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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황금성당 - 경상도 서북부 지역의 전교와 신앙의 중심지 |
경북 김천시 학사대길 64
김천지역 교우촌의 형성
김천 지역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되기 시작한 시기를 말해주는 기록은 사학징의(邪學懲義)이다. 사학징의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서울 형조에서 신문을 받거나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교한 이들에 대한 기록으로, 사학죄인 명단 등을 담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801년 박춘산이 '천주학’을 믿은 죄로 김산읍(金山邑, 김천의 옛 이름)에 유배되었으며, 같은 시기 부산 동래 출신인 현계탁도 형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이유로 김산 고을 증산(甑山)으로 유배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볼 때 김천지역의 천주교는 220년이 넘는 퍽 오래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여러 박해를 거치면서 때 충청도와 전라도, 타 경상도 지역의 신자들이 김천의 소백산맥 산악 지대로 피난하게 되면서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 장자터, 장전리 선무터, 지좌동 마잠, 대항면 향천리 양지마, 봉산면 광천리 곤천, 남면 부상리 등지에 교우촌이 급격히 형성되었다. 병인박해 때 김천에 살던 유시몬 외 5인이 충주 포교에 잡혀 처형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중 대표적 교우촌이 지좌동 마잠 교우촌(현 지좌성당)이다.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부친인 서철순이 이 곳에 살았고, 또한 신도 권종웅 안드레아가 박해를 피해 김천시 대항면 대성동의 공자동에 살다가 마잠 마을로 피난 왔다. 그후 권 안드레아의 인도로 임 바오로가 영세를 받고 그의 집안도 입교하였다. 또 마을에 별감 벼슬을 지낸 서 토마와 허 요셉 가정과 과부인 곽 안나와 그의 양부모도 사는 등 마잠 마을은 많은 천주교인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신앙촌이 형성되었다.
김천 성당의 설립
이러던 중 1896년 칠곡 가실본당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성학 알렉시오 신부가 경부선 철도 부설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되는 교통의 요지인 김천 지역에 새 성당 건립이 필요하다고 판단, 조선교구 뮈텔주교에게 수차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1901년 4월 27일 김산군 김천면 자라밭골(현 김천시 황금동 현 성당터)에 초가집 1동을 구입하고 같은 해 5월 27일 김천 성당의 설립과 동시에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계산 성당과 가실 성당에 이어 대구대교구의 세 번째 본당으로 경상도 서북부 지역의 전교와 신앙의 중심지였다.
이후 교세가 안정되자 1907년 그 자리에 기와집 4칸 한옥을 지어 성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중국 상해에서 주조한 안나의 종을 달아 삼종을 타종하였다. 이후 김천 본당은 상주, 문경, 예천, 성주, 황간 등 경북 북부지역 복음화에 매진하여, 1911년에는 신자수 2,5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편 김성학 신부는 1907년 성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도 전개하였으며, 1911년 2월에는 교실 6칸을 건립하여 성의 여자부도 설립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4대 김승연 아오스딩 신부가 1934년 순수한 성당 자금 2만원으로 협소한 기와 성당을 허물고 붉은 벽돌 첨탑종각의 웅장한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여 봉헌하였다. 이 건물은 대구 계산동성당을 본뜬 서구식 건물로 당시 김천의 명물이 되었다
1958년 김천 평화동 본당을 분가하면서 행정구역 명칭을 따라 김천 황금동 본당으로 개명했다. 이후 지례 본당, 지좌 본당을 분리 신설하는 등 김천지역 복음화 산실이 됐고, 대희년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00년, 최경환 사베리오 신부는 구 성당은 그대로 보전한 채 옛 기와 성당 터 바로 옆에 100주년 기념성전을 세웠다.
2018년은 교구 성모당 봉헌 100주년이 되는 해로 황금동 본당 경내에 교구 성모당과 같이 ‘루르드의 성모님’을 모신 성모당을 지었다. 신자들이 쉽게 성모님을 방문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누리도록 하고자함이었다.
