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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베트남 생활 정보 친목 여행 (30세이상 남자들만의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차태현
I. 서 론
19세기 후반에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되어 20세기 후반, 남 북베트남이 통일되기 까지(1884~1975) 약 1세기에 걸친 베트남의 최근사는 강대국에 의한 식민통치와 지배 그리고 그들의 분할지배를 거부한 토착민족세력 내지 공산주의 세력의 철저한 항전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의 남베트남의 분단을 베트남에 있어서 동서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나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공산주의체제간의 갈등구조로 보는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이고, 그 본질은 그 이전부터 추구되어 온 민족해방 내지 민족통일운동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남베트남지역에서 내세워진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추악한 군사독재와 부패체제로 전락하여 체제존립의 정통성을 상실하자 이것이 남부베트남인들로 하여금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의 논리와 행동에 지지를 보내게 되어 결국 공산주의체제로 통일된 것이다.
이에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고찰하고 베트남의 사회 문화 역사적 특성과 베트남의 분단과 통일과정, 베트남의 전쟁, 통일후의 사회통합과정 그리고 베트남의 통일의 특성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을 성찰하고저 한다.
Ⅱ. 베트남에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특성
베트남은 아시아대륙 동남부에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국가이다. 북으로는 중국의 문남섬, 서쪽으로는 라오스, 캄보디아와 육상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으로는 남지나해를 사이에 두고 필리핀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르네오해를 사이에 두고 말레이시아와 부루나이가 있다. 또한 서남쪽으로는 타이만을 사이에 두고 타이남부와 마주하고 있다. 특히 국토의 동남부와 남부의 해안선이 1,000마일이상이나 길게 뻗은 지리적 조건을 가진 면적이 약 3.3만km2이며, 인구도 7,500만명이나 된다.
인구의 대부분이 베트남족(Kinh Tribe)으로 이들은 북부의 송코이강 삼각주, 중부베트남의 해안고원지대, 남부의 메콩 삼각주(MeKong Delta) 등의 요지에 거주한다. 여타 54개의 군소 종족은 주로 산간 오지에 살고 있다. 베트남은 인접국가들에 비하여 인구구성에 있어서 비교적 동질적이며 베트남어를 사용하는 공동문화를 가지고 있다. 또한 베트남은 오랜 기간 강대국으로부터 침략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반외세적이며 민족의식이 강하다.
베트남은 중국대륙의 주변부(rimland)로서, 해안에 연해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중국대륙이 통일되어 팽창할 때는 그 성향을 받아 대륙세력에 종족되었다. 반대로 해외세력 예컨대, 프랑스, 일본, 미국이 베트남을 거점으로 하여 대륙에 진출할 때도 전쟁에 휘말렸다. 베트남 역사를 도리켜볼 때, 19세기 전반까지는 대륙세력인 중국의 이따른 침략과 지배의 연속이었다. 1884년 이후 20세기 전반(1942년)까지 58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 후 프랑스가 이지역을 다시 지배하려다가 토착민세력의 저항으로 패배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프랑스를 대신하여 들어온 미국이 1950년대 중반 이후 남베트남을 그 영향하에 두기 위해 부패한 독재, 군사정권을 세워 후견하였으나 미국도 북부베트남과 남부베트남 내의 반정부세력의 치열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 남베트남은 1975년 공산화되었다.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인도와 중국사이에 위치한 국가로, 인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은 국가이다. 1857년 프랑스는 아시아에서 더 많은 영토를 쟁취하지 않는다면 유럽에서 이등국가로 전락하게 된다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베트남 침투의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베트남의 전통적 정치형태를 파괴한 것은 프랑스 식민통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에서 54년까지 베트남에서는 인민해방전쟁 또는 프랑스 식민전쟁이 치러졌으며, 결국 1954년 베트남이 두 지역으로 분단되면서 북베트남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바로 이 시기 1954년 제네바회의 전야의 미국정책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미국은 남베트남 당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후기 신생국의 보호자로서 프랑스의 역할을 인수했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기타 다른 사람들이 수용했던 도미노이론은 만일 어떤 국가 또는 지역이 공산주의 통제하에 떨어지게 되면 일련의 다른 나라들도 마치 "도미노 행렬처럼" 따라서 붕괴된다고 가정하였다. 이 이론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승인한 국가안보위원회 보고서에서 유명해졌는데 이 보고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어느 한 나라의 손실은 넓은 의미에서 전 동남아시아의 손실로 귀결된다고 예측했다. 이 도미노이론에 타당성을 제공한 것은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공산주의 국가가 된 것은 베트남이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한 직후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들 나라들의 정부는 침공과 반란에 의하여 붕괴되었고 베트남의 통제는 전인도차이나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구소련간의 경쟁은 격화되었었다.
식민주의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는 동남아 전역에 걸쳐 민족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과거 통합되지 않은 군주공국이었던 식민지 국가들은 통일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주요 국경선이 그어졌고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 전역이 유럽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러한 식민지 유산은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항쟁에서 보여준 베트남인들의 강한 민족주의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동남아시아의 특유의 정치이데올로기로 들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결합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의 공산주의화'내지는 '공산주의의 민족주의화'이다. 이러한 특유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발생하게된 원인은 베트남과 같은 동남아시아 신생제국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국가건설과정에서 부딪친 상호 모순적인 양면성에 기인한다. 그들은 식민지를 경영하는 서구제국주의에 대하여 강력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대국가로 성장하기 위하여 서구의 제 모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선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즉, 베트남의 초기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크게 매료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민족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시작되었으며,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또는 좌파인사들로부터 지원과 격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서구에서 사상적으로 식민주의가 자본주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식민주의 비판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인 1930년대에 정치적 성숙기에 들어갔으며, 전후 신생독립국의 지도세력으로 등장했다. 1930년 호찌민(Ho Chi Minh)을 비롯한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캄보디아, 라오스의 공산주의자들을 망라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마련되었고, 이는 1970년대에 3국이 공산주의 국가를 이루는 초석을 마련한 의미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상치의 개념이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완성을 통하여 세계의 혁명을 궁극의 목표로 표방하고 있는 공산주의가 민족주의와 상이함은 너무나 자명한 논리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경우 반식민, 반제국주의의 투쟁을 통한 독립의 달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는 쉽게 결합하였다. 이러한 접목요인은 무엇인가를 몇 가지로 나누어 규명해 본다.
첫째, 레닌이 주장한 민족자결권은 식민지 상태하의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레닌은 일정한 단계에서의 민족의 역량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레닌의 논리는 피억압민족의 부루주아들이 억압민족에게 대항하여 투쟁하는 한에서 그들의 민족주의는 압제에 반대하는 일반적인 민주주의 내용이므로, 모든 압제에 대한 가장 철저한 반대자인 공산주의자는 그같은 민족주의 운동 내지 민족자결권요구는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동아시아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정치적 지배에 대한 저항과 함께, 그들 사회에서 경제적인 침탈의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대결의 성격으로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에서 고조된 민족주의는 여전히 반자본주의적이며 반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고, 식민지 유산의 청산이라는 공동의 목적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을 촉진하게 되었다. 서방의 식민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초기 동남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쉽게 손을 잡았다
셋째, 60년대 및 70년대 초까지 비공산 동남아시아제국에 있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공산주의에 의한 경제발전 모델은 많은 진보적 지식계층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소련은 저 발전 국가이었지만 강력한 산업국으로 등장하였고, 중국도 공산주의 모델을 통해 발전하였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민족주의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빈곤을 탈피하기 위한 근대화이다.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 구조상 현실인식논리와 지향가치를 뚜렷이 가지고 있으나, 실천방안의 핵심인 경제개발정책이 약하다. 그러므로 자연히 뚜렷한 정책을 제시하는 공산주의와의 접목이 쉽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생국의 취약점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공산주의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킬 수 있었다.
