623중)의 논설(不能牽引, 憎背有故)에 따라 ‘--衆同分故’의 ‘故’를 빼고 번역하였다. 즉 4선근도 일종의 성도로서 온갖 존재(욕ㆍ색ㆍ무색유)를 매우 싫어하고 원적(圓寂, 열반)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색계의 5온의 이숙을 초래하는 데 보조적인 원인은 될지라도 그것의 중동분(衆同分)을 견인하는 실제적인 원인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50)
『대비바사론』 제188권(대정장27,P.994하). 그에 의하면 난ㆍ정법은 욕계에 존재하며, 인ㆍ세제일법은 색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난ㆍ정법은 문ㆍ사소성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유부의 정의(正義)가 아니다.
51)
다시 말해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 수 없기 때문에 4선근을 일으킬 수 없다.(『대비바사론』 제7권,대정장27,p.33하)
52)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뛰어난 소의신과 뛰어난 염리(厭離) 등의 작의(作意)가 존재하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서, 악취에는 전자를, 천취에는 후자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 제7권, 앞의 책,p.33중; 한글대장경118,p.156)
53)
4선근을 획득할 수 있는 자는 남ㆍ여근을 갖춘 자로서, 선체나 무형자(無形者)는 획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난ㆍ정ㆍ인선근의 경우, 남ㆍ여성일 때뿐만 아니라 전근(轉根) 변성하여 여ㆍ남성이 되었을 때에도 역시 그것에 근거하는 선근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남ㆍ여성은 자신의 성에 근거하는 선근과 바뀐 성에 근거하는 선근을 모두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세제일법의 단계가 되면 여성은 남성으로 전근하는 경우가 있어 남성의 몸에 근거하는 그것도 획득할 수 있지만, 남성은 더 이상 여성으로 변성(變性)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남성에 근거하는 그것만을 획득할 뿐 여성에 근거하는 그것을 획득하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난ㆍ정ㆍ인의 단계에서는 남녀 공히 변성이 인정되지만, 세제일법의 단계에 이르면 남성은 이미 여성의 비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변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54)
인법(忍法)의 공능에 대해서는 차항(次項)과 주61)를 참조할 것.
55)
4근본정에 의해 일어나는 도는 지(止)ㆍ관(觀)이 균등하여 어떠한 노력 없이도 저절로 일어날 뿐더러(그래서 이를 樂通行이라 함) 유(有)를 싫어하는 마음(『구사론』에서는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이 치성하여 필시 이 생에서 견도에 들 수 있지만, 미지정과 중간정에서는 관(觀)만이 증성하여 그것을 낳는데 노고가 따라야 하며(그래서 이를 苦通行이라고 함),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도 저열하기 때문에 이 생에서는 견도에 들 수 없는 것이다. 낙ㆍ고통행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 ‘고ㆍ락의 4통행(通行)’을 참조할 것.
56)
전생에 ‘난’ 등의 선근을 획득하였으나 명종함으로써 그것을 버리게 된 경생(經生)의 성자는, 숙주지(宿住智)로써 그같은 수행 정도를 아는 설법자가 설한 ‘정’ 등의 법을 듣고서 금생에 ‘정’ 등의 선근을 바로 획득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 난법부터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57)
예컨대 사견(물러남)에 의해 선근을 버리거나[退捨], 득과(得果)에 의해 하지의 선근을 버리게 되는 경우[失地捨]가 그러하다.
58)
난법에는 여섯 가지 과실과 한 가지 공덕이 있다. 곧 난법을 획득하였더라도 은복(隱覆)해 있던 견혹을 일으켜 거기서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 인과부정의 사견을 일으켜 생득선을 끊고, 무간업을 짓고, 3악취에 떨어지고, 명종(命終) 시에 난선근을 버리고, 항상 이생에 포섭되지만, 이 같은 과실에도 불구하고 오래 유전하는 일없이 열반에 들게 된다.
59)
정법에는 다섯 가지 과실과 두 가지 공덕이 있다. 곧 정법을 획득하였더라도 거기서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 무간업을 지으며, 악취에 떨어지며, 명종 시에 정선근을 버리고, 항상 이생에 포섭되지만, 이같은 과실에도 불구하고 오래 유전하는 일없이 열반에 들고, 필경 선근을 끊는 일이 없다.
60)
본권 ‘세제일법의 명의(名義)에 대한 이설 비판’에서 인용한 가타(伽他)를 참조할 것.
61)
인법에는 두 가지 과실과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곧 인법은 목숨을 마치면 버리게 되고 이생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인법을 획득하게 되면 오래지 않아 열반에 들게 되고, 필경 선근을 끊지 않으며, 물러남으로써 그것을 버리는 일이 없으며, 무간업을 짓지 않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
62)
주14)의 본문 참조.
63)
견도에 들어 욕계에서 여러 생을 거친 성자[經生聖者]는 최대한 일곱 번째 존재에서 열반에 들기 때문에(極七返生) 여덟 번째의 존재는 더 이상 받지 않는 것이다.(본론 제64권 ‘예류과’ 참조)
64)
세제일법에는 한 가지 과실과 한 가지 공덕이 있다. 즉 이생에 포섭되고, 능히 견도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65)
4선근에는 각기 하ㆍ중ㆍ상의 세 품류가 있어 상품의 그것은 불승(佛乘)의 가행이 되고, 중품은 독각승의 가행, 하품은 성문의 가행이 된다. 그럴 때 각 승의 선근가행은 다른 승의 가행으로 바뀔 수 있는가? 이를테면 성문승의 가행이 독각승이나 불승의 그것으로 바뀔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본 단의 문제이다.
66)
불승으로 전향하는 경우 3아승기겁 100겁을, 독각승으로 전향하는 경우 100겁을 거쳐야 각각의 난법 등을 일으킬 수 있다.
67)
성문이 난선근과 정선근을 일으켰을 경우 불승(佛乘, 무상정각)으로 전향하여 난법과 정법을 낳을 수 있지만, 인선근을 일으켰을 경우, 그는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을 닦을 수 없으며, 따라서 불승의 인위(忍位)로 전향할 수 없다.
68)
인각유(麟角喩)독각이란 기린의 한 뿔은 다른 한 뿔과 결코 만나지 않듯이 무불(無佛)시대에 태어나 홀로 수행하여 부처가 된 이를 말하며, 일찍이 성문이었던 독각(이를 部行獨覺이라 한다)이란 다른 이와 함께 수행하다가 홀로 깨달은 이를 말한다.
69)
이는 『구사론』(고려장27,p.624상; 대정장29,p.121상; 권오민 역,p.1053) 상에서 논주 세친의 설이다. 그는 앞의 유부 비바사사의 설을 “씨앗을 뿌리고 싹이 성숙하고 열매를 맺게 되는 세 단계로 비유하면서 이를 전설(傳說)로 논설하였다.
70)
‘4선근의 제문분별’(주55의 본문) 참조.
71)
즉 의업은 바로 직접적으로 문ㆍ사소성혜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72)
“이러한 의업의 사원력(思願力)에 포섭되어 일어나는 신ㆍ어업도 역시 순해탈분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한 덩이의 밥을 베풀고 한 가지 계율을 지키는 등의 업도 해탈을 깊이 추구[樂, 즉 意樂]하려는 사원력에 의한 것이라면 순해탈분을 뿌리고 심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3권, 고려장27,p.624중; 대정장29,p.121상; 권오민 역,p.1054)
73)
세 악취에서는 고(苦)를 염리하는 의업은 강하지만 반야 즉 지혜가 저열하며, 천취에서는 반야의 지혜는 수승하지만 괴로움이 적어 염리심이 부족하다. 그리고 북구로주에서는 염리심도 부족하고 지혜도 저열하다. 따라서 순해탈분의 종자를 뿌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인취의 세 주뿐이다.
74)
이에 대해 경주 세친은 “부처의 출세(出世)와 조우하여야 이러한 선근을 심을 수 있다”고 하였다.(『구사론』, 앞의 책)
제62권
1)
순해탈분(3賢位, 즉 정심위와 총상ㆍ별상념주)에 대해서는 4선근(순결택분)을 설하기 앞서 이미 논설하였지만(본론 제59권-제61권), 그것의 제문분별은 편의에 따라 ‘4선근에 이르는 수행기간’(제61권)에서 논설하였었다.
2)
여기서 고성제의 경계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말한다. 본론 제61권 ‘난법’ 참조.
3)
『구사론』 제23권(고려장27,p.624중; 대정장29,p.121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056).
4)
단대치(斷對治)는 인(忍), 지(智)는 지대치(持對治). 무루법은 동등하거나 보다 뛰어난 법에 대해서만 동류인이 되기 때문에(본론 제9권 ‘동류인’ 참조) 동류로서 상속하는 세간의 동류인 등류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따라서 법지인이 무루임을 나타내기 위해 세간의 예로써 법지를 낳는 동류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5)
여기서 ‘가행도의 인(忍)’이나 ‘유루의 인’은 모두 순결택분(4선근)의 인법을 말한다.
6)
즉 본 항의 주제는 “세제일법과 무간에 생겨난 고법지인(苦法智忍)이 무루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인데, 경주는 이에 대해 “무루의 고법지를 낳는 동류인이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다시 “고법지인이 고법지를 등류과로 삼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에 대해 “그것은 무루이고 고법지에 선행한 것이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말하자면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뜻이다.
7)
이상 고법지인을 입정성결정(入正性決定)이라고 말하는 까닭. 이하 이에 대한 힐난과 이설(異說).
8)
다시 말해 “욕계 고법인(苦法忍)을 획득한 다음 찰나 고법지(苦法智)를 획득하고, 상2계의 고류인(苦類忍)ㆍ고류지(苦類智)를 획득하며, 계속하여 찰나 찰나에 걸쳐 도법인ㆍ도법지ㆍ도류인ㆍ도류지를 획득하지만”이다.
9)
이하 고법지인을 입정성이생(入正性離生)이라고 말한 까닭에 대해 논설한다.
10)
송ㆍ원ㆍ명본(明本)이나 『현종론』(제30권)에는 ‘생의 자구[生具]’가 ‘생취(生臭)’ 즉 ‘생의 냄새’로 되어 있다.
11)
여기서 ‘근기’는 선근이다. “일체의 번뇌 혹은 온갖 애탐은 능히 선근을 성숙할 수 없게 하며, 아울러 온갖 유(有)로 하여금 과실을 일으키기에 적합하도록 윤택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생’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견도가 일어나면 그것의 세력을 꺾어 더 이상 생의 허물을 증상(增上)시키지 않으니, 이에 따라 견도만을 유독 이생(離生)이라 이름한 것이다.”(『대비바사론』 제3권, 대정장27,p.13상)
12)
“그것(이생성)도 이것(세제일법)도 다 같이 세간법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에 [이생성을 버릴만한 힘이 없다.]”(『구사론』 제23권, 고려장27,p.624하; 대정장29,p.121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57) 즉 세제일법도 이생성도 다 같이 세간법 즉 유루법이기 때문에, 유루의 세간법으로써 세간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의 힐난.
13)
세제일법과 이생성은 다 같이 세간법이지만 자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힘이 강력한 어떤 원적이 힘이 약한 원적을 해치는 것처럼 전자 또한 능히 이생성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14)
이는 『구사론』(앞의 책; 권오민 역,p.1056) 상의 정설이다. “이러한 ‘인’이 생겨나면 성자라는 명칭을 획득한다. 즉 이것이 미래 [생상위(生相位)]에 있을 때 이생성(異生性)을 버리게 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인’이 미래 생상위에 있을 때 이러한 작용을 지니며, 그 밖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작용을 갖지 않는다고 인정하니, 마치 등불과 생상의 관계와 같다.(此忍生已, 得聖者名. 此在未來捨異生性. 謂許此忍未來生時有此用, 非餘, 如燈及生相.)” 즉 미래의 등불이 생상을 획득하여 현전할 때 어두움을 지멸하는 작용을 갖듯이, 이러한 고법지인도 세제일법의 단계로부터 생상위에 이를 때 이생성을 버리는 작용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생성을 버리는 작용은 오로지 고법지인만이 갖는다. 그러나 경주 세친은 이 같은 생(生) 등의 유위4상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만 ‘인정[許]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하 이에 대한 힐난을 해명한다.
15)
본론 제50권 ‘유(有)의 특성과 종류’ 참조.
16)
4정단(혹은 正勤)은 37보리분법의 하나로서, 이생(已生)과 미생(未生)의 악과 선을 힘써 끊고 닦는 것.(본론 권71 참조) 즉 근근(勤根, 4정근의 본질) 역시 이생과 미생의 선악을 힘써 끊고 닦는 공능을 갖는다는 예증.
17)
원문은 ‘如燈據總. 體雖是一實物異, 故功能有殊’.
18)
본론 제52권 ‘경주의 위부동설 약난(略難) 비판’ 참조.
19)
고법지인이 욕계 고법(苦法)에 대한 인가(認可)의 혜를 획득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고법인에 의해 관찰된 욕계의 고제에 대한 결단(決斷) 간택(簡擇)의 혜를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법지’이다.
20)
즉 욕계와 상2계의 집제를 반연하여 집법지인(集法智忍)과 집법지(集法智), 집류지인(集類智忍)과 집류지(集類智)가 생겨나며, 욕계와 상2계의 멸제와 도제를 반연하여 각각 멸법지인(滅法智忍)과 멸법지(滅法智), 멸류지인(滅類智忍)과 멸류지(滅類智), 도법지인(道法智忍)과 도법지(道法智), 도류지인(道類智忍)과 도류지(道類智)가 생겨난다.(후술)
21)
여기서 집성제의 경계란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본론 제61권 ‘난법’ 참조.
22)
여기서 멸성제의 경계란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 본론 제61권 ‘난법’ 참조.
23)
여기서 도성제의 경계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 본론 제61권 ‘난법’ 참조.
24)
순결택분(4선근)에서 이미 3계에 걸친 4성제의 경계에 대해 관찰하였다. 특히 인위(忍位)에서는 감연감행(減緣減行)하면서 총 31번 반복[周]하며 두루 관찰하였었다.(본론 제61권 주19 참조)
25)
『현종론』(제30권)에 따라 보충함.
26)
여기서 ‘법(法)ㆍ유(類)의 인(忍)ㆍ지(智)’란 법지인(法智忍)과 법지(法智)와 유지인(類智忍)과 유지(類智)의 줄임말.
27)
이와 달리 유부에서는, 견도위에 든 자로서 일찍이 이생위에서 믿음과 공경[信敬]의 힘에 의해 가행을 수습한 둔근의 성자를 수신행(隨信行, śraddhānusārin)이라고 하며, 일찍이 계경 등의 법을 열람하며 가행을 수습한 이근의 성자를 수법행(隨法行, dharmānusārin)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에서 상론한다.
28)
증정(證淨, avetyaprasāda)이란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불ㆍ법ㆍ승 삼보와 성계(聖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을 낳게 되는 것을 말한다.(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한다.)
29)
상좌에 의하는 한, ‘인’은 세제일법과 성도의 중간단계로서 성정(聖定,무루정)에 의한 4제의 인가(忍可)이기 때문에 성법(聖法)이지만, 그렇다고 성도에 의한 성지(聖智,무루지)는 아니다. 즉 인위에 이른 수신과 수법의 행자는 아직 ‘성도의 흐름에 이른 자’ 즉 예류과(預流果)가 아니기 때문이다.
30)
원문은 ‘住此忍位爲經久如’이지만, ‘如’를 ‘如何’의 ‘何’가 결락(缺落)된 것으로 이해하여 이같이 번역하였다.
31)
여기서 3결은 유신견(有身見)ㆍ계금취(戒禁取)ㆍ의(疑).
32)
즉 상좌는 유부가 설정한 고법지인 내지 도류지인의 8인(忍)을 성정(聖定, 무루정)에 의한 성제의 관찰[見諦]로서 아직 성도에 이르지 못한 단계로 이해하여, 성제현관으로 무루지인 고법지ㆍ고류지 내지 도법지ㆍ도류지의 여덟 찰나의 마음[八心]만을 인정하였다.
33)
이에 반해 상좌는 고법지를 예류과의 첫 찰나 마음이라 하였으며, 고법지를 획득할 때 3결을 단박에 끊는다고 하였다.
34)
『중아함경』 제30권 「복전경(福田經)」(대정장1,p.616상) 참조. 복전에는 유학과 무학 두 가지가 있으며, 유학에는 예류향ㆍ예류과ㆍ일래향ㆍ일래과ㆍ불환향ㆍ불환과ㆍ아라한향ㆍ수신행ㆍ수법행ㆍ신해(信解, 同經에서는 信解脫)ㆍ견지(見至, 同經에서는 見到)ㆍ가가(家家)ㆍ일간(一間, 同經에서는 一種)ㆍ중반ㆍ생반ㆍ유행반ㆍ무행반ㆍ상류반의 열여덟 가지가 있고, 무학에는 퇴법(退法)ㆍ사법(思法)ㆍ호법(護法)ㆍ안주법(安住法)ㆍ감달법(堪達法)ㆍ부동법(不動法)ㆍ불퇴법(不退法)ㆍ혜(慧)해탈ㆍ구(俱)해탈의 아홉 가지가 있다.(이상 27현성)
35)
여기서 5근은 무루의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근(慧根)이다.
36)
다시 말해 상좌는 “수신행과 수법행은 인법(忍法)만을 획득한 이로서 아직 성도는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지만, 이 같은 성교에 비추어볼 때, 성자(수신행 즉 예류향)이면서 성도를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정리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37)
즉 예류과는 ‘성도의 흐름에 이른 자’이고, 고법지는 이미 성도이기 때문에 이를 획득한 이를 ‘예류과’라고 이름해야 한다는 뜻이다.
38)
이해의 편의를 위해 하기(下記)의 인용문 다음에 나오는 문구를 먼저 제시하였다.
39)
가가(家家)는 욕계 제3ㆍ제4품의 수혹(修惑)을 끊은 성자, 7반은 현관을 성취한 예류과, 일간(一間)은 욕계 제7ㆍ제8품의 수혹을 끊은 성자, 일래과는 제6품의 수혹을 끊은 성자(이상의 성자에 대해서는 본론 제64권 ‘수도위의 성자’ 이하에서 상론함), 욕아라한은 물러나는 일이 있는, 부동법(不動法)을 제외한 다섯 종성의 아라한(제67권에서 상론함), 5종 불환은 7종 불환 중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에 드는 불환과.(제65권에서 상론함)
40)
여기서 통달은 성제현관(견도)의 완전한 성취를 말한다.
41)
주28) 참조.
42)
앞서 상좌는, 증정(證淨)을 성취하여 견제(見諦)가 원만한 정견자(正見者) 중에 수신행과 수법행이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 성지(聖智, 무루지)를 획득하지 못한 이라고 하였는데, 견제가 원만한 이는 앞서 언급한 열 종류의 성자로 볼 때 이미 4제현관을 성취한 예류과 이상의 성자이다. 따라서 그 경문으로써는 수신행과 수법행이 무루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논증할 수도 없을 뿐더러 고법지를 증득한 이가 예류과라는 자신의 주장마저 훼손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43)
이를테면 『중아함경』 제49권 「성도경(聖道經)」(대정장1,p.736중), ‘學者成就八支, 漏盡阿羅漢成就十支.’ 정지(停止)와 정해탈(正解脫)에 대해서는 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44)
오로지 이곳에서 통달(완전한 현관의 성취)하고 저곳에서 구경을 증득하는 이는 다만 5종 불환뿐이다.
45)
상좌가 인용한 계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열 가지 성자가 모두 이곳에서 통달하고 저곳에서 구경을 증득하는 이는 아니기 때문에 이 경의 취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힐난.
46)
예컨대 예류과(預流果)를 획득한 이가 증진하여 일래과(一來果)로 나아가는 일래과향(一來果向, 줄여 一來向)에 성도가 일어났다면 예류과향(預流果向, 즉 預流向)인 수신행과 수법행에도 역시 성도가 일어났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7)
원문은 ‘二行者未得預流果, 中間不命終.’
48)
원문은 혹은 須陀洹)는 ‘[성도의] 흐름에 이른 자’라는 뜻으로, 입류(入流)ㆍ지류(至流)ㆍ역류(逆流, 생사의 흐름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임)라고도 번역한다. 예류과를 증득하는 현관 제16심이 과위에 포섭되는 성도의 흐름이라면, 15심까지는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 성도의 흐름으로 예류향이다. 즉 예류향으로서 둔근자를 수신행, 이근자를 수법행이라 한다.
49)
원문은 ‘此二雖得預非果流, 而未得名預果流者.’
50)
원문은 ‘二行者未得預流位, 中間不命終.’(주46과 대조바람) 즉 수신행과 수법행의 두 성자에 대해 ‘아직 예류과(預流果)를 획득하지 못하였기에--’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이미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 성도의 흐름’에는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어떠한 성도의 흐름도 획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아직 예류위(預流位)를 획득하지 못하였기에--’라고 하여야 하지만, “예류위를 획득하지 못한 이는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즉 ‘예류(預流)’라고 하는 말은 ‘성도의 흐름에 이르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제의 현관(現觀)은 지극히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예류향(수신ㆍ수법행)이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은 없다.
51)
“그러니 마땅히 수신행과 수법행자는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 성도를 이미 획득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52)
다시 말해 수신행과 수법행의 예류향을 견도위에 포함시키지 않을 경우, 견도위에 들 때를 바로 예류과로 설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53)
원문은 ‘彼所立皆, 以聖敎爲勝所依.’ 상좌종은 자칭 경량부 즉 경(經)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는 부파였다.
54)
견도와 수도의 첫 찰나 마음인 고법지와 도류지. 이것의 가행은 고법지인과 도류지인. 이는 각기 일 찰나로서 도류지(예류과)에 이르는 동안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결코 출관(出觀)하는 일이 없다.
55)
이하 ‘수신행과 수법행은 출관한다’는 이설(異說)의 경증이 매우 길게 인용되기 때문에 인용 뒤에 논설되는 중현의 평석을 먼저 제시하였다.
56)
원문은 ‘彼應不放逸修集諸根.’으로 되어 있으나, 후술하는 문구나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 등에 따라 ‘修集’을 ‘修習’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7)
앞서 예류향 즉 견도위의 성자를 근기의 차별에 따라 둔근자를 수신행(隨信行), 이근자를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였는데(주27 참조), 이러한 성자가 견혹(見惑)을 모두 끊는 예류과(제16 도류지)에 이르게 될 때를 신승해(信勝解, 보통 信解)와 견지(見至)라고 한다. 즉 전자의 경우 신근(信根)으로 말미암아 승해가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 혜근(慧根)으로 말미암아 정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계 수혹(修惑)을 끊은 불환과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이를 신증(身證)이라 하며, 상2계의 수혹을 끊은 아라한과를 혜해탈(慧解脫), 아울러 멸진증을 획득하여 해탈의 장애(불염오무지)마저 끊은 아라한과를 구해탈(俱解脫)이라고 한다. 수신행과 수법행에 대해서는 신해와 견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64권 ‘수도위의 성자’에서, 신증에 대해서는 제65권에서, 혜해탈과 구해탈에 대해서는 제70권에서 상론한다.