수원 성지를 떠나 점심때가 조금 지난 낮 1시 반 경 김천 황금 성당에 도착했다. 똑같은 붉은 벽돌 성전 두 동이 나란히 나타난다. 왼쪽은 2,000년에 건립한 현재의 새 성당, 오른쪽은 1934년에 건립한 구 성당이다.
들머리 길 오른쪽 정원에는 항쇄돌, 성구 휘호석, 기념식수 등 순교나 신앙과 관련한 여러 가지의 시설물이 자리하고 있다.
죄인을 포박할 때 다리에 채우는 것을 족쇄, 목에 채우는 것이 항쇄 또는 칼이라고 한다. 이 항쇄돌은 죄인을 죽이는 용도로 쓰인 것이다. 죄인이 형장으로 걸어갈 수도 없을 때 담장 가운데 이 돌을 끼워 넣고 밧줄로 목을 걸어 반대쪽에서 당겨서 죽인다. 이 형구돌은 현풍의 동헌이 있던 자리의 부근에서 수습된 것이다.
행초로 된 휘호석의 내용은 ‘救主寶血 眞理充滿’ 곧 “구세주께서 흘리신 보혈, 진리가 온 세상에 가득 찼네”로 풀이된다. 기념식수 중 주목(朱木)은 2,000년 5월 27일, 본당 창립 100주년 기념성당을 봉헌하는 식수로 이문희 교구장과 김수환 추기경이 식수한 것이다. 그리고 소나무는 2018년 5월, 성전 앞 성모당 봉헌 기념으로 조환길 교구장이 식수한 것이다.
두 팔이 묶인 예수님의 상은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재현한 것이다. 길 오른쪽에서 시작된 십자가의 길은 새 성당 앞 잔디밭으로 이어진다.
이 현양비는 병인박해 때 김천 지방의 순교자 유 시몬과 동료 순교자 4명의 거룩한 삶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이들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무덤도 알지 못한다.
성전 앞 쪽에는 성모당이 있다. 이 성모당은 2018년 프랑스의 루르드의 성모발현지를 모델로 조성했다. 대구대교구청의 성모당과 영적 교류를 통해 은총을 공유함을 모적으로 한다.
제대 벽화와 같은 색상으로 채색된 성전 출입문에는 해와 달, 시작과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알파(A)와 오메가(Ω)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성당에 들어서며 세상의 창조주로 인간을 비추는 빛이신 구원자 예수를 가슴에 새기라는 의미다
성전 내부는 교리와 예술이 한 데 어우러진 성미술품을 보는 듯하다. 하느님의 영원성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노란색과 푸른색 원과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상한 노란색 삼선, 최후 심판과 재림 예수를 형상화한 어린양 등이 새겨진 벽화를 배경으로 제대중앙 허공에 끈에 매달린 십자고상은 박해시 형틀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천가톨릭대 종교미술학부 교수 조광호 신부 작품.
제대 좌우에는 두 손이 잘린 목각 예수성심상과 성모 마리아 모자상이 있다. 두 손이 잘린 목각 예수성심상은 원래 본당 주보로 모셔 구성당 제대 정면에 안치했던 상이다. 세월 탓에 훼손됐지만 '본당 공동체가 한 뜻으로 모여 이 시대 예수님의 손이 되어 드리자'는 뜻에서 복원하지 않고 새 성당 현관에 모신 것이다. 103년간 김천 지역 복음화의 텃밭이 된 전통을 잇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목각상이 서 있는 대좌에는 성 김대건, 성 모방, 성 앵베르, 성 샤스탕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벽면에는 상, 하에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고 그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지나간다. 특히 조명에도 신경을 써서 조명 전원을 따로 설치, 묵상 때는 제대에만 은은한 빛이 감돌게 하고 십자가 길 기도 때는 14처만 비추는 등이 켜지도록 해 전례적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있다.
성전 참배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오후 1시 반. 수녀님과 대화 중에 할머니 교우 한분을 만났는데 멀리서 왔으며 식사 전이라는 말을 듣고 나가시더니 잠시 뒤에 청포도 한 송이를 들고 오셔서 권한다. 뜻이 너무 고마워 피로도 풀리는 것 같다.
