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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내장사
내장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백제 제30대 무왕(600-640)37년인 서기 636년(백제멸망 660년24년 전)에 당시 도승이신 영은조사께서 지금의 절 입구 부도전 일대로 추정되는 자리에 대웅전등 50여동에 이르는 대가람으로 백제인의 신앙적 원찰로서 영은사 란 이름으로 창건되었고 1098(고려조 숙종3년) 행안선사께서 전각당우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57년(조선조제13대 명종12년) 희묵대사가 법당과 요사를,1639년(인조17년) 부용대사가 사우를 중창하고 불상을 개금했으며,1779년(정조3년) 영운대사가 대웅전과 시왕전을 중수하고 요사를 개축하였다. 1923년 백학명 선사가 사세를 중흥시킨 뒤 1938년 매곡선사가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등을 신.개축하여 현 위치에 내장사의 면모를 일신시켰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1951년1월12일 소실된 것을 마지막으로 창건이래 5화 7건으로 역사가 있다. 1957년 주지 야은스님께서 요사,1958년에 현 대웅전을 중건하였다.1964년 무량수전을 세우고 1965년 대웅전 불상과 탱화를 조성 봉안 하였다.
그 후 1974년 국립공원 내장사 복원계획에 따라 일주문, 명부전, 정혜루를 복원하고 사천왕문이 신축되었다.조선조 성종때 석학 성임(1421-1484)은 정혜루기에서 영은사는 고려말엽 지엄선사의 개산에서 비롯된다고 기록한 뒤, 정혜루는 당시 영은사의 문루로 1467년(세조12년)에 시작하여 다음해 준공된 3간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장엄무비하다고 전하고 있다.
최근 내장사는 향적원과 정혜원, 요사등을 신축하고 1994년 10월에는 사리탑을 건립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원래 내장산에는 명찰 영은사가 있었으니 영은사는 지금의 부도전 위치에 있었다.
주지스님 인사말
천년고찰 내장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인 서기636년 백제시대의 고승 영은조사께서 창건하신 호남 명찰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부침(浮沈)을 계속했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사격을 갖춘 지는 60년대 초반 무렵입니다.저희 내장사는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습니다. 봄에는 연초록 나뭇잎이 여름엔 신선·원적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숲 그늘이 여려분을 맞이합니다. 가을엔 오색단풍이 겨울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설경이 있습니다. 실로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사이버공간은 지구촌 곳곳을 실시간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과 일치하는 세계입니다. 마치 서로가 얽히고설킨 그물코처럼 모든 사물이 하나로 이어져 어느 것 하나가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보화 사회는 유형이던 무형이던 간에 점점 하나로 이어진 세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네 인생은 어두운 무명의 칼날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혼란은 국민들에게 경제적 상실감과 정신적 고통을 함께 겪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개인주의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확대되며 웰빙 신드롬과 함께 새로운 사회, 문화적 흐름으로 정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반목, 불안과 절망이 우리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지만 현실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믿음과 수행만이 불안과 혼돈 속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밝은 눈으로 오늘을 직시해야 합니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1700여 년 동안 겨레의 얼과 문화에 크게 이바지 하여 왔고 민족종교로써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해 왔습니다. 내장사는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지입니다. 꺼져가는 조계종의 종풍을 진작시킨 조계종 초대 종정 박한영 스님과 근대 최고의 선지식인 백학명 스님이 주석하셨고, 열반하신 곳입니다. 이러한 불가의 가풍을 계승하기 위하여 저희 내장사 사부대중은 불철주야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내장사의 법향기는 내장사와 인연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깨워 주인공의 삶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길을 열 것 입니다.
내장사의 홈페이지는 사부대중 모두와 정보를 향유하기 위한 자유공간입니다.내장사의 역사와 현재, 사찰의 구조와 운영, 부처님의 가르침, 스님들의 수행이야기 등을 사부대중과 함께 나누는 공간입니다. 내장사의 홈페이지가 활발자재(活潑自在)한 공간으로 이용되는 몫은 사부대중과 네티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장사 홈페이지가 항상 새롭고 풍부해질 수 있도록 관심과 참여를 기원합니다.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사부대중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두루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내장사의 전각들
대웅전 (大雄殿)
극 락 전 (極樂殿)
삼성각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과 탱화를 모신다. 삼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인다.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을 짓고 따로 모실 때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그림은 천태산과 소나무·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이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명부전
천왕문
사대천왕(四大天王)·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한다.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毘沙門天王)을 말한다.
