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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4월 19일
어느 겨울날
상원사 적멸보궁에 이르는
햇살처럼 눈부신 이승의 길이 있다면
당신과 살림을 차려 매화꽃처럼 피고 싶네.
우뢰와 같은 그리움으로
단 한 벌 뿐인 사랑으로
삶의 끝 벼랑에도 포근한 길이 있다면
아늑한 토굴 한 칸 마련해 들꽃처럼 살고 싶네.
사색의 바다처럼
정동진 이르는 길목처럼
새떼처럼 정연한 화엄의 꽃 뿌려져 있다면
언제든 잔잔한 한 생애
바람벽 기대어 날고 싶네.”
-이재창 시인의 「상원사 가는 길」 전문
*4월19일 오늘은 4.19혁명기념일 1960년 오늘 4.19혁명 일어남, 경찰 발포로 서울에서만 1백여명 부산19명 광주8명 등 사망186명 부상6,026명, 정부는 서울일원과 유혈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 계엄령 선포, 계엄군(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서울진주후 일단 가라앉았으나, 4·25 대학교수단데모가 이어지자 4.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5·16쿠데타이후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명칭바뀜, 1993년 오늘 김영삼 대통령 현직대통령으로는 처음 4.19묘소 참배, 성지화 지시
*홀로코스트 추모일(Yom Hashoa): 1943년 4월 19일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기념하는 날, 폴란드
*에스와티니 국호 확립 1주년 (독립 51주년)
1066년 [음]문종(文宗) 20년, 근시(近侍)들을 각 창고의 별감으로 삼음
1087년 [음]선종(宣宗) 4년, 대장경 완성을 경축함
1256년 [음]고종(高宗) 43년, 대부도별초가 소래산에서 몽고군을 물리침
1261년 [음]세자 왕심이 몽고에 입조함
1271년 [음]원종(元宗) 12년, 종친 왕희와 왕옹을 보내 진도(삼별초)를 토벌하게 함
1280년 [음]충렬왕(忠烈王) 6년, 중랑장 지선을 동녕부에 파견해 선대 군왕의 능묘를 발굴한 일을 따짐
1395년 (조선 태조4)화약 만든 최무선 세상떠남, 중국의 이원에게 화약제조법 배움, 1377년 화통도감 설치 건의, 화약과 각종무기 만듦, 왜구가 쳐들어오자 부원수가 되어 그 화기들을 사용 적함500여척 전멸시킴
1396년 [음]태조 5년, 한성부 5부(五部)의 방(坊) 이름을 붙임
1402년 [음]태종 2년, 시장에서 거래할 때 오승포(五升布) 사용을 금하고 저화(楮貨)를 사용하도록 함
1409년 [음]태종 9년, 각 관청에서 사용하는 재정 비용을 감사(監査)하고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함
1415년 [음]태종 15년, 주부군현에 신명색(申明色)을 설치
1425년 [음]세종 7년, 흥천사(興天寺)의 종을 남대문에 옮겨 달게 함
1446년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 작고
1481년 성종 12년 동국여지승람 완성
1495년 [음]연산 1년, 《성종실록》을 편찬하게 함
1504년 [윤]연산 10년, 변형량(卞亨良)을 처형하여 효수(梟首)함
1504년 [윤]파평 부원군 윤필상(尹弼商) 죽음
1544년 [음]중종 39년, 충청도에 전염병으로 200명 이상 사망, 환자 474명 발생
1547년 [음]명종 2년, 전국적으로 우박이 내림
1566년 [음]명종 21년, 내수사(內需司)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없앰
1618년 [윤]광해 10년, 북경 사신단의 상행위를 금함
1637년 [음]오달제(吳達濟, 삼학사의 한 사람)가 심양에서 살해됨
1640년 [음]인조 18년, 청나라와 담배 밀무역하는 자를 엄벌하게 함
1654년 [음]효종 5년, 《선조실록》을 수정하도록 함
1749년 [음]영조 25년, 회계법(會計法)을 5군문(軍門)과 선혜청(宣惠廳)에 시행하도록 함
1763년 [음]영조 39년, 연산군과 광해군 묘를 수축하게 함
1766년 [음]영조 42년,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전 좌의정 김상복(金相福) 등을 삭직(削職)함
1771년 [음]영조 47년, 신규 은광은 호조에서 관장하게 함
1787년 [음]정조 11년, 충청도에 해적이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소동이 일어남
1825년 [음]순조 25년, 풍덕 향교의 혁파에 반대하는 유생들을 엄벌하게 함
1835년 [음]헌종 1년, 순종(純宗, 뒤에 순조)을 인릉(仁陵)에 장사 지냄
1869년 (고종6)『대전회통』 보수
1895년 (고종32)을미개혁 단행
1895년 역모 죄인의 姓을 없애는 법례 폐지
1895년 흥선대원군 손자 이준용 모반 사건 선거 공판, 10년형으로 감형, 강화도 교동에 유배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1911년 한국은행, 조선은행으로 개칭(9.1. 시행)
1912년 최초의 지방은행 구포은행 설립
1913년 대한인 부인회(회장 황마리아),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조직, 국어 교육 장려·일제 일용품 배척·교회와 사회 단체 후원
1920년 시베리아주둔 일본군,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촌 점령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 결성
1925년 한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송욱 출생
192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언론 3사에 논조·용어까지 구체적 조건부로 서약시킴
1935년 소설가 성해 이익상 작고
1938년 총독부,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 폐지 조선어 시간을 수학·실업 등으로 바꿀 것을 지시.
