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Holst ―《The Planets》 중〈Mars, the Bringer of War〉
https://youtu.be/L0bcRCCg01I?si=3JIxZOeRXQrYUmBu
Benjamin Britten ―《War Requiem》 중〈Strange Meeting〉
https://youtu.be/rsSMCq7pl_k?si=2ij0loy9Pp2mwfnG
〈오디세이〉와 세 가지 규범
영화〈오디세이〉를 다시 관람하고, 법조인의 눈으로 그 속에서 오늘의 법과 맞닿아 있는 세 가지 규범을 음미해 본다.
1. 가족과 이웃, 그리고 적에 대한 규범
첫째, 보증인적 지위를 기초로 한 ‘가족규범’이다. 오디세우스는 아들로서 노부(老父) 라에르테스를 돌보고, 아버지로서 텔레마코스의 성장과 자립을 이끌며, 남편으로서 페넬로페와의 혼인관계와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 그의 귀향은 20년의 부재로 흔들린 가족관계와 그에 따른 권리·의무를 복원하는 과정이다.
오늘날에도 부모의 자녀에 대한 보호·양육의무, 부부의 동거·부양·협조의무, 자녀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무 등 가족관계는 보증인적 지위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다만 구하라법, 유류분, 양육비 지급과 고령 부모의 부양, 비혼 출산과 친자관계, 동성혼과 생활동반자 관계 등을 둘러싼 논의에서 보듯 가족의 범위와 권리·의무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는 중요한 법적 과제이다.
둘째, 사회적 규범인 ‘제우스법’, 곧 크세니아(xenia)이다. 나그네를 환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규범으로, 제우스가 그 수호자이자 보증자가 된다. 공적 보호체계가 미비했던 시대에 환대는 공동체의 교류와 생존을 위한 상호부조의 규범이었다. 크세니아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이방인에게까지 보호의무를 확장한다. 현대법의 관점에서 보면 보증인적 지위의 사회적 확장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의 선한 사마리아인법과도 맞닿아 있다. 선의의 구조자를 면책하는 법제가 있는가 하면(응급의료법 제5조의2, 미국 캘리포니아주 보건안전법 §1799.102), 자신에게 중대한 위험이 없는데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은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법제도 있다(독일 형법 제323c조, 프랑스 형법 제223-6조). 특히 후자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타인에게까지 구조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에서 크세니아와 닮았다.
그러나 크세니아도 남용될 수 있었다.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의 집에서 환대를 악용하고 절제와 존중의 의무를 저버렸다. 결국 그들의 처단은 무너진 크세니아의 질서와 신적 정의가 회복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셋째, 국가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전쟁규범’이다. 전쟁에서는 적을 속이고 허점을 파고드는 메티스(mētis), 곧 지략과 기지가 칭송받는다. 트로이 목마는 그 상징과도 같다. 반면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는 전쟁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오래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송나라 양공은 홍수전투(BC 638년)에서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는 중에 공격하자는 건의를 물리쳤다가 패하여 후세의 비웃음을 샀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오늘날 국제법은 무력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무력충돌 중에도 민간인을 보호하며 전쟁의 수단과 방법에 한계를 둔다. 국제형사법은 전쟁범죄에 대해 개인의 형사책임까지 묻는다. 전쟁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쟁규범이 강자의 논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2. 전쟁의 승자는 있어도, 온전한 승리는 없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리스 세계가 안정과 번영을 누린 것도 아니었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단정할 수 없으나 트로이 전쟁 후 미케네 문명 역시 쇠퇴와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승자는 있었지만 누구도 온전한 승리를 누리지 못한 전쟁으로 읽힌다.
〈오디세이〉역시 이 역설을 보여준다.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는 10년 동안 바다를 떠돌아야 했고, 그리스 연합군을 이끈 아가멤논은 귀향한 뒤 죽임을 당하였으며, 수많은 그리스 영웅 역시 죽거나 고난을 겪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그 승리의 대가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폐허가 된 트로이는 절제와 한계를 잃은 전쟁이 인간과 공동체, 나아가 문명 자체를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다가온다. 문명마저 위태롭게 하는 전쟁에서는 진정한 승자가 없다.
3천 년 전 트로이가 던지는 경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기의 파괴력이 고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오늘날, 현대 문명이라고 해서 그 파국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더욱 분명하고 엄격해야 한다.
3. 법과 규범, 그리고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가족에게서 시작한 보호의무는 낯선 이웃으로 넓어지고, 마침내 전쟁터의 적에게까지 이른다. 가족이기에 보호해야 하고, 낯선 이웃이라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적이라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어쩌면 법과 규범의 역사는 인간이 보호해야 할 ‘타인’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온 역사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가족관계와 사회관계, 국제관계를 바라보면 우리는 3천 년 전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던진 질문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법과 규범을 발전시켜 왔지만, 그 경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은 3천 년의 세월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추기: 지난 8월 중순 영화〈오디세이〉를 처음 관람하고, 9월 7일 아침편지 제432호에 「오디세이아 — 운명(Moira) 앞에 선 신과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아침, 음악편지」를 썼다. 9월 중순 영화를 다시 관람하면서는 오디세우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자들의 넋을 위로하려 페넬로페와 함께 배를 타고 서쪽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산 자의 보호와 책임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어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은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