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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신(金敎臣)은 누구인가?
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란 쉽지 않다. 직접 보고 들은 바 없이 그저 서책만으로 아는 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우회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김교신(金敎臣)이라는 인물에 대해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국민교양단체 외솔회에서는 이렇게 평했다.
수난과 순교의 시대를 살다 간 김교신 선생은 ‘한국의 흙으로 만들어져, 한국의 흙을 디디고 살고, 한국의 흙으로 돌아간 참 한국인’이다. 근세 한국의 전 민족이 부딪친 암흑과 수난, 모독과 시련의 죽은 민족사의 황야에서 모세가 그랬듯이, 그는 민족 구원의 복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인도했고, 드디어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생명을 묻어 단절된 민족사를 이어준 다리가 됐다. 선생의 신앙 생애․교육 생애․애국 생애는 죽은 민족사의 황야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구원이었고, 한국의 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었고, 한국이 품고 있는 순정으로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외솔회 발간 『나라사랑』 제17집(1974, 김교신 선생 특집호)에서
그런 이가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교신의 글을 후대에 남겨야 한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일제 시대 ‘성서조선 사건’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소각․말살되다시피 한 관련 자료를, 아는 이들의 서재를 깡그리 흝다시피 하고, 청계천 헌책방을 샅샅이 뒤지다 못해 심지어는 검찰청 창고까지 연줄을 통해 드나들면서 찾아내어,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 『성서조선 영인본』을 간행해낼 정도로 헌신적인 벗과 후배, 제자가 상당수에 달함에도 그토록 묻혀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김교신과 한 세대의 격차가 있는, 그래서 스스로 ‘김교신 선생님을 나는 한번도 뵈온 일이 없다’고 말하는 김정환 박사(교육학. 전 고려대 교수, 한국교육학회 교육철학연구회장)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현대 한국의 종교계 인물 중에서 한용운과 김교신은 종교로 민족을 거듭나게 하려 한 종교개혁자다. 한용운이 불교계의 그 기수라면 김교신의 기독교계의 그 기수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은 널리 알려져 있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김교신의 경우는 일반인에게는 물론이요, 기독교계에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분은 ‘민족의 시인’이라는 좋은 인상 때문에 그 불교개혁론도 전적으로 공감․수용되었는데, 한 분은 처음부터 안팎에서 기독교의 ‘이단자’로 몰렸기 때문이다.
『김교신 - 그 삶과 믿음과 소망』(한국신학연구소, 1994) 머리말에서
여기서 ‘이단자(異端者)’라는 표현은 상당히 미묘하다.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략이나마 김교신의 생애부터 접해야 한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
김교신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16년에는 함흥공립보통학교를, 1919년에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22년 당시 중등학교 교사 양성기관으로 최고 명문이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나중에 벗이자 신앙 동지가 되는 함석헌과 함께 입학한다.
그런 그가 기독교에 접하게 된 것은 1920년 거리에서 설교를 듣고서였다. 하지만 다니게 된 교회에서 목사가 반대파에 축출되는 등의 병폐를 목격한 뒤 실망한 상태에서 무교회(無敎會) 신앙을 주창하는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의 청강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7년에 걸쳐 지속된다.
1927년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신앙 동지들인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류석동, 양인성과 함께 발간하기 시작한 동인지 『성서조선』의 간행을 돕기 위해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 이후 12년간 『성서조선』의 간행과 양정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김교신은 1930년부터 『성서조선』의 간행 책임을 혼자서 전적으로 맡게 된다. 낮에는 교사, 그 외의 시간에는 『성서조선』 편집자이자 필자, 제작 담당자, 발송 담당자, 판매 담당자, 경리 담당자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김교신은 또 그런 짬짬이 기독교 선교 및 무교회신앙의 전파에도 적극 나선다. 김교신이 남강 이승훈, 기독교계 원로인 김정식, 다석 류영모, 춘원 이광수를 비롯 당시 농촌 운동을 벌이던 김주항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다 동경대 교수직에서 쫓겨난 야나이하라 다다오(전후 동경대 총장 역임) 등과 교분을 두텁게 하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에서였다.
하지만 1940년 김교신은 양정을 사임하게 되고, 1941년에는 서울 경기중학교에 6개월간 머물렀다가 바로 개성의 송도중학교로 자리를 옮긴다. 이 모두가 김교신의 『성서조선』이 가진 민족적 색채로 말미암아 조선총독부에 요주의 인물 내지는 불온 인물로 낙인찍힌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 벌어진 것은 김교신이 개성의 송도중학교에 근무하던 1942년 3월 30일의 일이었다. 근대 한국을 만든 명 논설 33편(『신동아』 1966년 1월호 부록 『근대 한국 명논설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성서조선』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문제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성서조선』 관련자 및 독자들이 검속되는 이 사건에서 『성서조선』 관련 자료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압수․소각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기 7개월 전의 일이었다.
구속되고 만 1년만인 1943년 3월 29일 불기소로 출옥한 김교신은 이후 전국 각지는 물론 만주까지 순회하며 신앙 동지들을 격려하고 기독교 전파에 몰두하다 1944년 7월 함경남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한다. 강제 징용당한 5,000여 한국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한국인 노무자들의 교육, 주택, 처우 개선에 골똘하던 김교신은 해방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생을 달리 한다. 장례는 평소 김교신을 존경하던 일본인 간부의 주장에 의해 최초로 공장장(工場葬)으로 거행됐다. 향년 44세 때의 일이었다.
◐‘무교회’를 주창해 ‘이단’ 낙인 찍혀(?)
이런 김교신의 생애에서 ‘이단’ 시비가 벌어질 소지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의 ‘무교회’ 신앙이 될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에 의해 주창된 무교회 신앙은 기존의 기독교단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무교회 신앙의 경우 형해(形骸)화된 교회 대신 갈릴리 호반의 어부들이 가졌던 초대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특정 공간이 아닌,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교회이며, 성직자에게서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닌, 각자가 회심(回心)을 통해 영으로 받는 세례가 진정한 세례이고, 성서 해석은 성직자나 교회가 아닌, 신자 각자가 하느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수와 은총의 분수에 따라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는 근거에서이다.
한마디로 무교회 신앙은 기존의 교회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독교 교회를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닌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과 같은 상황에 빠진 교회교(Churchanity)라고 비판한다. 그런 만큼 예배 방식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무교회 신도들은 예배 대신 성서연구 모임을 가진다. 거기서 감정적인 면은 대부분 배제된다. 모임에서 찬송가는 대개 한 두 곡만 부르고 끝나며, 목사가 없으니 성찬식이니 세례니 하는 것들은 아예 없다. 또 장로니 하는 것들도 없기 때문에 순번으로 사회를 정해 개회 기도와 성경 낭독을 하고, 헌금은 없고, 청강료만 있다. 집회 장소 임대료로 쓰기 위해서이다. 예배 내용도 기존 교회와 전혀 다르다. 설교는 없다. 다만 로마서면 로마서, 마태복음이면 마태복음 하나를 정해 몇 년이고 주석을 해가면서 끝까지 공부하되, 가급적 원어로 성서를 읽도록 격려한다. 무교회 신도들의 모임에 희랍어 강좌가 많은 것도 그래서이고, ‘학자적인 모임’이라는 달갑지 않은 평판을 듣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파(敎派)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들의 경우 오히려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교파화 될 가능성을 잘라냈다. 무교회 신앙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우치무라 간조의 경우에는 자신이 이끌던 성서연구회 모임의 해산을 유언으로 남길 정도였다. 그 모두가 자신들이 부정하는 교파화의 폐해를 우려해서였다.
◐ 민족 기독교 대 일제 기독교
이런 무교회 신앙을 기존 기독교 교단에서는 철저히 배척했다. 모임을 갖기 위해 YMCA 강당을 빌리는 것이 거절되고, 교회 출입 자체를 금하는가 하면, 단순한 친교마저도 백안시하고, 심지어는 친일(親日)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무교회 신앙의 창도자 우치무라가 일본인이라는 점과 연관시켜 ‘일본식 기독교’로 몰아붙이면서 은연중 민족 감정을 부채질하는 식이었다.
피상적으로 보자면 무교회 신앙의 교회 비판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배경도 깔려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사람의 증언 혹은 평가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송건호(전 한겨레신문 회장)는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
김교신은 … 참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다 쓰러졌다. 그런데 교회측은 어떠했던가. … 오로지 신앙과 전통만을 간판으로 내걸고 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중립적 태도를 취했고, 현장의 참여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의식화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이 기독교를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에 순응하고 나아가서 전쟁에 협력하고 더욱 일본 천황을 또 하나의 신으로 모시는 군국주의 찬양 친일 기독교로 전락시켰다. ‘무교회’를 백안시한 배경도 바로 이것이다.