58)
다시 말해 “세존께서 장차 그를 지키려고 함에 세존을 버리고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며, 세존께서 그를 지킬 때 동전(動轉)하지(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그를 지킨 후 피곤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59)
즉 계경에서 수신ㆍ수법의 행자를 견도위의 예류향과 구별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견도위와는 달리 출관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60)
즉 계경에서 ‘어떤 한 예류향’이라고 하여 예류향에 다수의 종류가 있음을 암시하였기 때문에 수신ㆍ수법의 행자도 다만 예류향의 한 종류일 뿐이며,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예류향은 출관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61)
즉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는, 예컨대 ‘보릿가루를 찧는다’고 할 때 ‘보릿가루’는 보리를 찧고 난 이후의 상태로서, 이는 찧기 전의 명칭(즉 보리)을 찧은 후의 명칭(보릿가루)으로 설정한 것이듯이, 아직 수신행과 수법행을 획득하지 않았지만, 획득할 것을 예상하여 그 같은 명칭으로 설하였다는 뜻이다.(후술)
62)
욕계 수혹은 끊은 불환과(不還果)에는 현생을 마친 후 바로 반열반에 들거나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 반열반에 드는 등 열반에 드는 처소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일곱 종류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중반열반은 색계 중유에서 반열반에 드는 불환을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함) 즉 불환과의 계위는 아직 중반열반이 아니지만, 이후 획득하게 되는 반열반에 근거하여 ‘중반열반’이라 이름하였다는 뜻이다.
63)
‘통달’은 4제현관의 통달로 예류과에 붙여지는 수사(修辭)이다. 이 계경은 앞서 ‘현관의 순서 비판’(주40)에서 인용되었다.
64)
원문은 ‘苦法智起力能頓斷--’으로 되어있지만, 앞서 인용한 상좌설(‘상좌의 8심 현관설’) 전문에서 설한 ‘次起苦法智--能頓斷--’에 따라 이같이 번역하였다.
65)
이는, 계속하여 앞서 반문한 “‘고법지가 단박에 3결의 구 수계를 끊는다’고 함은 생겨날 때 끊는다는 것인가, 소멸할 때 끊는다는 것인가? 만약 소멸할 때 끊는다고 한다면,--”에 따른 힐난이다.
66)
즉 고법지의 단계에서 3결이 돈단(頓斷)될 경우, 집법지와 멸법지 도법지는 무엇을 끊을 것인가? 하는 힐난이다.
67)
집제 등에 미혹한 ‘의(疑)’도 고지(苦智)로써 능히 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멸제나 도제에 미혹한 번뇌(즉 견멸소단이나 견도소단) 역시 고지로써 끊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68)
원문은 ‘於相續中, 諸見所斷皆有斷義故’이지만, 문맥상 송ㆍ원ㆍ명본에 따라 ‘斷’을 ‘轉’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다시 말해 “고법지(苦法智)에 의해 견집소단의 ‘의’뿐만 아니라 모든 견소단의 번뇌가 끊어진다는 말은, 고법지(무상ㆍ고ㆍ공ㆍ무아에 대한 觀智)가 현전하지 않으면 견소단의 모든 번뇌는 전전한다(아무 것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69)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는 뜻의 힐난이다.
70)
고법지를 증득하여 예류과가 된 이는 아직 상2계의 고제에 대한 ‘견’ 즉 고류지(苦類智)조차 증득하지 못하였다.
제63권
1)
이는 『구사론』 제23권(고려장27,p.625상; 대정장29,p.121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59)에도 언급되는데, 칭우에 의하면 법밀부(法密部), 보광에 의하면 대중부의 설로서, 그들은 4성제는 순서[次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관되는 것이 아니라 일 찰나의 마음에 의해 단박(동시)에 현관된다는 돈현관론(頓現觀論)을 주장하였다.(『대비바사론』제51권, 대정장27p.264하; 한글대장경120,p.15 참조) 참고로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이는 대중부(‘以一刹那現觀邊智. 遍知四諦諸想差別’ 대정장49,p.15하)와 화지부(‘於四聖諦一時現觀. 見苦諦時能見諸諦.’ 동,p.16하)의 본종동의(本宗同義)이다.
2)
“그렇지만 그들이 말한 뜻을 마땅히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니, 그들이 말한 현관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구사론』, 앞의 책) 후술하듯이 현관에는 견현관(見現觀)ㆍ연현관(緣現觀)ㆍ사현관(事現觀) 세 종류의 차별이 있는데, 이러한 세 현관의 관점에서 본다면 돈현관론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부파에서는 현관을 어떻게 분별하였으며, 또한 어떠한 현관에 근거하여 이같이 주장하게 되었는지 밝히지도 않고서 돈현관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구사론』상에서는 세 종류의 현관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후술)
3)
오로지 무루혜로써 성제를 관찰하는 것이 견현관(darśanābhisamaya)이라면, 연현관(alaṃvaṅābhisamaya)은 무루혜와 그 상응법인 심ㆍ심소가 함께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을 말한다.
4)
사현관(karyābhisamaya)은 무루혜를 중심으로 하여 이와 상응 구유하는 심ㆍ심소와 도공계(道共戒)와 4상(相) 등이 동일한 성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 작용[事業]을 동시에 행하는 것으로, 그러한 작용에는 고(苦)의 변지(遍知)와 집(集)의 영단(永斷)과 멸(滅)의 작증(作證)과 도(道)의 수습(修習)이 있다.(후술)
5)
원문에는 ‘故於前說頓現觀察--’로 되어 있지만, 『현종론』(제30권, 고려장28,p.222중)에 따라 ‘察’을 ‘宗’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
이를테면 고제를 관찰할 때, 무루혜가 고제를 추구(推求)하는 것은 견현관이고, 혜와 더불어 심ㆍ심소가 고제를 동일한 소연으로 삼는 것은 연현관, 혜와 상응 구기법이 동시에 작용하여 두루 아는 것[遍知]은 사현관이다. 그리고 고제를 두루 앎으로써 견고소단의 집(集)을 끊고, 그것의 멸(滅)을 작증하였으며, 그것의 도(道)를 닦은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3제(諦)에 대해서도 역시 사현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사현관에 근거하여 ‘단박에 현관한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마땅히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원문은 ‘一見理無非一行相故.’ 앞에서는 이 내용을 “이치상 일 [찰나]에 다수의 [진리의] 행상을 관찰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一見理無多行相故)”라고 논설하였다.
8)
이는 “일체의 법은 오로지 무아(無我)로 관찰해야 한다”는 경설에 근거한 것으로, 본론 제62권 ‘현관의 순서 비판’ 말미에서 상좌의 8심 현관설을 비판하기 위한 예(例)로 제시되었다.
9)
즉 성제현관이란 각각의 제(諦, 4제)를 관찰하는 것에 근거한 말이지 각각의 행상(16행상)을 관찰하는 것에 근거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10)
다시 말해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경설에 따라 일체법(즉 4제)을 동시(단박)에 반연하여 무아라고 하는 것은 무루혜에 의한 성제현관이 아니라 세속지일 뿐이다.
11)
‘해야 할 일을 이미 마쳤다[所作已辦]’이라고 하는 말은 무학의 아라한과를 나타내는 수사(修辭)이다.
12)
『잡아함경』 제16권 제435경(대정장2,p.112하). “世尊! 此四聖諦爲漸次無間等, 爲一頓無間等? 佛告長者 此四聖諦漸次無間, 非頓無間等.--若於苦聖諦未無間等, 而欲於苦集聖諦ㆍ苦滅聖諦ㆍ苦滅道跡聖諦無間等者, 無有是處.”
13)
『잡아함경』 제16권 제437경과 제436경(대정장2,p.113상중). 제437경은 아난(阿難)에 대해 설한 것으로,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계단씩 올라야 한다”고 비유하였으며, 제436경은 어떤 비구에 대해 설한 것으로,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 번째 계단을 오른 뒤에 순서대로 올라가야 한다”고 비유하였다. 참고로 앞의 제435경은 수달(須達)장자에게 설해진 것으로, 여기서의 현관 차제의 비유는 이러하다. “[폭이 좁은] 가느다란 나뭇잎을 모아서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갈 수 없듯이 고제를 무간에 알지 못하고 집ㆍ멸ㆍ도성제를 알지 못하며--, 연잎을 모아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갈 수 있듯이 고제를 무간에 알고 나서 집제 등을 안다.”
14)
『잡아함경』 제15권 제379경(대정장2,p.103하).
15)
상동. ‘當正思惟時, 生眼智明覺.’
16)
이는, 돈현관론자가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 4제를 별관(別觀)한다고 설한 것은 초입자에 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점현관(漸現觀)의 경증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한 데 대한 반론이다. 여기서 ‘진실의 현관’이란 말하자면 작의를 초월하는 단계[初作意地]에서 닦는 현관이다.
17)
만타다(Māmdhātṛ, 구역은 頂生王)는 포살타(布殺陀, Upoṣadha)왕의 정수리에 생겨난 수포로부터 태어나, 장성한 후 금륜왕(金輪王)이 되었다는 전설상의 왕이다.(본론 제22권 ‘4생’에서도 나온다) ‘만타다왕이 구시에 추락하였다’(출처불명)고 하였을 경우, 혹은 ‘무간업과 구시에 악취에 떨어진다’고 할 경우, 이때 ‘구시’는 동시가 아니라 ‘무간’의 뜻이듯이, ‘구시에 3결을 끊었다’고 하는 말 역시 그러한 뜻이라는 예증이다.
18)
원문에는 ‘動足俱時時財’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판본에 따라 ‘시재(時財)’를 ‘득재(得財)’로 고쳐 번역하였다.
19)
“발을 움직이는 것과 구시에 재물을 획득한다”거나 “성에 들어가는 것과 구시에 부귀하게 되었다.”고 말할지라도,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과 재물을 획득하는 것, 성에 들어가는 것과 부귀하게 되는 것이 동시(동일찰나)가 아니라 먼저 발을 움직이고, 성에 들어간 후 비로소 재물을 획득하고 부귀하게 되는 것처럼, 계경에서 “성제 현관과 구시에 3결을 끊었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성제를 현관한 다음에 3결을 끊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경문은 돈현관의 증인(證因)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20)
즉 계경에서 “4제를 관찰하는 것은 혜근이다”고 설하였지만, 예컨대 불ㆍ법ㆍ승과 성계(聖戒)에 대한 신근(信根)이 각기 다르듯이,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에 대한 염근(念根)이 각기 다르듯이, 동일한 혜근이 동시에 4제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고제를 관찰하는 혜근과 집제 내지 도제를 관찰하는 혜근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4제 돈현관의 증인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21)
다시 말해 ‘무상’이라는 관념으로써 집제 내지 도제를 관찰할 수 없다. 예컨대 멸제는 멸(滅)ㆍ정(淨)ㆍ묘(妙)ㆍ리(離)라는 관념으로써 관찰한다.
22)
순상분결은 색ㆍ무색계의 두 탐(貪)과 도거ㆍ만(慢)ㆍ무명이다.(본론 제54권에서 상론)
23)
돈현관론자의 해석에 의하면, 살(薩)은 ‘아울러’의 뜻으로, 구시(俱時)를 나타내는 부사였다. 여기서 중현이 말하려는 바는 ‘살’이라고 하는 말은 순차[次第]를 나타낼 때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자제바달다(薩子提婆達多)’ 즉 ‘아울러 아들인 제바달다와 함께’라는 말은, 아마도 “어떤 일을 하고 난 이후, 아울러 아들인 제바달다와 함께 어떤 일을 하였다”는 의미인가? 여기서 ‘제바달다’는 갑돌이와 같은 일반호칭이다.
24)
즉 돈현관론자가 인용한 “만약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면, ‘살(薩) 인고(因苦)’를 알았기 때문이다”는 말은 “유인고(有因苦) 즉 ‘원인을 갖는 고’를 알았다”는 뜻일 뿐, 고제(苦)와 아울러 집제(苦因)를 동시에 알았다는 뜻이 아니다. 중현이 시정하고 있듯이, 만약 ‘살(薩) 인고(因苦)’가 ‘아울러 집제’의 뜻이라면 ‘인고(因苦)’가 아니라 ‘고인(苦因)’이 되어야 한다.
25)
경에서 설한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는 말은, 예컨대 고제를 현관함으로써 견고소단의 모든 ‘의’를 끊고, 내지 도제를 현관함으로써 견도소단의 모든 ‘의’를 끊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26)
“원인을 갖는 고제[薩因苦]를 현관하여 일체의 의(疑)를 끊었다”에서 ‘일체’란 견4제소단의 일체가 아니라 견고소단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뜻이 불충분하며, 그래서 중현은 앞서 돈현관론자가 인용한 경설을 ‘제멋대로 설한 것[縱說]’이라고 하였다.
27)
고제와 집제는 다 같이 유위법으로서 결과와 원인의 관계이다.(본론 제57권 ‘총설: 4제의 체상’ 참조) 다시 말해 고지(苦智)와 집지(集智)는 동일한 유위법(즉 諦)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으로, 다만 결과와 원인으로서의 특성(즉 行相)만 다를 뿐이다.
28)
다시 말해 고제를 관찰할 때 견고소단의 의(疑)뿐만 아니라 견집ㆍ견멸ㆍ견도소단의 ‘의’도 역시 끊어진다고 한다면, 경에서는 3제에 대해 ‘통달(즉 현관)’이라는 말을 설할 필요 없이 다만 “고제에 대해 통달하여 집(集)을 영원히 끊어야 하고, 멸(滅)을 작증해야 하며, 도(道)를 수습해야 한다”고 설하였어야 한다는 힐난이다.
29)
원문은 ‘經言聖慧見時斷者, 說見時能斷非見所斷法如所證修.’
30)
욕계의 9품의 수혹을 끊은 이(불환과)로서 색ㆍ무색계의 8지(地)의 상상품에서 하하품에 이르는 9품의 혹을 순서대로 끊는 이가 아라한향이라면, 유정지 제9품의 단혹(斷惑)과 무간에 진지(盡智)가 생겨난 이를 아라한과라고 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 ‘아라한향과 아라한과’에서 상론한다.)
31)
다시 말해 4제를 각기 별도로 현관해야 하기 때문에 “고제에 대해 통달 변지(遍知)해야 하며, 집제에 대해 통달 영단(永斷)해야 하며, 멸제에 대해 통달 작증(作證)해야 하며, 도제에 대해 통달 수습(修習)해야 한다”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32)
본론 제61권 ‘4선근의 제문분별’에서 논설하였다.
33)
본론 제62권 ‘고법지인의 제상(諸相)’ 참조.
34)
이 경문은 본론 제62권 주27)의 본문에서도 인용되었다.
35)
앞(본론 제62권 ‘그 밖의 15심’)에서 “이러한 [고법지]인과 무간에 바로 [고법지인에 의해 관찰된] 욕계 고성제의 경계를 반연하여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고법지(苦法智)라고 이름하니, 오로지 바로 이러한 고법(苦法)에 대한 결단(決斷)의 혜(慧)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즉 고법지는 욕계 고제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고법인에 의해 관찰된 욕계의 고제를 대상으로 한 결단(決斷) 간택(簡擇)이다.
36)
즉 고법인(苦法忍)에 의해 욕계 견고소단의 열 가지 번뇌, 탐ㆍ진ㆍ만ㆍ무명ㆍ의(疑)ㆍ유신견ㆍ변집견ㆍ계금취ㆍ사견ㆍ견취가 끊어지고(본론 제46권 ‘98수면으로의 전개’ 참조), 고법지(苦法智)에 의해 이 같은 번뇌의 단절이 확정되어 이계가 획득된다.
37)
본론 제55권 ‘4종의 대치’에서는 무간도를 온갖 번뇌의 득(得)을 직접적으로 끊는 단대치(斷對治)로, 해탈도를 단혹(斷惑)의 ‘득’과 최초로 구생하는 지대치(持對治)로 논설하였다.
38)
『구사론』 제23권(고려장27,p.625하; 대정장29,p.122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062). 『구사론』에서는 계속하여 “이러한 두 가지의 순서는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세간에서 도적을 몰아내고 문을 닫는 것과 같다”고 논설하고 있다. 즉 3계의 제 번뇌는 고법지인 내지 도류지인의 순간 끊어지며(斷, 여기서 ‘끊어진다’고 함은 번뇌의 제 심소가 심상속과의 구생의 관계를 떠난다는 말이다) 고법지 내지 도류지는 그같은 번뇌의 단절을 확증하여(證) 이계를 얻게 한다. 따라서 8인에 의한 번뇌의 단절은 이를테면 도둑을 잡아 문 밖으로 쫓아내는 것에 비유되고, 8지에 의한 단절의 확증은 문을 닫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에 비유된다는 것이다.
39)
다시 말해 “동류의 도가 다 찰나로 상속하는 일이 없을 뿐더러.”
40)
이는, 욕계와 상계의 견고소단의 번뇌를 끊고 택멸을 증득하는 것은 고법지인(제1찰나)과 고류지인(제2찰나)으로, 오로지 무간도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설(異說)이다. 『구사론』(고려장27,p.625하; 대정장29,p.122상; 권오민 역,p.1063)에서는 “만약 제2찰나도 오로지 무간도로서 이계득과 구시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若謂第二唯無間道, 與離繫得俱時而生)”으로 되어 있다.
41)
만약 무간도만이 존재하고 해탈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욕계 견고소단의 이계의 ‘득’과 구생하는 제2찰나가 고법지가 아니라 고류지인이라고 한다면, 욕계의 고제에 대한 의심을 끊었다고 확증 짓는 결정지(決定智)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법지인은 욕계계의 의심과 함께 하는 찰나이지만, 고류지인의 찰나에는 욕계의 경계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42)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제5권(대정장26,p.40하; 한글대장경176,p.107), “아홉 종류의 결(結)이 있으니, 이를테면 고법지소단(苦法智所斷) 내지는 수소단(修所斷)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9결취란 4법지소단과 4유지소단, 그리고 수소단의 결을 말한다. 즉 본론에서 견소단의 번뇌는 네 가지 법지와 네 가지 유지에 의해 끊어진다고 설하였으므로 8인(忍)이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것은 근본 아비달마(즉 본론)에 어긋난다는 힐난이다.
43)
“마치 왕의 권속이 지은 사업을 왕이 지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구사론』, 앞의 책) 즉 ‘인’은 ‘지’의 권속이기 때문에(본권 말미에서는 助伴이라 하였다), 근본 아비달마에서는 다만 ‘지’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주78)의 본문 참조.
44)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3권 ‘인(忍)과 지(智)와 견(見)의 관계’에서 상론한다.
45)
4제의 관찰은 제15 찰나의 마음(도류지인)에서 마치게 되고, 제16 찰나에서는 제15 찰나의 마음에 의해 관찰된 상2계의 도제를 거듭 관찰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에 ‘견도’라고 하지 않고 ‘수도’ 즉 반복된 관찰[重見]이라고 한다.
46)
‘일찍이 관찰하였던 것’은 이미 제15찰나에서 관찰한 상계의 도제이며,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것’은 제15찰나의 마음과 상응 구유하는 도인 도류지인이다.
47)
참고로 『구사론』(고려장27,p.626상; 대정장29,p.122중; 권오민 역,p.1064)에서는 도류지가 견도에 포섭되지 않는 이유로서 이 밖에 “도류지는 [사문]과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8지(智)의 16행상을 단박에 수습하기 때문이며, 선행된 도(즉 앞의 15찰나의 向道)를 버리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수도와 마찬가지로 상속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일 찰나가 아니기 때문이다)”는 네 가지를 더 열거하고 있는데, 이하 이에 대해 광설(廣說)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더 들고 있다.
48)
이는 주47)의 두 번째 이유를 광설한 것이다. 즉 견도위에서는 예컨대 고법지가 현재전할 때 미래 생상위의 고법지와 고제 하의 4행상만을 득수(得修)할 뿐 그 밖의 7지와 12행상은 득수하지 않으며, 도류지인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도류지의 경우 미래 생상위의 도류지나 도제 4행상뿐만 아니라 8지 16행상을 모두 득수하기 때문에 수도에 포섭된다.
49)
이상의 ‘인(忍)과 지(智)와 견(見)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73권에서 상론한다.
50)
이는 주47)의 세 번째 이유를 광석한 것이다.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 세속도로써 욕계 9품의 번뇌를 끊은 이가 제16 찰나의 현관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불환과를 증득하고, 색ㆍ무색계에 태어나 반열반을 성취하는데(본론 제64권 ‘성제현관과 성자’ 참조), 색ㆍ무색계에 태어나면 더 이상 앞의 15찰나의 견도를 성취하지 않는다.
51)
승진도는 보다 향상된 단계로 나아가는 도(본론 제71권에서 상론). 예컨대 예류과를 획득한 이가 향상하여 일래향의 도를 획득할 때 예류과의 도는 더 이상 현행하지 않는다.
52)
여기서 ‘또한’은, 계속하여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난 이가 견도를 성취한다고 할 때 야기되는 허물에 대한 것이다.
53)
여기서 ‘또한’은 본항의 주제인 ‘도류지가 견도가 아닌 까닭’에 대한 것이다.
54)
본론 제9권 ‘제근(諸根) 각각에 대한 해명’ 참조. 이지근(已知根)이 수도위의 무루근이라면, 미지근(未知根)은 견도위의 무루근이다.
55)
예컨대 어떤 성도가 미지근(未知根)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역시 또한 견도에 포섭되며, 이지근(已知根)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역시 또한 수도에 포섭된다.
56)
이는 주47)의 첫 번째 이유를 광석한 것이다.
57)
신승해와 견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 주56)을 참조할 것.
58)
견도를 성취하는 이는 수신행과 수법행이라 이름한다.
59)
예컨대 어떤 성도가 승해나 견지의 근거되었다면 그것은 다만 수도에 포섭되며, 수신행과 수법행의 근거가 되었다면 그것은 다만 견도에 포섭된다.
60)
고제현관의 최후심인 고류지(苦類智), 집제현관의 최후심인 집류지(集類智), 멸제현관의 최후심인 멸류지(滅類智)가 다 견도이듯이, 도제현관의 최후심인 도류지(道類智) 역시 견도라는 뜻이다.
61)
고(苦) 등의 일곱 지(智)란 고법지ㆍ고류지ㆍ집법지ㆍ집류지ㆍ멸법지ㆍ멸류지ㆍ도법지이다.
62)
여기서 ‘견(見)의 특상’이라 함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진리를 관찰하는 것. 본권 ‘16심의 견ㆍ수도 분별’ 참조.
63)
진지(盡智)란 번뇌멸진(즉 택멸)의 득(得)과 동시에 작용하는 무루지를 말하는 것으로,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집(集)을 끊었고, 멸(滅)을 작증(作證)하였고,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것이다. 이는 금강유정에 의해 유정지(有頂地)의 제9품의 번뇌가 끊어짐과 무간에 생겨나는데, 금강유정이 유정지 제9 하하품 번뇌를 끊는 최후의 무간도라면, 이로부터 생겨난 진지는 최후의 해탈도로서, 이때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된다.(본론 제65권 ‘아라한향과 아라한과’에서 상론한다)
64)
6종성의 아라한 중 진지와 무간에 무생지(無生智)를 낳는 부동법을 제외한 다섯 아라한의 경우가 그러하다. 퇴법(退法) 등 다섯 아라한은 진지와 무간에 진지나 무학의 정견을 일으킨다.(본론 제66권 ‘진지 이후에 생겨나는 智에 대하여’ 참조)
65)
유부 법상에 의하면 견도는 물러남이 없지만 수도는 물러남이 있는데, 도류지의 경우는 비록 수도이지만 견도소단의 택멸에 의해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물러남이 없다.
66)
이는 『구사론』상에서 설해진 도류지가 견도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도류지에서는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견도소단의 끊어짐(즉 택멸)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마땅히 견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려장27,p.626상; 대정장29,p.122중; 권오민 역,p.1064) 이에 대해 경주 세친은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크나큰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고만 평석하고 있다.
67)
다시 말해 도류지가 견도소단의 번뇌의 단(즉 택멸)을 임지하기 때문에 견도라고 한다면, 일래과 등도 역시 그것을 지니기 때문에 견도위의 성자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후술)
68)
즉 도류지는 견도소단의 ‘단’(택멸)을 임지하기 때문에 견도에 포섭된다고 하면서, 역시 견도소단의 ‘단’을 임지하는 일래과의 경우는 견도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류지가 견도에 포섭된다면 일래과도 그렇다고 해야 하며, 일래과가 견도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도류지도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69)
경생(經生)의 성자란 사문과를 획득하고서 7생 혹은 1생의 생을 거치는 예류과나 일래과를 말한다.
