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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신계영(辛啓榮)실기 조선왕조실록(71건)
광해군시대
광해군 14년 임술(1622) 3월 12일(무신)
남근ㆍ유대건ㆍ홍요검ㆍ정홍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근(南瑾)을 대사헌으로, 유대건(兪大建)을 대사간으로, 홍요검(洪堯儉)을 집의로, 정홍원(鄭弘遠)을 장령으로, 한정국(韓正國)을 지평으로, 한급(韓昅)을 수찬으로, 정기문(鄭起門)을 필선으로, 신계영(辛啓榮)을 주서로, 성진선(成晉善)을 강원 감사로, 박경업(朴慶業)을 청주 목사로, 안응형(安應亨)을 공홍 감사(公洪監司)로 삼았다. 【남근과 유대건은 모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간흉에게 빌붙어 점차 화요(華要)한 이들과 통하게 되었다. 대건은 모습이 조식(曺植)과 비슷하여 더욱 정인홍의 신망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기세가 점차 확장되고, 또 임귀인(任貴人)의 숙부 임취정(任就正)과 관계를 맺어 일대(一隊)가 된 다음 궁금(宮禁)에 의탁하여 도리어 이이첨을 되물려 하자, 이에 간흉들 가운데 관망하며 뒷걸음질 치던 무리들이 대부분 귀의하였다. 홍요검은 간신 홍경주(洪景舟)의 후손인데, 이이첨에게 빌붙어 몇 년 사이에 자급을 건너뛰어 여기에 이른 것이다. 성진선은 당초 박학(博學)함과 〈담론(談論)을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사람됨이 거짓되고 바르지 않아, 독서함에 있어서는 주자(朱子)의 주소(註疏)를 그르다고 하고 논의함에 있어서는 정론을 어기고 이론을 내세우는 것을 위주로 하여, 명예를 탐하고 승진되기를 구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김제남 아들의 스승이 되었던 관계로 계축년에 죄를 얻을 뻔하였는데,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면할 수 있었다. 그 아들 성하연(成夏衍)과 힘을 다하여 결탁한 결과로 승지에 제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망이 너무 심하여 공청(公廳)에서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 자리를 더럽혔는데도 여전히 물러날 줄을 몰랐다. 이에 큰아들 성하창(成夏昌)이 울며 간하였는데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정북창(鄭北窓)에 비유하였다.〉 안응형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외손으로서 그 어머니 광양 부인(廣陽夫人)이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연줄을 타고 잘 섬겨 특별히 총애를 받았다. 여러 차례 방백에 제수되었는데, 성품이 자못 간약(簡約)하여 군을 잘 다스린다는 칭찬이 있었다.】
광해군 15년 계해(1623) 1월 21일(임자)
정부가 예문관의 취재시를 보이다
〈정부가 예문관의 취재시를 보였는데 신계영(辛啓榮)은 《좌전(左傳)》을 강하여 통(通)을 차지하였고, 유흠(柳𢡮)은 《강목(綱目)》에 조(粗)를, 정성(鄭晟)은 《송감(宋鑑)》에 조를 차지하였다.〉
인조시대
인조 2년 갑자(1624) 1월 17일(임신)
문회ㆍ이우ㆍ권진 등이 이괄 등의 변란을 고하다. 이에 이들을 추국하다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신의 아비가 비명에 죽었으므로 반드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여겨 지난해 7월에 신에게 저희끼리 음모한 것을 말하기를, ‘무인(武人) 성우길(成佑吉)이 일을 수창(首唱)하여 우리 5~6인과 유생(儒生) 정돈(鄭焞)ㆍ정찬(鄭燦)ㆍ성백구(成伯耉)ㆍ정방열 등이 학업을 익힌다는 핑계로 인성군(仁城君)의 이웃집에 모여 밤이면 들어가 뵈고 모의하였는데, 추대하는 일에 언급하면 자못 겸손하게 사양하며 「그대들은 다만 큰일을 이루라.」 하였다.’ 하기에 신이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은 정돈ㆍ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어 그 동당(同黨)을 만나게 해주기를 요구했더니, 말하기를 ‘이전은 현재 일 때문에 시골에 내려갔으니 뒤에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에게 전복(戰服)에 쓸 호문단(虎紋緞)을 장만하게 하므로 신이 가산을 기울여 수십 필(匹)을 사서 그의 소원에 부응해주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윤인발이 충주(忠州)에 내려가면서 서로 도우라는 서찰을 남겨두었는데, 곧 윤인발이 이부치(利阜峙)에서 안개 속에 도둑을 만나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었고 다시 탐지할 길이 없으므로 정돈 등을 만나려고 다시 탐문하여 그 집에 찾아갔더니, 그 아비 정인영(鄭仁榮)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며 시국을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 뒤로는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으니, 대개 신이 그 정상을 드러낼까 의심했던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이우가 정돈ㆍ정방열 등과 서로 친숙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우를 찾아가 만나서 윤인발의 흉모와 정인영에게 속임당한 정상을 자세히 말하고 그 모의한 것을 탐지하게 하였더니, 이우가 곧 허락하고 정방열과 함께 몰래 서로 왕래하였습니다. 하루는 정방열을 데리고 신의 집에 와서 잤는데, 정방열이 시국을 원망하는 시를 지으면서 이우에게 시구를 채워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신과 이우가 상변할 뜻을 지니고 있는가 의심하였으므로, 신들이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먼저 고변하였습니다.”
하고, 이우가 공초하기를,
“문회에게 다그침을 받아 자주 정방열을 보러 갔는데, 짐짓 난언(亂言)을 하여 꾀었더니 드디어 그 정상을 실토하기를 ‘이괄ㆍ한명련ㆍ정충신ㆍ이익(李榏) 등이 지금 연결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지난 가을에 어떤 사람이 홍 승지(洪承旨) 집에 투서하기를 「이괄ㆍ정인영ㆍ유경종(柳慶宗)이 반역을 모의한다.」 하였는데 홍 승지가 그 글을 유경종에게 보였다. 이 때문에 이괄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반역할 모의가 더욱 굳어졌다.’ 하였습니다. 또 한준철(韓濬哲)이라는 자는 한희길(韓希吉)의 손자로서 평소에 서로 친했는데, 신을 불러 윤안형의 집에서 같이 자면서 신에게 계책을 말하고 일을 같이하기를 요구하므로 신이 곧 겉으로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윤안형 등을 불러 회의하였는데 권진ㆍ문회도 참여하여 듣게 하였습니다.
