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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하기란|♣ 자천이해 현일 2009.12.26. 19:52
수련한다는 것은 인간을 초월하기 위해 방법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자신의 의지로 우뜩 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원해서 그 자리에 있나요
또, 자신이 누구이고 왜 거기에 있나요?
이런 질문에 해답을 찾고 있나요?
그렇다면 해답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수련은 그런 의문을 넘어 자신을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는 것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의문이나 고민을 넘어
나와 세상의 상호관계에서 그 바람직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 왔는지 왜 살아 왔는지 모르면서
떠밀리듯이 기계적으로 살아오던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방식을 새롭게 정립하고
자신의 의지로 일어서서 홀로 존귀함을 주장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상과 서원과 뜻을 세움으로써 존재의 보편적 당위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나의 존귀함과 훌륭함을 보이고 떳떳하고 당당한 자신의 뿌듯함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가는 것입니다.
이건 한순간도 내가 남이나 세상에게 헛되거나 불필요하거나 의미없는 것이 되지않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고 당연한 욕망의 발로입니다.
이것이 초월이고 초인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허무나 염세에 빠지는거 같습니다.
이것도 그 과정의 하나이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새로워지고 창조적이고 아름다움과 희망을 원해야 합니다.
물과 같아 사람도 고이고 멈추면 썩고 사라집니다.
끝까지 자신의 허무와 염세에 빠져나오지 못하는건 이기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번민만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모조건 남을 위해 살라고 하는 것도 편견이고 나만 바라보는 것도 치우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타적인거나 이기적인 것이 모두 해답은 아닙니다.
그 중을 찾는 것이 수도이고 그 방법적 절충과 기다림과 철저한 이해와 관심과 배려 겸손과 자긍심은
수도의 또 다른 이유가 됩니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몸을 만듭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초월적 신체를 가져야 합니다.
더 나은 생각을 한다면,,, 내가 초월되었다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
나를 넘어 전체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그런 몸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은 있고, 마음은 있다고 하는 것은 말뿐입니다.
허장성세는 필요없고 무지한자의 설명입니다.
지행합일은 동서양의 덕목이지만 그 방법적 실천법은 잘못 알려진거라 봅니다.
바른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건 그 사람이 바른생각으로 바른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보면압니다.
바른몸을 보면 어떤생각으로 만든건지 알게 됩니다.
이건 그사람의 욕망과 생각과 마음이 만든 결실이니까요
그런 몸도 없으면서 도덕과 윤리와 온갖 감언이설을 하면서 자신의 대단하다고 말하는건
상대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 속을 보고 그 내면의 깊은곳도 보는 사람이 있고
그런 공부가 있고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걸 모르는 자의 겁없는 짓입니다.
몸을 형태적인 면과 비형태적인 면으로 나뉘어 봅시다.
형태적인 면은 육체적인 것이라 하면 다들 이해가겠지요
시각적이거나 고정적이고 또는 환원적이라고 합니다.
비형태적인면은
뭐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목적은 있는가? 왜그러는가?
그런 질문에 해당하는데 편하게,,, 어떤 사람인지, 목적이 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등으로
더 쉽게 말하면 흔히 착한 사람인지 강한 사람인지 추잡한지 나쁜놈인지 이런 간단한거와
자신의 꿈을 이루기위해 힘겨운 삶을 묵묵히 헤쳐나가고 있는 사람,
권력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
부자가 되기위해서 무조건 자신의 가진것만 생각하고 남의 그로인한 고통은 외면하는 사람 즉,
받을건 빨리 받고 줄건 안줄려고 하거나 더디 줄려는 사람,
이세상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데 직장이나 직위나 부나 권력적, 사회적 상식적 정체성에 해당하는
것만 인정하는 세상이라 참 어려운 것이 됩니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가 ...
이렇듯 형태적 모습을 갖고 또 그형태의 활동적, 혹은 정체성의 모습이 있는데
이 비형태적인것의 정의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부분의 설명이나 관심이 별로 없기도 하고 사실은 이것이 중요 한데도요...
이 두 모습이 합쳐져서 하나의 몸이 됩니다.
이 몸을 탄생시켜야 하는데
그래서 의지나 뜻, 서원을 중시 합니다.
이것이 그 자신의 정체 즉, 비형태적 몸을 만드는 근간이고 성공하면 그몸이 될거니까요
다시 말해 수도해서 대단(5단)이 됬는데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왜 수도했는지, 뭘한건지, 모르는 상황이 되거나
아니면 그저 욕망 충족의 이기적 존재가 될 뿐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형태적으로 근거가 있는 몸, 즉 깨달은 몸이 있어야하고 깨달은 행위를 해야 합니다.
물론 확인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확인이 어렵다고 없거나 인정 못해서는 안됩니다.
분명 근거적 현상과 몸은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몸 즉 근거와 원인적 요소는 확실히 중요하고
거기에 실천적 당위도 더 없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몸은 도라고 하는 것이고
실천은 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 도는 있습니다.
깨달은 몸은 있어요
원신이든 법신이든 뭐든 있고 의지와 꿈도 있어요
하지만 덕이 부족해서 즉, 비형태적인 몸이 없는데
이것을 블러그나 카폐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조금은 아는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교육도 덕이고 수도이기도 하죠
더나아가 이로움이나 삶의 토대를 주어야 하지만 아직 그런 덕는 없어요
세상에 각성한 수도인이 많아지면 더 행복한 세상이 될까요?
어떻게하면 더 많은 사람을 각성 시키죠?
강요할까요? 최면은 어때요? 광고 할까요?
좋은거라고 돈벌 수 있다고 할까요?
구원을 바라고 도통군자가 되길 바라고 하는
개인적 복락을 바라는 것은 지금은 필요 없어요
또 특이한 능력이나 현상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 없구요
일당백의 배짱과 명철한 사고의 균형잡힌 전인적 사람이 필요해요
구원이나 세상의 진화가 뭔지부터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요
이것부터 안되서 세상의 구원이 안된다고 생각해요
때가 안됬어요 누구는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없어요
때를 준비한 사람, 자신이 무엇인지,
세상은 무엇이고, 신이 무엇이고, 진리란 무엇이고, 더 나은 세상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고, 이런것을 알고 준비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때가 안됐어요
지금껏 오랜 세월 메시아나 인류구원이 안된건 이걸 준비하는 사람이 없고 혜택만 바랬기 때문이에요
혜택을 받는것이 아니라 주는 것을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되요?
별로 없어요 그래서 세상은 멸망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죠
부정적인 생각을 퍼트려 희망을 꺽는 것은 잔인한 거에요
그대는 세상을 구원시킬 준비 했나요?
몸이 있어요? 아님 만드는 중인가요?
현일 09.12.26. 19:53
생각좀 해보고 더올릴게요 ㅎㅎ
Q 09.12.26. 20:03
헉, 더 있으십니까?
Q 09.12.26. 19:59
마음을 열고 있는중입니다.^^
Q 09.12.26. 22:54
당당히 외칠수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추구해야 된다는 말씀이시네요. 감사합니다^^
Q 09.12.27. 03:25
쉬운듯 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현일 09.12.27. 11:40
이상하게 글이 난삽하네 아유 ㅠㅠ
Q 09.12.27. 13:52
노력이 부실해서 봐주기 거시기하신지,,,,
글 내용이 뒤통수 따땃하게 만드시네요,,,,,,,,,,,
예전에도 꿈에서 구봉이신듯한 분과 대화중에 "요즘,애들은 공부를 안해서 큰일이야 ㅉㅉㅉ" 하시더니,,,
이님 춥다고 ,,배려해주시는 ,,,, 감기조심하라고,,,, ㅠㅠ
Q 09.12.27. 13:57
이 글은 여러 번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수련정의 ♣ 자천이해 현일 2009.11.03. 19:33
수련
우선 수련의 정의부터 내려보자
수련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하는데 왜 해야하는지도 있다.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어떤곳 어떤방식으로 사는 곳이든 내가 있어야 한다면 그 존재 방식이 있게 된다.
이건 나에게 자아를 강요하는데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하고
이런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말이 이러지만 쉽게 말하면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내 존재방식이고 누구나 같다.
