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8. 한국 塔의 원류
인도-복발형 중국-누각식 한국-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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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라왁사원탑. 중국 신강성에 있는 라왁사원지 탑. 중국식으로 변해가는 중간 형태. 인도탑의 맛이 약간은 남아있다. |
과거 불교를 믿었던 나라나, 지금 불교를 믿고 있는 나라, 혹은 한 때 사찰이었던 곳이나, 지금 사찰인 곳에 가면 반드시 볼 수 있는 ‘한 물건’이 있다. 바로 탑(塔)이다.
불상이 탄생되기 전까지만 해도 탑은 사원의 중심이었다. 탑을 중심으로 사찰 건물들이 세워졌고, 탑을 가운데 두고 사찰 구성물들이 배치됐다. 탑(塔)은 불상이 탄생되기 이전, 주된 예배대상이었다.우리나라 사찰의 법당 앞에도 탑이 있다.
탑이 왜 예배대상일까. 그곳엔 부처님의 영원한 몸이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 열반의 길에 들어선 부처님의 영원한 삶이 숨겨져 있는 집이 바로 탑이다. 탑은 엄연한 집이다. 삶의 애착 속에 사무쳐 사는 중생의 집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의 몸, 번뇌도 정열도 사랑도 남김없이 태워 모든 불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의 집, 불멸의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집이다. 법신불(法身佛)의 집이 바로 탑이다.
탑은 언제 생겼고,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탑은 본래 탑파(塔婆).솔도파(率堵婆)라 불렀다. 솔도파는 산스크리트어 ‘stupa’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말이며, 탑파는 팔리어(語) ‘thupa’를 한자로 음역한 말. 모두 ‘방분(方墳)’, ‘고현처(高顯處)’로 의역된다. 스투파의 원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한 묘(墓)’라는 의미. 이처럼 탑파란 당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됐다.
스리랑카에선 지금도 탑을 ‘다가바’ 또는 ‘다고바’라 부르는데, 이는 ‘다투 가르바’ 곧 ‘사리봉안의 장소’라는 말을 줄여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미얀마에서는 탑을 ‘파고다’라고 일컫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파고다라 부르는데, 이 말은 미얀어인 ‘바야’와 스리랑카 어(語)인 ‘다고바’의 혼합어. 영어의 ‘top’도 thupa에 어원을 둔 것이다. 뾰족한 고층건물을 ‘탑’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타워’지 ‘스투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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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불국사 석가탑. 인도 중국과 다른 ‘한국식 석탑’을 잘 보여준다. |
탑은 기원전 5세기 초 부처님이 입적하자 유골을 모시기 위한 분묘로 처음 축조됐다.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들기 전, 부처님은 아난다 등 제자들에게 최후의 설법을 남겼다.
“비구들이여,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할 곳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할 것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부처님은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 유해는 제자들에 의해 다비됐다. 장례에 관한 일에는 제자들이 관여할 수 없었다. 부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출가승은 여래의 장례 같은 일에 상관하지 마라. 너희들은 진리를 위해 게으름 없이 정진해야 한다. 장례는 독실한 재가신도들이 맡아서 집행해 줄 것이다.”
장례는 쿠시나가라에 있던 말라족에 의해 치러졌다. 유해가 다 타자 마침 비가 쏟아져 거기엔 사리만 남게 됐다.
부처님 유해로 세운 ‘근본 10탑’이 최초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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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인도 산치탑. 복발탑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
뒤늦게 부처님 열반 소식을 접한 인도의 일곱 나라에서 각각 쿠시나가라에 도착해 “사리를 받아 큰 탑을 세우겠다”며, 말라족에게 사리를 나눠줄 것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리는 쿠시나가라의 말라족,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카필라성의 석가족, 알라캅파의 부리족, 라마그리마의 콜랴족, 베티두비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 등 여덟 부족에게 여덟 몫으로 분배됐다. 이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웠다. 이것이 ‘근본 8탑’이다.
사리 배분을 중재했던 드로오나(香城)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있었던 병을 받아 병탑(甁塔)을 세웠고, 뒤늦게 도착한 핍팔리바나의 모랴족은 남은 재를 가지고 가 회탑(灰塔)을 건립했다. 8탑과 두 탑을 더하여 흔히 ‘근본 10탑’으로 부른다. 불교 최초의 탑은 이렇게 조성됐다.
부처님 유언에 따라 탑은 사찰이 아닌 모든 사람이 접할 수 있는 네거리 한복판에 세워졌다. 200여 년 동안 불탑(佛塔)의 관리와 숭배는 스님들의 간섭 없이 재가자들이 했다. 출가자들은 오직 정진해 해탈에 도달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탑은 재가자들이 관리했던 것.
부처님이 입멸한 지 100년 지나 인도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 재위 기원전 268~232)이 근본 8탑의 사리를 꺼내, 인도 전역에 8만4000기의 탑을 세웠다.
8만4000이라는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신심(信心)깊은 아소카왕이 넓은 지역에 일시에 많은 탑을 건립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탑 건립은 결과적으로 불교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아쇼카왕이 8만4000기의 탑을 세운 뒤부터 출가자들도 직접 불탑관리에 참여했다. 탑의 숫자가 많아져 재가자들만 관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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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카불 근처의 세와키 스투파. 인도탑 형태가 여전하다. |
그런데 중국 불전(佛典)과 인도 학자들 사이에는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다.