⌈일제하 민족 기독교⌋(『일제하 민족과 기독교』, 김용복 외 엮음, 민중사, 1981)에서
한편 임종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장로회 교육총무 정인과는 기독교가 국책에 순응하여 구미 의존성을 극복하고, 외국 선교기관을 철수시켜 ‘일본적’ 기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 했고, 조선감리교단 본부 주사 심명섭은 전시에 가장 필요한 사상의 통일과 신념의 강화를 위해 국책에 순응하는 진정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자 했고, 복음교회 감독 최태용은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친일논설선집』(실천문학사, 1987)
이 모두가 1940년 전후, 즉 『성서조선』이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검열로 휴간, 속간을 되풀이 하고 있던 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조정래(소설가)의 비판이나, 홍근수(목사, 향린교회 당회장, 한국기독교협의회 통일위원)의 탄식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김교신 선생께서 외롭게 실천하신 일이 뭡니까. 이 땅의 기독교에 미국식 물량주의와 저돌성이 감염된 것을 치유해서 건전하고 건강한 민족 종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김교신 선생께서는 일찍이 그 저의를 간파한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한민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시켜 의식을 완전히 속국화 시켜 버리려는 강대국의 저의를 말입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민족 종교화를 꾀했던 것은 그 음모에 맞서기 위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태백산맥』(조정래, 한길사, 1987) 제4권 242~243쪽에서
김교신이 죽은 지 벌써 반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는 놀라울 만큼 자랐지만 성숙 면에서는 하나도 성장한 것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김교신과 같은 선각자가 교회가 민족과 세계를 위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있는가를 오래 전에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전혀 귀머거리로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김교신 - 그 삶과 믿음과 소망』(김정환, 한국신학연구소, 1994) 338쪽에서
한마디로 무교회 진영은 일제 시대 기독교계에서 (가톨릭 측을 포함하여)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한 몇 안 되는 집단에 속한다. 이점은 감리교의 윤치호와 비교해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두 사람은 실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길을 걸었다. 윤치호가 기독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로 친일로 귀착된 ‘좌절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반면,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은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바람직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으며, 윤치호가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요소를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제국주의에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는 예속적 에토스를 심는데 앞장섰다면, 김교신의 경우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민족 정체성의 재구성에 대한 자극 요인으로서 기독교를 활용했다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양현혜 저 『윤치호와 김교신』)
◐ 진정한 스승, 김교신
하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기억하는 김교신의 모습이 훨씬 더 매혹적이다. 가령 김교신이 가장 총애했다는 제자, 100점 만점에 120점을 받았다는 류달영(농학박사. 서울대 명예교수)은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 지리 과목은 대부분 일본 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두서너 시간으로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1년을 우리나라 지리만 배웠다. 대고구려를, 세종대왕을, 이순신을 배웠다. 식민지 교육 아래서 자신에 대해 소경이었던 우리 소년들은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국토가 넓지 못한 것을,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을, 백두산이 높지 못하고 한강이 깊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윤석중(아동문학가, 새싹회 회장)의 기억은 교사가 아닌 스승으로서의 모습이다.
시험 보는 시간에 컨닝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선생이 계셨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퇴짜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이런 술회는 끝없이 계속된다. 모든 학생에게 반드시 한 개의 운동부와 한 개의 학술연구부에 들어가 자기를 알고 닦게 하였고(정태시), 일본이 조선 사람의 혼을 몽땅 먹어 버리려 하고 있다고 늘 경고하고(박춘서), 모두들 창씨개명을 하였는데도 선생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 조례에서 출석을 부를 때 끝내 우리말로 호명을 하였는데 배속장교가 항의하자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상관없다고 버티다가 문제화되자 다음부터는 아예 출석을 부르지 않았고(최남식),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공허해 못 견디는데,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이상적 인물에 대한 동경이라고 타일렀다(유희세)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교신의 제자들은 ‘교사’ 하면 김교신을 연상할 정도로 가장 인상 깊게 회상되는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교사로서의 김교신은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에세이스트 김교신
그러나 편집자의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김교신전집』의 미덕은,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에세이(Essay)’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에세이 류(類)는 결코 적지 않다. 아니, 넘쳐난다고 해야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출판 분야에서 아예 하나의 ‘시장(Market)’을 이룰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류의 에세이와 김교신의 에세이는 그 궤를 달리 한다. 교과서적 용어를 빌자면, 김교신의 에세이는 글자 그대로 에세이(중수필, 重隨筆)이다. 작금에 넘쳐나는, 그때그때 생각 가는 대로 끄적이는 식의, 감성적 미셀러니(Miscellany)가 아닌 것이다.
일례로 조국, 교육, 학문과 직업, 이상과 현실, 가정 등을 논한 1권 『인생론』의 ⌈조선 지리 소고(朝鮮 地理 小考)⌋를 보자. 김교신은 거기서 조선 땅의 면적과 인구, 산악과 평야, 해안선, 기후, 지구상에서의 위치를 세세히 논하며, 그것이 얼마나 천혜(天惠)의 것인지를 밝힌다. 인류 문명사 전반(全般)에서 그 화려한 꽃을 피웠던 국가들의 지리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세세히 밝혀 가면서.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끄집어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읽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다.
그러나 조선의 과거 역사와 현장을 통관(通觀)한 이는 누구든지 그 위치의 불리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황해가 대서양만큼 넓거나 압록강 저편에 알프스 산맥 같은 고준(高峻)한 연봉이 둘러쌌더라면, 조선 해협이 태평양만큼이나 넓었더라면 좀더 태평하였을 것을, 그렇지 못하니 중, 일, 노 3대 세력이 개재(介在)*하여 좌충우돌하는 형세에 반만년 역사도 별로 영일(寧日)이 없이 지나왔다고 하니 듣는 자로서 과연 동정의 눈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비명인 것을 미면(未免)*한다. 약자가 한갓 태평을 구하여 피신하려면 천하에 안전할 곳이라곤 없다. 남미 페루국 에스파니아에 선주(先住)하였던 인디언족의 수도 쿠스코는 우리 백두산보다 휠씬 더 높은 곳에 있었어도 에스파니아인들의 참혹한 침략을 피할 수 없었고, 티벳은 해발 4,000미터 이상의 고원에 비장(秘藏)된 나라이었으나 천하 최고의 히말라야 산맥도 이 신비국으로 하여금 영인(英人)의 잠식을 피케 하는 장벽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다 - 겁자(怯者)에게 안전할 곳이 없고 용자(勇者)에게 불안한 땅이 없다고.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굴(虎窟)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영일이 없다 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 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는 이만한 데가 다시없다. 이 반도가 위험하다할진대 차라리 캄차카 반도나 그린란드도(島)의 빙하에 냉장하여 두는 수밖에 없는 백성이다.
게다가 세월에 조금도 퇴락한 기색이 없다. 60~70년에 달하는 세월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읽고 있노라면 지금 이 순간으로 현재화된다. 가령 1권에 게재된, 교육 문제를 다룬 ⌈최대의 우상⌋이 그렇다.
학교 교육은 현대인에게 최대의 우상이다. ‘이불 길이를 보아 가면서 발을 펴라’ 함은 동서양에 공통한 격언이다. 마는 자질(子姪)의 교육에 한하여서만 이불이 짧아도 발길만 펴고자 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 비류(比類) 없던 조상 숭배의 열성은 이제 ‘자손 숭배’ 형태로 변하였다. 선조의 분묘를 위하여 아끼는 것이 없던 심정으로써 최후의 1평 전토까지 팔아서라도 학용품, 후원회비를 합하여 보통학교에 50여원, 중학교에 100여원, 전문대학에 수백 원씩 4월 1일에 헌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 교육을 위한 파산이 생긴다.
간이(簡易) 생활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이나 해마다 증가하는 교육비를 지출하기 위하여는 수입의 증액을 기도하여야 한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지출에 비하여 수입이 상반치 못할 때에 인간 비극이 시작된다. 본의에 거스르는 직무도 감수하여야 하려니와 승관(昇官)운동도 사양치 않으며, 부정행위도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에 달하려는 때에 생기는 것이다. 교육을 위한 비교육적 생활이 이에서 포태된다.
몸을 다하여 공직에 복무함을 ‘충’이라 일컬을 것이나, 자제의 교육을 위하여 도회로 전임할 때에 그 배임(背任)하는 모양이 마치 창기(娼妓)의 절(節)을 변함과 방불할지라도, 학교 교육을 위함이라 하면 자타가 서로 용인하려 한다. ‘악마는 도회를 건설하고 하나님은 향촌을 건설한다’ 하며, 농촌 진흥이 시급하다고 외치는 선각자가 있으나, 농민을 모집하여다가 서울서 농민 수양회를 개최하여야 하는 형편이니 교육의 비애가 없지 못하다.