수련하는 이유도 더 나아지고 싶고 바라는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주관적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다.
객관과 이타적인 것은 주관성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한다.
태초부터 이 세상은 나와 별개이다.
이 거부할 수 없는 객관세계는 내가 치열하게 생을 이어가야 할 전제로써
가장 근원적 바탕이 되지만 내 의지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해낸것이 내 주관이 된다.
절대객관을 내 주관으로 성취한 만큼 난 절대에 다가가는것이 된다.
다시말해 할 수 있으면 주관이고 없으면 객관이다.
그사이에서 나는 줄다리기 하며 더 주관을 확대하기 위해 수련하고 노력한다.
영어를 잘해서 좋은 직업을 구해 돈많이 벌고 윤택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이것이 수련의 목적이며 이유가 되고 그러기 위해 영어 단어를 외우고 학원을 다니면 이것이 수련이다.
알통을 만들고 남 앞에서 멋진근육을 보이고 건강해지고 싶다면
이것이 수련의 목적이된다.
그럴려고 헬스를 다니고 아령을 든다면 그것이 수련이다.
자격증을 따고 기술을 익히는 것도 같다.
이렇게 우리는 나아진 삶을 위해 노력하며 꿈을 꾸고 산다.
그러니 누구나 수련하고 공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면서 사는것이 좋은것이다.
영어하고 자격증이 있으면 우리는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 자유로워진다.
우린 자유로워야 한다.
도덕이나 윤리에서도 우린 자유로워야 한다.
과거의 잣대나 학문과 관습 사고로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어떤일이든 타인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려해서는 안된다.
가장 가까운 나도 내게는 타인이 된다.
이런 설명도 폭력이 된다.
도학이라는 분야가 있어 이것만 수련인양 알고 이해하는데
소위 말하는 불교, 도교 선, 참선, 명상, 도, 기체조 하도 많아 알기도 어렵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을 해야하는데
어쩌겠나 자기가 뭐라도 알아낸 것은 없고
앵무새 마냥 어디서 주워들은 것을 아는체 하는데
어쩌다 타존재의 말이라도 들으면 앞뒤 따지지도 않고 굴복하는 노예근성이 있다.
이런건 일고의 가치도 없고 항상 보수적 무지가 세상의 발전을 막는 것이다.
재미 있는건 본인이 이러고 있다는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개그가 따로 없다.
이들은 눈이없다. 근원을 뚫어보는 힘이없다.
눈은 마음에 있는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자유로운 만큼 보인다.
무엇이 마음을 가리고 있는지....
Q 10.09.17. 23:47
왕도란 없는겁니까? 진정한 스승은 없는 겁니까?
하다못해 글을 깨우치는 데도 스승이 있는데 수련을 하는데 맨 땅에 해딩해야만 합니까?
최소한 한글은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 주 듯이 소주천 정도는 형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스승은 없는 겁니까?
그냥 한번 의견을 제시해 봅니다.
Q 10.10.06. 00:48
눈은 마음에 있다....???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감정일까요?
가슴이라고도 하는데 무엇을 뜻하는지요?
현일 10.10.06. 21:22
사람들이 생각하고 감정을느끼는 그 기준으로 작용하는 가치기준이 있는 곳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부정적 긍정적 판단을 항상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이 의식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잇는 부분을 알아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관찰을 하는데 자기를 보는 것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형태를 보는 것입니다.
선택을 했다면 어떤것을 왜 내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고 보면서 그 판단기준를 아는거요
본성 ♣ 자천이해 현일 2009.11.03. 19:49
본성(本性)
본성개념에는 삼일신고의 자성구자(自性求子)나 불교의 여래장(如來藏),
유교의 리일분수(理一分殊)등이 사람은 처음 날때부터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미물부터 영이 차츰 진화했고 인간에 왔는데 어디서 불성같은 것이 들어 올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모든 만물이 법신에서 나오고 법신에서 시작하였으니 본성이 법신을 함유 한다고 한다면
승만경에서 여래장의 확인은 모든 중생이 고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려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 해보아야 한다.
열반을 구하려는 것은 열반이 없기 때문이고
열반을 구하려는 욕망이 여래장의 근거라고 하였으니 이는 더 나아지려는 열망이다.
이것이 존재의 힘이고 삶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 지향성이 결국은 열반에 이르는 힘으로 작용할것이다.
이는 오히려 부처가 되고 싶고 하늘이 되고 싶은 것이며 이는 상실의 회복이다.
사람이 수도 할 수 있고, 내안에 신아 이든, 불성이든 무엇이든 있다는 것은 모두 이것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 초월을 향한 끊임없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성이다. 이것이 하늘의 마음이다
본성강하게 ♣ 자천이해 현일 2009.11.03. 19:49
호흡 수련은 외부의 기를 단전에 쌓아가며(수단) 하는데
이는 내안의 진아를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일념에 힘을 보태는 것이고 그로인해 강한 내 본성을 만드는 것이다.
몸을 이용한 것이고 신기한 이 몸이 저절로 수련을 통해 원신의 질적 변화를 이루게 해준다.
이러한 과정은 지금껏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것을 하기 때문에 힘들고 고행의 과정이다.
호흡이건 주문이건 내안에 외부의 것이 들어와 자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내부로 들어온 기가 쌓이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여 드디어 도가 되어간다.
이는 자연스럽게 되는것이다.
이것이 하늘을 닮은 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내가 할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을 열고 능동적으로 외부와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내몸의 상승하는 요구에 따라 그 요구에 맞는 마음을 갖고,
그에 따른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면 결국은 금단을 이룰것이다.
금빛기운 이것이 신의 몸이다.
이제야 시작이다 원래부터 천지에서 가져오고 싶은 것은 금빛 기운이다.
나에게 생긴 이 금기金氣로 하늘의 금기를 유도하여 얻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신이 될 수 있다.
서양의 철학자들이 각성은 하지만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여 자아의 성장을 막고
외부의 더 나은 어떤것을 끌어당기지 못하기 때문에 득도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내 자신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적극적으로 수련의 방법적 마음의 전환을 때에 따라 하지 않으면 어려워지게 된다.
나의 외부로 향한 능동적 마음 열기와 그 마음의 통로로 들어온 하늘이 나를 하늘로 재탄생 시킨다.
복희 팔괘는 하늘(건:乾)이 나(곤:坤)에게 들어오는 것을 말한것이고
구궁팔괘는 내안에서 구체적으로 수도의 방법으로 변혁함을 실체화 하는 것이고
정역 팔괘는 내가 하늘이 되어 세상을 영위하는 것을 표현했다.
나와 하늘의 만남, 그래서 하늘이 내가 되고 ,내가 하늘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이상이다.
이 하늘을 향한 끝없는 욕망이 본성이다.
Q 09.11.06. 23:35
수련초기에는 몰랐는데 요즘들어 참 와닿는 내용입니다^^
Q 10.09.18. 00:06
마음을 열고 능동적으로 외부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그러겠구나 하고 짐작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수련방법을 묘사해 주시면 엉킨 실마리가 풀릴 것같은데
너무 원론적인 말만 하니 모호합니다.
단계를 2~3단씩 건너 뛰지 마시고 세밀히 풀어주기를 바라면 저의 욕심일까요.
부디 포덕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본성에 대한 생각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8:02
본성에 관한 여러 이야기
다산의 여유당전서에 '상제의 목소리가 도심에 깃들여 있다' 고 한다.
일종의 경향성 지향성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좋아하는 嗜好기호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의예지신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보다 선에 대한 지향성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태용-
나 역시 본성은 상제에 대한 지향으로 생각하며
인의예지신의 덕은 사람이 한생에 하나씩 갖추어져 5번 생의 거듭 태어남으로 갖추어 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심(心)에 있는것으로
근거는 성에 있지만 성에서 보면 하등의 관계가 없고 심에서 보면 근거가 된다.
성은 심에 영향을 주며 심은 다시 성에 영향을 주는 상호 영향을 한다.
그렇게 변해가며 성장한다.
성장하는 것인 한 이것이 상제를 향한 욕망이니 결국은 성의 근원은 영원하다.