70)
즉 수도위 중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만 불퇴론(不退論)에 근거하여 도류지가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반화의 오류라는 뜻이다.
71)
다시 말해 그것 역시 견도의 가행(즉 견도를 성취하고자 하였던 期心)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역시 견도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72)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제5권(대정장26,p.40하; 한글대장경176,p.107). 주42)에서도 인용되었다.
73)
즉 『발지론』에서는 4법지소단과 4유지소단, 그리고 수소단의 9결취를 설하고 있는데, 도류지가 수도라면 마지막의 수소단을 별도로 열거할 필요가 없다. 혹은 마지막의 수소단을 열거하려면 앞에서 네 가지 법지소단과 도류지소단을 제외한 세 가지 유지소단만을 설하였어야 하였다는 뜻이다.
74)
주43) 참조. 즉 ‘인(忍)’은 ‘지(智)’의 권속이기 때문에, 『발지론』에서는 다만 여덟 번째로 도류지(道類智)에 의해 끊어지는 결취(結聚)를 설하였다는 뜻이다.
75)
여기서 9근은 의근(意根)ㆍ사근(捨根)ㆍ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본론 제9권 ‘사문과를 증득하게 하는 근의 수’ 참조) 즉 『발지론』에서 도류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류지에 의해 끊어지는 결’이라고 설한 것은 해탈도에 대해 무간도를 일시 가설한 것으로, 이는 예류과를 견도위의 무루지인 미지근과 수도위의 무루지인 이지근에 의해 증득된다고 설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76)
무루의 성혜(聖慧) 중에 8인은 오로지 ‘견’의 성질이며, 진지와 무생지는 오로지 ‘지’의 성질이며, 그 밖의 8지와 무학의 정견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한다.(본론 제73권 ‘忍과 智와 見의 관계’ 참조)
77)
즉 『발지론』에서 9결을 네 가지의 법지소단과 유지소단, 그리고 수소단으로 분별하였지만, 여기서 법지와 유지(해탈도)는 사실상 법지인과 유지인(무간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지론』의 문구는 도류지가 수도라는 사실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후술)
78)
주43) 참조.
79)
본론 제9권 ‘사문과를 증득하게 하는 근의 수’ 참조.
제64권
1)
원문에는 ‘由先信敬力修集加行故.’로 되어 있지만,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 등에 따라 ‘수집’을 ‘수습(修習)’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이하 동(同).
2)
원문은 ‘先隨信他, 行於義故.’ 『구사론』제22권(고려장27,p.626상; 대정장29,p.122중)에는 ‘彼先信他, 隨行義故.’로 되어 있다. 보광(『구사론기』 제23권, 대정장41,p.353하)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이생위에서 다른 이를 믿고 따라 행하였다는 뜻으로, 수신행 등은 가행에 따라 설정된 명칭이다.”
3)
성과(聖果)의 증득에는 차제증(次第證)과 초월증(超越證) 두 가지가 있다. 즉 먼저 견도에 들어 견혹을 끊고 나서 수도에 들어 수혹을 끊어 성과에 이르는 4향(向) 4과(果)를 차제증이라고 하며,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의 세속도로써 욕계 수혹의 일부 내지 전부를 끊고 난 다음 견도와 수도에 들어 견혹과 나머지 수혹을 끊는 이를 초월증이라고 하는데(이러한 이는 현관 제16찰나에 이르러 견혹을 모두 끊을 때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 또는 불환과를 증득한다), 이하의 논설은 후자에 대한 것이다.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도로써 욕계 수혹을 끊은 상태에 따라 수신ㆍ수법의 두 성자는 예류ㆍ일래ㆍ불환 등의 세 가지 과향(果向)으로 설정된다.
4)
예류과(혹은 須陀洹, srotāpanna)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수도위의 성자’에서 상론한다.
5)
일래과(혹은 斯陀含, sakṛdāgamin)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수도위의 성자’에서 상론한다.
6)
불환과(혹은 阿那含, anāgāmin)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수도위의 성자’에서 상론한다. 참고로 유루의 세속도로써는 유정지(有頂地, 무색계 제4 비상비비상처)의 혹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본론 제66권 ‘유ㆍ무루도와 이염의 관계’ 참조), 또한 아라한과는 현관의 제16심에서 획득될 수 없기 때문에 초월증에는 아라한향과 아라한과가 없다.(주8의 본문 참조)
7)
구박(具縛)과, 욕계ㆍ4정려ㆍ아래 세 무색정 각각에 9품이 있기 때문에 일흔세 가지이다.
8)
본론 제66권 ‘유ㆍ무루도와 이염의 관계’ 참조. 유루 세속도로써는 유정지의 수혹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아라한과는 초월증(超越證)에 의해 직접적으로 바로 획득되는 일이 없다.
9)
즉 수신행에서의 믿음이 이 단계에 이르러 더욱 증장하여 무루의 승해를 처음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신해(śradhādhimukta)라고 한 것이며, 수법행에서의 혜가 더욱 증장하여 정견의 혜로 현현하였기 때문에 견지(dṛṣṭiprāpta)라고 한 것이다.
10)
승과도란 향도(向道)를 말하는 것으로, 선행한 과도(果道)보다 뛰어난 도라는 뜻이다. 혹은 다음에 초래되는 사문과를 ‘뛰어난 것[勝]’이라고 할 때, 그것으로 나아가는 도라는 의미에서 승과도라고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비록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수혹의 일부(1품 내지 5품, 혹은 7품 내지 8품)나 전부, 혹은 무소유처의 수혹을 끊고 견도에 들어 16심에 이르렀을지라도 아직 과도(果道)로부터 승과도(즉 向道)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예류과 등(‘과위에 머무는 자’)라고만 하지 일래향 등(다음의 과위로 향하는 자)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11)
『발지론』 제6권(대정장26,p.947상; 한글대장경176,p.131), “[무루의] 낙근은 변정천(제3정려 제3천) 이하와, 성자로서 [제4정려] 이상에 태어나는 자가 성취한다(樂根遍淨以下, 及聖者生上成就).” 자세한 뜻은 차주(次註) 참조.
12)
이는 초월증으로서 과위를 획득한 성자는 현생에서 다음 과위의 향도(向道, 즉 승과도)를 일으키게 된다는 논의이다.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아래 세 정려의 염오를 떠난 이는 유루의 낙근도 끊었는데, 만약 이러한 이가 그 후 제2정려나 초정려 혹은 미지정 등의 하지에 의거하여 현관 제16 찰나의 마음을 획득(즉 불환과)하고서 승과도(즉 向道)를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죽어 제4정려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무루의 낙근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유루의 낙근은 끊어졌을 뿐더러 사지(捨地)인 제4정려 이상에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지론』에서 “변정천(제3정려 제3천) 이하와, 성자로서 제4정려 이상에 태어나는 자는 무루의 낙근을 성취한다”고 말한 것은 결정코 현생에서 승과도를 일으켜 무루의 낙근을 성취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대비바사론』 제90권, 한글대장경121,p.327-8 참조)
13)
‘선구’란 구박(具縛)의 성자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견도에 들기 전에 욕계 수혹 중 1품도 끊지 못한 자, 다시 말해 욕계의 수혹을 모두 갖춘 자를 말하며, ‘배리욕’란 욕계 9품의 수혹 중 일부분(6ㆍ7ㆍ8품)을 끊은 자를, ‘전리욕’이란 9품 전체를 끊은 자를 말한다. 선구는 차제증(次第證)이며, 뒤의 두 가지는 초월증(超越證)의 성자이다.
14)
‘견도위의 성자’에서 수신행과 수법행의 세 가지 과향(果向)을 논설하면서 욕계 9품의 수혹을 분별하였다. 따라서 3계 9지(욕계와 4정려ㆍ4무색정)에는 모두 81품의 수혹이 있으며, 그 대치도인 수도(修道)에도 81품이 있다.
15)
3계 9지에 각기 9품의 수혹이 있기 때문에 모두 81품의 번뇌가 되며(즉 견혹은 돌이 깨어지듯이 단박에 끊어지기 때문에 그 수를 번뇌 자체에 근거하여 헤아리지만, 수혹은 연근의 심줄이 끊어지듯이 점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품류에 근거하여 헤아린 것이다), 그것을 끊고 임지하는 것은 무간도와 해탈도이기 때문에 대치도는 모두 162찰나의 마음이다. 곧 최후의 1찰나의 마음(有頂地 하하품의 해탈도)은 무학도이지만, 현관 제16심이 수도이기 때문에 수혹의 대치도는 162찰나가 된다.
16)
전술한 ‘수도위(제16심)의 성자’ 참조.
17)
현관의 제16 찰나 도류지에 이르러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고 수도위에 든 자를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성도의 흐름에 이른 자’로서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며, 최대한 인ㆍ천을 일곱 번 왕래한 후 반열반을 성취한다.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욕계 9품의 수혹 중 상상품의 혹이 2생을 초래하고, 상중ㆍ상하ㆍ중상의 3품이 각기 1생을 초래하며, 중중ㆍ중하품이 1생을, 그 밖의 하 3품이 1생을 초래하기 때문으로, 이는 법이(法爾)이다.(후술)
18)
『중아함경』 제1권 「수유경(水喩經)」(대정장1,p.424하), 極受七有, 天上人間七往來已便得苦際.
19)
만약 처음으로 무루성도를 획득하였을 때를 ‘예류과’라고 한다면, 성제현관의 첫 찰나의 마음에 의해 처음으로 성도를 획득하기 때문에 이것을 예류과라고 이름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예류과가 아니라 예류향이다.(예류향은 견도 첫 찰나에서 제15찰나에 걸쳐 있는 初果向의 성자로서, 4향 4과를 아라한과로부터 헤아려 나아갈 때 여덟 번째이기 때문에 제8의 성자라고 하였다. 『대비바사론』 제46권, 한글대장경119,p.495 참조) 또한 만약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하였을 때를 ‘예류과’라고 한다면,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 세간도로써 욕계 6품의 수혹을 끊은 자(倍離欲)가 도류지의 단계에서 일래과를 획득하였을 때에도, 또한 9품의 수혹을 모두 끊은 자(全離欲)가 도류지의 단계에서 불환과를 획득하였을 때에도 역시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예류과라고 이름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20)
즉 배리욕과 전리욕의 행자는 이미 초월증이기 때문에 그들의 명칭은 일찍이 이생위에서 끊어진 수혹(修惑)에 근거하여 설정된다. 예류과라는 명칭은 오로지 일체의 과위를 두루 획득하는 차제증자가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할 때에 근거하여 설정된 명칭이다.
21)
즉 도류지의 단계(제16심)를 예류과라고 하는 것은 그 때 향ㆍ과의 무루도를 획득하고, 견ㆍ수도를 획득하며, 4제현관의 16심(8忍ㆍ8智)을 획득하기 때문이지만, 제8 예류향의 단계(제1 고법지인에서 제15 도류지인)에서는 아직 이 세 가지 인연을 충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류과라고 이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2)
『구사론』 제23권(고려장27,p.627중; 대정장29,p.123중; 권오민 역,p.1074)에서는 “욕계 인ㆍ천에서 일곱 번 생유와 중유로 이어지기 때문에 28(有)라고 해야 한다”고 힐난하였다.
23)
5온의 각각을 고ㆍ집ㆍ멸ㆍ도ㆍ애미(愛味)ㆍ과환(過患)ㆍ출리(出離)라는 일곱 가지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을 ‘35처선’이라 하지 않고 ‘7처선’이라고 하는 것은 ‘칠’이라는 수가 공통되기 때문이다. 또한 칠엽수의 잎은 대단히 많지만 한 가지에 일곱 잎만 달리기 때문에 칠엽수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류과를 획득한 이는 이후 최대한 인ㆍ천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지만 ‘칠’이라는 수가 공통되기 때문에 ‘극칠반생’이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24)
『중아함경』 제48권 「다계경(多界經)」(대정장1,p.724상), 若見諦人受八有者 終無是處. 若凡夫人受八有者 必有是處. 보광은 이를 미사새부(彌沙塞部, Mahīsāsaka) 즉 화지부(化地部)의 물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이 부파에서는 극칠반생의 7생을 인ㆍ천을 합한 7생(인4 천3, 혹은 인3 천4)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25)
즉 인용한 계경에서는 인취 혹은 천취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경문의 언사(密義說)에만 집착할 경우, 부처님께서는 중유의 존재도 부정하고 오로지 생유의 7생만을 인정하였다고 말해야 한다는 힐난. 참고로 화지부에서는 중유(中有)의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26)
『별역잡아함경』 제8권(대정장2,p.434중), 如來記, 彼得須陀洹, 於人天中七生七死, 得盡苦際. 그러나 이 『별역잡아함경』이 음광부 소전(所傳)인지 아닌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27)
상류반은 ‘7종 불환’ 중의 하나로서(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함), 색계에 태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전생(轉生)하여 반열반에 드는 불환과를 말한다. 여기서 보다 높은 경지란 색계 제4정려의 최고천인 색구경천, 혹은 무색계 비상비비상처 즉 유정천(有頂天)을 말하는데, 색계의 모든 하늘을 거쳐 색구경천에 태어나 반열반하는 불환을 변몰(遍歿)이라 한다. 본 논설은, “견도가 원만한 자(현관을 완전히 성취한 자)는 여덟 번째 유를 받는 일이 없다”는 경설은 인취나 천취 중 하나의 취에 근거하여 밀의로서 설한 것이라면, 어떻게 변몰에 대해서는 하나의 취에 근거하여 여덟 번 이상의 생을 받는다고 설한 것인가? 하는 힐난. 참고로 『구사론』 제23권(고려장27,p.627중하; 대정장29,p.123중; 권오민 역,p.1075)에서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상류반(上流般)으로서 가장 높게는 유정처(有頂處)에서 [반열반에 드는] 자도 역시 마땅히 하나에 취에 근거하여 여덟 번째의 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고 논설하고 있다.
28)
다시 말해 “예류과는 더 이상 여덟 번째 유(有)를 받을 리가 없다”고 설하는 경이야말로 일반적인 경설에 위배되지 않으니, 즉 앞서 인용한 경이 그 밖의 다른 별도의 뜻[別意]을 갖는 경설에 위배된다면, 그러한 경설이 바로 밀의설(密義說)이라는 뜻이다.
29)
전초(全超)란 상류반의 불환으로서 색계 중의 어떤 한 하늘에 태어나 목숨을 마치고 나서 바로 색구경천으로 가 반열반에 드는 성자, 반초(半超)는 중간에 다른 하늘(1천 내지 13천)을 거치면서 색구경천으로 가 반열반에 드는 성자.(본론 제65권 ‘7종 불환’ 참조) 이 역시 색ㆍ무색계에 걸쳐 있는 변몰과는 달리 오로지 색계에서 전전하며 반열반하는 성자이기 때문에, 오로지 욕계에서 최대한 7생을 전전하며 반열반한다고 한 예류과와 경우가 동일하다. 따라서 예류과의 7생을 취(趣)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30)
어떠한 이유에서 전초와 반초 혹은 변몰하며 각각의 천처에 태어나게 되는지 밝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일찍이 어떠한 경에서도 세 경우를 차별하여 별도로 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31)
『중아함경』 제2권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 제1선인(선사)은 보리의 겨가 잠시 타다가 바로 꺼지는 것과 같으며, 제2선인은 시뻘건 쇳덩이를 망치로 칠 때 불꽃이 솟구치다가 바로 꺼지는 것과 같으며, 제3선인은 그러한 불꽃이 땅에 이르기 전에 꺼지는 것과 같으며(이상 중반열반), 제4선인은 그러한 불꽃이 땅에 떨어져 바로 꺼지는 것과 같으며, 제5선인은 그러한 불꽃이 작은 섶풀[薪草]에 떨어져 잠시 타다가 꺼지는 것과 같으며, 제6선인은 그러한 불꽃이 많은 섶 풀에 떨어져 그것을 다 태우고 꺼지는 것과 같다.(이상 생반) 그리고 제7선인(상류반)의 경우 그러한 불꽃이 공중으로 날다가 섶 풀에 떨어져 그것을 다 태우고, 다시 촌읍(村邑)ㆍ성곽(城郭)ㆍ산림(山林)ㆍ광야(廣野)를 불태우고 길[道]이나 물[水]이나 평지(平地)에 떨어져 꺼지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본론 제24권 ‘중유의 존재증명’에서도 언급되었다. 현존의 「선인왕경」과는 비유상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제24권에서는 중반과 생반을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각기 장작개비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速般), 쇳덩어리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非速般), 쇳덩어리의 커다란 불꽃이 흩어질 때의 모습(經久般)에 비유하고 있다. 중반과 생반의 각기 세 가지와 상류반 등 일곱 불환을 말하는 ‘7선사취(善士趣)’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한다.
32)
원문은 ‘旣說上流至道等邊無緣故滅’이지만, 다음에 논설되는 문구(쥬34의 본문)나 송본(宋本) 등 다른 판본에 따라 ‘무연(無緣)’을 ‘무의(無依)’로 고쳐 번역하였다.
33)
주31)의 제7선인 참조.
34)
원문은 ‘如有上流乃至道邊, 或水邊等無所依故--.’로 되어있지만, 문맥이나 앞의 언급, 혹은 다른 판본에 따라 ‘上流’의 ‘상’을 ‘화(火)’로 고쳐 번역하였다.
35)
다시 말해 일반적 사실만을 설한 요의설(了義說)로서, 별도의 특별한 뜻을 설한 밀의설(密義說)이 아니다.
36)
앞서 이설자는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경’에는 밀의설의 특징[相]이 없다고 하였지만, ‘상류반에 대해 설하고 있는 경’에서는 분명하게 하나의 취(趣)에 근거하여 상지로 전생(轉生)하다 반열반하는 전초 반초 변몰의 세 불환과를 설하고 있는데 반해, 이설자가 인용한 ‘‘여덟 번째 유를 부정하는 경’에서는 하나의 취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설이라는 뜻이다.
37)
『구사론』(고려장27,p.627하; 대정장29,p.123중; 권오민 역,p.1075)에서는 본 항의 귀결로서 “만약 인취 중에서 예류과를 획득하였다면 그는 다시 인취에 환생하여 반열반을 획득하며, 천취 중에서 획득한 자라면 다시 천취에 환생하여 반열반을 획득한다”는 논설을 더하고 있다. 즉 인취와 천취 각각이 7생이 아니라면 인취에서 예류과를 획득하고서 천취에서 반열반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38)
“어떠한 연유에서 그같이 [현관을 성취한 예류과의 성자는] 여덟 번째 유(有)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인가?”(『구사론』 제23권, 앞의 책)
39)
이는 『구사론』(고려장27,p.627하; 대정장29,p.123중; 권오민 역,p.1076) 상에서의 제1설이다.
40)
이는 『구사론』에서 주39)의 예증이다. 칠보독사에게 물리면 일곱 걸음만에 죽는 것처럼, 걸리면 4일 만에 발작하는 제사일학(第四日瘧)처럼 예류과의 소의신은 제7 생에 이르면 상속신이 법이로서 성숙하여 온갖 번뇌를 다하게 된다는 뜻이다.
41)
이 역시 성도의 종류가 법이로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42)
이는 『구사론』(앞의 책) 상의 제2설이다. 5하분결 중의 유신견ㆍ계금취ㆍ의(疑)의 3결은 견도로써 끊어지지만 그 밖의 수혹인 탐(貪)ㆍ진(瞋)의 2결과 상계에 수순하는 색ㆍ무색계의 2탐과 도거ㆍ만ㆍ무명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43)
문맥상 불환과도 아직 5상분결을 끊지 못하였으니, 그 역시 7생을 초래한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지만, 7결을 끊지 못한 일래과의 예가 보다 적합할 것이다.
44)
불법(佛法)이 유통되지 않는 시기에는 수계작법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45)
부처와 독각 등 지자(智者)는 스승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같은 지혜를 획득할 때 자연적으로 구족계를 획득한다.(본론 제37권 ‘세 종류 율의의 획득조건’ 참조)
46)
『잡아함경』 제43권 제947경(대정장2,p.242중), 斷此三結(身見ㆍ戒禁取ㆍ疑)得須陀洹, 不墮惡趣法決定正向三菩提, 七有天忍往生, 究竟苦邊.
47)
허공은 열반과 마찬가지로 무위로서 결코 조작될 수 없는 것이지만, 집을 허무는 것을 ‘허공으로 만든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48)
욕계 9품의 수혹 중 앞의 6품을 끊은 자는 1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일래과라고 하는데, 그 이전에 3품(상상품 내지 상하품)만을 끊은 자도 있고, 4품 혹은 5품을 끊은 자도 있다. 그리고 3품을 끊은 자는 3생만을, 4품을 끊은 자는 2생만을 남기고 있어, 극칠반생의 예류과와 1생의 일래과의 중간단계로서 3생 또는 2생의 가가(kulaṃkula)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가’란 인ㆍ천의 집에서 집으로 옮겨간다는 뜻이다.(후술)
49)
본송 중에서 “욕계 3ㆍ4품의 수혹을 끊고 세 번ㆍ두 번 태어나는 자”라고 하여 단지 첫 번째와 세 번째 인연에 대해서만 설한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뜻이다.
50)
즉 “욕계 3ㆍ4품[의 수혹]을 끊은 자 ‘등’”이라고 설하면.
51)
즉 본송에서 두 번째 인연(무루근의 성취)을 설하지 않은 것은 ‘수혹을 끊었다’는 사실로써 이미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세 번째 인연(세 번ㆍ두 번 태어나는 것) 역시 ‘3ㆍ4품의 수혹을 끊었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설하게 된 것은, 이후 반드시 세 번이나 두 번의 생만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3ㆍ4품의 수혹을 끊고 나서 더욱 증진한 결과 일래과에 이르러 1생만을 받을 수도 있고, 바로 반열반하여 생을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불환과의 성자로서 상류반(上流般)이 되어 상계를 두루 전생(轉生)하다가 반열반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명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52)
이는 예류향이다. 본권 ‘견도위의 성자’ 참조.
53)
즉 이생위에서 3품과 4품의 수혹을 끊고서 견도위 중에 머무는 예류향 역시 수혹을 끊었고, 무루근을 성취하였고, 생을 받는 등의 가가(家家)와 동일한 세 가지 인연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기 위해 반드시 ‘세 번ㆍ두 번 태어난다’는 말을 설하였어야 한다는 뜻이다.
54)
유여사가 예증(例證)한 예류향은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의 세간도로써 3ㆍ4품의 수혹을 끊은 자였으며, 무루근 또한 견혹을 대치하는 것이지 수혹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55)
이에 대해서는 ‘일래과’(주57의 본문)에서 다시 논설한다.
56)
즉 5품(중중품)을 끊을 경우, 이 생에서 바로 6품을 끊고 일래과에 이르기 때문에(5ㆍ6품은 함께 1생을 초래함) 5품단(斷)의 ‘가가’는 인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욕계 제6품의 수혹은 5품단의 성자를 장애하여 일래과를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없는데, 그것은 일래과가 되더라도 어차피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 최후의 1혹(그것에 의해 한 번의 생을 남긴 성자를 ‘一間’이라 함)은 불환과의 획득을 장애하는데, 불환과는 바로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주59참조) 이 같은 욕계 9품의 수혹을 두고서 설정된 일래와 불환의 향ㆍ과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57)
즉 3생의 인가가는 천취의 생을 두 번 받고 인취의 생을 세 번 받으며, 2생일 경우 천취의 생을 한번 받고 인취의 생을 두 번 받는다.
