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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 샤밭예배 "פֶסַח 페싸흐"
샤밭예배
레33:12-34:26(To)
오늘은 오메르 카운트 여섯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헤세드에 예쏘드를 결합합니다. 형제 사랑에 덕을 결합합니다. 오메르 카운트는 굉장히 신비한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육체로 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성품을 이야기한다. 그 사람 안다고 했을 때, 육체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품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한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의 성품을 주님이 제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제정하신 그 여섯개의 성품을 우리는 바브라고 한다. 바브의 빛이 여섯개의 주님의 성품의 빛이다. 그 성품의 빛 중에 이번 주간, 우리는 계속 형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의 헤세드의 빛을 받고 있다. 그 사랑이 완성되려면, 나머지 다섯 가지 성품이 합쳐져야 또한 그 사랑은 완성되어진다. 오늘 우리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합치는 덕이라는 것은, 사랑은 반드시 덕이 있어야 한다. 덕이 없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덕을 가지고 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덕이 있다는 것은 언약적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덕이 있다는 것은 언약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던, 안되던, 자기에게 어떤 기쁨이 있던, 없던 상관없이, 언약적으로, 창세 전에 나와 하나였던 자를 찾아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언약적 사랑이라고 한다. 사람에게 이 덕이 없다면, 짐승과 같을 것이다.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웃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온갖 아우라를 풍긴다. 그러나 의인은 덕이 있어서, 이 땅에서 나에게 발생되는 어떤 일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케뎀에서 잃어버린, 하나였던 자들, 그러나 이 땅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서, 그들과 결합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다. 이것을 예쏘드의 힘이라고 한다. 창세 전에 나와 하나였던 자들과 결합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을 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을 모르면 사람은 덕이 없어서, 자기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행복해하고, 자기에 따라서 웃고, 울고, 온통 자기의 감정이 중요하다. 이것을 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는 여섯번째 날에, 하늘로부터 이 덕의 빛을 받는다.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예쏘드의 힘으로 살아간다. 예쏘드의 힘은 모든 사랑을 완성하는 기초이다. 예쏘드의 힘은 자기의 이익에 따라서 울고, 웃고 헤헤거리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어떠함에 따라서 삶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다. 덕에 있는 덕의 힘은 오로지 케뎀에서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특별히 청년들,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언약의 사람이 되어서, 자기 자신의 어떠함으로 up and down하는 삶에서 나오기 바란다. 오늘은 예쏘드, 사랑의 언약의 날이다
* 유니스 목사님
교회를 개척하고나서 처음으로 목사님이 몸이 안좋으셔서 상번제를 다 제자들에게 맡긴 처음 있는 날이다. 인생이 참 짧구나.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남편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샤밭에는 샬롬이 있다. 샤밭 샬롬이 우리의 인사이다. 진짜 오랫만에 절기의 초를 당기면서, 그 직전까지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근심이 초의 불을 보는데, 그냥 물러가는 경험을 하였다. 샤밭 초를 당기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다. 샤밭에는 샬롬이 있다. 평소에는 사실 욤 토브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손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필요한 날들, 그렇게 우리는 욤 토브 하면서 6일을 사는데, 이 시간 샤밭으로 들어오면, 그냥 완전한 샬롬인 것이다. 그냥 완전한 평안, 지극한 행복이다
저는 요새 제자들이 말씀 전하고, 간증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하고, 특히 오늘 아침에 베드로의 너는 나의 봄이라는 말씀 들어보셨는지, 한편의 노래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굉장히 유명한 곡이더라. 베드로가 부른 소절을 찾아봤는데, 어딘지 모르겠다. 그래도 왕년 초창기 때 베드로가 싱어였다. 성시경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주었다. 너무 멋졌다. 지지난주에는 장 집사님이 격리를 마치시고 올 동안,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들으면서 가정을 보는데 너무 행복하더라. 그냥 각자 각자가 맡아줄 수 있는, 영화가 엊그제 이야기했던, 그 자리에서 버텨주는 지체들이 너무 고맙고 예뻤다. 그것을 보는 것이 샬롬이고, 아름다움이고 조화였다. 완전한 샬롬을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유월절에 계속되고 있다. 사실 노래 중에 노래는 오메르 카운트이다. 목사님이 올려주시면, 우리는 또 화답을 하고, 마치 노동요 같다. 사랑의 세레나데라고 하자. 50일 동안 우리 열심히 노래해서, 주님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때를 기다렸으면 좋겠다. 오늘은 제가 아가서를 함께 보겠다. 마음 같아서는 설교 안 하고, 아가서를 같이 교독했으면 좋겠다. 이것은 다 노래이다. 기도의 집을 했을 때는, 이것을 다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를 했다.