1938년 독립운동가·언론인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주필 세상떠남(67세), 영국인 베델과 함께
1940년 경조(慶弔) 전보제 도 폐지
1941년 재미 각 단체, 한국인 연합회 조직
1947년 서윤복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 동양인으론 첫 우승(2시간25분39초 세계신), 서윤복 선수 2013년에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선정됨
1948년 국제일보 창간
1948년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열림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김구(38선을 넘으며), 남북협상=1948.3.8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김구가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측 정치지도자들에게 협상 제의 3.9 김일성이 수락하여 성사, 김구 김규식은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 제안하는 한편 유엔한국위원단에 남북협상방안 제시하였으며 북한측은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제의, 미군정의 반대에도 김구 등 북행 4.19-23일 미소양군철수와 단독정부수립 반대를 논하는 연석회의 열렸고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인회담 따로 열림
1948년 김구-김규식,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참석차 방북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 선생과 김규식이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북행을 감행했다.
연석회의는 그동안 김일성이 언급해온 것으로 김구가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보려는 생각에 공식 제안함으로써 상사될 수 있었다. 당시 김구의 제안에 김규식과 안재홍은 동조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은 냉담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여는 연석회의에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한다고 홍보됐으며 김일성에게는 인민정권을 선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김일성을 비롯한 1,500여 명이 참석해 19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연석회의에 남한에서는 김구, 조소앙, 조완구 등이 참석했다. 이어 27일부터는 `남북요인 15인회담`과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김 회담` 등이 계속됐다. 이같은 일련의 회담을 통해 남북지도자들은 외국군대 즉각철수, 全조선정치회의 소집,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의 4개항을 결의했다. 하지만 모두 평소 김일성이 주장해 오던 판에 박은 내용들 뿐이었다.
김구의 평양방문은 남북분단을 막아보자는 절실한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한 결과 만을 낳았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은 지친 몸을 이끌고 5월 5일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1952년 동양통신 창간
1954년 국회, 〈국영 기업체 민영화안〉 결의 통과
1955년 피분 태국수상 내한
1960년 대학생과 시민 2만여 명이 시위. 경찰 발포로 142명 사망. 서울등 5개 도시 비상 계엄령.
1960년 4.19혁명 발발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자유당 정권의 오랜 독재 정치와 부정 부패로 국민의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데다가 1960년 3월 15일의 부정 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돼 일어난 혁명이다.
1952년 7월 4일 집권욕에 사로잡힌 자유당 정권은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 뒤 1954년의 총선거에서도 관권을 동원하여 승리를 거두고 1960년 3월 15일의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켜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일당 독재와 부정 부패 및 부정 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이날 4·19 혁명으로 폭발한 것이다.
4·19 혁명은 정권을 빼앗거나 체제 변혁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오직 독재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청년 학생들의 불타는 정의감에서 일어난 집단 행동이었다. 4·19 혁명은 학생이 주동이 되었고, 그 배경에는 온 국민의 호응이 있었다. 그러한 뜻에서 4·19 혁명은 민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근대적인 시민 투쟁으로서 우리 민족의 민주적 역량을 보여 준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서울 세종로와 명동 입구에 지하도 착공
1967년 수원에 경기도청사 본관 준공
1970년 함석헌, 월간 『씨알의 소리』 창간
1971년 민주수호 국민협의회결성(대표 위원에 김재준· 천관우·이병린)
1972년 KAL 태평양횡단 첫 취항
1974년 미국 이민국,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 연간 2만 명 이상 급증 발표
1980년 강원 영동지방 돌풍 속초 최대순간풍속 46.0m/s
1980년 문공부, 75년 베트남에 억류되었던 李大鎔 공사 등 세 외교관이 석방.귀국(12일)했다고 발표
1981년 정부, 유류·전기·연탄값 등을 일제히 인상
1983년 대도 조세형 탈주 후 5일 만에 검거
--대도(大盜) 조세형씨가 1983년 4월 19일 탈주 5일 만에 서울 장충동 민가에서 시민의 신고로 충돌한 경찰관의 총을 맞고 검거됐다. 조세형은 4월 14일 법원에서 결심공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넘겨지던 중 법원 구치감벽의 환풍기통을 뜯고 탈주했었다.