58)
일간(ekavīcika)이란 일래과(6품단)와 불환과(9품단)의 중간단계로서, 인취 또는 천취에서 한 번의 생을 받고 다음 생에 반열반한다. 따라서 현생과 열반 사이에 1생의 간격이 있기 때문에 ‘일간’이라고 한 것이다.
59)
원문은 ‘現身不能證一來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앞(주56)에서 언급한 대로 제6품의 수혹은 5품단의 성자를 장애하여 일래과를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다시 말해 제6품과 제5품 사이에는 생의 간격이 없기 때문에) 5품의 수혹 끊을 경우 현신에서 일래과를 증득하게 된다. 이 논설은 앞에서 제9품을 끊고 불환과를 증득할 때에는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8품과 9품 사이에는 생의 간격이 있지만, 5품과 6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예증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제5품의 수혹은 일래과를 획득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지만, 제8품은 불환과를 획득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60)
7품과 8품의 수혹을 끊었다는 점에서 불환향은 일간과 동일하지만, 일간은 세 가지 인연을 갖춘 자라고 한다면 불환향은 다만 단혹에 근거한 명칭일 따름이다.
61)
그때는 다만 예류과나 일래과라고 이름하지 가가(家家)나 일간(一間)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앞(‘제16심의 성자가 일래향 등이 아닌 까닭’)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62)
즉 경에서는 가가나 일간에 대해 설하면서 ‘오로지 유신견 등의 3결을 영원히 끊고--’라고 하여 한정적으로 설하였다면 예류과나 일래과와 동일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로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사실만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경설로써 “일찍이 이생위에서 3품과 4품, 7품과 8품 등의 수혹을 끊고 견제(見諦)에 들어 과위를 획득한 자(즉 예류과와 일래과)가 증진하여 무루도로써 수혹을 끊을 때를 가가와 일간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63)
즉 경에서는 예류과나 일래과에 대해 “‘오로지’ 3결을 영원히 끊었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결도 끊었음을 알 수 있듯이, 가가나 일간에 대해서도 ‘오로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경에서 설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64)
원문은 ‘如是所說家家一間, 旣不言唯, 進斷無失.’
65)
가가와 일간에 대해 경에서 “생의 수(數)가 감소한다”고 설하였으므로, 생의 원인이 되는 번뇌가 예류과와 일래과에 비해 더욱 많이 끊어졌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66)
온갖 행은 둔근과 이근에 따라 차별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에 따라 둔근과 이근의 종성이 차별되기도 한다.(전술한 ‘견도위의 성자’ 참조)
67)
여기서 ‘그의 부파의 논(論)’이라 함은 상좌 슈리라타가 지었다고 전하는 『경부비바사(經部毘婆沙)』를 말함인가?
68)
불환과에 대해서는 이미 욕탐과 진에를 모두 끊었다고 설하였고, 예류과에 대해서는 악취로 나아가게 하는 탐 등을 영원히 끊었다고 설하였으며, 일래과에 대해서는 탐 등이 엷어졌다고 설하였으므로, 탐 등의 수혹은 여러 품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일래과는 6품(중상품)까지의 수혹을 끊었으며, 나머지 3품(하상품 내지 하하품)의 수혹은 아직 끊지 못하였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일래과를 ‘탐 등의 번뇌가 엷어진 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69)
“만약 1품에 따라 단박에 끊어지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하고], 만약 9품에 따라 점진적으로 끊어지는 것이면 [이를 수소단이라 이름한다].” 본론 제46권 ‘98수면과 견ㆍ수소단(續)’을 참조할 것.
70)
즉 견혹(見惑)의 품류가 먼저 끊어지고 난 다음에 수혹(修惑)의 품류가 끊어진다는 뜻이다.
71)
다시 말해 “상좌도 이미 일체의 번뇌는 견소단과 수소단의 품류별로 끊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니, 9품으로 끊어진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72)
원문은 ‘此據集斷, 密作是說’이지만, 『구사론』 제24권(고려장27,p.629상; 대정장29,p.124중)의 ‘於此時, 摠集斷故’에 따라 보충하였다.
73)
5하분결은 유신견ㆍ계금취ㆍ의(疑)ㆍ욕탐ㆍ진에로서, 이치상 초월증의 성자는 일찍이 이생위에서 뒤의 두 가지 수혹을, 그 뒤 견도위에서 앞의 세 결을 끊으며, 차제증의 성자는 견도위에서 세 결을, 수도위에서 욕탐과 진에의 두 결을 끊지만, 지금 불환과의 단계에서 이러한 다섯 결의 끊어짐이 모두 결집되었기 때문에 이를 은밀히 ‘오하결단(五下結斷)’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74)
차제증의 경우 수도위에서 욕탐ㆍ진에를 끊고 불환과를 획득하며, 초월증의 경우 현관 제16심에서 유신견ㆍ계금취ㆍ의(疑)를 끊고서 불환과를 획득한다.(前註 참조)
제65권
1)
생결은 생유(生有)를 낳는 번뇌, 기결은 중유를 일으키는 번뇌. ‘기(起)’는 중유의 이명(異名)이다. 본론 제30권 ‘중유의 다섯 이명’ 참조.
2)
‘근수’는 근면한 정진(精進), ‘속진의 도’는 더 이상의 노력을 필요치 않는 도이다.
3)
“유행반열반이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 가행을 멈추지 않고 많은 공용(功用, 즉 노력)에 의해 비로소 반열반하는 불환을 말하니, 이것에는 오로지 근수(勤修)만이 존재할 뿐 속진의 도가 없기 때문이다. 무행반열반이란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가행을 게을리 하고 많은 공용을 닦지 않더라도 바로 반열반하는 불환을 말하니, 근수와 속진의 도를 모두 결여하였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29상중; 대정장29,p.124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084)
4)
이는, 유위법을 반연하는 무루성도에 의해 반열반하는 것이 유행반, 무위법을 반연하는 성도에 의해 반열반하는 것이 무행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중반열반도 유위법과 무위법을 반연하여 무루의 성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 역시 유행반ㆍ무행반이라고 해야 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참고로 이 같은 有爲緣道와 無爲緣道에 의한 반열반 설은 『대비바사론』 제174권(대정장29,p.875상; 한글대장경124, p.547-8)에 『집이문족론』의 인용으로 설해지고 있다.
5)
『구사론』 제24권(고려장27,p.629상중; 대정장29,p.124중; 권오민 역,p.1085).
6)
『잡아함경』제29권 제821경(대정장2,p.211상). 여기서는 5하분결을 끊음으로써 중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생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무행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유행반열반을 획득하며, 거기서 깨닫지 못한 자는 상류반열반을 획득하니, 이것을 증상의 혜학(慧學)이라 한다고 설하고 있다.
7)
이에 반해 『구사론』(앞의 책)에서는 빠르며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열반도인 무행반을 보다 상위로 간주하고 있다. “계경 중에서는 무행반열반을 먼저 설하고 그 뒤에 유행반열반을 설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순서가 이치에 상응하니, 빠르게 나아가는 속진도(速進道)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무행과 유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무행은]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고, [유행은] 공용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광(普光)과 법보(法寶)는 다 같이 이를 경부(經部)의 해석으로 판석하고 있다. 즉 유부에서는 빠르지는 않지만 많은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유행반을 무행반보다 상위에 두고 있지만, 경량부에서는 빠를 뿐더러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열반인 무행반을 보다 상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8)
잡수란 두 찰나의 무루정려 중간에 유루정려를 닦는 것으로,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설함. 곧 잡수의 정려는 능히 5정거천(淨居天, 즉 無繁ㆍ無熱ㆍ善現ㆍ善見ㆍ色究竟의 5천을 말함)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에 색구경천에서 반열반하는 것이다.
9)
‘전초’란 색계 중의 어떤 한 천처(天處)에서 몰하고 나서 바로 단박에 모든 천처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으로 가는 것을 말하며, ‘반초’란 모든 천처를 초월하지 않고 중간천 내지는 아래 정거천에 이르러 하나의 천처를 초월하여 색구경천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변몰’은 색계에 대한 애미(愛味)가 많아 모든 천처에 한번씩 태어난 후 색구경천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후술)
10)
색계가 17천이 아니라 16천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주12) 참조.
11)
즉 범중천에서 몰하여 색구경천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14천이 있는데, 반초는 바로 1천(그럴 경우 색계 15생) 내지 13천(그럴 경우 색계 3생)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곧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대범천을 하나의 천처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16천이라 한 것이다.(次註참조)
12)
가습미라 비바사사는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대범천을 제외한 색계 16천설을 주장하는 것이다.(본론 제21권 ‘외국사와 상좌의 색계 17천설 비판’ 참조) 즉 색계에 대범천이 존재한다면 불환의 성자는 이곳에서도 생을 받아야 하겠지만, 범중천의 주인인 대범천은 스스로를 일체 세간의 원인이라고 하는 계금취견을 일으키고, 또한 자신이 일체 세간의 유일한 구세주(生主)라는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불환의 변몰성자는 그곳에 태어나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색계의 별도의 처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13)
색계 5정거천은 바로 잡수정려에 의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후술)
14)
두 가지 상류반 중에서 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관행자로서 관(觀)이 뛰어나고, 무잡수에 의해 유정천에서 반열반하는 자는 지행자로서 지(止)가 뛰어나니, 전자는 혜(慧)를 즐기는 자이고, 후자는 정(定)을 즐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15)
다시 말해 “색계에서 몰하고서 색계에 태어난 자는 중유 중에서 반열반하지 않으니.”
16)
색계에서 몰하여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하는 상류반에도 중유에서 반열반하는 중반열반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힐난이다.
17)
무색계에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색계의 반열반 중에 중반열반을 제외한 네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18)
5종불환 가운데 유행반과 무행반은 생반열반에 포섭된다.
19)
참고로 『구사론』 제24권(고려장27,p.630상; 대정장29,p.125상; 권오민 역,p.1089)에서는 “중반열반은 [중유에서] 신속하게 반열반[速般]을 획득하고, 얼마동안 머문 후 반열반[非速般]을 획득하고, 오랜 시간 지난 후 반열반[經久般]을 획득하는 세 종류로 나누어지니, 세 가지 불꽃의 비유(제64권 주31 참조)로써 나타낸 바와 같기 때문이다”고 논설하고 있다.
20)
순기의 ‘기’는 중유의 다른 이름. 즉 순기업은 중반을, 다음 생에 결과를 낳는 순생업은 생반을, 다음 생 이후에 결과를 낳는 순후업은 상류반을 인기한다. 다음의 번뇌와 근기의 경우도 이에 준하여 해석할 것.
21)
즉 중반과 생반을 각기 시간적으로 나눈 세 종류는 하ㆍ중ㆍ상품의 번뇌와 상ㆍ중ㆍ하품의 근기의 차별에 의한 것이고, 상류반을 전초ㆍ반초ㆍ변몰의 세 종류로 나눈 것은 번뇌와 근기, 그리고 순후수업의 차별에 따른 것이다.
22)
『중아함경』 제2권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 7선사취란 중반과 생반의 각기 세 종류와 상류반의 불환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이미 욕계의 번뇌를 끊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선사취’이다.
23)
중반과 생반는 각기 세 가지로 나누면서 어째서 상류반은 한가지로 설정한 것인가 하면, 전초(全超)든 반초(半超)든 변몰(徧歿)이든 상류반의 세 가지는 다 같이 상지로 유행(流行)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24)
잡수(雜修)는 무루와 유루의 선정을 섞어 닦는 것이며, 무잡수(無雜修)는 오로지 무루의 선정만을 닦는 것으로서(후술), 잡수에 의해서는 오로지 색계에 태어나 상지(上地)로 유행하다 색구경천에서 반열반에 들고, 무잡수에 의해서는 색계에 태어나 상지로 유행하다 무색계 유정천(有頂天)에서 반열반에 든다.
25)
원문은 ‘雖彼一一亦有同義, 而等第三. 於上流中雖有異義, 而等前二.’ 즉 중반과 생반의 세 가지도 각기 색계 중유의 상태에서 반열반하고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상류반에 수많은 차별적인 뜻도 결국 이 같은 점에서 중반이나 생반과 동등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7선사취는 말하자면 색계에 태어나 반열반하는 불환과를 일곱 유형으로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을 선사취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함.
26)
『중아함경』 제2권 「선인왕경(善人往經)」(대정장1,p.427상) 참조. 유학의 정견이란 4제를 관하여 고(苦)ㆍ비아(非我) 등의 행상을 관한 자로서, 견도 고법지인 이후의 성자를 말한다.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0중하; 대정장29,p.125중; 권오민 역,p.1092)에 의하면, 중반ㆍ생반ㆍ상류반 이외의 다른 모든 유학도 더 이상 살생ㆍ투도ㆍ사음ㆍ망어ㆍ음주를 짓지 않는 율의를 획득하였으며, 견소단의 불선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선사’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오로지 선만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뛰어난 원인에 의거하여 상계로 간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들만을 선사취로 설정하였다.(후술)
27)
예류과나 일래과의 성자도 선업을 행하지만 불선심으로써 비범행 등을 지어 욕계에 태어난다는 점에서 범부와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불환의 성자는 선행을 행하면서 불선심으로써 행하는 비범행 등을 떠났고, 또한 욕계를 초월하여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선사취’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28)
일찍이 생을 거친 성자, 즉 경생(經生)의 성자란 타계에 가지 않고 항상 어떤 1계에서 태어나고 죽은 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경생의 성자가 불환과를 획득할 경우에도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중반ㆍ생반ㆍ상류반의 구별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29)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0하; 대정장29,p.125중; 권오민 역,p.1093)에 따라 보충하였다. 즉 욕계에서만 생을 거친 자는 욕계의 열등함과 더러움만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상계도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계로 가지 않고 반열반하지만, 색계의 경생의 성자는 색계의 선미(善美)함을 알았기 때문에 무색계로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30)
『중아함경』 제33권 「석문경(釋問經)」(대정장1,p.638상). “나는 여기서 목숨을 마친 뒤 인간으로 태어나--지혜[智]를 배워 만약 지혜를 획득하면 바로 구경지(究竟智, 즉 아라한)를 획득하고 구경변(究竟邊)을 획득하겠지만, 지혜를 배워 만약 지혜를 획득하고서 구경지를 획득하지 못하면 색구경천이라 이름하는 최상의 묘천(妙天)에 태어나리니, 대선인(大仙人)이시여, 원컨대 응당 아나함(阿那含, 즉 불환과)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대선인이시여, 나는 이제 결정코 수타원(須陀洹, 즉 예류과)을 획득하였습니다.(역자 抄譯)” 즉 천제석이 천 중에서 수타원을 획득하고서 인간으로 태어나 반열반한다고 말한 것은 성자로서 경생(經生)하는 자를 나타내며, 죽어 색구경천에 태어난다고 말한 것은 상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므로, 이는 곧 욕계의 경생의 성자도 상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이설(異說)의 경증이다. 이하 이는 올바른 경증이 아님을 해명한다.
31)
『대비바사론』 제53권(대정장27,p.277하; 한글대장경120,p.73) 참조. 즉 “천제석이 욕계 경생의 성자는 상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같이 말한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그릇된 앎이 도에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꾸짖어 제지하지 않으신 것이며, 또한 훗날 스스로 법성을 알게 될 때 부끄러워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꾸짖지 않으신 것이다.”
32)
무루와 유루의 정려를 번갈아 가며 닦는 것을 잡수(雜修)라고 하는데, 이는 오로지 욕계를 떠난 성자 즉 불환과 아라한만이 닦는 선정이다. 즉 그들은 지금 바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정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거기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유루와 무루의 정려를 섞어 닦는 것이다. 혹은 불환과의 경우 5정거천에 태어나기 위해 잡수하기도 하는데, 무루법에 의해서는 그러한 존재가 초래되지 않기 때문이다.(후술)
33)
낙행이란 지관(止觀)이 균등하게 일어나 심사(尋伺) 등의 동란이 없어 목적한 바를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도를 말한다. 본론 제71권의 ‘4통행(通行)’ 중 ‘낙통행’을 참조바람.
34)
“온갖 정려를 잡수하는 자는 바로 아라한이나 혹은 불환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1상; 대정장29,p.125하; 권오민 역,p.1095). 욕계를 떠나지 못한 미이욕(未離欲) 성자는 근본정에 들 수 없으며, 이욕(離欲)의 이생(異生)은 비록 근본정에 들 수 있을지라도 무루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35)
시해탈이란 적당한 시기를 만나야 비로소 해탈하는 아라한으로, 여기에는 퇴법(退法) 등의 다섯 종류가 있으며, 불시해탈이란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해탈할 수 있는 부동법의 아라한을 말한다.(본론 제66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36)
“앞의 두 찰나는 무간도와 유사하고 세 번째 찰나는 해탈도와 유사하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1상; 대정장29,p.125하; 권오민 역,p.1096) 즉 앞의 유루와 무루의 두 찰나에서 불염무치(不染無癡)의 정장(定障)을 멸하고, 무루의 제3찰나에서 그것의 불성취를 획득한다.
37)
미상응의 등지 즉 미정(味定, 정려에 대한 집착)은 애탐과 상응하는 등지로서, 전 찰나의 청정한 등지[淨等持]에 미착(味着)하는 등지.(본론 제77권 ‘8등지와 味ㆍ淨ㆍ무루등지’ 참조) 이는 곧 어떤 과위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인연이 되는 것으로, 둔근자는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앞의 두 이유와 아울러 역시 또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려를 잡수한다.
38)
5정거천이란 색계 제4정려에 포섭되는 무번(無煩)ㆍ무열(無熱)ㆍ선현(善現)ㆍ선견(善見)ㆍ색구경천(色究竟天)으로, 불환과의 성자가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5나함천(那含天)’이라고도 한다.
39)
상품의 잡수는 앞(중품)의 여섯 찰나를 가행으로 삼아 여기에 세 찰나를 더한 것이며, 나아가 극상품은 앞의 열두 찰나의 마음을 가행으로 삼아 세 찰나의 잡수를 더한 것이다. 즉 하품인 세 찰나의 잡수에 의해 무번천에, 중품인 여섯 찰나의 잡수에 의해 무열천에, 상품인 아홉 찰나의 잡수에 의해 선현천에, 상승품인 열두 찰나의 잡수에 의해 선견천에, 상극품인 열다섯 찰나의 잡수에 의해 색구경천에 태어나 반열반하게 된다. 즉 무루법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5정거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유루법을 도와 그것으로 하여금 초래하게 하는 것으로, 무루법은 유(有)를 버리고 등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루의 업력만이 그것(정거)의 이숙을 초래할 수 있다.(후술)
40)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중; 대정장29,p.126상; 권오민 역,p.1098)에는 첫 문장만 인용되고 있는데, 칭우(稱友)에 의하면 이는 대덕 실리라다(室利羅多)의 설로서,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무루근이 증상하여 정려를 잡수하면 무번천 내지 색구경천에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다.
41)
양 설에 대한 중현의 뜻은 이러하다. “온갖 정거천을 초래하게 된 것은 잡수의 힘에 의해서이며, 역시 또한 업력에 의해서이니, 서로가 자조(資助)하였기 때문이다.”(『현종론』 제31권, 고려장28,p.229하; 대정장29,p.929하)
42)
『중아함경』 제51권 「아습패경(阿濕貝經)」(대정장1,p.751중하).
43)
신증(kāyasākṣin)이란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의 성자를 별도로 일컫는 명칭으로, 멸진정은 심식(心識)이 멸한 상태이므로 심식이 존재하지 않는 소의신을 근거로 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심증’이라 하지 않고 ‘신증’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44)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1하; 대정장29,p.126상; 권오민 역,p.1098-1099) 즉 신증이란 불환과의 성자가 멸진정에 머물 때의 명칭이 아니라 출정(出定)하여 심식이 존재하는 소의신[有識身]에 일찍이 획득된 적이 없었던 적정을 증득하였을 때의 명칭이라는 뜻이다. 보광(普光)에 의하면 이는 구사논주 세친이 경부(經部)의 해석을 서술한 것으로, 멸진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멸정 중 세심(細心)’ 내지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을 주장하는 경량부(본론 제13권 참조)로서는 멸진정이 무식(無識)의 소의신에 근거한다는 유부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출정위(出定位)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5)
앞에서 설한대로 유부의 정의(正義)는 현재 상속신 중에 멸진정이 증득된 상태에 근거하여 “불환과의 성자로서 만약 소의신 중에 멸진정의 ‘득’이 생겨난 자이면,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身證)이라고 한다”는 것이지만, 그러한 상태는 심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멸진정으로부터 출관한 상태(즉 後邊)에 근거하여 말해야 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는 그 명칭을 바꾸어 ‘신증’이라 한다”고 해야지 경주의 말처럼 오로지 출관하여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유식신(有識身)의 적정(寂靜)에 대해 ‘신증’이라는 명칭을 설정해서는 출관 전의 상태를 지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46)
8해탈(혹은 背捨)이란 선정을 통해 성취하는 공덕으로,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내적인 색상(色想)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고(제1해탈) 이를 보다 견고히 하며,(제2해탈) 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청정한 해탈을 증득하고(제3해탈) 아래 세 무색정에서 벗어나고(제4-제7해탈), 일체의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멸진정 혹은 滅受想定, 제8해탈)을 말함. 본론 제80권에서 상론함.
47)
『중아함경』 제30권 「복전경(福田經)」(대정장1,p.616상) 참조. 이상의 유ㆍ무학을 27현성(賢聖)이라 한다. 참고로 현존의 「복전경」에서는 신해(信解)를 신해탈(信解脫), 견지(見至)를 견도(見到), 일간(一間)을 일종(一種)으로 번역하였으며, 아라한향 대신 신증을 열거하고 있다.
48)
멸진정은 유소연법(有所緣法, 즉 심ㆍ심소)을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지만(8해탈 중의 제8해탈), 청정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49)
이는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1하; 대정장29,p.126상; 권오민 역,p.1099) 상에서의 정설이다.
50)
다시 말해 “유학의 여덟 가지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즉 유학은 무루의 3학(계ㆍ정ㆍ혜)과 그에 따른 택멸의 수승한 과보를 갖는다. 그런데 신증불환의 경우 그가 획득한 멸진정은 유루이기 때문에 무루의 3학이 아니며, 유위이기 때문에 이계과(離繫果)가 아니다. 그래서 유학의 범주에서 제외한 것이다.
51)
본론 제70권(‘원만한 유학과 무학의 조건’)에 의하면, 멸진정 자체만으로는 원만한 유학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근기, 혹은 근기와 과보와 함께할 때 비로소 원만한 유학의 조건이 된다. 예컨대 견지(見至)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불환과의 신증(身證)은 근기[根]와 과보[果]와 선정[定]을 갖추었기 때문에 ‘원만한 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선정 혹은 근기와 선정만을 갖춘 이를 ‘원만한 유학’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다. 즉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 신증을 18유학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다만 선정(즉 멸진정)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고, 지금 본 절에서 불환과에 ‘신증’을 포함시켜 설한 것은 과보(즉 불환과)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신증은 유위인 멸진정의 획득여부에 따른 분별이기 때문에 18유학 중 불환과에 포함되지만, 신해와 견지 등은 근기에 따른 분별이기 때문에 불환과와는 별도로 헤아렸다는 것이다.
52)
신증 역시 무루의 성법을 증득한 자이기에 유학의 수(數)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8해탈 중 아래 세 무색정의 해탈을 성취한 이도 역시 무루의 성법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유학의 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뜻인가?
53)
여기서 다섯 갈래는 지(地)ㆍ종성ㆍ생처(生處)ㆍ근기ㆍ이염처(離染處).
54)
여기서 6종성이란 5종 불환이 반열반하게 될 때 획득하게 되는 아라한의 여섯 종류. 즉 퇴법ㆍ사법ㆍ호법ㆍ안주법ㆍ감달법ㆍ부동법의 종성을 말함.(본론 제67권 ‘아라한의 6종성’ 참조)
55)
여기서 ‘아흔 가지’는 6종성 각각에 존재하는 하ㆍ중ㆍ상품의 5종 불환이다.
