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4막 22장 (2부)
1979.1.29.
이날은 내가 보통1종 면허취득을 하게 된날이다.
자동차 운전학원은 다니지도 않았고, 아버님회사 택시가 부제에 걸려 쉬는차가 있으면 홀로 자동차 기어변속도 연습해 보고, 클러치와 브레이크 밟는 연습을 하며 시뮬레이션을 하였고, 어느정도 자신이 생기자 봉천동 골목길을 누비며 실전 운전을 터득하게 되였다.
가끔마다 택시운전수가 한수 가르쳐 주었으나 난폭하기 그지 없어 운전수들한테 배우기를 포기한채
홀로 연습을 하게 된것이다.
운전을 하면 보행자들이 알아서 피해주었고 나는 조심스레 자동차를 몰면 되였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그러다 실전 운전을 하고 싶어 새벽녘에 일어나 택시를 몰고 봉천동 대로길을 달려보았다.
새벽이라 차량이 거의 없어 도로를 전세 낸것처럼
질주도 해보았고 차선을 변경도 해보고 과속도 해보았다.
그러기를 한달여 나는 운전에 자신이 생겨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기 위해 운전 면허 문제집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예상문제 300개중 30여개를 무작위 선별하여 문제로 내니 문제집만 달달 외우면 되였다.
필기시험은 제한시간 1시간이나 나는 15분만에 문제를 풀고 답안지를 두번째로 제출하며 거뜬히 합격하였고,실기 시험은 어떻게(?)해서 합격하여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된것이다.
그당시는 오토차량이 전무하고 전부 클러치를 밟아기어를 변속시키는 수동식 자동차였다.
요사이 운전자들은 생소한 클러치와 4~5단 기어를 수시로 변속시켜야 자동차가 탈없이 움직였으니 운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나는 1월29일 면허증을 획득하고 알바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당시 아버지 택시회사 운전수들중 피곤하여 일찍 택시를 입고하고 귀가하는 경우가 있어 나는 그택시를 몰고 영업을 나간것이다.
그때는 12시 이후에는 통행금지가 시행되여 술꾼들이나 일반인들도 12시 이후에 통행하다 적발되면 즉결재판에 넘겨지는 시기였다.
12시이후 길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일이었다.
(이것은 추후 전두환대통령 취임후 12시 통행금지령을 해제하여 최악의 법은 사라지게 된다.
박정권의 법은 계엄령이나 전시중이나 있을법한 12시 통행금지령을 수십년간 시행하여 개인의 자유까지 탄압한 독재자 였던 것이다.)
나는 10시40분경 빈택시를 몰고 종로1가로 직행하였다.
그리고는 종로1가에서 봉천동쪽을 향해 택시를 서행하기 시작하면 취객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태워달라고 난리법석이었다.
따블
따따블
서로 손가락을 헤아리며 합승이건 방향이 안맞건 무조건 태워달라고 아우성이였다.
나는 봉천동쪽으로 가는 승객 위주로 태우며 2명이상 동행자는 안태우고 각기 목적지가 다른 4명을 합승한채 봉천동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승객이 하차하면 빈좌석에 손님을 또 태워 합승을 하며 봉천동에 12시가 다되여 도착하게 되였다.
그렇게 1시간여 필사적인 통행금지 탈출기가 끝나면 내 호주머니는 지폐로 두툼해 졌다.
10시40분부터 통행금지 12시까지 1시간여 동안 번 수익금이 2~3만원(요사이돈으로는 7~8만원) 이였다.
한시간 만에 7~8만원을 벌었으니 대단한 수입이였다.
내가 생애 최초로 벌어들인 돈이었다.
그런 호황기는 통행금지 해제와 같이 사라졌으니
상도동고개를 넘고 봉천동고개를 넘어 무한질주를 하며 돈을 벌은 내가 참으로 대견했거늘...
초보운전이 무색할 지경이다.
오늘 면허증을 딴것은 상상도 못할것이다.
그당시 승객중 어느 누구도 내가 초보운전이라 상상도 못하였고 요금도 더블로 주며 생명까지 맡겼으니...
나는
근간에 "초보운전" 스티카를 붙히고 슬금슬금 다니는 차량을 도로가에서 보면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