인도 학자들은 아쇼카왕이 사리를 꺼낸 탑의 숫자는 8탑이 아니고, 나가족의 반대로 7기(基)의 근본탑(根本塔)에서만 발굴했다고 지적한다. 아소카왕의 8만4000탑도 ‘탑(stupa)’이라 하지 않고 ‘비하라(Vihara)’라는 용어를 쓴다.
비하라는 일반적으로 승원(僧院) 또는 불전(佛殿. 정사)을 일컫는 말. 따라서 ‘8만4000의 비하라’는 일종의 건축으로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사당(祠堂)이든 스투파든 어느 것이나 불사리를 봉안한 것이면, 일괄하여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캔디사원엔 ‘부처님 치아’를 봉안하고 있고, 파키스탄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대탑 근처의 건물터엔 작은 스투파를 모신 사당도 있다. 지하에 봉안한 사리가 발견된 곳도 있다.
불사리(佛舍利)는 사당이나 수미단(須彌壇) 위에 봉안하는 방법과 지하에 봉안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탑에만 사리를 봉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입멸 후 재가자들은 진신사리(眞身舍利)를 탑 속에 안치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했다. 불교가 인도 북서부 간다라지방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한국 등지로 전파되고 탑이 더욱 많이 세워짐에 따라, 극히 한정된 부처님 진신사리로는 신자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게 됐다.
결국 부처님 머리카락(佛髮), 부처님 손톱(佛爪), 부처님 이(佛齒) 등을 봉안 예배하거나, 부처님의 옷이나 좌구(座具) 등의 유물을 본존(本尊)으로 예배하기도 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과 달리, 부처님의 탄생지.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성도지(成道地).열반지(涅槃地) 등 4대 성지에 탑파를 건립하고 신앙했는데, 이런 성스런 곳에 건립된 탑을 지제(支提. Caitya)라 부르며, 불사리를 봉안한 탑과 구별하기도 한다.
형태는 달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변함없어
어떤 경전에는 “사리가 있는 것을 탑파라 하고 사리가 없는 것을 지제라 한다”고 기록돼 있지만, 후세에 이르러 사리가 있고 없음을 외관상으로 구별하기란 사실상 매우 곤란해졌다. 따라서 이런 정의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 오늘날 불교국가에서는 ‘탑’과 ‘지제’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어찌됐던, 인도의 불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뤄 마치 분묘(墳墓)와 같은 외관을 하고 있는데, 경주의 왕릉과 형태가 비슷하다. 이처럼 초기 인도 탑은 원분형(圓墳形)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밑 부분에 높은 기단이 만들어져 탑신(塔身)을 받들도록 변했다. 탑 위의 상륜(相輪)도 숫자가 늘어, 이들을 보호하고 장엄하게 하기 위한 돌난간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우아한 조각도 새겨졌다. 초기 인도 탑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산치언덕에 있는, 기원전 3~1세기에 세워진 산치대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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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응현 목탑. 완전 누각형, 중국식 탑을 대표한다. |
기대(基臺).복발(覆鉢).평두(平頭).산개(傘蓋) 순으로 이뤄진 인도의 탑은 파키스탄(이슬라마바드 근처에 있는 마니.라 스투파. 탁실라의 발라 스투파. 카이버 고개에 있는 스폴라 스투파), 아프가니스탄(카불 근방의 세와키 스투파),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들어오는 사이 형태가 변했다.
우즈베키스탄까지만 해도 복발식인 인도탑의 형태가 남아있지만, 일단 중국령에 들어오면, 신강성 호탄의 타클라마칸 사막 가운데 있는 라왁사원지의 탑만 해도 인도 탑과는 확연히 다르다. 탑신 부분이 세장(細長)하게 위로 쭉 뻗은 모습으로 바뀐다.
신강성에선 그래도 인도적인 맛이 약간 남아있지만, 감숙성 하서주랑 부근에 오면 탑은 어느새 인도 탑과는 전혀 다른 ‘누각식 탑’으로 변해 있다. 인도 탑을 상륜부로 삼고, 그 아래쪽에 중국 나름의 ‘고층 누각 형태’(高樓形)인 기단부와 탑신부를 만들어 탑의 중국적 변신을 이뤄내고 있다. 서안 낙양 북경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 형태다.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탑도 초기엔 중국처럼 고루형 목탑으로 조성됐다. 현존하는 것은 없지만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적어도 4세기 말에는 우리나라에 목탑이 세워졌고, 황룡사 9층 목탑 등에서 알 수 있듯 목탑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전까지 계속 건립됐다. 그러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보듯 ‘목탑식 석탑’으로 바뀌었다,
통일신라시대 지금 같은 형태의 탑이 등장해 ‘한국적 석탑’으로 굳어진다. 인도의 복발식에서 중국적 누각형으로, 누각형에서 다시 한국적 석탑형으로 탑 모습은 바뀌어도 그 안에 봉안된 진신사리와 부처님 가르침은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 탑의 원류도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였던 것이다. 중국을 거쳐 전해지는 동안 모양과 형태가 변하고, 토착화돼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것일 뿐이다.
인도.파키스탄.아프카니스탄.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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