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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표(Identification Tag) 이야기
군대문화 이야기(4) 전사(戰士)의 신분증
조선일보 입력 : 2018.03.30 15:00
미군의 신병 지급용 인식표를 제작하는 통칭 "개목걸이 베이커리(Dog Tag Bakery)"에 아직 사용되지 않은 새 인식표들이 걸려있다. <출처 : 미 국방부/Marvin Lynchard>
군인의 신분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증명된다. 예를 들자면 임관사령장, 신분증, 전역증 등 다양한 형태의 서류나 공문서가 있는데, 이들 문서는 법적으로 해당 서류의 소유자가 군인 신분임을 국가가 보증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통용되는 신분증은 이등병부터 대장까지, 산 이와 죽은 이를 모두 망라하여 단 하나 뿐이다. 바로 인식표이다. 인식표는 흔히 ‘개목걸이(dog tag)’라는 별명으로도 부르는데, 이는 대부분의 국가가 인식표를 목에 거는 목걸이 형태로 제작하기 때문에 유래된 별명이다. 오늘날 군인 신분이라면 누구나 소지하게 되는 인식표는 고대에서부터 기원하고 있으나, 오늘날의 모양과 쓰임새로 완성하게 된 계기는 근대에서 현대로 전쟁 양상이 변화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 시대의 인식표
구체적으로 군번줄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이 언제,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가장 오래 전에 쓰인 군번줄은 로마 군단의 ‘시그나쿨룸(signaculum)’이다. 로마 병사들은 가죽으로 된 작은 띠에 이름을 비롯한 자잘한 개인정보를 기재한 후 목에 걸고 다녔다. 로마군은 병사가 징병 검사를 마치고 정식으로 입대하게 되면 시그나쿨룸의 정보를 인증해주는 의미로 인장을 찍어주어 이것이 신분증 역할을 하게 했다. 또한 시그나쿨룸은 전쟁에서 전사자가 발생할 경우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시그나쿨룸을 발급했는지는 불확실하나, 21세의 나이로 로마군에 징집되자 이를 거부한 순교자 ‘테베스테의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274~295)’의 일화에 시그나쿨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군 입대를 거부하자 아프리카 총독에게 체포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로마 군인의 선서를 하고 ‘시그나쿨룸’을 받아들이던가 죽음을 택하라고 종용 받자 시그나쿨룸을 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참수형을 택한 기록이 있다.
로마군의 인식표인 '시그나쿨룸' <출처: gsr-roma.com>
하지만 시그나쿨룸은 오늘날의 군번줄과 1:1 대응을 한다고 보기는 약간 어려운 측면도 있다. 우선 이 증명서는 병사에게만 발급한 것이 아니라 가끔 로마제국의 재산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발급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오늘날의 라벨(label)처럼 특정 물건에 붙여 놓아 생산자나 소유자 같은 정보를 표시했다. 심지어 로마제국 후기에 들어서면 병사의 입대 시 시그나쿨룸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몸에 문신처럼 특정한 문양의 인장을 문신 형태로 새겨버리게 되는데, 이는 로마군에 대한 영원한 소속감을 갖게 해 줌과 동시에 퇴역 군인에겐 복무 증명서 같은 역할을 하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워지지 않는 표식을 새김으로써 전투 중 병사가 배신하거나 적에게 투항할 의지를 꺾을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량살상이 낳은 인식표의 역사
군번줄의 필요성이 최초로 제기된 전쟁은 남북전쟁(The Civil War, 1861~1865)이다. 미국판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불리는 남북전쟁은 4년에 걸쳐 미 연방군(북군)과 남부연합군(남군)이 전쟁을 치르면서 쌍방이 도합 240만 명 이상을 동원하였으며, 그 중 25%에 가까운 62만 명이 전사했다. 이렇게 대규모 전사자가 발생한 이유는 남북전쟁의 독특한 성격 때문인데, 이 전쟁은 최초로 본격적인 현대의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한 전쟁인 반면, 전쟁 수행 방식은 전쟁 중기까지도 근대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개틀링 기관총과 작열식 지뢰 등의 등장으로 화력이 커지고 살상범위가 넓어진 무기가 다양하게 동원된 것에 비해 전열 보병의 전투 방식은 대량의 전사자를 양산하기에 좋은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쟁 기간 중 발생한 전사자의 58% 가량만이 제대로 신원이 확인 됐을 정도 때문에 병사들은 설령 자신이 전사하더라도 최소한 가족에게 이를 알릴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전 중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게 될 경우 자신의 신원이나 주소를 알릴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 병사들은 작은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비롯한 소소한 정보를 적은 후 이를 전투복 상의의 안쪽 등에 핀으로 꽂아 놓았고, 어떤 병사들은 벨트 버클 안쪽이나 배낭에 꽂아 두었다.