평일에 엄정 공명하던 인사도 자질의 입학시험에는 파렴치하고, 청탁도 시(試)하니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 입학 후에는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진급하기를 기도한다. 한번 문제가 학교 교육의 결과에 미치면 노유(老幼)와 현우(賢愚)의 별(別)이 없이 혼돈이요, 망패(妄悖)*이다. 이렇게 하고라도 학교 결과에 무슨 소득이 있다면 용혹무괴(容或無怪)*하려니와, 오늘의 학교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외에 무엇이 남는가. 절대한 신뢰의 표적이 되면서 하등의 실효도 없는 것을 가로되 ‘우상’이라 한다. 현대와 같이 교육이 우상화한 때에 “행유여력즉 위학문(行有餘力則 爲學問)”*이라는 공부자의 말씀에 깊이 반성할 것이다.
◐ 선비의 전범, 김교신
여기에 몇 가지 일화를 덧붙여 보자.
아는 이가 찾아오자 밭에서 일하다 집안으로 들어가 의관을 정제하고 다시 나와 맞아주는 모습, 한 밤중에 조심스레 손님의 이불 밑에 손을 넣어 방이 식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문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가서는 군불을 때는 모습, 동경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동기동창 중에서 빠른 이는 장학관, 보통 교장을 하고 있는데 평교사로 있으면서도 학무국(오늘날의 교육부)의 관립 사범학교로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는 모습, 300여명의 독자뿐인데도 10여년에 걸쳐 『성서조선』을 만들어가는 모습, 일제에 체포․수감된 상황에서 경찰의 ‘황국신민서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라고 답하는 모습, 시집가는 딸에게 단도 하나를 내주며 ‘금일로써 친정과의 관계는 싹 끊어라, 길흉화복을 오로지 시댁과 함께 해라, 나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자르는 모습….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로 집약된다. ‘선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선비는 이조 시대의 선비와는 달랐다. 최소한 친구 아버지를 통해 무교회신앙을, 김교신을 알게 됐다는 석진영(시인, 찬송가 작사자, 미국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주필)에 의하면 그렇다.
격무 중에서도 가족을 위해 밭을 일구고, 가축을 기르시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은 청빈만을 덕으로 삼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등지고 앉아 글만 읽으며 무기력한 생활인으로 자족하고 안거하며 처자를 희생시킨 우리의 선비들의 폐풍을 산 신앙으로 지양한 저에서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
『복음의 전령(The Christian Ambassador)』 제30호(1978)
그래서인가. 김교신의 벗 함석헌은 김교신을 추모하는 글에서 이렇게 외친다.
오늘에 와서 저를 생각함이 더 간절하다. 오늘에 저를 그리는 생각은 그 의미가 다르다. 나라의 미친 꼴을 보고, 썩는 꼴을 보고, 생명의 말씀을 가진 참 산 인물이 그리워서다. 저로 하여금 이 나라에 있게 하라. 있어서 말씀하게 하라.
결국 김교신은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김교신 전집』의 복간에 나서는 이유일 것이다.
◐ 다석 류영모와는 무관하다!
최근 들어 김교신(金敎臣)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듣게 되면 다석(多夕) 류영모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다석 류영모 전집> 발간과 함께 ‘다석은 함석헌․김교신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식으로 소개된 탓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한마디로 근거가 박약하다.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다석의 후학들이 다석을 보다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함석헌과 김교신의 이름을 들이대는, 약간의 오버 페이스마저 서슴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그 근거를 몇가지만 제시해 보자.
우선 사상적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김교신과 류영모는 합치하는 부분이 없다. 물론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고,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하기는 하다. 마는 본질적으로 김교신은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를 주창하며, ‘성서를 조선 위에, 조선을 성서 위에’ 올려놓고자 헌신한, 철저한 기독교도이다. 공자마저도 그 실천적 측면에서의 소극성이나 현실적 측면에서의 무기력함을 들어 은연중 비판할 정도인 만큼 다석이 이야기하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김교신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럼에도 류영모가 김교신의 스승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정황적인 측면이 많이 고려된 듯하다.
우선 류영모는 김교신과 교제가 있었다. 그 교제의 시작은 불분명하다. 김교신 자신이 그와 관련 뚜렷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김교신의 동경고등사범학교 동창인 함석헌이 류영모와는 오산고보를 매개로 인연이 맺어진 상태였다는 점, 함석헌과 김교신은 다같이 <성서조선> 동인(同人)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자연스런 교제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은 가능하다.
류영모와 김교신의 교제에 관해서는 김교신의 글 중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 하지만 그런 글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과연 스승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교신은 대단히 솔직한 인물이다. 그의 글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에 대한 김교신의 솔직한 평은 경우에 따라서는 몸서리쳐질 만큼 엄정하고, 가혹하다.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친소(親疎) 유무와 관계의 경중(輕重)을 막론하고 준열히 꾸짖는 식이다. 그런데 류영모와 관련해서는 뚜렷한 평가가 없다. 다만 그 사상과 경륜을 존경하고, 지기(知己) 내지는 훌륭한 선배(先輩)로 대접하는 정도이다.
그것은 김교신의 일기와 서간문을 읽으면 드러난다. 평생 일기를 쓴 김교신에게 류영모는 일기에서 17회, 서간에서 2회 언급된다. 그 내용은 참고자료 <류영모 관련 일기 및 서간 내역>에 제시되어 있다.
만일 류영모를 스승으로 생각했다면 김교신은 그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활자를 통해 밝혔을 인물이다. 가령 김교신 본인 스스로 스승으로 생각하는 우치무라 간조의 경우를 보자.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또 김교신이 주창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에 대해 기존 기독교단에서 ‘기독교마저도 일본화하기 위한 음모의 괴수’ 내지는 ‘일본식 기독교’라는 가혹한 중상모략이 십자포화처럼 펼쳐지는 속에서도 김교신은 당당하게 ‘나는 우치무라의 제자다’라고 공식적으로 여러 차례 밝힐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류영모의 후학들이 주장하는 ‘김교신의 스승 운운’은 좀 지나친 아전인수가 아닌가 한다. 그보다는 연보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있다.
‘남강 이승훈과 교유하다. 이 밖에 선생의 교유관계는 우리나라 기독교계 원로인 김정식의 남다른 촉망을 받았고, 또 남강의 동지로 일시 오산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동양학의 석학 류영모와는 지기(知己)로 수어(水魚)의 사이였다. 또 우치무라의 사후, 그의 고제로서 일본 지성인의 존경을 한 몸에 모았던 2차대전 후 동경대 총장을 지낸 야나이하라 다다오와는 각별한 신앙교우를 지속하였다. 전쟁중 비전론자로서 동대를 추방당한 후에 그는 내한하여 서울 정릉 선생댁에서 성서집회를 가진 일도 있을 정도였다. 춘원 이광수도 신앙문제로 한때 선생의 가르침을 청한 때도 있었고, 또 창조의 생활로 청년들에게 생활개척의 정신을 크게 불러일으켰던 김주환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 참고자료 1 : 전집 스킵(Skip)法
김교신 전집은 조금만 시간 여유를 갖고 찬찬히 읽노라면 온갖 감회를 모두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래도 좀 시간을 절약하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의 스킵(Skip)이 효율적이다. 물론 편집 과정에서 읽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라 김교신 선생의 의도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권 <조국> 노국인의 교양 (42P)에서 보듯 성서조선이 조선 총독부의 원고 검열을 거친 후에 발간된다는 사실을 유념해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검열 하에서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는 노심초사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아울러 단 한편으로 기독교에 대한, 조선에 대한 김교신의 생각을 읽고 싶다면 1권 <조국> 성서조선지 창간사 (17P)가 좋을 듯하다.
반면 한 章으로서 김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싶다면 1권 <고백․선언> (203-236P)을 추천한다. 성품이나 삶의 모습, 사회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편린들이 여기저기에 흝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경우에는 아래의 주제 분류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읽으면 될 것 같다. 다만 <에세이>만큼은 먼저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편집 과정에서 읽은 소감으로 말하자면 김교신 선생의 가장 매력있는 부분이 에세이스트로서의 자질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별권은 김교신을 아는 분들의 소평전 내지는 회고담이므로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으면 된다. 혹시 몰라 필자들의 약력은 따로 첨부한다.
