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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마스 전투 (삼상 14:1-52)
영적적용:육중심의 실패
설명
믹마스 전투는 믿음의 사람 요나단에 의해 승리하는 전쟁인데 사울의 경망스
러운 행동으로 완승을 놓치고 만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도 육신중심에
있는 그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1. 육신적인 안일과 소득에 만족하는 신앙이다.
2절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명"
☞ 미그론은 숨고 머물기 좋은 천연요새로 이 곳에 사울이 600명의 군대와
함께 머물었음은 육신중심에 빠져 발전을 원하지 않는 영적상태의 예표이다.
2.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3절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법궤와 에봇 입은 대제사장을 대동했듯 육신
에 속한 신자들은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한다.
3. 변덕스럽다.
18-19절에 "이리로 가져오라 … 네 손을 거두라"
☞ 이와 같이 육중심의 신앙은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묻고 엎드려 구하다가도
상황이 좋아지면 하나님을 잊는 감정적인 신앙으로 변덕스럽다.
4. 어리석다.
24절 "맹세시켜 ‥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 사울은 상황이 호전되자 전군에 금식령이라는 엄청난 맹세를 했는데 이와
같이 육신중심의 신앙은 그 믿음이 상황에 근거하고 있다.
5. 그러나 이런 사람도 사용하신다.
47-48절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 이는 사울의 업적으로 이는 아직 육신중심의 신앙일지라도 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의 일은 내 경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6. 큰 신령한 역사를 이룰 수도 있다.
1절에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 "
☞ 여기 요나단은 객관적으로는 큰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상징이요, 주관
적으로는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상징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직분과 은사를 통해서 우리들을 온전토록 도우신다.
7. 육신중심의 신자가 나아갈 길은 십자가이다.
4절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 여기 보세스는 '빛나다, 미끄럽다'는 뜻이요, 세네는 '아카시아, 가시'라는
뜻이다. 이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십자가의 길로서 육신중심의
신자들은 자기를 포기하는 이 길만이 나가야 할 길이다.
8.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8-16절)
13절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 여기 손발은 겸손이요 위는 천성인데 이처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려면
내가 온전히 죽어지고 순종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9. 경건이 필요하다.
15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 겸손에 설 때 우리 속에는 죄를 소멸시키는 놀라운 경건이 발생한다.
강해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믹마스 전투"라는 제목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믹마스 전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침으로 발
생한 블레셋과의 대전쟁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는 철병거로 무장한 블레셋
의 군대를 농기구로만 무장된 소수의 이스라엘의 군대가 막아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믿음의 사람 요나단에 의해 상황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여기
서 우리는 너희에게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산을 명하여 바다로 옮긴다 하
신 그 말씀이 실감이 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사울의 경망스러
운 행동으로 이스라엘은 다된 전쟁인데도 완승을 놓치고 맙니다.
이 믹마스 전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육신중심의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
가를 보여줍니다. 이 육신중심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도 육신이 중심이
되어서 이끌어 가는 신앙을 뜻합니다. 지금 많은 성도들이 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 잘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육신중심의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1. 육신적인 안일과 소득에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2절을 보면 "사울이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명 가량이며" 했습니다.
여기 기브아 변경 미그론은 사울이 적을 피해 숨어있기로는 가장 좋은 장소입니
다. 깍아지른 천연 요새의 절벽에 적의 동태를 한 눈에 파악하는 전망 좋고 더구
나 그 곳에 싱그러운 석류나무가 있어 그 분위기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습니
다. 이 곳에 사울의 600명의 군대가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머물렀다
는 용어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그 곳에 정체되
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육신중심의 상태를 어쩌면 이렇게 잘 묘사할 수가 있을까요? 여기 미그
론은 '절벽'이란 뜻으로 좋은 의미로는 거룩이지만 여기서는 나쁜 의미로 자기중
심의 철저한 이기주의를 나타냅니다. 또 이 곳은 안전지대요 망대와 같은 곳으로
안일과 관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석류 역시 좋은 의미로 쓰일 때는 성령의
열매이지만 나쁜 의미로는 자기 만족을 뜻합니다. 그리고 함께 한 600명은 육신
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머물렀다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을 원하지 않는 영적 상태
를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중심의 신앙이란 자기의 육신적인 만족만 이루어지면 더 이상 다
른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어려울 때는 힘써 부르짖지만 육신적
으로 형통하고 평안하면 거기에 안주하여 열심할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더구나 그
들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는 영중심의 신앙에 필요와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적인 문제를 가지고는 철야를 할
수도 있어도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초기에는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
을 통해서 주님을 더 의지하는 계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
는 사람들에게 기복주의를 너무 공격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곳에 머물
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열매를 통해서 기복주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보여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기복주의에서 영혼중심으로 바꾸는 전환점에 있을 때는 대개 기도를 많
이 못합니다. 그것은 전에 육신의 소원만큼 아직 영혼의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영중심의 기도 한 시간이 육중심의 기도 열 시간보다 더 많
은 축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미그론의 석류나무 아래 머물러 있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속히 영중심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2. 육신중심의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3절에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
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
라" 했고, 18절을 보면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
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라" 했습니다.
