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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활동적이라서 이룰 것은 전무하다>의 줄거리: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음의 말씀 즉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것과 함께 기존의 마음가짐보다 조금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말씀 아닐까요? 단절하고 밀착하는 갓난아기의 비활동성으로라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활동적이라서 이룰 것은 전무하다
(누가복음 18장 15절~17절)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활동적이라서 이룰 것은 전무하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활동적이라서 이룰 것은 전무하다’
활동적인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활동을 통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조건 해(害)가 된다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앞서 본 17장 20절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대답하셨고 이어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18장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적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어린아이들을 금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9장이나 마가복음 10장에서도 등장하였던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다만 본문과 연관하여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어린아이를 헬라어 파이디아(παιδία)로 사용하였습니다. 파이디아는 일반적으로 5세를 전후로 하는 7세 미만의 아동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한편 누가는 어린아이를 브레페(βρέφη)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브레페는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먹는 갓난아기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역사적으로 같은 말씀을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각자 세 가지 맥락에서 짚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세 가지 맥락에서 다시 언급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입체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어도 실천적인 부분에서 여전히 문제는 존재합니다. 다 큰 성인이 어떻게 갓난아기와 같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의 제자들 또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생각과 바람은 바리새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출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대격동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 것을 바랬고,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다윗 왕국이 재현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 끝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는 마땅히 대장부들의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던 대장부의 모습이란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전쟁 때를 떠올리면 그러한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승리의 전장 속에서 칼이나 창을 들고 씩씩하게 서있는 장정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린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정치적 사회적 활동과는 무관한 젖먹이 갓난아기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갓난아기들은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설령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해도 아기들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깨달을 수 있는 최소한의 연령은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돌이켜서 젖을 먹는 갓난아기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17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마치 기독교가 제공하는 모든 은혜에 대한 거부로까지 느껴집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복음의 은혜를 줄 수 없다는 의미인데 심각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마음속에서 그렸던 합당한 사람의 모습은 원대한 기대와 포부와 비전을 가진 대장부이자 장정이었습니다. 단호한 결심을 하고 죽을 각오로 예수님과 함께 하려는 활동가의 모습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마음속에서 그리셨던 합당한 사람의 모습은 바로 갓난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활동성으로는 복음이 약속한 무한한 은혜 중에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먹는 갓난아기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일으키실 복음 사건을 통해 약속된 무한한 은총 중에서 단 한 부분도 소유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활동성은 언제나 복음의 은혜가 받아들여진 결과로써 나타나야만 합니다. 반대로 활동성을 통해서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자 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활동적이 될 수 있지만, 활동적이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쟁취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싶으시다면 먼저 갓난아기처럼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게 되는 자발적 활동성으로는 무엇인가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생은 꼬이게 되고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활동하면 할수록 인생은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갓난아기를 데려온 엄마들을 꾸짖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큰일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대격동과 변혁을 일으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실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런 중요한 때에 갓난아기들과 어울리시는 것은 제자들의 눈에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비활동성의 극단에 위치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은 이러한 비활동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 여겨졌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갓난아기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을 뿐이지 인간성 자체가 몹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아기들은 귀하고 예쁜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기들을 상대할 때는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활동적이고 결심이 단단한 장부들을 모아야 할 때이지 엄마들과 아기들을 상대해야 할 때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아녀자들은 사회적인 대격동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채 아기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아기를 만져주시기만을 바라는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아시고 파괴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의 제자들처럼 열정적인 활동성을 통해서는 결코 임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제자들이 꾸짖었던 갓난아기들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만 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정작 갓난아기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도 모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채택하셨습니다. 갓난아기들과 같은 상태가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할 수 없고 복음이 약속한 어떠한 은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들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요?