대량살상전의 효시인 남북전쟁의 모습. <출처 : US Civil War Research and Commemoration, 미 육군>
엉뚱하게도 ‘인식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들 병사들의 행동을 본 미국의 사업가들덕 이었다. 이들은 군 내에서 인식표가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한 면에는 이름과 주소, 계급, 소속부대 등을 기재하고, 다른 면에는 미국의 방패나 독수리 문장이 새겨진 금속 주화를 제작했다. 이 주화의 위 아래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옷이나 배낭 등에 꿰맬 수 있게 하여 오늘날의 인식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남북전쟁에서 인식표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사용한 것은 주로 북군이었다. <출처: Ephemera Society of America>
남북전쟁을 통해 시장성을 입증한 인식표는 불과 5년 뒤에 벌어진 보불전쟁(普佛戰爭) 때에 다시 등장한다. 1870년에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 전쟁이 발발하자, 프러시아 군은 정식으로 병사들에게 인식표를 지급했다. 개 목걸이를 뜻하는 ‘훈데마르켄(Hundermarken)’이라는 별명이 붙은 프러시아군의 인식표는 사실상 현대의 모든 군대가 채택한 인식표를 처음으로 도입한 케이스가 되었으며, 뒤따라 주변의 각국도 인식표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기 시작했다.
미군의 현대화와 인식표의 정착
앞서 말했듯, 미국의 남북전쟁은 전사자의 신원 확인 문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불과 4년여 남짓에 걸쳐 벌어진 전쟁 동안 쌍방의 군인과 민간인을 모두 합쳐 백만 가까운 목숨이 희생됐다. 전쟁이 끝난 뒤 미 육군은 30만 구에 달하는 신원 미확인 병사의 시신을 모두 합쳐 국립묘지에 묻었으며, 빅스버그(Vicksburg) 국립묘지에 매장된 전몰자의 75%가 신원 미상의 전사자였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솔즈버리(Salisbury) 국립묘지에 묻은 12,126명의 전몰자 중 99%가 신원 미상의 전사자였다. 앞서 말했듯 전쟁 기간 중에는 미국의 개인 사업자들이 간이 인식표를 제작해 팔았으나, 미 육군도 전사자의 신원 확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주 비일(Beale) 공군기지에 설치된 신원 미상 전몰장병 추모관에 걸린 인식표의 모습. 이 인식표는 2011년 10월 30일 이후 이라크 자유작전(OIF) 및 항구적 자유작전(OEF)에서 전사한 6,259명의 장병이 소지하던 군번줄을 모아 추모하고 있다. <출처 : 미 공군/Staff Sgt. Jonathan Fowler>
결국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식표를 채택한 것은 1906년으로, 약간 타원형의 모양을 띤 알루미늄 판에 이름과 생년월일, 소속대 등을 적는 형태였다. 이 인식표는 한동안 개인의 선택에 따라 구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에 미 육군이 정식 개인 용품으로 채택해 전 장병이 인식표를 소지하게 되었다. 영국군 역시 미군과 유사한 알루미늄 판으로 된 인식표를 1907년부터 채택했으며, 주요 영영방 국가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뒤따라 동일한 인식표를 채택하면서 사실상 인식표가 군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인식표. <출처 : National Archives UK/William Spencer>
미 육군은 1916년 8월 13일자로 인식표를 정식으로 채택함에 따라 병사 한 명당 두 개의 인식표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두 개를 지급한 이유는 인식표의 소지자가 전사한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 한 개의 인식표는 즉각 목걸이에서 제거되어 전사자 명부 기록용으로 떼어 갔고, 다른 한 개는 시신에 계속 걸어 두어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장에서 즉각적으로 전우의 시신을 회수하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시신을 회수하기만 한다면 군의관이 신원 확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1916년부터 지급한 인식표에는 ‘군번(Identification number)’이 부여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기존 인식표와의 차이이다. 1918년부터 인식표에는 성명과 계급, 소속 연대, 군단 (혹은 부서), 국명(USA), 군번을 기재하게 했고, 끝에는 종교를 표시하는 C(천주교), H(힌두교), P(개신교) 등을 새기게 했다. 이 인식표는 강하게 당길 경우 끊기 쉬운 재질의 목걸이에 꿰어 지급했다.
1918년 경에 사용된 미군 인식표로, 찰스 해밀턴 휴스턴(Charles Hamilton Houston) 중위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출처 : 미 의회도서관, The Library of Congress>
1930년대에는 인식표에 군번 대신 사회보장번호(SSN: Social Security Number)를 새겨 민간인에게도 지급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고 폐기됐다. 하지만 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그와 갈라서면서 최악의 적이 된 언론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가 ‘루즈벨트 행정부는 모든 민간인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우려고 하고 있다’라고 공격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구형 M1940 인식표. 사진은 B-17F 멤피스벨 조종사였던 로버트 모건(Robert Morgan) 대위의 인식표이다. <출처 : 미 공군/ Ken LaRock>
군번줄은 2차 세계대전 시기가 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귀퉁이가 둥근 사각형 모양이 되었다. 1940년에는 일명 “M1940”으로 명명된 오늘날의 둥근 직사각형 모양의 인식표가 등장했으며, 재질 또한 알루미늄에서 부식되지 않는 스테인레스로 바뀌었다. 또한 인식표에 기재되는 내용이 단순화되면서 성명과 군번, 국적과 응급 수혈을 위한 혈액 정도만 적게 되었다.
