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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다운 상주감리교회(1831.2017. 12.3)
행13:1-3
할렐루야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가 되는 상주감리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구부로와 구레네 출신 및 형제들이 모여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설립된 교회입니다. 나중 된 자로 하여금 먼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핍박 중에 생긴 이 이방 교회로 하여금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교회는 그 상징성에 있어서 값진 면이 있다면,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불어 닥친 핍박으로 인해 신앙을 지키고자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세워진 교회로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땅 끝까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로 쓰임 받은 이 땅의 교회로서의 하나님의 모델이 되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눈으로 볼 때 ‘참 저 교회는 본받고 싶은 교회다’하는 부러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인 수가 많고, 교회당 건물을 잘 지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 교회는 정말 교회다운 교회이구나’ 하는 것 때문에 부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교회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안디옥교회’입니다. 우리교회도 개척은 어렵게 시작되어서 오늘까지 이르렀는데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우리 상주감리교회도 안디옥 교회를 모델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안디옥교회는 예배와 기도가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2-3절‘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기도로 뜨거웠고, 금식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였습니다.
2절‘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라는 말씀 가운데 ‘섬겨’라는 원어의 뜻은 ‘레토로기아’ 즉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섬겨 금식했다는 말은 금식까지 해 가면서 예배에 전념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지식층 인사나, 귀족 출신의 신자들은 신앙의 열정과 갈망이 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들의 찬송에 힘이 없고, 저들의 기도엔 냉기가 도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석학이요, 마나엔은 귀족이었으며, 바나바는 신사요, 시므온과 루기오는 상당한 식견이 있는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기도와 예배에 뜨거운 열정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열정과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는 교회는 특별히 예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씁니다. 찬송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간절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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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을 잃고 덤비는 광신적인 교회나, 생명을 잃고 굳어져 가는 냉랭한 교회는 둘 다 복음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성경의 기초 위에서 성령으로 불붙어 가는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배와 기도에 열정과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도 예배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할 정도로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가 뜨거워야 하겠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능력은 예배와 기도가 뜨거울 때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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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잇었던 것은 바로 이들에게 예배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이들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상반 절에 ‘주를 섬겨’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섬긴다는 말은 본래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하면 예배했지 왜 금식까지 했을까요? 금식하면서 예배했다는 의미는 음식을 포기할 정도로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인생을 살기 위해 생명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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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 가운데 정말 갈급한 심정을 가지고 온 맘 다해 온 정성을 모두워 이 예배를 섬기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가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삶 전체를 몽땅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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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는 하나님 뜻에 맞추기 위해 몸부림 쳤습니다. 크고 작은 유혹이 왔을 것입니다. 낯선 곳에 정착해서 먹고 사는 문제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어려운 문제들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속한 일터에서 그들의 동료들에 비친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손해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희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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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삶의 현장에서 안 믿는 사람이 ‘저 사람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 인정 받기는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 사람으로서 그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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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서로가 하나가 되어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선교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가 피부색깔과 신분과 소유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사랑공동체라고 하는 분명한 공동체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도 이름도, 태어난곳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예배에 대한 열정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신분과 소유, 학력과 학식의 차이, 인종의 차이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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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 삶에 예배가 중심되지 못한 삶은 어떻습니까? 휘청합니다. 낚시 가자고 그러면 낚시 가고 등산가자고 그러면 등산 가고 골프치러 가자고 하면 골프부터 먼저 칩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이 아니라 예배는 악세사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전혀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붙들려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휘청거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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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생명선입니다. 예배를 떠나면 생명줄이 막히기 때문에 실패하고 신음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영혼이 시들어 갑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 죽어가는 꽃처럼 시들어 갑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로 삶이 흐트러져 버립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예배에 승리하는 사람들,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왔으나 하나님이 맡아주는 통쾌함을 경험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왔으나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어루만짐 당하고 붙들림 당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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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디옥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인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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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백인과 흑인과 황인종, 귀족과 왕족, 평민과 노예가 함께 모여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한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못배운 사람, 잘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치와 조화를 이룬 교회입니다. 