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찜/ 박복자
1) 계란을 깨뜨려 볼에 담아 젓가락으로 젓는다. 흰자와 노른자가 따로 논다. 거품기로 한 방향으로 휘휘 저어 주자 곱게 섞인다. 젓고 난 뒤 살이 고운 채에 걸러낸다. 파, 당근, 양파를 다져 넣고 계란 찜기에 옮겨 담는다. 계란찜은 어릴 적 어머니가 자주 해 주던 음식이다.
2) 어머니는 살림이 그리 넉넉지 않은 선비 집에서 오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담하고 예쁘장하게 생겨서 혼기가 차자 그럴듯한 곳에서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좋은 자리는 혼수가 부담스러워 못하고 재 너머 농촌으로 시집을 왔다. 아버지는 셋째였지만 맏이와 다름없었다. 큰아버지께서는 일본에 계셨고 또 한 분은 중국에 계셨다. 일본에 있는 큰아버지 자식과 함께 살고 있었다.
3) 어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사촌 두 남매를 같이 키웠다. 고모는 결혼해서 친정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간 고모까지 챙겨야 했다. 제사가 일 년에 열두 번 거의 한 달에 한 번꼴이었다. 길쌈을 하며 누에 치기와 담배 농사일도 함께했다. 농촌에서는 이른 봄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에 거름을 내며 한해 농사 준비에 바빴다.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란 풀을 뽑고, 가을이 되면 가을걷이에 눈코 뜰 새 없었다. 이 집에서 우리 형제 4남매가 태어났다.
4) 할머니는 어머니를 혼수 없이 시집왔다는 이유로 구박을 많이 했다. 하루는 열심히 다듬질해 놓은 옷감을 보더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심하게 나무라셨다. 친정집에 가서 다시 배워 오라며 사립문 밖으로 내쫓았다. 사촌 오빠가 병에 걸려 고생할 때 어머니는 한약을 정성껏 달여 먹이고 등에 업고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기도 했다.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했지만 사촌 오빠는 세상을 떠났다. 섭섭함도 가슴 시린 아픔도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덮으며 눈물을 삼켰다.
5) 사촌 언니는 울산 병영에 언니의 외할머니가 혼자 계시는 곳으로 갔다. 어머니는 수시로 사촌 언니가 사는 집에 쌀을 이고 반찬을 만들어 들여다보았다. 사촌 언니가 혼기가 찼을 때는 혼수를 갖추어 우리 집 마당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고 시집 보냈다. 우리 4남매는 자라서 초등학교에 차례대로 입학했다. 맏딸인 나는 항상 어머니를 도왔다. 밥을 할 때면 밥솥에 불을 때고 부지깽이로 부엌 바닥에 글자를 쓰며 한글을 익히고 숫자와 구구단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새벽밥을 지어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6) 우리 집에서는 담배 농사와 누에치기를 그만두고 소득이 나은 양계장을 했다. 일요일은 넓쩍 삽으로 닭똥을 끌어내고 알을 낳고 잠자는 자리를 보살펴주었다. 상추와 쑥갓 풋보리를 뜯어서 넣어주기도 하고 닭 사료를 챙겼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오면 달걀을 삶아 대접했다. 밥상에는 어머니가 만든 푸짐한 계란찜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계란찜은 다른 어떤 반찬보다 맛이 있었서 숟가락 여러 개가 찜 그릇을 들락거렸다.
7) 농사를 지어서 기차 통학비와 육성회비를 마련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동네 양계하는 집에 가서 계란을 모아 우리 집 계란과 같이 부산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지름이 60센티가 넘는 다라이에 보자기를 깔고, 계란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손끝을 오그리며 가슴을 조이며 조심조심 옮겨 담고 묶었다. 옹골지게 담긴 달걀을 머리에 이고 울퉁불퉁 돌부리가 박힌 길을 살얼음 위를 걷듯 오금이 저리도록 걸었다. 10리 20리 길을 머리에 누르는 무게를 견디며 논길과 밭둑길을 걸었다.
8) 하루는 어머니가 동네 계란 걷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머리에 이고 오다가 둑길에서 발을 헛디뎌 달걀을 다 깨뜨렸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계란 한알 한알에 온갖 근심과 걱정을 얼마나 많이 쏟아 부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9) 달걀 속에는 하나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의 좋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어 완전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시집살이며 아버지의 내조와 자식들을 키우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 없이 혼신을 다했다. 어머니의 희생은 달걀에 버금가는 완전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10) 학교 가면서 나도 머리에 이고 손에는 책가방을 들고 기차에 옮겨 실었다. 통학생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럽고 난감했다. 어머니는 부산으로 달걀을 팔러 갔고 나는 울산역에 내려서 학교에 갔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먼저 집에 온 날은 계란찜이 밥 상위에 올려져 있었다. 완전식품인 계란으로 만든 계란찜을 먹고 잔병 없이 우리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계란이 잘 안 팔린 날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서야 집에 도착하는 날도 많았다. 나는 어머니의 무게를 덜지 못하는 철부지였다.
11) 우리 동네와 한국비료 공장과 자매결연을 하였다. 마을에 양계를 하는 집이 많아 구내식당의 부식으로 납품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울산 역전 시장에 계란 도매상을 열었다. 어머니의 생활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나 새벽 시장이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첫 버스를 타고 시장으로 가야만 했다. 힘든 일을 감내하며 노력한 보람으로 살림살이도 넉넉해지고 자식 4남매도 잘 자라서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어머니의 묵묵한 생활은 우리들의 삶의 교훈이 되었다. 사랑으로 온 식구들을 다 품고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다.
12) 드디어 계란찜이 완성되었다. 순한 맛이 혀끝을 감싸고 돈다. 어머니의 품속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다. 그 옛날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계란찜 맛이다. 둥근 숟가락 너머로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첫댓글 제가 정리해보겠습니다.
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