최근 미군에 지급되는 인식표는 한쪽 끝에 홈이 없고 필수정보만이 표기되어, 이름, 사회보장번호, 혈액형, 종교가 표시된다. <출처: Chaplain Somya Malasri, U.S. Army>
재미있는 사실은 미군의 초창기 인식표에는 사각형 한 쪽 끝에 살짝 파고들어가 있는 ‘홈’이 있다는 점인데, 이 홈이 있던 이유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전사자의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물리도록 하여 시신이 입을 벌리고 있게 할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더운 지방에 시신을 두거나 시신을 오래 방치할 경우 내부 부패로 가스가 차 올라 시신이 터질 수 있으므로 일부러 입을 개방해 놓을 용도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것이 낭설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데, 우선 전사자가 발생하면 시신을 훼손하면서 인식표를 입에다 물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목걸이 형태로 계속 걸어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 ‘홈’은 초창기 공작기계로 글자를 새길 때 기계에 물려 두기 쉽도록 파 놓은 홈일 뿐이었다고 반박한다. 이를 증명하듯 미군은 1950년대부터 이 홈을 없애 버린 인식표를 지급해오고 있으나, 이것이 의무 후송 및 수송체계의 발달로 없앤 것인지, 아니면 공작기계의 진화로 없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미 육군의 돈 캠벨(Don Campbell) 중장이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인 부친을 기리기 위해 항상 그의 인식표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 <출처 : 미 제 3군단/포트 후드(Fort Hood) 공보실>
두 개의 인식표는 길고 짧은 두 개의 다른 줄에 별도로 걸려있는데, 이는 인식표의 높이를 다르게 하여 두 금속이 계속 부딪혀 쇳소리를 내는 것을 막을 목적도 있었지만, 전사자의 시신을 천 등으로 덮어놓는 경우 짧은 줄에 걸린 인식표를 떼어내 발가락에 거는 용도이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기도비닉(企圖庇匿)이 필요한 상황에서 금속 인식표가 부딪혀 소리를 내는 상황을 막기 위해 백색의 플라스틱 재질 인식표 테두리를 씌웠는데, 이는 베트남전 시기에 검은색 고무 테두리로 바꾼 뒤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다양한 인식표 테두리의 모습 <출처: 유튜브>
현재의 인식표와 군번줄은 1959년부터 미 육군 뿐 아니라 공군과 해군, 해병대까지 모두 채택하여 공통적으로 착용하고 있다.
현대의 군번줄과 인식표
덴마크 군 인식표. <출처 : wikimedia commons>
인식표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적으로 군인의 당연한 소지품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지고 널리 쓰이는 모양은 우리 군도 채택하고 있는 타원형 모양의 인식표지만, 군에 따라서는 다른 형태나 모양, 방식의 인식표를 쓰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캐나다 군이나 이스라엘 군, 덴마크 군의 경우는 두 개로 쪼갤 수 있는 한 개의 인식표를 지급하고,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군번줄에 단 인식표 대신 간략한 개인정보를 적은 종이를 작은 통에 담아 휴대하게 했으나 전쟁 이후 금속 재질의 타원형 인식표를 도입해 성명과 군번을 기재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올해부터 인식표와 복지카드 등을 결합시킨 전자태그 개념을 시도할 예정에 있다.
이스라엘 방위군(IDF) 인식표. 하나를 반으로 쪼개게 되어 있다. <출처: Public Domain>
인식표는 초창기 군인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증의 성격으로 처음 시작되었으나, 오늘날처럼 활성화 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살상력이 거대해지기 시작한 18세기 이후부터다. 오늘날의 인식표는 신원확인이 어려운 전장 위의 전사자를 구분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다소 꺼림칙한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상자에게 맞는 혈액을 수혈하기 위한 혈액 정보나 신분조회를 위한 군번과 소속 군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점을 본다면 ‘전사의 신분과 생명을 지켜 주기 위한’ 목적 또한 강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차 대전 때 소련군 ID 캡슐 <출처: (cc) 3aStalina at warrelics.eu>
오늘날의 군번줄은 민간분야까지 퍼져나가면서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의료 분야에서도 환자의 신원과 혈액 정보, 비상연락처 등을 표시할 목적으로 쓰이고 있고, 아동의 미아방지 용도로도 활용되면서 이름과 주소, 연락처와 소형 GPS를 이용한 위치 추적 기능까지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미래 전장에서는 개개인의 병사가 착용하는 휴대용 장비와 결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를 담고 더 폭넓은 활용분야를 갖게 될 것이다.
한국전쟁 인식표. 작년 10월에 발굴된 고 김창헌 일병의 유해에서 나온 것이다. <출처 : 국방일보>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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