현대의 베트남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식민통치 이전의 유산보다는 유럽 식민주의의 경험이었다. 즉, 프랑스에 의한 통치는 베트남에 주요한 사회적 변화를 초래했다. 베트남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한 것은 프랑스의 침투로 시작되었고,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와 미국의 개입은 민족주의를 활성화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베트남 등의 민족주의는 저항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식민지 시대 전반에 걸쳐 베트남에서는 사회의 전 계층이 참여한 민족 해방운동이 전개되었다.
Ⅲ. 베트남의 사회 문화 역사적 배경의 특성
베트남은 남부중국에서 싸암만(Gulf of Siam)까지 동남아 대륙의 동부연안에 따라 약 1,600마일이나 뻗어있다. 동쪽은 남지나해에 면에 있고, 서쪽으로는 해안선과 평행하게 늘어선 산맥들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베트남은 열대지방이며 계절풍과 때로는 심한 태풍의 영향권에 드는 나라이다. 베트남은 쌀을 생산하는 두 개의 삼각주, 북쪽의 주강(Red River) 삼각주와 남쪽의 메콩강(Mekong River) 삼각주가 길고도 좁은 연안지역에 의해 접속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의 면적은 329,560㎢로 한반도의 1.5배 정도이다.
역사상으로 남쪽사람 즉 중국의 남부에 사는 사람들의 땅 남비에트(Nam Viet)로 알려졌고, 국가의 이름이 되어버린 남비에트인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구는 7천 4백만명으로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24세 이하의 젊은 층이 4천 3백만으로서, 전체적인 인구구조는 완만한 피라미드형의 미래지향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인구의 80%가 대승불교를 믿고 있으며, 7%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개종한 카톨릭 신자들이다. 인종은 베트남족이 84.3%, 따이족, 타이족, 능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베트남어이고 영어와 불어, 러시아어 등이 통용된다. 베트남의 문맹률은 10%로 다른 인도차이나 국가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
유교와 불교는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규제하는 기본적인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강한 정신적 지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식민지 지배이래 불교는 전통적 가치체계의 상징으로 탄압을 받았다. 불교는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육성한 카톨릭이라는 외부 종교에 대한 전민족적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종교를 부정하고 있는 통일베트남은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적 가치관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베트남은 이 과정에서 일정 정도의 공산주의적 가치관에 전통적인 불교적 가치관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에서 전통적 가치의 지속성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젊은이들도 기성세대에 의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유교적 가치체계에 적응하고 있다. 베트남의 가족제도는 아직까지도 유교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아 조상숭배를 가장 기본 축으로 하여 장유유서에 입각하여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조상숭배를 위한 제사는 가장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베트남의 농촌 공동체 역시 아직까지 유교적 영향력이 깊이 잔존하고 있는데, 마을의 장로들은 무언의 지도자인 동시에 그들의 이웃과 친지들로부터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고 있는것이다.
또한 민족주의는 베트남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이 되어 왔다. 사실 1000여 년 간에 걸친 중국 지배기간동안 베트남의 민족주체성이 강하게 추구되었다. 베트남이 독자적인 전통을 간직한 채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 그들의 역사 속에 스며들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의, 일본의 점령, 그리고 미국의 개입에 대한 베트남의 투쟁은 그러한 민족주의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베트남은 언어 문화적 유산을 공유한 민족공동체로서 2,000여 년을 지내 왔다. 수세기 동안 중국의 이른바 문화적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조공제도라는 형식이 변방지역에 대한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중국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비록 중국과의 특별한 관계인 조공관계는 1885년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의 합병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946년에 베트남이라는 국가는 하나의 실체로 나타났다. 이 조공제도는 직접통치에 대한 중국의 집념을 희석시키고 베트남 통치자의 정통성도 인정받게 되었다.
리왕조(Ly Dynasty: 1009-1225)는 최초의 베트남 왕조였다. 1069년 제3대 왕, 리 탄 통이 남쪽과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나라이름을 다이비에트라고 명명하였다. 이 국명은 1802년 지아롱 왕이 베트남이라고 고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에 진출한 프랑스는 1880년 중반에 이르러 베트남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1862년 6월 6일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에게 3개성의 소유권을 인정하게 되고, 베트남의 남부는 코친차이나라고 하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어서 1883년 8월25일에는 북부의 통킹과 중부의 안남을 프랑스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베트남이라는 칭호는 금지되었고 프랑스는 통킹, 안남, 그리고 코친차이나의 세 나라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포함시켜 인도차이나연합을 형성시켰다.
Ⅳ. 베트남의 분단과 통일과정
1.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베트남인의 독립운동
19세기 후반까지 베트남은 중국을 사대의 대상으로 삼은 유교문화권국가이었다. 베트남은 문화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북아의 유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동남아의 힌두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만나는 곳으로 남베트남의 경우에는 밑바닥에는 힌두교전통의 참파문화와 크메르문화가 깔려있고, 그 위에 유교전통의 중국식 동북아문화가 결합되었다. 특히 중국과 인접한 북부베트남은 중국문화의 영향하에서 11세기이래 문조(공자의 사당)건립, 국자감과 과거제 운용과 유학교육을 통해서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유교문화를 유지하였다.
정치사적으로 볼 때도 베트남은 B.C 111년~939년과 A.D 1408년~1428년에 걸쳐 1천년여 동안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직접통치를 받았던 시대에도 중국에 대한 공조의 의무를 다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책봉을 받아 중국과는 갈등하면서 종속적 지휘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세력의 일원인 프랑스가 1858년 중부 베트남의 해안거점인 다낭의 침공을 시작으로 베트남을 공략해 들어 갔다. 당시 베트남을 지원할 종주국의 위치에 있었던 청나라는 내란(태평천국난 1850 - 1864)과 영국, 프랑스 등 서구세력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스스로 추스르기에도 힘에 부쳤기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외부의 침략을 방치했다. 결국 1884년 청 불 전쟁이 일어나 청이 패하자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로 넘어갔다.
프랑스 식민통치는 토착인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식민지 체제를 구축하여 정치적으로는 총독에서부터 각 성. 시. 현의 경찰, 교통, 법무 등의 주요관직을 장악하고 "직접통치"를 실시하였으며, 토착봉건세력과 지방의 매판세력을 그들의 추종세력으로 편입시키였다. 식민지세력은 베트남을 프랑스 자본주의의 후배지로 전락시켜 결국 이 지역에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반식민, 반제투쟁의 씨앗을 뿌리었다.
베트남에 있어서 프랑스의 반봉건적 식민지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었다. 첫째는 근대화된 일본의 자본주의와 중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모방하려 했던 판 보이 찌우(Phan Boi Chau)와 그 추종자그룹, 둘째는 서구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의회제도와 자유형 등의 이상을 추구했던 판 쭈찐(Phan Cho Trinh)과 르엉 반 깐(Luong Van Can)그룹 노선, 셋째는 호앙 호아 탐(Hoang Hoa Than)의 농민을 중심으로 지방에 거점을 둔 항불 게릴라전 그룹 등이었다.
이러한 세 갈래 운동이 프랑스 식민통치의 억압과 회유에 의해 대부분 좌절되자 1925년 호찌민(Ho Chi Minh) 등은 베트남 청년 혁명 동지회를 창설하여 새롭게 반제반식민 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호찌민은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을 창설하였다. 베트남 공산당은 1930년과 1931년에 노동자 농민단체와 학생들의 폭동을 통해 처음에는 노동자 농민의 생계보장, 노동조건 향상, 지주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저항, 지도자의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후에는 그들의 운동목표를 민족해방과 토지재분배에 집중시켰으며, 각 지역수준에서 농민 노동자가 주도하는 소비에트의 창설을 획책하였다.