참고 : 이하의 페이지에서 앞에 것은 교정지 기준임. 책 기준으로 찾을 때는 2P를 더해야 함
◐ <에세이>
1권 <조국> 조와 (36P) 성서조선 사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칼럼. 에세이스트로서의 김교신의 모습도 엿볼 수 있음
1권 <믿음의 생활> 제자된 자의 만족 (176P) 현대의 君子, 혹은 현대의 선비가 어떤 모습일지를 충분히 상상이 가게 해주는 글
1권 <학문과 직업> 폐물 모집 (12P) 지금 시점에서도 충분히 유효한 글. 김교신의 솔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2권 <기독교도> 기독교도의 이상 (185P) 기독교 이야기를 함에도 엉뚱하게 느림의 철학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하는 글
2권 <진리> 무신론자를 탐조함 (298P) 지식인의 허위의식, 부박함을 질타한 글
2권 <자연> 병아리의 싸움 (343P) 기독교와 세사가 어우러진 에세이. 하나의 소재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 김교신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줌
◐ <본인의 성격․성품>
1권 <조국> 조선의 빈곤상 (21P) 민족적 측면에서도 읽을 수 있으나 그보다는 사물을 바라보는 깊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
1권 <교육> 회오록 (83P) 溫故知新이란 단어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하는 글
1권 <가정> 어버이가 되기까지 (241P) 不恥下問 정도가 아니라 不恥悔悟 혹은 吾一日三省이라는 삶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글
1권 <가정> 북한산록의 집 (250P) 김교신의 安貧樂道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는 글
1권 <위대한 사람들> 공자 지금 출현한다면 (273P) 단순히 공자왈, 맹자왈이 아닌, 殖産과 實事求是를 중시하는, 經世濟民에 뜻을 둔 선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
2권 <성서> 진과 미 (64P) 진정과 진실로 접근하고자 하는 김교신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
2권 <기독교> 반야탕(般若湯) (88P) 김교신 본인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사랑> 명경대 (138P) 김교신 본인의 선비적 기질, 군자적 기질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글
2권 <자연> 계명성 (336P) 자연주의적, 환경주의적 풍모를 보여주는 글
◐ <본인의 삶>
1권 <학문과 직업> 배울 수 있는 사람 (94P) 유교에 대한 그리움을 통해 어설픈 평론가 투성이인 현실을 풍자한 글
1권 <학문과 직업> 전공과 기호 <상> (108P) 漢學에 능하고,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이래 런던타임스를 정기 구독하고, 성서를 공부하기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히고, 라디오 방송으로 독어까지 학습했음에도 實事求是 정신에 투철한 김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
1권 <학문과 직업> 불변의 변동 (122P)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것으로 보임에도 내적으로는 얼마만한 갈등이 많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
1권 <현실과 이상> 책략이냐 진실이냐 (145P) 正義, 이것을 일상 생활에서 관철코자 하는 김교신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글
1권 <가정> 가정생활 (237P) 개화한 선비, 혹은 합리적 선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글. 단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함
1권 <가정> 성조소감 (248P) 김교신의 實事求是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는 글
1권 <고인에 대한 추억> 조성빈 군의 일생 (302P)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사제의 모습과 함께 진정한 스승의 공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글
1권 <성서조선지의 행로> (313-344P) 성서조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교신이 겪은 노고와 심려를 간접적으로나마 제대로 엿볼 수 있는 章
1권 <생활 주변> 하계 휴가 온다 (350P) 편집자로서, 교사로서, 경영자로서, 서임받지 못한 목회자로서 분주한 김교신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글
1권 <생활 주변> 나의 자전차 (352P) 일상 생활에서 俗塵을 털고자 하는 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둘 필요가 있는 글. 에세이와 미셀러니의 중간 쯤에 위치한, 읽기에 즐겁고도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글
1권 <생활 주변> 제소와 패소 (353P) 신실한 기독교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
1권 <생활 주변> 무제 (372P) 편집자로서, 교사로서, 경영자로서, 서임받지 못한 목회자로서 분주한 김교신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글
2권 <기독교> 상층구조(上層構造) (89P) 당대 유행하던 맑시즘의 세례에서 한 발 비껴나 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엿볼 수 있는 글
2권 <기독교도> 그대여 담대하라 (198P) 우물쭈물 하고 있는 친구를 질타하는 모습을 통해 김교신 본인의 성품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전도> 가족 전도의 문제 (213P) 자기 가족을 전도하려는 학생에 답하는 형식의 글. 결코 강요하려 하지 않고 修身을 통해 敎化하고자 하는 김교신 본인의 성품을 잘 보여줌
2권 <진리> 진리 체득의 길 (292P) 김교신의 漢學에 대한 깊이나 조예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책
2권 <자연> 상현 (333P) 속세에 살면서도 俗塵을 털어내고 安貧樂道하는 선비의 풍모를 보여주는 글
2권 <자연> 빙산 (353P) 君子를 그리는, 김교신의 조선화된 기독교, 기독교를 만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
◐ <민족 의식 및 사회 개혁 관련>
1권 <조국> 조선 지리 소고 (60P) 서두, 본론은 빼고 결론만 읽는 편이 훨씬 즐거움. 서두, 본론은 교양 강좌 내지는 방증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 결론을 보면 민족 의식이라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음
1권 <교육> 교사 심경의 변화 (65P) 반성하는 삶을 사는 한 지식인의 모습이자 교사로서의 고민에 투철한 한 소시민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글
1권 <교육> 최대의 우상 (76P) 교육이 우상화된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의 교육 현장과, 그것을 핑계로 온갖 부정에 스스로 발 담그는 사회 성원들의 말없는 共謀를 통탄한 글
2권 <하나님> 시험제의 법칙 (14P) 하나님의 권능을 설명하는 글이지만 다르게 읽으면 優勝劣敗가 아닌, 劣勝優敗 역시 세상의 이치임을 설파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조선 민족에게 희망을 복돋움
2권 <하나님> 친소유별 (20P) 우리 사회의 안면 관계, 친분 관계를 질타
2권 <부활> 일로전쟁 좌담회기 (162P) 김교신의 기독교에 대한 열정과 함께 당시 <성서조선>이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발간되는 과정에서 얼마만한 어려움을 겪었을지를 간접적으로 엿보게 하는 글. 행간을 읽어 달라는 유달영 박사의 말이 새삼 느껴진다.
2권 <자연> 식목의 심리 (338P) 민족주의적 자긍심과 허탈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글
◐ <기독교도가 된 이유>
1권 <믿음의 생활> 극단의 도 (159P) 漢學에서 기독교로 귀의한 김교신의 전후 사정을 은연중 짐작케 해주는 글
2권 <그리스도> 작은 일 (52P) 평범한 이의 종교인 기독교를 부각. 그 과정에서 동양적 미덕을 풍자하는 것이 볼만
2권 <기독교> 선의인(鮮矣仁) (87P) 漢學을 공부한 본인이 왜 기독교도가 됐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신앙> 입신의 동기 (124P) 漢學을 공부한 본인이 왜 기독교도가 됐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사랑> 愛敵의 사랑 (131P) 김교신의 기독교관의 한 단편을 잘 엿볼 수 있는 글
2권 <사랑> 농담 무용 (132P) 김교신 본인의 성품과 기독교관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사랑> 책무를 분담하리라 (140P) 김교신의 기독교관의 한 단편을 잘 엿볼 수 있는 글
◐ <기독교>
1권 <현실과 이상> 천재와 범부 (134P) 종교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늘상 누구를 껴안아야 할지를 함축있게 보여주는 글
2권 <그리스도> 예수와 성인 (35P) 이른바 4대 성인과 예수와의 차별성 부각. 다른 무엇보다 기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설파
2권 <그리스도> 최대의 죄악 (48P) 기독교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왜 가장 큰 죄인지를 일상 생활에서의 예를 통해 비유적으로 제시
2권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 (12P) 종교와 생활과의 조화가 어떤 것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줌
2권 <하나님> 지질학상으로 본 하나님의 창조 (25P) 巫俗的 기독교가 아닌 合理的 기독교를 원하는 김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 창조 과정을 지질학적 성과와 연관시켜 해석. 과학적, 합리적 기반을 잃지 않으면서도 경건한 신앙에 몰두할 수 있음을 보여줌
2권 <신앙> 이성 존중 (110P) 巫俗的 기독교가 아닌 合理的 기독교를 원하는 김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
2권 <신앙> 보는 눈, 듣는 귀 (112P) 일종의 기독교 호교론. 대단히 설득력 있음
◐ <교회 비판>
1권 <위대한 사람들> 벤저민 프랭클린의 교회관 (276P) 가치가 전도된 교회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글
1권 <위대한 사람들> 대통령 링컨의 신앙 (279P) 가치가 전도된 교회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글
2권 <기독교> 나의 예수교 (82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은근히 통타
2권 <기독교> <성서조선>이 전하는 복음 (93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은근히 통타
2권 <기독교> 금후의 조선 기독교 (95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은근히 통타
2권 <신앙> 베드로輩의 신앙 (113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은근히 통타
2권 <교회> 교회가 거룩하냐 (219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통타
2권 <교회> 가교회 (221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통타
2권 <교회>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 (222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통타
2권 <교회> 교회와 진흥회 (228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통타
2권 <교회>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 (239P) 가치가 전도된 교회의 제반 행위를 통타
◐ <무교회주의>
1권 <위대한 사람들> 내가 본 우치무라 선생 (269P) 초창기 무교회주의 집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글
1권 <위대한 사람들> 우치무라 선생 (271P) 초창기 무교회주의 집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글
2권 <기독교> 나의 기독교 (80P) 무교회주의란 무엇인지를 설파
2권 <기독교> 나환자의 음신을 받고 (100P) 당대에 무교회주의가 얼마나 핍박받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기독교도> 우리는 한 평신도다 (188P) 무교회주의란 무엇인지를 설파
2권 <교회> 쫓겨난 때의 감상 (232P) 당대에 무교회주의가 얼마나 핍박받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글
2권 <교회> 부흥회의 감상 (235P) 기존 기독교와 무교회주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극명히 엿볼 수 있는 글
2권 <무교회> 나의 무교회 (246P) 무교회주의란 무엇인지를 설명
2권 <무교회> 대립 항쟁의 대상 (253P) 무교회주의란 무엇인지를 설명
2권 <무교회> 두 사람의 증언 (261P) 무교회주의자들이 가진 기본적 태도나 품성을 잘 보여주는 글
2권 <무교회> 우치무라 간조 論에 답하여 (271P) 무교회주의를 창도한 우치무라 간조를 해명한 글
참고자료 2 : 류영모 관련 일기 및 서간 내역
참고 : 류영모의 이름은 고딕으로 별도 표기했음
1931년
6월 21일(일) 산상수훈 제30회로 7장 1-5절을 공부. 류영모 선생이 내참하여 금일 공부에 대하여 선생의 독특한 해석을 첨가하사 우리에게 계발을 더 하심이 심대하였다. 동양 사람이 가장 심원하게 기독교를 이해하리라는 추측은 필경 적중할 듯하다. 폐회 후에 능곡 임간을 산책하면서 유선생, 김산형과 함께 밤 9시여까지 담론하다. 마태 6장 19절 이하를 현실 생활에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 1933년
4월 18일 나의 출생후 11,689일 되는 날이다. 단 류영모 선생께 수고를 끼쳐 계산하다.