안형이 말하기를 ‘기자헌(奇自獻)이 반정(反正)한 처음부터 이시언(李時言)과 함께 이미 이 모의를 하여 이성(李偗)으로 하여금 주상(主上)의 명수(命數)를 논하게 하고, 또 한 왕자(王子)와 함께 이시언의 집에 모여 은자(銀子) 2천 냥을 이시언에게 주고 1천 냥을 성우길에게 주어 혹 도감(都監)의 군사를 모으기도 하고 무리를 불러 모으게도 하였다. 동참한 자는 성준길(成俊吉)ㆍ현즙(玄楫)ㆍ정충신ㆍ유비(柳斐)ㆍ안륵(安玏)ㆍ한명련(韓明璉)ㆍ한겸(韓謙)ㆍ김복성(金復性)ㆍ한계(韓誡)와 이문빈(李文賓)의 다섯 아들과 권충남(權忠男)의 아들인 권이균(權以均)ㆍ권필균(權必均)과 성효량(成孝良)과 그 아들 성철(成哲)과 한욱(韓頊)ㆍ윤상철(尹商哲)ㆍ허익(許杙)ㆍ한흥국(韓興國)ㆍ한창국(韓昌國)ㆍ김극전(金克銓)ㆍ김극명(金克銘)이고, 문신(文臣) 전유형(全有亨)ㆍ윤수겸(尹守謙)ㆍ이용진(李用晉)ㆍ유공량(柳公亮) 등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한창국ㆍ한흥국ㆍ이광호(李光澔)ㆍ신득지(愼得智) 등은 기자헌이 흉격(凶檄)을 투입하였을 때에 십삼학사(十三學士)라 부르던 자이다. 이시언이 고변(告變)한 것은 본심이 아니라, 신득지가 그 모의를 누설하였으므로 일이 발각될까 염려하여 먼저 이유림(李有林) 등을 고하여 스스로 신임을 받으려 한 것일 뿐으로 그 모의는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전라 병사 윤숙(尹璛)은 왕자군(王子君)의 가까운 친족이므로 서방에 부방(赴防)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하여 그대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윤숙이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에 차출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근일 기자헌이 김정(金鉦)ㆍ남염(南濂)ㆍ조희형(趙希亨)을 이시언에게 잇달아 보내어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재촉하게 하고 전유형ㆍ윤수겸 등이 정돈을 한명련에게 보내어 본도(本道)의 감사를 죽이게 하고 한명철(韓明哲)을 현즙에게 보내어 원수(元帥)를 도모하게 하였으며, 이미 어인(御印)을 주조(鑄造)하여 왕자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한계가 일찍이 어떤 사람이 민씨(閔氏)가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는데, 왕자의 어머니가 곧 민씨이니 그 일이 매우 기이하다.’ 하였습니다.
정방열도 말하기를 ‘광해가 인왕산(仁王山)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었으니 반드시 이 궁의 임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윤안형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2월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정하였으니 공들은 반드시 무사를 모집하여 따라야 한다.’ 하니, 권진이 그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은화(銀貨)로 돕겠다.’ 하고 1천 냥을 허락하였는데, 윤안형이 또 문회에게 1천 냥을 요구하니 문회도 허락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정방열이 그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상변할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앞서 와서 고하고 정방열과 왕복할 서찰도 아울러 상달(上達)하였습니다.”
하였다. 권진이 공초한 말은 대개 이우 등의 말과 서로 부합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윤안형이 말하기를 ‘이광영(李光英)이 강화 부사(江華府使)로 있을 때에 외원(外援)하려 하였으며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체임되어서는 그 군사로 도우려 하였다. 그런데 또 갈렸으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하고, 한흔이 공초하기를,
“신과 정찬은 척분이 서로 두터우므로 신이 상경하였다는 말을 듣고 와서 보고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처형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와 일을 같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서 놀라와 대답할 바를 몰라 다만 묻기를 ‘이 일은 반드시 장자(長者)를 얻어서 주장하게 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느 사람인가?’ 하였더니, 정찬이 말하기를 ‘정승 기자헌(奇自獻)인데 유경종(柳慶宗)ㆍ유몽인(柳夢寅)ㆍ유위(柳韡)ㆍ유흠(柳𢡮)과 무장(武將) 이시언ㆍ성우길이 다 같이 모의하고 도감의 장관(將官)도 많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였는데, 신이 평소부터 정찬이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로 시골로 내려가다가 길에서 신대지(申大枝)와 유흠을 만났는데, 신대지는 신의 아비의 옛날 편비(褊裨)였으므로 길가에 앉아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뜻이 없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어찌하겠는가.’ 하였더니, 대지가 말하기를 ‘너는 아직 요즘의 일을 모르는가? 오래지 않아 거의(擧義)하여 폐주(廢主)를 복위시킬 것이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은의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유흠이 이어 신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신이 일이 있다고 핑계대고 드디어 시골에 내려 갔는데, 그 뒤에 들으니 유응형(柳應泂)이 고변(告變)하여 유흠 등이 다 죽었다 하였습니다. 저번에 맏형의 아들 한준철(韓濬哲)이 와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이우ㆍ문회ㆍ윤안형 등이 요즈음 큰일을 꾀한다.’ 하기에 신이 멸족될 일을 하지 말라고 매우 꾸짖었습니다. 준철이 간 뒤에 재삼 생각하니, 준철의 말은 국가에 관계될 뿐더러 사가(私家)의 큰 화(禍)가 있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와서 고하였습니다.”
하고, 정방열이 공초하기를,
“평소 이우와 서로 친했는데, 이우는 신에게 잇달아 화환이 있어 가사(家事)가 탕패(蕩敗)한 것을 보고 매우 후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신과 함께 선친의 묘소 아래에서 같이 잘 때에 이우가 말하기를 ‘요즈음 들으니 영남ㆍ호서에 큰 변이 있을 것이라 하는데, 청주(淸州) 사람 박동명(朴東明)ㆍ유대명(柳大鳴)과 진위(振威)의 무인(武人) 김제정(金濟鼎) 등이 고을 군사로 남쪽 군사를 응원하려 하니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나도 경중(京中)과 백운산(白雲山)의 중 수백 인을 불러 모아 서로 응원하겠으나 단약(單弱)한 것이 한탄스럽다. 정찬 형제는 한명련과 혼인한 집안이고 또 이전과 서로 친하니 만약 정씨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면 일이 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하였으나, 신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 반역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신이 정찬을 만나 이우의 반역을 꾀하는 정상을 말하였더니, 정찬이 말하기를 ‘오합지중은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 다른 한 곳에서 하는 일은, 철기(鐵騎) 10만이라도 못 당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그들과 합세해야 큰 일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이우의 말을 이미 김자점(金自點)에게 고하였습니다.”