그 부하로는 견수(堅手)· 있는데, 이들은 수미산의 아래쪽에 있다. 또한 사천왕은 이들 외에도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쌍산(持雙山) 등 일곱 겹의 산맥과 태양·달 등도 지배하고 있다.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일주문(一柱門)과 본당 사이에 천왕문을 세워, 그림으로 또는 나무로 깎아 만든 사천왕의 조상(彫像)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3층석탑 (眞身舍利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3층 석탑이다. 1997년 범여스님이 조성한 탑으로 1932년 영국의 고고학 발굴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인도의 고승 지나라타나 스님의 주선으로 내장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부도전
암자
벽련암
원적암
포교당
도덕암
성보 문화재
조선동종
영은사지
용굴암지
금선계곡내 기름바위 못미쳐 신선봉으로 오르는 오른쪽 절벽위에 암굴이 있으니 바로 용굴이요, 이곳에 암 자가 있었으니 용굴암이며 건물은 없었다.
불출암지
불출봉 정상의 암벽에 형성된 반호반굴형의 공간으로서 내부에 암자가 있었다. 고려 광종26년(975년) 하원선 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근래 한국동란에 소실되었다. 암굴의 동 벽 약2M 높이에 10개의 자그마한 홍역형의 구멍이 파여있다. 불 출암은 완전히 동굴이 아니라 말하자면 암벽 밑에 반로반굴형의 공간이다.
역대 큰스님
백학명선사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고 총명한 기운이 뛰어나 장래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 주위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이도 집안이 가난했다. 너무 빈한하여 학업을 지속할 형편이 못되었다. 마침내 자신이 필상을 하여 부모님과 두 동생의 생계를 꾸려가는 어려움속에 살아갔다.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선사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공부만은 전력을 다했다. 대성(大成)의 길은 학문이 앞서는 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20세의 소년이 되었을 때는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부모를 잃은 선사의 가슴엔 항상 공허했고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순창 구암사와 인연을 맺게된다. 그때 구암사에는 유명한 고승 설두(雪竇)화상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설두화상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후 스님이 될 것을 결심하고 출가하고 말았다. 그후 학명선사는 고향에 돌아와 잠시 머물면서 높은 뜻을 더욱 공고히 굳힌 후 불갑사에 들어갔다. 불갑사에 들어온 그는 즉시 금화화상의 상좌가 되었다. 그의 험준한 고행의 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상좌로서 해야할 많은 일들을 조금도 흩어짐없이 해나가면서도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굳건한 정신으로 불도 정진에 몸을 바치고 있었다.
이어서 벽송사, 선암사, 송광사 등에서 끊임없이 수도에 전념하였다. 나이 34세 되던 해에 구암사 금화화상의 뒤를 이어 불교강사직을 맡아 보기도 했다. 이러한 수행의 고행 과정에서 곧 참선의 깊은 경지에 들어 큰 도를 깨닫게 된다.
1914년 봄에는 홀연히 중국과 일본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보며 그곳의 고승들과 만나 불서를 놓고 고답적인 고담을 펴기도 했다. 그후 귀국하여 부안 변산에 있는 내소사와 월명암의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의 깊이를 다져 선풍을 일으키고 강론을 계속했다.
1923년의 이었다. 백양사에 머물던 송만암선사 한테서 연락이 왔다. 내장사의 주지가 되어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다. 당시 내장사(現 碧蓮庵)는 절의 운영부실로 인하여 퇴폐의 위험을 안고 있을 때었다. 그는 송만암선사의 간곡한 권고를 물리치지 못하고 내장사의 주지가 되었다. 내장사의 중책을 맡은 그는 즉각 극락보전을 중건하고 선원을 새로 지었으며 사찰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부도를 지금의 부도전으로 옮기고 각종 수목을 심고 정비하는 등 불사에 크게 힘썼으니 내장사 일대 중흥에 박차를 가함은 물론, 드문 공적을 쌓았다. 그후에도 불사와 수도를 병행하면서 수도하는 가운데 불자들을 교화하였다.
내장사에 있는 동안 젊은 신도들을 모아 불도 수련과 교리의 전도에 전력했다. 그때 백학명선사는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사상을 가르쳤다. 스님된 사람이 놀고만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손수 농사를 지어 보아 그 고통까지도 체험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장사 주변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어 농작물을 제자들과 직접 심고 가꾸었으니 자호(自號)를 백농(白農)이라 했다.