아1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쉬르 하쉬림이라고 하는 아가서는 유월절 예식 세데르 맨 마지막 순서에 읽게 되어있다. 그전까지는 출애굽이라는 위대하고 거대한 서사, 에픽 스토리가 지극히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침실로 옮겨지는 순간인 것이다.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
지금 유월절이 레위기를 주님이 움직여가는 시간 안에 있다. 레위기는 가장 지루해보이지만, 가장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레위기 전체가 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시간에서, 유월절, 그 사랑 중의 핵심인 에하드에 들어가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지성소라고 한다.
사실 오메르 카운팅을 하면서 굉장히 죽음에 집중해계실 것이다. 내 관점이 죽고, 내가 써지는 것에 너무 집중하고 계시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한 형제가 있었는데, 중독에 걸린 사람이었다. 친구에게 자기가 포르노 중독자인데, 한 자매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제가 100이면 100, 형제들의 이상형을 물어보면 나오는 단어가 청순과 단아한 자매이다. 그리고 뒤에 붙이는게, 우리 교회에는 없는 자매라는 것이다. 그 형제도 사랑한 자매가 청순하고 단아한 깨끗한 자매를 사랑하게 되어있는데, 나 같이 더러운 놈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형제가 자기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교수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중독을 끊으라고 하진 않고, 그 여인을 한번 미치도록 사랑해보라고 한다. 그 여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사랑인지 생각해보고, 그 여인을 죽도록 사랑해보라고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 친구가 그 형제를 만났다. 어떻게 됐냐고 했더니, 그 자매를 만나기 시작하고나서 1년 뒤에 한번도 그 중독이라는 단어에 집중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자기가 여기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친구를 만나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적이 있다. 우리 관점이 죽는 것에 너무 집중하지 않아도, 죽도록 주님을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 죄의 노예에서 나올 수 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네명의 형제 자매가 아슬란이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존재에게 가까이 갈수록 어느새 하얀 마녀의 꽁꽁 얼어붙은 겨울 왕국에서, 그 눈이 녹도, 자신들이 옷장에서 꺼내입었던 코트를 하나씩 벗기 시작하며, 슬그머니 봄이 오기 시작한다. 이번 겨울은 참 혹독했는데, 어느새 봄이 왔다. 이 봄의 때는 누군가, 주님을 미치도록, 죽도록 사랑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주님과 뜨거운 사랑에 들어가는 시간들 되시길 바란다
아가서는 결합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교회와 이스라엘이, 토라와 제자도가, MVC와 JVC가 결합하는 이야기이다. 많은 제자들이 쿠웨이트와 우리 교회는 너무 다르다고 한다. 토라와 제자도는 안 만나지는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을 다르게 하면,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과 같다. 우리는 포크다. 너무나 다르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하나라는 반증인 것이다. 포크를 똑같이 만들려고 생각해봐라. 이쪽 저쪽도 삼지창이면 포크가 아니라, 그냥 삼지창이다. 얼굴이 좋다고해서, 전신을 얼굴로 만들려는 무지에서 그런 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불가능해보이는 그 결합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 MVC와 JVC가 결합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하나님과 우리가 결합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을 하는 것을 아가서라고 한다
쉬르 하쉬림이 아가서이다. 쉬르, 노래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노래이다. 제가 쿠웨이트 가기 직전에 우울증에 빠져있었다. 목사님이 쿠웨이트에 가자고 하면서, 어떤 목사님이 당신보고 같이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남편 없이 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당신 하던대로 하시라고 했는데, 고 목사님의 강권하심으로 그곳에서 제 인생이 바뀌었다. 제가 비전으로 거듭나고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가 그때 뭘 했어야 합니까? 정말 고통스러웠고 외로웠던 그때 제가 했어야 할, 그 신성은 무엇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제 마음 속에 너는 노래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공황장애에 걸린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기어서 의자 밑에 들어갔는데, 그때도 놓치지 않는 것이 호흡이다. 죽을 것 같다고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호흡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것 같을 때에도 호흡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죽을 것 같다면 노래해보시기 바란다. 이것은 안돼, 불가능해보인다면, 노래해보시기 바란다. 너는 나의 봄이다!? 순관이의 나의 봄을 들으시고, 아가서를 보기 바란다. 1년 중에 아가서를 노래하는 시간이 또 오지 않는다. 민수기, 신명기, 초막절에는 더 바쁘다. 지금 이 시간에 온 우주에 충만한, 노래의 기간에 노래하시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은 아가서 해석을 어려워한다. 저희가 24시간 기도의집을 할 때 세 기둥이 있었다. End time, 이스라엘 기도, 아가서였다. 훈련생 중 한 명이 아가서를 육체적으로 풀려고 하는 위험한 발언을 한적이 있다. 자기가 주님과 깊은 사랑에 빠졌는데, 첫날밤을 치룬 것 같았다고 했다. 그때 다비드 선교사님이 엄청 무섭게 그 말에 대해서 정색을 하시면서 교정하시더라. 저는 방에 들어와서 그 훈련생 내일 나가겠다고, 어떻게 무섭게 했냐고 했는데, 우리 제자들은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했다. 육체적, 문자적으로 아가서에 접근할 때, 지성소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성결케되지 않은 대제사장조차 죽을 수 있는 위험하고 비밀을 아가서에 숨겨놓으셨다.