하고, 윤안형이 공초하기를,
“한준철(韓濬哲)과는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준철이 천변(天變)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말뜻이 이상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네가 무슨 소견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가?’ 하였더니, 준철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시국을 원망하는 사람이다. 기자헌ㆍ이시언이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보고 지금 거사를 꾀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너만 못해서 이런 생각을 갖겠는가.’ 하고, 이어 말하기를 ‘기자헌이 정명진(鄭名振)을 불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폐주(廢主)에게서 은혜를 받은 것이 두터운데 어떻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명진이 말하기를 「감히 공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드디어 이시언에게 가서 알리게 하니, 시언이 곧 허락하였다. 이튿날 스스로 시언의 집에 갔는데, 인성군(仁城君)도 미복(微服)으로 와서 동지 10여 인과 함께 통곡하고 맹약하였다. 인성은 백금(白金) 3천 냥을 내어 군사를 모집하게 하고 기자헌과 유몽인은 격문(檄文)을 지어 도감의 장사(將士)에게 보냈다. 그리고 윤숙으로 하여금 호남(湖南)을 맡게 하였는데, 대개 윤숙은 거의(擧義)할 때 인성에게 뜻을 가졌었는데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마음에 불안을 품었기 때문에 인성이 비밀히 통한 것이다. 경외(京外)에서 모의에 참여한 자가 대략 3백여 인인데, 나처럼 복수하려는 사람은 이문빈ㆍ권충남의 아들들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곧 상변하려 하였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여 이제까지 참아왔습니다. 새해 들어 준철이 와서 말하기를 ‘어제 이우를 만났는데 일을 같이할 만하다.’ 하고 이어 신의 집에 함께 모여 잤습니다. 이우가 강개하여 큰소리로 심정을 토로하니, 준철이 말하기를 ‘그대가 일을 같이하려 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할 것인가?’ 하니, 이우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경성(京城)에서 불러 모은 자가 5백여 인이고 호서에서 온 자가 5백여 인이고 수원(水原)의 천총(千摠) 이승충(李承忠)이 거느리는 자가 3백여 인이고 포천(抱川) 등산(燈山)의 승군(僧軍)으로 정예한 자가 50인이니 이것으로 일으키면 족히 성공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이우가 말하기를 ‘경중에 한 장자(長者)가 있고 외방에 상신(相臣)이 있다.’ 하니, 준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리들이 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였습니다.
하루는 이우가 사람을 보내어 와서 모이기를 청하므로 가보니, 좌상(座上)에 두 사람이 있는데 문회ㆍ권진이었습니다. 신이 권진에게 묻기를, ‘이우의 말은 이미 들었는데 그대가 얻은 것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권진이 말하기를 ‘나는 심복같은 벗이 1백 인이 있으니 1백 인이 각각 친병(親兵) 10인을 거느리면 1천 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월 15일 저녁에 신이 이웃 사람과 달을 보고 돌아가는데 성탁(成琢)이 시국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에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우리 외삼촌 전회(全晦)는 평소 이용진과 서로 친한 사이인데 지금 이용진ㆍ윤수겸ㆍ전유형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한준철의 말과 서로 부합하였습니다. 신이 이우ㆍ권진에게 말하기를 ‘이용진 등 여러 사람의 모의를 우리가 알게 되면 함께 모의할 길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한준철이 신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이 일은 장차 드러날 것이므로 우리 얼숙(孽叔)이 상변하여 잡류(雜類)를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막으려 한다. 그런데 윤수겸 등이 꾀하는 것은 매우 크므로 장차 그 쪽을 따를 것이니, 너도 함께 상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따르지 않고 홀로 고하려 하였는데 이우ㆍ권진 등이 함께 상변하므로 한꺼번에 와서 고하였습니다.”
하였다. 애초에 한흔이 김광소(金光熽)에게 역모를 누설하자 광소가 훈신들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광소를 나문(拿問)하였는데, 공초하기를,
“한흔은 신의 아내의 동생인데, 신의 병이 심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시골에서 문병하러 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신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근래 유응형ㆍ이시언의 두 옥사(獄事)에 대해 사람들이 다 부실하다고 의심하고 국청(鞫廳)에서도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끝까지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흉도(凶徒)가 법망에서 빠져나가 그지없이 난을 모의하고 있다. 하루는 유흠ㆍ신대지가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이번 반정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서 인심이 따르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장차 다시 거의할 것이다. 너희 아버지도 죄없이 죽었으니 우리들과 일을 같이 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는가?」 하기에, 내가 그 모계(謀計)의 대강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문신(文臣)은 기자헌이 대장이고 유몽인ㆍ유경종이 다음이며, 무신은 이시언ㆍ현즙ㆍ성우길 등이 대장인데, 이시언은 여러 차례 도감의 대장이 되었으므로 뭇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 항왜(降倭) 50여 인이 그의 심복이며 반정 뒤에 죄받은 사람의 자제ㆍ노복으로서 서로 약속한 자가 매우 많고 도감의 장관(將官)도 많이 호응하고 있다. 우리들이 각각 초군(哨軍)을 거느리고 사사로이 훈련한다고 핑계대고 동쪽은 살곶이[箭串]에 주둔하고 서쪽은 연서(延曙)에 주둔하였다가 동서에서 함께 종가(鐘街)에 들어가 진치고 복수기(復讐旗)를 세우고서 도하(都下) 사람들을 타이르고 무리를 나누어 보내어 공신(功臣)들을 제거하면 기세가 웅장할 것인데, 조정에서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는가. 폐주를 맞이하여 복위하고 몇 달 뒤에 왕자 중에서 평소에 어질다고 일컬어진 자에게 양위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오늘날의 큰 계책이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한흔에게 묻기를 ‘왕자 중에 어진 자란 누구인가?’ 하니, 한흔이 말하기를 ‘인성의 아우 인흥(仁興)인데 인흥이 즉위하면 국가가 태평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흔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장차 강홍립(姜弘立)ㆍ김경서(金景瑞)에게 알려서 노병(奴兵)을 이끌고 경상(境上)에 와서 진압하며 조정을 협제(脅制)하여 구주(舊主)를 복위시키게 하고 우리들이 안에서 일어나면,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한흔이 또 말하기를 ‘이선철(李先哲)ㆍ위정철(魏廷喆)이 반역을 꾀하다가 석방되었는데, 그들이 서방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겉으로 은혜에 감격하여 목숨을 바치는 체하면서 실은 그 간계를 부리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반역을 꾀한 무리가 살을 찔러 피를 내어 맹세하기를 「우리들이 불행하게 되더라도 맹세코 각자 스스로 죽고 서로 끌어대지 않는다.」 하였으니, 전후의 옥사에서 사실을 고한 자가 아주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흔이 신이 그 아비를 거두어 묻어준 것을 감사하게 여겨서 화기(禍機)를 알려 난병(亂兵)을 면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공초에서 끌어댄 사람들을 국문(鞫問)하였는데, 이괄ㆍ유비ㆍ정충신ㆍ유숙 등은 나문하지 말라고 명하고, 갇힌 죄인 중에서 정인영ㆍ정찬ㆍ성백구ㆍ성철(成哲)ㆍ한준철ㆍ김정ㆍ성탁ㆍ한창국ㆍ한흥국ㆍ신승남(申承男)ㆍ신경남(申慶男)ㆍ이담(李澹)ㆍ이항(李沆)ㆍ권이균(權以均)ㆍ권필균(權必均)ㆍ성대익(成大翼)ㆍ윤상철(尹商哲)ㆍ민유장(閔有章)ㆍ한명철(韓明哲) 등은 모두 형신하였다. 정찬이 공초하기를,
“이괄이 비기(祕記)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딴 뜻을 품었는데, 남건(南楗)은 요술로 서로 친하고 남응화(南應華)는 망기(望氣)를 잘하여 이괄의 집에 가기(佳氣)가 있다 하였고, 윤수겸은 이괄이 갑자년 명수(命數)를 타고나 극히 길(吉)한 것으로서 한번 지휘하면 태평을 이루게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괄의 종손(從孫) 정석필(丁碩弼)에게서 들었는데, 신의 아비와 형이 다 이괄의 모계를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정인영은 이미 역모에 참여하여 들었다고 승복하였으나 실토하지 않았고, 한준길은 역모에 같이 참여한 것을 자복하였고, 성탁도 윤안형과 함께 모의하였다고 공초하였다. 성탁은 곧 처형하고, 정찬은 그대로 가두고서 여러 죄수를 빙문(憑問)할 바탕으로 삼고, 정인영은 미처 처형하기 전에 죽었고, 김정ㆍ한창국ㆍ한흥국 등도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다. 정석필을 나래(拿來)하여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이괄의 내응(內應)은, 전라 감사 이명(李溟), 병사 윤숙, 강원 감사 윤안국(尹安國), 수원 부사 이경립(李景立)과 윤수겸(尹守謙)ㆍ전유형(全有亨)ㆍ성효량(成孝良)ㆍ오문갑(吳門甲)ㆍ김대현(金大賢)ㆍ신계영(辛啓榮)ㆍ조사언(趙士彦)ㆍ송경(宋璟)ㆍ손득일(孫得一)입니다.”