4월 23일(일) 오후에 에스겔서 제2회를 강하고 밤에는 종로 청년회관에서 있은 류영모 선생의 요한복음 제17장 강해를 들었다.
12월 29일 내일부터의 동기성서강습회를 위해 남해서 황형과 오산의 함형이 내사하다. 작년에는 정초 활인동에서 3박 5일 동안 소수회원으로, 함석헌씨의 사도행전 연구, 양인성씨의 성서동물학, 김교신의 성서지리학, 류영모 선생의 노자사상, 김종흡씨의 중세철학과 신앙, 유석동씨의 영어사, 송두용씨의 농사 2년 등으로 진지한 연구와 발표가 있었는데, 금년은 오류동에서 내일부터 6박 8일간의 제2회 동기 성서집회를 갖게 된다. 금년 시간표는 김교신의 복음서 연구, 양석동씨의 예언서 연구, 이덕봉씨 성서식물학, 양능점씨의 구약성서의 사적 가치, 함석헌씨의 조선역사, 송두용씨의 기도회 등이다.
12월 31일(일) 청 오전 10시부터 일요 예배집회, 유석동씨는 로마서 9장 1-5절에 의하여 대다수가 문제 아니요, 소수로써 전체를 구원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힘있게 주장하다. 금일의 교육문제, 전도문제 등의 실패는 군중을 상대로 하는 폐해에 기인한다함은 지언. 뒤를 이어 여는 공관복음 대관이란 제로써 복음서연구의 총괄을 술하다. 아무리 처음 성서 읽는 이라도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가 서로 유사 공통함에 비하여 요한복음이 특이함을 깨닫는 바니 이것이 전자 3책을 공관복음이라 하여 총괄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까닭이며 공관복음서를 통독하면 예수의 전생애를 1, 출생 및 유년기 2, 준비시대 3, 전도시대(전기, 후기) 4, 십자가의 도 5, 수난 및 부활승천의 5기로 나눠 볼 수 있고 그 각기를 상고하여 본 결과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애가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냉철한 학구를 지원하건만 결론이 이에 이를 때에는 열하지 않을 수 없어 모임은 자연히 기도회로써 마치다. 오후 2시부터 좌담회, 혹은 신앙의 기미에 촉한 질의, 혹은 실제생활에 관한 포부 등을 담론하는 중에 좌기 서적을 종람. 1, 이정섭씨역 산하신의 선생의 강연집(46판 45면). 이 책 권두에 「나의 경앙하는 산하신의 선생의 강연을 역간하여 삼가 친지제현께 드리나이다」하였고, 또 「선생의 일언일문이 모두 오의의 발언이요 신앙의 유로 아님이 없건마는 다만 졸역이 능히 그 의를 달하지 못한가 하나이다」하여 그 책자의 내용이 세상 간행물과 다른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발행자로부터 류영모 선생께 진정한 것을 유선생이 다시 성조사로 보내 주어서 회람한 후에 다시 이선생께 청하여 40부를 얻어 기자가 관계하는 학교 생도중 지원자 5백여명에게 윤독하게 하다. 단 본래 비매품인데 지금은 품절되었다고. 2, 시내원충웅씨의 「통신」(실비 일부 3전, 우표대용 가). 사신을 인쇄한 형식으로 된 것이다. 비상시 일본의 기독신자의 입장을 볼 수 있음이 특색. 시내원씨는 현동경제대 교수. 3, 총본호이씨저 『예수전대관표』정가 20전, 예수의 일생을 대관도표로 표시한 것이다. 저자 총본 선생은 무교회주의의 급선봉이라 하여 교회의 사갈시하는 이나 이 책만은 교회의 내외를 불론하고 다독한다고 한다. 4, 일본지리풍속대계(신광사판)의 조선편 상하권. 5, 대영백과사전의 조선 항목. 6, 임태보씨저 『조선통사』. 오후 7시부터 함석헌씨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제1강. 역사이해, 사관과 성서적 사관, 세계사의 윤곽 등 제항에 하여 만3시간의 연속강연이었으나, 강자 청자가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백성에게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 날에 「전인미답」의 경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 자 2백인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을 첨서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에 명기할 뿐이었다.
◐ 1934년
1월 1일(월) 청 도시에서는 신년 기분에 취흥할 때에 우리는 연말 연시에 시달림이 없이 성서를 공부할 수 있음이 연두에 감사였다. 오전 10시반부터 복음서 연구, 예수의 생애의 제1기인 출생 및 유년기를 공부함이니, 때도 때인 만치 신년을 맞이함에 더할 데 없는 공과였다. 다음에 유석동씨의 아모스연구에서 종적 관계와 횡적 관계의 중대 법칙을 배우고, 사회자의 제언으로 일좌는 예정치 않았던 신년 기도회로써 오전 집회를 마치다. 오후 2시부터 류영모 선생을 중심으로 한, 좌담회가 시작되어 치밀한 사색의 세계로 이끌리면서 질의와 논변이 왕성하였다. 유선생은 항상 사람보다 앞서는 사상의 전개로써 일좌를 지배하실 뿐 외라 좌를 떠난 후에도 오래 생각할 과제를 듣는 자에게 남겨 주고야 만다. 오후 7시부터 조선역사의 제2강으로 단군사에서 신라통일까지의 대강을 듣다. 고구려의 말년이 마치 장년의 졸도와 같은 비장한 전사였다는 장면에 이르러는 졸부라도 주먹에 땀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학교부터 20년 가까운 교육을 받았어도 한 시간의 조선사를 배울 수 없었던 신세를 한하여 왔으나, 이제 조선 제일의 조선사 따라서 세계 제일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는 기연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하다. 조선을 이렇게 보는 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겠는 까닭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을 바르게 볼 줄 아는 역사가가 났을 리가 만무하며, 기독교의 빛이 비추인 후에 아직 기독교적 역사가의 출현을 듣지 못하였었다. 빛이 반도를 비춘 지 반세기에 비로서 반도의 진상을 드러냈도다. 반만년 감추였던 오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관계없이, 그 빛에 비추임 없이 아무리 단군 천년사에 정통할지라도 그것은 흥분이 아니면 장난이다. 역사는 지울 수 없다. 허무한 것을 만들어 가지고 한 민족, 한 국가가 왕성한 예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진은 아니다. 「참」이 아닌 역사에 취한 백성은 깨는 날에 그 멸망이 심하다. 범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역사에 관하여는 성서적 입장에 서지 못한 역사는 그 대소를 물론하고 만주 광야에 기복하지 마적단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더욱 느껴진다. 사론은 어찌했든지 성서에 비추어 볼 때에 반도의 반만년사라는 것이 전세계와 또 전우주적 상관에 있어서 이렇게도 의의가 있구나, 이렇게도 줄기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밝히 깨닫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1월 4일(목) 청 예정의 일부를 변경하여 양능점씨의 「구약성서의 역사적 가치」라는 강화를 오전에 듣기로 하다. 양선생은 수년전까지 동경 입교대학에서 고대사 강좌를 맡아 강의하셨던 분이다. 우리의 모임에 유일한 순학자적 강의였다. 신병으로 인하여 고향에서 수년간 정양하다가 이제 완전히 회복하여 야인같은 건강으로써 다시 학계에 출마하려는 신춘에 특히 이번 집회를 위하여 출강한 것이다. 이 방면 연구에 관하여는 만일 조선에 유일이 아니라면 확실히 제일인자인 양선생의 강연에 참열할 수 있었음은 신년의 일대 상운이 아닐 수 없다. 강화의 요지를 적기하면 좌와 같다. 구약성서의 역사적 가치. 구약성서에는 좌의 3종이 있음. 1, 마소레본 2, 70인역 3, 사마리본. 1, 마소레라 함은 방주 혹은 부주라는 뜻인데, 히브리 본문에 해석법까지 첨부한 것이다. 마치 동양의 경서에 주자 기타 석학자의 주해까지 붙어 있는 모양으로 된 것이다. 이 책은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로 필요에 응하여 일정하게 편찬한 것이다. 처음 인쇄하기는 1477년에 시편만 되고, 1482년에 모세5서가 되고, 1488년에는 전성서가 왼쇄되었다가 1524년-5년에 Jacob ben Chayim이라는 이가 베니스에서 발간한 것으로서 가장 권위 있는 결정적 성서가 되어 루터 이후로 기독교회에서 쓰게 된 것이다. 우리가 쓰는 것도 이것을 번역한 것이다. 2, 70인역이라 함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다 비치하기 위하여 유대에서 학자 72인을 파견하여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하였다 하여 그렇게 명칭한 것이라고 전래하나, 실상인즉 팔레스틴 지방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할 때에 애급에도 수백만 인구가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 자손들이 차츰 모국어인 히브리말을 해득치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 제2세 이하의 자손들이 읽기 위하여 기원전 2세기경에 희랍문으로 번역한 것이라 한다. 