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26)
2.이스라엘: 처음 방문한 이스라엘의 도시는 에일랏이라는 항구도시였다. 이집트에서 먹던 음식에 비해서 선진국인 이스라엘의 호텔식사는 한결 수준이 높았다. 아름다운 홍해바다가 펼쳐지는 에일랏의 해변가에서 여행객 두 분과 대화를 나누며 나그네의 여수(旅愁)를 풀었다. 멀리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영토가 보였다.
엘리앗을 출발하여 맛사다요새를 관람했다. 맛사다는 AD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무너뜨릴 때 탈출한 엘리아살 벤야일을 지도자로 한 결사대들이 헤롯왕의 여름궁전인 맛사다에 농성하여 로마에 최후까지 저항한 곳이다. 그러나 AD73년 로마 10군단의 실바장군이 천혜의 자연적인 요새인 맛사다를 3년에 걸친 포위공격과 요새의 서쪽방향으로 6개월에 걸친 공성퇴(攻城槌)를 운반하기 위한 경사로를 축조한 끝에, 마침내 성벽을 부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로마군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진격을 해 올 전날 밤 유대인 지도자 엘리에젤 벤 야일은 결사대 960명 전원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내일 아침 로마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 밤에 우리가 스스로 자유스럽게 영광의 죽음을 택합시다.” 연설에 감동을 받은 그들은 각 가정의 가장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칼로 죽이고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남자들은 다시 열 명을 제비를 뽑았다. 제비로 뽑힌 열 명은 나머지 남자들을 죽이고 다시 한명을 제비로 정했다. 정해진 한명은 나머지 9명을 죽이고 자신은 칼에 엎드려 장렬하게 자결했다.
드디어 로마군이 요새의 마당으로 진입했을 때, 반란군들의 극렬한 저항을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주위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 마당 한가운데서 자결한 유대인들의 무수한 시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3년의 힘든 싸움 끝에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승전의 기쁨을 맛보려고 했던 로마군들은, 그것을 보고, 허탈을 넘어서 극도의 충격을 받았다. 맛사다는, 이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고난의 역사를 가진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이 유감없이 나타난 사건이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어떻게 그들의 죽음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졌을까? 유대전쟁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군대가 맛사다를 함락시켰을 때 동굴 속에 숨어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바로 그들이 맛사다의 집단 자결사건을 증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종군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이들의 증언을 그의 역사책 “유대전쟁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것이다.
유대인 격언에 “사람은 죽기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살기위해 죽는다.”란 글이 있다. 맛사다에서 죽음을 택한 이들은 유대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군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그들은 “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이 다시는 외적에 정복당할 수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는 곳이다.
맛사다를 떠나 우리는 구약의 필사본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동굴로 향했다. 20세기 성서고고학계의 최대사건인, 사해사본(死海寫本)이라고 불리는 구약이 필사된 양피지 두루마기가 발견된 경위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쿰란 근처에 사는 한 베두인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동굴이 보이자 돌을 던졌다. 그러자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을 못이긴 소년은 동굴로 기어들어가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했다. 베두인 소년은 이 책들을 베들레헴으로 가지고 가서 돈 몇 푼을 받고 아랍상인에게 넘겼다. 이것을 히브리 대학의 고고학과 수케닉 교수가 아랍 골동품 상인에게 운 좋게 연락을 받고 구입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 진 것이다.”라고 한다. 우연히 아랍인 골동품 상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수케닉은 초대형 월척을 낚았던 것이다.
이 사본을 쓴 쿰란공동체는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에세네파 사람들로서 기원전 1세기부터 사해근처의 광야, 쿰란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임박한 세상의 종말을 대망하며 살았던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그들은 생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절제되고 엄격한 신앙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신념을 강하게 가졌던 골수신앙집단이었다. 이러한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구약성경을 필사했던 것이다.
쿰란관광 매장에서 사해(死海)에서 생산되는 “아하바”라는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성경공부반 회원들이나 수고하는 아내에게 줄 선물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아하바 제품 중 영양크림과 마사지용 머드팩, 비누 등을 샀다. 이것을 받고 기뻐할 아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은 사해 관광이었다. 사해는 매일 평균 500만톤의 물을 요단강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해는 물이 들어오기만 하지, 나가는 곳은 없다. 그래서 사해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사해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사해의 물속에는 염분만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광물질들이 무궁무진하게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해 근처에 공장을 세워 물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희귀한 자원들을 추출해서 생산한다. 특히 농약, 페인트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브로마인은 전세계 소비량의 26%가 사해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사해의 자원을 연료로 하는 공장의 증가로 점점 사해면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였다.
사해는 몸을 치유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해의 물은 각종 피부병에 특효이다. 또한 사해 물은 관절염이나 류머티즘을 치유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병을 고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해의 자연치유력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마이클 잭슨은 잦은 성형으로 피부가 망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 손상된 피부를 의학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잭슨을, 어느 날 이스라엘 정부가 초청했다. ‘사해에서 일정한 기간, 이스라엘 정부가 마련한 프로그램에 따라 치료받는다면 회복할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이었다. ‘그리고 치료되지 않으면, 비용을 이스라엘 정부가 전액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정부의 제의를 잭슨은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사해의 진흙으로 머드팩을 하기 위하여 진흙 벌에 들어갔다. 진흙에 발이 깊이 빠지는 바람에 슬리퍼가 벗겨졌다. 바닥에 처박힌 슬리퍼를 찾아보았지만 진흙이 깊어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맨발로 수영이나 한번 해 보자고 물에 들어가 누웠더니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 신기하게 몸이 둥둥 뜨는 것이었다.
수영과 머드팩을 하고 난 후에 샤워 실에 몸을 씻으러 갔다.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오지 않아 수건 두 장을 가진 백인 관광객에게 수건 한 장을 잠시 빌려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문화의 차이인지 아니면 글로벌한 휴머니즘이 결여된 사람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다. 마침 옆에 같이 여행 온 장로님이 손수건을 빌려주어 여러 번 쥐어짜면서 겨우 몸을 닦았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