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01.07 (금) 1:55 am (서울 집에서)
출발전.. 매일 (알바-친구들 만나기- 집)의 동선이 바뀌지 않던 내가 이 동선을 깨고 네팔 히말로 간다.
이번 여행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무언가 나를 조금이라도 끓어오르게할..
참되게 느끼게 할 시간들로 채워진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2011.01.07 (금) 8:35 am (인천공항에서)
인천공항 여객기 안이다. 홍콩으로 간다.
이제 이륙하기 직전이다. 대한민국을 떠나
홀로 외국을 나가는건 처음이다. 설레이기도 하고
약간의 두려움 마저도 생긴다. 잘있어라 가족들.. 친구들도..
대한민국도.. 조금이라도 더 깊게 생각하고 긍정적이고 성숙한
내가 되어 올께요..
2011.01.07 (금) 11:10 pm (네팔 카트만두 샹그릴라 호텔에서)
중간 경유지인 홍콩,다카를 거쳐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 앞에 나섰을 때부터 다른 나라에 왔다는 설레임도 잠시뿐..
짐을 강제로 들어주고 돈을 받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놀랐다..
처음엔 우리 가이드 분들인줄 알고 솔직히 난생처음으로 몸소 느낀
긴 비행시간때문에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짐을 맡겼는데 다짜고짜
내가 처음부터 들어달라고 한것도 아닌데 돈을 요구하는것이다..
기분이 조금 꺼림칙 했지만 여기 호텔로 오는 버스를 탔을때
파상 아저씨와 아내분과 밍마 아저씨가 주시는 흰 머플러와
반가운 인사 `나마스떼` 즐거운 여행되시길 바래요
한마디에 마음이 좀 놓였다.
내일부터는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서 소중하고 좋은 추억들이
더 많이 남고 기억되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2011.01.08 (토) 6:28 pm (카트만두에 있는 한식식당에서)
카트만두에 있는 한식 식당에 왔다.
어젯밤 대장님 몰래 마신 맥주가 타지에서 행한 음주여서인지
속에서 잘 내려가지를 않았었는데.. 마침 다행히 한식식당에서 이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한결 좋아졌다.. 느글느글함이 싹 사라졌다.
오늘은 네팔의 유명한 유적지들을 가보았다. 듣고 보던대로 종교적인
문화 유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길거리와 유적지 근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원숭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는데 참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번도 볼수없던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원숭이들 개들 ..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서로서로 조금씩 배려하면
융화되어서 사는 여유있는 삶 내가 배워야 할 부분 중에 일부였다.
너무 너무 흥미로웠다. 하지만, 유적지나 길거리에서 아기를 안고
돈을 조금만 달라고 애원하는 젊은 아기엄마들.. 시장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물건을 파시는 젊은 엄마들..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을 보면 달려가서 돈을 조금만 달라고 하는
아이들.. 이런 저런 물건들을 들고 홍보하면서 하나라도 팔아보려는 젊은 친구들.. 어린아이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마음이 아프고 내가 미안해 졌다.. 그러나 가끔 길거리에는 최신형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꽤나 볼수있었다. 박대장님 말씀으로는 지금 네팔의 경제적 환경은
우리나라의 한국전쟁(1950.06.25) 6.25 사변 이후의 10년뒤인, 196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셨다..
전전근대, 전근대, 근대, 현대가 공존하는 사회라는 말씀이셨다. 이런일도 있었
퍼슈퍼티나트 사원에서는 신을 믿는 사람들의 장례가 치뤄진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구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보내지 않고 그대로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유족들은 거의 울지도 않는다.
신을 깊이 믿는 네팔 분들이기에 돌아가신 가족 분들이 좋은 곳에서 편히 쉬러 갈것이라는 믿음 때문일것이다.
난 우연히 그 사원에서 나올때쯤 사원의 장례식장 옆의 강가에서 낚시질 비슷한 행동을 하는것을 보았다..
알고보니.. 사후의 삶이 있다고 믿는것이어서인지.. 장작을 이용해서 화장을 한 시신과 같이 동전과 유품들을
그강에 뿌리는데, 되는 것들을 낚시대에 미끼대신 자석을 붙여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강은 아무리 그래도
시신들을 뿌리는 강이다.. 충격이 컸다.. 원래 신에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 물로 씻고, 심지어 그물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 형제의 행동은 일단 예의에 심하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 형제의 행동을 말리거나 제대하는 혼내는 사람들도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그 사람들도 이해는 간다.. 사회환경이 그 순수한 아이들한테 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해야만 그 형제는 먹고 입고 자고 살 수 있으니까.. 그 형제에겐 생사가 달린
일이기 때문에 말리지 못하는것 같았다.. 내일부턴 본격적인 트래킹 일정의 시작이다. 얼른 숙소로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오늘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다.
내 자신에게 고맙다.. 계속되는 일상생활이 아닌.. 일상을 벗어나서 네팔 트래킹을 선택해서 이렇게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게 해주어서..
내일부터는 더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줄 이 여행을 선택해 준 내자신에게 고맙다..