이처럼 기원전부터 번역된 것이요, 그 내용도 마소레본과 대동소이한 것이므로 70인역도 매우 권위가 있다. 오늘날까지 로마 천주교에서는 70인역을 쓴다. 3, 사마리본은 모세5경만으로 된 것인데, 나블루 지방에 있는 미개인 부락에서 본래의 원형대로 오늘날까지 보관하여 온 것이라 하여 일부분은 유력한 참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재료로 보아도 구약성서가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된다. 지금 유대민족 역사의 재료가 되는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성서 - 기원전 900-200년간에 기록된 서적인데, 본래 역사서로 쓴 것이 아니요, 신앙서로 쓴 것이므로 작자나 연대 등에 차오는 있으나, 독법여하로는 역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참고가 된다. 2, 외전(위전 또는 비전이라고도 칭함) - 기원전 200-기원후 100년간에 된 것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없는 글이 70인역에만 있는 것이 14편이 있다. 기원후 제4세기에 제로움(Jerome)이 이 14편을 구약성서에서 분리하여 외전(Apocrypha)이라는 명칭까지 주조하였고, 후에 루터의 개혁시에 와서 성서원문에 권위를 두는 경향이 생길 때에 확연히 외전을 분리하였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기원전 2세기 이전에 되었고, 신약성서는 대개 기원 제1세기 말엽 이후에 기록된 것이어서 정경에는 그 중간 3백년간 기사의 연결이 없는데, 외전으로 인하여 그 결함을 보충할 수 있으므로, 역사적인 참고로서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그러므로 외전을 일명 중간문학이라고도 한다. 3, Flavius Josephus - 기원 38년에 예루살렘에서 출생, 바리새 교인이요, 보수파에 속하였다. 14세 때에 벌써 학자로 소문이 났고 20세에 사마리아 총독이 되고 끝내는 로마제국의 중신까지 되었던 인물이다. 이러한 실제가로서 양으로 구신약성서보다 더 많은 저서를 남겼으므로 당시 열강의 실정을 알기에는 무이의 참고재료가 된다. 4, 신약전서 - 기독교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 5, 유태교전 Talmud - 1180년에 Maimonides가 편찬한 율법의 해석서이다. 그 내용이 다시 Mishna, Gemara의 2부분으로 되었는데, 전자는 율법을 해석한 것이요, 후자는 해석을 다시 해석한 것이다(이 점도 동해의 경서와 유사하다). 구약, 신약전서보다도 후에 된 것이지만, 현대를 앎으로써 고대를 추측하는 데 재료가 된다. 6, 김석문(비문등속) - 다른 나라에서는 비문 같은 것이 사료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으나 유대는 특이하여 모압왕비 하나가 존잔할 뿐이다. 7, 바빌론 서류 - 히브리인은 아라비아, 이락 등지의 종족과 함께 셈민족이므로 바빌론 문명은 히브리 문명의 모체가 된다. 최근 백성 이래로 고분발굴에 의하여 많은 재료가 나온다. 8, Gressmann; Altorientische Texte und Bilder zum A. T. - 구약성서 연구에 필요한 것을 일속한 것. 2권으로 된 것임. 9, Rogers; Biblical Parallels of Babilonia and Assyria - 전자보다는 간략한 것이다. 시가 약15원. 이상으로써 유대역사 연구의 지침될 만한 몇 가지 참고서를 열거하였거니와, 이제 끝으로 사관의 변천과 유대사와의 관계를 잠술하고자 한다. 재래로는 역사라 하면 민족사로써 만족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전세계를 일단으로 본 역사가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전 역사에는 약소민족인 유대사가 고대사 중에 무시당했으나 오늘날 세계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유대사는 라마사 이상의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1, 교통상 요지이므로 국제관계를 앎에 요긴함. 2, 현대열강의 종교인 기독교를 앎에는 구약성서를 알아야 되는 것. 3, 유대사를 알아야 세계사를 알게 된다. 신학 연구에는 독일이 최고, 그 신학자는 대부분 유대인. 4, 현재 고대민족은 유대인뿐이다. 바빌론, 애급, 로마민족은 벌써 멸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써 유대역사의 연구는 세계사를 연구하는 데도 매우 필요한 것을 알 수 있거니와, 그 유대사를 연구하는 데는 어떤 참고서보다도 구약성서가 가장 권위 있는 재료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라고 최후에 어조를 높여 결론하였다.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약30분간 유석동씨의 에스겔서 본문 비평이 있고 오후 2시부터 일주간 우리 집회를 위하여 은연한 중에서 수고만 하시는 부인들을 위하여 특히 가정예배가 있어, 함석헌씨로부터 에베소 5장 15-동 6장 20절에 의하여 눈물겨운 설교가 있었으나, 이는 들은 사람만이 영구히 가슴에 새겨 다시 기억할 것이었다. 예배 후에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건양사 정세권씨의 감자재배와 양식문제 해결책에 관한 소개가 있었다. 우리의 태도를 선찰하시면서도 누누이 시끄러워할 이만큼 기회 있는 대로 빵문제를 제안하시는 그 신념과 성의와 근기에는 경복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연하여 명철하고 치밀한 사상으로써 많은 교훈을 주시다. 동일 오후 7시부터 회원 일동의 감화회가 열리니, 밤 11시반에 사회자가 중단을 선언하기까지 연속부절하는 간담은 도저히 기록할 수 없다. 조선역사 및 기타 강연록을 출판할 것, 성조지에 독자란 설치 등의 공통한 희망이 있은 외에,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이로 참가하였던 형제 한 분이 전야의 꿈에 대학 졸업을 하여 보이더라는 실화가 일좌를 폭소하게 하였다. 이는 사실 우리 집회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학 졸업 정도 이상이라는 조건을 붙인 것은 필요가 있었다. 단지 설교뿐이라면 무학한 이와 소년들에게까지라도 알 수 있도록 말씀할 것이며, 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구 도중에 있는 우리 집회는 가르치는 방면외에 나아가 배우려는 방면을 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준을 저하하지 못하고 소수라도 이 수준에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명년도 예정에는 양자물리학의 강화를 들으려고 우리는 지금부터 물리교과서를 복습해야 할 형편이다. 이 방침은 당분가 불변할 것이다.
◐ 1935년
2월 3일(일) 작야 당직으로 양정학교에서 유숙하고 깨니, 오늘이 곧 음력 섣달 그믐날이요, 또한 나의 제12,345일이다. 창외 봉래구상에 백설이 수촌 대지를 덮었으니 은총의 유족하였음을 지시하심인가? 십자가 속죄의 순결을 새롭게 기억하라고 하심인가? 평범하다면 나날이 모두 평범한 것이요, 기이하다면 일생 중의 12,345일이 다 기이하고 그 전날과 그 다음 날이 또한 공전절후의 신기가 아닌 것이 아니다. 봉래정 가로에 나서니 눈에 미끄러져 물지게를 쏟아붓고 회한하는 장정, 떡목판을 언덕 아래 내리뜨리고 부끄러워 적면하는 소녀 등등 송구하는 희비극. 예와 같이 무레사네. 서대문외로 약10킬로 걷고 동행한 생도들게 자작 호떡을 분배하여 제12,345일을 자축하다. 금일의 감상이 권두의 것과 (주, 「성서조선」74호 참조) 같거니와 그 사상에 관하여는 경성 류영모 선생과 동경 구천차랑 박사에게서 시사받은 바 적지 않았음을 감출 수 없다. 그리고 고귀한 사상을 품고도 용이히 말도 집필도 하지 않는 이들은 실상인 즉 물질적 수전노보다 더 심한 어른들이라는 원망이 가슴에 사무치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 1936년
5월 27일(수) 청 공덕리와 정릉리와 학교에 왕래빈번하게 되므로 금일에 자전거 1대 구입하다. 단 봉래정 일정목 송본자전차포 주인 박창성씨는 류영모 선생이 절대로 지지하시는 터이라, 전적 신뢰로써 매매할 수 있음은 유쾌한 일이다. 이러한 신뢰할 수 있는 직인이 서울 장안에 10인만 있었어도!