하였는데, 이경립ㆍ윤안국ㆍ이명은 나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인조 2년 갑자(1624) 2월 12일(병신)
서성ㆍ장유ㆍ정광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서성(徐渻)을 대사헌으로, 장유(張維)를 대사간으로, 정광적(鄭光績)을 우참찬으로, 김신국(金藎國)을 형조 참판으로, 정엽을 대사성으로, 조성립(趙誠立)을 전한으로, 이목(李楘)을 부교리로, 강석기(姜碩期)를 수찬으로, 엄성(嚴惺)을 부수찬으로, 한여직(韓汝溭)을 경기 우도 감사로, 전식(全湜)을 집의로, 오숙(吳䎘)을 사간으로, 정백창(鄭百昌)을 헌납으로, 오준(吳竣)을 지평으로, 신계영(辛啓榮)ㆍ정홍명(鄭弘溟)을 정언으로 삼았다.
인조 2년 갑자(1624) 3월 5일(기미)
옥당에서 이안눌ㆍ황치경을 탄핵하고 양사의 체차를 건의하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2백 년 동안 없었던 변란이 성명(聖明)의 세대에 일어나 종묘 사직이 파천하고 승여(乘輿)가 몽진하게까지 하였으니, 모든 백성이 누구인들 분개하여 죽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외의 신료 중에 혹은 역순(逆順)을 분간하지 못하고 뚜렷이 적을 따르는 논의를 한 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무부(武夫)는 무지하므로 혹 버려두고 묻지 않음으로써 불안해 하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겠으나, 이안눌(李安訥)처럼 자신이 재상의 줄에 있고 황치경(黃致敬)처럼 통현(通顯)한 지위에 있는 자가 버젓이 사람들을 대하여 패역스런 말을 함으로써 듣는 자들이 간담이 터지듯이 하여 그의 살점을 찢고 싶어합니다.
박내장(朴來章)은 성에 들어와 적에게 붙은 것을 사람들이 많이 보았으므로 국론이 자자하여 엄폐할 수 없이 분명한데, 양사는 이목(耳目)의 관원으로서 한 시대의 공론을 맡고 있으면서도 규핵하여 논죄하는 일이 없습니다. 기익헌(奇益獻)이 외람되게 상소한 것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는 것인데 후설(喉舌)의 관원이 범연히 받아들였으니 직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그런데 또한 탄핵하거나 논박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혹 일에 임하여 미리 의논하고 곧 정고(呈告)하여 규피(規避)한 자가 있으니, 언관(言官)의 풍채가 땅을 쓴 듯이 없습니다. 양사를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런 때에 사람들의 말을 어찌 죄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양사는 풍채를 손상한 일이 없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대사헌 서성(徐渻), 집의 이준(李埈), 장령 김상(金尙)ㆍ지평 이덕수(李德洙)ㆍ오준(吳竣), 헌납 정백창(鄭百昌), 정언 신계영(辛啓榮)이 공척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사간 오숙(吳䎘)도 규피하였다는 공척에 대해 스스로 논열하였는데, 대사간 이수광(李晬光), 정언 권곽(權钁) 등이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인조 2년 갑자(1624) 5월 11일(갑자)
정립ㆍ강홍중ㆍ신계영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정립(鄭岦)ㆍ강홍중(姜弘重)ㆍ신계영(辛啓榮)을 보내어 일본(日本)에 회답하였다. 정립 등이 떠나려 할 때에 아뢰기를,
“중국은 부모의 나라로서 혹 유무(有無)를 무역해도 본디 크게 해로울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수검(搜檢)하는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왜노(倭奴)는 원수의 나라로서 사신을 보내어 회답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는데, 재화(財貨)를 가져가서 이익을 꾀하는 일이 있다면 사신이 모욕을 당하고 나라의 체모가 손상되어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부경(赴京)의 예에 따라 경관(京官)을 보내어 금령을 범하는 사람을 수검하는 일을 각별히 거행하여 잠상(潛商)의 율(律)로 처단하게 하소서. 그리고 비국(備局)의 공사(公事)에 따라 화사주(花絲紬) 수천 필로 조총(鳥銃)ㆍ환도(環刀)를 사오게 하셨는데, 이 성명의 시대에 처음 사신을 보내면서 버젓이 재화를 가져가 무역의 길을 열게 하면, 도이(島夷)에게 깔보이고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킬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수검하는 일은 사신이 엄금하면 절로 그 폐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따로 경관을 보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인조 2년 갑자(1624) 7월 3일(을묘)
정백창을 헌납으로 신계영을 지평으로 삼다
정백창(鄭百昌)을 헌납으로, 신계영(辛啓榮)을 지평으로 삼았다.