조세형은 10살 때 친구들과 숟가락을 훔치는 것으로 범죄와 질긴 인연을 맺기 시작, 1982년까지 절도죄로 10차례나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교도소에서 보낸 세월만 해도 정확히 자기 인생의 절반인 27년이나 됐다. 1982년 3월 출소한 그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담벼락을 넘나들며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 보석류와 현금, 수십억원대의 기업어음(CP)을 닥치는 대로 훔쳤다. 그는 이중 일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줘 `의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햇볕도 들지 않는 청송교도소의 1평짜리 독방에서 15년을 살아야 했던 조세형은 1998년 11월 수감 15년 만에 석방돼 절도방지를 위한 강연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며 살았으나 2001년 일본에서 다시 절도행각을 벌여 비난을 자초했다
1983년 정부, 유가인하 조치 발표. 벙커C유 7.5%, 가정용 전력요금 5.2% 인하
1983년 문공부 공산권의 순수음악 음반 수입허용
1984년 점보 카페리호 조난 참사
1984년 국세청,호화생활자 세금추징-전국에 1만여명 될듯
1985년 경찰, 가짜참기름 90억원어치 밀조 판매한 업자 등 9명 구속
1986년 프로야구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 첫 맞대결
--86년과 87년 프로야구는 롯데 최동원 선수와 해태 선동열이 펼친 맞대결로 뜨거웠다. 84년 다승왕(27승)에 한국시리즈 4승을 모두 책임 진 최동원과 국가대표로 불같은 강속구를 뽐낸 선동열.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 타자와 투수인 이들의 선발 맞대결은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1986년 4월 19일 부산에서 열린 첫 대결은 후배 선동열의 1대0 완봉승. 팽팽한 투수전에서 3회초 해태 송일섭이 뽑은 홈런이 결승점이었다.
정확히 4개월 후인 8월 19일 최동원은 2번째 맞대결서 똑같이 완봉승으로 `복수`했다. 1987년 5월 16일 세 번째 맞대결은 15회 연장 끝에 2대2 무승부였다. 9회까지 던지고 연장에 접어들었지만 아무도 두 선수를 마운드에 내려가게 하지 못했다. 이경기서 최동원은 209개, 선동열은 232개의 공을 던지며 끝까지 버텼다. 세 차레 맞붙은 최종 전적은 1승1무1패였다
1987년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 1조원 넘는 회사빚 감당못해 10층사무실서 투신자살
1988년 한국중공업 노조 총파업
1988년 노동부, 87년말 현재 노조수가 4086개, 노조 원수는 126만여명으로 집계
1988년 최초의 여성비행사‧최초의 여성출판인‧독립운동가 권기옥 세상떠남(88세)
1989년 서울대생, 당국의 민중항쟁운동탄압에 항의, 동맹휴업 결의(4월27일∼5월1일)
1989년 메네트리 주한미군사령관, 주한미군철수는 95년부터 가능할 것이라고 밝혀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 윤경석박사, 한국화학연구소 이규호 박사팀 상온핵융합에 성공
1990년 투기혐의 2만 3000명 특별관리, 국세청 6개월 마다 변동상황 점검
1990년 시내 통화의 한달 기본요금 3000원을 2500원 으로 내리고 시외전화 요금은 10% 인하(5월 1일부터)
1991년 고르바초프 대통령, 소련국가원수로는 처음 으로 한국(제주도) 방문-신라호텔. 우호 협력다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공식 한국방문이 1991년 4월 19일 이루어졌다. 남북한을 통틀어 소련의 최고지도자 국가원수가 한반도를 방문하는 것은 유사이래 처음이었기에 상징적 의미가 컸다. 이날 한국과 소련의 정상들의 회담이 서귀포 중문단지 내 제주 신라호텔에서 개최됐다.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두 차례의 단독회담과 한차례의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아태 및 동북아지역 정세,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한소 쌍무관계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양국정상은 특히 한반도에서의 안정과 평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아태지역의 평화와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공통인식 아래 남북대화 및 교류 협력, 한국의 연내 유엔가입,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협정 서명, 북한의 개방문제 등을 집중논의 했다. 이번 제주정상회담은 두 사람간에 오간 대화내용보다 회담 그 자체가 갖는 상징적 의미에 더 비중이 있었다.
비록 일본방문 후 귀로에 그것도 국빈방문이 아닌 실무방문으로 들른 것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방한을 했다는 그 자체와 양국이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1991년 건설부, 건설업자가 분당 일산 신도시 아파트중 536가구에 대해 주택상환사채를 발행할수 있도록 조치
1992년 제1회 세계체조개인선수권대회서 유옥렬 우승
1992년 楊尙昆 중국주석은 북한을 방문중 金日成 주석에게 조만간 韓ㆍ中수교, 통보.