이 아가서의 시작을 보자. 솔로몬의 아가서라고 한다. 쉬르 하쉬림 레슐로모.
לשׁלמוֹ 레슐로모
우리 교회에 쉬르라는 자매가 있다. 노래란, 첫 번째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자매에게 쉬르라는 이름을 지어줄 때가 시작된다. 이 자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많은 자매들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는데, 자기만 생일을 기억을 못하는 자매이다. 너는 멜기세덱이라고 했다. 너의 근본은 이 땅이 아니구나. 그러나 거짓 아비는 이 자매가 자기 생일, 근본을 모른다는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박스에 가둬서, 그 상처와 사연 덩어리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들어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실제화시키는 자, 아버지의 생명을 살아내는 자가 되라고 쉬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שׁיר 쉬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형상을, 그 손의 능력으로 이 땅에 내리는 영, 그것을 노래라고 한다. 노래는 굉장히 영적인 것이다
다음주부터 도 사모님이 오신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시려다보니, 우리는 나만의 언어 모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쏟아부어주셔도, 나의 언어 사전을 통과하는 순간, 굴절되어서 엉뚱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쉬르의 삶에, 4-50년을 내가 맞다고 살았는데, 아버지의 생명을 나타내라니, 이것이 또 자매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시간도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면 금발의 잘생긴 청년을 떠올린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아가서를 말씀하신다니, 정말 난감하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올리시기 원하는 아버지의 갈망, 마음을 받으시는 샤밭이 되기 원한다.
토라를 공격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 생활을 안 해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아시는가? 노래는 멜로디가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반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에하드, 끝없이 반복하신다. 끝없이 자아에서 나가는 것, 주는 사랑의 노래의 대가이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에하드, 사랑, 승리, 절제, 이런게 잘 안되신다면, 노래하시기 바란다. 무조건 노래해보라.
제가 존경하는 이지선 교수님, 자신의 모든 피부가 벗겨지고, 괴물같이 변한 20년 전의 교통사고, 누군가가 물었다고 한다. 20년 전의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나는 그 사고를 당한게 아니라, 만나지 않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과 가치를 몰랐을 것이다. 이분의 전체 인생이 노래이다.
정말 인생은 짧은데, 여러분의 인생이 노래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이 보이지 않는 알렢, 이 1의 세계를 하나님의 손으로, 쉬르의 요드로 나타내는 것, 100은 또 쿠프인데, 알렢, 쿠프, 이것이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이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저희 집에 아보카도를 먹고 씨를 두었는데, 하나가 그것을 자기 화분이 심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는데, 오랫만에 그것을 보니 이만큼 자라있는 것이다. 타락한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아보카도는 언제 먹을 수 있냐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 안에 들어있는 사랑과 가치, 이런 것보다, 어떡하면 그 열매를 먹을 수 있을까밖에 생각할 수 없다. 씨앗 속의 어떠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가장 가치있고, 그것을 소망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가서를 부를 수 있는 자는 그것을 소망하는 자이다.
נשׁיק 네쉬카 : 키스, 나에게 입맞춰주세요
이 여자는 첫 소절을 이렇게 시작한다.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을 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진짜이고 실제임을 믿습니다.