인조 2년 갑자(1624) 7월 16일(무진)
간원에서 홍호의 파직을 청하다
대사헌 정엽이 아뢰기를,
“신은 홍호를 논계하여 그 벼슬을 파면하기를 청하였는데, 옥당은 사론(邪論)한 자의 죄를 관용해 주려 하면서 이것을 언로를 넓히는 계책이라고 하니, 이는 정론(正論)을 억누르고 사론을 넓히는 것에 가깝지 않습니까. 신은 박승종이 이이첨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홍호를 논하여 파직한 것도 오히려 말감(末减)이라고 여기는데, 옥당은 박승종이 이이첨과 상반된다고 생각하여 홍호를 헐하게 보아 파직을 너무 무겁다고 여기기까지 하니, 이것은 소견이 끝내 서로 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박승종의 죄악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분개하여 욕하는데, 시골을 아무리 다녀 보아도 들을 길이 없다는 것을 허물을 꾸며 가리우는 말로 삼으니, 공론을 맡은 옥당이 솥에 귀가 있는 것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신이 얕은 생각과 짧은 식견으로 논의를 잘못한 탓에 홍호를 논한 한 가지 일이 이토록 어지러워졌으니, 이것은 모두 신처럼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언지의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의 직책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집의 박정(朴炡), 장령 최연(崔葕)ㆍ정기광(鄭基廣), 지평 이경용(李景容)ㆍ신계영(辛啓榮) 등도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홍호가 함부로 괴이하고 망령된 말을 하여 사람들의 귀를 어지럽혔으니 언관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갖가지 말을 하면서 신구(伸救)하는 것은 본디 그 직책을 담당한 자가 있는 것이니,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고, 간원이 또 아뢰기를,
“홍호의 괴이하고 망령된 말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데, 박승종이 형세가 궁해 자결한 것과 법으로 볼 때 당연히 적몰(籍沒)해야 된다는 것은 이미 헌부가 곡진하게 아뢰었으니 지금 번거롭게 아뢸 것까지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홍호가 삼공(三公)과 종반(從班)들은 다 죽어야 할 의리가 있다고 한 것은 더욱 어긋나는 말로서 위로는 천리(天理)를 해치고 아래로는 인심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으니, 한때에만 죄를 얻을 뿐 아니라 후세에도 의혹을 일으킬 것입니다. 따라서 그 죄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어찌 파직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러나 천지와 같이 포용하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미치고 눈먼 자에게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말감의 청을 하는 데에 그친 것이니, 이는 당초부터 과격한 논의가 아니었습니다.
경악의 신하는 의리를 강명(講明)하고 공론을 확장하는 것이 그들의 책무인데, 시끄럽게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홍호를 위하여 변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언로가 혹 막힐까에 대해서만 염려했을 뿐 사론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은 깨닫지 못했으며, 말한 자를 죄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만 염두에 두었을 뿐 방자한 의논을 물리치는 것이 급하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정해진 대론(臺論)을 막고 이미 내려진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니, 논의가 전도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홍문관의 상차에 동참한 관원을 모두 체직하고 추고하는 동시에 홍호는 전에 분부하신 대로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당이 언로가 막히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상차하여 논변(論辨)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으로서 죄줄 만한 잘못이 없다. 홍호를 파직하라는 명은 이미 도로 거두었으므로 결코 다시 그 벼슬을 파면할 수 없다.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을 체직하고 추고하는 논의를 다시 아뢰니, 이에 따랐다.
인조 3년 을축(1625) 3월 13일(신유)
정립ㆍ강홍중ㆍ신계영이 일본에서 사람들을 쇄환해 오고, 부산에서 계문하다
회답사 정립(鄭岦)과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이 일본에서 돌아와 부산에서 계문하였다.
“신들이 잡혀갔던 사람 1백 46명을 불러모아 데리고 왔습니다. 태반이 호남(湖南) 사람인데 우리 지경에 이르면서는 양식이 떨어져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급히 해조로 하여금 원적(原籍)으로 돌려보내 머물러 있게 되는 염려가 없게 하도록 하소서.”
인조 3년 을축(1625) 3월 17일(을축)
최명길ㆍ홍서봉ㆍ이준 등에 대한 인사를 실시하다
최명길(崔鳴吉)을 대사헌으로, 홍서봉(洪瑞鳳)을 부제학으로, 이준(李埈)을 사간으로, 정세구(鄭世矩)ㆍ강대수(姜大遂)를 장령으로, 박황(朴潢)을 검열로, 신계영(辛啓榮)을 지평으로, 김신국(金藎國)을 사은사로, 유순익(柳舜翼)을 부사로, 남궁경(南宮㯳)을 서장관으로, 장자호(張自好)를 성찰사 겸 동지사로, 조훈(趙塤)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김류가 이조 판서로서 자신을 사은사의 첫머리에 의망했었는데, 상이 더 의망하도록 명하여 김신국에게 낙점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자못 김류가 자신을 의망한 것을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김신국은 80세 노모가 있는데도 면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사신은 논한다. 옛적에 열국들이 이웃 나라와의 교섭에 나가는 사신은 반드시 전대(專對)할 수 있는 인재를 가렸었기에, 사신이 적임자가 아니면 《춘추》에서 기롱하였다. 하물며 오늘날에 상국에 사명을 받들고 가는 사람의 소임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한 번 요동(遼東)의 길이 막히게 되고서는 바다로 가는 길이 험하고 멀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싫어하고 기피하여 번번이 관직에서 밀려난 사람으로 충당하였다. 이에 장자호는 곧 혼조 때 아첨하던 신하이고 남궁경과 조훈은 모두 간흉들에게 물든 무리인데 이런 소임을 맡게 되었다. 이때의 정사가 공정하지 못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인조 3년 을축(1625) 3월 23일(신미)
정립ㆍ강홍중ㆍ신계영 등이 일본 국왕의 복사서를 가지고 와서 복명하다
회답사 정립(鄭岦), 부사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 등이 복명하였다. 당초에 정립 등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의 군신들이 매우 후한 예로 대우했는데, 증정하는 물품과 보패(寶貝)를 하나도 받지 않았고, 은화는 모두 도주에게 되돌려주고 돌아왔으므로, 신하가 국경을 나갔을 때의 의리를 잃지 않은 것이라고들 했다. 일본 국왕 원가광(源家光)이 우리 나라에 복사서(復謝書)를 써서 보냈는데, 그 복사서에,
“일본 국왕 원가광은 조선 국왕 전하께 봉복(奉覆)합니다. 섣달이 되어 추위가 사람을 핍박하는 이때에 한 통의 봉서(封書)와 함께 세 사신이 온화하게 찾아주시니,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과인이 일본 강역을 다스리고 있으면서 갑자기 귀국의 소식을 접하고 보니, 예절을 닦아 치하하고 약간의 진귀한 토산(土産)을 보낸 것이었는 바, 그전대로 계속해서 교린을 돈독히 하는 아름다운 뜻에 감복하며, 더욱 기쁘고 위로가 됩니다. 두 나라에 만대토록 경사가 흘러가도록 하고 감히 사이가 벌어지게 하지 않을 것을 확약합니다. 삼가 계절에 따라 나라를 위해 옥체를 보중하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하였다. 또 집정(執政) 두세 사람도 모두 예조에 글을 보내어 물건을 증급해준 것에 대해 치사하였다.