2011.01.09 (일) 9:29 pm 시발라야 마을 롯지에서
오늘은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지리 마을을 거쳐 이곳 호텔 이후로 첫 롯지가 마련되어있는 시발라야 마을 까지. 장장
11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처음에 승용차로는 위험천만한 최강의 레이스를 했다.. 서행을 하는 국가이기에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엄청난 급커브에서 서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경적을 한번울려서 급커브 길에서 반대편에서 차가 오고 있다는
신호를 주어서 서로 비켜서 지나가는데 그것이 심하게 스릴이 있었다.. 창가에 앉은 난 화가날정도로 위험했다..
버스로 갈아탔을땐.. 너무 흔들거렸다.. 비포장도로.. 얼마전에 그 근처에서 이러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전복사고가 나서
여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어서 다행이다.. 내가 버스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기전에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내려서 걸어왔을 것이다.. 일기는 새벽에 쓰고 있겟다.. ....................................... 어쨌든 안전하게 도착해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자주 쏠린다.. 처음엔 부담이었지만 항상 어색해하는 우리에게
먼저 인사해주고 웃어주는 그들에게(현지인분들)
정이가고 부담스러움이 차차 친근함으로 바뀌었다.. 내일도 참되고 의미있는 추억들을 담는 하루가 되길..
2011.01.10 (월) 반다르 마을에서
오늘은 반다르 마을에 왔다. 역시나 드디어 별이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참 많았다.. 사람들이 품는 꿈들처럼 .. 이 마을에 도착해서 자유시간에
짐을 풀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 주민들과 사진도 찍고 아이들에겐
펜도 나누어주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한마디씩 해주었다.. 나도 하기 싫은 공부지만.. ㅎㅎ
이 아이들은 펜 하나로도 행복해했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할까봐.. 펜을 선뜻 주기가 힘들었는데..
어차피 이건 돈이 아니라 가능성을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난 당당해졌다.. 조금 조심만해서 주면
엄청난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그리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같이 보면서
행복했다. 나도 아이들도 그 가족들도.. 펜 하나란 사소한 물건.. 카메라 사진.. 하나로 우린 충분히
마음과 즐거움을 공유했다.. 보람찬 하루였다..
2011.01.11 (화) 04:00 pm 납겔리 마을에서
오늘 납겔리에 와 있다. 힘들다.. 텐트에서 자게 된다.. 슬프다.. 고산병만 안와주면 이대로 잘
버틸 수 있을것 같은데.. 걱정이다.. 몸 관리를 철저히 해야겠다.. 다시한번 (천천히 걷기, 충분한 수분 섭취, 충분한 수면,
땀 흘리는것 피하기, 방한 철저히 하기)를 지키려고 노력해야겠다.. 더 좋은 추억을 담으려면 아프면 안된다..
2011.01.12 (수) (나우르 마을에서) 고산 증세 때문에 일기를 쓴건 다음날인 2011.01.13 (목) 피케이카르카에서 였다.
밤에 납겔리에서 전통주를 좀 많이 마시고 포터친구들과 흥겹게 춤을 추고 추운곳에서 놀아서
그랬던 것인지 말로만 듣던 고소증세가 나타나더니 심각해졌다.. 일기도 하루를 밀려썼다..
오늘은 절에서 잠을 잤다..
신이 지켜주신다는 느낌은 들어서 너무 좋았지만.. 너무 추웠다.. ㅜㅜ
군대는 어떤곳일까.. 이것보다 더 한 곳은 있는 것일까??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어도 바람이
뼈속까지 파고들어서 흔들어 주는 느낌은 없어지질 않았다.. 고산 증세가 겹쳐서 인지 너무 아프고 춥고
어질어질하고 힘들었다..
2011.01.13 (목) 7:15 am 피케이카르카에서
아침에 고소증세가 조금 수그러 들었는데, 아직 어질어질하다. 내일 고도를
최고로 높여야 하는데, 신이 도와주셔서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다.. 드디어 내일이면 정상 이다..
그리고 네팔에서 한국으로
잘 돌아가서 더 큰 꿈을 품고 달라진 모습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
짐을 들어주는 포터들중에 친구들이거나 나이 또래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20~25)정도의 나이를 가진 친구들과 같이
축구를 했다.. 난 5분도 안되서 지쳤다.. 박대장님이 그만하기를 권유하셨다.. 3600m 에서 축구를 한 5년만 연습하고 훈련하면
한국에서는 박지성 뺨을 300대는 칠 수 있을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것 같이 뛰었다.. ㅎㅎ 정말 한국에 돌아가서 집에서 보일러를
빵빵하게 제대로 틀어놓고 반팔,반바지만 입고 푹 자보고 싶다..
고소 증세에 몸이좀 적응을 하기 시작은 한것같다..
오늘은 트레킹 코스도 오전 중으로 거의 끝나서 낮잠도 잤다.. 오늘 이시간의 현위치는
피케이 카르카이다. 단장님과 선생님이 피케이 카르카에서 라볶이를 만들어 먹은 사람들은
우리들 밖에 없을 거라고 하셨다. 정상쪽이라 너무 많이 춥다..
2011.01.14 (금) 피케이 피크(정상) - 준베시 마을
엄청난 바람과 체력소모를 딛고 피케이 피크 정상에 올랐다..