또 여기 놀라운 일은 사울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법궤와 에봇 입은 대
제사장을 대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법궤와 대제사장은 그 곳에 있을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 물음 그 자체도 결국
자기를 위한 부속품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신앙은 주권을 하나님께 두어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계획은 자기가
세워놓고 하나님에게 역사해 달라고만 합니다. 한 술 떠서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돕지 않으신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방황합
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노릇 다 하고서 하나님에게 도와만 달라는 것은 근본적
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그 동안의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3. 육신중심의 신앙은 대단히 변덕스럽습니다.
18-19절에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
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육중심의 신앙은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묻고 엎드려 구하다가도 상황
이 좋아지면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감정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를 경험하거나 기분이 좋으면 온갖 충성을 다하다가 기분이 언잖으면 집어 치웁
니다. 그래서 이랫다 저랫다 아주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좋을 때는 한 없이 좋
다가 나쁠 때는 돌아서거나 침체합니다.
4. 육중심의 신앙은 늘 어리석습니다.
20-46절까지의 내용인데 블레셋의 기세에 눌려 숨어살던 사울은 상황이 호전되
자 어느 누구도 그 믿음을 흉내낼 수 없는 엄청난 서원으로 맹세합니다. 그것은
전군에 내린 금식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하는데 무슨 금식령입니까? 이것은 잡
혀 죽기 위한 것과 같습니다. 또 금식령을 내리려면 진즉 내려야지 상황이 호전되
니까 왜 내립니까? 이것은 사울이 믿음이 없었다는 증거요 그의 믿음은 보이는
환경에 근거를 둔 허상이요 감정을 믿음으로 오해했음을 보여줍니다.
어려울 때 그의 믿음은 기미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과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나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백성들까지 군대에 합
류하여 강해지고, 적군들끼리 서로 쳐서 죽고 도망치는 이 광경이 더 확대되는 것
을 보자 그 때야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일 뿐 참 믿음이 아니었
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더욱 분수를 넘어서 어느 누구도 감당치 못할 놀라운
사실을 선언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육중심의 신자들은 그 믿음이 상황에 근거하고 있기에 상황이 좋아지
면 용기백배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선언하는 실수를 저
지릅니다. 예를 들면 무언가에 감동을 받아면 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살겠다고 서원하기도 합니다. 혹은 배 고프지 않을 때는 40일 금식이라
도 할 수 있다고 소리치다가도 사흘만 지나면 그 믿음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혹은 무엇을 깨닫으면 그것에 지나치게 고무되어 그것 만이 제일이요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육에서 나온 감정이지 영혼에
서 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 결과 사울은 요나단까지 죽일 뻔 했고 기진맥진하여 다 된 전쟁조차 마무리
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 때 온전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블레셋은 완전히 패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돌아가 후일에 다시 쳐들어와 길보아산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육신중심의 신앙
은 감정적이고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중심의 믿음은 말씀과 하나님의 인격에
근거하기 때문에 환경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수가 나를 둘러 친다할지라도
다윗처럼 오히려 안연할 수 있습니다.