1993년 김영삼 대통령,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4·19 묘소 참배, 성역화 지시
1993년 무장탈영병 백주에 총질-육군 전차부대 일병 수류탄-소총들고 탈영
--무장 탈영병이 길가는 서울시민을 향해 총기와 수류탄을 무차별 난사, 1명이 총에 맞아 숨지고 7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1993년 4월 19일 오전 5시30분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소재 육군 사단 전차대대 소속 일병 임모씨가 소총과 수류탄을 갖고 탈영, 베스타 승합차를 탈취해 서울로 잠입한 뒤 도심 한복판에서 길 가던 시민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도주했다.
군-경 합동타격대가 추적하자 임 일병은 인질을 끌고 골목길로 달아나면서 주택 담장 안으로 수류탄을 던지는 등 발악하듯 30여분동안 도심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12시4분 허벅지와 복부에 총상을 입고 검거됐다
1993년 金泳三대통령,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4·19묘소 참배후 성역화 지시.
1993년 충남 논산 서울신경정신과의원 화재. 환자수용소에 있던 정신질환자 34명 사망, 2명 부상.
1993년 4·19기념 제26회 동아사이클대회에서 경북팀 단체종합우승을 차지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34년 동안 복역), 북한으로 보내짐.
1993년 화성군 동탄면 청계리 경부고속도로, 화물차 등 30여대의 차량이 연쇄 추돌 7명 사망, 50여명 중경상.
1993년 논산정신병원 화재가 발생
1994년 재무부, 6월부터 국내거주자의 외환소지를 완전자유화해 매각 및 예치의무를 폐지키로
1994년 조용한 4.19 행사-34주년 맞아 대학가 차분
1994년 황영조 미국 보스턴국제마라톤대회서 4위 - 2시간 8분 7초 한국신
1995년 에반스 앤두루 엘 등 미군 2명, 이성미 씨 등 2명 폭행
1995년 4.19묘역 국립묘지로 격상
1996년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연평도 서남 16km 해상에서 북방한계선 남 1km지점까지 침범
1996년 베트남 전쟁 참전 고엽제 피해자 137명,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송 제출
1996년 여수수산대 오영권, 김영삼 정권 타도 미제 축출 요구하며 분신자살
1996년 유엔인권위 총회, 위안부동원 국제법위반 이라며 특별보고관 보고서 채택
1997년 규제개혁추진회의 발족
199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세체계의 단순화 등 조세제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
1998년 이봉주 네덜란드 로테르담마라톤대회에서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44초), 이봉주 선수는 2년뒤 도쿄마라톤대회에서 자신의 기록 경신(2시간7분20초)
1999년 서울시지하철공사 전면 파업에 돌입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부군 에든버러 공이 3박4일 일정으로 1999년 4월 19일 방한했다. 영국 왕의 방한은 1883년 한-영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래 116년간의 양국관계 사상 처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내외는 이날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한 직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데 이어 청와대를 방문, 공식 환영행사를 갖고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정상환담을 갖고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 방안과 문화 등 공동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여왕 내외는 또 서울 미동초등학교를 방문, 태권도 시범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7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주최한 리셉션에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방한 3일째인 21일 안동 하회마을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상을 둘러보고 안동 청과시장, 봉정사 등을 방문했다.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 한옥의 전통적인 건축미가 잘 보존된 풍산 류씨 문중의 충효당(보물 414호)을 방문해 집을 둘러 보고, 서애 류성룡의 후손 탤런트 류시원의 본가인 담연재에서 하회별신 굿탈놀이 아홉마당을 관람하며,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조옥화씨(78)가 여왕의 73회 생일을 위해 마련한 생일상을 받았다.
1999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핵심 계열사 매각·정리, 자동차 산업 전념 등 구조 혁신 방안 발표
2003년 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 선생 118년 만에 명예졸업장 수여식 거행
--미국 메사추세츠주(州) 북쪽의 1번 국도를 따라가다 바이필드 시(市)에 진입하면 ‘가버너 더머 아카데미 1763년’ 간판이 눈에 확 띈다. 간판을 따라 자동차를 몰고 가면 450에이커(약 55만평) 규모의 작은 학교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입구 왼쪽의 조그만 붉은 벽돌색 건물 정면에는 ‘1763년 지어진 미국 최초의 보딩 스쿨(기숙사를 갖춘 학교), 최초의 교실’ 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당시 학생수는 7명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19일(현지시간) 아침부터 한국 손님들을 맞이 하느라 분주했다.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지은 한국의 개화 선각자인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1856~1914) 선생의 고교 졸업장 수여식이 118년만에 열리기 때문이다. 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1884년9월 이곳 학교 3학년 과정에 입학했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다음해인 1885년 6월 한국으로 귀국했다.