1936년 7월 국제공산당 제국 인터네셔널 제 7차 대회를 기점으로 베트남공산당은 식민지 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유예하고 공산종주국인 소비에트연방의 정책에 동조하여 반파시즘노선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공산당이 비공산주의적 진보세력과 민족부르주아와도 연대하는 통일전선(1936 - 1939)을 형성하여 국내적으로 합법적 또는 준 합법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0년 6월에는 히틀러 파시스트들이 프랑스 본국을 점령하자 아시아의 일본 파시스트들은 인도차이나를 공략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베트남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다같이 항일저항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의 주체가 1941년 호찌민이 결성한 베트남 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minh)이다. 베트민의 구국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가자 파시스트들과 그 하수인들의 지배가 무력해지고, 1945년 3월 이후부터 폭동과 게릴라전에 의해 전국 각처에서 이원화된 권력구조가 형성되었다. 즉 인민의 권력이 지배하는 혁명기지와 해방구가 전국의 주요거점을 장악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 측에 항복하자 그 다음날인 8월 16일 호찌민이 베트남 민족해방중앙위원회 임시정부의 의장으로 선출되고, 9월 2일에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2. 프랑스의 식민재건과 베트남인의 항전
호찌민 주도하의 베트남 공산당이 일본의 연합국 측에 대한 항복이 있은 후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북부베트남 지역을 석권해 가고 있을 때, 연합국 측은 인도차이나의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에는 장개석의 중국군이 베트남에 진주하고, 그 이남은 영국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전승국 자격으로 식민지배를 재확립하기 위하여 베트남에 총독과 군대를 파견하고 베트남의 자주정부수립을 저지하였다. 이에 토착민족주의적인 공산세력이 프랑스를 상대로 9년간의 처절한 게릴라전, 진지전, 정규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소위 제 1차 베트남전쟁(1946~1954)이다.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베트남의 북부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고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식민세력과 베트남 매판세력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빈민에게 분배하고 모든 인민에 공유지의 공정한 분배, 노사분규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보호 등의 과감한 시책을 펴나가면서 전국적으로 총선과 각 지역인민위원회의 설치를 추진하였다. 한편, 남부베트남에서는 영국군이 진주하여 대세를 장악해 갔기 때문에 북부(하노이)에 거점을 둔 베트남공화국은 남부베트남지역을 장악할 수 없었다. 당시 하노이 베트남정부는 1946년 3월 6일 장개석 군대의 철군을 앞당겨 완전독립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우선 프랑스와 타협하여 프랑스로부터 정부와 의회 및 군대를 지닌 자유국가로 인정받는 예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협정을 곧 파기하고 1946년 11월 20일부터 북부의 하이풍 량선과 중부의 다낭을 거점으로 북위 16도선 이북의 베트남지역, 특히 북베트남의 내륙과 평야지대를 점령해 들어갔다.
이에 베트남 공산정부는 1953년 동계작전과 1954년 춘계작전을 통해 진지전과 게릴라전을 벌여 기존 해방구를 사수하고 프랑스군을 패배시켜 나갔다. 특히 1954년 5월 7일에 끝난 베트남 북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에서 벌인 베트남공산군과 프랑스군의 대격전은 제 1차 베트남전쟁을 판가름했다. 당시 55일간 계속딘 이 전투에 양측이 투입한 병력은 베트남 측이 20만이었고, 프랑스 측이 11만 2천으로 이는 당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전 병력의 1/4이 집결된 수치이며, 이 전투로 1만 6천명의 프랑스군이 전사 체포되었고, 프랑스 사령관 가스뜨리예(De Castries)장군 이하 참모들이 모두 베트남 공산군의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지역을 포기하게 하고 베트남의 분단을 가져 온 휴전협정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이 처참한 9년간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것이 1954년 제네바정전협정이다.
이 협정의 주요내용은 첫째, 북위 17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설정하고 그 북쪽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군(월맹군)이 철수하고, 그 남쪽으로는 프랑스군이 철수한다. 둘째, 중립국 감시위원회(인도, 캐나다, 폴란드 등 대표) 관리하에 1956년 11월 베트남 전지역에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한다. 셋째 통일베트남 영토내에 외국군사기지를 허용하지 않고 어떤 군사동맹도 맺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3. 베트남의 분단과 미국개입 그리고 패배 (1954-1975)
1954년 9월 미국은 프랑스와의 "워싱턴회의"를 통하여 프랑스에 대신해서 남부베트남 지원을 약속했으며, 미국은 호찌민의 베트남의 민주공화국에 대항하여 남부베트남을 장악하기 위하여 프랑스가 내세운 괴뢰 바오다이(Bao Dai)왕정을 폐지하고 미국에 망명중인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n)을 1955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서 대통력으로 내세워 베트남 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을 출범시켰다. 이후 미국은 1954년 제네바 국제협정을 인정치 않고 그 협정의무 조항인 2년 이내이 남북베트남의 총선거조차 거부하였다. 이는 호찌민과이 선거대결에서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이질적인 체제로 분단되어 대결하게 되었다.
1950년대까지도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원조를 했지만, 직접적인 군대파병은 없었다. 그러나 남부베트남이 디엠일가의 독재로 치닫자 남부베트남 내의 반정부세력은 1960년 12월 남부베트남 민족해방전선(FCN)을 결성하고 그 무력부대인 남부베트남 해방군 베트콩(Vietcong)이 저항운동을 시작했고, 여기에 월맹(하노이)이 군사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직접 개입으로 전환했다.
남부베트남의 해방군의 활동이 격화되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게릴라 진압을 위한 특수부대요원을 파병했으며, 1963년 케네디 사후 존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베트남 확전이 시작되었다. 1964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은 지원요청을 전문으로 25개 동맹국에 보냈으나 대부분의 동맹군들은 파병에 등을 돌렸다.
다만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한국만이 이러한 요청에 응했다.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한 명분과 동기에 대해서는 첫째, 과거 한국전쟁 중에 국제 연합군의 파병지원에 대한 보답, 둘째, 대미관계에서 한국의 위상강화, 예컨대, "한 미 상호방위조약"의 강화방향으로개정요구, 군사원조증액 등, 셋째, 베트남참전으로 결과되는 잠재적 재정적 이익, 넷째, 베트남에 대한 지원과 참전을 통해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그러나 제 3세계와의 관계는 부정적임)등 이다. 여하튼 한국의 경우는 한마디로 말해서 "월남특수"가 가져 올 경제적 실리가 주요 참전동기였다. 이리하여 1960년대 후반부터 사이공 정부군과 베트공 게릴라와의 싸움은 하노이와 워싱턴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최초의 미군파병은 케네디 행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1962년 2월 18일 미국방성은 하킨스 휘하의 특수군사령부(Special Military Command)를 창설한 뒤에 특수부대요원 1만 2천명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베트공의 게릴라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소위 스탤리-테일러 계획(Staley-Taylor Programme)이라고 불렀던 이 특수전의 전략방안은 첫째, 남부베트남의 정부군을 헬리콥터와 장갑차로 중무장시켜 대베트콩 토벌의 전력을 강화하고, 둘째, 신속한 평정작전과 아울러 전락촌(Strategic Namlets)을 설치하여 농촌지역의 베트콩 거점을 철저히 분쇄하고, 셋째, 해안을 통제하고 군사분계선(북위 17도선)을 봉쇄하여 북베트남의 지원을 차단시켜 베트콩을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단기간 내에 남베트남 내에 1만 7천 개의 전략촌을 설치하였으나 베트콩의 습격과 치열한 파괴공작이 뒤따라 이들 전략촌 건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전략촌 건설과 평정작전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남부베트남정부(사이공 정부)의 토지정책과 사회통합정책의 실패에 그 요인이 있었다.
