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6> 서장 (書狀)
손지현(孫知縣)에 대한 답서
진실과 허구는 不二의 관계
“장수(長水) 스님은 비록 경전을 강의하는 강사이긴 하나 다른 강사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일찍이 낭야의 광조 선사를 찾아뵙고 <수능엄경> 가운데에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깨끗함이 본래 그러한데 어찌하여 문득 산과 강과 땅을 만들어 냅니까’고 물은 뜻을 가지고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낭야가 이에 소리를 높여서, ‘깨끗함이 본래 그러한데 어찌하여 문득 산과 강과 땅을 만들어 내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장수 스님은 이 말을 듣자 크게 깨달았습니다.”
마음 자체는 보고 확인하고 믿을뿐
까닭이나 원인 물을 수 없는 것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아무런 망상이나 조그만 티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라고도 하고, 본래 마음은 진공(眞空)이라고도 하며, 깨끗한 거울에 비유하기도 하고, 맑은 하늘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마음이 모든 티끌 경계를 만들어 낸다고도 하고, 하나하나의 대상 경계가 마음 아닌 것이 없다고도 하며, 마음은 진공이지만 동시에 묘유(妙有)라고 하고, 마음을 물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가리켜서 답하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을 공(空)이라고도 하고 색(色)이라고도 하며, 무(無)라고도 하고 유(有)라고도 하며, 번뇌라고도 하고 보리라고도 하므로, 이치를 따져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정반대인 것을 어떻게 하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온갖 그럴듯한 설명들이 만들어져 나오니, 그런 것들이 이른바 불교철학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하고 기묘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뜻이라는 허구적 관념이며 그 뜻을 표현한 말일 뿐이다. 마치 아무리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잘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림일 뿐이고 실재가 아닌 것과 같다.
뜻은 허구이니 허구만 쫓아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허구와 진실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빛과 그림자와 같은 관계고, 파도와 물과 같은 관계이며,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고, 영화 화면과 영사기의 빛과 같은 관계로서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불이(不二)의 관계이다.
그 때문에 허구를 그 자리에서 바로 돌이켜 볼 수만 있다면, 진실은 바로 그곳에 있다. 진실이 허구와 동떨어져 따로 있을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앞에 나타나는 하나하나의 경계는 그 자체로는 허구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다. 경계를 마주하여 허구로 보거나 진실로 보는 것은 오직 사람이 지혜를 갖추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혜란 경계를 대하여 허구 아닌 진실을 보는 안목을 말한다. 경계의 진실을 우리는 법(法)이니 도(道)니 마음이니 자성(自性)이니 불성이니 본래면목이니 하고 다양한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그러므로 지혜란 예컨대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만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돌멩이를 보면서 법을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법을 보며, 향기를 맡으면서 법을 보고, 손을 씻으면서 법을 보며, 달리기를 하면서 법을 보고, 책을 읽으면서 법을 보며, 생각을 하면서 법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경계는 천차만별로 달라지지만 모든 경계는 법으로 통일된다. 말하자면 모든 경계는 법 위에서 건립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에 관해서는 이대로 보고 확인하여 믿을 수 있을 뿐, 그 까닭이나 원인을 물을 수가 없다. 물음 자체가 이미 법에 의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생각을 통하여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는지 하나하나 관찰할 수가 있지만, 생각 자체가 왜 일어나는지를 알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통하여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만, 생각 그 자체에 관해서는 단순히 이렇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마음법이 바로 그렇다. 마음 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헤아려 이해할 수가 있지만, 마음 그 자체는 다만 이렇게 보고 확인하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렇게….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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