심에 있는 인의예지신이 정으로 행동의 발현이 된다.
성은 선악이 없고 생의 순수 동력인 것이다.
주역의 생생지위도 정자의 도즉자연생생불식道卽自然生生不息
이는 성性이 가지고 있는 생의 의지를 말한다고 본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하며 나아가
궁극의 지위를 향한 의지의 발현으로 우주만물의 자기자신을 표현하고 드려내려는 꾸밈과 활동의 원동력이 된다.
선(善:仙:上帝)은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제이다.
상제는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경외의 대상이다.
이유는 나도 그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미 상제인 그분이 부럽고 그것이 나에게는 절대적 위압감으로 다가오니 무섭다.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를 지지한다.
이가 발하여 기를 제어하려하고 기도 발하여 이에 대항하는 상호 견제와 대립으로 이해함으로 이다.
그러면 이가 승하기도 하고 기가 승하기도 한다.
서로 발하여 상대를 억압하려하니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경우가 있지만
한때이고 또 이겼다고 냉정한 판단을 하기도 쉽지 않다.
현실은 그렇게 한쪽의 완전한 승리는 바람직 하지 않고
어느정도의 앞섬이 있는 정도의 우세승이 바람직하고 그럴때가 더많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서로간의 긴장된 관계에서 개체는 자기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좋다.
결국 돌아가는곳은 내안이고 이것이 귀원으로의 회귀이다.
"퇴계의 이기호발설에 대한 율곡의 비판이
'이가 발용 할때 기가 혹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기가 발용할대 이가 혹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이렇다면 이와 기에 이합離合이 있고 선후가 있고 동정에 단端이 있고 음양에 시始가 있는것이니 그 오류가 적지않다.'"
-조은수-
그렇다 이러하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사람들의 갈등과 싸움이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하기에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기의 이함. 선후 등의 문제를 최소화하고 본래의 성에 귀일해야 한다.
아니 하고 있다 다만 선후와 빠르고 더딤이 있는 것이다.
이와 기의 조화는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누가 시킬 수 잇는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동양인의 사유 天池출판
사소하다.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0:19
수련이 특별하거나
별난 사람이 하는 것으로 비쳐진게 요즘 현실이지요
그리고 그 방법도 출가하거나 속세를 벗어나서 산이나 홀로 힘들게
수련하는 것으로 알기도 하구요
도시의 수련단체가 있어 도장처럼 가서 하는것도 있구요
음 건강이나 능력이나 뭔가 바라는 사람이 하는것 같기도 하구요
점이나 퇴마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많아요
암튼 아직 수련이란 유별난거에요
이런것에 좀 생각을 전환하고 싶어서
여러 글을 올리는데
생각처럼 안되어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고
떨떠름한거 같고 아님 이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봐요
잘해야 생활속에서 수련하자는 정도로만 여기는 것 같기도 하구요
어쩌면 수련자들이 수련으로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큰 뜻이나 꿈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가 봐요
수련에 어떤 뜻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일반인과 멀어져서 이율배반적 생각이기도 한데
아직은 전문적이고 깊은 수련을 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서
세상의 변화에 뜻을 두었으면 해서 그래요
우린 모두 수련하고 있고 일상생활에서 모두 강하든 약하든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데
이렇다고 아무리 말하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요
수련하는 사람들도 수련에서 특별한 것을 바래서
서로 대화하거나 마음을 교류하기도 어려워요
물론 행복해야 하지만 경망스럽고 가벼운 생각만으로 도를 여기는 것에는 화가나요
덕이 중요하지만 덕이 먼지 모르는 세상에 무엇이 덕이다 라고 말한다고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거라고 말하면 되지 않냐고
도가 뭐고 덕이 뭐고 수련이 뭐고 어떻게 하고 간단히 하면 될거 아닌가 하죠
우선 이런식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섭섭해요
플라톤주의도 아니고 뭘 그렇게 단절시켜서 세상을 보는지 몰라요
공자는 한모퉁이를 들면 나머지를 짐작해야 가르친다고 했던가요
맞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까지는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한 질문이었으면 하고
질문 이전에 한번쯤 자신이 알아볼려는 생각을 했으면 해요
수련은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호흡도 주문도 명상도 어떤것도 필요없어요
섹스하다가 나를 발견하기도 해요
개와의 눈마주침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구요
애들의 말대꾸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광고 문구에 발상의 전환도 하구요
콜라 한모금에 내 몸을 느껴요
그러면 수련한거에요
이런 일상이 왜수련이 아니라는거에요
왜 이거외에 뭔가 그럴듯한 것을 해야 수련이라는 거에요
기는 왜 생각해야하고 호흡은 왜해요
저 많은 단체들은 뭘 가르치나요
신선되나요 난 신선본적 없는데
다 어디 있죠
님들이 하는 그 수련이 진실로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나요
님이 원하는 것을 정말로 원해도 되는건가요
세상에 허락받고 원하나요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이 얼마나 힘들고 거칠고 안타까운 현장일지라도
한번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내 존중감만 생각해도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도의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당장 어떤 가시적 효과가 나는것은 아니에요
왜 눈에 보이는 그런 현상을 쫒고 항상 지금 당장이에요
전체적인 내삶의 흐름이 있는데 잊어버리고 묻혀가는것이 아쉬울지 몰라도
잊혀지거나 묻혀지지 않아요 망각된 듯한 어떤것도 결코 없어지지 않아요
다시 더 나은것이 되어서 또다른 감동으로 날 이끌어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거에요
계산되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지만
지식은 들어가서 다른것으로 나오는 것이라서
그리고 그 변환이 나의 모든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거라서 알아지지 않는 거에요
자신을 믿고 기다려요 한번의 바라본 내 자아는 다음에 또 다른 것으로 나에게 나타나요
사람들이,
자신이 지금 귀한 생의 기회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시대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이 내 건강이나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날 알고 날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킬수 있는 기회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덕은 내안의 사랑이 남에게 나가는거에요
자신을 본 사람만이 남도 보는거에요
내마음만 가라앉히고 내감정만 편하고 내생각만 보면서
내위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덕은 그것을 타인과 내주위로 확장하는거에요
이것이 안되면 수련을 왜 해요?
도는 덕을 위한거지 그 무엇도 아니어요
와와 설명해보자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7:35
인체는 생존을 위해 생리활동을 해요
당연히 생리활동이 곧, 수련이지만 이 정도론 불만족스럽죠
우리 인체는 생리적인 것외에 미약하지만 수련활동을 하는것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이 수련활동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어서요
그것이 여러 수련법이 생긴 동기가 된 것이에요
구체적으로 신체적 동작을 이용하고
시간을 내고 장소도 골라서 많은 투자를 하지요
왜, 그런 생리활동과 구분해서 수련을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만 하는 이유요
집중수련이라면서 하루에 얼마의 시간을 오직 수련에 투자해야 하나봐요
이건 오해에요 이렇게 투자하는 시간에 하는것이 그렇지 않은 일상의 시간에 비해
수련의 진도가 더 나가는 듯이 보이던가요
그렇게도 느낀적이 있겠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 이구요
하지만 사실 더 많은 것이 다른일로 딴 짓 할때 수련이 더 성장되어요
수련을 1시간하면 23시간은 뭘 하고요
수련을 5시간하면 나머지 19시간은요
이 다섯 시간의 수련때 뭔가 진전이 있었다면
평상시의 먹고 놀고 잠자고 한 19시간의 남모르는 진전이 모여서 이제야 느낀것이겠죠
차라리 자요
밤늦게, 새벽에 잘된다고 몸을 학대하지 말고 그냥 자요
몸이 건강하고 상태가 좋아야 수련에 더 도움이 되요
몸이 힘들고 피곤하면 당연히 수련을 위한 수련활동보다 생리활동을 더 많이 할거에요
몸이라는것이 그렇자나요
아침에 발기가 저절로 되듯이 기는 시간되면 알아서 일어나 운행해요
수련 활동은 밤낮이 없어요
근데 이때 일어나서 더 집중하면 수련이 더 잘될거라고 생각하죠
억지에요 수련을 작위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관습일 뿐이에요
수련은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더 많은 시간에 더 많은 작용의 결과가 있는거에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저렇게 울었나보다(서정주의 국화옆에서)
이시를 알지요?