요새 정원이의 매력에 제가 취해있는데, 딜랴를 만나고, 우즈벡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고, 제가 쿠웨이트에 있을 때 정원이가 간증을 했는데, 그 큰 덩치가 뭔가를 보여주면서 우는 것이다. 카르칼팍 지방에 물이 없는데, 물이 솟았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다. 정원이라는 씨앗은 정말 볼품이 없었다. 지난 교회에 정원이만의 자리가 있었다. 오른쪽 기둥 뒤에, 자기는 안 보인다고 앉았는데, 그 큰 덩치가 너무 잘 보였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속은 있는대로 썩이고, 인간이 안됐다고 쿠웨이트에 가라고, 씨앗이 묻힐 수 있는 흙,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야반도주 직전까지 씨앗이 묻혔다가, 우즈벡에서 씨가 터지고, 아주 조그만 싹이 난다. 그 싹을 보고도 얼마나 쿠웨이트 식구들이 기뻐하고, 그 언약에 들어간 것, 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것에 대해서 금희환향을 해주더라. 그런데 지금 베이트 칼렙, 정원이 마치 그 소숫물이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아이들에게 생수를 공급하는 정원이의 삶이 노래가 되었다.
정원이가 찌그러져 있을 때 앞의 일들을 다 보여줬다고 생각해보자. 야반도주 직전에 우즈벡에 가서 반쪽을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퍼스트리움에 살게 될 것이다!? 한번도 그런 노래는 안 부른다. 하나님은 그냥 문, 달렛만 보여주신다.
저희가 이스라엘에서 철수해서 원래는 보스턴에서 사역을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게 하시려고 한국에 개척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때 저희들에게 말씀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렇게 되어서 목감으로 이사하고, 지원이, 성민이를 만나게 되고, SJ 아이들을 만나게 할 것이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냥 서초동 지하에서 교회를 개척하라고만 하셨다.
노래할 수 있는 자는 문을 발견하고 여는 자이다. 그 뒤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소망으로 그 문을 여는 자를 노래하는 자라고 한다. 이것을 바로 헤세드라고 한다.
영화 자매가 이번주에 헤세드를 풀어주면서, 제가 영화 설교를 듣고, 목감 저수지쪽으로 걸어가면서, 삶은 쏘드라고 묵상하면서 걷고 있는데, 삶의 쏘드, 비밀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삶은 비밀이구나라고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삶의 비밀을 알려고 걸으면서 묵상했는데, 삶 자체가 비밀이구나. 우리 인생 자체가 미스테리이고, 노래이구나.
인카운터가 많이 그리우실 것이다. 인카운터 마지막 시간에, 목사님 뒤로 엄청 줄을 선다. 뭔가라도 하나 듣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냥 노래해주신다. 지난주 2부 설교 때 김시형 집사님 간증에, 빛이 있으라고 기도해주셨다고 한다. 만약 목사님이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고 기도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냥 빛이 있으라, 미스테리한 노래를 불러주신다. 우리는 얕고 가벼운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 사랑이라는 미스테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미스테리를 아는 쉬르 하쉬림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 되기 원한다.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를 슐로모라고 한다.
שׁלמוֹ 슐로모
- 형상을 훈련하는 진리를 가진 자
- 완전한 자, 샤밭 샬롬 처럼, 이 시간이 완전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 Totality, 전체, 토라와 제자도가 하나되는 전체, 온전함이다.
- 조화, 아름다움
- 댓가지불
완전함의 시간으로 아무 조건없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 샬롬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은 빛을 켜는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를 보셨겠지만, 이 영화는 흑백 영화인데, 첫 장면이 샤밭 초에 불이 켜져있는데, 그 빨간 불, 컬러로 묘사한 한 장면이 그 불이 꺼지면서 영화가 전개되는데, 그러면서 흑백 영화가 된다. 그런데 마지막에 쉰들러가 자신의 공장에서 자신이 구한 사람들에게 너희 뭐하고 있어? 오늘 샤밭이라고 하면서, 그 초를 켤 때 이 흑백 영화가 컬러로 묘사된다. 유일하게 우리가 샬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우리에게 빛이신 그리스도의 불이 켜져야 한다.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럴 때 흑백영화같은 우리 인생이 컬러로 변한다
저는 내 삶에서 아버지를 잘라버리고, 제 삶은 흑백이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그냥 회색인 것이다. 제가 아버지를 만나고, Wonder라는 찬양을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Wilderness에서 Wonder로 바꾸셨다. 내 삶에서 빛이 터져나오고, 내 삶이 컬러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 제 악함이었다. 하나님 관점에서 제 삶은 한번도 흑백이었던적이 없다. 여러분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흑백인 적이 없었다. 여러분이 샤밭의 빛을 당긴다면, 그 빛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다시 타오른 빛을 부활이라고 하고, 생명이라고 한다.