56)
상동.
57)
원문은 ‘總成一萬一千九白六十不還差別.’로 되어 있지만,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2상); 『현종론』(제31권, 고려장28,p.230중)과 다른 판본에 따라, 혹은 실제 계산상 ‘一萬二千九白六十’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8)
그러나 엄격히 말해 실제로는 유정지 제9품(하하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까지를 아라한향이라고 한다.(후술)
59)
유정지 이하의 번뇌는 앞에서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금강유정에 의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사실상 일체의 번뇌를 끊는 공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의 선정과 상응하는 무간도는 일체의 무간도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금강’에 비유한 것이다.
60)
여기서 무사혹(無事惑)은 실체(事, dravya)로서의 경계대상을 갖지 않는 견혹, 다음의 유사혹(有事惑)은 실체로서의 경계대상을 갖는 수혹. 예컨대 유신견의 경계대상인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탐 등의 경계대상인 색 등은 실유의 법이다.
61)
“금강유정에도 다수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유정지 제9품의 혹을 끊는 무간도는 모두 9지(地)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2상; 대정장29,p.126중하; 권오민 역,p.1102) 즉 금강유정은 미지ㆍ중간ㆍ4정려ㆍ아래 3무색 등의 무루정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법ㆍ유지(智), 고(苦)ㆍ공(空) 등의 행상, 소연이 되는 4제 등의 차별에 따라 동일지(地)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이하 이에 대해 상론한다.
62)
상2계의 8지를 능히 대치하는 도류지는 서로 동류인이 되기 때문에 8지의 도제를 반연할 때에는, 그것을 별연(別緣)으로 삼지 않고 총연(總緣)으로 삼아 관찰한다. 그래서 그 때의 행상은 단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 네 가지뿐이다.
63)
본론 제48권 ‘무루연혹의 계지(界地) 관계’:동 주39) 참조.
64)
즉 식무변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앞의 공무변처에 포섭되는 스물여덟 가지 금강유정 중에서 공무변처의 멸제를 반연하는 멸류지의 네 행상을 제외한 스물네 가지가 존재하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금강유정에는 다시 식무변처의 스물네 가지 중에서 식무변처의 멸제를 반연하는 멸류지의 네 행상을 제외한 스무 가지가 있다.
65)
이는 앞에서 설한 유부 정설(正說)에 따른 경우이다.
66)
이는 뒤에 설한 “3무색정의 단계[地]에도 하지의 멸제를 반연하는 유지(類智)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따른 경우이다.
67)
앞서 유부 정설로 언급된 쉰두 가지에, 8지 각각의 도제의 네 행상을 반연하는 서른두 가지 중 총관(總觀)의 네 가지를 제외한 스물여덟 가지를 더한 것이다.
68)
이 계산은 매우 복잡한데, 『대비바사론』 제28권(대정장27,p.143하-144상중)에 의하면, 여기서 총관은 2지,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의 총관이다. 즉 초정려와 제2정려, 제2정려와 제3정려, 나아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7총관 스물여덟 가지, 초정려와 제2ㆍ제3정려, 나아가 식무변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지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6총관 스물네 가지, 초ㆍ제2ㆍ제3ㆍ제4정려, 제2ㆍ제3ㆍ제4ㆍ공무변처, 나아가 공ㆍ식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의 5총관의 스무 가지, 초정려 내지 공무변처, 제2정려 내지 식무변처, 나아가 제4정려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4총관 열여섯 가지, 초정려 내지 식무변처, 제2정려 내지 무소유처, 제3정려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3총관 열두 가지, 초정려 내지 무소유처, 제2정려 내지 비상비비상처의 멸제 네 행상의 2총관 여덟 가지, 그리고 4정려와 4무색정의 멸제 네 행상을 총관하는 네 가지, 도합 백열두 가지를 앞서 유부 정설로서 언급한 쉰두 가지에 더한 것이다. 참고로 『대비바사론』에서는 이 설을 여시설자(如是說者)의 말로 전하고 있다.
69)
주63)의 본문 참조.
70)
즉 무색계에 계속(繫屬)되는 견고소단 내지 견도소단의 혹(惑)을 끊는 고류지인 내지 도류지인과, 유정지 9품의 수혹을 끊는 무간도이다.
71)
‘번뇌의 멸진[盡]’이란 택멸을 말하며, 진지란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다’, ‘나는 이미 집(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다’, ‘나는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스스로 아는 것을 말한다. 본론 「지품(智品)」 제73권 ‘진지와 무생지의 차별’ 참조.
72)
유정지 제9품의 해탈도는 모든 누(漏)의 단진(斷盡)의 득, 즉 3계 9지의 일체의 번뇌를 단진하여 획득하는 택멸의 ‘득’과 구생하는 최초의 법이기 때문에 ‘진지’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 밖의 무생지(無生智)나 무학의 정견과 같은 것은 비록 모든 누의 단진의 ‘득’과 구생할지라도 최초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진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73)
여기서 ‘응과’는 응공(應供)의 과(果), 즉 아라한과를 말한다. 아라한은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이[應供]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 aśaikṣa)’이다.
74)
이에 대해 진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자(예류향 내지 아라한향)는 또 다른 과위를 획득하기 위해 부지런히 학을 수습하기 때문에 유학(有學, śaikṣa)이라 한다. 즉 예류ㆍ일래ㆍ불환의 성자가 자신의 과위에 머물며, 물러나지도 않고 승과도로 나아가지도 않는 상태(본성, prakṛti)로 머무르는 것은, 마치 길가든 행인이 잠시 쉬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는 평온할지라도 더욱 증진하려는 의업이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배우려는 의지[學意]가 충만 되지 않아 학(계ㆍ정ㆍ혜학)의 ‘득’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을 ‘유학’이라 이름한 것이다.(후술)
75)
무학의 성자에는 근기에 따른 6종성이 있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76)
이를테면 예류과 등에 머무는 자는 일래과향 등을 행하여 예류과 등과는 다른 명칭의 일래과 등을 추구하지만, 아라한과에 머무는 이는 더 이상 또 다른 향ㆍ과를 추구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77)
즉 예류ㆍ일래ㆍ불환의 성자가 물러나지도 않고 승과도로 나아가지도 않는 본성(prakṛti)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마치 행인이 잠시 쉬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는 평온할지라도 더욱 증진하려는 의업이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아가 배우려는 계ㆍ정ㆍ혜법의 득(得)이 항상 소의신을 쫓아 일어나기 때문에 ‘유학’이라 이름하였다는 뜻이다.
78)
『잡아함경』 제35권 제976경(대정장2,p.252하), ‘云何爲學?--佛告尸婆, 學其所學故名爲學.’
79)
택멸(열반)ㆍ비택멸ㆍ허공 등의 무위법은 비록 무루일지라도 유학법이나 무학법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학과 무학이 획득한 택멸열반의 무위법은 이생도 역시 유류의 세속도(즉 6行觀, 후술)로써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획득하는 일이 없는 비택멸과 허공은 그들에게 계속(繫屬)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무루의 유위법 즉 성도(聖道)만이 유학과 무학의 법이다.
80)
즉 예류과향ㆍ일래과향ㆍ불환과향ㆍ아라한과향의 향위(向位)와 예류과ㆍ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의 과위(果位).
81)
유루의 세속도로써 욕계 6품 또는 9품의 수혹 등을 떠난 초월증자가 견도에 들 때는 예류과와 일래과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것의 향도는 그 같은 앞의 과위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과는 별도의 존재로서 일래향(배리욕)ㆍ불환향(전리욕)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 참조)
82)
주72)의 본문 참조.
83)
『중아함경』 제49권 「성도경(聖道經)」(대정장1,p.736중), ‘學者成就八支, 漏盡阿羅漢成就十支.’ 여기서 8지(支)란 8성도지를 말하며, 10지란 여기에 정해탈(正解脫)과 정지(正智, 유위와 무위의 두 해탈을 아는 진지와 무생지)를 더한 것을 말한다. ‘정해탈과 정지’에 대해서는 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84)
“유학위 중에는 여전히 계박이 남아 있어 아직 [완전하게]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해탈(正解脫)의 갈래[支]가 없는 것으로, 약간의 계박을 떠났다고 해서 해탈자(解脫者)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해탈의 체성[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지(解脫智, 즉 正智)도 설정할 수 없다.”(본론 제72권 ‘무학의 정해탈과 정지’ 참조)
85)
불증정(佛證淨)은 4증정(불ㆍ법ㆍ승ㆍ聖戒증정)의 하나로, 도제(道諦)를 현관할 때 획득된다. 본론 제72권 ‘4증정’ 참조.
86)
즉 그들(유학)에게는 진지(盡智)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론 제72권 ‘무학의 정해탈과 정지’에서도 설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상론하고 있다.
제66권
1)
이하 무학위와 관련하여 대치도의 제문제, 이를테면 유ㆍ무루도와 이염(離染) 및 이계득(離繫得) 관계, 유ㆍ무루도와 이염의 소의지(地) 문제, 근분정과 이염의 관계, 유루 세속도의 소연과 행상에 대해 논설한다.
2)
즉 차제증자는 무루도로써만 수혹을 끊지만, 초월증자는 유정지(비상비비상처)를 제외한 하지의 수혹을 유루도로써 끊는다.
3)
무루도는 유루에 대해 세력이 강력하여 자지(自地)나 상지(上地) 등의 혹(惑)을 능히 모두 대치할 수 있지만, 유루 세속도의 경우 오로지 상지 근분정(近分定) 중의 그것만이 바로 아래 지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데, 유정지는 더 이상 상지도 상지의 근분정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번뇌는 오로지 무루도에 의해서만 끊어진다. 여기서 유루의 세속도란 예의 6행관(行觀)으로서, 하지를 추(麤)ㆍ고(苦)ㆍ장(障)으로, 상지를 정(靜)ㆍ묘(妙)ㆍ리(離)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본 절 제5항에서 상론함)
4)
예컨대 재수생은 자신이 속한 세계(自地)나 고등학교의 세계(下地)를 싫어하고 대학의 세계(上地)를 흔구(欣求)함으로써 고등학교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듯이, 이생범부는 자지(自地)와 바로 아래의 하지(下地)를 싫어하고 상지(上地)를 흔구하는, 이른바 6행관(行觀)이라 일컬어지는 유루의 세간도를 통해 바로 아래 하지의 염오에서만 벗어날 수 있을 뿐으로, 이를 통해 결코 상지의 염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5)
즉 아래 8지의 번뇌는 상지 근분정의 세속도와, 자지와 하지의 무루도에 의해 끊어질 수 있다.
6)
원문은 ‘聖者二離八修.’
7)
즉 유학의 성자가 무루도로써 하(下) 8지의 번뇌를 떠날 때, 유루의 이계득을 낳지 않는다고 한다면, 색계의 4근본정에 의해 둔근(鈍根)의 불환으로부터 이근(利根)의 불환으로 근기를 바꾸게 되면 앞서 성취한 둔근의 무루도는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이근의 무루도만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에 아래 3무색정에 존재하는 번뇌의 이계득은 획득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의 이계득을 획득할 때 유루의 이계득도 함께 획득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구사론』 제24권(고려장27,p.633중; 대정정29,p.127;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109)에도 인용되고 있다. 참고로 무루도는 퇴실(退失)ㆍ득과(得果)ㆍ전근(轉根) 시에 버려지고, 유루도는 퇴실ㆍ명종ㆍ월계지(越界地)ㆍ단선근 시에 버려진다.
8)
즉 유정지의 염오를 떠나고서 그 후 4정려에 의해 전근(轉根)을 획득하여 일찍이 획득한 둔근의 무루도를 버릴 때에도 역시 유루의 이계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유정지의 유루의 혹을 성취하는 일이 없으며, 또한 이생이 미지정에 의해 욕계의 혹을 끊고 이계득을 획득하며, 다시 승진하여 초정려의 혹을 끊고 명종한 후 제2정려 등에 태어날 때 욕계 등의 이계득을 버렸을지라도 욕계 등의 번뇌를 성취하지 않듯이, 성자가 8지의 염오를 떠날 때 유루의 이계득을 획득하지 않을지라도 아래 3무색정의 번뇌를 성취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앞의 유여사의 주장은 올바른 논증이 아니다는 뜻이다.
9)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3하; 대정장29,p.127중; 권오민 역,p.1110) 다시 말해 이미 하지의 염오를 떠나고 나서 무루의 근본정 등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10)
유루도는 자지의 번뇌에 의해 수증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에 자지와 상지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이며, 바로 아래 지를 제외한 그밖의 하지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이미 그것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루 세속도가 자지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 절 1) ‘유ㆍ무루도와 이염의 관계’에서 논설하였다.
11)
근분정에 의해 염오를 떠날 때, 각 지의 제9품의 해탈도도 역시 근분정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근본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물음. 초정려의 근분인 무루의 미지정은 욕계 내지 유정지의 혹을 끊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유루의 근분정과 이염(離染)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12)
근분(近分)이란 4정려ㆍ4무색정(이를 ‘근본정’이라 함)의 예비적 단계로서, 근본정에 접근한 단계이기 때문에 ‘근분(近分)’이다. 그래서 여덟 가지가 있는 것으로(초정려의 근분은 미지정), 이것은 무간ㆍ해탈ㆍ유루ㆍ무루의 모든 도의 근거가 된다. (본론 「정품」 제78권에서 상론함).
13)
즉 미지정에 의해 욕계의 염오를 떠나며, 제2정려의 근분에 의해 초정려의 염오를, 제3정려의 근분에 의해 제2정려의 염오를 떠난다.
14)
아래 세 정려의 경우, 근분정은 모두 사수이지만, 근본정의 초ㆍ제2정려는 희수, 제3정려는 낙수로서,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 근분에 들기도 하고 근본에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제4정려 이상은 근분과 근본이 사수로서 동일하여 근분정보다 근본정이 들기 쉽기 때문에 해탈도는 근본정에 든 상태에서 일어난다.
15)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4성; 대정장29,p.127하; 권오민 역,p.1113)에서의 설명은 이러하다. “[하지의 유루법은 상지처럼] 적정(寂靜)하지 않기 때문에 ‘추(麤)’라고 일컬은 것으로, 크나큰 노력에 의해 비로소 능히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묘(美妙)하지 않기 때문에 ‘고(苦)’라고 일컬은 것으로, 거칠고 무거운 많은 [번뇌가] 능히 위해(違害)하기 때문이다. 출리(出離)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장(障)’이라 일컬은 것으로, 이 같은 [하지의 유루법은] 능히 자지를 초월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이니, 감옥의 두터운 벽이 능히 그곳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장애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정(靜)’과 ‘묘(妙)’와 ‘리(離)’의 세 가지 행상은 이와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
16)
여기서 조복[伏]은 은복(隱伏) 즉 ‘감춘다’는 뜻이다. 비유부(즉 경량부)에 의하는 한, 세간도에 의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으며, 다만 감출 수 있을 뿐이다.(『대비바사론』 제51권, 대정장27,p.246중, 譬喩者作如是說, ‘異生不能斷諸煩惱’. 大德說曰, ‘異生無有斷隨眠義. 但能伏纏’.:동 제144권, 동 p.741下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17)
비유논사는, “유정지의 혹을 조복시키면 더 이상 퇴실하는 일이 없듯이 진실로 하지의 혹을 조복시켰다면 퇴실하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이미 퇴실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진실로 끊은 것[實斷]이 아니다”고 주장하였지만, 유정지의 예를 하8지에 적용시키는 것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18)
유루의 세속도로는 오로지 바로 아래 지의 번뇌만을 끊을 수 있는 것으로(주10 참조) 유정지(有頂地)는 더 이상 상지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혹을 끊을만한 세속도는 능히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주3 참조)
19)
유루 세간의 해탈도는 상지를 정(靜)ㆍ묘(妙)ㆍ리(離)로 관찰하여 하지의 염오를 떠나는 것인데, 유정지에는 더 이상 상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도 역시 일어날 수 없다.
20)
올달낙가알라마자(Udraka Rāmaputra). 보살이 출가 후 두 번째로 찾아간 스승. 보살은 여기서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고 한다.
21)
묘안(Sunetta, 혹은 善眼). 『중아함경』 제2권 「칠일경(七日經)」(대정장1,p.429중; 한글대장경 중아함경1,p.30):동 제30권 「교담미경(敎曇彌經)」(대정장1, p.619중; 한글대장경 중아함경2,p.215) 등에 이 같은 내용이 설해진다.
22)
비유논사가 언급한 예증(例證) 즉 죽은 상태에 대해서도 ‘번뇌가 끊어졌다’고 말하고, 애들이 흙장난을 할 때 잠시 귀한 장난감에 대해 ‘이염을 획득하였다’고 말한다는 등의 예증에는, 앞서 인용한 “온갖 이생 중에도 5개(蓋)를 끊은 이가 있다”거나 “욕계의 염오를 떠난 외도 선인이 존재한다”는 등의 경설도 역시 그러한 예증처럼 잠시 현행하지 않는 것을 ‘끊었다’거나 ‘이염을 획득하였다’고 설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결정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23)
이생의 번뇌 ‘단’이 다만 현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도에 의한 ‘단’이나 이염에 대해서도 역시 ‘현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경량부에서는 “이미 일어난 수면(隨眠)과 생(生)의 종자(種子)가 소멸한 상태에서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번뇌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을 설하여 ‘택멸’이라 이름한다”고 주장하였다.(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의 무별체설 비판’ 참조)
24)
유부에 의하면 유루 세간도에 의해서도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것으로, 성도의 끊는다고 하는 점에서 무루의 성도와 다르지 않다. 다만 물러남과 물러나지 않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25)
끊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상지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이다.
26)
즉 이 같은 사실은 3계 9지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유정지에만 적용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밀의(密意)이다.
27)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탐을 떠나지 못한 차제증자(次第證者, 이를 具縛의 성자라고 함)는 제16 도류지에 이를 때 예류과를 획득한다.
28)
즉 “유신견을 끊으면 불환과를 증득한다”는 경설이, 제16 도류지에서 유신견을 끊고 점차 증진하여 욕계 수혹을 모두 끊을 때 불환과를 증득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은밀히 그렇게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후 증진하여 아라한과도 증득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불환과를 증득한다”고 설하였을 것인가? 하는 힐난이다.
29)
4제를 여실견지할 때는 사실상 5하분결(유신견ㆍ계금취ㆍ疑ㆍ욕탐ㆍ진에) 중 앞의 세 견혹만을 끊기 때문에, “4제를 여실견지(如實見知)하여 불환과를 증득한다”는 경설은 일찍이 이생위에서 세간도로써 욕탐과 진에를 끊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뜻이다.(후술)
30)
왕이 어떤 곳에서 출발하였던 것은 과거의 일이었지만, 세속의 언어적 관례상 “지금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입니까?”라고 말하듯이, 욕탐과 진에는 일찍이 이생위에서 끊어졌지만, 관례상 4제 현관을 성취하는 지금에 기준하여 “5하분결을 끊었다”고 설한 것이라는 뜻이다.(후술)
31)
주28) 본문 참조.
32)
‘이생은 번뇌를 끊을 수 없다는 비유논사 설 비판’에서 논설하였다.
33)
번뇌가 유정들로 하여금 3계 9지에 계박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만약 어떤 이생이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났다면 그는 마땅히 욕계의 번뇌 등을 끊었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34)
유루 세간의 해탈도는 상지는 하지에 비해 적정[靜]하고 미묘[妙]하며 염오를 떠난 것[離]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정지에는 더 이상 상지가 없기 때문에 세간도로써는 그것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35)
요약하면 이러하다. 앞서 중현은 “번뇌의 힘은 유정을 계박하여 3계ㆍ9지로 차별 짓는 공능을 갖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욕계의 번뇌를 끊지 못하였다면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주33 참조), 이생도 유루의 세속도로써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이증(理證)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이설자(異說者, 즉 비유부)는 “하지의 번뇌가 조복되지 않았을 경우 상지에 태어나지 못하며, 이같이 상지에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힘이 바로 번뇌의 공능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부정관이나 지식념과 같은 선심으로도 역시 자지의 번뇌를 조복시켜 잠시 현행하지 않게 할 수 있지만(따라서 유정지의 번뇌도 조복시킬 수 있다), 번뇌가 현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상지에 태어날 수 없으며, 반드시 번뇌를 끊을 때에만 상지에 태어날 수 있다. 따라서 3계 9지를 차별 짓기 위해서라도 이생이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36)
즉 이생은 욕계의 수혹을 끊고 견도에 들어 현관 제16심에 이르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불환과를 획득하지만, 이설자가 주장하듯이 이생은 번뇌를 끊을 수 없으며, 다만 조복시킬(감출) 뿐이라고 한다면, 욕계가 아니라 색계의 번뇌마저 조복시킬지라도 그는 여전히 구박(具縛)이기 때문에 결국 차제증과 마찬가지로 예류과를 획득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37)
참고로 본론 제62권(‘현관의 순서 비판 특히 고법지 예류과설 비판’)에서는 “다섯 성자는 이곳[此處, 욕계]에서 통달(通達, 현관의 완전한 성취)하고 저곳[彼處, 색ㆍ무색계]에서 구경(究竟, 즉 반열반)을 [증득한다]”는 경설이 인용 해석되고 있다.
38)
본론 제64권 ‘불환과’ 참조.
39)
본론 제64권 ‘일래과’ 참조.
40)
각각 본론 제64권의 ‘불환향: 일간’ ‘일래향: 가가’를 참조할 것.
41)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나 혹은 색계의 수혹을 조복시키고 성제 현관 제16심에 이른 이가 명종하여 색ㆍ무색계에 태어난다고 할 경우, 욕계 인천에서의 7생에 상계의 생을 더하여 8생 이상 받는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극칠반생’이라고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42)
이는 첫 번째 이증이었다.
43)
다시 말해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탐을 떠난 자는 도제(道諦)의 현관위에서 불환과를 증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44)
이들에 의하는 한, 이생은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현관위(제16 도류지)에서 불환과를 증득한다고 하는 경우, 5하분결 중 욕탐과 진에는 미래 끊어지는 것이므로 미래법의 실재성을 주장하지 않는 한 이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45)
이 같은 두 가지 사실로 볼 때, 본 항의 ‘어떤 이’는 경부(經部) 즉 비유부(譬喩部)의 논사임을 알 수 있다.
46)
즉 이설자는, 이생위에서 욕계 수혹을 조복한 이도 도제 현관 시 예류과를 획득하지만, 증득하는 순간이 지극히 빠르기 때문에, 혹은 성제현관과 ‘무간’에 불환과를 증득하기 때문에 계경 중에서 “일찍이 욕계를 떠난 자는 도제의 현관위에서 불환과를 증득한다”고 설한 것이며(다시 말해 “일찍이 욕계를 떠난 자는 도제의 현관위에서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며), “성제현관과 함께 불환과를 획득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지만, 예류과와 불환과 사이에는 일래과가 있으므로 증득의 순간이 빠르다고 해서 바로 불환과를 증득한다고 말할 수 없을 뿐더러 불환과를 예류과와 ‘무간’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47)
본론 제65권 ‘진지와 아라한과’ 참조.
48)
부동법은 아라한의 6종성 중의 하나로,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아라한을 말한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진지는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다’, ‘나는 이미 집(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다’, ‘나는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것이며, 무생지는 ‘나는 이미 고를 알아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내지는 ‘나는 이미 도를 닦아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이다.(본론 제73권 ‘진지와 무생지의 차별’에서 상론함)
49)
원문은 ‘謂彼求得順諸所解’이지만, 『현종론』(제32권, 고려장28,p.234중)에 따라 ‘제(諸)’를 ‘기(記)’로 고쳐 번역하였다. 즉 일찍이 일체의 번뇌를 끊어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을 기약하였고, 이에 따라 이미 번뇌가 다하였음을 알고[盡智], 이와 무간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無生智]는 뜻이다.