특히 베트콩의 혁명조직은 농촌의 마을공동체나 친족조직 교우관계 등의 사조직을 기반으로 하였으므로 남부베트남정부가 각급 상위 행정조직에 의하여 사회통제를 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베트공이 혁명조직은 무장테러나 군사적 투쟁도 불사했지만 이 이권단계에 이미 반제 반미 사이공정권의 타도를 내세워 정치투쟁을 표방하면서 농민과의 융합을 위해 전쟁에 싫증이 난 농민과 젊은이들에게 물리적 안정과 지위보장, 토지분배, 그리고 권력분배 등의 구체적인 동기를 부여했고, 계급투쟁보다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소수민족의 소외현상을 극복하는데 주력했다. 예컨대, 당은 하층계층과 농촌출신의 엘리트가 능력만 있으면 맨 하위의 치보(Chibo)조직에서부터 당중앙위원까지 승진이 가능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이와 같이 베트콩은 정치 경제 사회조직과 관련해서 고도의 총체적 혁명전략을 수립했다. 반면에 사이공정부는 경직된 행정조직과 미국의 지원에 의한 군사적 토벌작전에만 급급하여 민심이 이탈되었으며, 모든 정책의 수혜는 기득권층인 지주 관료 군장교에 국한되었다. 결국 남베트남공화국과 그 동맹국인 미국은 거의 무제한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였지만, 베트콩의 혁명전략에 밀리고 말았다. 베트콩의 치열한 게릴라 공세와 악순환 되는 쿠데타정부의 무능으로 중반 이후부터 남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직접적이 군사적 개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의 확전 양상은 대규모의 병력 증파와 북베트남 지역의 폭격으로 나타났다.
1967년 말에는 30만의 공산군 가운데 5만의 월맹정규군이 포함되었고, 전쟁은 정규전으로 전환되었으며, 미군병력은 54만명 수준까지 파병되었다. 1968년도 한해 미국이 쓴 베트남전비는 265억달러나 되었다. 이는 당해연도 미군사비 총액의 30%, 미국 GNP의 3% 수준이었다.
베트남전쟁이 확전될수록 미국의 군사적 패배가 거듭되자, 세계여론의 악화는 물론 미국내의 반전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당시 반전여론은 존슨 대통령의 재선포기를 선언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결정적으로 말려든 계기는 1965년 7월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확전 결정(미지상군 완전참전과 5만명의 파병결정 등)이다. 이후 존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결국 특정 비전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보다는 정치적 타협이나 현실지향적인 리더쉽을 가진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서 의회와 가계의 반전여론에 밀려서 과거 윌슨이나 루즈벨트가 결단했던 것처럼 강력한 제패전쟁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베트남전쟁에서 손을 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베트남전쟁에 말려들어 계속 표류했다.
존슨의 후임인 닉슨 행정부도 1969년 6월 24일부터 10월 15일 사이에 11개의 반전과 철군에 관한 결의안이 미의회에 상정될 정도로 의회의 치열한 반전론에 직면했다. 이에 닉슨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철군방침을 결정하고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를 꾀했다.
이리하여 1969년 5월 10일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한지 3년반이 되는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대표가 서명한 "베트남에서의 전쟁종식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파리협정의 핵심내용은 1954년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협정에 의해 인정된 베트남의 독립주권의 당위성 및 영토보전(제 1조), 베트남 내정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간섭 중지(제 4조), 미국과 외국군 철수(제 5조), 포로석방(제 8조) 등을 규정했으며, 티우 정권의 존속을 인정하고 북베트남군의 남베트남 잔류를 묵인하는 선에서 상호 타협한 것이다. 파리협정은 미국이 적당히 체면과 명분을 세우고 힘겨운 베트남전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편으로 체결한 것이다. 이 협정에 의하여 미군이 철수하자 계속되는 북베트남군(월맹군)과 베트콩의 군사적 공세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붕괴되고 공산화통일이 달성되었다. 이 제 2차 베트남전쟁(1961 - 1975)은 "이념을 내세운 거짓과 오산"으로 점철된 미국의 아시아지역에서 정치적 군사적 패배의 악몽이며 파노라마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미국의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아시아에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미국의 무지의 결과다.
이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제 1차 베트남전쟁은 약 460만명의 사망자, 550만명의 부상자 그리고 13만병의 난민을 냈고, 제 2차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인의 경우 약 190만명의 사망자, 450만명의 부상자 그리고 700만명의 난민을 내었다. 미국의 경우 5만 8천명이 사망했고, 13만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국이 소모한 전비는 1,700억달러에 달했다.
4. 전쟁과 통일
가. 내전의 시기
호찌민은 총선거를 실시하면 공산주의 베트민 체제에 의하여 통일이 달성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제네바협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며 선거를 거절하였다. 이후 북베트남은 남부에서 정치적 투쟁을 통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였다. 즉, 게릴라혁명전쟁이라는 무장투쟁과 민족해방전선을 통한 정치투쟁을 결합하여 통일을 추구하였다. 제네바협정에 따라 그들의 주력부대를 북으로 철수시키면서도 남부에 공산당요원과 게릴라부대를 남겨놓았던 것이다. 베트공(남부베트남 공산주의자)요원들이 남부지역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1957년부터의 그들의 테러와 반란의 전법은 경제개발, 토지개혁 및 사회복지 등으로 디엠정부의 프로그램을 무력화시켜 남베트남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1960년 집권노동당 제3차회의에서 남부반란에 대한 공식적인 정치-군사적 지원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노동당 총서기 레 두안(Le Duan)이 이 프로그램을 지휘하였다. 그의 노력에 의하여 12월에 인민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1962에는 하노이의 군사지원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중앙기구로서 인민해방군이 조직되었다.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의 베트공세력은 계속 신장하였다. 1963년 10월에 발생한 구테타와 이에 동반된 디엠의 죽음으로 인하여 열 두번째에 걸쳐 비효율적인 불안한 군사정부가 남베트남에 들어섰다. 이 정부들은 경제적 개혁이나 사회개혁보다는 베트공과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승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 미군의 군사개입
미국의 지원은 1954년 1,000명의 고문관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는데, 1960년에는 군대파견으로 5,000명이 증가 되였다. 1962년 2월 18일 미국방성 하킨스(Harkins) 휘하의 특수군사령부를 창설하고 특수부대요원 1만 2천명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베트콩의 게릴라진압에 착수하였다.
1963년 케네디 사후 존슨 행정부가 들어서서 베트남 확전이 시작되었다. 1964년에는 미국 존슨대통령의 지원요청성명과 러스크 국무장관의 전문을 25개 동맹국들에게 보냈으나 대부분의 동맹국들은 파병에 등을 돌렸다.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한국만이 이 요청에 응했다. 미국의회에서 이른바 통킹만결의안이 채택되면서, 1965년 미군 병력 수는 18만 4천여명에 이르렀다.
베트콩은 정치·경제·사회조직과 관련하여 고도의 총체적인 혁명전략을 수립했다. 농민을 주축으로 하되, 협력하는 지주·부농은 물론, 도시 쁘띠부루주아나 소수민족까지도 광범하게 포용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마을과 촌락단위의 하부조직에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분권화정책을 실시하여 토지분배·조세·징집 등의 문제를 하층엘리트들리 각 지역 실정에 맞게 직접 결정할 수 있게 하였다. 반면 사이공정부는 경직된 행정조직과 미국의 지원에 의한 군사적 토벌에만 급급하여 민심이 이탈하였으며, 모든 정책의 수혜는 기득권층에 국한되어 결국 남부베트남공화국과 그 동맹국인 미국은 거의 무제한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였지만, 베트공의 혁명전략에 밀리고 말았다. 미국의 대량 군사개입은 사이공정부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남베트남에는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공군참모총장이 1965년 6월 수상으로 등장하고, 새로 설립된 국가지도평의회 의장인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u)장군이 사실상 국가주석이 되었다.