이 단어에 조화라는 것이 있다. 베드로 목사님이 오랜만에 14개의 영, 인카운터 원고를 읽고 있었는데, 마지막 인카운터 때 베드로 목사님이 14개의 영을 했다. 거기에 봄에는 노랑색, 여름에는 초록색, 가을에는 보라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이 몇일인지도 모르는데, 몇일밤을 새서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고, 언제 먹었는지 모르는 사발면 그릇과 담배 꽁초가 쌓여있고, 삶에 조화가 없었던 그때를 묘사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이 삶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조화롭지 못한, 아름답지 못한, 질서없는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내가 최고인 그런 삶 밖에 살 수가 없다.
현천이를 비롯해서 저희가 반석이에게 너 드럼 소리가 많이 바뀌었냐고 한다. 반석이의 드럼치는 제스처가 바뀌었다. 옛날에는 정말 반석, 그냥 손만 움직였는데, 이제는 살도 많이 빠진데다가 현천이가 앉아있는 것이다. 반석이가 그렇게 바뀐 이유는 사랑을 했기 때문이고, 현천이의 사랑의 영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현천이는 정말 드럼을 사랑했던 아이이다. 전라도 광주에서 주먹을 휘날리던 현천이가 드럼으로 인생을 성공해보겠다고, 트렁크 하나 들고 서울에 와서, 밤새 토하면서 드럼을 연습을 했다. 사실 제가 고백하건데, 교회 개척하고 너무 힘든 나머지 뭐라도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서초동 악기 연습실 중에 드럼을 가르쳐주는 지하 연습실에 갔던적이 있다. 제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서 배웠다. 나는 드럼을 위해서 태어났구나 하면서 너무 재밌게 드럼을 치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는데, 2주도 안되었는데 손목이 나가는 것이다. 한두달 깁스를 하고 주님 앞에 회개했던 시간이 있었다
저에게는 드럼이 참 좋아보였던 것이다. 좋아보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아시는가? 현천이는 드럼을 사랑해서, 밤새 토하고 몇일을 연습해도, 그 댓가를 지불해도 괜찮았는데, 저는 그냥 드럼이 좋아보였던 것이다. 좋아보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내가 가치, 댓가를 드릴 수 있는가란 것이다. 샬렘의 뜻에 댓가, 가치 지불이라는 뜻이 있다.
댓가 지불의 박스가 여기에 통째로 오셨다. 장 집사님에게 가시면 정말 주님을 위해서, 내가 훈련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슐로모는 내 형상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다. 현천이가 멋있는 이유는 반석이를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혼자 드럼을 잘 칠 때보다, 전체를 지휘하는 모습이 훨씬 멋있다.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이 형상을 위해서 훈련받는 자를 슐로모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시간과 마음을 지불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지불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이런 것은 사실 없다. 사랑을 잘못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내가 널 어떻게 사랑했는데, 어떻게 키웠는데, 세상 말로 머리 검은 것은 거두는게 아니라고 하는데, 이런 말은 진짜 슐로모가 아닌 말이다. 진짜 사랑하는 자는, 내가 가치를 드린 것을 받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그 순간 영원을 얻고,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보상이 된다. 이것이 최극상으로 가면, 당신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셔서 너무 영광스럽습니다란 표현이 된다.
우리가 뭔가 보상을 바라고, 알아주기 바라고, 당신께 이 정도 사랑을 했으니, 제자, 너를 이 정도 사랑했으니, 너도 이 정도 해야되지 않겠니 하는 것을 다 불태우는 것이 아가서 불의 사랑이다. 금요일 이렇게 값치름을 하고 왔다. 목감으로 이사와서 외국인 형제들이 고충을 많이 표현한다. 차비도 많이 든다. 벤 같은 경우에는 택시를 타고 왔다갔다 한다. 값치름을 배울 수 있는 참 좋은 훈련의 시간이 온 것이다. 치른만큼 또 소중한 것이다
여자가 담배를 끊는게 쉬울까, 남자가 쉬울까? 어른이 되서 담배를 처음 맛본 사람이 쉬울까, 청소년 때 시작한 사람이 쉬울까? 남자가 여자보다, 어른이 청소년보다 담배 끊기가 더 쉽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자는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사회적 편견을 뚫고 담배를 얻었기 때문에, 그만큼 이것을 포기하기가 힘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제자를 위해서, 비전을 위해서 값을 치루셨는가? 이 비전이 여러분에게 그냥 좋아보이는 것인지, 정말 나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인지, 나는 정말 슐로모인지, 우리 돌아보기를 원한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값치름을 할 수 있는 자, 값치름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 조차, 주님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신것 하나만으로 너무 영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진짜 슐로모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아가서에서는 주님이 신부를 부르는 여러 호칭이 나온다. 라야티부터, 야파티, 나의 어여쁜 자이다. 하늘이의 이스라엘 친구 할머니 이름이 야파였다. 우리나라말로 김미녀, 김이쁜이 이런 것이다. 나의 어여쁜 자야. 아호티,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타마티, 요나티, 너의 눈이 비둘기같다는 표현도 있다.