존 마틴 도거트(Doggett) 교장은 이날 유길준의 후손인 유석재(증손자)씨와 그 일행(증손녀 유항희씨와 그 아들인 김기현군 등)에게 유길준의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고,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회측이 준비한 유길준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한국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사회개혁가, 교육자, 작가인 유길준을 기리며”라고 적힌 기념비는 학교 도서관 앞에 영구히 보존된다.
유길준의 명예 졸업장은 총 3장이 만들어져 한 장은 후손들이 보관하고, 2장은 메사추세츠주 세일럼시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이 오는 9월 문을 열 ‘유길준 기념실’과 ‘고려대학’에 각각 전시될 예정이다.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의 ‘유길준 기념실’은 조선일보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이 1994년 서울서 개최한 ‘유길준과 개화의 꿈’ 전시회 수익금 30만 달러를 기증함으로써 이번에 세워지게 됐다.
도거트 교장은 “안녕하십니까, 학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한국말 인사로 한국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어 학교의 ‘나이팅게일’ 학생 합창단과 보스톤 한국여성합창단이 미국 국가와 한국 애국가로 분위기를 살렸고, 합창단의 ‘아리랑’과 ‘아메리카 뷰티풀’로 끝을 맺었다.
유길준의 증손자인 유석재씨는 “후손으로 더한 영광이 없다”면서 “잠시 흐트러진 한미관계가 이번 기회로 바로잡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길준 선생 후손들은 이날 명예 졸업장을 받은 뒤 답례사를 하면서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2004년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 중국 방문(-21일까지)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유물 9만9622점 용산 박물관 이전 시작
2004년 자민련 김종필 총재 정계 은퇴 선언, `3金시대` 종말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2004년 4월 15일 총선 결과에 책임을 지고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함에 따라 길게는 1970년대 이후, 짧게는 1987년 대선 이후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3김시대’도 함께 막을 내렸다.
김 총재는 35세 때인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을 주도하며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 총재는 이어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시작으로 9선 의원, 국무총리 두 번, 민주공화당·신민주공화당·자민련 총재, 87년 대선 출마 등 정치 역정을 겪으며 반 세기 가까이 우리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43년 정치 역정 대부분을 ‘2인자’로 보내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그가 평생 정치 목표로 추구한 ‘내각제 개헌’도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내각제 개헌’과 10선 고지에 미련을 갖고 ‘4.15 총선’에서 비례대표 1번으로 재도전했지만, 끝내 둘 다 달성하지 못한 채 정계를 떠났다.
한때 정치권에서는 그를 중용을 아는 ‘동양정치의 달인’, 글·글씨·그림·노래·음악·술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르네상스적 정치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 그도 세월의 무게와 시대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이날 정계를 떠났다
2004년 김정일 북한 위원장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4년 4월 19일 중국 베이징(北京)에 도착,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된 후인 200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으며, 2001년 1월 상하이를 거쳐서 베이징을 방문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3일간의 베이징 체류기간 동안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 중국 4세대 지도부와 상견례를 통해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고, 북핵문제와 경협 등 현안에 대한 양국 입장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서 후 주석은 중국의 경제개혁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북한이 대민관계를 개선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은 특히 체니 미국 부통령의 방중 결과를 북한측에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급작스럽고 비밀스런 이번 방문에서 북한이 얻은 성과라면 중국의 경제적 지원과 신의주 경제특구에 대한 협력 정도라고 보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3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4월 22일, 김 위원장이 돌아오던 길목이었던 신의주부근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해 김 위원장을 겨냥한 암살기도 여부가 의문시되기도 했다.
2006년 현대자동차그룹 사재1조원 상당의 사회환원 발표
2008년 한국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12일간의 우주생활 마치고 무사귀환 “우주에서 바라본 한반도는 하나였다”-귀환소감
2009년 현대ㆍ기아차 10종 4만8천636대 리콜
--국토해양부는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판매한 베라크루즈 2천131대 등 5종 3만7천794대와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판매한 뉴카렌스 3천981대 등 5종 1만842대에 제작 결함이 발견돼 리콜한다고 2009년 4월 19일 밝혔다.
리콜 사유는 일부 자동차에서 제동장치를 작동시켰을 때 스위치 접점 불량으로 제동등이 켜지지 않는 결함 때문이다.
리콜 대상은 2006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생산돼 판매된 현대차 신형 싼타페, 베라크루즈, 신형 아반떼, 신형 쏘나타, 신형 그랜저와 기아자동차 그랜드카니발, 신형 카니발, 신형 스포티지, 뉴카렌스, 쏘렌토 등이다.