북베트남의 전쟁양상은 게릴라혁명전쟁으로부터 정규군전략적 전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67년말에는 30만명의 베트공 가운데 5만명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포함되어 전쟁은 정규전으로 전환되었다. 미군 병력은 최고 54만명 수준까지 파병되었다. 1968년 한해 미국의 베트남 전비가 265억 달러나 되었는데 이는 당해연도 미국 군사비 초액의 30%, 미국 GNP의 3% 수준이었다. 이는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1968년 구정 공세 때 최고조에 달했다. 이 공세에서 인민해방무장부대들은 워낙 큰 타격을 입어 실제적으로 더 이상 정규군 전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 협상과 전쟁의 병행을 통한 통일
한편에서는 닉슨-키신저와의 막후협상을 진행하고, 한편에서는 남베트남 내의 혁명세력강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택적 테러전술을 계속하였다. 1968년 5월 13일 대사급회담이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북베트남 대표들은 베트남인들이 자신들의 정치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DMZ에서의 모든 폭격의 중지와 미군의 전면철수를 요구하였다. 1969년 9월 호찌민의 사후 북베트남의 지도층은 전행수행에 있어 다양한 견해를 표출시켰다. 남부의 침투를 위한 통로로 캄보디아를 이용함으로써 확장된 전쟁은 1969년 내내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비밀폭격을 유발시켰다. 그 폭격은 또한 미국-남베트남의 캄보디아침공과 함께 더욱 강화되었다. 라오스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전쟁에 휘말렸다. 이러한 상황 중에 남베트남에서는 티우가 1971년 재선에 성공했다.
1972년 초 북베트남이 비밀회담 재개를 거부하면서 DMZ를 통해 대대적인 군사공세를 취하자, 미국도 이에 맞서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그후 협상은 재개되었으나 큰 진행은 보여주질 못했다. 1972년 12월 18일부터 30일까지 북베트남에 대한 집중폭격이 개시되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협상방안과 협상날짜를 제시했다. 1973년 1월 8일 레 독토(Le Duc Tho)와 키신저 사이의 비공개 파리회담이 재개되었고, 이들 둘사이에는 1월 23일 협의사항에 가서명을 했고, 이 협정과 함께 전 베트남에 휴전이 발효되었다.
휴전, 국제통화관리위원회, 포로의 석방 그리고 지뢰제거 등에 관한 네 개의 의정서를 포함한 베트남에 있어서 전쟁의 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은 군사적 문제를 해결했으며 반면 정치적 문제는 베트남인들 자신들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남·북베트남 사이의 내전이 다시 곳곳에서 재개되었고, 결국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반세기간의 끈질긴 지루한 전쟁이 막을 내린 후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RV)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이것은 급진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통일을 의미한다. 한편 1975년 제4차당대회에서 노동당을 베트남 공산당으로 개칭함으로써 1930년 호찌민이 최초로 창당했던 당 명칭으로 되돌아갔다.
5. 베트남전쟁에 대한 평가와 교훈
미국이 케네디 행정부이래 베트남에 적극 개입하게 된 배경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석권하여 그 영향력이 아시아 전역에 미치게 되었고, 한국전쟁과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반공강경노선과 같은 1950년대 유산이 미국 외교정책에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행정부의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게릴라 전술이론을 개발하여 그것을 실험해 보려는 군사전략가나 사회과학자들이 행정부에 들어가 큰 역할을 한데 원이이 있었으며, 또한 베트남 전쟁을 일종의 군사적 게임으로 생각하는 관료적 냉담성과 무자비성은 베트남에 폭력을 가해서 "베트남을 석기시대(Stone Age)로 되돌려 놓겠다"는 케티스 리메이(Cartis Lemay)미군장군의 말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만일 베트남사회가 백인사회였다면, 그러한 초토화 작전과 대규모 북폭이 자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인의 사고에는 암묵적으로 인종주의(Cryptoracism)적 편견이 그 저변에 깔려있다.
당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의 사고에는 역사의 왜곡 내지 자기류의 "팩스 아메리카나 테크노크라티카(Pax Americana Technocratica)"라는 미국판 이데올로기가 작용하였다.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유럽에서 "뮤니하"배신이나 전후 동유럽의 봉쇄 그리고 아시아에서 말레이시아의 반란과 한국전쟁 등에서 얻은 경험의 부정확한 유추를 통해서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미국인의 "팩스 아메리카나 테크노크라티카"는 적어도 베트남의 경우에 있어서는 세계 적화를 노리는 공산주의 급진적 좌파사고와 유사한 것이었다.
모켄소는 미국의 기본적인 과오는 첫째 베트남 자체의 경제적 사회적 혁명이 결과한 민족해방전쟁을 베트남 밖의 외부세력의 음모의 결과라고 고집했던 그릇된 신념이라고 지적했다. 베트남의 이러한 기본적 현실을 공산주의 음모의 단순한 결과로 왜곡하고, 남부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북베트남의 음모의 결과이며, 또한 북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선동하고 수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세계와 아주 경미한 관계만을 갖는 가상의 세계를 조작하려는 오류라는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의 현실을 잘못 이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 대신 미신과 가상으로 일관해왔으며, 그릇된 역사적 유추법을 적용해왔다. 예컨대 뮈니히징후(Munich Syndrome)를 베트남에 적용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베트남전쟁을 모스크바나 북경의 지령을 받아 성취한 세계화의 일환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베트남과 중국 및 캄퓨티아는 국제사회에서 사회주의권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입장을 같이 했지만, 개별국가의 국가이익 차원에서는 첨예하게 대결하였다.
둘째, 베트남전쟁은 전쟁을 서구문명차원에서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으로 구분하는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부도덕하며 부정의한 전쟁의 전형적 예다. 모겐소는 미국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악(소위 공산주의)으로부터 베트남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전쟁이라는 죽음을 강요해 왔다. 이는 선이 악으로 전도된 것으로 미국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력화시켰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야말로 200년 이상 지속시켜 온 미국독립선언의 원칙에 대한 생생한 부인이며, 미국사회의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켜 신뢰의 위기를 불러왔고, 나아가서는 미국의 세계적 위상에 타격을 주었다고 개탄했다.
셋째, 모겐소는 미국이 베트남사태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은 실재(reality)라고 착각했던 악몽과 같은 미신과 결별하고 세계를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며, 그러한 세계에 우리 자신을 말과 행동을 적용시키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의 세계는 혁명상태에 있다. 미국은 현상유지를 위해서 목격하고 해병대를 보내서 혁명과 싸우고 분쇄하려 해서는 안된다. 혁명적 시대 속에서 현상을 지키려는 것은 결국 패배하는 편에 내기를 거는 거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전 세계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미래가 그들에게 속해 있는 자들의 편을 들어야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수많은 캐톨릭 교회가 보수에서 개혁이나 혁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는 사실은 깊이 인식해야하며, 현실에 그들 자체를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교훈적인 일이다.