아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이때가 요나이다. 요나는 재미있는 선지서이다. 요나는 아이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소개하는 선지서인데, 사실 요나는 다 아가서 이야기이다. 요나서는 참 독특한 선지서이다. 보통 선지서는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써 있는데, 이 선지서는 하나님이 요나라는 사람을 요나티, 슐로모로 만드시는가에 대한 요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욘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의 아빠가 나온다.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하면, 에메트의 아들이다.
אמתי 아미티 : 나의 진리
나의 의로움, 내가 진리라고 하는, 자기 의로 가득찬 그런 사람의 아들 요나였다. 이 요나가 여기에만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보암의 악한 왕에 대해서 요나가 예언하자 회개하는데, 이 왕이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드라쉬에서는 진리의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을 통하여 악한 왕이 돌이키고 땅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예언을 적중한 요나, 이스라엘 영토의 좋은 소식에 참여한 요나, 여기까진 좋았는데, 요나서에 넘어오면 하나님이 앗수르,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값치르는 것도 보상을 요구하는데, 앗수르는 원수인 것이다
앗수르는 어마하게 크고 강성한 나라였다. 엄청나게 강성한 나라,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넘어서, 시리아와 이스라엘까지 정복하려고 했던 나라이다. 얼마나 잔인한 나라였는데, 여러 문헌에서 앗수르의 만행에 대해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 이야기하는 것이, 요나가 니느웨게 회개하라는 말씀을 그토록 싫어했다고 한다. 만약 그 원수가 진짜 회개해서, 잘된다면? 하나님의 그 무조건적인 헤세드가 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몸서리칠만큼 싫을 때가 있다. 제가 요나서를 준비하는데, 제게 요나의 심정이 오는 것이다. 어떤 어려운 사람이 왔는데, 하나님이 저 사람도 사랑하시나? 생각이 들면서, 제가 화가 나고 어려운데, 제가 딱 요나인 것이다
우리는 값치르는 것을 너무 억울해한다. 요나가 여기에서 걸어서, 앗수르까지, 광야를 걸어가면서 얼마나 씩씩대면서 갔겠는가? 많은 학자들은 요나의 가족 중에 앗수르 때문에 망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치 홀로코스트 같은 것이다. 우리 가문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가서, 너 잘되라고 선포하라는 하신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여기에 요나는 반항을 한다. 완전히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나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하나님에게 대드는 모습을 보자
요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가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이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면서 회개를 하자, 요나가 매우 싫어하며 성을 낸다. 히브리어로 이것을 한번 보자.
יונה רעה גדולה 요나 라아 그돌라 : 요나가 큰 악이다
분명히 악은 앗수르인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큰 악이라고 하신다
많은 제자들이 부부싸움한 이야기를 하는데, 한쪽 말만 들으면, 반대쪽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악이다,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자에게 오신다. 하나님은 지금 니느웨에 가 계신다. 그들을 용서하신다.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 악이다. 저 남편이 악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 남편에게 가신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제자가, 내가 선이고, 저 사람이 악이라고 하면, 저 사람에게 간다니? 너무 충격적인 것 아닌가?
아가서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부르시는 이름이 라아, 라야티이다. 아가서에서만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이 연인, 여러분을 부르실 떄, 나의 '악'이라고 부르신다.
아1: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라야티야, 내 사랑아. 바로가 탄 전차를 끄는 말이라는 것이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는가? 주인공의 원수가 탄 전차를 끄는 말을 기억해보자.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바로를 움직이는 힘과 에너지를 가진 말, 여기에 내 사랑아, 여러분을 비유하고 있다. 정말 힘이 쎄고, 바로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에너지를 내가 가지고 있다. 라아 그돌라로 가지고 있다
제가 굉장히 착했다. 이렇게 쎄지 않았다. 그때에도 아무리 순해보이고, 착해보여도, 여기 조윤희 집사님이 순해보이지만, 바로의 암말과도 같은 에너지를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다. 나한테 싫어하는 일 시키고, 뭐라고 하고, 내 원수에게 가서 좋은 소식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우리는 성내고 분노하는 에너지가, 바로의 전차를 끄는 암말과도 같다. 이렇게 하나님에게도 대들고, 얼마나 대드는지 한번 보자.
