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혁필. '제주민속'(濟州民俗) | | |
빠른 필력·화려한 색으로 표현…효제문자도와 깊은 연관성 소중한 전통회화…창의적 계승 통해 한국화 새바람 가능성 민간예술의 생성과 소멸 아직도 우리에게는 민간예술에 대한 용어, 개념, 가치에 대해 혼란스럽다. 소위 민간예술이 민속예술, 민예(야나기 무네요시), 민중예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해도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용어에 대한 개념마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전통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오래 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도 시대가 만들어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한국전쟁, 분단구조로 이어진 한반도의 정세가 '우리 전통 예술'에 대해 천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 예술의 진정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시간은 불과 30여년에 불과하다. 우리 전통예술의 재발견은 이미 둥지를 틀고 있는 외세주의 미학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의 아카데미를 잠식하고 있었던 서구 미학의 주도권은 서구우월주의 예술관을 창발(昌發)시켰다. 그 폐해는 아직도 한반도에 만연하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에 시작된 예술운동은 바로 외세주의에 대한 자각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고, 그간에 소외되었던 민중성에 대한 역사적 전통을 새롭게 복원하는 시기였다. 이 지점에서 전통예술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전통예술이라면 나를 중심으로 하여 과거의 예술 유산 일체를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이 비록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딱히 맞는 말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통예술을 다시 지배(귀족)예술과 피지배(민중)예술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민중의 손에서 만들어진 예술품들이 지배층이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배계급의 예술일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조선 분청과 백자의 창작자는 민간 도공이었고 그것을 왕실에 공급한 것도 그들이었다. 조선시대 3대 회화의 큰 흐름인 문인화(文人畵), 화원화(畵員畵), 속화(俗畵) 중 속화는 분명 피지배층의 예술이었고, 문인화는 지배층의 예술이었다. 화원화는 왕실 관련의 실용화를 그렸으나 화원들 개인의 실경산수화나 풍속화는 세속의 삶과 중층적으로 얽혀 있기도 했다. 세상은 지배/피지배 문화와 공존하면서 어느 한쪽이 배척하기도 하고 흉내를 내기도 한다. 종교와 종교 간, 지역과 지역 간, 계급과 계급 간 문화들은 서로 작용을 한다. 다시 말해 문화투쟁은 늘 같은 시·공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때 대세였던 문화도 어느 순간 소외되고 새로운 문화에 밀려 잔존하는 문화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 변동 또한 역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주류였던 문인화도 오늘날에는 예술 취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화원화도 명맥을 잇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민간 속화 또한 아예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전통예술도 새로운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면 아름다운 붉은 꽃이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이치와 같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혁필의 시초 비백서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은 봉사 소리꾼 누이 송화(오정애분)와 고수 동생 동호(조제현분)의 인생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김녕 목지곶, 용눈이 오름, 제주민속촌, 귀덕 포구, 샛별오름 등 아름다운 제주 풍경 여러 장면이 어우러진 것이 인상 깊다. 제주도 협재 출신 아버지를 둔 양방언이 음악을 맡아 남남이지만 남매이면서 서로 연인으로 느끼는 정한(情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천년학>의 한 장면에는 제대하고 온 동호가 누나를 찾기 위해 시골 시장에서 혁필화를 그리는 낙산거사(안병경분)를 만나는 씬이 있다. 시장판에 걸린 알록달록한 혁필화들이 한때의 영화(榮華)를 말해주는 듯하지만 찾는 손님은 아무도 없다. "하루에 한 점 그려 팔기도 어렵다" 는 혁필화가 낙산거사의 말에는 깊은 우수(憂愁)가 서린다. 오늘날 그리도 소중했던 우리 전통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았다. 혁필(革筆)은 혁필화(革筆畵), 혁화(革畵)라고도 한다. 혁필은 재료를 말하기도 하지만 회화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소가죽으로 각진 필(筆)을 만들어 속도감을 내며 그리는 그림이다. 진채(眞彩) 오방색을 이용한 적, 녹, 보라, 노랑, 청, 흑(먹) 6가지 이상의 색을 배합하여 화려한 그림으로 글씨를 구성한다. 원래 혁필은 중국의 비백서(飛白書)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비백서는 후한(後漢) 시대 채옹(邕)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한자체라고 한다. 