21일부터 직영 서비스 센터 또는 협력사에서 무상 수리(제동등 스위치 교환)를 받을 수 있으며, 지난달 29일 이후 수리 비용을 들여 제동등 스위치를 바꿨을 때는 개정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직영 서비스센터에 수리 비용 보상을 신청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2018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문재인 대통령을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으로 선정
2022년 북한, 금강산 골프장 리조트 초고속 철거...8개동 모두 폐허로
2022년 문대통령 “4.19혁명, 촛불혁명 등 민주주의 발전의 도화선”
1054년 152대 로마 교황 교황 레오 9세 작고
1241년 몽골군과 유럽 연합군의 전투인 레그니차 전투가 발발
1390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2세 사망
1587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이 스페인 카디즈에서 무적 함대를 격
1688년 러시아의 작가 바실리 타시셰프 출생
1768년 이탈리아의 화가 카날레토 작고
1775년 미국 독립전쟁 시작됨
--영국이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압박을 가한 것이 원인이 되어 1775년 4월 19일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미국에 대해 세금을 혹독하게 부과하는 등 여러 가지 규제를 가했다. 1764년에는 `Sugar Act`라는 법을 제정하여 설탕을 수입할 때 관세를 부과했고, 1765년` 둔영법` 제정, `Stamp Act제정` 등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샀다. 영국의 통치에 반발한 식민지인들은 직접세에 대한 항세 운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직접세가 간접세로 전환되었으나 이 또한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샀다.
1773년 영국은 동인도 회사의 재정 지원을 목적으로 관세없이 식민지에서 차를 팔 수 있게 하는 `Tea Act`를 제정했는데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보스턴 차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제1차 대륙회의와 제2차 대륙회의가 개최됐다.
1775년 5월에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이 독립군 사령관이 됐다. Bunker Hill에서의 충돌을 계기로 독립군은 식민지의 반란을 선언하며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반에는 식민지 군대가 불리하였으나 1777년 10월 17일 뉴욕의 북부인 Saratoga에서 식민지 군대는 대승을 거두게 되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동맹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1781년 버지니아의 York Town에서도 대승하게 됐다. 이후 1783년 파리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미시시피강 동쪽의 13개주는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미국은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선언하게 됐다. 미국은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독립국가로 태어날 수 있었다. 미국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와 동맹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793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 출생
1824년 영국 낭만파시인 바이런 세상떠남(36세)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1823년 그리스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독립군 사기를 북돋움, ‘오늘 나는 36세가 되었다’- 마지막 시, 그의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세계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인정받음
1881년 영국정치가 디즈레일리 세상떠남
1882년 진화론의 선구자 영국생물학자 찰스 다윈 심장병으로 세상떠남(73세),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힘 “만일 내가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나는 1주일에 한 번은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 습관을 가질 것이다.” “가장 강한 종(種)도, 가장 지적인 종도 아닌,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만약 우리가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어느 정도의 이익이 있을지는 몰라도 극도의 죄악도 함께 존재할 것이다.” 『종의 기원』=해군측량선 ‘비이글’호로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 탐사 연구한 결과) 『인간의 유래』
다윈은 50년넘게 심계항진(가슴 두근거림) 구토 나른함 편두통 습진 종기 오한 안면경련 위에 가스가 차는 것, 지독한 불면증 등으로 고생했는데 학문연구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 다윈은 훗날 성경이론을 뒤집고 ‘돌연변이를 통해 진화할 수 있다’는 이론 발표가 마치 살인행위를 누군가에게 고백하듯이 힘겨웠다고 털어놓음
1883년 브라질 대통령(1930-45, 1951-54) 바르가스 츨생
1889년 독일의 법학자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출생
1897년 제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제1회 보스턴마라톤경기가 열렸다. 경기는 보스턴 체육위원회(BAA)가 1896년 제1회 올림픽(그리스 아테네)에서 채택된 마라톤을 본떠 만들었다. 당시 코스도 올림픽을 모방해 25마일(약 40.25㎞)의 언덕길로 정해졌다.
4월 19일로 날을 잡은 것은 이날이 보스턴 주민들이 영국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것을 기념하는 `애국자의 날(Patriot`s Day)`이기 때문이다. 1969년부터 애국자의 날이 4월 셋째 월요일로 고정되면서 마라톤 날짜도 같이 바뀌었다.
1900년부터 외국인 선수들이 참가한 보스턴 마라톤은 1977년 세계 최초로 여자부가 신설됨으로써 여자마라톤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런던 마라톤, 로테르담 마라톤, 뉴욕 마라톤과 함께 세계 4대 마라톤대회 중 하나이다.
보스턴 마라톤은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다. 서윤복, 함기용, 이봉주 선수가 정상에 올랐고, 한 번의 세계최고기록과 두 번의 한국최고기록이 이 대회에서 수립됐다. 1947년 51회 대회 때 서윤복이 2시간25분39초의 당시 세계최고기록으로 정상에 올랐고, 남승룡(작고)이 2시간41분10초로 10위에 입상했다. 1950년 대회에서는 함기용과 송길윤, 최윤칠이 1위, 2위, 3위를 휩쓸어 국제 사회에 신생 독립국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제61회(1957년) 대회에서 임종우가 2시간24분55초로 한국기록을 세우며 3위에 입상했고 한승철이 5위(2시간28분18초)를 했다. 이후 침체기를 거친 한국은 1993년 김재룡이 2시간9분43초의 호기록으로 당당 2위에 올랐고, 1994년엔 황영조가 2시간8분49초의 한국최고기록을 세우며 4위를 차지했다.