국화꽃이 피는건 한순간일지 몰라도 그 과정은 아무도 모르는거에요
또 말하지만 기를 운행할때 내몸만 운행하면 될 것 같고 내가 운행시키면 다 될줄 알지만
자연과 천지와 내 운명과 모든것이 서로 조응해서 도는 거에요
이걸 모르면 바보죠 쿄쿄쿄
그러니 그 시간에 세상을 즐기고 뜻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풍요를 위한 자기계발에 힘써요
이것도 수련이고 그에 따라 진행될거에요
사회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수련은 최소한 신들 세계에선 인정 안해요
왜냐면 함께사는 것이고 덕이 있어야 하는데
세상과 단절시키고 자기 길만 가면 우리와 세상과 뭔 상관이에요
그 사람 땜에 이 땅이 울부짖을껀데 그 울림이 안들리니 잔인한 자일 뿐이죠
사람이 죽는것도 땅의 울음이에요
수도자는 명심해요 당신때문에 사람이 죽어가요
이 나라 자연이 죽어간다구요
혼자 도닦으며 잘난체하는 그 무심함이 원망스럽습니다.
낮두껍게 좋은땅과 혈을 찾는 그 타락은 근래에서나 보는 현대적 탐욕이구요
혈이나 지기는 이 땅과 전지구적 생명흐름의 체계에서 형성되는
모이고 흩어짐이며 많은 사연이 그안에 있는데
생각하는 것이 내가 어떻게 수련하여 빨아볼까하고 생각하니 한심합니다
이런 자들하고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뒷감당하기 위해 애쓰는 분들이 있으니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은 항상 따로네요
암튼 도는 닦는데 덕은 없는 세상에
무조건 포덕이고 덕행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안하니 하라고 해야죠
이날 이후부터 이기적으로 자신의 도나 늘리려는 수련을 하는자는
이나라 수도자가 아닙니다
현문이나 천부에 고지 할랍니다
그들이 들어줄려나 모르겠지만 캬캬캬
수련활동에 인체가 신경쓰도록 여분의 힘을 더 주기위해 단전을 만들고 의식을 사용하고
명상하고 주문하면서 생리활동에서 수련활동으로 더 많은 힘을 주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단 한번의 결의로 강한 의지를 내신체에 줌으로써 가능하고 그이후는 신체가
수련활동에 박차를 가합니다
수련의지를 흔들리지 않고 선택과 결단을 내림이 어려운거지 수련자체는 쉬워요
다만 여러 이유로 어렵다고 생각하는것이 있습니다.
빨리 안된다.
원하는것이 안된다.
체험이 깊지 못하다.
등등 하지만 이런것이 수련의 어렵다는 이유는 안되요
더디고 빠른것은 수련자의 의식의 문제인 경우가 많고
원하는것이 안되는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없고 자신의 길을 이해못한 것일거라 생각해요
체험의 깊이는 수련자 각각의 성향에 따른것으로
이것이 수련의 깊이로 직결되는것은 아니니 신경쓸거 없다고 생각해요
신기한 몸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7:56
미국만화에 유령의 머리위에 흰고리를 그려 넣는다.
하지만 원래 이것은 죽은 자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산사람에게 있다.
이는 환명이라고 하며 수명이나, 운명이 기록되고 지내온 과거가 기록되어 있다.
대주천 할때 천기는 이곳을 거처서 들어오게 된다.
4단이되면 머리에서 수직으로 한참위에 거대한 고리가 하나 더 생긴다.
삶의 영역과 영력장의 들고 남이 달라지고 필요한 신기의 양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짓말이나 마음에 숨기는 것이 있을때
가슴에 막대기를 수평으로 놓은듯한 기운의 흐름이 있어 마음의 뚜껑을 닫듯이 좌우로 그어진다.
솔직하고 바르게 마음을 가지거나 말할때는 수직으로 기가 통한다.
마음의 바르고 그름에 따라 기의 흐름이 다르다.
거짓을 말할때 아직 기운행이 전환되지 않아 실언이나 횡설수설한다.
이렇지 않은 사람은 모진 사람이다.
마음이 맑으면 기도 맑아지고 밝으면 밝다.
어두우면 어두워진다.
마음이 처지면 기도 처지고 마음이 경직되고 답답하면 기도 직선적이고 딱딱하며 흐름이 정체된다.
옛날에는 3혼 7백이라는 말을 했다
내 생각에는 스팩트럼같아 분할하면 그 이상도 분리할 수 있다.
장부마다, 마음의 깊이마다 하나씩있고, 욕망의 크기에도 있고, 더 많은 다양한 혼과 백이 있다.
생각의 집중에도 생긴다.
주문을 외우는 사람에게도 따로 하나가 생긴다.
이것들이 혼과 백으로 포함(包含)되어 사후에 혼은 영계로 백은 땅으로 간다.
몸통에 가위 모양으로 흐르는 기가 있는데 사명감이나 다른사람이 시키는 일을 할때 생긴다.
그래서 남이 시켜서 하는지 자발적으로 하는지 그 기의 생성으로 알게된다.
기에도 마음대로 운행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기에 층이 있어 가볍게 흐르는 것과 무겁게 흐르는것이 있다
가벼운 것은 혼과 비슷하고 무거운 것은 백과 비슷하다.
무거운 기를 움직이거나 통제할 수 있으면 몸의 병이나 건강 그리고 강력한 신체로 어느정도 제어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침이나 뜸의 기구나 전문적 기술, 그리고 체질적 성향이 크게 작용한다.
이것이 잘안되는 것은 마음대로 하게되면 장부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균형이 중요한다.
임의로 어느경맥이나 신체의 한부위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거나 바꾸면
오장육부의 부하게 커지고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간다.
욕심이나 호기심으로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12정맥들의 임의 조절이 어렵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은 조금은 쉽다.
임독맥으로 감정을 조절하고 시간이 걸리지만 무거운 기를 간접적으로 제어할 수도 있고
외부의 침입의 방어나, 임의의 외부의 변화도 어떤 방법으로는 가능하다.
그리고 기에도 다양한 층이 있다고 했는데 그 층을 이용하여 다양한 작용을 하게된다.
주파수를 맞추듯이 기의 종류를 조절하여 때에 따라 사용한다.
귀신의 존재를 알려면 귀신의 기에 맞는 기로 변환하여 보고
천계를 알려면 그에 맞게 하여 보는데 귀신과 신선은 그기가 확실히 다르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것이다.
그래서 기를 바꾼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기가 아니라 신기나 영기, 천기로 바꾸는 것이다.
이를 모두 기라고 하면 말의 오용이다.
어째든 때로는 사람의 생각이 모여 뭉친 구름같은 것이 땅위를 흐르는데
원망이나 탐욕 등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이 모여진 것인데
서양의 버터플라이맨이 이것의 일종이다.
이것도 이것에 맞추어서 보면 느낄 수 있는데 사람이 잘때 악몽이나 가위눌림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층에 따라 많은 현상들이 발견되는데 또 무엇이 있는지는 더 알아 봐야 한다.
초반
초반이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자기삶에 대한 전반적 설계와 그에따른 능력과 방법을 정한것.
대개의 사람은 이러한 것을 스스로 계획적으로 하지 못하고 인연이나 단순한 감응으로 한다.
하지만 사명을 가지고 나오거나 스스로 어떤 목적으로 생을 선택한 경우는 자세히 따져보고 나오게 된다.
내 경우는 계획하지 않고 있는데 인정상관님과 국조신이 임으로 떠밀어 나는 얼떨결에 나온 경우이다.
이렇게 어떤 이유로 부족한 초반을 채워주는 곳이 '구월산'이다.
반도
반도란 사방12km 정도의 단위로 하며
태어날때 탄생지를 기준으로 영역이 정해지며
여기에서 일년에 5명의 사람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산천의 감응이 있다.