버들가지를 꺾어서 그 끝을 갈라지게 하고 그 끝에다 먹을 찍고는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의(禮義), 염치(廉恥) 등의 글씨를 쓰되, 점을 찍고 또 건너 긋는 것을 멋있게 하여 물고기, 게, 새우, 제비 등 형상을 가미하여 글자를 구성하는 것이다(柳得恭(1749~?). 이 비백서는 부드러운 털붓과는 달리 딱딱하고 끝이 평평한 나무 붓으로 물기를 최소화하고 속도감 있게 글씨를 쓰게 되면 독특한 여백의 효과가 나타난다. 털붓의 갈필(葛筆) 효과와는 또 다른 맛을 안겨준다. 이 서체는 11세기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건너왔다고 한다. 비백서를 잘 쓴 이로는 칸칸하고 예리한 철선(鐵線) 글씨로 유명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를 말할 수 있다. 비백서가 죽필(竹筆)이나 유필(柳筆), 초필(草筆)에 먹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흑백 중심이었다면, 혁필은 진채를 이용한 오방색 중심으로 문자와 글자를 조화롭게 구사한 그림 글씨라는 점에서 더욱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이와 같이 문자를 중심으로 다양한 동·식물의 소재를 함께 구사한 조형적 의미의 기원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세계관에 흐르고 있는 샤머니즘과 민간 토속신앙이 문자의 주술적인 힘(文力)과 융합돼 나타난 결과"라고 한다. 혁필(화)의 종류에는 효제문자도 혁필, 비백 혁필, 화문자(畵文字) 혁필로 구분하기도 한다(이명구, 2005). 제주에서 활동하는 혁필화가 |  | | | | ▲ 혁필화가 벽산 최수성 선생 | | |
제주에 혁필화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실로 오랜만에 찾은 표선의 제주민속촌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우거진 숲을 지나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며 찾아간 곳은 혁필·낙화 공예방. 제주민속촌은 우리의 전통 장인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임대나 시설 사용을 무료로 하는데 현재 목공예, 서각공예, 민속화, 점집 등의 공예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언뜻 감 잡아 혁필·낙화 공예방은 6평 남짓의 정낭이 있는 초가다. 작은 난간에 진열된 혁필들. 활짝 열려진 방문으로 혁필화가 벽산(碧山) 최수성(崔守成, 1931~?) 선생의 얼굴이 환하다. 최선생은 녹색의 저고리에 머리에는 검은 색 건을 썼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정정한 모습에 아련히 기품이 서린다. 최선생은 1965년 낙화(烙畵)를 시작했다고 한다. 낙화(烙畵)라는 그림 개념도 최선생이 개발한 것이다. 원래 낙화는 켠 판자에 산수화나 초상을 불에 달군 인두로 그리는 그림이다. 원래 대나무 생필품이나 장식품에 인두로 글씨나 간단한 그림을 그리는 낙죽(烙竹)이 원조였다. 최선생은 당시 모 회사의 총무과장 시절 일간신문에 낙죽에 대한 기사를 보고 인생의 길을 바꾸게 된다. 그때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낙화 연구에 몰두했다. 선묘에 의존하던 기존의 낙죽을 넘어서서 보다 자유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입한 것이 서양의 원근법을 이용한 낙화기법이었다. 인두도 원근법을 표현하기 좋게 여러 개를 만들어 산수화, 화조화를 그려보니 훨씬 생동감이 있었다. 점점 명성을 얻으면서 명동의 코스모스 백화점에 낙화 공방을 열 수 있었다. 1967~1977년까지 약 10년은 한국민속촌에서 초빙돼 전통 초가에서 낙화 공방을 운영했다. 일본까지 소문이 나 낙화 연하장을 5만장 주문 받았으나 일손이 모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위약금 대신 약 1만장 정도 그린 것을 거저 주고는 수습했다고 한다. 최선생은 한국민속촌에서 낙화를 그릴 때 혁필화가 홍지성을 만나 사사했다. 홍지성(?~1995)은 호가 팔산(八山)으로 1974년~1992년 한국민속촌에서 혁필 공방을 운영했다.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남하하여 스님과 대만인에게 혁필을 배우고 전국 장터를 누비던 거리의 화가로 살다가 한국민속촌이 개장되자 그곳에 정착했다. 홍지성은 관광객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어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사후 여러 제자들이 그에게 배운 혁필의 맥을 국내외에서 잇고 있다. 최수성은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이 제주도다. 1944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매일 미군의 공습이 있었고 살던 동네가 집단소개 되면서 제주로 급히 귀향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제대하고 결혼을 해 서울에 정착했다. 홍지성을 만난 이후 최수성은 낙화보다는 혁필을 주로 그렸다. 제주민속촌에 둥지를 튼 것은 1994년인데 혁필 때문에 일본을 자주 왕래했다. 최수성의 전성시대는 화려했다. 1984년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 한국관에서 시연을 시작으로, 한국 혁필화가 최초로 해외로 진출하였다. 그 후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일본 후쿠오카 등 각종 세계박람회에 한국관 멤버로 참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2000년에는 독일 하노버 세계박람회에 참가하였다. 벽산 최수성의 혁필은 한문과 서예의 바탕이 돼 그런지 화려한 구성력이 돋보인다. 빠른 필력, 화려한 색으로 표현되는 형태와 선들의 묘미는 효제문자도와의 깊은 연관성을 갖게 한다. 한때 혁필의 대중성은 대단했다. 부적과 같이 여겼던 그림 글씨는 우리 마음의 자유분방함에 걸맞는 색채감과 속도감이 전해진다. 이 귀한 전통 회화가 창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면, 21세기 한국화의 새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부모가 없이 자손이 번창하길 바랄 것인가.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