50)
무학의 정견이란 무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결정(決定)적인 무루혜를 말한다.(본론 제6권 ‘견ㆍ비견 분별’ 참조)
51)
퇴법(退法) 등의 다섯 종성의 아라한은 적당한 시기를 만나야 비로소 열반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시해탈(時解脫)’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부동법의 아라한은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열반에 들 수 있기 때문에 ‘불시해탈(不時解脫)’이라고 한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에서 상론함)
제67권
1)
『중아함경』제48권 「마읍경(馬邑經)」제1(대정장1,p.725하), “무엇을 사문이라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악과 불선의 법과 온갖 누(漏)의 더러움과, 미래 존재의 근본과 번뇌의 뜨겁고 괴로운 과보와 생노병사의 원인이 되는 것을 종식시킨 이러한 이를 사문이라고 한다.”
2)
“이생도 [능히 과실을 고요하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지만 구경(究竟)의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사문이 아니다.”(『구사론』 제24권, 고려장27,p.634중; 대정장29,p.128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115) 즉 이생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여러 가지의 악과 불선법을 종식시키고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사문과 다르지 않지만, 무상정(無想定)을 진실의 열반이라 생각하여(이를 異趣涅槃이라 한다) 진실의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3)
즉 무루법에는 멸제(무위)와 도제(유위)가 포함되기 때문에, 여기서 유위란 무루 5온 즉 8성도(聖道)을 말하며, 무위란 택멸을 말한다.
4)
『잡아함경』 제29권 제797경(대정장2,p.205중). 이 경에서는 사문법(즉 사문성)으로서 8성도(즉 正道)와 사문과로서 수타원(예류과) 등의 4과를 설하고 있다.
5)
불환과는 일체의 견혹과 욕계의 수혹을 끊은 자로서, 상2계에는 ‘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일체의 ‘진’을 모두 끊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6)
여기서 자성은 자부(自部)에 동류인이 되는 번뇌를, 능연은 타부(他部)에 변행인이 되는 번뇌를 말한 것으로, 견고ㆍ견집소단의 번뇌는 각기 자부의 번뇌에 대해 동류인(자성)이 되지만, 서로에 대해 변행인(능연)이 되기 때문이다. 즉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견혹(열한 가지)은 변행혹이어서 모두가 끊어질 때 변지(즉 永斷)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본론 제56권 ‘9변지의 설정’ 참조)
7)
여기서 열한 가지 혹이란 욕계와 상계의 견소단 여덟 가지와, 욕계와 색계와 일체 계의 수소단 세 가지이다.
8)
전술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중에서 다만 무위를 사문과의 본질이라고 설하였을 뿐이니,--”를 말한다.
9)
예컨대 본론 제66권(‘이생은 번뇌를 끊을 수 없다는 유여사 설 비판’)에서 유여사가 인용한 경증에 대해 이같이 해석하였다.
10)
경에서 “현법락주의 선정은 오로지 초정려이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현법락주가 그 밖의 다른 선정과도 통하기 때문이듯이, 전술한 경에서도 예류과 등에 대해 ‘오로지 3결을 끊은 자’라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위의 ‘단(斷)’만을 사문과의 본질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경에서는 다만 결과(즉 斷)에 근거하여 ‘3결을 끊은 자’라고 설하였을 뿐으로, 만약 이와 아울러 무루 성도에 근거하여 설하였다면 예류과 등은 역시 또한 유위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후술)
11)
다시 말해 “‘예류과는 3결을 끊은 자이다’라는 말 이외 달리 설한 경이 없다”고 한다면.
12)
여기서 여섯 가지라고 함은 견소단의 6변지(본론 제56권 주41 참조)를 말함인가?
13)
본론 제17권 ‘5과론 총설’ 참조.
14)
본론 제17권 주11)의 본문 참조. 경부에 의하면, 허공(虛空)이란 어둠 속에서 촉대(觸對)되는 바가 없는 것을 가설한 것이고, 택멸(擇滅)은 이미 일어난 수면(隨眠)과 생(生)의 종자가 소멸한 상태에서 간택력(簡擇力)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번뇌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을 가설한 것이고, 비택멸(非擇滅)은 간택력과는 관계없이 연(緣)을 결여함으로써 그 밖의 번뇌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상태를 가설한 것이다.
15)
선정은 해탈의 도(道)로서 유위이며, 해탈은 선정의 과(果)로서 무위이기 때문에, 사문과는 도(道)ㆍ과(果)로서 유위 무위 모두와 통한다는 경증이다.
16)
택멸열반은 오로지 무루도에 의해 증득된 결과 즉 이계과(離繫果)로서, 유위 일반의 인과관계를 떠난 것이다. 즉 “그것은 원인을 갖지 않는 결과(이계과)이며, 결과를 갖지 않는 원인(능작인)이다.”(본론 제17권 ‘택멸무위의 인과관계’ 참조)
17)
즉 경에서는 “무상의 보리를 증득하면 단식(段食) 등의 세 가지 상을 초월한다”고 설하였지만, 그 밖의 다른 상도 초월하고 몰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18)
사문과를 네 가지로 설하게 된 별도의 다른 뜻에 대해서는 차항(次項)에서 논설한다.
19)
해탈도는 사문의 본성[沙門性]이면서 역시 또한 유위로서의 사문과(沙門果)이다. 그러나 무간도는 오로지 번뇌를 끊고 해탈도를 인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청정한 무루도로서의 원인 즉 사문성일 뿐 사문과는 아니다.
20)
예컨대 욕계 수혹의 하하품을 끊는 무간도와 그것의 이계를 획득하는 해탈도는 무간으로 일어나지만, 역시 동류인 등류과의 관계인 욕계 하하품의 이계를 획득하는 해탈도와 색계 초정려의 상상품을 끊는 무간도는 무간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간도의 다음 찰나에 항상 해탈도가 일어나듯이, 해탈도의 다음 찰나에도 항상 무간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21)
원문은 ‘二越有頂, 二越欲界故’. 그러나 유정지를 초월하는 것은 아라한과이고, 욕계를 초월하는 것은 불환과이기 때문에 ‘二越有頂’의 ‘二’는 ‘一’의 오식(誤植)인가? 그럴 경우 “첫 번째 과위는 유정지를 초월하고, 두 번째 과위는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에”가 된다.
22)
이미 설한대로 번뇌 단(斷)의 택멸은 무위의 사문과이며, 해탈도는 유위의 사문과이다.
23)
본 절 1)항 ‘사문성과 사문과’에서 청정도 즉 무루의 성도(무간도와 해탈도)가 사문성(沙門性)이라고 논설하였다.
24)
원문은 ‘總一得得共成一果.’ 즉 초월증자는 비록 세속도로써 욕계 수혹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현관 제16심에 이를 때 다시 단일한 무루의 ‘득’에 의해 일래과나 불환과를 획득하기 때문에, 세속도에 의한 소수의 택멸에 근거하여 그러한 과위를 획득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25)
다시 말해 초월증자가 세속도로써 일래ㆍ불환과를 획득하였다고 할 때, 이러한 과위는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뿐만 아니라 현관 16심에 의해 획득된 택멸을 본질로 삼기 때문에 사문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세속도와 무루의 성도가 공동으로 하나의 사문과를 성취한 것이다.
26)
『잡아함경』 제29권 제797경(대정장2,p.205하). 여기서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수혹의 제6품을 끊은 이가 현관16심에 이르러 3결(유신견ㆍ계금취ㆍ疑)을 끊으면, 이를 ‘탐ㆍ진ㆍ치가 엷어진 자’(일래과의 다른 이름, 제64권 ‘일래과’ 참조)라고 하고, 일찍이 욕계 수혹을 모두 끊고 현관 16심에서 3결 끊은 자를 불환과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유루단과 무루단이 상잡(相雜)하여 일래과와 불환과를 성취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27)
사문과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다시 획득하지 않으면 끝내 목숨을 마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제61권, 대정장27,p.318상; 한글대장경120, p.256)
28)
어떤 물건에 왕의 도장이 찍혀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주운 이의 것이 될 수 없듯이, 비록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성제현관에 의한 무루단의 ‘득’이라는 도장이 찍히면(다시 말해 무루단의 ‘득’에 의해 확증되면) 그것은 더 이상 범부의 과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29)
본론 제66권 ‘유루 세간도의 소연과 행상’ 참조.
30)
이상은 유여사와 상좌와의 대론. 즉 유여사는 성자도 세속도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한 초월증(일래과와 불환과)도 ‘사문과’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데 대해, 상좌는 이미 성제를 현관한 성자가 세속도를 일으킬 리가 없기 때문에 초월증을 사문과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하는 유여사의 설에 대한 중현의 해명이다. 참고로 성자는 무상정을 깊은 구덩이[深坑]와 같다고 여겨 거기에 드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본론 제12권 ‘무상정’ 참조)
31)
앞서 상좌는, 성제를 관찰한 이는 ‘유’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쇠 구슬과 같은 것으로 여겨 어떠한 세속의 유루행도 갖지 않는다고 하였으면서, 여기서는 ‘즐거움의 인연을 추구하여 여인을 가까이할 때 정념을 상실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앞과 모순된다는 뜻이다.
32)
즉 성자는 유루행 중의 낙수를 향수할 때 잠시 즐거운 것이라고 알듯이, 상지의 유루법에 대해서도 잠시 하지에 비해 적정[靜] 미묘[妙]하며 하지의 염오를 떠난 것[離]이라고 관찰하며, 따라서 성자 역시 유루의 세속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33)
원문은 ‘以有出有’이지만, 앞서 논설된 “모든 성자는 이치상 필시 마땅히 ‘유’에 포섭되는 법(즉 세속도)으로써 온갖 ‘유’에서 출리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以有攝法出離諸有)”는 상좌의 비판에 따라 이같이 번역하였다.
34)
여기서 태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유’란 욕ㆍ색ㆍ무색유를 말하며, ‘유’의 공덕이란 하지에 비해 뛰어난 상지의 정(靜)ㆍ묘(妙)ㆍ리(離)이다.
35)
맹림은 안타림(安陀林, andha vana) 즉 묘지를 말한다.
36)
무상정을 닦아 무상천에 태어나는 것을 진실의 해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외도이다.(본론 제12권 ‘무상정’ 참조) 이에 반해 멸진정은 성자의 선정이다.
37)
다시 말해 “과거의 제행이라 해야 할 것인가, 현재 혹은 미래의 제행이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뜻이다.
38)
주1)의 「마읍경(馬邑經)」, “무엇을 범지(梵志)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온갖 악과 불선의 법과 온갖 누(漏)의 더러움과, 미래 존재의 근본과 번뇌의 뜨겁고 괴로운 과보와 생노병사의 원인이 되는 것을 종식시킨 이러한 이를 범지라고 한다.”
39)
『잡아함경』제15권 제379경(대정장2,p.104상). 일명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교진여 등에게 4성제의 법륜을 세 번 굴리셨다. 제1전(轉):‘이것은 고성제이다’ 내지 ‘이것은 도성제이다.’ 제2전:‘고성제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집성제를 마땅히 끊어야 한다’ ‘멸성제를 마땅히 증득해야 한다’ ‘도성제를 마땅히 닦아야 한다.’ 제3전:‘이미 알았다’ ‘이미 닦았다’ ‘이미 증득하였다’ ‘이미 닦았다.’ 이는 순서대로 견도와 수도와 무학도에 대응한다.
40)
‘신속하게 작용한다’고 함은 15찰나에 4제를 현관하는 것을 말하며, ‘버리고 취한다’고 함은 4제ㆍ8부소단이나 무간도와 해탈도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을, ‘아직 항복하지 않은 것을 항복시킨다’고 함은 무간도로써 번뇌를 끊는 것을, ‘이미 항복한 것을 진압한다’고 함이란 해탈도로써 택멸을 임지하는 것을, ‘위 아래로 굴러가는 것’이란 욕계의 고제와 상2계의 고제, 욕계의 집제 등의 관지(觀智)를 교대로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후술)
41)
성제현관은 단박[頓]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16찰나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본론 제63권 ‘돈현관론 비판’ 참조)
42)
그러나 이치대로 말하자면, “하계(욕계)의 고제 등을 관찰하고 나서 상계(색ㆍ무색계)의 고제 등을 관찰하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이 옳다.
43)
주 39)의 『잡아함경』 참조.
44)
견ㆍ수ㆍ무학의 일체의 성도가 모두 법륜이라면, 어째서 교진나 등에게 견도가 생겨났을 때를 ‘전법륜’이라고 하였는가? 하면, 그것은 다만 견도가 타상속으로의 전생(轉生)의 첫 단계이며, 법륜의 시초이기 때문에 ‘처음[初]’에 따라 견도를 법륜이라는 말로 설정하였다는 뜻이다.
45)
원문은 ‘雖諸見道皆名法輪’이지만, 문맥상 ‘견도’는 ‘성도(聖道)’가 되어야 한다.
46)
이는 『구사론』(제24권, 고려장27,p.635중; 대정장29,p.128하; 권오민 역,p.1121)상에서 ‘전(轉)’에 관한 논주 세친, 혹은 경부사의 주장으로 논설되고 있다.(『구사론기』 제24권, 대정장41,p.371상) 여기서는 교법이 법문(法門)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곧 견ㆍ수ㆍ무학도에 관한 법문 즉 말씀을 말한다.
47)
이는, 차제증자가 처음으로 욕계의 혹을 떠나 불환과를 획득하면 그것은 욕계의 몸에 의지한 것이지만, 초월증자는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혹을 단진하였기 때문에 색계의 몸으로도 불환과를 획득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다.
48)
즉 무색계에는 색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리를 본질로 하는 ‘무아’ 등의 교법을 청문(聽聞)할 수 없다.
49)
즉 견도는 먼저 욕계의 고제를 소연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하지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의 소의신으로는 견도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50)
이는 『장아함경』 제21권 『세기경(世紀經)』「삼재품」에서 설하고 있는 것으로, 괴겁시 대 삼재의 화재는 제2정려의 극광정천 이하만을 태운다.(본론 제32권 ‘대삼재’에서 약술하였다) 이 에피소드에 관해서는 본론 제22권 주17)을 참조할 것.
51)
장수천은 색계 제4정려의 무상천(無想天). 여기 사는 천중들의 목숨은 대단히 길어 5백 대겁을 살므로 장수천이라 이름하였다.
52)
색계에는 싫어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지만, ‘두려움’을 ‘싫어함’으로 잘못 알아 마음이 ‘싫어함’에 속박되는 경우, 그것을 ‘두려워 싫어하는 것[怖厭]’이라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53)
원문은 ‘是恐自害被損壞義’이나 다른 판본이나 경설(주50)에 따라 ‘해(害)’를 ‘궁(宮)’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22권 주17)을 참조할 것.
54)
‘통달’이란 4제에 원만(완전)한 현관을 말하는 것으로서, 경에서 5종 불환은 바로 이곳(즉 욕계)에서 그것을 통달하고, 그곳(즉 색계)에서 구경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견도는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55)
『구사론』(제25권, 고려장27,p.636상; 대정장29,p.129상)과 『현종론』(제33권, 고려장28,p.238상; 대정장29,p.935중)에서는 ‘從前見至生([부동법은] 이전의 견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다)’로 되어 있다.
56)
『중아함경』 제30권 「복전경(福田經)」(대정장1,p.616상). 여기서는 사법(思法)ㆍ승진법(昇進法,즉 감달법)ㆍ부동법(不動法)ㆍ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호법(護法)ㆍ실주법(實住法, 즉 안주법)ㆍ혜해탈(慧解脫)ㆍ구해탈(俱解脫)의 9무학을 설하고 있다. 이는 6종성에 불퇴법ㆍ혜해탈ㆍ구해탈을 더한 것으로, 불퇴법은 부동법에 포섭되고, 두 가지 해탈은 멸진정의 획득여부에 근거한 것이므로 여섯 종성 모두에 포섭된다.(후술)
57)
퇴법이란 질병 등의 작은 인연을 만나더라도 수혹을 일으킴으로써 불환과 등의 하위로 물러나 이미 획득한 과위를 상실하지만, 퇴실(退失)의 인연을 만나지 않으면 곧 바로 반열반하게 되는 종성의 아라한을 말한다.
58)
송ㆍ원ㆍ명본(明本) 등에는 수습(修習)으로 되어 있다.
59)
시애심해탈(줄여 時解脫이라고도 함)이란 항상[恒時] 마음의 해탈을 애호하는 아라한으로, 적당한 시기에 비로소 반열반에 든다. 부동법을 제외한 앞의 다섯 종성이 이에 해당한다.(후술)
60)
여기서 ‘항시’란 항시에 가행을 닦는 것을 말하며, ‘존중’이란 가행을 일으킬 때 법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퇴법과 사법이 다 같이 이러한 두 가지 가행을 결여하였음에도 별도의 종성으로 나누게 된 것은, 퇴법은 둔근이고, 사법은 퇴법보다 좀 더 이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학위에 이르면 사법은 조금 더 부지런히 힘쓴다”고 설한 것이다.
61)
이러한 유여사의 설은 『구사론』제25권(고려장27,p.636중; 대정장29,p.129중; 권오민 역,p.1127)에서 정설로 설해지고 있다.
62)
이상은 6종성의 아라한과 3계의 관계를 밝힌 것으로, 말 그대로 퇴법은 반드시 물러나고, 감달법은 반드시 부동법에 이르는 종성이라면, 지극히 적정(寂靜)하여 퇴실ㆍ자해ㆍ자기방호ㆍ근기의 단련과 같은 변동이 없는 무색계에는 6종성이 아니라 안주법과 부동법만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 정의에 의하는 한 이러한 6종성의 구별은 다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3계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후술)
63)
다시 말해 “퇴법의 종성이라도 결정코 반드시 물러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감달법도 반드시 [부동법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니다.”(『구사론』, 앞의 책)
64)
다시 말해 퇴법 내지 감달법의 종성이 실제적으로 존재하여 물러나거나 부동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아라한으로서 누구든 물러나는 이를 퇴법이라 이름하고, 무생지를 획득하여 구경의 반열반에 이르는 이를 감달법이라고 이름한다는 뜻이다.
65)
이미 획득한 공덕에서 퇴실하지 않기 위해 항상 애호하지만, 마음이 번뇌의 계박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시애심해탈’이다.
66)
『대비바사론』 제101권(대정장27,p.525상; 한글대장경122,p.27-28)에 의하면, 좋은 옷을 얻을 때, 좋은 음식을 얻을 때, 좋은 와구를 얻을 때, 좋은 처소를 얻을 때, 참다운 좋은 설법을 얻을 때, 덕행을 갖춘 좋은 보특가라를 얻을 때, 비로소 퇴법 등의 앞의 다섯 종성의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다.
67)
‘시해탈’은 바로 ‘때를 기다려 해탈하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대시해탈(待時解脫)’이라고 해야하지만, ‘타락죽을 담는 항아리[盛酥甁]’의 경우도 ‘담는[盛]’이라는 말을 생략하여 ‘타락죽 항아리[酥甁]’라고 하듯이, ‘대’자를 생략하여 ‘시해탈’이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68)
“잠시(暫時) 해탈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시해탈’이라고 이름한다”는 이러한 설은 상좌의 주장이다.(본론 제68권 ‘『교저가경(喬底迦經)』에 대한 상좌 등의 해명 비판’ 참조)
69)
아라한의 여섯 종성의 차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혹은 후천적인 수행에 의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70)
사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전에 호법ㆍ안주법ㆍ감달법이었던 자가 근기를 단련하여 안주법ㆍ감달법ㆍ부동법이 되는 경우도 있고, 선천적으로 호법 내지 부동법인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제68권
1)
퇴법은 여섯 종성 중에서 더 이상 물러날 종성이 없는 가장 아래 단계의 종성이기 때문이다.
2)
예컨대 퇴법의 종성이 무학위에 머물면서 연근(練根)의 행을 닦아 사법 등의 네 종성을 성취하였을 경우, 새로이 획득된 종성은 이전의 무학과 과위로서는 차별이 없으며, 유ㆍ무학의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어서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종성과 과위 모두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다.(次註 참조)
3)
예컨대 유학위에 있을 때 사법의 종성을 성취한 자가 승진하여 무학위에 이르러서도 계속하여 사법의 종성을 상속하고 있으면, 그러한 종성은 유학과 무학의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므로 퇴실할 리가 없다는 뜻이다.
4)
이는 무학의 종성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사실을 유학의 경우에 적용시켜 논설한 것이다.
5)
유학위(혹은 범부위)에 머물면서 사법 등의 종성을 성취한 자가 승진하여 무학위(혹은 유학위)에 이르러서도 계속하여 사법의 종성을 상속하고 있으면, 그 종성은 유학도와 무학도(혹은 세간도와 출세간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에 과위에서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퇴법의 경우는 종성의 최하위이기 때문에 종성 상으로는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과위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다.
6)
유부에 의하면, 최초로 획득되는 예류과와 초월증의 일래ㆍ불환과 등은 견도에 의해 유신견 등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이지적 번뇌[迷理惑]를 끊은 자이기 때문에 한 번의 단멸로서 더 이상 하위로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견도 이후 수도에 의해 정의적 번뇌[迷事惑]를 단멸하여 획득된 차제증의 일래ㆍ불환과와 아라한과의 경우는 물러나는 일이 있다. 즉 예류과 등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하는 유신견 등의 무사혹(無事惑)을 끊기 위해 4제를 반연하여 획득된 법이지만, 차제증의 일래과 등은 어떤 실재하는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집착하거나 증오하고, 잘못 이해하여[不了] 일어나는 탐ㆍ진ㆍ만(慢) 등의 유사혹(有事惑)을 반연하여 획득된 법이기 때문에 실념(失念)하여 악연(惡緣)이나 사연(邪緣)을 만날 경우 다시 물러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중부와 경량부에서는 아라한 무퇴론을 주장한다.(후술)
7)
‘사(事)’에는 자성사(自性事)ㆍ소연사(所緣事)ㆍ계박사(繫縛事)ㆍ소인사(所因事)ㆍ소섭사(所攝事)의 다섯 뜻이 있는데(본론 제17권 ‘無事法에서의 事의 의미’ 참조), 여기서 소집사(所執事)의 ‘사’는 자성사의 의미이다. 『구사론』(제25권, 고려장27,637상; 대정장29,p.129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130)에서는 “견소단의 번뇌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無事]’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以見所斷依無事故)”로 되어 있다.(次註 참조)
8)
즉 견혹은 실유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유인 자아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실체로 간주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아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無我]이라고 앎으로써 견혹이 끊어지기만 하면 다시는 그것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럴 경우 유소연심(有所緣心)을 주장하는 유부설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데(『구사론』,앞의 책:『구사론기』 제25권에 의하면 대중부로부터 제기됨), 다음의 논설은 바로 이에 대한 해명이다.
9)
“이것(견혹)은 비존재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 아니니, 4제(諦)를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리의 경계를 참답게 반연(攀緣)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구사론』 제25권, 앞의 책) 견혹은 비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4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다만 그것을 바로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견혹이다. 예컨대 5취온 등의 고과(苦果, 즉 고성제)는 무상한 것이고 무아임에도 항상[常]하고 아(我) 혹은 아소(我所) 등으로 여기는 것이 견혹이다.
10)
예컨대 유신견 등의 대상이 된 자아는 실체(종자)로서 존재하지 않지만, 욕탐이나 진에의 대상은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끊어지더라도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주6) 참조.
11)
『구사론』(고려장27,p.637상; 대정장29,p.130상; 권오민 역,p.1131)에서는 “‘거친 실체’의 상은 덧없고 거짓된 것[浮僞]이어서 결정코 의지할 만한 것이 없으니(事相浮僞無定可依)”로 논설하고 있다.