5명을 넘으면 온전한 탄생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을 크리스탈 모양의 형태로 형성시킨 것을 '반도구'라하며
사는곳 근처에 산과 계곡이 있는 임의의 장소에 있으며, 나와 연결되어 있다
신체현상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0:30
수련을 처음할때나 아님 오래하거나
상관없이 이러한 일은 일어난다.
머리나 가슴, 배의 성격상 나타나는거고 또 이렇게 생활하는거라고 생각하는데,
우선, 상단전이나 중단전 하단전이라고 안하고
또 정확한 혈자리를 말하지 않는 것은
다른 단체에서 이미 하고 있고
그리고 너무 구체적 혈자리에 집착하는것 같아서
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단전이 정확히 어디라고 안다고 좋거나
수련이 빠르고 잘되는것은 아니다.
정확히 자리를 손으로 잡아주고 또는 거기에 뭔가를 붙여서 자극을 하루종일
주기도 하는것 같은데 이런것이 바른 수련이라고 안본다.
하단전은 상부의 심화가 내려오고 외부의 천지기운이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것일뿐인데 거기를 그렇게 집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어떤방법을 쓰든 이런 현상을 일어나게 하기만 하면된다.
중단전을 비우는 수련도 이런 것이 가능하다.
중요한건 그 본래 의미이다.
이걸알면 수련의 이치를 알게된다.
높이 날면 자세히 못보고 가까이 날면 전체를 못보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데
너무 작은 한곳에 집착하다보니 전체적 수련의 이해나 작용을 잘못알아
하단전에 기를 의도적으로 뭉치듯이 만드는 듯한 인상을 갖기도 한다.
명심할것은 단전은 무슨 구슬 만들 듯 하는것이 아님을 알 길 바래요
상단전이 열린다고 하는데
단전 개통이나 열린다고 하는것이나
너무 직접적 표현은 별로 안 좋아해서 꺼리는데
세상의 흐름이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말을 좋아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나봅니다.
이런말이 과거부터 내려오던 것이긴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비슷하니까...
삘 꽂히는 말이나 화~악 땡기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
그런데 수련에서는 조심해서 했으면 해요
말도 마찬가지로 너무 자세히 말하면 전체적 이해를 못하고
함축적이면 치밀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아쉽죠
수련이 하단전을 연마한다고 거기만 연마될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발상이어요
하단전을 온전히 하고 중단전하고 상단전으로 해 나간다고 생각한다면
일시적으로 그럴 순 있지만
우리 몸이란 것이 그렇게 단절되어 있는것도 아니고
몸 어디든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온몸이 영향을 받는것이 정상인데
수련은 더욱 전체적 반응을 할수 밖에 없어요
상단전위주로 수련할 경우 상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올라오는 기운이 하단전에서 올라오는것이 아닌가요
정확히는 신장이지만 암튼 반대로 하단전을 연마하면 상단전의
기운이 내려와 상단전이 상대적으로 맑아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상단전이 단련되는것인데 우리몸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어서
움직이니 전체적 이해를 하면서 봐야죠
양의학처럼 환부만 보면서 치료하는 근시적 안목은 곤란해요
암튼 머리가 단련되면
듣고 보고 맛보고 하는것들
무당이 입이 열리는것같은 다아는 듯이 말하기 시작하는거요
그것도 자기 수준에 맞는 말만 하는거지 그게 다 맞다는 근거는 없어요
신이 알려주어도 역시 어떤 상황에서 해 준거지 절대적 진리를 알려주지는 않아요
다스칼로스책을 읽었는데
일대기가 전체적으로 좋았어요
예수를 신의 화신으로 생각하더군요 그는 그렇게 보고 아는것이죠
계시로 보고 듣고하기도 하고 직접 정신계를 드나들기도 하지만
그런 실수를 하지요
실수가 아니기도 해요 지식은 자신의 상황과 세계의 한계를 가지는 것이니까요
계시주는 자도 있지만 그 자도 잘못알고 있기도 하구요
이건 우리나라 수도자가 계제가 높으면서도
공자를 최고로 아는 그런 거죠
자신의 믿음체계를 벗어나지 못하죠
그래서 그이상 수도가 안되기도 했지만
이 작은 한계가 정신의 성장한계가 되요
그래서 내가 계제가 만만한게 아니고 올라갔다고 자기것이 아닐 수 있다고
한거구요 사고 체계의 작은 틈이 도의 틈이 되요
지금 무당이든 수행자이든 뭔가 보고 듣고 아님 직접가서 보고오든
자신의 한계와 운명적 한계는 어쩔 수 없어요
이건 나도 포함하구요
다스칼로스처럼 사람을 고칠순 있어요 하지만 그 병에 대한 설명이 맞다고
할수는 없어요
이런건 고치는것 말고도 여러 현상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맞다고 볼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수도 있어요
고치는것하고 설명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범주이거든요
그가 틀렸다는것이 아니라
그 고치는것 하고 지식하고의 논리차원이 다르다는것요
아무튼 이렇게 보고 듣고 아는것이 머리에서 일어나죠
많은 생각과 이해력이 좋아지기도 하고 지식이 생기기도 하고
귀신과 신장이나 여러현상이 보이기도하고
들리기도 하고 말할수 있기도 해요
이런것은 머리가 작용하는 것으로 자연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정확한 지식인지는 스스로 알아가야해요
전체적 일관성으로 하나의 관법을 이루지 못하면
즉, 인생관이나 가치관, 세계관으로써 자신의 지적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그저 자기주관과 정체성과 자유의지도 없는
기계나 다름없어요
이건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의 모습을 한 도깨비에요
이런 사람 의외로 많아요 나도 놀랬어요
저런 도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고 좋다고 하는구나 하고...
가슴의 작용은 우선 감정이에요
감정적 불안정을 많이 경험해요
특히 수련이 어떤 관문이나 경계를 넘어갈때 그렇죠
사춘기처럼 감정 통제가 안되요 화나고 짜증나고
불안하고 슬프고 기쁘고 즐겁고 여러 감정이 나왔다 사라지니 힘들고
아님 짜증이나 슬픔이 몇일씩 가기도 하죠
또 하나는 움직임이에요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가슴이 하는거라고 생각해요
기가 움직이는 것이나 몸안이나 외부나 움직이는 것은 가슴이 알고 하는거라고
보아요
그래서 기운이 움직이는것도 느끼고 몸속으로 뭔가 돌아다니고 꿈틀대고
그러죠 이걸 하단전 수련으로 단전만들어서 기운행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것도 되지만 결국은 중단전으로 운행해야해요
안그러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요
움직임은 자유로운 감정과 깨우침에서 나오는것인데
하단전은 성격이 다른 즉 차원이 다른것이거든요
그러니 수련의 이해를 잘못한거라고 생각해요
암튼 기가 움직이면 몸도 움직여요
이걸 자발동공이나 육근진동이나 여러 신체적 동작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진동과 떨림과 반복동작등 괴상한것을 하지요
이것이 가슴이 하는 것으로 몸이 풀어져 가는것이고
자유를 표현하는것이죠
이게 빙의나 의지가 나약한것으로 본다면
반대로 그런것이 두렵거나 걱정되면
처음부터 수련할 생각 없었어요
그리고 이런 현상이 나오지도 않아요 이건 자신의 신뢰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아요
내몸은 움직여요 끊임없이 움직여요
반응하고 작용하는 너무도 많은 현상이 있죠
그런것에 내가 적응해가는것이에요
자아는 대개는 머리에 있는듯 여길 수 밖에 없죠
생각을 머리로 하니까요
가슴으로 자아를 느껴본적 없나요?