정상이라는 자리는 어떤 경우에서든 오르기 힘든 자리인것 같다..
내가 한국에 가서 정상이 되려면 이보다 더한 고생을 해야겠지만..
피케이피크 정상에 오르는 것은 충분히 보람있었다..
꼭 정상이 되려고 하지는 않고 싶다.. 어느정도 내가 생각한 일들을
이루는 위치 까지만 가고싶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난 그 기회를 나를 성공시키는 계기로 삼을 자신이 있다..
피케이피크 정상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에베레스트,로체,로체샤르 등 여러개의 높은
히말라야 봉우리들도 볼 수 있었고, 우리의 목적지에 다 올랐다는 기쁨에 너무 행복했다..
저녁 즈음, 준베시 마을로 고도를 낮추어 내려왔다.. 럭시, 뚱바 (우리나라의 막걸리 같은것), 우리가 샀던 맥주를
한국라면과 네팔라면을 같이 부순것을 안주삼아서 포터와 셀파 형들과 같이 마셨다..
내일은 준베시 마을에서 행사를 하는데, 신께서 도우셔서 무사히 행사를 즐겁고 행복하게 잘 마쳤으면 좋겠다..
내가 축사를 우리팀 대표로 선생님과 같이 하게 됐는데, 떨지 않고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1.01.15 (토) 준베시마을에서
준베시 마을에서 축구를 했는데, 우리 트레킹팀 vs 준베시 마을 학생들과 주민들로 대결을 했는데 8:8로 비기고
네팔 vs 한국 전은 3:3으로 비겼다 난 역쉬 에이스..? 양쪽 경기 2골씩~ 내파트너 민수는 트레킹 팀 대 준베시 마을로
경기를 할때 3골이나 넣어서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대단했다.. 어제의 패배를 싹 가시게해 준 승부였다. 학교에서 봉사
활동도 했다. 내 연설로 시작되었는데, 그다지 엄청나게 감명깊은 좋은 연설이 아니었는데도, 밍마 아저씨가 통역으로
잘 풀어주시고 진심이 통해서인지 진심이 담긴 따뜻하고 큰 박수를 받았다. 난 그제서야 좀 마음이 가라앉고 감동이었다.
학생들이 선물을 받고 우리와 몸으로 알파벳 만들기과 이어달리기, 닭싸움, 3~5시간 전부터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너무
미안했다. 진행중에도 열을맞춰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너무 미안했다. 같이 오신 부모님들께도 너무 죄송했다.
마이크도 반주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정말 따뜻하고 애틋한 진심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고,
우리는 하나 한 마음이 되었다. 현지인들과 공동어인 영어로 대화 할때 보다 눈빛으로 통하고, 사람대 사람으로서
웃을때, 인상 쓸때 더 큰 재미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2011.01.16 (일) 파플루에서
준베시에서 파플루로 왔다.
중간 중간에 밍마 아저씨와 까지 아저씨와 같이 왔는데 계속 술을 권해서, 두번이나 마시고,
이곳 파플루에 와서도 포터 친구들과 형들이 술을 권해서 술을(럭시를) 3번이나 마셨다.
다들 이별을 아쉬워했다. 럭시를 마시며 우리가 이야기 하는 주된 소재는 단하나 이별이었다.
나도 너무나도 아름답고 좋은 추억이라 내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겨두어야할 기억들이 되었다.
당구장에 가서 포켓볼도 쳤는데, 적응이 안되서 민수와 나는 두게임을 다 내리 져버렸지만,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하에 있는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설인데도
그것을 즐거워하고 재밌게 놀줄아는 그들과 우리는 이미 하나였다.
서울에서 당구를 치는것보다 훨씬 좋지 못한 시설이었는데도
충분히 동질감을 느끼고 즐거운 자리였던것같다.
2011.01.17 (월) 10:55pm 트리뷰반 공항이다.
트리뷰반 공항이다. 홍콩으로 간다..
아니 한국.. 인천으로 간다. 네팔.. 꿈은 한국 꿈을 자꾸만 꾸는데.. 현실은 계속 네팔이었는데..
드디어 한국행 이다. 한국을 간다. 너무너무나도 많이 많이 그리웠던.. 대한민국으로 간다. 대한민국에 간다.
기다려라..내가간다.. 안전한 비행을 하라고 처음에 주셨던 머플러를 주시면서 have a good flight 하셨다..
문법에 맞는 문장인 지는 모르겠다.. ㅎㅎ 파상아저씨의 그 말이 처음에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머플러를 둘러주시며
즐거운 여행이 되라며 반겨주시던 그 모습과 겹쳐졌다.. 보고싶을 것이다.. 나는 다시 오고 싶다.. 네팔..
이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넘치는 나라.. 가난 속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나라..
눈빛이 선하고 눈에서 눈으로 통하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나라.. 이 나라 네팔에 다시 오고싶다..
안전한 비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 .. 서울 천호동으로 간다..
|
첫댓글 오~~형 꽤 잘 썼는데~!!ㅇㅗㅇ;; 나머지도 올려주삼~!
from.에너자이저당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