가광은 곧 가강(家康)의 손자이고 수충(秀忠)의 아들이다. 정사년에 오윤겸(吳允謙)이 사신으로 갔을 때 수충이 관백(關白)으로 있었다. 수충이 그의 아들 가광을 마땅히 관백으로 세워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그의 자리를 전했는데, 가광은 성격이 날카롭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므로 사람들이 원망하며 괴로워하였다.
인조 3년 을축(1625) 3월 25일(계유)
정립ㆍ강홍중ㆍ신계영을 인견하고 왜국의 사정을 물어보다
상이 자정전에서 회답사 정립(鄭岦), 부사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을 인견하여 묻기를,
“왜국의 사정이 어떠하던가?”
하니, 정립이 아뢰기를,
“신들이 듣고 보고한 것은 문견사건(聞見事件)에 갖추어 놓았습니다. 대체로 신들을 몹시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듣건대 그들 내부에 염려되는 일이 있어서 관백 부자가 60주의 장관(將官)들의 가속을 국중에 잡아다 놓고 동서의 도성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마치 조석 사이의 변에 대비하고 있는 듯 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사세로 보면 군사를 출동하여 이웃 나라를 침범하는 일은 없을 듯 합니다.”
하고, 강홍중이 아뢰기를,
“관백이 나이가 젊으면서 새로 즉위하였고 또 경박하고 날카로워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므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백이 전위(傳位)한 것은 대체 무슨 의도인가?”
하자, 정립이 아뢰기를,
“왜국의 임금은 으레 전공(戰功)에 따라 승습하기 때문에, 관백이 생존했을 때 그의 아들에게 전위하여 인심을 진정시킬 계획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강홍중이 아뢰기를,
“친근하게 신임하는 사람을 각 주에 나누어 보내고, 대판성(大坂城)을 쌓아 부자가 각기 지키는 계획을 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호(江戶)는 한 쪽 구석인 듯 한데 어찌하여 도성을 만드는 것인가?”
하자, 강홍중이 아뢰기를,
“혹자의 말이 ‘가까운 주에 발호하는 장수가 있으므로 그를 억누르려는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는 장계한 것을 보고 쇄환해 오는 사람이 반드시 많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번에 쇄환해 온 수가 자못 많다.”
하자, 정립이 아뢰기를,
“잡혀간 지 이미 오래여서 시집가고 장가갔기 때문에 환국할 뜻이 없었습니다. 신들이 마음을 다하여 탐문하고 관백도 영을 내려 귀국을 허락했는데, 마침 서해주(西海州)에서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기에 1백여 인을 쇄환한 것입니다.”
하고, 강홍중이 아뢰기를,
“쇄환한 사람 중에는 포(砲)를 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20여 명이나 있으니, 따로 대오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은 반드시 부모를 사모하고 고국을 생각하여 나온 것이니, 억지로 군대를 편성할 수는 없다.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결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이 원적(原籍)으로 돌아가 휴식하게 한 뒤에 정예한 장정을 뽑아 훈련도감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인조 3년 을축(1625) 4월 3일(경진)
회답사 정립 등에게 상을 내리다
회답사(回答使) 정립(鄭岦)과 부사(副使) 강홍중(姜弘重)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종사관(從事官) 신계영(辛啓榮)은 승서(陞叙)하고, 역관(譯官)ㆍ군관(軍官)은 모두 차등 있게 상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인조 3년 을축(1625) 8월 2일(무인)
엄성ㆍ강대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엄성(嚴惺)을 사간으로, 강대수(姜大遂)ㆍ신계영(辛啓榮)을 장령으로, 이윤우(李潤雨)를 교리로, 심지원(沈之源)을 정언으로 삼았다.
인조 3년 을축(1625) 9월 30일(을해)
이홍주ㆍ신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홍주(李弘胄)를 대사헌으로, 신계영(辛啓榮)을 장령으로, 정백창(鄭百昌)을 사인으로, 이윤우(李潤雨)를 검상으로, 이준(李埈)을 집의로, 홍명구(洪命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인조 4년 병인(1626) 2월 18일(신묘)
이귀ㆍ최현ㆍ이준ㆍ신계영ㆍ정홍명ㆍ심지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귀(李貴)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으로, 최현(崔晛)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준(李埈)을 시강원 보덕으로, 신계영(辛啓榮)을 필선(弼善)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이조 정랑으로, 심지원(沈之源)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인조 4년 병인(1626) 2월 28일(신축)
장유ㆍ윤지경ㆍ이경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장유(張維)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사헌부 집의로, 이경헌(李景憲)ㆍ신계영(辛啓榮)을 장령으로, 박황(朴潢)을 헌납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정언으로, 이여황(李如璜)을 홍문관 교리로, 강석기(姜碩期)를 시강원 보덕으로, 권확(權鑊)을 필선으로, 김지수(金地粹)를 문학으로 삼았다.
인조 4년 병인(1626) 2월 28일(신축)
장유ㆍ윤지경ㆍ이경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장유(張維)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사헌부 집의로, 이경헌(李景憲)ㆍ신계영(辛啓榮)을 장령으로, 박황(朴潢)을 헌납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정언으로, 이여황(李如璜)을 홍문관 교리로, 강석기(姜碩期)를 시강원 보덕으로, 권확(權鑊)을 필선으로, 김지수(金地粹)를 문학으로 삼았다.
인조 4년 병인(1626) 7월 17일(정해)
이현영ㆍ이식ㆍ정백창 등에게 관직을 내리다
이현영(李顯英)을 형조 참판으로,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정백창(鄭百昌)을 집의로, 이준(李埈)을 보덕으로, 정세구(鄭世矩)ㆍ신계영(辛啓榮)을 장령으로 삼았다. 신계영은 일찍이 혼조(昏朝)에서 박승종(朴承宗) 등에게 아첨하여 한림까지 되었는데, 반정(反正) 이후에도 청반(淸班)에 출입하자 공의(公議)가 허락하지 않았다. 김세렴(金世濂)ㆍ민응회(閔應恢)를 지평으로, 박황(朴潢)을 헌납으로, 엄성(嚴惺)을 필선으로, 조정호(趙廷虎)를 교리로, 송시길(宋時吉)ㆍ한필원(韓必遠)을 정언으로 김휼(金霱)를 설서로 삼았다.
인조 5년 정묘(1627) 1월 6일(갑술)
호패 정돈에 대해 각도 어사에게 구언하다
상이 순안 어사 전라 좌도 이경여, 경상 좌도 신계영(辛啓榮), 충청 좌도 최유해(崔有海), 경상 우도 강석기(姜碩期), 함경도 조정호(趙廷虎), 황해도 민응회(閔應恢), 강원도 이경의, 평안도 홍명구(洪命耉), 충청 우도 심지원(沈之源), 전라 우도 박황(朴潢) 등 열 사람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분부를 받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반드시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사목 가운데에 소루한 곳이 있는가?”