만약이걸 느끼면 빙의든 접신이든 시비(옳고 그름의 사유)든 어떤 감정과 관념이든
벗어나요 이런걸 몰라서 서양식 정신분석으로 수련자를 판단하거나
상식적이론으로 이해하려 하고 자신의 학문체계나 믿음체계나 수련방법을
고집하게되요
원래 고대에는 처음에는 머리로 수련해요
이게 제일 쉽고 아무나 하죠 하지만 한계가 대단이죠
요즘하는 불교의 위빠사나요 이런거요
그들은 이것이 최고 수련이라고 하지만 이건 기본이에요
이런거 모르고 수련하면 역시 나태한 거에요
부처는 이거라도 해서 좀 알라고 한 것인데 이것만 전부라고 하면 항상 그래 온 것이니
말을 말아야죠 다른 수련들도 다들 자기것이 최고라고 하니까요
그렇다고 위빠사나를 수준 낮은 수련이라고 한건 아니에요
다른수련도 별반 차이가 없고 비슷할뿐인데요
사실은 다른수련도 위빠사나의 아류일뿐이구요
그리고 다음이 가슴수련인데 대표적인것이 도덕경이죠
근데 아무나 이걸 들먹이며 아는척을 해요
이건 40단까지가죠
이걸 수련하는사람은 본적이 없어요 불교에도 있어요
오직 이 지구상에 이 두곳에만 이걸해요
그외 나머지 수련들은 결코 대단을 넘어가지 못해요
이건 구조적 수련한계에요 수련법의 한계죠
그 이유가 우선 가슴에서 자아가 일어나는 것을 아는 수련법이 있나요?
없죠? 가슴으로 수련하는걸 가르치지 않아요
대단(5단)이후 수련이 어려운건 방법이 어렵기도 하지만 이걸 몰라서에요
이건 가슴이 먼지 몰라요 그래서 말해도 모르고 나도 설명을 못해요
상대방이 이해를 안해주니 뻘쭘해서요
전설로 내려오는 천지와 함께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에요
이것이 기초수준이구요
이 다음이 배로하는 것이구 이건 80단이 한계에요
이수련은 복희가 만든 팔괘가 유일해요 이지구상에
지금알고 있는 팔괘하곤 전혀 달라요
이걸 수련하는 사람이 나올리없죠
과거 배달도 소수의 몇분만 하는것이니
가슴이라도 할 줄 알면 다행이죠
솔직하게 말하면 자질이좋고 나쁨이 없다고 말했지만
진짜 자질은 가슴을 수련하는 사람이에요
난 아! 만난적이 없지만...
공자가 그 기미를 좀 본거죠
지금하는 여타 다른 수련들은 순수하지도 못하고 족보도 없는
엉성한것인데 이것에 목매는 상황이 안타깝죠
대개는 머리 수련이에요
하단전에 수련해도 그건 머리수련이에요
하단전에 신경쓰는 즉, 의식으로 유도해서 하니
머리로 하는거에요 아닌가요?
배는 고요와 정적인 것이 주로하는곳이라서
따듯함이나 차가움이나 통증이나 압박감,
피로함이나 건강 몸의 체력증진이나 힘이 나는것이 해당할거에요
피부가 좋아지거나 거칠어지거나 아프거나 병이낫거나 하기도 하죠
토대이기도하고 신체이기도하고 깊은신뢰 저력이기도하고
혼으로 나가서 싸울때 상대가 공격해도 흔들리지않는 거죠
현실에도 굳건한 자세나 안정감이 있고 아님 반대로 안절부절못하는
나약함이나 불신을 받죠
부동하면서 동하는것의 의지처이죠
이런것이 순서대로 나오기도하고 한꺼번에 나오기도하고
안나오기도하고 종잡을수가 없어요
어떤것이든 잘못이라고는 못해요
수련에 부작용이 있다고 하지만
왜그런 부작용이 생겼는지 그리고 그것이 부작용인지
간단히 진단하기가 어려워요
잘못된 수련탓이나 이해탓으로 대개는 하지만
그래서 고쳐주기도 하지만 역시나 고치는 것하고 그 설명은 달라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보편적 처방을 하는것도 위험하고 이런 발상이 더 위험해요.
사람을 수퍼의 상품보듯이 같은 처방이면 다낫는다고 하는것이
너무 사고가 안일해요
그저 안목을 위해 여러 말을 했어요
이게 정답은 아닐거에요
혹 도움되면 좋구요
부연설명 더할까요
호흡이나 주문 화두 선 명상
어떤것이든 이건 다 머리수련이에요
대단(5단)이 끝이에요
이걸로 그 이상간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이 수련으로 간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거에요
자신의 지혜가 치밀하지 못해서 엉성하게 아는거죠
수도가 진행되는 것이 꾸준하고 자기가 수련한 법이나 고행적 수련방법을 했기
때문으로만 안다면,
이렇게 배웠다면 그것으로 족할수도 있죠
하지만 분명히 더 많은 원리와 비의가 있어요
한사람이 수련되기에는 자기가 아는것보다 더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많은 명의 작용이 얽혀있어요 더 높고 더 넓은 곳에서 보는 방법도 있고,
모르면 아는 만큼 알고 그것이 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죠
하지만 내말이 맞다고 하기전에 자신의 수련이나 지식 말이나 관념이
맞다고 주장하는 그것이 아직 수련이 덜 된거라는 거에요
지금 내가 블러그로 쓰는것이 난 이렇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진리나 무조건 맞거나 안틀리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비난이나 잘못알고 있다고 댓글써도 관심없구요
내가 쓴것에 책임은 지지만 이것이 맞다고는 안해요
난 나도 모르고 내지식도 모르고 내 사유도 몰라요
전에 말했듯이 난 항상 신명으로 넘어가 암것도 없는 무지의 세계로 가요
항상 혼돈으로 분간이 안되는 곳을 떠돌죠
내가 말하는 것하고 말한것이 옳다고 하는것은 달라요
그리고 이렇게 알거나 이해하는 것하고
자신이 이렇게 된것하고도 다르고요
이게 되면 고숩니다.ㅋㅋㅋ
법을 주장하고 이것이 최고이고 이것만이 맞다고
이런식으로 말하면 이미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일뿐이어요
좀 어느정도 도가 된 사람이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폭력을 쓰는거잖아요
배울 자세가 안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도 그렇고
가르침도 원하지 않는데 하면 폭력이에요
기다림이어요
천년 만년을 기다리죠
가르침은 지금하는것이 아니라
항상이고 영원히이요
시간은 남아요
언제나 언제나이죠
감각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8:38
여러감각들
수련하다보면 감각들이 생겨난다.
우선 가장 널리 알려지고 있는 기감
그리고 가장많은 사람이 바라는 투시
가장 알기 어려운 상象
그리고 내가 가장좋아하는 관觀
천지가 움직이는 운의 흐름을 아는것
기감은 수련하다 보면 거의 모든 수련법과 수련자가 알게되는
가장 보편적이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이다.
하지만 아직도 명확하게 기가 무엇이고 왜 느끼고 느낀것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대강 설명하면
기는 중단전의 작용이고 움직이는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동적현상에 대한 감지라는 것으로
느끼는 부위와 움직이는 방향과 그 기에 담긴 소망과 바람이 차이를 만든다.
느끼는 이유는 소망과 바람의 결과로 원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우리몸과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정 부분이 이루어지는 창조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잘되는 사람은 성격이 기의 성격과 맞기 때문이며
이것은 일종의 양명지기와 많이 비슷해서 의심이 많고 현실적이거나 물리적 현상에 집착하는 사람이 잘느낀다.
또다른 사람은 반대로 내향적으로 사물보다 초자연적 현상에 더 관심가는 사람이 잘느끼는데
이들은 반대 성향이라 느끼기는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아도 사실은 다른것을 느끼는 것이다.
자연에 기는 크게 두가지의 기로 나뉘는데
하나는 주로 동적인 현상에 치우친것으로 생명력이나 힘의 차이로인한 변화를 감지한다.
이것은 양적이고 강하고 밝고 쉽고 간단하게 느낄 수 있다.
다른하나는 소망과 바람으로 사념의 한 형태이다.
타존재나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것으로 음적이고 약하며 어둡고 어렵다.
약하다고 약한것이 아니라 두가지를 비교할때 그렇다는 것으로 본인은 힘들고 강하게 느낀다.
위의 두가지 중 하나를 통해 느끼기 시작하면 다른것도 느끼게 되어 구분이 모호해진다.
두번째것에서 처음것으로 느껴가기는 쉬워도 처음것에서 두번째것으로 가기는 어려워하기도 한다.
원래 하나 더 설명하여 세개가 되어야한다.
그 하나는 정말 어렵다.