우리는 얼굴생김처럼 다양한 색깔의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있는 그대로 받아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주님의 몸,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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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말씀을 보면 이 교회의 구성원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일꾼입니다. 하나님 나라 일꾼입니다. 오늘 본문에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그 교회의 중직자들입니다. 그 교회의 핵심 멤버들입니다. 교회마다 알고 보면 헌신하는 개척 멤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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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시련들이 오기 마련입니다. 악한 마귀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워지는 데 악한 마귀들이 가만 있을리 없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일꾼을 통해 기도하게 하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도와주십니다. 교회가 거저 부흥되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수고와 헌신, 희생이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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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나 받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한 자들이 받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눈여겨 보십니다. 누가 헌신을 하는지? 누가 눈물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지, 누가 교회를 위해 노력을 하는지 다 아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좋은 것을 뿌리십시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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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는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아직 이 지방에서 사회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사람들과 생존경쟁의 문제로 날마다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교회에서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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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는 안디옥교회의 일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뿌리가 다 다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태생인 레위 사람(행4:36)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되어 온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귀족출신으로 땅을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개척 때부터 열심으로 봉사한 사람입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흑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니게르라는 말의 의미는 ‘검은’입니다. 이 말에서 ‘니그로’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학자들은 이 시므온은 누가복음 23:26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넘어지고 쓰러질 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흑인이며, 시골사람입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도 흑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구레네라는 곳이 북아프라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젖동생이란 궁중에서 같이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마나엔이라는 사람은 그 당시 갈릴리를 통치하였던 헤롯왕과 궁정에서 함께 자랐던 왕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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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우리가 아는 대로 바리새인이고(빌3:5) 학문의 중심지인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행22:25),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행22:3). 처음에는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였지만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소개 되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사람을 살펴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다섯 사람이 모두 고향도 다르고, 출신성분도 다르고, 피부색깔도 다르고, 사회적 지위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다양한 계층,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핍박 가운데 세워진 이 교회가 이방 선교의 물꼬를 트고 이처럼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정말 근사하게 하나로 뭉쳐서 나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그들 속에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졌기 때문임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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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입니까? 계1:5-6절‘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서 교회는 네 가지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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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입니다. 주님이 죄에서 구속해준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의 나라와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의 제사장으로 삼으신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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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공급을 받은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십자가너머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절망너머에 꿈틀거리는 희망의 아지랑이를 봅니다. 안디옥 성도들도 절망가운데 모인 사람들이지만, 걱정과 한숨과 근심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주역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은혜의 끈을 붙들고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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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절망의 눈빛과 희망의 눈빛은 다릅니다. 절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헌신 속에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비전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 중에, 절망 중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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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방장관을 지낸 모세다얀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와 그의 운전기사가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물었더니 모세다얀 왈(曰) ‘그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고, 나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운전하는 사람이니 결국 그와 나는 같은 운전사가 아닙니까’라고 해서 웃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는 상대방의 일과 삶을 서로 인정해 줄때에 아름답게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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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가 피부색깔도 다르고, 배움도 다르고, 출신성분도 다른데도 서로 갈등하거나 분열되지 않고 마음이 하나 되어 선교에 매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피차 서로를 인정하고 아껴주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도 앞으로도 다양한 분들이 교회에 들어와도 금방 서로 하나 되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사랑이 많은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안디옥교회는 선교에 열정이 있는 교회입니다.
