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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성도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입니다./히브리서 11:13-16, 눅 4:21-30/최우식목사
2013. 2. 10 설 명절 아침에
오늘은 2013년 설 명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떠난 날입니다.
‘고향은 정말 어머니, 가족과 더불어 가장 정겨운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이 고향에 대한 진리를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결코 돌아가서 안 될 고향이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미국 문학의 거장인 토마스 울프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전적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합니다.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공부도 끝내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고, 똑똑한 자녀를 골고루 두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그리던 고향 애쉬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몹시 당황하고 실망합니다.
고향이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했습니다.
친구들은 거의 없어졌고, 자기는 이미 고향에서 잊혀져서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이미 주인공이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슬프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순 없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나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향수 속에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를 아름다운 신화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은 40세가 되면 대개 안정을 구한다.’고 합니다.(안정의 욕구)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내 아들이 영원히 일곱 살 정도의 귀여운 아이로 머물렀으면, 우리 집 개가 영원히 강아지로 있었으면’ 하는 정지의 희망을 심리적으로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고향도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고향을 떠났을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향은 순례의 길을 떠난 성도들이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눅 4:2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참 인기가 올라갈 때 고향 나사렛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무도 의연하게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시니,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권위에 눌려 실제로 예수님을 죽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아는 이웃이나 친구들이 많은 고향에서는 지도자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통속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진리로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선지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돌아갈 고향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돌아가서 안 될 고향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서 안 될 첫째 고향은 애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블레셋 사람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13:17)
하나님께서 그 길이 분명 가까운 길이었음에도 인도하지 않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이 없는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돌아가서는 안 될 첫 번째 고향은 바로 애굽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애굽을 동경하였습니다. “애굽에 있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왜 이렇게 광야로 이끌어내서 이 고생을 하며 죽게 하느냐?”고 부르짖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쫓아올 때나,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플 때나,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를 때 그들의 한결같은 동경은 애굽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먹고 마실 걱정 없이 그 생활이 편하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급기야 민14장에 가서는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후에는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까지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고향은 애굽입니다.
옛 신앙입니다. 옛 생활입니다. 옛 풍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돌아가서는 안 될 애굽은 옛 신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옛 신앙으로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고향 삼아 그곳이 주는 풍요와 쾌락에 푹 빠져 살고 있는 롯과 그의 가족을 그곳으로부터 속히 떠나게 하셨습니다.
“떠날 때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가 그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결과, 소금기둥이 되어 영원한 화석으로 저주받았습니다.
아무리 고향이라 할지라도, 풍요와 쾌락이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친구와 친척들이 살고 있다 할지라도, 그곳은 돌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고향은 그리워도 가서는 안 되는 곳이고, 보고 싶어도 만나서는 안 될 곳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심판이 있고, 죽음이 있고, 멸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안타까운 말씀 가운데 하나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이 애굽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애굽의 풍요보다 더 풍성한 나라, 애굽의 보화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끝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세계를 향하여 출발한 신앙의 발걸음을 뒤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애굽의 옛 신앙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돌아갈 수 없는 첫 번째 고향입니다.
돌아가서 안 될 둘째 고향은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 1:6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너무너무 마음 아파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절대 돌아가서는 안 되는 두 번째 고향은 율법입니다.
성도들이 율법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 힘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치한 체면과 착한 본능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 본능이 체면 때문에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았는데도 무엇이 이루어지면 감사치 않고, 생리적으로 불안하게 여깁니다.
‘내가 열심히 땀 흘리고, 노력하고, 수고해야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이 우리 속에 꽉 들어차있기에,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자꾸만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의 구원문제는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올바르게 살아서 구원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롬3:23- 롬6:23- 히9:2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호하게 증언하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은 것에 대해서 누구든지 자랑치 못합니다.
성경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갈3: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서 안 될 셋째 고향은 육체의 욕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속에는 아직도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두 소욕은 서로 싸우며, ‘나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싸움에서 육체의 소욕을 물리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시험하면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미혹합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런 미혹에 빠져, 돌아가서는 안 될 고향으로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것이 부정축재, 부동산 투기, 자녀들의 군 생활 면제 등입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계속될 것입니다.
1970, 80년대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을 때 돈 있는 사람치고 부동산 투기 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나 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청문회에서 하도 따지니까 ‘좋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거절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이라는 새 삶을 시작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돌아가서는 안 될 고향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생활입니다.