9월 1일(화) 청야우 12921일. 우리 집 가장 어린이의 제1천일. 「어머니 날 보고 꾸지람 마오. 옷고름 뗀 것이 그리 죄 되오. 이래 뵈도 골목에서 힘이 세다고 골목대장 골목대장하고 불러 줍니다」라는 노래를 우렁차게 불러서 정릉 골목에 기쁨이 넘치다. 등교하여 신학기 시업식. 담임반 생도 54인이 일제히 건안으로 출석. 반가운 정을 난제. 약1시간은 생도들 편의 휴가중 감상을 듣고 약2시간은 그에 대한 비판과 나의 감상과 신학기의 기도 등을 피로. 「시작이 절반이라」고 개학 첫날에 전반의 출석을 강제하여, 혼신의 정력으로써 전학기의 학업 대강을 기도하는 것이 나에게 허여된 교육노작의 유일의 천지다. 출결만 조사하고 싱겁게 귀가시킴으로 결석생도가 많은 시업식날에, 그 학기 훈육의 반을 실시하고자 함이 은근한 기대요, 천하의 교육사업을 논할 것 없이, 전교의 6백명 생도를 걱정할 것 없이 다만 담임반 50여명만을 관심하고자 함이 좁은 길을 걷는 교사의 그윽한 기원. 오전 일을 마친 때는 벌써 심신의 피로 적지 않다. 정오부터 선광인쇄소에 나가 9월호 발송. 마침 이 때에 영남에서 공무를 띠고 입경중인 무주식회사 지배인이 격망중의 촌시를 할애하고 약1시간의 발송 사무를 내조하니 위려됨이 불소. 공무의 시간을 도둑하여 내방한 것이라고 들을 때에, 나의 얼굴도 화끈하였다. 시간 도둑질은 피차 일반인 까닭. 귀가후 보토현을 넘어 구기리에 류영모 선생 참방. 연일 보도되는 남선수재의 「수자」가 우리에게 절실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통한과 완전저작 및 자연요법의 효험 등 유익한 말씀을 들으면서 잡곡소채 주의의 만찬에 참탁하여 조밥의 맛이 우리의 옥수수밥 맛보다 못하지 않은 것을 배우고 총총히 귀로. 달밤에 북한산록 계곡을 거슬러 보토현에 오르니 추천에 가득 찬 달빛, 별빛과 묵묵히 솟은 북한의 숭엄, 가을벌레의 교향악에 잠든 계곡의 신비, 첨전이 높이 솟은 교회당을 소유함이 없고 「파이프 오르간」의 아락을 못 가진 무교회자에게는 이런 데가 가장 엄숙한 예배당이다. 끓어 엎디어 기도를 아뢰고 우주를 진동하는 대지의 교향곡에 맞추어 방약무인의 태로 찬송가를 외치면서 하산. 동내 야학교설립에 관한 회담에 잠시 참석. 매우 흥미 있는 하루 살림이었다.
◐ 1937년
1월 2일(토) 晴 새벽 기온은 좀 내렸으나 낮은 여전히 온화. 오전에는 요한복음의 서문인 제1장 1-18절을 소개하고, 오후에는 함선생의 교육강화. 금일 오후에 류영모(柳永模) 선생이 내참하여 밤 늦도록 담론(談論)이 불식(不息).
1월 3일(일) 晴 금일은 교육강화를 쉬고 오전에 함형의 출애급기 제2장에 관한 ‘나라’의 감화(感話)에 일동 감개를 깊게 하고 오후에는 요한복음 공부를 필한 후에, 류영모 선생의 독특한 요한복음관을 듣고 일동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유선생은 특이한 해석을 갖고 계시나 남의 신앙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자기 성서관을 용이히 공표하시지 않는 터인데, 수년 동안의 간청에 의하여 금일 요한복음 제3장 16절을 설명하시니 처음 듣는 이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월 14일(목) 昨夜降雪後晴 아침에 뜰과 통로의 제설역사(除雪役事). 류영모 선생의 전화로써 선생이 어제 오후 6시에 영면하셨음을 알고, 한번 더 뵈올 기회를 놓친 일을 후회하나 막급. 귀로에 종로 청년회관에 들러 보았으나 시체는 아직 청량리 안식교 병원에서 옮겨 모시지 못하였다고.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 기독교회의 원로이신 선생이 떠나시니 조선 기독교의 일각이 무너진 감을 난제. 석양에 모씨를 만나니 자기가 유씨와 절교하게 된 연유를 세세히 설명할뿐더러 남더러도 절교하라고 열렬히 권하여 마지않았다. 대체로 무슨 까닭인지 알 길이 없다.
1월 15일(금) 晴 등교하여 4시간 수업을 마치고 오후 2시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리는 고(故) 김정식(金貞植) 선생 고별식에 지각하여 참렬하다. 다시 영구차를 따라 홍제원 화장장까지 선생의 먼 길을 전송하고 류영모 선생, 송두용 형 동도(同途)*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신 고(故)선생 부인(夫人)께 금일의 고별식 이하 시말보고 겸 위로의 뜻으로 심방(尋訪)하고, 유선생의 주의로써 서천(西天)에 빛난 초순 달과 금성이 나란히 한 모양을 바라보면서 작별하다. 모 공립고등보통학교 교유인 형제로부터 지급(至急) 친전(親展) 서신을 받고 그 의외의 일에 놀라다. “...제(弟)* 폐문(肺門)임파선염(線炎)으로 향후 1월여 정양위요(靜養爲要)*오니 초조와 우울의 생활을 보내오며, 신앙의 미흡으로 마음의 안정을 잃음 괴란불이(愧赧不已)*외다. 일전 하송(下送)하신 성조지 감격으로써 읽었습니다. 계속하여 보내 주시압. 그리고 선생께 산더싱 씨의 자서전이 있거든 혜대(惠貸)*하여 주시압. 이 외라도 선생께 신앙을 부흥시킴에 적당한 책이 있거든 2, 3 하송하시와 신앙과 병과 싸우고 있는 제(弟)를 인도하시압. 지금 제의 심리는 선생이 보내시는 책이면 무엇이고 탐독할 경지외다. 김YC 씨에게도 제의 번뇌를 전해 주시고 제의 신앙을 굳게 하여 달라고 해 주소서. YC 씨는 제의 입신(入信) 초기의 선배외다. 1월 14일 ○○”이라고 하였다. 읽고 동정불금. 우선 제85호를 보내면서 ‘병상에서의 소식’을 읽고 위로 받기를 권하고 연하여 서적 공급할 교안(敎案)을 생각하다. 85호가 있었으므로 병상의 형제를 대하기에 아무 군색한 것이 없는 듯하더니 이젠 그 85호도 몇 책 안 남아 수중이 빈 것 같다.
2월 15일(월) 晴寒冷 작금 기온심강(氣溫甚降). 송형을 보내고 등교. 류영모 선생이 과차(過次)에 내교. 김정식 선생의 신앙생애를 집필하실 것을 상의하시다가, 고(故) 남강 선생의 전기가 아직 출현치 않는 일을 통탄. 금석(今夕)에 달과 금성이 서남천에 접근한 것을 바라보니, 고(故) 김정식 선생의 장례식날 저녁에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같은 현상을 지호(指呼)*한 지가 벌써 일삭(一朔)된 것을 깨닫다.
4월 15일(목) 晴 신열은 거의 평상대로 내렸으나 피로는 회복 못되다. 잠시 등교하였다가 귀가 와상. 그러나 원고 걱정으로 누워도 불안하여 기상(起床) 대안(對案). 때에 류영모 선생이 원고 뭉치를 갖고 내방. 고(故) 김정식 선생의 귀중한 기록이었다. 선생은 최소한도의 시간으로 원고에 관한 설명만 해 주시고 퇴거하시니 전혀 나의 시간을 아껴 주심이다. 우리는 천체가 각자의 궤도로 운행하듯이 서로 멀리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 살림이다. 밤 12시까지 집필.