백학명 선사의 용모는 꼭 달마상을 닮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달마상 그리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덕이 놓고 선의 깊은 도를 깨친 살아있는 부처라 하여 생불이라 불리기도 했다.
선사가 돌아가기 몇달 전부터 내장사에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짐승들까지도 선사의 열반을 예감하고 그 징조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내장사 뒤쪽에 자리잡은 석란정에서 밤이면 호랑이가 울었다. 깊은 밤만 되면 이곳에 내려와 슬피 울고 가는데 이런 일이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동안 며칠간은 갑자기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내장사의 상공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큰 징조인데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걱정을 했다. 다 부처님의 영험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사는 자기가 죽는 날을 알고 있었다 한다. 오후에 돌아갔는데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선사는 제자인 고벽(古碧)을 시켜 {오늘이 마침 정읍 장날이군. 얼른 정읍시장에 나가 무명베 4필, 짚신10켤래, 그외 상례(喪禮)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오도록 하게. 지금 당장 떠나게.}하는 것이었다.
고벽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스승의 부탁이므로 시행은 해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사건을 예견한 모양인데 알 길이 없었다. 그리 급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고벽은 마침 비가 죽죽 내리고 있어 다음 장날이나 가려고 하고 있는데 선사의 독촉이 또 있었다. {아니, 얼른 떠나질 않고 무얼하고 있나. 지체 말고 시장을 다녀오게}하는 것이었다. 고벽이 장을 보러 떠난 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선사는 손상좌인 다천(茶泉)을 불러 먹을 갈게하며 달마상을 그렸다. 그때 6장의 달마상을 그렸는데 평소에는 갈대타고 강을 건너는 절로도강(切路渡江)의 입상을 많이 그렸으나 그날은 좌상만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다그린 백학명선사는 자리에 몸을 눕히고 제자인 운곡(雲谷)과 그외 불자들에게 원각경을 외우도록 하여 독경속에 미소를 지으면서 고요히 멸도(滅度)했다. 그때가 1929년 3월 27일 오후 2시였으니 수많은 불자들의 슬픔은 너무도 큰 것이었다. 고벽스님은 정읍장에서 사온 상례물품을 그대로 쓸 수 있었으니 백학명선사의 영감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사가 열반한 이후에 또 이적이 일어났다. 화장한 그의 몸속에서 70개의 백색 문양사리가 나왔으며 큰 고승에서만 볼 수 있는 영골까지 나왔으니 현세에 드문 불도정진의 결정체였다.
박한영스님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은 전라북도 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성장하였다.
17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에서 금산(錦山) 스님의 삶과 죽음에 관한 법문을 듣고와서 이를 전해주자 크게 감동하였다.
이 인연을 계기로 1888년 금산 스님의 법제자가 되어 법호를 정호(鼎鎬)라 하였고, 1890년 21세에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 대사에게서 사교(四敎)를 배웠다.
1892년에는 순천 선암사의 경운(擎雲)에게서 대교(大敎, 《화엄경》·《염송》·《전등록》)를 익혔다.
1894년에는 안변 석왕사를 비롯하여 신계사와 건봉사에서 안거하였고, 1895년에는 순창군 구암사의 설유 처명(雪乳處明)에게서 법을 이어 당호를 영호(暎湖)라고 하였다.
석전이라는 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에게 ‘석전, 만암(曼庵), 구연(龜淵)’이라는 글씨를 지어주면서, “훗날 법호 가운데 도리를 깨친 자가 있으면 이로써 호를 삼게 하라.” 고 부탁하였는데 이것이 설유에게 전해져 마침내 박한영 스님의 시호가 되었다.
스님은 이후 여러 곳에서 강론을 펼쳤다. 30세 되던 해부터 고창의 선운사, 산청의 대원사, 장성의 백양사, 해남의 대둔사, 합천의 해인사, 보은의 법주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많은 대중이 운집하였다.
1908년 스님은 서울에 올라와 불교개혁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이회광(李晦光)이 친일의 입장에서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조동종(曹洞宗)과 합종하려하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한국의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밝히고 일제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1912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고, 이듬해에는 《해동불교》를 창간하여 불교의 자각과 개혁운동을 선도하였다. 1916년에는 중앙불교학림에서 강의를 맡아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1926년에는 개운사 대원암에 불교강원을 설립하여 이후 20여 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주요 졸업생으로는 청담 순호·운허 용하 스님을 비롯하여 신석정(辛夕汀)·조지훈(趙芝薰)·김달진(金達鎭) 등을 손꼽을 수 있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최고 지도자로서 폭넓은 도량으로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1년에는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어 고등교육 일선에서 불교를 전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여 불교중흥과 조국광복의 인재양성에 몸바쳤다.
