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양윤영(梁允永) - 천국은 놀라운 음악의 세계 5. 온갖 시험을 딛고
1 아무튼 나는 매일 새벽같이 박마리아 씨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녀와 나는 사제지간이기 때문에 박마리아 씨의 집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박마리아 씨에게 새로운 진리가 나왔으니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하면 왜 비정상적인 말을 하느냐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학교 사무실에까지 찾아갔다.
2 나의 정성에 그녀도 어쩌지 못하고 세대문 교회까지 왔으나 효원 씨와 30분쯤 얘기하다가, “그래 당신들이 이걸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거냐”라며 나가버리고 말았다. 박현숙 씨와 숭실대 교수인 김양선 목사도 교회까지 와서 원리 말씀을 듣고 갔으나, 모두 끝까지 따르지 못했다.
3 그렇지만 박현숙 씨와 김양선 목사도 그 이후 내게 잘 해주어 지금도 은인처럼 느껴진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찾아 전도했지만 하나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내 정성의 부족 탓도 있겠지만 한결같이 높은 지위와 권좌에 있는 지성인들은 자기가 딛고 있는 현실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나오지 못한 탓도 있었다.
4 이화여자대학 주최 전국 여고생하령회에서 음악 지도를 맡았던 나는 학생들을 통해 계시를 잘 받는다는 최정순 씨 형부되는 사람을 소개 받았는데 그분 역시 나의 권유와 계시에 의해 교회를 찾아오긴 했으나 그만두고 말았다. 하늘은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뜻길의 문을 열어 주셨지만 그들은 그 하늘의 은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5 다시 장충동 은행 사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가 6월 20일이었다. 집은 교회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 무렵 선생님께서는 매일 새벽마다 식구들과 함께 장충공원에 올랐다. 그런데 남편도 장충동으로 이사 간 후 애들을 데리고 장충공원에 올라 약수터에서 물을 떠 오곤 했다. 그때 남편은 유효원 선생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했다.
6 그때 나는 원리 필기장을 빌려다 읽어 보도록 했는데, 그이는 뜻이 좋기는 좋은데 언제 그렇게 이뤄지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원리노트와 함께 성경을 읽기도 했다. 그때 교회를 이해하는 남편 덕에 장작더미 한 수레를 실어 가기도 했고, 떡 할 때 집에 쌀 한 톨 남기지도 않고 교회에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교회와 접하는 것을 피했다. 나는 더 이상 남편을 붙들려 하지 않았다.
7 교회는 다른 기성교회당에 견주어 바깥사람들이 보기엔 참으로 허술했다. 의대생들이 전도되어 오기도 했는데 그들은 교회가 초라하고 비위생적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선생님의 침구는 변변치 않은 조그마한 것이었고, 선생님의 식탁은 항상 소찬이었다.
8 교회에서 기거하는 7, 8명의 식구 이외에 다른 손님들이 와도 소찬이나마 정성껏 대접했지만 많은 식구들이 한꺼번에 배부르게 먹을 수 없을 만큼 교회는 어렵고 쪼들린 상태였다.
9 얼마 안 된 부식조차 당시 이수경 씨가 송판으로 게시판 같은 것을 만들어 서울운동장 앞에 놓고서 사진에 색칠을 해주고 번 돈 몇백 원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가정에서의 시련은 나를 당혹하게도 했지만 더욱 강하게 믿음을 굳혀 주기도 했다.
10 어느 날은 은 수저를 모두 도둑 맞았고, 또 두 번째로 은 수저를 도둑맞았는데, 남편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 왜 그런 일을 당하느냐고 빈정거리곤 했다. 또 어느 날에는 큰 딸 영순이가 병원에서 핏물이 흥건한 러닝샤쓰를 입은 채로 동생 두삼을 안고 나오는 것을 봤다.
11 나는 그때, 용을 시험하던 사탄이 내게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탄이 비록 내 아들을 빼앗아 간다 할지라도 나는 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두삼이는 애들이 다이너마이트 장난을 하는 곁에서 구경 하다가 그것이 터져 얼굴과 윗몸을 유리 파편에 다친 것이었다.
12 남편은 또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 왜 이렇게 화만 당하느냐고 나무랐다. 나는 이런 일로 하나님을 원망하면 벌받는다고 했으나, 이게 다 시련이거니 생각하며 참고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안과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수술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사나흘이 지난 후에는 수술을 안 받아도 된다는 진단 결과를 받아, 이것도 하늘의 도우심이거니 했다. 마지막의 시련이 부딪쳐왔다.
13 대학시절부터 위장 병으로 고생해왔다는 남편이 자리에 누운 지 3일 만에 별세하고 만 것이다. 그때가 9월 20일이었다. 교회에 입교하지 못하고 간 것이 못내 유감스러웠다. 별로 뜻을 반대하거나 나를 방해하지도 않았던 주인이었다. 신앙은 갖지 않았지만 선량하고 양심적으로 살았던 그였다.
14 선생님께서도,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택함 받은 사람에게는 탕감이 따르는 법이라고 위로를 해주시면서 당신께서 뜻길에 나서던 때 가정에서 많은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을 말씀해 주셨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