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8
은혜 뒤의 위기를 극복하라 /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로빈슨이란 목사님에게 어느 교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마귀의 존재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가 물었습니다.
"저는 마귀를 만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마귀를 만나지 않은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그것은 당신이 마귀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향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면 마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마귀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심통을 부립니다. 초신자들의 경우를 살펴보십시오. 새로 하나님을 믿고 참되게 살아보려고 하면 마귀가 들고일어납니다. 마귀가 시험을 주고 어려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냥 순순히 보내주지 않습니다.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면 믿음 약한 초신자들은 겁을 먹습니다. 지금까지 섬기던 신들이 노했다고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물러 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것은 믿음으로 여겨야 하는데 믿음이 없으니 어떡합니까? 먼저 믿는 성도들이 잘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신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마귀의 발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또 마귀는 언제 발악하는가? 하나님이 일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마귀는 은혜가 있는 곳에 훼방을 놓습니다. 성도들이 은혜 받고 기뻐하면 마귀가 심술을 부리면 그 은혜를 다 까먹게 만듭니다. 은혜를 다 쏟아버리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은혜 받았다더니 뭐 저래"하는 소리를 듣게 만듭니다. 마귀가 심술을 부리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잘 되는 것이 보기 싫어서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이유도 뚜렷한 것이 없는데 티격태격하게 만듭니다. 별일 아닌데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마귀가 장난하는 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장난으로 은혜 뒤에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옛말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마귀가 심통을 부립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귀가 장난치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은혜가 충만한 것을 보고 그냥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잘 되려고 하는데 뒷짐지고 앉아 있겠습니까? 마귀도 들고일어납니다. 은혜를 다 쏟아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 뒤에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은혜뒤의 위기
오늘 봉독한 말씀은 은혜 뒤에 위기를 맞았던 엘리야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당당하던 엘리야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담대하게 외치던 엘리야의 기개는 다 어디다 버리고 이제는 죽고 싶다고 허약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위기였습니다.
이스라엘 갈멜산에는 칼을 들고 있는 엘리야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물리친 용맹스런 엘리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아합왕 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알의 종교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과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결판을 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인지, 바알이 참 신인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참신인지 알아보고 그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세운 제단에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알은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는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임을 온 천하에 증거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게 하고 기손 시냇가로 내려가서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왕후 이세벨이 들었습니다. 이세벨 왕후가 펄펄 뜁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의 배후가 이세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펄펄 뛰다가 엘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열왕기상 19장 2절을 보십시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하나같게 하리라." 이세벨의 서슬 퍼런 선전포고였습니다.
이세벨의 선전포고를 들은 엘리야는 무너져 버렸습니다. 갈멜산에서 승리하고 당당하게 외쳤던 바로 그날의 일입니다. 엘리야는 생명을 위하여 브엘세바로 도망쳤습니다. 또 하룻길을 행하여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은혜 뒤에 오는 위기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되도록 장난치는 것입니다. 엘리야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마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엘리야를 꺾으려는 마귀의 작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영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영계의 현실을 바로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야 은혜를 쏟지 않습니다.
석교가족 여러분! 마귀는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마귀는 은혜가 충만한 곳에 공격의 목표를 삼습니다. 은혜 받으신 분들은 그 은혜를 잘 지키십시오. 이를 위해서 오늘 열왕기상 19장의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여기에는 엘리야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처방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 하여 <은혜 뒤의 위기를 극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며 하나님의 처방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피정의 길
하나님의 첫 번째 처방은 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힘을 내라고 격려하시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피정가게 하셨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떠나서 조용히 하나님만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열왕기상 19장 5∼8절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로뎀나무 아래서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여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 40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호렙산은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신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였습니다. 모세는 그 산에서 40일 금식기도하며 십계명 돌판을 받았습니다. 즉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집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렙산으로 보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잠시나마 복잡한 세상, 살벌한 세상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단독으로 대면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재충전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기를 만날 때 조용히 주님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오. 그곳이 기도원이든 교회든 상관없습니다. 더러는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곳에 가서 조용히 하나님을 대면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고 곤고할 때 한적한 곳에 가서 주님을 만나면 큰 힘을 주십니다.
영적 고독의 극복
하나님의 두 번째 처방은 엘리야의 고독을 극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를 괴롭혔던 것은 자신 혼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실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기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고 하나이다."(10절)
"나만 홀로 남았거늘"이라고 말하는 엘리야의 고독을 하나님은 두 가지 차원에서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셨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로서 엘리야는 큰 힘을 얻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위기를 만날 때 혼자라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 영적 고독이 맥이 빠지게 합니다. 영적 고독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듭니다. 시편에 보면 영적 고독을 호소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니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그러나 이 영적 고독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녀와 함께 하십니다. 또 우리에게는 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7000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미한 음성
특별히 성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큰 징조 가운데서 찾으려 합니다. 열왕기상 19장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지진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히 큰바람 가운데도 역사 하십니다. 큰 지진도 일으키십니다. 큰불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본문이 주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큰바람, 지진, 불 가운데서 찾지 말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큰 징조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으려는 사람은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 조용히 역사 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처럼 부드럽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미한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열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확신 갖고 위기를 극복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