Ⅴ. 베트남 사회와 관료의 부패
1. 베트남사회의 관료부패
과거 베트남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부패가 어떠한 양상을 띄고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실태를 체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경험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 자료의 부재는 단지 베트남만의 문제는 아니다. 부패한 당사자간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거래행위와 같은 것이어서 쉽게 나타나지도 않고, 설사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처럼 드러난 실체만을 가지고는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빙산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부패에 관한 한 비교적 세 가지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첫째는 과거 베트남 사회에 만연한 부패가 고산당의 혁명적 기반을 잃을 정도로 심각하게 발전하였다. 둘째, 과거 연일 뉴스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부패 스캔들로 인하여 일반 국민들이 이에 대한 일종의 무감각 증세마저 지니고 있었다. 셋째는 공산당 정권이 부패의 심각성을 인정하면서도 체제상의 한계로 인하여 이를 통제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 부패의 발전과 함의
일반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제국보다 전통적 사회주의 국가나 후진국에서 보다 많은 부패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베트남 사회에서 부패가 많을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이 가능하다. 그러나 베트남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적어도 통일전까지는 부패로 인한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특히 1954년부터 공산당 지배 아래 있었던 북부는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 날 자본주의 체제를 경험한 남부와는 달리, 북부는 통일 이후 남부로부터의 영향과 1980년 중반부터 시작된 Doi Moi로 인하여 급증하는 부패현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를 향한 개혁이 당 관료들로 하여금 혁명적 계율을 상실한 채 점차 개인적 이익이나 물질에 관심을 두도록 유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태를 반영하듯, 베트남 노동조합지 Lao Dong은 베트남 전쟁 시 북부의 법원들이 일년간 처리한 부패사건이 단지 5~7건에 불과하였으나, 통일 이후 공산당이 자유시장경제로에 개혁을 추진하기까지는 1,800%, 그리고 1988년까지는 무려 2,230%나 증가하였다고 한다.
사실 베트남 사회에서 사소한 부패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잇다. 조그만한 뇌물을 바라보고 편의를 제공하려는 공산당원이나 관료들은 항상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부패가 점차 대형화 조직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액의 횡령이나 뇌물을 수반하는 부패행위가 체제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노이의 경제학자 Do Duk Dinh은 이러한 실태를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부패의 사례가 발견된다. 당신이 전화 명부에 이름을 올리려면, 아마도 수개월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당장 전화를 원한다면 400불을 주면 될 것이다(당시 베트남 국민의 1인당 연간 소득은 200불에 불과했다)". 베트남에서는 "적합한 사람"을 아는 것이 곧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만약 당신이 이런 사람을 모른다면, 당신은 기꺼이 지불하고자 해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패의 증가는 베트남 경제의 성장"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값싸고 근면한 노동력, 그리고 풍부한 자원 등이 베트남의 경제 전망을 밝게하고, 따라서 외국 기업들이 베트남 관료들에게 더러운 돈을 투자하거나 베트남 관료들이 외국 정부에 더러는 뇌물을 주고자 하는 노력이 경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패는 이러한 외견상의 모습과는 달리 베트남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을 기곡(奇曲)시킴으로써 수 십억 달러에 달하는 외국 투자를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베트남 공산정권의 혁명적 공적을 손상시킴으로써 정부의 생존마저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지난 날 베트남 공산당이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어 온 것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호찌민의 후예들이 "도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3. 부패에 대한 인식과 반응
1990년 베트남 정부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인 부패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부패가 더 증가되었던 것이다. "이제 뇌물이 없이 일자리 찾는 일, 건축허가를 얻는 일, 병원치료를 받는 일, 어린아이를 탁아소에 보내는 일, 해외여행을 위한 비자를 받는 일, 사업허가나 수출입허가를 얻는 일 등이 불가능해 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푸념들은 종종 분노로 변하기도 했다. 1982년 하노이 남부 Quang Loo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분노한 지역주민들이 부패 관료들을 스스로 납치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베트남 정부가 농민들의 세금을 포탈하고 친척들에게 특혜를 제공한 부패 관료들을 처벌해달라는 지역주민의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발생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퇴역 장교를 중심으로, 지역 공산당 지도자와 부하 경찰서장, 농림부서장 등을 체포하기로 하였고, 이 가운데 몇 명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노이 정부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몇 차례에 걸쳐 경찰을 보냈으나 마을 주위에 담을 치고 인질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지역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무관심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부패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들이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과는 달리 부패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반응은 비교적 단순하고 방어적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관료부패를 간헐적,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자 하였고, 특히 이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부패가 점차 확산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한 수동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90년대 이르러서는 악화된 국민적 여론을 의식하여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대대적인 부패추방 운동을 전개한 이래 매년 수 천명의 관료를 대상으로 한 부패행위 조사활동을 전개하였고, 1992년 말에는 "반부패 및 밀수의 해"로 설정하였으며, 동시에 부패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베트남 사회주의가 지닌 체계적 한계로 인하여 대개 선언적 혹은 상징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개혁이 부패를 초래하고, 다시 부패가 개혁을 촉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건 이러한 부패현상은 정부나 국민 모두가 심각하다고 인정할 정도로 점차 통제가 어려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4. 관료부패의 요인
베트남에서는 점차 확산되고 있는 관료부패를 개인이 지닌 도덕적 정신이나 혁명적 계율의 상실에서 비롯됨을 강조하여 온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이 관료부패의 원인을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구조적 결함이나 정책적 실패보다는 관료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나 일부 관료들의 파렴치한 행위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공산당 스스로가 사회문제의 원인을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자체 결함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 사회에 만연하는 부패의 원인을 관료 개인의 도덕적 결함보다는 이러한 행위를 가능케하는 체제적 구조나 요인에서 찾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최근 부패요인에 관한 연구들이 개인적 도덕적 설명에 치중하는 전통적 접근방법에 반발하여 그 요인을 주로 정치 경제의 체제적 결함에서 찾고자 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만약 부패의 요인이 개인에게만 있다면 왜 특정 사회에서 보다 많은 부패가 발생하는가"라는 기본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는 부패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고, 따라서 부패에 대한 관심도 도덕적인 것으로부터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다음에서 제시되는 관료부패의 요인들은 그 것 자체가 직접 관료부패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들로 하여금 부패행위를 하거나 할 수 있는 또는 유인으로 작용할 뿐이다.
여기에서는 그게 경제적 정치행정적 그리고 사법적 차원에서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 경제적 요인
1980년대 베트남 공산당은 지난 날의 경제를 "관료주의 중앙집권주의와 국가보조체제"라 명명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1950년대 중반 베트남 공산당이 국가경제를 통제하고 민간부분의 경쟁을 억제하기 위하여 도입한 것으로서, 수요와 공급에 내재하는 유인체계라기 보다는 생산 및 분배에 관한 행정통제를 가지고 경제행위를 유도하던 일종의 하향식 경제체제이다.
관료주의 중앙집권제는 기업들의 활동을 전적으로 중앙의 의사결정이나 판단에 의존케 하였다. 중앙정부가 다양한 생산규범이 남긴 계획안을 만들어 이들에게 강요하였고, 생산활동에 필요한 모든 원료 및 부품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기업들은 원료나 부품을 얻기 위하여 경제관료들에게 뇌물을 공여한 것이며, 기업이 스스로의 실질 생산능력을 속이거나 가능한 국가에 바칠 양을 적게 배당받기 위한 비밀스러운 협상을 하는 것이다.