12)
견소단의 번뇌가 자세히 살피는 힘[審察力]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추탁성(推度性) 즉 헤아려 아는 성질이라면, 수소단의 번뇌는 경계대상의 힘[境力]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으로 매둔성(昧鈍性) 즉 어둡고 무딘 성질이다.(본론 제69권 주3의 본문 참조)
13)
호법에는 호법에서 물러나 사법에 머무는 이를 더한 다섯 가지, 안주법에는 여기에 안주법에서 물러나 호법에 머무는 이를 더한 여섯 가지, 감달법에는 여기에 감달법에서 물러나 안주법에 머무는 이를 더한 일곱 가지가 있다.
14)
일찍이 퇴법종성이었던 자가 무학위에 이르러 승진하여 사법이 된 후 퇴실의 인연을 만나 과위에서 물러날 때, 일찍이 머물렀던 퇴법으로 머물 뿐 사법 등으로 머물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뜻이다.
15)
원문은 ‘若退住所退種性.’ 다시 말해 “일찍이 퇴법이지만 근기를 단련하여 사법 등을 성취한 자가 아라한과에서 유학위로 물러날 때, 이전의 퇴법종성이 아니라 물러날 때의 종성인 사법 등의 종성으로 물러나 머문다고 한다면.”
16)
이는 『구사론』(제25권, 고려장27,p.636하-637상; 대정장29,p.129하; 권오민 역,p.1130) 상에서의 정설이다.
17)
『구사론』(제25권, 고려장27,p.637중; 대정장29,p.130상; 권오민 역,p.1133). 세친은 『구사론』에서 이를 경부사(經部師)의 설로 전하면서 “그들의 설은 이치에 부합한다(彼說應理)”고 평석하고 있다. 참고로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앞서 논설한 현관 제16심에서 처음으로 획득된 과위인 예류과와 초월증인 일래ㆍ불환과가 물러나는 일이 없듯이 아라한과에서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18)
『중아함경』 제3권 「청백연화유경(淸白蓮華喩經)」(대정장1,p.574하). 여기서는 증(增)ㆍ사(伺)ㆍ쟁송(諍訟)ㆍ에(恚)ㆍ한(恨)ㆍ진(瞋)ㆍ전(纏)ㆍ불어(不語)ㆍ결(結)ㆍ간(慳)ㆍ질(嫉)ㆍ사광(斯誑)ㆍ유첨(諛諂)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악욕(惡欲)ㆍ악견(惡見)은 신(身)ㆍ구(口)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혜견(慧見)에 의해 소멸된다고 설하고 있다. 곧 경량부에 있어서 진실된 번뇌의 끊어짐이란 성자가 무루혜로써 번뇌종자를 끊어 다시는 현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래과와 불환과는 유루도에 의해서도 획득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때 번뇌종자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복(隱伏)되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지만, 예류과와 아라한과는 무루도로써 각각의 번뇌종자를 끊은 성자이므로 더 이상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19)
『중아함경』 제51권 「아습패경(阿濕貝經)」(대정장1,p.752상):『잡아함경』 제8권(대정장2,p.53하). 즉 유학은 물러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아라한의 무학은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불방일을 설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상은 『구사론』(앞의 책).
20)
경주(경부)에 의하는 한, 번뇌의 끊어짐 즉 택멸이란 이미 일어난 수면와 생의 종자가 소멸한 상태에서 간택력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으로(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 참조), 택멸을 증득한 아라한과는 더 이상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택멸(煩惱斷)은 대치도에 의해 계박의 ‘득(得)’을 끊고 이계의 ‘득’을 획득한 것으로, 지혜가 저열한 둔근자의 경우 다시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는 ‘무학에는 번뇌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주 설 비판’과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이증 비판’에서 논설한다.
21)
본론 제45권 ‘욕탐과 유탐에 관한 상좌의 해석 비판’에서 『안온경』(『잡아함경』 제5권 제103경, 대정장2,p.29하-30상)을 인용하여 “불환과와 아라한향으로서 욕계에 머무는 자라면 욕계 소의신에 대한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갖는다”는 상좌 설에 대해 논파하였다.
22)
본론 제66권 ‘이생은 번뇌를 끊을 수 없다는 비유논사 설 비판’:동 주32 참조.
23)
본론 제67권 ‘사문성과 사문과’ 참조.
24)
올달낙가알라마자(Udraka Rāmaputra). 보살이 출가 후 두 번째로 찾아간 스승. 보살은 여기서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고 한다.
25)
다시 말해 세속도로는 유정지의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26)
즉 경에서 “성혜(聖慧)로써 번뇌를 끊은 것을 일컬어 ‘진실된 끊음’이라 한다”고 설한 것은, 무루혜로써 유정지의 번뇌를 끊을 경우 다시는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생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번뇌단을 칭찬하기 위해 ‘진실된 끊음’으로 설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27)
『중아함경』제5권 「성취계경(成就戒經)」(대정장1,p.449하) 참조. 여기서는 비구(불환과)가 계ㆍ정ㆍ혜를 갖추면 바로 멸진정에 드나들며, 만약 현신에서 구경(究竟)을 얻지 못하면 몰(沒) 후 단식천(段食天)을 지나 여의생천(如意生天, 혹은 意成天, 즉 색계천)에 태어나서도 멸진정에 드나든다는 내용을 설하고 있는데, 이는 본론 제12권(‘무상정과 멸진정의 같은 점과 다른 점’)에서 멸진정에 물러남이 있다는 사실의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28)
바야흐로 해탈온을 굳건히 수호해야 하는 이가, 이제 다시 가행을 닦지 않아 해탈온을 자재하게 일으키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29)
경부에 의하면, 아라한의 6종성은 다만 현법락주(現法樂住, dṛṣṭadharma sukha- vihāra)에 근거한 것일 뿐 아라한과 자체로서는 부동법이다. 즉 경부에서는 유루정(有漏定)인 현법락주에서의 물러남만을 인정하여, 그것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는 둔근자를 앞의 다섯 종성의 아라한이라 하고, 물러남이 없는 이근자를 제6 부동법의 아라한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미 획득한 4정려의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이를 퇴법, 물러나는 일이 없는 이를 부동법 등이라고 하였다.(주54 참조)
30)
본론 제51권 ‘삼세실유 논증’ 참조.
31)
본론 제34권 ‘비유종의 종자 상속설 비판’ 참조. “바야흐로 세간을 관찰하건대 구연(枸櫞, 레몬)의 신맛이 상속 전변하여 결과(즉 초)로 성숙할 때, 초(酢)의 원인(구연)은 비록 존재하지 않을지라도(과거로 낙사하였을지라도) 초라는 결과는 생겨날 수 있으니, 업과 그 결과도 이치상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32)
원문은 ‘然無諸惑斷皆有退起過, 如執無法可生論者, 無一切無皆可生過.’ 여기서 ‘비존재’란 택멸의 열반을 말한다. 경부(經部)에서는 번뇌단(斷)의 택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수면과 생의 종자가 소멸한 상태에서 간택력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번뇌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을 가설한 것, 즉 ‘생기의 비존재’로 이해하였다.(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 참조) 그러나 그럴 경우 그것은 토끼 뿔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더러워지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33)
씨앗이 존재한다고 싹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온도 수분 공기 등의 조건이 충족될 때 싹이 생겨나듯이, 일체의 번뇌종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일체의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중연(衆緣)이 충족될 때 생겨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중연만 갖추어지면 무학에게도 번뇌가 생겨날 수 있다. 번뇌의 생기조건에 대해서는 본론 제53권에서 상론하였다.
34)
주7)의 본문 참조. 따라서 견소단의 번뇌를 끊고서는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35)
다시 말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36)
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37)
항시의 가행과 존중의 가행을 모두 결여한 이는 퇴법과 사법이고, 호법에는 항시의 가행만이, 안주법에는 존중의 가행만이 있을 뿐이다.(본론 제67권 주60의 본문 참조)
38)
『이부종륜론』의 설전부(說轉部) 조(대정장49,p.17중)에 의하면, “이생위에 중에도 역시 성법(聖法)이 존재한다”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39)
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40)
상동.
41)
원문은 ‘若此無漏所引功能, 而得名爲彼法種子’로 되어 있지만, 문맥상(본 단락의 마지막 문장 참조) 혹은 송(宋)ㆍ원(元)ㆍ명본(明本)에 따라 무루의 ‘루’를 ‘피(彼)’로 고쳐 번역하였다.
42)
염오법과 청정법을 결정적으로 설정할 수 없으면, “선이나 불선의 훈습(공능 즉 종자의 이명)이 각기 별도로 존재한다”고도 주장할 수 없다는 뜻.
43)
다시 말해 나무 등은 비록 불의 원인(종자)은 될지라도 그 자체 불 등이 아닌 것과 같다.
44)
나무는 4대종(大種)의 소조색(所造色)으로서, 거기에는 이미 화성(火性)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불의 종자(원인)가 된다는 뜻이다.
45)
본론 제2권 ‘4대종 총설’ 참조. 4대종의 자상은 견고성[堅]ㆍ습윤성[濕]ㆍ온난성[煖]ㆍ운동성[動]이며, 그 작용은 보지[持]ㆍ인섭[攝]ㆍ성숙[熟]ㆍ증장[長]이다.
46)
즉 청정하고 염오한 마음은 다 같이 유루법을 능생인(能生因)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47)
다시 말해 “세제일법(유루법)이 고법지인(무루법)을 사용과로 삼는다고 할 때에도 이생과 성자는 여전히 차별되듯이.”
48)
본론 제19권 ‘등무간연’ 참조. 세제일법은 고법지인에 대해 다만 등무간연이 될 뿐으로, 동류인과 등무간연은 적용범위가 다르다. 즉 동류든 이류든 전 찰나의 심ㆍ심소법은 후 찰나의 그것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
49)
여기서 인연(因緣)은 6인(因) 중 능작인을 제외한 다섯 원인으로, 결과에 대한 직접적인[親] 원인을 말한다. 즉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현행의 결과를 낳는 능생인(能生因)으로서의 종자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간접적인[疎] 원인인 등무간연의 경우를 예로 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50)
본론 제66권 ‘유루 세간도의 소연과 행상’ 이하 참조. 이생도 번뇌를 끊었을 경우 번뇌종자를 갖지 않는다는 뜻인가?
51)
이상 경주 세친(『구사론』상에서는 경부사)의 아라한 무퇴론을 비판하면서 파생된 ‘아라한에는 번뇌종자가 없기 때문에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그의 주장과 이에 근거가 된 종자설에 대해 비판하였고, 이하 계속하여 ‘아라한 무퇴론’의 또 다른 경증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52)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7하; 대정장29,p.130중; 권오민 역,p.1136). 원문에는 『증일경(增一經)』으로 되어 있지만, 『구사론』에도 송ㆍ원ㆍ명본 등 다른 판본에서도 『증십경』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증십경』은 『장아함경』 제9권 「십상경(十上經)」(대정장1,p.51상)일 것으로, 현존의 한역에는 “一生法謂有漏解脫, 一證法謂無礙心解脫”로 되어 있다. 인용한 경문은, 시애심해탈은 아라한과가 아니라 유루정이 현전한 이를 의미한다는 사실의 경증으로, 경에서 시애심해탈과 부동심해탈을 별도로 설한 것은 그 자체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경주(경부)에 의하는 한, 모든 아라한은 부동(不動)이며, 퇴법 등은 바로 이 같은 유루정으로부터의 물러나는 이를 말하는 것으로, 아라한과로부터 물러나는 이가 아니다.(次註 참조)
53)
다시 말해 “시애심해탈을 물러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라한과(應果)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정려 등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즉 경주(경부)는 시애심해탈을 ‘적당한 때를 만나야 해탈을 획득하는 아라한(혹은 항시 해탈을 애호하는 아라한)’으로 해석하지 않고 현법락주의 유루정(4정려와 4무색정)에서 물러나는 이로 해석하여, 앞서 중현이 반증한 경증을 다시 무퇴론(無退論)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54)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7중; 대정장29,p.130상; 권오민 역,p.1134).
55)
이전에 복용하였던 탕약과 지금 복용하는 탕약이 동일하듯이, 유학위에서 관찰하였던 무루의 온갖 행상과 무학위에서 관찰하는 그것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56)
다시 말해 “시애심해탈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응과성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정려 등의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관찰해 보아야 한다.”(주53참조.)
57)
수용퇴(受用退)는 이미 획득한 온갖 수승한 공덕이 현전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득퇴(已得退)는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본론 제70권 ‘물러남의 세 종류’ 참조) 즉 부동법(부동심해탈)이든 시애심해탈이든 현법락주에서 물러남의 뜻이 있지만, 전자는 다만 현전하지 않는 수용퇴일 뿐이며, 후자의 그것은 수용퇴와 이득퇴라는 것이다.
58)
만약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이를 시애심해탈이라고 한다면, 부처도 부동법아라한도 일시 현전시키지 않는 일(즉 수용퇴)이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시애심해탈이라고 해야 하며, 현법락주를 증득하지 못한 이(즉 未得退) 또한 물러나는 이(시애심해탈)의 일종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59)
즉 해탈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퇴ㆍ불퇴의 차별이 없다면, 계경에서는 해탈(즉 아라한)을 오로지 한 가지로만 설하였어야 하였지만, 이를 차별하여 시해탈과 불시해탈(부동심해탈)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시해탈은 물러나는 일이 있는 아라한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60)
시해탈의 물러남은 정려에서 퇴실하는 것이고, 이때 ‘정려 즉 유루정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온갖 욕탐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초정려는 이생희락(離生喜樂)이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욕계의 생(온갖 욕탐)을 떠난 것인데, 그것에서 물러나는 것을 다시 ‘온갖 욕탐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앞뒤 말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61)
교저가(Gautika, 혹은 瞿低迦)의 기사는 『잡아함경』 제39권 제1091경(대정장2, p.286상)에 나온다. 그는 시수의해탈(時受意解脫, 즉 시애심해탈)을 획득하였으나 여섯 번이나 물러나게 되자 더 이상 물러나지 않기 위해 자살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수기(授記)하였고 그가 반열반하였음을 찬탄하였다.(이에 대한 에피소드와 경주의 해석은 주65의 본문 참조) 즉 “정려에서 물러난다”고 함이 온갖 욕탐[諸欲]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교저가가 자살할 리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애심해탈은 유루의 현법락주도 아니거니와 “정려에서 물러난다”고 하는 말 또한 욕탐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62)
주58) 참조.
63)
원문에는 『증일경(增一經)』으로 되어 있다. 주52) 참조.
64)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8상; 대정장29,p.130중; 권오민 역,p.1137).
65)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7하; 대정장29,p.130중; 권오민 역,p.1136). 경주 세친은, 교저가는 시해탈에 대해 깊이 애미(愛味)하여 하지의 혹에 의해 자주 물러나게 되자 이를 싫어하여 자살하였고, 그 같은 찰나에 신명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아라한과를 획득하고 무여열반에 들게 되었으므로, 시해탈은 아라한과가 아니라 유학위의 유루정이라는 것이다.
66)
즉 상좌는 시애심해탈을 이생(異生)과 마찬가지로 잠시 세속도로써 번뇌를 감춘 이라 하여 여전히 탐의 염착이 존재하는 이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67)
만약 세속도로써 잠시 번뇌를 은복(隱伏)하여 마음이 계박을 떠나게 된 이를 ‘시해탈’이라 이름하고, 이를 현법락주성(性)이라고 한다면, 부동심해탈의 현법락주도 역시 이러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가? 하는 뜻이다.
68)
동선근은 가행도인 4선근 중 하위로 물러나는 일이 있는 난법(煖法)과 정법(頂法). 본론 제61권 참조.
69)
원문은 ‘此所執極令善’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본 등에 따라 ‘선’을 ‘희(喜)’로 고쳐 번역하였다. 즉 선설(善說)이 아니라는 뜻이다.
70)
『교저가경』의 현존본인 『잡아함경』 제39권 제1091경(대정장2,p.286상)에 의하면, 악마 파순이 시해탈(是受意解脫)을 얻은 교저가(瞿低迦)가 자살하면 그의 경계를 벗어나 식신(識神)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으로 하여금 자살을 막게 하려고 아래의 게송을 읊고 있다.
71)
『잡아함경』 제1091경(상동)에서는 “큰 지혜와 큰 방편과 자재하고 큰 신통력을 지닌 이, 불꽃처럼 빛나는 제자를 두었으나 지금 그는 죽으려 하네. 대모니(大牟尼)께서는 마땅히 제지하여 그로 하여금 자살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 누가 불세존의 바른 법과 율에서 얻지 못한 것 배우는 유학의 성문이 목숨을 마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인가?(大智大方便 自在大神力 得熾然弟子 而今欲取死 大牟尼當制 勿令其自殺 何聞佛世尊 正法律聲聞 學其所不得 而取於命終)”으로 되어 있다.
72)
『구사론』제25권(고려장27,p.638상; 대정장29,p.130중; 권오민 역,p.1137). 여기서 대법장은 『품류족론』 제3권(대정장26,p.702중; 한글대장경117,p.66). 즉 욕탐수면이 이 같은 이유에 의해 일어난다고 할 때, 아라한과는 이미 욕탐을 끊었고, 그것의 근거가 된 경계대상도 현전하지 않고, 이에 대한 비리작의도 더 이상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물러날 리가 없다는 것이다.
73)
본론 제53권 ‘번뇌의 생기인연’에서 상론하였다. 즉 아라한의 번뇌는 전 찰나의 번뇌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원인(두 번째와 세 번째 원인)에 의해 생겨난다.
74)
다시 말해 가능성으로서의 세 가지를 설한 것이라는 뜻이다.
75)
다시 말해 “일체의 모든 번뇌가 세 가지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76)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8상; 대정장29,p.130하; 권오민 역,p.1137).
77)
본권 ‘무학에는 번뇌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주 설 비판’ 참조.
78)
경주(경부)에 의하는 한 간택력에 의한 번뇌불생이 택멸 즉 번뇌단(斷)이다. 주32) 참조.
제69권
1)
예컨대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써는 욕계 9품의 견고소단을 끊으며, 고류지인(苦類智忍)으로써는 색ㆍ무색계의 각기 9품의 견고소단을 끊지만, 수도위에서는 3계에 걸친 하하 등의 9품의 도로써 상상 등의 9품의 혹을 끊는다. 따라서 견ㆍ수소단의 예로써 아라한과의 무퇴론을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2)
본론 제68권 ‘아라한과 유퇴론’ 참조.
3)
본론 제68권 주12)의 본문 참조.
4)
다시 말해 “성자는 구체적인 대상을 갖는 정의적 번뇌[迷事惑]만을 일으킬 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사실에 집착하는 이지적 번뇌[迷理惑]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5)
본론 제68권 ‘아라한과 유퇴론’ 주10)의 본문 참조.
6)
본론 제67권 ‘성자는 세속도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상좌 등의 설 비판’ 참조.
7)
본론 제68권 주4)의 본문 참조.
8)
본론 제68권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논증(論證) 비판’ 참조.
9)
즉 본론 제68권(‘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論證 비판’) 주72)에서 경주 세친이 인용한 『품류족론』에서는 번뇌생기의 인연으로서 욕탐 등의 수면을 아직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번뇌의 경계대상이 현전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리작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만약 번뇌(염심)는 반드시 선행된 번뇌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면, 염심에서는 선심 등이 결코 일어날 수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현에 의하면, 『품류족론』에서는 가능성으로서 세 가지 원인을 설하였다.
10)
비리작의는 염오의 작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염오의 작의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번뇌를 갖지 않으며, 그래서 아라한이라고 한다면, ‘비리작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이유명제[因]는 결국 ‘아라한은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주장명제[宗]와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에 논거로서의 효용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상좌의 이증은 “[번뇌가 없는] 아라한은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번뇌(즉 염오의 비리작의)가 없기 때문이다”는 것으로, 이유명제의 의미가 이미 주장명제에 포함되어 있어 예컨대 “[사람인] 갑돌이는 죽는다. 사람이기 때문에”라는 논증과 같은 동어반복이라는 것이다.
11)
본론 제68권 ‘무학에는 번뇌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주설 비판’; ‘어떤 부류(경부)의 종자설 비판’ 참조.
12)
다시 말해 아라한과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최후심에서는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다.
13)
송(宋)ㆍ원본(元本) 등에서는 ‘갖춘다[辦]’로 되어 있다.
14)
원문은 ‘若正堅信等運相心’이지만, 앞서 논설이나 다른 판본에 따라 ‘신(信)’을 ‘주(住)’로 고쳐 번역하였다.
15)
즉 술나는 이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둔근의 아라한(즉 시해탈)은 물러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술나경』을 일체의 모든 아라한과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6)
두 가지 가행을 모두 닦은 이는 감달법(堪達法)과 부동법(不動法)인데, 전자가 둔근이라면, 후자는 이근이다.(본론 제67권 주60; 61의 본문 참조)
17)
이상 첫 번째 경증 해명.
18)
이러한 천마(天魔)의 의심에 대해서는 본론 제68권 주71)에서 논설하였다.
19)
이상 두 번째 경증 해명. 즉 상좌가 인용한 『투전유경』은 응과가 번뇌[魔]에 의해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경과 마찬가지로 다만 후유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아라한에게 물러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라한은 설혹 유학위로 물러나더라도 더 이상 후유를 받지 않는다.
20)
이상 세 번째 경증 해명.
21)
즉 상좌가 인용한 『독전유경』은 비상비비상처에서의 생에 탐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아라한 무퇴론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22)
정해탈이란, 무학의 첫 찰나의 마음인 진지(盡智)가 생상위(生相位)에 있을 때 번뇌의 ‘득’이 바로 끊어져[正斷] 장애로부터 해탈하기 때문에, 이를 정해탈이라고 하였다.(본론 제72권 ‘무학심이 정해탈하는 때’에서 상론함)
23)
독화살을 제거하고 몸속의 독 기운도 남김없이 제거하였을지라도 기피해야 할 것을 삼가지 않으면 독화살의 상처가 다시 곪아터지듯이, 비록 후유와 그것의 동인인 번뇌를 남김없이 제거하였을지라도 기피해야 할 좋지 못한 경계대상에 계박되어 머물며 그것에 대해 살펴 생각[尋思]하게 되면 번뇌는 다시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24)
이상 네 번째 경증 해명.
25)
본론 제68권 ‘『교저가경』에 대한 상좌 등의 해명 비판’ 참조.
26)
주35) 이하 참조.
27)
이상 다섯 번째 경증 해명.
28)
본론 제68권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경증 비판’ 중 ‘두 번째 경증 비판’ 참조.
29)
이상 여섯 번째 경증 비판.
30)
아라한은 더 이상 후생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은밀히 “아라한은 영원히 번뇌[垢]를 떠났다”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영원히 떠났다’는 경설은 아라한은 더 이상 후생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물러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본론 제68권 주26참조)
31)
여기서 “[무학에게는 번뇌]종자가 존재하지 않아 마땅히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해야한다”는 말은 경주 세친의 설로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8권 ‘무학에는 번뇌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주 설 비판’에서 논설하였다. “다하였기 때문에”라고 하는 등의 말이나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염착(染著)이 생겨나며--” 등의 경문에 대해서는 같은 권 ‘어떤 부류의 종자설 비판’에서 언급하여 해석하였다.
32)
“종자가 태워지면 싹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이증에서 종자는 번뇌, 싹은 후유의 비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증은 “번뇌가 생겨나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주30) 참조.
33)
즉 분별논사(分別論師)는 아라한 무퇴론의 이증(理證)으로서 “종자가 태워지면 싹은 생겨날 리가 없다”는 비유를 제시하였지만, 불이 땔감에 의지하여 일어나듯이 무루지(無漏智)의 불길 또한 번뇌종자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하므로 그것을 무루지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34)
여기서 정리론자는 유부(有部)의 논사들을 말한다. 이하 앞(본론 제68권)에서 설한 ‘아라한과 유퇴론’에 이어 거기서 설하지 못한 것을 논설한다.