구 성당 앞에 계시는 또 다른 성모님께 떠나는 인사드리고 성당을 나왔다. 점심은 흑돼지 구이로 이름난 김천시 지례면에 가서 먹었다. 지례는 함께한 문 베드로의 선대 교향이다. 맛 있는 식사 후 칠곡 가실 성당으로 향발.
가실 성당 - 대구교구에서 두 번째 설립된 본당으로 지역 선교의 요람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614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가실1길 1
가실(佳室) 본당은 경북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대구대교구 소속이며 설립일은 1895년이다. 초창기의 이름은 가실 본당으로 후에 행정구역명을 따라 낙산(洛山) 본당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가실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주보는 성모님의 어머니 성녀 안나이다.
흔히 ‘가실’을 한자 ‘佳室’로 표기하여 ‘아름다운 집’이라고 좋게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풀이가 아닌가 한다. ‘가실’은 ‘갈대가 많은 골’(蘆谷노곡)인 ‘갈실’에서 온 말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노곡은 전국적으로 동명이 많다. 어쨌든 가실성당에 찾아오는 이들은 “성당과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거나 “마음이 평안해져 기도하기에 좋은 곳”이라고들 입을 모은다. 2004년에는 권상우와 하지원이 주연한 영화 ‘신부수업’이 이곳에서 촬영돼 신자, 비신자 모두에게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됐다.
본당의 설립과 발전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새로운 신자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곳 하나가 신나무골이다. 그리고 병인박해 가 끝난 후 성직자들은 신나무골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4년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1868~1903, 가밀로) 신부가 입국하였고, 그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전교 활동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895년 왜관읍 낙산동 가실에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가실 성당이다. 가실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 대구대교구에서 계산 성당에 이은 두 번째라는 오랜 연륜을 지진 성당이다.
낙동강변의 한적한 마을 낙산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0년대의 교통사정 때문이었다.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육로(陸路)보다 강의 수로(水路)를 이용, 온갖 물자가 교역되는 주운(舟運)이 수송의 대종이었으므로 포구(浦口)와 나루(津)터가 교통의 중심지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낙동강의 뱃길은 부산 하단포(下端浦)에서 길을 거슬러 구포(龜浦) 삼랑진(三浪津) 고령의 개포(開浦) 화원의 사문진(沙門津) 왜관 상주(尙州)를 거쳐 안동의 영호진(映湖津)에 이르는 8백리 길이었는데, 그사이에는 지방마다 수많은 포구와 나루터가 있었고 많은 광선들(廣船, 중간 폭이 넓은 배)이 내왕했다.
또한 낙산은 박해시대 신부들의 은신처이며 대구 선교의 요람인 신나무골에서 옛길로 약25리 떨어진 곳이며 선착장이 있어 부산이나 또는 북으로 상주ㆍ안동 등지로도 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당시 왜관에는 신자가 없었는데 비해 낙산에는 이 당시 김희두(金熙斗,베드로) 회장과 그 형제 김경두(金璟斗,도마) 김철두(金哲斗,가밀로) 세 집안을 비롯하여 강응문(姜應文,레오), 장한봉(張) 회장과 전경조(全敬祚) 신부의 집안과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의 집안 등 많은 교우들이 살고 있는 고장이었으므로 1894년 이곳에 본당이 설립된 것이라 한다.
첫 본당신부로 부임한 가밀로 파이야스 신부는 교우 김희두(金會斗, 베드로) 소유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본당으로 삼아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당시는 외국인이 부동산을 살 수 없기에 교우 김희두 회장의 명의로 구입한 것이다. 가실 본당은 신앙의 자유가 열리던 여명기에 설립된 오랜 본당으로 담당 전교지역은 매우 넓었다. 칠곡을 비롯하여 성주, 선산, 문경, 상주, 함창, 군위, 안동, 예천, 의성, 김천, 거창, 안의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 등지였으며, 공소는 17개소. 신자수는 777명이었다.
파이야스 신부는 이후 1898년 6월까지 이곳에서 전교하다가 황해도 장연으로 전임되고, 제2대 본당 주임으로 김성학(金聖學) 알릭스 신부가 부임, 3년간 전교 활동을 하다가 1901년 김천 본당을 분리 설립하면서 그곳으로 이임하였다.
