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재림 때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약간 엉뚱한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우리 안에는 "자아"가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영원한 심판과 영생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반드시 자아를 직면해야 하고, 잘 처리해야 한다. 믿기 전에는 본능따라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주님을 믿게 되면 자아를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자아를 처리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아를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실현의 끝에는 심판과 저주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땅에 것에 귀속된 자아실현은 결국 심판으로 끝난다. 이것이 못된 자아실현의 위험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1절)
자아실현으로는 천국을 맛볼 수 없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나 환경에 상관없이 행복하고 평안을 누리며 살지만, 자아실현을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은 시간과 환경에 행복이 묶이는 삶을 산다.
자아가 죽고 예수님이 주인되면 지금 여기에서 바로 천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아실현을 꿈꾸며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욕심이 끊임없이 일어나, 땅에 것에만 집중하며 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 오히려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꿈을 성취하고자 한다.
우리는 겉 세상에 관심이 많지만, 주님은 우리의 속 사람에 관심이 많다. 속 사람이 바뀌지 않은 열심은 골치 아프다. 그는 Almost Christian! 즉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 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그는 신앙인이 하는 것은 다 하지만 진짜 거듭난 것은 아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책망하셨다. 주님의 관심은 마음 중심에 있다!
가인은 아담을 통해 순종의 중요성을 단단히 교훈 받았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배가 열납되지 않자 동생 아벨을 때려 죽였다. 이것이 못된 자아의 힘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우월의식에 빠지게 된다.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아벨과 비교하여 동생을 죽인 것이다.
자아문제를 처리 안하면 욕심대로 무슨 일이든지 한다.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던 롯!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17:28-30)
세간살이에 미련이 남아 뒤돌아 보았던 롯의 아내!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눅17:31)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왔는데도 자아실현에 메여있는 현대인들!
26-28(누가복음 17장)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17:26-28)
촛점이 주님께 전혀 없는 사람들! 그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 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마치 빈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 처럼, 그들은 결국 반지를 낀 채 용광로에 떨어진다.
마음의 주인은 하나 밖에 없다! 나 아니면 예수님 뿐이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은 언제나 소수다! 노아의 때도 그랬고, 롯의 깨도 그랬다. 인자가 오실 때도 마찬가지다. 10명의 문둥병자 가운데도 오직 한 명만 구원받았다 (눅17:15-16) 나머지 9명은 자아실현을 위해 앞으로 달리다 구원을 놓치고 말았다 (17-18절)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세간살이를 끊는 것이 구원의 길을 달려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만큼 자아가 못됐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1-32)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보라! 죄는 씻겨야 하지만, 자아는 죽여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주님 없는 꿈은 죄다! 그 꿈은 성취해도 멸망이요 저주다. 자아가 죽으면 상황이 힘들어도 더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 불편을 좀 더 참으면 된다. 세간살이에 집착하는 사람은 빨리 돌이키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17:33-35)
땅에 있는 모든 것은 기회다. 회개는 자아를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가 안되면 결정적인 순간에 뒤돌아 보게 만든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발목을 잡고 한 순간에 무너뜨린다. 불에 타죽는 불나방처럼!
자아를 죽이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눅17:25)
예수님과 같이 죽는 것이 자아를 죽이는 길이다.
사랑에 빠지만 같은 꿈을 꾼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과 함께 주님과 같은 꿈을 꾼다. 나를 향한 주님의 꿈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신뢰한다.
예수님과 함께 꾸는 꿈은 영원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23:27-28)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너희와 너희 자녀가 불쌍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자아는 정신차리는 것이 아니라 죽여야 한다! 자아를 움직이게 하는 두 가지가 감정과 이해다. 감정이 흔들리면 따라가다 말고, 이해가 안되면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이해가 아니라, 신뢰의 언어다! 믿고 따라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