그 뒤 광복을 맞이하여 새롭게 조직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의 초대 교정에 취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읍 내장사를 찾아간 스님은 주지에게 “나 여기서 죽으려고 왔다.”라는 천진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 때가 1948년으로 나이 79세, 법랍 61년이었다.
스님은 학문에 있어서 교와 선에 정통하여 당대의 화엄종주(華嚴宗主)라 일컬어졌고, 출가자의 신분이면서도 유교 경전에 두루 통달하였다.
더욱이 스님은 사회와 대중을 염두에 두고 불교를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애썼다. 문하에는 청담 순호(靑潭淳浩)와 운허 용하(耘虛龍夏)가 대표적이다.
저서로는 《석림수필(石林隨筆)》·《정선치문집화(精選緇門集話)》·《정선염송설화》·《계학약전(戒學約詮)》·《염송신편》 그리고 400여 수의 시를 수록한 《석전시초(石顚詩抄)》 등을 남겼다.
매곡선사 (1092년-1955년)
梅谷禪師는 대한광무 2년 (1902년)3월 10일에 출생하였다 . 임술년 (1922년)고향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에 당도하여 보련장로에게 출가 득도하였다. 법명은 혜순(慧淳) 그 다음해 삼월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율사에게 구족계를 품수하고 유점사 강원에서 6년동안 내전을 연수하였다. 선사는 27세 봄에 사교행선의 뜻을 품고 불조 혜광을 찾아 점차 남하아며 유명한곳을 찾아 수행하시었다. 결국에는 호남의 명승지인 내장사에서 당대 선직식인 학명 선백을 찾아 문하에 들어와서 법호를 매곡(梅谷)이라 하고 십수년간 학명선사의 사아을 펼쳐 사리를 쌍수하니 인욕과 선정의 행리로는 법계대종사의 지위에 승진학 사업으로는 당사의 퇴락한 법전과 협소한 요사를 중건창하니 실로 본사의 제 7 중창주 이였다. 선사는 선농 병행하여 동외 쌍암리에 농원을 설치하고 대중스님들이 자력 근로하여 식량을 공수하는 모범을 보였다. 1945년 조국광복을 맞이하여 승단의 조직이 개편됨에 따라 45세때 불교중앙총무원 교무부장에 취임하였다가 전북 불교교무원장에 추대되어 도내 사원을 통일함과 동시에 재단 전북교원을 조직하고 금산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전력하였으며 1954년 3월에는 다시 총무원 총무부장과 동국대학교 재단이사를 겸임하여 재단의 완성과 일제 강압시대시 재정된 사찰령을 타파 하는 등 고세개발의 임무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활약을 시도 하였으나 불행의 승단의 내분이 야기되매 의연히 개탄하고 전주 정혜사에서 수행 정진하시었다. 1955년 7월3일에 목욕제계 하시고 금파스님을 불러 임종계를 설하시니 ‘원래 부지처 원래 부지래 부지거 필경여하’ 라 하시고 임종하시었다. 선사는 향년 54세 법랍 34이셨다.
단풍이 드는 이유
식물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
어린 잎이나 줄기가 새롭게 발생하면서 일시적으로 붉은색을 보이다 잎이나 줄기가 성장하면서 붉은색이 없어지는 경우는 어린 잎이나 줄기의 엽록소를 만드는 세포내의 구조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기로부터 당이 계속 보내져 오면서 안토시안을 형성하게 된다. 안토시안은 자외선을 잘 흡수하는 성질을 갖고 있고, 또한 안토시안을 많이 가진 조직은 표피뿐이다. 때문에 연약한 어린 잎이나 줄기가 빨갛게 됨으로서 자외선의 해를 피하는 것이다. 잎이 성숙함에 따라 안토시안은 분해되어 소실되며 엽록소에 의해 녹색으로 변하게 된다.
유전적 변종
가을철 단풍(겨울준비를 위한 작용)
다채로운 색의 표현
수종별로 각각의 색소 함유량과 엽록소가 소멸되는 양과 비율의 차이로 인해 가을 단풍색의 차이가 나타난다. 색소에 따라 카로틴은 밝은 오렌지색, 크산토필은 노란색에서 오렌지색 계열, 안토시아닌은 핑크, 빨강, 자줏빛 등의 붉은색 계통으로 표현된다.