하였다. 최유해가 아뢰기를,
“신의 소견은 상소 중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홍명구가 말하기를,
“평안도는 호패에 입적(入籍)한 자가 열에 두셋은 되는데 적군(籍軍)을 함에 있어서는 서로 도피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통하는 방도는 사목에 있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덕의(德意)를 선포하는 일은 사신에게 달려 있으니 늙어서 제대시킨 군인은 나이를 상고하여 영원히 면제를 허락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2~3세 아동으로서 군역에 책정된 자가 있기 때문에 양민 중에 자식 많은 자들이 유망(流亡)하는 일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목 가운데에는 단지 5세 이하만 군역에 보충된 자를 면제시켰으니, 10세 이하의 은전을 입지 못한 자들은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15세 미만인 자들은 우선 군역을 책정하지 말고 따로 성책(成冊)을 해 두고 뽑아 놓은 여정(餘丁)들로 그 빈 자리를 채워서 나이가 차기를 기다린다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본청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치토록 하겠다.”
하였다. 강석기가 아뢰기를,
“지금 경장(更張)을 하게 되면 반드시 산실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비록 군액이 날로 축소된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미성인(未成人)을 군역에 충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정호는 아뢰기를,
“이경여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왕자(王者)가 백성을 사랑하는 방도는 반드시 성의를 가지고 서로 신뢰한 뒤에야 민심이 스스로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적군만을 일삼고 백성의 원한과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군사가 아무리 많다 한들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제(老除)를 조사하면서 어린이들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원망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어린이를 군역에 충정한 것은 호패법 이전에 있었던 일이고 노제를 사문 조사한 것은 적군한 뒤에 있었던 일이니 정체(政體)로 헤아려 볼 때 다시 개혁하는 것은 타당치 않을 듯하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강에서 낙방한 유생들에 대해 혹자는 ‘단지 군포만을 거두게 하는 것 또한 권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고, 혹자는 ‘이와 같이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강하는 책을 비록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책을 가지고 시험하여 약간 문리가 있는 자는 입격시키도록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도태시키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도입니다.”
하였다. 조정호가 아뢰기를,
“그렇게 되면 강에서 낙방한 자는 적고 낙방하지 않은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북이 현격하게 다르니 삼남(三南)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한결같이 사목에 의해서 하라. 서북도는 여유를 두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홍명구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고관(考官)으로서 본도에 명령을 받았었는데 그곳에도 글을 해독하는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청천(淸川) 이남은 《대학》을 강하는 데서 낙방하는 자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들 열 사람이 나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호패를 정돈하는 일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다. 상하(上下)가 경영해 온 지 수년 만에 일이 이제 겨우 질서가 잡혀가고 있다. 각도의 어사들이 만일 심력(心力)을 다해 받들어 행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일은 잘못될 것이다. 어사 중 만일 사정에 끌려 국사를 생각하지 않는 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에 싫증을 내어 심력을 다하지 않는 자, 한갓 위엄만 숭상하고 원왕(冤枉)을 살피지 않는 자, 출척을 공정히 하지 아니하여 관사를 파괴하는 자, 주연(酒宴)에 흠뻑 빠져 열읍(列邑)에 폐해를 끼치는 자 등이 있다면 비단 일시적인 이의(吏議)를 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허물을 짊어지게 되어 영원히 다시는 조정의 대열에 서지 못하게 될 것이며 조금도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니 각각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 7년 기사(1629) 9월 6일(정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면서 국정에 대해 논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시강하였다. 시강관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삼한(三韓) 시대에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병적(兵籍)에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후에 걸쳐 난리를 치르는 통에 대장(大將)이 몇 만명의 군사도 거느리지 못하고 있으니 군대 없는 나라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군대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병(兵)과 농(農)을 구분한 뒤에야 용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군대의 수로 보건대 삼한 때에는 풍족하고 오늘날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삼한 때에는 전쟁을 일삼았기 때문에 한가롭게 놀고 먹는 장정이 없었던 반면, 지금은 문(文)에만 빠진 나머지 무(武)를 조롱하여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병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신계영(辛啓榮)에게 하문하기를,
“호남에는 무슨 병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호남 연해의 백성들은 어염(魚鹽)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데, 공가(公家)에서 무역하여 판매하면서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무척 그 일을 원망하며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없애 준다면 백성이 소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참찬관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무역하여 판매하는 등의 일은 서울부터 먼저 금하지 않는 한 외방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긴 하다. 그러나 군대를 일으켜야 할 무렵이니 모두 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강제로 금하지 않으면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편할 방도를 찾는다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윤지경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호남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건대 살인계(殺人契)가 조직되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송상인(宋象仁)이 적도들을 다스리려 하다가 선조의 봉분이 모욕당하는 변고를 빚었다고 하니, 상께서 방백에게 하유하시어 추적해 체포한 뒤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위한이 아뢰기를,
“송상인이 고을에 부임한 뒤 항통(缿筩)법을 써서 10여 인을 잡아 죽이자 도당이 이 소문을 듣고 뿔뿔이 달아나면서 상인의 선조 묘를 파헤쳤다고 합니다. 토속이 이토록까지 패악스럽게 되었으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인조 7년 기사(1629) 9월 19일(경자)
자정전에서 소대하면서 일식의 변고와 언관에 대해 논하다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모두 일식(日食)을 큰 변고로 여겼는데 후세에는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연유에서인가?”
하니, 시독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지금은 일식이 있어도 그저 형식으로만 대처할 뿐 실제로 재난을 당해 삼가는 자세가 없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관사(官師)가 서로 잘못을 바로잡았는데, 후세에는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들을 수 없는가?”
하니 검토관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이는 치세(治世) 때에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흥국(興國)의 왕은 간신(諫臣)을 상준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언로(言路)를 넓혀 준 뒤에야 어느 정도 서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고 김남중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로 말하건대 대관(臺官)이 말씀드려도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는데, 더구나 백관이 서로 바로잡아 준다 한들 어찌 기꺼이 듣고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인조 7년 기사(1629) 9월 19일(경자)
이소한, 신계영 등을 파직하고 김광현을 추고하다
이소한(李昭漢)ㆍ신계영(辛啓榮) 등을 파직하고 김광현(金光炫)을 추고하였는데, 시정기(時政記)를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 7년 기사(1629) 9월 21일(임인)
자정전에서 위엄에 대해 논하다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야 위엄을 위주로 하니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군대가 아니라도 위엄을 위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시독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관대함과 위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릴 때에는 오로지 위엄을 위주로 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촉을 다스릴 수 없었던가?”