욘4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차라리 나를 죽이라는 것이다. 내가 성내거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 성질이 거의 지원이 수준이다. 이런 요나를, 이 라아 그돌라를 하나님은 그 헤세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에게까지 비를 내리신다. 나중에 이스라엘을 다 쳐서 잡아가는 앗수르가 되는데, 지금 요나를 보내지만 않아도 그렇지 않을텐데, 그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다 아는 요나에게 이것을 시키시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시키시는 것이다
עמר 오메르 : 머리와 함께하다.
곡식 한 단을 묶는데, 머리에 묶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가진 하나님의 머리에,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서 내 사고를 그냥 묶어버리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요나를 요나티가 되게 한다. 아무리 다시스로 도망가도, 아무리 배에 숨어있고, 풍랑이 쳐도 자고 있어도, 풍랑에 던져져도, 그 물고기의 깊은 뱃속으로 들어가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더러운 성질의 요나를 요나티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함께가자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여기에 쓰고 있다
이 힘은 거부할 수 없다. 마치 엄마 자궁 안에 있는 배아에 심장이 생기고, 여러분이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 심장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팔을 잡아 당긴다고 자라게 할 수 있겠는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리가 그 생명을 생명되게 한다. 여러분의 삶에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그것에 우리의 머리를 고정하는 오메르 카운트를 하기 원한다
욘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의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셨다. 광야가 너무 뜨거우니까, 박넝쿨로 해를 가리우셨다는게 아니다. 그를 구원하시는데, 라아에서 구원하셨다고 되어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라아 그돌라를 하나님이 여기에서 우리를 꺼내신다. 그러기 위해 박넝쿨을 주신다.
קיקיון 키카욘 : 박넝쿨, 아주 작은 소망
우리가 아무리 악해도, 요나같이 배째라고 해도, 하나님은 아주 작은 소망을 걸고 놓지 않으신다
이 요나가 얼마나 다혈질인지, 심카 그돌라, 아주 기뻐한다. 이게 우리 모습 아닌가? 꼭 혜성이 같다. 저도 그렇다. 오늘 아침에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같이 청국장을 먹으면서 늘어놨다.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야기하는 중에 막 풀어지고, 하나님의 섭리, 말씀, 이것이 들어오니까 또 너무 기쁜 것이다. 심카 그돌라가 되어서, 청국장과 단팥빵을 먹으면서 기쁘다고 하더니, 남편이 저 여자가 미쳤냐고 하는 것이다. 요나와 같은 것이다. 심히 분노하다가, 심카 그돌라, 그 소망의 메세지에 또 기뻐한다.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하나님이 벌레를 또한 보내신다. 오늘 정말 중요한 단어이다.
תלע 톨라 : 벌레
톨라아트 쉐니, 성막을 구성하는 중요한 것이다. 시22편은 메시아를 묘사한 장이다
시2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내가 톨라라고 이야기하신다. 톨라는 주황색, 핏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나가 요나티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힘 바 되어야 한다. 잠언에 보면 우리 집의 모든 사람이 주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걱정이 없다고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은 왔다갔다하는 다혈질인 우리에게 톨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
톨 = 올 : 올라가서 완성에까지 이른 자, 우리는 완성까지 올라간다.
요나서는 요나의 노래로 되어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한다. 이 전체가 노래인데, 이 전체 책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하나는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돌아섰을 때, 정말 억울하다고, 나는 그것을 위해서 값을 치룰 수 없다고, 돌아설 때 내려가다라는 표현을 쓴다. 물고기 뱃속으로 내려갈 때도 내려가다, 배 밑으로 내려가서 잘 때도 야라드, 내려가다는 단어를 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해 들어갈 때, 선장이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질 그때, 올라가다라는 단어를 쓰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니라는 것도 올라를 쓰고, 내려가던 그를 여호와께서 부르실 때도 올라를 쓰고 있다. 마치 요나티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라고 요나를 그렇게 부르시는 하나님, 신랑의 목소리인 것이다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피존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병균을 옮기는 것 같은 비둘기 말고, 성령이 임하시는 도브이다. 이 비둘기의 특징이 있다. 비둘기는 한 존재만을 바라본다. 내 사랑아, 이 어여쁜 사랑아, 너의 눈이 비둘기 같구나, 너가 그냥 한 아버지, 한 비전, 한 그리스도의 몸, 그 한 사람에 꽂혀있구나, 이 눈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너의 눈의 눈짓 하나로 내 마음이 동하였다고, 하나님이 어찌할 줄 모르게 사랑하신다. 요나의 마음이 이렇게 회복되기까지, 앗수르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요나서는 하나님의 요나를 향한 사랑이 가득 차 있다.