1906년 부인(마리 퀴리)과 함께 플로늄과 라듐 발견해 노벨상받은 프랑스물리학자 피에르 퀴리 교통사고로 세상떠남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가 1906년 4월 19일 마차에 치어 47세로 사망했다. 아내인 마리 퀴리가 워낙 유명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공동연구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퀴리는 노벨상 수상 후 소르본대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상온에서 1400 ℃ 정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화(磁化)가 온도에 역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했고, 퀴리온도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895년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마리 퀴리)와 결혼한 후, 뢴트겐의 X선 발견, H.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받아 방사능 연구에 몰두했다.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 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을 탐구하던 중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다. 그는 이 업적으로 1903년 아내와 H.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12년 미국의 핵화학자 시보그 출생 -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들 분리로 노벨화학상 수상
1914년 미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 사망
1932년 콜롬비아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태어남, 부풀려지고 독특한 양감이 드러나는 정물 등을 통해 특유의 유머감각과 남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평가
1941년 프랑스, 국제연맹 탈퇴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 나치스에 봉기
--유태인들이 학살 수용소로 가기 전 임시로 거주했던 바르샤바 게토에서 1943년 4월 19일 나치스에 대항하는 격렬한 봉기가 일어났다. 유태인들을 격리하기 위해 1940년 11월 설치된 바르샤바 게토는 사실상 죽음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유태인 40여만 명이 좁고 열악한 위생상태 하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그 곳에는 비명과 시체만이 난무했다.
1942년 7월 이 게토에 거주하는 유태인은 모두 동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해 여름에만 3만명의 유태인이 이곳을 떠나 트레블린카 학살수용소로 수송되었다. 대이동은 계속되었고 봉기 전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유태인 수는 고작 7만명 뿐이었다. 이들에게도 고통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남아있는 그들 대부분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나치스 SS대 전국 지도자인 힘믈러는 "바르샤바의 게토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1943년 오늘 SS대원 58명과 장교 16명이 전차와 장갑차로 게토에 침입했다. 유태인들은 격렬히 저항하며 그들에게 유탄과 화염병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나 이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기도 보급도 없는 주민들은 다가오는 적들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주민들의 방어기지인 지하실을 파괴했고, 화염 방사기로 집들을 불태웠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인 슈트로프는 상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바르샤바에는 이제 유태인 거주 지역은 한 군데도 없다. 저녁 8시 15분에 모두 종료됐다. 체포되거나 학살된 유태인 총수는 5만 6천 65명이다."
1947년 미국의 피아노 연주자 머리 퍼라이아 출생
1948년 장개석,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선출
1948년 - 미얀마 유엔 가입
1964년 라오스 우익 쿠데타, 1일 만에 실패
1967년 라인강의 기적 이룬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 초대총리 세상떠남
1971년 미(美) 살인범 맨슨 재판, 사형 선고
1974년 파키스탄 근대화에 기여한 대통령(1958-1969) 아유브 칸 사망
1983년 폴란드의 작가 예지 안제예프스키 작고
1989년 미국 해군 전함 BB-61 아이오와 호의 포신이 폭발하여 47명의 수병이 사망
1990년 니카라과-반군 9년간의 내전 종식 위한 종전협정 조인
1993년 미국 사교집단 `다윗파` 집단자살
--미국의 사교집단인 다윗파 광신도들이 1993년 4월 19일 집단 자살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51일 동안 투항해 온 이들이 자살을 택한 것은 FBI의 기습작전에 교주 데이비드 코레쉬가 자살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광신도들의 방화로 95명 중 86명이 사망했다.
교주 코레쉬는 지하무기고까지 있는 요새화한 텍사스주 웨이코 외곽의 31만평 규모의 마운트 카멜 농장에서 추종자들과 수도나 전기시설 없이 자체 학교와 언론기관을 운영하며 원시생활을 해왔다.
코레쉬는 성경이 진실이라면 자신은 예수라고 자처했고 추종자들은 그를 신약성경 묵시록과 관련, 전쟁, 질병 등 신이 내릴 7가지 재앙을 개봉할 유일한 인물이라고 믿어왔다. 다윗파는 미 전역에 2천-3천명의 신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시의 연방정부 건물에 반정부 차량폭탄테러 사망168명
--미중부 오클라호마 주도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 기구 사무실 빌딩에서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강력한 차량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폭탄을 실은 트럭이 연방청사건물 주차장에서 굉음을 내며 폭파돼 9층 건물이 가라앉으면서 조용한 아침을 일순간에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만든 사건으로 어린이 9명을 포함한 사망자 1백68명과 부상자 5백명이 발생한 미 최대의 참사로 기록됐다.