김 신부의 뒤를 이어 가실에 부임한 신부는 3대 즈와요(Joyau, 玉裕雅) 알퐁소 신부였는데, 그는 1903년에 성당을 증축하는 한편 사제관을 신축하였으며,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부임 당시 800여 명이던 신자수를 6년 만에 1,400명 정도로 증가시켰다. 그러던 중 나병에 걸려 1907년 1월 12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후 4대 소세(Saucet, 蘇世德) 히폴리토 신부에 이어 5대 투르뇌(Tourneux, 呂東宣) 빅토리노 신부가 부임하였다.
투르뇌 신부는 1912년 5월 29일 가실 본당에 부임한 뒤 1944년 3월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일제시대 대부분을 이곳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으며,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퇴르뇌 신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자들과 함께 1923년 현재의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28일에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Giardini)의 집전으로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자본당 분할에 따를 본당 교세의 감소
그러나 김천 본당에 이어 문경의 점촌(店村) 본당과 상주의 퇴강(退江) 본당 등의 자본당 분할과 함께 관할 구역이 축소되었고, 게다가 신자들이 대구로 이전하면서 신자수가 줄게 되었다.
특히 왜관 본당의 설립은 가실 본당에 큰 위축을 가져오게 되었다. 왜관은 새 중심지로 발전하는 추세에 있었지만 가실은 시골 본당에 지나지 않게 되었기에 드망즈 주교는 1933년 가실 본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 본당으로 설정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 현상이 심해지면서 젊은 층 신자들이 크게 줄어드는 동시에 신자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600-700명의 교세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본당 신자들의 활동이 위축되어 왔고, 활동 단체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1986년 1월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는 등 신심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하였고, 소공동체 활동과 친교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후 본당은 1986년 2월 28일, 왜관 감목 대리구의 폐지로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순례 성지의 유지를 위한 노력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성당 정면 마당에 순교자 성순교 가문 신앙유적비(殉敎者 成舜敎家門 信仰遺蹟碑)를 세웠다. 가실 성당은 원래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설립 당시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가 살던 집터 일대다. 성순교는 경신박해(1859~1860년) 때 가실을 떠나 상주로 피난 갔다가, 그 이름처럼 1861년 상주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상주로 옮겨 가기 전에 성순교는 가실 집을 외가에 맡기고 갔는데, 1894년 신나무골에서 가실로 옮겨 온 파이야스 신부가 이를 매입해 첫 가실 성당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밝혀진 사료로는 성순교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과 순교 사실이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현재 성당 정면에 있었던 이 비는 철거된 상태다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현재의 성모동굴을 건립했고,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오랜 역사와 어우러진 성물들을 새롭게 제작했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인 가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옛 사제관과 함께 2003년 4월 1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
대구대교구는 2005년 2월 2일자 공문을 통해 낙산 본당의 이름을 옛 이름인 가실 본당으로 다시 변경하였다. 그 동안 가실 본당은 설립 당시 ‘아름다운 집’(佳室)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 ‘가실 본당’으로 정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산(洛山) 본당’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어 왔었다. 2011년 7월에는 16년이나 늦었지만 더 많은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교구 설정 100주년의 해에 맞춰 가실 성당의 역사를 담은 가실(낙산) 성당 100년사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구 사제관을 유물관으로 꾸몄다. 이를 통해 공의회 이전까지 성당 제대 위에서 사용하던 십자가와 감실, 중앙 제대 왼쪽과 오른쪽에 설치돼 있던 성모성심 제대와 예수성심 제대의 감실, 촛대 등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본당 설립 초창기 신자들의 교적은 물론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친필 공문 제1호 등 교회사의 중요한 사료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본당이 한창 번성하던 1960년대 신자들 교육용으로 사용하던 환등기(전기가 없던 시절 등불을 이용해 그림을 볼 수 있는 독일식 환등기), 밍크본이란 화가가 1930년대에 그린 43장의 성서 그림, 미사주를 채즙하던 포도 착즙기, 성체를 만들던 숯 제빵기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실 성당과 치유의 의미
성당 건물은 물론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이 ‘평화’를 연상케 하는 가실성당이 6·25전쟁 중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가실성당이 위치한 경북 칠곡군은 6·25전쟁 중 임시수도였던 대구와 불과 20여 km 떨어져있어 북한군과 국군 · 미군이 전쟁의 향방을 놓고 사활을 걸고 싸운 곳이다. 1950년 8월과 9월 55일간 이어진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 결과 북한군 2만4000여 명,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지만 가실 성당 건물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가실성당은 북한군과 미군, 국군이 서로 공방을 벌이던 장소였지만, 북한군이 점령했을 때는 북한군 부상병을 위한 야전병원이 됐고, 미군과 국군이 점령했을 때는 역시 미군과 국군 부상병을 위한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면서 포화를 피할 수 있었다.