느낀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느낌 뿐만아니라 그에 대한 이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자기 성찰과 판단,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이런 부분은 가르치기 어렵고 연습으로 되지 않는다.
투시
이것은 많이 알려져 있고 바라는 것으로 이것도 두가지인데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경우와
어떤의미로 해석해야 알 수 있는것들이 있으며 정신을 빼내어 보는경우는 위의 두가지에
신명계와의 접촉을 하게 되는 경우로 이중에 신명계와의 접촉이 가장 중요하다.
그대로 보이든 의미로 보이든 결국은 해석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떻게 보고 파악하고 통찰하는 것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며 기본적인 사물을 이해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꿈도 그렇지만 그대로 보이고 알아맞추는 것은 가장 저급이며
다양한 해석과 의미로 보여 많은것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더 높은 수준의 투시이다.
왜냐하면 꿈이 해석이 어렵고 뒤죽박죽인 이유는 다른것도 있지만
많은 사실을 보고 설명하며 그에 따라 감정의 동요와
또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과 시간적 뭉침과 공간적 겹침이 있어서이다.
하나의 사건에는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너무도 많은 힘과 원리와 작용하는 원칙이 있어
이것을 모두 한번에 보고 이해하려 하니 어쩔 수없이 상징과 기호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것에 더 관심이 있으면 의미투시가 더 재미있다.
정신끼리 만나는 것은 시해로 가사 상태로 가는 방법은 노력과 방법이 있어야 하지만
일종의 의념분리로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
어떤것이든 처음에는 위험한것도 있는데 조심하고 조심하여야 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을 만나는 것이니 인간관계처럼 서로 상대를 이용하고 어떻게 하려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세계에서 처럼 나름의 처세술이 필요하다.
다른곳에 쓴 것처럼 왠만한 힘의 연마는 필수이다.
상
이것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육감이나 영감으로 말하기도하고 직관, 직감으로 하기도한다.
이것도 수련하다보면 점점 알게되는데
차차 잡념이 적어지고 잡념의 분석이 되고 생각의 원리가 이해되면서 더 잘된다.
많은것이 떠오르고 떠올릴 수 있고 오는것을 보고 가는것을 보면서
상의 원리나 이치를 알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감으로 느껴가면서 통하는 것도 있다.
이것을 알고 이해하여야 좋은 능력이 된다.
많은 지식과 학문을 가능하게 한 능력이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하기 힘들다.
너무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것이 어려워지고 논리와 영감을 적절히 쓸수있어야 한다.
요령과 방법은 스스로 알아가야지 알려주기가 어렵다.
투시로 어려운 것이 이것으로 해결하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본인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관
이것은 통찰력이라고도 하고 깨우침이나 지혜라고도 한다.
많은종교 그중에 재대로 된 종교에서는 이 부분을 가장 신경쓰면서 한다.
불교경전이 거의 이것을 위한 것이고
유교도 마찬가이이며
오직 이것만을 수련하는 방파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오해가 있어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중요하지만 또 그만큼 어렵기도 하다.
생이지지는 이것을 말한다.
이것을 할 수 있으면 타고난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생이지지가 아니라고 했지만 호흡을 한것은 아니고 결국 이것으로 한 것이다.
안자도 호흡했을리가 없다.
운의 흐름을 안다는 것은 위의 능력들을 총동원 하는 것이다.
하늘에 떠다니기도 하고 어떤 움직임이 느껴지거나 보이기도 하며
관법으로 유추하기도 하고 직접 물을 수도 있는것으로
신명들이나 사람들의 뜻이 있어 방향과 의도를 알수 있다.
특히나 근래 10여년을 전후로 너무도 많은 변화와 작용을 보이는데 지금은 거의 하늘이 찢어질 지경이다.
이것을 안다고 대단할 것은 없다.
위로 갈 수록 인간세상과는 동떨어지 것으로 혼자알고 혼자 기다릴 뿐이다.
시간차가 많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차피 아는 사람만 알고 하는 사람만 한다.
여기 까지 가는 사람을 죽기전에 꼭보고 싶다.
하도 한이 되어서....
자질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8:37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막상 쓸려니 어찌 할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양해 바랍니다.
자질의 문제는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것 같은데
우선 자질이 좋으면 빨리 진행되는 것인가?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빠를수록 좋은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수련의 속도가 단순히 수련자체만 놓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아요 수련속도는 그사람의 인생의 문제에요
인생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지 수련만 놓고보면 안됩니다.
내가 수련과 어떻게 연관되어서 살아가는지 이것이 중요해요
수련하면서 아무런 효과와 증험도 없이 외롭고 폐쇄적으로 해야하는 인생인지
수련하면서 비난받거나 방해받으면서 해야하는지
수련한지 얼마안되어서 벌써 몸이 달라지고 뭔가 보이고 주위의 반응이 다르고 하면서 재미있게 하는지
힘들게 힘들게 한단계 한단계 경험을 일일이 다하면서 하는지 그냥 건너뛰듯이 쉽게 가는지
하다가 포기하고 또 다시하고 또 포기하고 또 돌아오고 하면서 방황하고 번뇌하면서 하는지
그외 사람수 만큼의 너무도 많은 경우가 있는데
이런것과 자질은 아무 상관없고 오직 그 사람의 운명입니다.
운명이라 해도 자질이라는 것과 말만 다르지 같은거 아니냐고 한다면
자질은 우선 내가 수련하면 3단이면 3단, 4단이면 4단,
그 수련의 경지를 도달할 수 있냐 하는 것으로
내가 보기에 모든 사람은 수련에 마음을 두면 3단에서 4단은 가능합니다.
갈 수 있는 경지는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자질은 같은겁니다.
이 이상을 가는것은 전생에 수련했었던 적이 있거나
스승이나 다른 방법으로 도움을 받은겁니다 자질과는 다릅니다.
투시나 각종 술법은 경우가 다른데
이건 자질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축구선수는 축구선수이고 유도선수는 유도 선수입니다.
자질이 다르죠 하지만 스포츠인 인것은 같습니다.
누군 투시하고, 누군 영통하고, 누군 기치료하고, 누군 퇴마하고
이런 초자연적 능력만 있는것이 아니라
학문에 재능이 있을 수 있고 권력적이어서 리더쉽이 있고
의술, 명리, 추진력, 경제력, 사회전반에서 자신의 자질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도 초자연적인 능력과 함께 능력으로 생각하고 같은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수련자는 자신이 할수 있고, 하고싶고,
하고 있는것에 더 열심히 해야지 다른사람의 능력에 관심가질 필요없습니다.
수련은 자기만의 것이지 남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수련의 기본골격을 쓴것입니다.
그런 단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계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능력으로 하는것이아니라..
그러면 나는 왜 힘들고 어려운 수련운명인가?
이것을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것입니다.
자기 삶에 자신을 갖고 진지하게 살아야지 남과 비교하고 난 왜 잘안되냐며 비참해 할 필요없습니다.
결코 자기자신을 학대하지 마시길 바라며 나아가 남에게도 그러지 말길 바랍니다.
그건 수련자가 할 짓이 어닙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성급하게 생각하고 남보다 더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다르고 인생이 다르니 당연히 제각각의 방법과 경험이 있는 것이지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군 1년만에 단전이 형성되고 누군10년 걸리면
이건 엄청난 차이고 그 만큼의 마음고생과 인생 역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자분이 더 높이가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도달하는 경지는 거기까지입니다.
실망말고 수련하세요
너무 인생을 단편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처음 늦다고 끝까지 늦지는 않으며
처음 힘들다고 끝까지 힘들지 않습니다.
앞서간 사람이 토끼처럼 잠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중에 나중에 결과를 보자구요
얼마나 누가 더 나갔는지
또는 강도입니다.
같은 기감이나 수련증험에서 그 강도가 모두 다릅니다.
기로 예를 들면 배에 따듯한 기감이 있다고 하는데
누군 뜨겁고, 누군 따뜻하고, 누군 그저그렇고 합니다.
이러면 뜨거울수록 좋을까요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감의 강도와 자질, 수련의 진행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감각도 인체의 한기관으로 개인차가 있는것인데
이것 하나로 평가하고 시비를 논한다면 그 정신수준이 의심스럽습니다.