술 취함과 방탕함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음행과 호색 같은 것에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반드시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간 이유를 한 마디로 “돌아갈 본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말씀은 ‘성도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육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이 땅의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천국이 있습니까?”
이에 목사님이 ‘그럼. 천국이 있지’ 대답했더니, 어린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럼, 목사님, 천국은 좋은 곳이에요, 나쁜 곳이에요?’ 물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천국은 아주 좋은 곳이란다.’ 말해주었더니, 그 어린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그럼, 목사님이 천국에 가보셨어요?’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솔직하게 ‘아니, 나는 천국에 아직 가보지는 않았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아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사님, 그럼 어떻게 천국이 좋은 곳인지 아세요?’ 하더랍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천국에 간사람 중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단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고 돌아갈 본향은 너무나 좋은 곳입니다.
본향은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주님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와 늘 함께 동행하시고 도와주신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사랑했던 믿음의 선진들이 먼저 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향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그 천국 본향에 돌아갈 소망을 가지고, 그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그 하나님나라의 상급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래전에 아프리카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은퇴를 하여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더랍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고 반가웠겠습니까?
그러나 그 환영 인파는 미국의 유명한 비행사 린드버그가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성공하고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인파였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선교사는 ‘하나님, 과연 이것이 옳은 것입니까?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한 평생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한 일보다 못합니까?’ 항의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충성된 종아! 너무 속상해 하지 말라. 너희들이 진짜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린드버그의 환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 환영을 할 것이다. 그때는 너희를 환영하기 위하여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고,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온 내 백성들이 마중을 나갈 것이며, 내가 직접 너희들의 손을 잡고 환영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으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성도인 너희가 만들어가야 할 고향이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창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육신의 고향에 돌아가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그곳에 가서, 자기가 머문 그곳을 고향으로 만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간 것은 새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금의환향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공하면 고향에 돌아가 집짓고, 편히 살겠다.’는 생각을 결코 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아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 3:20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면서, 돌아갈 본향을 생각하였지만, 그렇다고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니 돌아갈 하늘의 본향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진짜 고향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항상 얼마나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에 따라서 사람들을 평가하고, 대우가 달라집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성공한 교회, 실패한 교회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다 나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 않으시고, ‘내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아들아’라고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향해 ‘죄인이라’고 정죄하였지만, 예수님만은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나라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고향,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서울에 사는 아들의 집을 찾아온 아버지께서 아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자기 집 한 귀퉁이 자투리땅에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경고문을 붙여 놓아도 소용이 없어서,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시장에 나가 호미를 사왔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를 버리고, 돌을 골라내어 텃밭을 만들어서 그곳에 상추와 고추를 심었습니다.
상추가 자라자, 아버지는 ‘상추가 필요하신 분은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고추가 필요하신 분은 양 것 가져가십시오.’라고 크게 써놓았습니다.
상추가 파릇파릇하게 크고, 풋고추가 맺혀지자, 동네사람들이 열심히 가져갔습니다.
그 일로 그 집이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당신이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했다는 겁니다.
사랑은 우리가 속해있는 곳을 고향으로 만들어가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고향이 될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의 현장이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진정한 고향이 될 줄 믿습니다.
‘남아프리카 잠비아의 북부 고원지대에 사는 바벰바족은 범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다른 민족과 달리, 죄 짓은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이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마을 한복판 광장에 세우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입니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외치는데, 그 사람의 잘못과 범죄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외칩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을 떠 올리며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을 하나씩 말합니다. 이 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하지 못하고,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칭찬의 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한마디로 ‘칭찬 폭격’을 하는 것입니다.
다 했다 싶으면, 이 사람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엽니다. ‘죄인이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바벰바족 마을에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가 아니라, 칭찬입니다.
이렇듯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은 점을 찾아 칭찬을 해 주는 것이야 말로, 그 공동체와 구성원을 건강하게 만드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만나면 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단점은 덮어주고, 장점은 드러내 주면서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곳이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이런 고향을 만들어가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여러분들이 있는 그 곳을 진정한 고향으로 만들어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진정한 가족으로 만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 늘푸른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가고 싶고, 힘을 얻고, 위로를 받은 진정한 고향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