보조금의 지급과 이중가격체제는 베트남 공산당이 추구하여 온 경제정책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상품의 시장가격과 정부가격을 설정하여 놓고 양자간의 차이를 보조금을 통하여 보전해 주는 것이다. 즉 정부에 의해 낮게 책정된 가격의 상품을 비싼 값으로 암거래 시장에서 팔거나 다른 기간요원이나 근로자에게 배분하거나 혹은 다른 기업이 상품과 교환함으로써 이득을 취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란 본질적으로 관료들의 비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체제이고, 반면에 관료들은 항상 부패에 노출되기 쉬운 취약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정치행정적 요인
베트남의 경제체제는 정치 행정체제가 지닌 구조적 결함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특히 후자는 우산체제(Umbralla System)라 불리는 실정주의적 체제를 통하여 국가 관료제에 집단적 무책임, 언론에 대한 통제 및 비밀유지, 그리고 사법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당관료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특히 우산체제는 관료들의 비리나 부패행위를 억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외부통제나 내부고발행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당료들의 비리를 대외적으로 공개하거나 공개재판을 받도록 하기 보다는 철저한 내부조사를 통하여 처리토록 하였고, 이를 통하여 우산체제에 속한 부패관료들을 쉽게 사면하였다. 그리고 당 관료들, 특히 우산체제내에서 정치적 연계를 지닌 관료들의 비행을 고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불합리한 전보나 승진기회의 박탈, 그리고 심지어는 무고죄로 인한 체포 등의 정치적 보복을 가함으로써 이의 발생을 근본적으로 봉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실주의적 행정형태는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지역사회에서 형성된 친밀한 혈연, 지연관계가 지역사회의 행정관리에 악영향을 주었고, "관리는 그 친척에게 최상의 혜택을 제공한다"는 베트남 속담이 있듯이 지방정부의 행정관계나 권위체제가 친밀한 친척과계나 이웃관계로 대치됨으로써 관료부패를 조장하여 온 것이다. 흔히 베트남 사회에서는 중앙보다 지방정부에서 부패가 더욱 심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지방정부이 당관료들이 우산체제의 보호아래서 마치 독재자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비판을 철저히 억제하고 비밀을 유지하여 온 것도 베트남 사회에서 관료부패를 조장하여 온 하나의 주요된 요인이였고, 외부 통제나 비판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부패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일종의 경험적 법칙과 같다. 여기에 지나치게 낮은 수준의 봉급도 관료부패를 조장하여 온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다.
다. 사법적 요인
베트남에서는 민법, 형법, 민영화법, 외국인 투자법 등 비교적 다양한 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장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조직이나 기업의 설치에 관한 절차법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베트남의 뚜렷한 법적 장치 없이 소비에트식의 보조체제로부터 자유시장체제로 전환을 시도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혼란 및 부패를 조장할 수 있는 많은 허점을 남겼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부패행위에 대한 소극적인 법적 대응이나 가벼운 처벌도 부패를 조장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사법기구의 정치적 종속도 간과할 수 없는 부패요인이 되었으며, 그리고 법 준수의식의 희박성을 들 수 잇다. 베트남 역사상 법체제(Legal System)란 정책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처럼 베트남 사회에서 법에 대한 관료들의 의식이 희박한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 진다. 하나는 우산체제가 당국가조직으로 하여금 법을 무시하도록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법이란 단순히 "계급억압"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기에 상위직 기관요원들이 권력만 얻게 되면 법, 규범 준수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 베트남 사회에서 보다 시급한 것은 새로운 법을 제정하기 보다 "법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5. 도이 모이 이후의 베트남의 변화
베트남은 국가적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86년 12월 구엔반틴은 제 6차 베트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취임하면서 과감한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고 베트남 경제의 대외개방을 서두르는 소위 쇄신정책(Doi Moi Policy)을 추진하였다. 도이(Doi)는 바꾼다는 뜻이고 모이(Moi)는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이 도이 모이 정책의 추구로 인하여 베트남의 경제 사회 체제가 변형을 겪게 되어 사회 통합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베트남은 남부베트남을 통합한 후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좇아 중공업 치중의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추구했으나 관료사회의 경제의 운명의 미숙, 기술의 낙후성, 자본부족, 국제수지의 악화, 인플레 등의 경제적 파탄에 직면하였다.
베트남의 공산당지도부는 이후 베트남 경제를 철저하게 개혁 재편성하려 하였다. 기존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탈피해서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 관료주의적 당조직과 행정기관의 권한과 역할을 축소하였다. 권한을 하급기관과 지방정부에 분산시키는 한편, 서방측과 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서방과 중국에 유화정책을 추진하는 등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정치 외교국방 등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진행시켰다. 또한 공업화의 방향을 종래의 중화학공업체제에서 급선회하여 식량생산을 위한 농업중시정책, 소비를 위한 경공업 분야 육성, 수출증대를 강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도이 모이정책의 추진내용과 특징은
첫째, 도이 모이정책의 추진주체는 과거 강력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주관해온 공산당이다. 이를 베트남 공산당은 호찌민 이래의 민족주의 성향과 실용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주체성이 강한 권력 엘리트들인데 이들이 스스로가 체질개선을 통해 과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와의 기존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상호 경제협력 대상이 딘다면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더라도 세계 어느 국가와도 협력관계를 가지며 우방으로 삼겠다는 신념으로 외국과의 관계개선과 협력에 매우 적극적이다.
둘째, 외국의 자본과 기업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베트남은 1989년 초에 국가투자협력위원회(SCCI)를 설치했고, 1990년 6월에는 "외국인 투자법"을 개정하여 외국자본을 적극 유치하였으며 국내 민간기업이 외국인 또는 외국기업과 합작 투자를 원하는 경우, 내각회의에서 결정하는 사업분야의 범위 내에서 이를 허가했다.
셋째, 베트남 정부는 토지의 사유화를 사실상 인정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넷째, 기업경영에 있어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와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잇다. 국영기업까지도 원료조달, 고용, 임금, 판매, 대외무역, 자본투자에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지방정부에도 그러한 자유를 부여하였으며 특히 외국기업과 직거래하고 차관도 들여올 수 잇는 권한도 부여했다. 과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경험했던 남북 베트남 지역에 있는 지방정부들에서는 외국기업투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국영 및 공영기업의 자율화뿐만 아니라 개인기업과 협동조합형태의 기업소유권을 인정함으로써 공기업과 사기업을 병행시키는 일종의 혼합경제체제의 「틀」을 짜면서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국가소유기업중에서 중앙정부의 부처가 관장하는 대기업은 그들 베트남인의 관점에서 볼때는 비교적 효율적이나 지방자치단체나 당조직이 직접 운영하는 중소기업은 대부분이 판매없이나 서비스 업종으로 이들 약 40%가 적자이며, 30%가 파산상태에 있다. 이들 국영기업이 부실요인은 복합적이며 대체로 ① 과도한 신용대부로 인한 자본 투자의 과잉, ② 불필요한 인력적체, ③ 구식장비와 기술, ④ 경영진(당간부)의 무능과 부패 등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였다.
1992년 6월 정부가 기간산업 이외의 국영기업에 대한 '민영화방안'을 제시하였고, 이전 1990년 12월에는 사기업법을 제정하여 사기업의 법적 지위를 확실하게 보장하며 장려하고 있다.
도이 모이 정책의 실시로 거둬들인 가시적인 성과는 대단했다. 1980년대 전반에 연 30%까지 물가가 상승했는데 1986년 이후 연 30% 수준으로 크게 완화되었다. 경제성장률도 1∼2%에 불과했거나 마이나스 성장률을 기록했던 것이 연 5∼6%선으로 올렸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은 기존의 경직되고 교조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개방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원리와 거기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자본주의 체제운영방식을 채택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모하고 있다.
베트남 사회에 대한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도전이 바로 도이 모이 정책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1975년의 베트남의 통일이 영토적 민족적 권역을 탈환한 독립혁명 정치혁명이라면, 도이 모이정책에 의한 베트남의 변화는 베트남인에게 삶의 질을 높이고 복지를 가져오는 경제적 사회적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Ⅵ. 베트남 통일의 특성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1. 베트남 통일의 특성
약소국과 강대국간의 전쟁 과정에서 약소국에 의한 통일이라는 점에서 베트남 통일의 특성을 규명할 수 있으며,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논의할 수 있다.