각성의 강도도 마찬가지인데
문득 깨우칠수도 있고 머리에 충격을 가하듯이 할 수도 있고
확철대오라며 엄청난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당연히 강한강도의 경험을 하려 하겠지요
또 말하지만 경험의 차이일뿐입니다.
경험과 수련성과나 정도는 무관합니다.
이것을 연관시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번개에 얻어맞듯 깨우쳐도 지나고 나면 그 경험은 평등해집니다.
평등을 경험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하는 자신의 깨우침의 경험 일화는 일고의 가치없는 것으로
그 수련경지가 진정한 것이 아님을 뜻할 뿐입니다.
5단이 못된 것 입니다.
지평을 아십니까?
땅이 평평하듯 모두가 평평한 먼시각으로 보고 높고 낮은 사물이 사실은 별차이 없고 그저그런 것입니다.
이런것을 알아야 무심한듯 세상을 봅니다.
오히려 드러나고 뚜렷한 것이 못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수련 증험이나 깨우침을 자랑하고 자신이 표준이라고 하고 대단한듯 남 앞에서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런것이 진짜입니다.
만약에 지금 님이 그러고 있다면 자질이 남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 다음 잡념문제는
우선 몸에서 열이나 기운이 위로 몰라가 머리로 가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기운이 머리로가면 그기운이 말과 이미지로 번역되어 잡념이 됩니다.
가슴으로가면 감정이 되고
배로가면 기감이 됩니다.
그래서 열이많아 그럴수도 있고
평소 활동하면서 사지에 몰려있던 기운이 조용히 정좌하면 사지에 있던 기운이 머리로갑니다.
가만히 있으면 소화작용이나 머리가 가장 왕성하니까요
그러면 잡념이 됩니다.
오늘 경험한것, 하고 싶은것등의 것과
아쉬운일상, 기분나쁜것, 좋은것등 이런감정이 위로 올라와 생각을 만듭니다.
또 미래의 알 수 없는불안,
이건 앞으로 내일, 모래등에서 일어날 일이 걱정되어 오는 불안 긴장등 시간을 초월해서 잡념이 옵니다.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압니다.
다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감정으로 이미 불안,초조, 긴장, 설래임등으로 알고
그에따라 잡념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흡도 힘들게 하여 길이도 줄고 번거롭개 합니다.
이런것 외에 여러 심리적혼란이 생각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 심리적 혼란의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는것 이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또 생각중에는 내 생각만 있는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기운이 내머리로 들어와 생각으로 되기도 하고
내가 아는 사람이 나를 떠올리며 생각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하며 나에대한 감정이 전이되어 그렇기도하고
어쩌면 타존재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세상의 모든 현상은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결코 혼자만은 아닙니다.
이런것들이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납니다.
심지어 미래에 내가 경험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고 다른것과 뒤죽박죽이어서 헤깔리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것은 모든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로
나중에 수련이 진전되어 마음이 맑아지면 자신의 생각의 출처를 알 수 있을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잡념없이 수련해야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재능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8:38
재능에 대해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면
불확실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생을 들먹이며
근거로 하는것이 논리적이지 못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한다.
전생에 무인이었거나 그와같은 성향이 있으면
기를 느끼며 운행하는 수련이 잘되고
문인이었거나 그와같은 성향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힘겨워하게 됩니다.
어떤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기는 소위 무협적 기의 성질을 띠게 됩니다.
이건 무녀나 퇴마류의 기와는 다른것입니다.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고 둘사이에 약간의 구분은 할 수 있는 성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걸 생각하면서 요즘은 호흡이 기호흡이고 기운행이 전부인듯 수련의 체계가 되어가고 있는것이
세상이 많이 바뀌어
이제는 무인이 큰소리 치며 살기도 하는구나 새삼 재미있기도 하고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문인이나 문인적 셩향의 사람은 기수련적 방법이
썩 맞지는 않기도 하여 힘들어 하기도 하는데
사리연구나 이치를 이해하는 좀더 관념적이며 형이상학적 깨우침을 추구해야 할것으로 봅니다.
그래야 개념적 수련학이 발달되어 설명하고 이유를 알고 원리규명에 도움될 것으로 봅니다.
수련의 방법만 설명하고 왜하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고
신명계의 설명과 그 작용적 원리등 너무도 알아야 하고 찾고 해명해야 할것이 많은데 이것을 해야합니다.
두분야에 재능있고 할 수 있으면 좋지만 역시 쉽지 않으니
서로 돕고 이해하고 교류하고 또 한편으론 수련의 경지를 얻어야하는 하나도 쉽지않은 길이 있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설명하면 ♣ 자천이해 현일 2009.11.04. 19:01
定慧정혜
止觀지관
性明성명
삼매,위빠사나
좌도,우도방
생각해보면 비슷한말이다.
수도를 하다보면 수도하는 신체적 연마와 그효험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 설명하고 점검하고 알아가는 것 즉 통찰과 깨우침이 있다.
서로 하나만 붙잡고 그것이 제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아닐것이다.
둘다 균형이 있어야하지만
이것도 사람마다 성향과 개성이 다르니 한쪽이 더 수월하기도 해서
균형이란것이 저울처럼 중간을 잡는것은 아니고
부족한것을 좀더 노력해서 채우려는 자세가 중요할거라 본다.
지금 수련단체는 수련을 직접체험하고 느끼고
경험하는것에 치중해서 그 지적체계와 관이 형성되기가 어려워보인다.
또 수련은 전통처럼 하는데 그 인식은 서구의 과학으로 하는 경우도 있어
괴이하기도 하다.
아니 꼭 이것이 나쁘지는 않다.
나도 그렇게 하고 철학과 과학적으로 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이건 어떤면에서는 괴물을 만들어내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어
잘못하면 안하니만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전통적으로 하려해도 이것도 전혀 현실성 없거나
시대착오를 하는경우가 있어 어렵고
지금 시대에서는 아무리해도 서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은연중에 들어와 결국은 어떻게해도 관념체계에
동양과 서양이 뒤섞여질 수 밖에 없기도하다.
다만 혼합된것이 잘못은 아니다.
혼합되어야 하기도하다.
그래서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하는데
어쩐지 지금 수도자들이 위빠사나나 관법수련, 성을 깨우치려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이런것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우도라고 잘못알고 있는 단체나 이런것이 안타깝다.
전혀 이런방면으로 신경쓰지 않는것 같아 아쉽다.
그래서 지금 수련해서 삼매는 들어가도 깨달음을 얻은사람은 없다.
각성하여 지혜를 얻은 사람이 안보여서 걱정이다.
지금수련이 모두 정定수련이다.
호흡이든 주문이든 명상이든 또는 화두이든 선이든
사실 위빠사나도 내가보기에 지금하는것은 정수련이지 본래의 그것은 아니다.
너무 방법상에 치우쳐 있다.
선도 관인듯하지만 이것으로 넘어간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모르겠다.
그리고 넘어간 사람도 내가보기에 수련법과 상관없는 다른것으로 한것이다.
암튼 이건 쉽게 수련진행으로 계제를 오르려는 것이나
성불하려는 것이나 신선이되려는 것이나 하는 그런 성장하는 의미이다.
성장을 생각한다면 결국은 이것이다.
혜는 인식이고 지적 확장이다.
이런것이 별로 없다고 하는것은
그들의 생각이나 학문이나 행동이 수련한만큼 되지 않아서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될것이다.
수련성장이 안되는것은 열심히 안해서가 아니라
혜가 부족해서이다.
평등심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것은 지혜가 없어서이다.
열반에 못들고 신선이 못되고 득도가 안되는것은 인식의 부족이다.
부처님이 위빠사나수련을 했다고 하는데
그건 그당시나 지금이나 이거 다음 수련을 가르칠 제자가 없어서이다.
이런건 앞에서 말했듯이 대단이 끝이다.
그 다음것은 이런것으로 안된다.
그런데 지금 수도하는 사람들은 겨우 양신이나 출신하는것이 목표이니 한심하다.
양신에 무슨 지혜가 있나..
차이나놈들 머리나쁜건 변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자질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