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말로이
-말로이! 지금 저 피안(彼岸) 어느 매서 잠들고 있어.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
서 호 련
5월 2일 이었다. 밤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할로(HALLO) 하는 소리가 독일에서 온 전화다. 그러나 낯선 목소리였다. 그는 말로이 (Maleu) 아들, 프랭크 라고 했다. 나는 어제 밤에 그의 아버지 말로이 와 통화를 했기 때문에 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 했다. “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순간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밤에 통화를 한 말로이가 오늘 저세상에 가다니. 세상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나는 한참을 하염없이 독백을 하고 있었다.
말로이(Maleu). 그는 30년이 넘는 친구이다. 나의 생일 5월 1일이면 그는 어김없이 전화를 한다. 그날 밤에도 그는 독일에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에 중국에서 돌아와 잠시 집에서 쉬고 있다면서 이번 여름엔 부인과 아들내외 그리고 손녀를 데리고 한국에 가서 한달 동안 휴가를 보낼 계획 이라고 했다. 함께 만날 기쁨으로 내 마음은 이미 들떠 있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다음날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 곧 독일의 엘리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 애는 이미 말로이 부인에게서 전화를 받아 알고 있었다. 그 애도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말로이 내외를 알게 된 것은 30년이 넘었다. 5.18 되던 해 가을, 우리는 광주에서 남원으로 이사를 왔다. 그 후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분들이 나를 찾아 남원에 왔다. 말로이는 독일의 유명한 제철관계 엔지니어링(설계시공)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였는데 한국의 포항제철 설립 때부터 설계 시공에 참여하였고 광양에 제철공장이 세워지니 또 광양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독일에 본부를 두고 있는 같은 교회에 다녔다. 그가 독일 교회에 문의를 하였더니 광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가 남원이라고 하더란다. 그들 내외는 광양에서 곡성을 거쳐 무턱대고 남원까지 왔었다. 광한루 쪽에 차를 받쳐놓고 사람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물었는데 영어를 모르는 남원 사람들이 그 말뜻을 알 리가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란 우리의 가족(Our Family)이란 교회의 잡지책 한 권 뿐이었는데 그 표지에 교회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키면서 혹시 이런 표시를 한 교회를 보았는가 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의 십자가가 아니고 청색바탕 물결위에 태양이 떠오르고 그 한가운데 휜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좀 독특한 휘장(徽章 enblem)이라서 혹시라도 그러한 십자가를 본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그때 마침 한 학생이 그런 십자가를 본 적이 있다고 하여 그를 차에 태우고 내가 사는 곳 까지 왔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집사람과 함께 지리산 산간지역에 나가 있었고 집에는 9살 된 나의 큰딸 마리나 와 7살인 막내 엘리사 밖에 없어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그 한 달 뒤 그분들은 다시 남원을 찾았고 그 때서야 우리는 함께 만날 수가 있었다.
그분이 광양에서 일할 때 는 일요일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남원교회에 참석했다. 그분들은 올 때마다 사탕을 한 봉지씩 사가지고 와서 교회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떤 때는 좀 늦게 교회에 와서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끝나자마자 떠나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기계 시설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는 맨 뒷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켜놓고 예배를 드리다가 공장에서 전화가 오면 즉시 떠났다고 한다. 영어나 독일어만 하지 한국어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그였지만 조용히 경청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여간 존경스럽지 않았다. 그가 한 때 인도에서 근무할 때에는 그 무더운 날씨에 비포장 길을 6시간을 달려 우리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원의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우리는 같이 광한루도 갔었고 춘향이와 이도령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그 부부는 오작교 옆에서 춘향이와 이도령 옷을 걸쳐 입고 카메라 앞에서 어린애들처럼 좋아 하기도 했다. 그분들은 우리를 광양의 사택으로 초청했기 때문에 광주형제들과 함께 그곳에 다녀오기도 했다. 성탄절 때는 예외 없이 독일에서 초콜릿 등 과자를 한 보따리씩 소포로 보내면서 교회의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참으로 그들 내외는 우리에게 믿음의 본이었다. 지금도 말로이 부인은 5월 1일이 되면 나에게 전화를 한다.
막내가 7살 때 말로이를 집에서 처음 만났는데 세월은 빨라 그간 엘리사가 이대를 졸업하고 독일 수트트가르트 국립교육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분들은 낯 설은 외국에 와서 유학생활을 하는 엘리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주었고 엘리사가 몸이 아플 때 말로이는 그에게 손수 전화를 해 그의 건강에 대하여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사는 베를린 부근 조그마한 도시 도르스텐(Dorsten) 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수트트가르트에서 그곳 까지는 기차로 8시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에게는 노모님이 계셨고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당시 아들 내외는 베를린 법대를 같이 다녔고 지금은 둘 다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바로 그날 밤에 전화를 한 그 아들, 프랭크 이다.