지상의 평화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 모쪼록 가실성당이 육이오 동족 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통일과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례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가실 성당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성당 입구는 숲길이다. 주차장에 내려 바로 성전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
성전에 오르기 전 성전 아래에 있는 스승 예수공원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가니 예수성심상이 호젓이 서 계신다. 예수상 대좌에는 가실 성당과 왜관 성당의 은인 고 정재문 안드레아 회장(1876-1954년)을 기리고자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인 2011년에 세운 것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스승 예수공원에서 성전으로 오르는 길에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성가정상이 우뚝 솟아 있다. 성전에 이르니 보수공사 중이어서 차단 막이 쳐져 있으나 성당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나 있다.
성전
1823년에 건립된 성전은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물로 설계는건축가로 유명했던 파리 외방 전교회 푸아넬(Poisnel 박도행) 신부가 맡았다, 공사는 중국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당시 본당 주임 트리뇌 신부는 망치로 일일이 벽돌을 두드리면서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 성당을 짓고, 그 다음 벽돌로는 사제관을 지었다고 한다. 가실 성당과 사제관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성전 내부는 퍽 단순하고 소박하다. 성전 바닥은 마루다. 제대 후벽에 십자고상이 있고 그 아래 아름답고 예스런 감실이 있다. 감실 이름은 엠마오 또는 부활 감실이라고 하는데 전면은 칠보 작품이다. 제단 오른쪽 측랑 감실에 있은 성 안나상은 1924년 프랑스에서 제작한 것으로 안나를 주보로 모시는 국내 유일의 상이다.
그리고 벽면에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동양화가 손석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와 아름다운 유리화가 있다. 십자가의 길은 그림과는 달리 틀은 옛날 한문식으로 14처를 나타낸 것이 특이하다.
숫자를 1, 2, 3, 4, 5, 6, 7, 8, 9,10을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으로 나타었는데 이중 우리나라에서 쓰지 않은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성당 건립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 오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유리화는 2002년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화가 에기노 바이너트(Egino Weinert)의 작품으로 창문의 10개 스테인드 글라스에 삼왕의 경배부터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까지 총 40개의 장면과 출입문 반달형 창문에 3개, 탑의 원형창문도 1개가 있다.
이제 성모동굴과 잔디광장, 십자가의 길이다. 성모동굴은 프랑스 루르드를 본 딴 성모동굴은 본당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9년에 조성되었다. 십자가의 길은 잔디광장 둘레에 이 나 있다.
마지막으로 잔디광장 위쪽, 성당 뒤편의 구사제관 영역이다. 여기에는 교육관과 순례자의 집, 구 사제관 등의 옛날의 흔적이 있다. 구 사제관은 1923년 성당과 함께 건립된 30편 정도의 장방형 단층 건물로 건축적 가치가 높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유물 보관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나 곧 옮겨갈 새로운 전시실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지하에는 포도주 저장고가 있다고 한다.
성당 순례를 마치고 나오면서 돌아보는 모습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 아래 붉은 배롱나무 꽃으로 감싸인 성가정상 - ‘기도하기 좋은 성당’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곳 ‘가실 성당이야말로 기도하기 좋은 성당’이라는 느낌이 든다. 유물전시실이 개관되고 다시 찾았으면 한다.
이로써 26차 성지 순례를 마친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