5. 그러나 이런 믿음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7-48절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
졌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아직 육신중심의 신자도 쓰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
의 단계가 높으면 좋지만 주의 일은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내
경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은 내 경건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
다. 경건 할 수록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특별하게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업적을 보고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면 낮은 단계에서도 생명단계의 놀라운 역사를 경
험하게 하십니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의 품 안에서 완전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
가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다고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실재와 경험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말고 계속하여 영성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아직 육중심의 신자일지라도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고백하고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드리면서 기도로서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
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죄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육도 이기고 사단도 이
기게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믿음이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면 안됩니다. 왜냐
하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6. 또 이런 육중심의 신앙에도 신령한 역사가 있습니다.
1절에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
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본 장의 초반부에서 요나단의 놀라운 믿음의 활약상을 보게 됩니다. 6절
에 나타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는 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대단한 것입니다. 수십만의 적군을 앞에 두고 개인 한 사람
이 어떻게 그러한 선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요나단은 객관적으로는 큰구원
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상징이요, 주관적으로는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상
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직분과 은사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육신중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지금도 신령한 역사를 진행하고 계십
니다.
7. 육신중심의 신자가 나아갈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4절에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 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했습니다.
요나단은 블레셋군이 주둔한 믹마스 앞에 서 있는 보세스와 세네라는 두 험한
바위를 통해 블레셋 군대에 접근했습니다. 믹마스는 넓은 땅이지만 아랫쪽은 온통
절벽으로 되어 있어 천연요새지입니다. 그런데 그 절벽 아래에 보세스와 세네라는
두 바위가 있어 믹마스로 가려면 반드시 이 두 바위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바위는 이름이 붙은 기묘한 바위였는데 보세스 바위는 '빛나다, 미끄럽다'는 뜻
으로 아주 미끄럽고 광채나는 바위입니다. 그러니까 올라가면 미끄러지고 올라가
면 미끄러져 올라가기 어려운 바위였습니다. 그리고 세네는 '아카시아, 가시'라는
뜻으로 뾰쪽하기 그지 없는 보세스와는 정 반대의 위험한 바위였습니다. 그런데
믹마스로 가는 길은 오직 이 길 밖에는 없기에 요나단이 이 두 바위를 통해서 블
레셋에 접근합니다.
여기에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보세스와 세네는 영적으로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실 때 미끄러저 넘어지고 가시에 찔리
신 것처럼 이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그 적용이 순식간에 되는 것
이 아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끄러지고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죽고
포기하면 되는데 잘 안되니까 올라가다가 미끌어지고 또 미끌어집니다. 또 가시와
같이 찔러 꾹 참아야 하는데 잘 참아지지 않고 아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 밖에는 승리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골2:15에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신중심의 신자들은 반드시 이 십자가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지 않고는 영생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여기만 통과하면 내
안에 사단의 군대가 얼마든지 간에 다 쳐부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
서 십자가를 나에게 적용시켜 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나깨나 '나를 죽여
주십시오' 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하신 말씀을
체험해야 합니다.
8. 더 온전한 승리를 위하여 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12-14절에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를 대하여 가로되 우리에
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
고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가 반일경 지단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인 가량이라" 했습니다.
요나단은 적군들이 올라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손에 붙이시
는 표징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그
곳이 대단한 절벽이었기 때문에 손발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이 되려면 손발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손발은 겸손을 뜻합니다. 천국은 겸손
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성숙은 우리가 겸손한 만큼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에 거할 때 우리는 다 이겨짐을 발견합니다.
9. 경건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15-16절에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지더라" 했습니다.
믹마스에 올라간 요나단이 블레셋 군인들을 죽이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
사하사 적군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심과 천지가 떨리는 지진이 일어나 블레셋 군
대는 온통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포에 질려 서로를 적으로 오
인하고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이와 같이 겸손의 위치에서
주님을 섬길 때 심령 속에 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경건이 발생합니다. 경건이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이 나를 주장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세력은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뿔뿔히 도망치고 맙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
느니라"(롬8:8) 고 말씀합니다. 육신중심의 신앙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굴복할 수도
영화롭게도 못합니다. 우리는 어서 속히 영에 속한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러기 위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깊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육적인 것을 온전히 처
리하고 그리스도 안의 온전한 하늘에 속한 믿음을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믹마스 전투가 우리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