할머니는 엘리사가 떠나는 날 손에 20마르크 독일 지폐 한 장을 쥐어주면서 가다가 콜라 사 먹으라고 하시더란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기가 입었던 것이라면서 두툼한 밍크코트를 싸 주시더란다. 물론 유행이 달라서 입지는 아니했지만 지금도 그 옷을 남원 집 옷장에 걸어놓고 우리는 할머니의 정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 년 뒤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 가셨다. 집에서 직장으로 온 전화를 받고 말로이가 급히 집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품속에서 잠든 듯이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그때도 우리 가족의 허전하고 허전한 마음은 금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무척이나 엘리사를 마치 손녀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말로이는 중국의 제철공장 일을 마치고 독일에 돌아와 모처럼 집에서 쉬면서 잔디를 깎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부인이 주치의에게 전화를 했고 의사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심장마비였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이는 나의 생일날 전화를 해주곤 그 다음날 허망하게 가버린 것이다. 나는 엘리사에게 나의 이름으로 아주 좋은 화한을 보내고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부탁했다. 이미 엘리사와 그의 남편은 그곳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남편은 장례식에 참석키 위해 직장에서 이틀간 휴가를 내기로 하고 밤새워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둘이는 도르스텐 엘 갔단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는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엘리사와 남편은 교대로 운전을 하면서 시속 180 km로 6시간을 달려 해 저문 시간에 간신히 꽃을 예약했던 화원에 도착했더니 막 문을 닫고 퇴근 하려는 참이었다고 한다.
부인이 ‘너는 호텔에서 자지 말고 내 집에 와서 자라’고 전화를 하여 그들은 함께 집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장례식장에 갔단다. 장례식장엔 수많은 지인, 교우, 회사원과 화환들로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한다. 수많은 화환들 가운데 “한국의 형제들‘ 이라는 리본이 달린, 유독 하얀 순백의 백합화 화환이 조명아래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근조의 경우에도 노랗고 빨간 원색의 꽃으로 만든다. 사자(死者)의 생애를 찬양하는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교회의 사제님은 조사(弔辭)를 하시면서 그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셨기에 지구의 반대편에서 이러한 화환을 보내왔는가. 라고 말 하셨단다.
엘리사 부부는 떨어지지 아니한 발걸음으로 돌아오면서 부인이 하신 말씀을 되새겼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어요. 만일 그가 중국에서 죽으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는 가족과 친지들의 품속에서 편히 가셨어요 ”
말로이, 그는 1944년생으로 나보다 4살 아래다. 체격은 건장했고 목소리는 나처럼 걸걸하고 무뚝뚝했다. 그러나 마음은 비단결 같았다.
평생에 한명의 진정한 친구를 가진 자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를 친구로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한 생애였다. 5월이 오면 말로이가 내 가슴에 밀려온다. 밀물 처럼 밀려오는 이 그리움.....,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데 오늘 어이 내 가슴은 이처럼 허전 할까? 춘향제와 바래봉 철쭉제를 겻들인 남원 5월의 향연을 잘 알고 있는 말로이가 저세상에서라도 얼마나 남원을 그리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는 특히 5월 초순에 핀 남원교회의 자산홍과 모란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내외는 지리산청정지역에서 나온다는 흙 돼지 구이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말로이! 지금 저 피안(彼岸) 어느 매서 잠자고 있어? 아니면 영계에 갇혀 있는 이름 모를 어느 심령들을 방문하고 있는 것인지? 여하튼,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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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 박환덕교수 ( 한국 헬만 헷세 학회장 .남원춘향제전위원장))의 멘트입니다. 박교수님이 위의 조사를독일어로 번역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서주교님
오늘 두번째 다시 주교님의 추도사를 읽습니다. 멀로이씨가 한해만 더 사셨어도 머로이씨를 아는 친지분들에게 이처럼 가슴아프게 하지 않고 남원과의 인연도 보다 깊게 쌓을 수 있었을터인데. 인간에게는 언제나 여유를 베풀지 않는 일이 너무 자주 있습니다. 지나고 나서 깨닫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85세까지 살면서, 자기는 큰 행운을 타고났다고 행복해 했습니다. 자신의 동료나 동업자들은 대부분 4, 50대에 이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어굴하냐는 것이지요. 자기는 이렇게 오랜동안 여러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으니 큰 행운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년에 의미있는 글을 많이 남겼읍니다. 머로이씨가 1년만 더 사셨어도, 저와의 대면도 있을번 하지 않았습니까? 서주교님의 좋은 우정을 다시 한번 살피면서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내내 강녕하십시요!
2015년 5월 1일
박 환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