단풍나무, 신나무, 옻나무, 붉나무, 화살나무, 복자기, 담쟁이덩굴 등
: 은행나무, 아까시나무, 피나무, 호두나무, 목백합, 생강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등
: 단풍나무科의 고로쇠와 우산고로쇠
또한 감나무의 붉고 노란색이 섞여 있는 단풍은 한 단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다. 노란색, 붉은색의 아름다움 못지 않게 늦가을에 절정을 보이는 참나무류나 너도밤나무, 느티나무의 노란갈색(Tannin 성분)은 가을다움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단풍이 아름다우려면..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환경적인 인자는 온도, 햇빛, 그리고 수분의 공급이다. 우선 낮과 밤의 온도차가 커야하나 영하로 내려가면 안되며 하늘은 청명하고 일사량이 커야한다. 특히 붉은색의 안토시아닌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범위에서 온도가 내려가면서 햇빛이 좋을 때 가장 색채가 좋다.
나무 안쪽의 잎색이 선명한 색을 띠지 못하는 이유는 햇빛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지도 않은 알맞은 습도를 유지해야지만 아름다운 가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추우면서 비가오는 날씨에는 잎이 충분히 단풍들기 전에 떨어지고 너무 건조할 경우 단풍을 보기전에 잎이 타는 현상이 나타난다.
단풍이 드는 시기
우리 나라 단풍은 설악산과 오대산 정상에서 시작되며, 단풍은 산아래 쪽으로 하루 약 40km씩, 남쪽으로 하루 약 25km씩 남하하는 현상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9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단풍은 11월 상순이 되면 남해안 지방의 두륜산과 국토의 최남단 제주도 한라산까지 물들게 되며 대체로 내륙지방이 해안지방보다 10일정도 빨리 단풍이 시작된다.
첫 단풍이 들었다고 할 때의 단풍은 산의 20%~30% 가량에 단풍이 드는 것을 말하며, 산의 80% 이상 단풍이 물들었을 때를 '단풍절정기'라 한다.
*아래쪽 그림은 최근 5년간의 발표된 자료를 평균한 것임.
단풍나무의 종류
내장산의 동물
서래봉과 불출봉을 비롯한 아홉개의 봉우리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과 깨끗한 환경은 여러 동물들에게 풍부한 먹이를 제공하여 내장산에는 수많은 자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내장산 국립공원에서 서식하고있는 자생동물은 858종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종은 포유류에서는 사향노루와 하늘다람쥐가 있고 조류로는 검독수리, 붉은배새매, 소쩍새, 까막딱다구리, 팔색조, 황조롱이와 새매가있다.
곤충류중 특산종인 이십팔점콩알무당벌레는 내장산 전남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내장산의 깊은 계곡에는 도롱뇽, 산개구리, 도마뱀등 양서류와 파충류가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내장산의 식물
내장산 국립공원은 식물구계지리학상 한반도 남부아구에 속하고 수평적 삼림대로는 온대중부림에 해당된다. 내장산은 지리학적으로 남방계 식물분자의 북한계(가지고비고사리, 쇠고비, 콩짜개덩굴, 굴거리, 백운란 등)와 북방계 식물분자의 남한계가 되는 지역이다.
주요 식물상은 목본식물로 굴거리, 고로쇠나무, 왕고로쇠, 단풍나무, 내장단풍, 당단풍, 복자기, 신나무, 꼬리말발도리, 산앵도나무, 복분자딸기, 자귀나무, 비목나무, 층층나무, 비자나무, 철쭉꽃, 초본식물로 뻐꾹나리, 백양꽃, 천마, 금마타리, 터리풀 등 756종류가 분포 한다.
굴거리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91호)
내장산국립공원의 천연기념물로는 굴거리나무(제91호)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비자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53호)
비자나무는 난대성이고 주목과에 속하는 나무인데, 이 곳 내장산국립공원의 비자나무들은 높이 25m, 지름 2m의 큰 나무들로 열매는 구충제와 식용유로, 목재는 고급 가구제로 쓰인다. 내장산국립공원내 백양사 일대와 원적암 부근에 자생하고 있는 이 비자림은 약 6천그루에 이르고 보통 나무와 달리 4월에 암 수의 다른 꽃이 피고, 열매는 다음에 가을에 가서야 익는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비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식생 분포상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