베트남의 통일이 부여하고 있는 특성은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체제를 상대로 하여 이뤄진 공산주의 통일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베트남의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체제로 분열되어 전쟁을 수행한 하나의 민족이 공산정권의 사회주의혁명 전략 내지 전술에 의해 폭력으로 통일되었다는 점을 주요 특성으로 들 수 있다.
베트남의 통일은 월맹에 의해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추진된 공산주의혁명 전략전술의 효과성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전략전술 수행과정에서 월맹이 유용하게 활용하였던 점은 앞에서 고찰하였던 베트남의 역사성에 있었다. 베트남은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점령당하기조차 하였다. 공산월맹은 바로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외국지배를 통해 축적된 베트남인들의 외세배척 감정을 적절하게 월남 공산화에 활용하였다. 더욱이 주월 미국을 또 다른 식민세력으로 규정하여 월남인의 반미감정을 극대화시켜 대결 전선을 구축하였다.
둘째로 물자적 측면의 군사력이 전쟁 수행상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선례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나타난 바와 같이 가공할 군사력에 의한 전쟁 수행은 다량 살상과 대량 파괴라는 점에서 공포적이며 전쟁 승패의 관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수행과정은 무엇보다도 국력의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는 "국민성"이 또 다른 핵심요인임을 명백하게 제시하였다. 특히 국민들을 지도하는 지도자의 대응 역량이나 의지 등의 지도력이 얼마나 크게 국력의 작동기제로 운영되는가를 여실히 제시하였다.
2. 향후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베트남의 통일이 제시하는 시사점 내지 교훈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고찰 할 수 있다. 특히, 베트남 통일의 특성으로 분석한 앞의 두 가지 점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지도자의 역할과 관련된 점을 들 수 있으며, 보다 세부적으로 향후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에 의한 통일과정에서 통일 후 민족간·지역간의 갈등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통한 통일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베트남은 1986년 12월 이후 채택한 도이 모이 정책(Doi Moi Policy: '바꾸고 새롭게 한다'는 소위 刷新政策)을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통합문제가 국가발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제이자 난제로서 존재하고 있음은 전쟁이 초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통일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도이 모이정책 이후의 전과정을 통찰하였을 때 베트남 발전의 주요한 변화의 핵심 방향은 결국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체제라는 점이다. 물론 베트남정부가 기존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의 위상을 전제하며, 사실상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접근은 발전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인간본연의 모습과 동떨어진 한계성을 띠고 있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을 철저하게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나 지배자는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어떠한 체제가 아무리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그 체제가 군사독재로 전락하고 부정부패로 민심이 이반하면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도 무력했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결국 체제안보는 무엇보다도 자주적 노력과 국민의 지지에 있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예증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먼저 우리 남한 대한민국 차원에서 성찰하고 대응해야 할 사례이지만, 한편으로는 한반도 통일에 매우 순기능적 측면에서 고찰할 수도 있다. 그러한 점은 북한이 현재 처한 인권유린의 독재 내지 부패성과 무원칙적 무능성 측면에서 그렇다. 아무리 강력한 독재체제일지라도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담보해내지 못할 경우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인류사적 사실이 하나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월남패망을 통한 베트남 통일 직전의 월남은 54만 명의 미군, 7만의 연합군, 60만의 자체병력, 세계 최첨단의 미군 무기, 1천 4백억 달러의 지원비 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지배자들로 인해 패망하고 말았다.
끝으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군사력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종국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이러한 점은 모겐소(Hans J. Morgenthau)가 베트남의 교훈과 관련하여 미국이 범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과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이 개입한 기본적인 오류는 베트남 자체의 경제적·사회적 혁명이 결과한 민족해방전쟁을 베트남 밖의 외부세력의 음모의 결과라고 고집했던 미국의 그릇된 신념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공산주의를 위해 세계정복을 목적으로 남부베트남에서 혁명을 선동했다는 생각은 무식하고 겁먹은 정치가들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베트남 전쟁은, 전쟁을 서구문명차원에서 정의와 부정의의 전쟁으로 구분하는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부도덕하며 부정의한 전쟁의 전형적인 예이다. 모겐소에 의하면 베트남전쟁이야말로 200년 이상 지속시켜 온 미국독립선언의 원칙에 대한 전면적인 부인이며, 미국사회의 응집력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켜 신뢰의 위기를 불러왔다. 나아가 미국의 세계적 위상에 타격을 주었다.
셋째, 모겐소에 의하면 미국은 베트남사태에서 실재라고 착각했던 악몽과 같은 미신과 결별하고 세계를 존재 그 자체로 보아야 하며, 그러한 세계의 미국의 언행을 적응시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장기적이 측면에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전세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전략·전술적 측면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Ⅶ. 결 론
현재 개혁 개방을 추구하고 있는 베트남은 잠재된 내부적 모순과 외부의 충격이 어우러져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한 진통을 몇 가지 차원에서 논의하면,
첫째, 개혁개방으로 인해 외부의 자본이나 기업과 함께 묻혀오는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나 가치를 기존 사회주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하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 문제는 각급 학교 교육이나 사회교육의 당면과제이다. 예컨대,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민족주의 교육이 더 강조되며, 특히 대학교육에 있어서 교과과정이 사회주의 사상교육, 이념교육보다는 각 영역의 전문성이 강조되고 있다. 종래는 특수계층이나 선택받은 집단에게만 자녀들의 대학입학이 허용되었는데 이제는 치열한 입시경쟁을 통해 선발되고 있다. 또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경상계열이 더 인기가 있다. 교과목수강에 있어서도 경제경영분야에 있어서 마르크스 경제학 보다도 현대경영기법이나 전산교육강좌에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둘째, 도이 모이 정책이후 중앙정부의 권한이 지방정부에 분산 이양되어 이것이 지역간에 경쟁을 유발하여 이것이 장래 지역간에 격차를 빌릴 가능성도 있다. 41개의 지방정부가 제각기 외국으로부터 차관과 투자유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로서는 과거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운영했던 구 남부베트남지역을 서방 측의 자본이나 동남아의 화교자본을 보다 선호하고 있다. 특히 사이공(현 호치민시)주변지역에 외국기업이 집중적으로 몰려들고 있다.
셋째, 중앙정부수준에서 특히 해방된 남부베트남지역에서 북베트남인들이 당이나 행정요직을 거의 독점하고 베트공 출신의 남부 엘리트들이 소외되어 왔는데 개혁 개방화시대에서도 이러한 불평등한 엘리트 충원이 지속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남부의 민족해방운동dl 통일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통일 후 억압당했던 불교와 카톨릭 등의 종교세력이 도이 모이정책 실시 이후 선교의 자유를 얻어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들의 향배가 사회 변화의 큰 변화의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한다.
넷째, 산업화(공업화)에 따라 각계 직능 집단의 기능과 이익이 분화되고 또 그것이 지각된다면 종래 공산당의 지배에 예속된 일방적 관계에서 보다 독립된 자율적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이것이 장래 다원화된 사회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끝으로 개혁개방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의 위상이 변화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즉 공산당이 일당체제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다원주의를 선언하면서 헤게모니정당으로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공산당이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룩할 때까지는 정치적으로 일당 권위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여타 비정치적 영역을 모두 개방하는 중국의 등소평 식의 개방 개혁모델을 따를 것이 분명하다.
개혁 개방의 과정에서 상호 모순되는 이데올로기의 불협화음과 갈등은 수십년간 외세와 항쟁하면서 독립을 쟁취한 강인한 베트남 민족주의와 이러한 저력으로 응집된 베느탐의 현 지도층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전망된다. 더욱이 베트남은 여타 동남아국가에 비해서 양질의 인적자원과 석유 등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 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