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어느 멋진 날 (隨筆)
影園 / 김인희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유물해설 자원봉사를 다시 시작했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 느슨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괴로워했다. 그때 박물관 자원봉사 담당 학예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큰 산을 등반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건만 기세등등하게 수락했다.
전에 공부방 교사를 할 때 오전 시간 여백이 있어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었다. 방과 후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학습지도를 하면서 고학년 사회과목에 역사에 대한 단원을 지도할 때 생생하게 지도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해설을 신청하는 학생 자녀를 동반한 가족을 만났을 때 학교 교과서와 연계하여 해설하겠다고 귀띔하면 학부모가 무척 기뻐했었다.
공부방 문을 닫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박물관자원봉사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박물관이 개방하지 않았을 때 텅 빈 넓은 주차장을 보고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봄과 가을에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던 그때, 전대미문의 코로나를 원망했다.
시월의 가을 아침 박물관에 가는 발걸음은 고치 안에 갇혀있다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기분이었다. 컴퓨터 앞에 산적한 자료들을 외면하고 거울 앞에 앉아 화장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현관을 나선다. 박물관에 들어서서 걸어갈 때 또각또각 구두 발걸음 소리가 경쾌하였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단을 오르고 전시실 로비에 들어서면 두근두근 신선한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자원봉사 명찰을 달고 심호흡한 후 관람객을 기다렸다. 오전 10시에 경기도 용인 대한노인회 단체 40명을 안내하면서 부여의 선사시대 역사와 유물에 대해 해설했다. 사비 백제시대 전시실로 이동하여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할 때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피난하여 정한 도읍이었다는 것,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할 때는 도성을 기획하고 축조한 후 천도를 선포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역설했다.
위덕왕이 관산성에서 전투 중 성왕께서 사기를 높이기 위해 행차하다 신라군에게 무참히 죽임당했다. 위덕왕은 전쟁에서 참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고 아버지 성왕의 비명횡사에 괴로워하면서 출가를 선언했다. 대신들이 만류하면서 왕을 대신하여 100명을 출가하게 했다. ‘창왕명석조사리감’에 새겨진 글씨를 통하여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께 못다 한 효심으로 능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체 어르신들을 안내하면서 구구절절 해설을 멈추지 않았다.
관람을 마치고 밖에서 단체사진을 찍을 때 합류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하나 둘 셋 찰칵, 다시 한번 찰칵, 손가락 하트하고 찰칵, 파이팅 하면서 찰칵.” 계단을 내려갈 때 조심하라고 하고 부여 여행이 좋은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며 작별했다. 어르신들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감칠맛 나게 설명해 주어서 이해가 잘 되었다면서 물개박수를 보내주셨다.
오후 박물관자원봉사를 마치고 궁남지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행사장에 도착하여 음향팀에 시낭송 배경음악을 전달하고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었다. 트럭 뒤에 숨어서 낭송할 시를 차곡차곡 되뇌면서 점검했다. 무대에 올라 여유를 가지고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의 선율에 목소리를 실었다. 트롯의 달콤함에 젖어있는 관중들에게 실낱같은 감동을 주고 싶었던 절규! 詩가 윤간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시낭송을 마쳤다. 무대를 내려올 때 들리는 함성,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는 의상을 갈아입고 잠시 망설였다. 집에 가서 컴퓨터 앞에 쌓여있는 일을 해야 하나. 썰렁한 객석에 앉아서 응원할까. 객석에 앉아 응원하는 편이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대에 올라 공연하는 가수를 위해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하고 연주자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가을 오후 석양은 미련 없이 능선을 넘었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바리톤의 음성이 땅거미를 부른다.
공연을 마치고 식사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행사의 이모저모 대화가 오갔다.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객석에서 응원하는 내 모습이 감동이었다고 했다. 늦은 밤 컴퓨터에 매달려 일하다가 단장님 문자를 받았다. “응원단장으로 촉탁합니다.” 나는 헤실 웃고 팔을 걷어 올린다. 이제는 별을 따러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