FBI와 연방수사국 등이 현지에 지휘 본부를 구성해 조사한 결과 이 사건은 범행동기와 범인, 범행에 사용된 폭탄, 차량 등이 모두 미국내에 있는 미 국내범죄임이 밝혀졌다.
연방수사국 등에 따르면 직접적인 범행동기는 2년 전 일어난 다윗파 집단자살사건이었고 극우파 내에서 연방정부에 대한 불만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던 점도 범행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극우파들은 클린턴 행정부가 대내외적으로 허약한 모습을 보이는 데 대해 광범위한 불만을 갖고 나름대로의 ‘애국과 헌법수호’를 추구한 것이 이번 사건이었다. 티머시 맥베이(27)가 범인으로 기소됐고 6월 13일 사형이 선고됐다
1996년 모스크바에서 핵안전 정상회담 개막
--1996년 6월 대선을 앞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서방측 지지를 보여주기 위한 정상회담이 1996년 4월 19일 모스크바에서 개막됐다. 선진 7개공업국(G7)과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참여하는 이번 회담에서 클린턴 미대통령과 옐친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은 핵재난을 막기 위한 핵발전소 안전대책, 핵물질 암거래차단, 테러 대책 등을 포괄 논의했다.
이틀간 열린 정상회담의 폐막 전 각국 정상들이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는 `제로 옵션` 원칙에 합의했다. 5대 핵강국 중 미국, 프랑스, 영국 등 3개국은 당시 제네바에서 진행중이던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협상에서 제로 옵션을 지지했으나 러시아와 중국은 그때까지 이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1996년 유엔인권위 총회 위안부동원 국제법위반이라며 특별보고관보고서 채택
1999년 `아이스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 은퇴
1999년 독일의 도이체 텔레콤과 이탈리아의 텔레콤 이탈리아, 합병에 합의. 세계최대 통신사 탄생
1999년 독일 연방의회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2000년 필리핀항공 보잉 737-200기 사말섬 추락. 131명 사망
2001년 우주 왕복선 엔데버호 발사 (21일 국제우주정거장 도킹)
--미국인 4명과 캐나다·이탈리아·러시아인 각 1명씩 모두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우주왕복선 엔데버호가 2001년 4월 19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돼, 21일 지구 상공 311km 궤도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했다.
11일간 우주 공간에 머무른 이들은 22일 길이 17.6m, 무게 1620㎏의 거대한 기중기 형태의 로봇팔을 ISS의 실험실 모듈에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업은 캐나다인 크리스 해드필드 대원과 미국인 스콧 파라진스키 대원이 해냈다. 캐나다측이 제작해 `캐나다암 2`라고 이름붙은 이 로봇팔은 제작비가 9억달러나 된다. 엔데버호에는 또 이탈리아가 만든 화물 운반기 `라파엘로 모듈`이 실려 있다.
2003년 이탈리아의 추기경 아우렐리오 사바타니 작고
2003년 프랑스, 이슬람 여성에게 신분증 사진 촬영 시 스카프 착용 금지 선언
--프랑스에서 이슬람교 여성의 머리 스카프 착용 논쟁이 터졌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내무장관은 지난 19일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이슬람 단체연합(UOIF) 총회에서 “신분 증명서 사진을 찍을 때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두 머리에 아무것도 써서는 안 된다고 법은 명시하고 있다”라며 “이슬람교 여성이라고 해서 신분증명서에 관한 법과 다른 특혜를 누릴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르코지는 당장 현장에 있던 수천명의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휘파람과 야유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가톨릭 수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분증명서에 관한 법이 적용되고 있다”고 환기시키면서 이슬람교 여성에 대한 동일한 법 적용에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사르코지의 발언에 대해 한 이슬람교도 여성은 “스카프는 이슬람에서 여성의 개별성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프랑스 법이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반대 입장을 나타냈지만, CFCM의 달릴 부바쾨르 의장은 “신분증명서 사진은 정확해야 하고, 전통과 종교가 그것의 법적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2004년 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 짐 칸달루포 심장마비사
2011년 제프리 무타이(케냐) 보스턴마라톤에서 세계기록(2시간3분02초), 공인받지못함
2012년 인도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아그니5호 발사 성공, 여섯번째 보유국 됨
2015년 리비아에서 유럽으로 850여명 난민 태우고 가던 배 지중해에서 전복 28명만 살아남음
2016년 파트리시오 아일윈 칠레대통령 세상떠남(97세)
2021년 NASA의 화성탐사용 헬기 인저뉴어티 사상최초로 화성하늘 비행
2021년 인도의 언어학자 간잠 벵카타수바이아 작고
2021년 미국의 제42대 부통령 월터 먼데일 작고
2022년 세계은행,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4.1%→3.2%로 햐향조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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