갓난아기가 비유적으로 어떠한 상태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지내다가 이제 막 태어난 존재입니다. 어머니 뱃속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세상으로 태어났기에 아기는 싫든 좋든 의식을 할 수 있든 없든 새롭게 던져진 세상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처럼 갓난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서 인간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우리의 마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갓난아이가 태어나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갓난아기처럼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자 한다고 해서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 대해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갓난아기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엄마 뱃속과는 전혀 다른 인간세상으로 던져진 상황이 됩니다. 아기는 세상을 받아들일 때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고 아빠의 보호를 떠나지 않습니다. 부모의 보호 속에 세상이 단절된 상태에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의식의 스위치가 꺼져있고 오직 부모의 품에서 밀착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대해 이러한 상태를 똑같이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현장과 무대로써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자신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열정적으로 개입해서 성취하고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갓난아기를 통해 세상과의 단절과 하나님과의 밀착의 형태를 제시하십니다.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취하는 방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마음에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과의 단절이고 하나님과는 밀착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다 큰 성인이 아기처럼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기처럼 의식의 스위치를 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서 과부의 원한에 사무친 끈질긴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세상과의 단절이고 아버지와 밀착되는 상태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가 되기 위해 원한에 사무친 끈질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과 단절된 사람의 것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해서 활동성이 제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기를 데려온 엄마들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의 행동 속에는 활동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대장부와 장정의 활동성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이 차이점을 강조하고자 활발히 뛰어노는 어린아이로서의 파이디아(παιδία)가 아닌 갓난아기로서의 브레페(βρέφη)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누가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있던 세상을 향한 열정과 활동성을 갓난아기와 대치시킴으로써 절대로 세상을 향하여 움직일 생각하지 말고 세상과 단절하고 접촉 자체를 피하라는 의도입니다.
갓난아기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과 접촉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부모의 활동성에 이관되어 있고 위탁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활동성이 내 삶 안에서 극대화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성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내가 취해야 될 입장은 활동성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활동성이 제로가 될 때만 하나님의 활동성은 삶의 영역 안에서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갓난아기의 상태를 통해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 또한 갓난아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세상과 접촉하신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는 말씀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고 활동하셨는데 어떻게 세상과 접촉하지 않으셨다는 것일까요?
베드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마주하고 계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갓난아기로 여기고 계셨습니다. 스스로를 활동성 제로의 존재로 여기심으로써 베드로와의 관계는 아버지께 이관되어서 아버지의 활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움직이시는 엄마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을 예수님은 그대로 따라 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행하시고자 하시는 행동이 있으실 때도 예수님은 그대로 따라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세상과 접촉하지 않으신 채 아버지 품에 안겨계셨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떡을 떼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보시며 떡을 떼시는 일을 그대로 하셨을 뿐입니다. 광풍노도의 일엽편주에서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도 세상과 단절되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일이 가능해지기 위해서 주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은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한 별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이후에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이 나오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에 대해 누가는 34절에서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 중에 가장 비활동적인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자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부터 온 세상으로 뻗어나갈 나라의 확장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활동성 제로의 상태에 도달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활동성 제로의 상태를 갓난아기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 것으로 삼고 싶다면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갓난아기가 세상에 대해서 단절을 취하는 상태를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활동성 제로의 상태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으며 복음 안에 약속된 모든 은총과 무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건강 문제가 있습니까? 이제 건강 문제에 대해 태도를 취해야합니다. 인터넷을 찾아볼 수도 있고, 유명한 의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라는 분야에 대해 나의 활동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아파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아픈 게 옳습니다.
돈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돈이 없다는 문제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활동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삶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가 없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활동들이 첨가되고 보태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활동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하나님 나라는 임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그 문제를 하나님 나라 안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성이 극대화되는 상태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의 활동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로 모든 문제를 끌고 들어가면 됩니다. 내가 활동할 생각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삶의 현장에 대해서는 오직 단절로 관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대해 단절하고 접촉을 피함으로써 아버지께 밀착하면 문제가 생긴 삶의 현장은 하나님 나라의 활동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활동성이 극대화됩니다. 그럴 때 문제는 발에 치이게 됩니다. 문제는 더 이상 문제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만날 때에 활동량이 늘어나는 모습은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막았던 제자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리라는 생각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스스로 활동적이 되어서는 임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갓난아기처럼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젖을 먹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이렇게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비활동성의 극한에 이른 갓난아기의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의 활동성이 극대화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내게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하여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기도와 최고의 찬양은 “응애, 응애”하는 갓난아기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 설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음력으로는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앞으로 시작되는 한해는 물론이고 여생 동안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최고의 찬양과 기도가 갓난아기의 입에서 나오는 “응애, 응애”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