안다옥 교회를 묵상하며 정말 놀라운 것을 하나 보게 됩니다. 그들은 주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과 헌신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2절‘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부흥과 성장을 위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무엇보다 기도하며 금식함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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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기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를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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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어딘가에 헌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인생의 본질은 하나님께 헌신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헌신한다는 말은 우선순위가 정해 졌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마하는 말은 좌우를 쳐다보지 못하도록 눈가에 가리개를 씌워 놓았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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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따로 세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디옥 교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의 주축이 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리더를 선교사로 파송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를 잘하고 있는 담임 목사와 그리고 함께 동역하여 안디옥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간 두 지도자를 선교사로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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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어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갑자기 교회의 핵심인물인 바나바와 바울을 달라는 이 음성 앞에 하나님께서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교회가 안정되어 가는 순간인데, 선교를 하라니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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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는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하여 두 사람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5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자신들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나머지 세 사람도 그들대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니, 바울 떼어 가고 바나바 떼어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하나님, 너무 합니다. 제일 좋은 부분만 싹뚝 잘라서 골라가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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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님들의 인생에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황금기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안디옥 교회라고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것은 안디옥 교회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자기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내놓으라는 성령의 음성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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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기도를 했습니다. 이 두 말 속에 그들이 얼마나 고민하고 갈등했는가를 우리는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두 사람을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할렐루야!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성도여러분! 가슴이 뜨거운 여러분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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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헌신을 요청한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교회도 할 일이 많아 일꾼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순종은 때로는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에 희생의 대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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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그들 중에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열방으로 파송했고 그들 특히 바울은 당시의 알려진 세상(오늘의 터키,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유럽대륙)을 세 차례 이상 여행하여 세계 도처에 교회를 개척했고 그리고 1세기의 세상은 복음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결코 ‘아니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님, 성령의 역사가 그들과 함께 하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 원하신다면 여러분과 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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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를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 앞에 선 우리들 속에 전도와 선교에 대한 부담은 사라지고, 우리끼리 교회 나와서 위로 받는 데에 만족하여 돌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 무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 꿈을 꾸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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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는 교회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입니다. 그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받은 이들이 바로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아니었다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고 할 일 다 했다고 손 놓았던 교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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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선교사님들이 겪는 어려움들 중에 하나가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안디옥교회의 특징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여행을 계속하여 지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교회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내는 주체는 안디옥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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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행14:26-2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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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때도 행15:40절에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18:22절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동안 있다가’ 3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3차 전도여행의 종착역은 예루살렘이고, 그곳에서 체포되어서 로마로 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디옥교회가 바울의 전도여행을 계속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차 전도여행 때뿐 아니라 2차, 3차 전도여행 때에도 안디옥교회는 계속해서 관련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전도여행을 지원하는 이일은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도 하지 못하던 일입니다. 그만큼 안디옥교회는 선교에 남다른 열정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도 앞으로 선교사를 보내면 책임을 질 수 있는 선교에 열정을 가진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고독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 좌절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혀 주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나면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치유가 됩니다. 신앙의 방황도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좋은 교회를 만나면 그곳에 내 영혼의 닻을 내리고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감격 있는 예배를 드리게 되고, 말씀을 들으며 심령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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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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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는 내년에 2월 14일이 창립 35주년을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여곡절 35년동안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넓게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 그리고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더 나아가 말씀 앞에 순종이 생활화 되는 교회로 섬겨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꼭 필요한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더욱 부흥시켜 주실 것이고, 우리와 우리 가정에도 필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과 물질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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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도 앞으로 선교지를 선택하고 선교사도 파송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준비해야합니다. 필리핀에 성전이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에 의해 전도가 되어서 예배는 드리는데, 예배당이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교회를 지어주면, 현지인 목회자를 파송하여 진정한 교회로 세워지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사님에게 물어보니까 3-4천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 내년부터는 상주감리교회 지 성전을 둘을 택하여 그 교회를 도울 생각입니다. 창고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까 성전건축 보다는 우선 목회를 도와서 그 교회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필리핀에 상주감리교회 지성전을 세운다는 기도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교헌금도 함께 해서 지교회를 하나 설립해서 몇주년 기념 예배당을 선교지에 지어 봉헌해드려 봅시다. 다 같이 가서 봉헌감사예배도 드리고, 해마다 가서 선교도하고 오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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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상주감리교회는 현재 교인 수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없는 것 없는 교회, 못하는 것 없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 상주감리교회는 그렇기 때문에 없는 것 없는 교회요, 또한 못하는 것 없는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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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최고 의사 결정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교회의 모든 것은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도 안디옥 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가 되기를 힘씁시다.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처럼 해봅시다. 기도와 예배에 간절함과 뜨거움이 있는 교회, 사랑이 충만한 교회, 선교에 열정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봅시다. 마지막 이 시대에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하나님이 모델 삼으시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우리교회를 제일 먼저 찾으시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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