◐ 1938년
10월 19일(수) 晴 금조에 신랑신부를 보내다. 송형이 후행(後行)으로 혁(赫)과 정손이를 데리고 반행(伴行). 혹(或)이 묻되 떠나보낸 오늘을 당해 그래도 심중이 다소 다를 테지요? 답왈, 조금도 섭섭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합니다라고. 생각건대 이번 결혼은 하나는 육(肉)으로 낳은 딸, 하나는 영(靈)으로 낳은 아들 그 어느 하나가 타인이라는 감이 없을 뿐더러 영으로 낳은 자일수록 더욱 신뢰할 수 있으므로 나에게 불안이 있을리 만무하다. 함형이 백운대 등산으로부터 류영모 선생과 함께 내댁하고 송형은 후행으로부터 돌아와 모두 함께 유숙. 결혼식에 참렬하였던 이로부터 “오늘 새벽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강산, 이 백성 중에서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키셔서 이 땅 위에서도 진리만의 말씀이 들려지고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들을 일으키시던 생명운동에 진충(盡忠)하시는 분들의 존재를 생각하올 때 글로 말로 발표할 수 없는 감격함이 중심에 사무친 까닭이었습니다. 작일의 결혼식은 후에 있을는지 몰라도 일찍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과연 미증유(未曾有)*의 식(式)이었음은 저 1인의 생각만이 아닌 줄 압니다. 하나님의 임재(臨在)하심을 절실히 인식할 수 있는 거룩하고 경건한 식장에 함선생님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구절절이 거짓된 인간의 골수를 쪼개는 날선 검이요, 생명이 고갈한 심령에 넘쳐 흐르는 진리의 생수였습니다. 불신자(不信者)에게는 전도회, 신자에게는 부흥회, 신랑 신부에게는 결혼식 모두 합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주님의 은총을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영으로만 사모하고 사랑하던 형제자매들이 육으로 한 자리에서 같이 즐길 수 있었음이 참으로 반가왔으며, 진지한 태도로 진리를 탐구하는 자매들이 여러분 계심을 볼 때 암흑한 세상에도 희망의 빛이 비치는 것 같사오며, 새 힘과 용기를 배나 얻는 것 같습니다. (중략) 제 생각에는 선생님들은 이 강산에 특별히 보내신 진리의 사도로서 김선생님은 서적으로 함선생님은 언론으로 불의와 죄악을 공격하고 천국복음을 증거하여 의와 진리의 씨를 조선의 방방곡곡에 널리 뿌려 주심이 주님의 뜻인 줄 믿고 그대로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10월 21일(금) 晴 여의 자전차 번호가 ‘이치(理致)에서 배우세’(27853)라는 뜻인 것을 금일 처음 알다. 이것은 류영모 선생의 발안(發案). 연(連)하여 일야(日夜)에 선(亘)하던 이야기 회의도 금조(今朝)로써 해산 작별. 단 함형은 내(來)주일까지 체경(滯京)하고 명륜정에 유숙케 되다. 동내의 학원 교사건으로 시내의 모씨와 면담했으나 상금(尙今) 미정(未定).
11월 30일(수) 晴 지난 밤 설화(雪花)에 북한산 화장(化粧)의 정채(精彩)*, 색의 묘(妙)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 오후에 북한학원 직원을 안내하기 위하여 시외(市外) 김주항 씨 가정을 심방하다. 언제나 감격할 것이 많고 배울 것이 많다. 오늘은 양돈(養豚)에 관한 것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귀도 시내 모처에 석반의 초청을 받고 명륜정에서 12월호를 기도로써 발송하고 밤중에 귀산하니 여하한 영남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 군의 소식에 의하면 선생님 덕택으로 군이 류영모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취직은 못하였지만 좋은 교훈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교훈 중 “공자님도 30에 입(立)하고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하셨다 하니 C군도 좀더 배워라. ...30세쯤 되거든 다시 나를 찾아와서 의논해 보자”고 하신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나이로나 사상, 신앙, 모든 방면으로 부족한 소생이 세상이 어떠하며, 인생이 어떠하니 슬프다, 어떻다 한 것이 잠꼬대에 불과함을 배웠습니다. 이후로는 공상을 적게 하고 실제 노동으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납니다. 이제는 달콤한 호강은 그만하고 출향(出鄕)을 하여 사회의 첫 계단부터 밟고자 하는 마음이 납니다. 거기는 눈물이 있을 것을 각오합니다. 운운 (하략)”.
◐ 1939년
6월 25일(일) 雨後曇 다행히 아침부터 우세점쇠(雨勢漸衰), 우산 든 채로 창의문외(彰義門外) 집회로 향하다. 우후(雨後)의 창의문외의 수석(水石)의 경개는 기괴할 뿐더러 또한 장엄하다. 단 작야래(來)의 출수(出水)에 월천(越川) 곤란한 개소(個所)가 있어 예정보다 늦게 오전 열한 시 반에 겨우 구기리 류영모 선생 댁에 회합. 지방에서 일부러 참석한 이도 여러 분이었다. 여의 사회, 예와 같이 암송이 있은 후 유선생은 제1만8천일의 소감을 만 두 시간 20분간 술(述)하시다. 생명을 빛으로써 해설하는 일 같은 것은 서양인의 주석책에서는 볼 수 없는 사색형일 것이다. 귀중한 체험의 보고에 공복도 잊었다가 오후 3시여에야 각자의 지참한 도시락과 주인댁 우유로써 오찬. 4시여에 폐회하다. 왕반 2차 인쇄소에 교정을 전하고 또 찾아 오다. 작일 행군의 영향도 있음인가 매우 피곤하다.
◐ <서간>
류달영군
일래 건강여하호 원문이.
조성빈군이 류영모 선생 농장에서 농사하게 되었는데, 과수 일반에 관한 좋은 참고서 있거든 소개하기 바라며, 최용신양의 역사하던 곳에 그 후임으로 간 이가 매우 기특한 심지로 일하고 있다는데 군혹선지호. 모르거든 어느 기회에 일차 면담함이 좋을 듯.
군의 폐첨이 약하다 운하므로 “병상의 친구” 재독이 여하호. 군처에 없으면 1책 보낼 터이니. 증정 4판 내착중.
1934년 4월 29일 김교신
류달영군
15일이 감리교신학교의 동기휴업일인 고로 이정찬군에게 70권을 배달하는 것을 선두로 하여 발송하도록 약속중. 좌기 제씨가 협동 찬조자인데, 그 분들에게는 내가 여기서 각각 진정하겠으므로 중복되지 않도록 하라. 단 조윤희양은 현재 개성에 가 있으니 군으로부터 진정하라. 20원. 박정수, 김봉국, 10원. 조윤희, 5원. 함석헌, 신근철, 김헌직, 3원. 박석현, 노평구, 2원. 손정균, 박윤동, 유선도, 1원 50전. 류영모, 이원전, 조성진, 1원 정태시. 민형래, 송훈, 조/임, 윤일심, 김중/, 문명록, 이종근, 최/희, 이/현, 조성지, 이성/, 김상/, 신형균, 이재화. 내가 진정할 것은 상기 제씨에게만 한하니 기외에 최씨 형자를 위시하여 루씨고여와 수언, 천곡 등지에 저작 재료 그 밖에 신세진 자리는 군이 분별하여 적당히 처리하라. 단 감리교신학 교장에게는 이정/군을 통하여 일부를 진정케 하고 추천서에 서명을 얻도록 부탁하였노라. 20부 한하여 저자가 무대로 쓸 수 있으나 소위 친구라는 이들에게 호의진정은 거의 도로일 뿐이니 될 수 있는 대로 대금 받고 주라. 내용을 정독하게 하는 데는 대금 받는 것이 유일의 방법이다. 출납부수를 잘 기장하여 둘 것은 물론.
◐ 1939년 12월 23일야 김교신
주, 일본이 제2차대전으로 점점 휘말려 들어갈 무렵 출판의 통제가 날로 심하여 지므로 서둘러서 최용신양의 생애를 류달영씨를 시켜 급속히 탈고케 하였다. 류달영씨는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양과 수원고농 재학시절에 농촌사업비를 거두어 도우면서 손을 잡고 일하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기의 출판비는 <<성조>>지 독자 유지들의 정성과 힘을 모아 협동하는 일을 기르기 위해서 처음으로 모금하였다. 그리하여 수입금은 다음의 출판을 계속해 갈 기금으로 쓸 계획이었었다. 이 전기는 전쟁전에 단시일에 4판을 거듭했고, <<성서조선>> 사건으로 필자와 독자들이 다수 전국적으로 구속되었을 때에 전기는 모두 압수되었고 출판이 금지되었었다. (편자)
남강 이승훈과 교유하다. 이 밖에 선생의 교유관계는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원로인 김정식의 남다른 촉망을 받았고, 또 남강의 동지로 일시 오산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동양학의 석학 류영모와는 지기로 수어의 사이였다. 또 우치무라의 사후, 그의 고제로서 일본 지성인의 존경을 한 몸에 모았던 2차대전후 동경대학 총장 야나이하라 다다오와는 각별한 신앙교우를 지속하였고, 전쟁중 비전론자로서 동대를 추방당한 후에 그는 내한하여 서울 정릉 선생댁에서 성서집회를 가진 일도 있었음. 춘원 이광수도 신앙문제로 한때 선생의 가르침을 청한 때도 있었고, 또 창조의 생활로 청년들에게 생활개척의 정신을 크게 불러일으켰던 김주항(金周恒)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 김교신 전집 발간위원회 자료실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