욘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요나가 뚝 끊긴다. 그 뒤에 뭔가가 더 나와야 할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요나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어떻게 되었는지가 없다. 저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반응을 기다리시는, 여러분이 요나의 뒤를 써야하는 요나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내가 아닌 전체를 위해서, 이 아름다움을 위해서, 내가 죽으라고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드럼을 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전체, 샬롬을 위해서 값을 치루고, 값에 대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내 사랑을 받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진정한 슐로모들이, 하나님은 이 유월절에 그 슐로모를 찾고 계시고, 요나서를 완성할 요나티들을 찾고 계신다
이 요나의 성질이 어떻게 바뀌는가? 어떻게 요나가 요나티가 되냐면, 뜨거운 사랑만이 바꿀 수 있다. 목사님을 사랑하신다면, 목사님께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저 지체가 싫어도, 목사님을 사랑한다면, 그 지체를 사랑할 수 있다. 저 앗수르가 나에게는 원수지만, 하나님께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12만명이나, 어찌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사랑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받게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한다. 이제 정말 비지니스 하지 말고,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줘야한다고 하지 말고, 불타오르는 그 사랑으로, 나의 원수가 돌아올 그때까지, 원수라는 부정적인 형태로 내 인생에 주님이 하나였던 자를 보내셨음을 믿고,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기 바란다
우리 교회 영성을 뜨겁게 서로를 사랑함에 있다. 토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오시기 바란다. 그러면 사랑 가운데 내가 임하였다고 한다
아1: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라야티, 요나티를 야파라고 한다. 요나가 욥바로 내려간다. 이 יפה 야파는 아름답다는 뜻이 있다. 아름다운 항구이다. 요나는 자기가 제일 아름다웠다. 자기 생각이 맞았고, 내가 의롭고, 내 말대로 다 되었다. 그런데 이 야파는 페이다. 유월절은 페싹이다. 이 페는 입구, 통로, 채널이란 뜻이 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누군가의 영혼의 하나님의 채널이 되는 그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다. 요나가 며칠을 걸려 뜨거운 광야를 통과하여 앗수르까지 가서 했던 말은 딱 다섯 마디였다. 너희들이 회개하라. 히브리어로 다섯 마디였다고 한다. 멀리, 그 값을 치루고 가서 한 다섯 마디에, 온 성읍이 회개하며 나온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는 것 같은가? 그저 채널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여러분이 그저 입술을 열고, 입구가 되고, 통로가 되어준다면, 하나님이 영혼 구원의 역사를 친히 하신다.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타마티, 요나티, 나의 비둘기야, 야파티, 나의 어여쁜 자야, 나와 함께 가자.
* 기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가자. 이 샤밭에, 이 유월절 샤밭에 우리가 이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고, 그렇게 우리의 외로움의 슬픔이 배 밑으로, 낙심과 절망의 배 밑으로, 억울함의 배 밑으로, 불평과 불만의 배 밑으로 그렇게 숨어 내려갔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이런 요나같은, 이렇게 악하고, 성내며, 분개하는 우리를 요나티로 만드시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루신, 우리를 위하여 벌레가 되신 주님, 이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가 이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주님 우리가 일어나겠습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손, 이 섭리에, 우리의 낙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일어나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 바다 목사님
이번주 주일 예배는 10시반에 비대면으로 진행된다. 요나라는 이름은 가장 예언적이고, 놀라운 이름이다. 왜냐하면 요드와 바브, 요드 헤이 바브 헤이에서, 요드 헤이는 야훼 하나님, 바브 헤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데, 요드와 바브가 합쳐진 이름이 요나이다. 하나님이 바브의 모습으로 오신 놀라운 스토리가 요나이다.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것이 놀라운 소리인데, 이것이 유월절의 기적이다. 요드가 바브로 나타난 유월절의, 무교절의 주님의 빛이 여러분들을 더 강력하게 비추게되길 소망한다. 사랑밖에는 없다. 이 우주에는 많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사랑만 존재한다. 내게 많은 것이 있어야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만 있으면 산다.
유니스 목사
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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