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에 관하여
명품을 볼 줄 모른다고 손에 들어온 명품을 마다할 사람 있을까. 아무 때고 러시아문학에 한 번 푹 빠져본 후에 러시아 문학기행에 나서리라 마음 먹었었는데 뜻밖에 여행의 인연이 찾아오니 마음이 달라진다.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3시간 쯤 달렸을까. 조그만 시골도시 툴라가 나온다. 도시의 외곽으로 빠지자 이내 자작나무 울창한 농장 앞에 차가 멈춰 선다. 야스나야 폴라냐의 톨스토이 농장이다. 사진으로 보았던 농장입구의 양쪽 기둥이 꽤 낯익은데도 갑자기 전설의 땅을 밟은 듯 천지가 낯설다. 문호 톨스토이와 나 사이의 아득히 먼 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호의 숱한 명작들이 태어난 옛 집의 계단에는 수 세기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대형 시계가 서있고, 자작나무들이 쭉쭉 뻗어 올라간 숲 속엔 그의 유택이 있었다. 안내가 없었다면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조차 알기 어려울만큼 애련하고 작았다. 관 크기의 직사각형 잔디 틀이 묘역의 전부였다. 서양식의 납작한 돌비석도 없었다. 망자를 기릴 수 있는 말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그의 나이 50세 전후 때 집필한 <참회록>에서 통렬하게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인생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의 혼란과 고뇌가 절정에 이른 때였다. 아내와 자녀 그리고 재산 건강 모든 것을 갖추고 집필에 몰두했지만 작품창작에 몰두하면 할수록 회의와 번민은 더 해 갔다.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할 만큼 그의 고뇌는 치열했다. 삶의 미망迷妄에서 깨어나는 순간 모두가 거짓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바탕이 깡그리 없어진 심연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에서도 자살을 결행하지 않은 것은 생각의 혼란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그의 신상이 더 이상 신을 향해있지 않은 것은 이미 열대여섯 살 때부터였다. '차라리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더 바르게 살고 있다'는 그의 불만이 말해주듯 당시의 러시아 정교회도 세월과 더불어 점점 초심을 잃어갈 때였나 보다. 이제 젊은 톨스토이에겐, 세상 속에서 명예롭고 중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욕망 하나뿐이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감추고 문학교사 노릇을 했다. 이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우고 허영심, 공명심, 오만한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저작의 목적인 명예와 돈을 위해서는 선을 감추고 악을 드러내야만 했다. 내 삶의 의미를 형성하고 있던 선에 대한 갈망을 은폐하려고 지혜를 짰다." 악을 선으로 위장하건, 선을 악으로 위장하건 거짓과 동기는 하나였다.
그 결과 막대한 돈과 박수갈채가 돌아왔지만 자신의 작품이 점점 혐오스러워졌다. 작가로서의 속임수가 지긋지긋해졌다. 마침내 그는 '문학은 사기'라고 절규한다.
'문학은 소망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한 어느 문인의 비탄 속에 톨스토이의 고뇌가 겹쳐 보인다. 인류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고뇌하며 집필하지만 따지고 보면 상황 속에 갇혀있는 자신의 '만들어진 생각'들을 적는 것이다. 한 생각이 밀려나면 또 다른 생각이 들어앉는다.
어떤 수도자는 수행조차도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고 잠깐 동안의 도취일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승의 윤회라고 했다. 예술도, 글쓰기도 작업하는 동안의 몰입에 그치는 것이라면 톨스토이의 고백대로 예술은 사기요 변덕쟁이임에 틀림없다.
"나의 변덕스런 생각을 인류의 법칙으로 만들어 낼 이론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톨스토이의 고백에, 자신의 글쓰기를 짚어보는 작가가 많이 있을 것 같다.
문학인생에 비애를 느낀 톨스토이가 자살의 폴리스 라인까지 간 것이 50대였다면 공자의 지천명의 나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이나 공자의 인간학이 다 같이 인간에 대한 탐구였을 텐데 어찌하여 공자는 70의 나이에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의 평화를 얻었고 톨스토이는 80이 넘은 고령에 가출을 감행할 만큼 방황하는 인생을 살았을까.
어떻게 쓸 것인가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몰두한 공자는 '옛것을 좋아해서 배우고 서술하되 새로운 것을 짓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삶을 살아서일까. 많이 쓰면 쓸수록 많이 괴로워했던 톨스토이보다, 쓰지 않은 공자가 더 좋은 몫에 인생의 터를 잡은 것 같다.
팔순이 넘은 원로 여류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내 삶은 허구였다'는 시구에서 눈이 멈췄다. 자신의 삶이 허구였다는 시어는 회한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만나는 개안이라고 믿어진다. 작가 중에는 자신의 창작동기를 톨스토이처럼 잔혹하게 해체하진 않는다 해도, 그리고 해체된 자신의 내면이 혐오스러워 삶을 끝내려고까지 마음먹지는 않더라도, 정신적 자살인 절필을 감행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듯 인간도 궁극적으로는 자연 아닌 것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라는 말은 맞다. 자연을 향하여 더듬어가는 여정에서 시시각각 뒤바뀌는 인식의 별자리를 톨스토이는 '변덕'이라고 표현한 것 아닐까.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이는 눈으로 바라보면 대상도 변하기 마련인 것을.
어떻게 써 보일 것인가에 매달렸던 자신의 시간들을 통회했던 톨스토이 노작가의 절박한 물음은 점점 어떻게 살 것인가로 옮겨가긴 했지만, 문필가로서의 톨스토이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존재론적 원형과 자신이 그려낸 문학적 자화상 사이에서 죽도록 피곤했을 것이다. 가출 열흘 만에 영원한 안식에 들고서야 그가 자책했던 '변덕의 윤회'에서 풀려난 것일까.
톨스토이 당시 정치적 지도자는 니콜라이 2세 황제였고, 도덕적 통치자는 톨스토이였다고 사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가 집필한 많은 명작들 때문이 아니다. 문학은 사기라는 자기해체로부터 시작된 참회의 삶이 있었기에 '톨스토이즘'이라는 새로운 인간학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작가가 '삶과 글의 괴리'라는 자기성찰에 몰두한다면, 문학은 구원이 아니고 저주일 수 있다. 문학의 원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뇌의 순례 길에서 생을 마감한 톨스토이의 죽음이 모든 작가를 대신해서 일어난 대속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신의 무덤에 돌조각 하나 허용하지 않은 문호의 소망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