35)
『잡아함경』 제43권 제1173경(대정장2,p.314중). “혹 어느 때 다문의 성 제자는 정념(正念)을 잃고 악 불선의 생각을 낳아 욕(欲)을 장양하고 에(恚)를 장양하며 치(癡)를 장양하니, 이는 바로 둔근자이다. 다문의 성 제자가 비록 집(集)의 멸(滅)을 일으켰을지라도 ‘욕’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으로, 비유컨대 쇠구슬을 달구어 몹시 뜨거워졌을 때 물을 조금 뿌리면 바로 말라 없어지듯이, 다문의 성 제자로서 둔근자가 염을 낳을 때 바로 멸하는 것도 이와 같다.”
36)
“다른 경 중에서도 이러한 ‘원리(遠離) 등에 수순하는 것’을 설하여 ‘응과(應果)의 힘’이라고 말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5권, 고려장27,p.638상; 대정장29,p.130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138) 여기서 ‘다른 경’이란 『잡아함경』 제26권 제694경(대정장2,p.188중). 주40) 참조.
37)
현존 경(『잡아함경』 제43권 제1173경)에서는 “그 같은 다문의 성제자는 그 마음이 오랫동안 원리(遠離)를 향해, 이욕(離欲)을 향해 나아갔고 흘러들었으며 실려갔다. 그래서 열반에서 적정(寂靜) 사리(捨離)하였으며, 열반을 즐겼으며, 유루처를 적멸하여 청량(淸凉)하게 되었다”로 되어 있다. 즉 여기서 원리와 출리(이욕)와 열반은 바로 아라한의 특징이므로 앞에서 ‘실념하는 다문의 성 제자’는 바로 아라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38)
현존 경(상동)에서는 “불구덩이와 같다고 관찰한다(見五欲猶如火坑)”로 되어 있다.
39)
아뢰야(ālaya)는 애착의 뜻으로 집장(執藏)이라 번역되며, 니연저(nkānti, 혹은 niyati)는 집착의 뜻으로 집취(執取)로 번역된다.
40)
이상은 『잡아함경』 제26권 제694경(대정장2,p.188중). 즉 중현이 아라한과 유퇴론의 경증으로 인용한 『탄유경(炭喩經)』에서 묘사하고 있는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를 다른 계경에서는 아라한이라는 말로써 동일한 내용으로 설하고 있을 뿐더러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이미 수습한 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탄유경』의 ‘다문의 성 제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라한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41)
본권 ‘상좌의 아라한과 무퇴론’; ‘상좌의 아라한과 무퇴론 교증 비판’ 참조.
42)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8상중; 대정장29,p.130하; 권오민 역,p.1138).
43)
본론 상에 인용된 『탄유경』에서는 ‘통달’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 경의 현존본인 『잡아함경』 제43권(대정장2,p.314상)의 첫 구절에서는 다문의 성제자를 여실지견(如實知見)한 이로 설하고 있다. “다문의 성 제자는 일체 고법(苦法)의 집(集)과 멸(滅)의 미(味) 환(患) 리(離)를 여실(如實)히 지견(知見)하여 다섯 욕(欲)을 마치 불구덩이와 같은 것이라고 관찰하였다.”
44)
6항주법이란, 색(色)을 보고 나서, 나아가 법(法) 등을 사유하고 나서 기뻐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마음이 항상 평정[捨]에 머물러 염정지(念正知)를 갖춘 것이다.(본론 제29권 주81의 본문 참조)
45)
다시 말해 “갈 적에나 머물고 있을 적에 아직 능히 잘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념(失念)하여 불선을 낳는 것으로, 이는 바로 유학에 대해 말한 것이다”는 경주의 설도 옳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46)
즉 『탄유경(炭喩經)』에서 실념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성 제자(주35)는 유학이고,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隨順)한 성 제자(주36)는 무학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양자를 분명하게 분별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지만,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은 그것은 모두 무학에 대해 설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47)
다시 말해 ‘자기들끼리 하는 말에 불과하다.’ 혹은 중현(衆賢)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볼 때 “어린애들이 저들 방안에서 장난삼아 지껄인 말과 같다(如童豎自室戱言)”는 뜻이다.
48)
주37) 참조.
49)
“‘번뇌에 수순하는 법[順漏法]’과 ‘번뇌[漏]’를 구별하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온갖 번뇌 역시 ‘번뇌에 수순하는 법’에 포섭된다”는 뜻이다. 전 찰나의 번뇌는 후 찰나의 번뇌에 동류인이 되고 변행인이 된다.
50)
경부(經部)에 의하는 한, 현행의 번뇌[纏]는 다음 찰나에 번뇌종자가 되기 때문에, 그들 역시 ‘번뇌’와 ‘번뇌에 수순하는 법’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51)
즉 앞서 중현은 『탄유경』에서 “다문의 성 제자에 대해 오랫동안 원리(遠離)에 수순하였다”(주37의 본문 참조)고 설하고 있으며, 다른 경에서는 그것을 아라한이 갖는 여덟 종류의 힘의 하나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주40의 본문 참조) 『탄유경』에서의 다문의 성 제자는 바로 무학임을 논증하였는데(주40), 상좌는 이 경에서는 다만 “원리(遠離)와 출리(出離)와 열반에 수순하며--5욕에 대한 욕탐ㆍ욕애ㆍ욕념(欲念)ㆍ욕착(欲著) 등이 마음을 영원히 더럽히지 못한다(덮지 못한다)”(주39 본문 참조)는 한 가지의 힘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학이라고 말해도 과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라한의 여덟 가지 힘이란 원리 등에 수순하며--5욕을 한 덩이의 숯과 같은 것이라 관찰하여(현존 경에 의하면 불구덩이와 같다고 관찰하여) 욕탐 등에 마음이 오래 머물지 않으며, 4념주 내지 8성도지를 닦는 것.(주40의 본문; 『잡아함경』 제26권 제694경, 대정장2,p.188중 참조)
52)
경부(經部)에서는 제법의 동시생기[俱生]를 인정하지 않으며, 상속 전변의 차제 생기[繼起]를 주장한다.
53)
이 경설은 앞서 ‘상좌의 아라한과 무퇴론 교증 비판’에서 인용하였다.
54)
이 경설은 앞서 ‘상좌의 아라한과 무퇴론’에서 인용하였다.
55)
본론 제68권 주54) 본문 참조.
56)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8권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경증 비판(續)’; 동권 주58)의 본문을 참조할 것.
57)
이 경설은 앞서 ‘상좌의 아라한과 무퇴론’의 다섯 번째 경증으로 인용되었다.
58)
이설자(경부)는 선정의 자재성에서 물러나는 이만을 퇴법이라 하고, 수용퇴인 부동법은 불퇴법이라 하였지만, 계경에서는 퇴법을 아라한의 한 종류로 설하였기 때문에 이 역시 옳지 못한 해명이라는 뜻이다. 해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본론 제68권 주57) 58)의 본문을 참조할 것.
59)
본론 제68권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경증 비판(續)’에서는 “정려에서 물러난다고 함은 온갖 욕탐[諸欲]에서 떠나는 것[有離]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떠나지 않는 것[無離]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미] 이욕(離欲)하여 퇴실할 일이 없음에도 이생희락(離生喜樂)에서 퇴실한다고 말한 것이니, 어찌 서로 모순되는 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욕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정려 중에서] 마땅히 번뇌를 일으켰어야 하는 것으로, 번뇌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어찌 정려에서 물러난다는 것인가?”라고 논설하였다.
60)
일체의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음을 아는 것이 진지(盡智)라면,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이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 이미 다하여 더 이상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아는 것이 무생지(無生智)인데(후술), 만약 “일체의 모든 번뇌가 다하였으면 다시는 물러나 번뇌를 낳지 않는다”고 한다면, 굳이 진지와는 별도로 무생지를 설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61)
즉 상좌는, 번뇌를 끊었을지라도 다시 태어나는 이생의 번뇌단과 제일(第一)의 안온(安穩)이라 할 수 있는 아라한의 그것(즉 금강유정의 진지)을 차별하기 위해 무생지(無生智)를 설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무생지는 필경 진지 이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진지와는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유부에 의하면, 무생지는 진지를 획득하고서 물러나는 일이 있는 아라한(즉 시해탈)이 닦아야 할 지(智)로서, 무생지를 성취한 아라한을 불시해탈, 진지만을 획득한 아라한을 시해탈이라 한다.
제70권
1)
본론 제68권 주12)의 본문 참조.
2)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8중; 대정장29,p.130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139)에서는 이 경문을 온전하게 인용하고 있다. “나는 그같이 증득된 네 종류의 증상(增上)의 심소(心所, 곧 4정려)인 현법락주 중의 한 가지에 근거하여 획득한 바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설한다. 그렇지만 부동의 심해탈을 몸으로 작증한 이의 경우, 나는 결정코 이로부터 물러나는 인연이 없다고 설한다.” 이는 『중아함경』 제49권 「대공경」(대정장1,p.740상중), “若彼不移動心解脫作證, 我不說有障礙也. 若彼得增上心現法樂居, 本爲精勤無放逸遊行故. 此或可有失以弟子多集會(만약 그들이 不動의 심해탈을 작증하면 나는 그들에게 장애가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네 가지 增上心의 現法樂居를 획득하였다면 본래 정근하고 방일함이 없이 유행하였기 때문으로, 여기에 혹 물러남이 있다면 [홀로 있지 않고] 제자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즉 부동법의 아라한은 물러나는 일이 없다면, 현법락주에서는 어떻게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설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참고로 경부(經部)에서의 아라한과의 물러남은 현법락주에 근거한 것이었고, 이에 대한 비판은 본론 제68권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경증 비판(續)’에서 논설하였다.
3)
불타는 온갖 공덕을 두루 갖추었을지라도, 그것이 일시에 현전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수용퇴’이다. 불타가 갖는 온갖 공덕, 이를테면 그만이 갖는 공덕[不共法]과 다른 성자와 공통적으로 갖는 공덕[共法]에 대해서는 본론 제75~76권에서 상론한다.
4)
무쟁(無諍)이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이에게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행(行)으로, 이로 인해 모든 유정류의 번뇌의 다툼[諍]이 종식되기 때문에 ‘무쟁’이라 하였다. 이는 제4정려를 소의로 삼기 때문에 무쟁정(定)이라 하였다.(본론 제75권 참조) 여기서 ‘등’은 부처와 여러 성자간에 공통되는 공덕인 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4무애해(無礙解)이다.
5)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8하; 대정장29,p.131상; 권오민 역,p.1140)에서는 “이에 대해 무퇴론자(無退論者)는 ‘온갖 무루의 해탈을 모두 부동이라 이름한다. 그럼에도 여섯 번째의 부동법을 별도로 설정한 것은 앞서 해석하여 회통한 바와 같으니, 이는 마땅히 힐난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설하였다”고 약술(略述)하고 있다. 경부에 의하는 한, 모든 아라한과는 현법락주에서 물러나고 물러나지 않음에 관계없이 과위(果位)에 물러나는 일이 없는 부동법(즉 부동심해탈)이며, 6종성은 다만 현법락주에서의 물러남과 물러나지 않음에 근거한 것이다. 즉 앞의 경에서 설하고 있는 부동법은 현법락주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는 응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심해탈을 증득한 일체의 모든 아라한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현법락주에서 물러난다고 설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사법 역시 부동심해탈이지만 현법락주에서 물러날까 두려워하는 아라한이라는 것이다.
6)
본론 제68권 ‘경주의 아라한과 무퇴론 경증 비판(續)’ 참조.
7)
안주법(安住法)이란 수승한 퇴실의 인연을 떠난 이로서, 스스로 방호하지 않더라도 물러나지 않지만, 뛰어난 가행을 떠나고 근기를 단련하지 않아 승진하지도 않기 때문에 ‘안주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8)
즉 앞에서 ‘근기를 단련[練根]하지 않고 획득한 이’를 불퇴법으로 설정하였다.
9)
감달법(堪達法)이라고 함은, 능히 감당할만한 공능[堪能]이 있어 즐거이 연근(練根,근기의 단련)을 수습하여 신속하게 부동법에 도달하는 종성을 말한다.(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10)
다시 말해 크나큰 가행을 일으키고 연근을 수습하는 것은 응과성으로서의 부동법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지 세속의 유루인 현법락주에서의 부동(물러나지 않음)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후술)
11)
『잡아함경』 제43권 제1173경(대정장2,p.314중하). “원리(遠離)를 향해 나아간 다문의 성제자들은 과위에서 물러나 번뇌를 일으키더라도 신속하게 다시 과위를 획득하여 일어난 번뇌를 진몰(盡沒)하게 할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동방으로 흘러가는 항하(恒河)를 많은 사람들이 막아 서방으로 흘러가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12)
여기서 범행이란 무간ㆍ해탈ㆍ승진의 세 도를 말하는 것으로, 청정행의 뜻이다. 즉 만약 아라한과에서 물러나 다시 획득할 수 없다고 한다면, 범행을 닦아 획득한 그 같은 아라한과조차 안온하게 믿고 안주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13)
여기서 소의신 즉 대종이 평등하지 않다는 말은 질병에 걸렸다는 뜻이다.
14)
제1설:성과(聖果)에서 물러날 때, 먼저 번뇌를 일으키고서 물러난다.
15)
『품류족론』 제3권(대정장26,p.702중). 욕탐 등의 번뇌가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53권 ‘번뇌의 생기인연’에서 상론하였는데, 세 가지는 순서대로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ㆍ경계대상ㆍ가행의 힘이다. 여기서 『품류족론』의 논설(論說)을 인용한 이유는, “아라한은 이미 단변지(斷遍知)하여 번뇌에 수순하는 법과 그에 대한 비리작의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다시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16)
다시 말해 번뇌가 현전하는 경우, 이미 끊어진 것이 현전하는 경우도 있고,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현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7)
다시 말해 번뇌는 염오의 마음과 무간에 일어나는 것도 있고, 염오하지 않은 마음과 무간에 일어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18)
번뇌생기의 인연을 모두 말하면 세 가지로서, 아라한의 번뇌는 다만 경계대상의 힘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품류족론』의 논설과 상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원인ㆍ경계대상ㆍ가행의 힘이란 『품류족론』에서 설한 세 가지.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고 변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라는 말은 번뇌는 원인의 힘[因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며, ‘전(纏, 즉 욕탐)에 수순하는 법이 바로 현전하였기 때문에’라는 말은 번뇌는 경계대상의 힘[境界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며, ‘비리작의(非理作意)를 일으켰기 때문에’라고 하는 말은 번뇌는 가행의 힘[加行力]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본론 제53권 ‘번뇌의 생기인연’ 참조)
19)
원문은 ‘수자주(守自住)’로 되어 있지만, 『현종론』 제33권(고려장28,p.241상)이나 송ㆍ원ㆍ명본 등에 따라 ‘수자위’로 고쳐 번역하였다.
20)
원문은 ‘少順退故得順退名’이다.
21)
제2설:성과(聖果)에서 물러날 때, 먼저 물러나고서 번뇌를 일으킨다. 이는 앞서 “물러나는 일이 있는 모든 이는 혹(惑)을 일으키고서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먼저 물러난 다음에 비로소 혹이 현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2설이다. 제1설은 주14) 참조.
22)
즉 번뇌를 일으키지 전에 물러났지만, 그때는 물러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그 후 번뇌를 일으킬 때 비로소 물러났다는 사실을 안 것이기 때문에, 논(論)에서는 “번뇌를 일으키고서 물러났다”고 설한 것이라는 뜻이다.(후술)
23)
개개의 종성을 장애하는 불염오무지에 9품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끊고 이계를 증득하는 무간ㆍ해탈도에도 각기 9품이 있는 것으로, 이는 9무간도와 9해탈도로써 유정지(有頂地)의 혹을 끊고 아라한이 되는 것과 같다.
24)
앞서 유학의 성자가 닦는 연근의 도에는 각기 한 가지의 가행ㆍ무간ㆍ해탈도가 있으며, 무학의 경우에는 한 가지의 가행도와 각기 아홉 가지의 무간ㆍ해탈도가 있다고 하였다.
25)
세속의 유루도는 그 본질상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성자의 근기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26)
원문은 ‘諸未來法有得, 得故卽說名修. 旣彼得俱, 寧不修彼?’이다.
27)
원문에는 ‘후시(後時)’로 되어 있으나 앞의 구절에 준하여 후과(後果)로 고쳐 번역하였다.
28)
주24)의 본문 참조.
29)
색ㆍ무색계와 6욕천에는 무루도가 존재하지만 물러남이 없기 때문에 연근(練根)을 닦지 않는다. 오로지 북구로주를 제외한 인취의 세 주(洲)에만 물러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연근을 닦는다는 것이다.
30)
근기를 바꾸는 것[轉根]은 지금까지의 과도(果道)와 승과도(勝果道, 즉 向道)를 버리고 증상(增上)의 과도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예류과와 일래과의 과도가 욕계 미지정에 근거하여, 불환과의 그것은 미지ㆍ중간ㆍ4근본정에 근거하여 획득되었듯이, 연근 역시 과도만을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 3무색정을 제외한 6지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31)
원문은 ‘諸住果位修練根時, 捨果得果. 住勝道位修練根時, 捨二得果’이다.
32)
다시 말해 “아라한과의 경우, 하지에 근거하여 근기를 단련할지라도 본래 획득한 것과 같은 지의 응과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33)
후(後)의 부동이란 근기의 단련에 의해 부동이 된 아라한을 말하며, 선(先)의 부동이란 근기의 단련에 의하지 않고 선래(先來) 본득(本得)의 부동을 말한다.
34)
즉 견도에 들기 이전에 다른 이의 말을 믿고서 가행을 닦은 이를 수신행이라고 하며, 스스로 증득한 법에 따라 가행을 닦은 이를 수법행이라고 한다. 본론 제64권 ‘견도위(15심)의 성자(수신행ㆍ수법행)’ 참조.
35)
둔근인 수신행의 성자가 수도에 이르러 신(信)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무루의 정해(正解)가 나타났기 때문에 ‘신해’라고 한 것이며, 이근인 수법행의 성자가 수도에 이르러 혜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무루 정견이 나타났기 때문에 ‘견지’라고 이름하였다. 본론 제64권 ‘수도위(제16심)의 성자(신해ㆍ견지)’ 참조.
36)
신증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을 참조바람.
37)
해탈장(解脫障)은 정장(定障)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해탈은 멸진정, 즉 멸진정에 들어가는 것을 장애하는 무부무기성의 저열한 무지인 불염오무지를 말한다. 차항(次項) 참조.
38)
참고로 신해와 견지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성자를 ‘신증’이라고 한다.
39)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에 대해서는 본론 제67권 ‘6종성의 아라한’ 참조.
40)
제8 지(智)인 도류지(道類智)는 수도위이기 때문에 제외된 것이다.
41)
이생위에서 수혹을 끊지 않고 견도위에 든 구박의 성자와, 하(下) 8지의 9품의 수혹을 끊은 일흔두 종류의 성자를 말한다.
42)
즉 첫 번째 유여사는 선정을 자유자재로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해탈장이라고 하였지만, 그럴 경우 선정을 자유자재로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필시 그 원인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해탈장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3)
즉 두 번째 유여사는 “선정을 획득하지 못한 것[不得]을 해탈장이라 한다”고 하였지만, 선정을 획득하지 못한 것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해탈장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4)
세 번째 유여사는 “구해탈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그것의 가행을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행을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음’이 해탈장의 본질이다”고 하였지만, 아라한과가 가행을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았다면 이와는 다른 번뇌장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45)
제1구는 명칭은 동일하여도 근기는 동일하지 않는 경우이며, 제2구는 근기는 동일하여도 명칭은 동일하지 않는 경우이며, 제3구는 명칭과 근기가 동일한 경우이며, 제4구는 명칭과 근기가 동일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아라한의 각기 다른 명칭인 혜해탈과 구해탈은 멸진정의 득(得)ㆍ부득(不得)에 의한 것이며, 시해탈과 불시해탈은 근기의 이(利)ㆍ둔(鈍)에 의한 것인데, 4구분별을 통해 네 가지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다.
46)
혜해탈 중에 존재하는 시해탈과 불시해탈은, 명칭상으로는 ‘혜해탈’로 동일하지만, 근기는 둔근과 이근으로 동일하지 않다.
47)
5하분결(下分結)을 끊고서 불환과를 성취하면 다시는 욕계의 혹업(惑業)에 견인되지 않는 불퇴위에 머물게 된다는 뜻이다.
48)
‘원만한 유학’이란 견지(見至, 즉 이근)로서 유학위 중 가장 뛰어난 불환과를 증득하고 다시 멸진정을 획득한 자(身證)를 말한다.
49)
순서대로 근기를, 선정을, 과보와 선정을, 근기와 선정을 결여한 유학이다.
50)
이러한 어떤 이의 설은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9하; 대정장29,p.131하; 권오민 역,p.1148) 상에서 정설로 설해지고 있다.
51)
무학위는 모두 최상의 과위인 아라한과를 증득한 자로서, 유학위의 경우처럼 사문과 상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52)
‘원만한 무학’이란 불시해탈(물러남이 없는 이근의 부동법종성)으로서 멸진정을 획득하여 해탈장(解脫障)에서도 떠난 자(즉 俱解脫)를 말한다.
53)
이 역시 『구사론』 제25권(고려장27,p.639하; 대정장29,p.131하-132상; 권오민 역,p.1149) 상에서 정설로 설해진 것으로, 온전하게 인용하면 이러하다. “[어떤 무학의 성자는] 다만 근기에 의해서도 역시 ‘원만한 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불시해탈로서 아직 멸진정을 획득하지 못한 자가 그러하다. [어떤 무학의 성자는] 다만 선정에 의해서도 역시 ‘원만한 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시해탈로서 멸진정을 획득한 자가 그러하다. [어떤 무학의 성자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오로지 그만을 홀로 ‘원만한 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불시해탈로서 이미 멸진정을 획득한 자가 그러하다.”
54)
삼명이란 숙세를 아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 미래의 유정이 이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남을 아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 번뇌의 멸진을 아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이는 불타만의 공덕[不共法]인 10력(力) 중의 하나이기도 하며, 또한 6통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아라한의 그것을 ‘3명’이라 한다.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함.
55)
『현종론』 제33권(고려장28,p.244하)에 의하면, “3명을 갖춘 자는 혜해탈과 구해탈 중에 포섭된다”는 유설(有說)과 “3명을 갖춘 자는 오로지 구해탈에 포섭된다”는 유설이 설해지고 있는데, 이상은 후자를 주장하는 이가 전자에 대해 힐난하는 논설이다. 이하 두 주장의 대론을 소개한 후 논주 중현의 평석이 이어진다.
56)
즉 앞서 “3명을 갖춘 자는 다만 구해탈에 포섭된다”고 설한 이설자는 『소시마경(蘇尸摩經)』에 근거하여 혜해탈은 정려가 현전한 이가 아니기 때문에 ‘3명을 갖춘 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경에서는 근기와 선정(멸진정)의 두 조건을 모두 갖춘 ‘원만한 이’에 근거하여 설하였을 뿐으로, 혜해탈 역시 ‘3명을 갖춘 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7)
뒤에서는 ‘8해탈’로 논설되고 있다. 8해탈에 대해서는 본론 제80권에서 상론.
58)
다시 말해 경에서 “어떤 이는 3명을 갖추었지만, 구해탈이 아니다”고 설하였지만, 후반부에서 다시 혜해탈에 대해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 ‘구해탈이 아니다’고 함은 원만한 구해탈이 아니라는 말일 뿐 혜해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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