하니, 김남중이 아뢰기를,
“한(漢)나라 말기에 정사가 형편없이 무너졌기 때문에 시대 상황에 맞춰 방편을 쓴 것입니다. 제갈량이 어찌 처음부터 위엄으로 다스리겠다고 마음 먹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仁)과 명(明)과 무(武)를 병칭(並稱)하는데 그중에서도 명이 가장 어렵다.
어떤 방법을 취해야 명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니, 김남중이 아뢰기를,
“제왕의 명(明)을 말할 때는 세세히 살피는 것을 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임금이 진정 제대로만 수신(修身)하고 정심(正心)하면 일을 처리할 때에 저절로 공명(公明)해질 것이니, 마치 거울에 미추(美醜)가 저절로 구별되듯 하는 것이 바로 명입니다.”
하였다.
인조 8년 경오(1630) 8월 19일(병인)
주강에 《서전》을 강하면서 지사 이귀가 붕당을 타파하는 것보다는 시비분별이 우선임을 이르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사(知事)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께서 붕당을 타파할 생각을 항상 하시면서도 먼저 색목(色目)을 가지고 사람을 의심하십니다. 그러므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말도 상대를 배격하는 의논인가 의심하시고 이로 인하여 죄를 주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조정이 화협(和恊)하지 못하여 일을 당해도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전하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다면 한 사람의 어진 신하를 얻어 그에게 중임을 맡겨 어진이를 등용하고 악한 이를 물리치는 것을 주관하게 한다면 화협해질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귀가 다시 나아가 아뢰기를,
“목릉(穆陵)의 지문(誌文)을 이제 개찬(改撰)해야 하니 지금 추숭례(追崇禮)를 의정(議定)하여 첨입(添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차자를 꺼내어 올리니, 상이 다 보고 나서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이 일 때문에 20여 번에 걸쳐 차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하는 자들은 모두 《예기(禮記)》가 한나라 때 학자들이 찬술한 것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기》 이외에 다시 어느 경서(經書)를 전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 어찌 관직의 고하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연소배들이 감히 신은 탄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탄핵하여 위협을 가하고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조신(朝臣)은 이런 의논이 제기되면 모두들 똑같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각기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옥당에서 입시한 사람들도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여 보라.”
하였다. 최유해(崔有海)ㆍ신계영(辛啓榮)이 명백하게 따져서 대답하지 못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진실로 부모처럼 사랑한다면 주야로 사실을 고증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해야 하고, 만일 모른다면 물러가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옥당은 시의(時議)에 영합할 줄만 알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제신(諸臣)들이 모두 전거할 곳이 없다 하고 더구나 불가하다고 쟁론하는 것은 필시 군상(君上)에게 조금도 공덕이 없으므로 부모를 추숭할 수 없다고 여긴 때문일 것이다. 덕종(德宗)은 성묘(成廟)에 대해 숙부(叔父)인데도 추존하였고 중국 조정에서도 사친(私親)을 추존한 일이 있었다. 근고의 전례를 헤아려 보아도 이미 이와 같고 역대(歷代) 이래에도 행한 경우가 있는데,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비록 곧바로 지척(指斥)하지는 못하지만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정대붕(鄭大鵬)의 경우 예조가 이미 분노하여 반대하였고 양사가 서로 소장을 올려 죄를 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구언(求言)하는 날 말이 지나치더라도 죄주지 않겠다고 이미 전교하였으니 죄를 줄 만한 말일지라도 버려두어야 되는데, 더구나 말한 것이 조금도 죄줄 만한 것이 없는데이겠는가. 만약 어린 임금이라면 혹 기미를 예방해야 할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덕이 적고 사리에 어둡다고 하더라도 결정하여 행하려고 한다면 어찌 정대붕의 의논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일개 정대붕의 말에 미혹되어 결정하겠는가. 그런데 논하는 자들이 기필코 정대붕에게 죄를 준 뒤에야 그만 두려 하니, 또한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는데, 이날 양사가 정대붕을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논계를 중지하였다. 경연의 신하들이 처음 상의 분부를 듣고서는 서로 돌아보며 아연실색했었는데 정계(停啓)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다행스럽게 여겼다.
인조 8년 경오(1630) 8월 29일(병자)
주강에 《서전》을 강한 후 신하들에게 힘써 간쟁할 것을 이르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상이 이르기를,
“정관(貞觀) 때 태종(太宗)이 군신(群臣)들과 이야기하면서 누차 수 양제(隋煬帝) 때의 일을 거론했는데 이는 눈귀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경계시키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니 혼조(昏朝) 때의 일을 귀감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조 때의 신하들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벼슬자리를 잃을까만 걱정했기 때문에 마침내 복패(覆敗)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니, 오늘날 상하 모두가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임금의 잘못을 보면 반드시 극력 간쟁하여 임금 사랑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끊고서 이런 자세로 시종 면려한다면 어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날 박승종(朴承宗)은 정승의 지위에 있었어도 스스로 ‘이 일은 상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니 말해도 무익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신하가 진실로 임금의 잘못을 보았으면 어찌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핑계대고서 말하지 않으려 해서야 되겠는가. 박승종이 아첨하면서 구차스럽게 용납되기를 바란 것이 이러했으므로 결국은 국가가 복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자신도 홀로 온전할 수 없었으니,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하니, 검토관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이제 성교를 받들진대 이는 실로 국가의 복입니다.”
하고, 참찬관 강석기는 아뢰기를,
“군신 상하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법받아야 할 것이 있으면 법받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으면 경계하면서 이로써 서로 면려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제 당 태종이 간언을 잘 따라 주어 훌륭한 정치를 이루었다는 분부를 받드니, 이는 성명께서 서책을 읽으시고 착실히 체득하여 안 데가 있으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자기 임금에게 간할 뿐만이 아니라 너 자신도 남의 간언을 따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인조 8년 경오(1630) 11월 24일(기해)
천장을 상소한 심명세에 대한 처벌 논의
정언 이행건(李行健)이 아뢰기를,
“동료들의 의견은 천릉의 연유로 당초 발언한 사람을 죄주고자 하였으나 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구릉(舊陵)이 무너지려 한다는 우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말하면서 모두 의심쩍은 마음이 있었으나 감히 발설하지 못했었습니다. 지난날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이를 상소하였으나 이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는 뜻에 불과합니다. 조정에서도 의심쩍은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술관(術官)에게 의논하여 가부를 따져서 천릉의 계획을 정하였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언한 것은 명세요, 채용한 것은 조정입니다. 이제 물이 없었다는 한 조목을 가지고 발언한 사람을 죄주려 하니, 법을 너무 각박하게 따지려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만약 명세의 상소가 어리석고 망령스러워 믿을 것이 못 되었다면 당초에 배척하고 죄를 주어야 옳지, 어찌 그 말을 채용한 후 도리어 그 사람에게 죄를 줄 수야 있겠습니까. 신의 뜻은 이와 같으나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체척(遞斥)하여 주소서.”
하였고,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사간 김반(金槃), 헌납 이경의(李景義), 정언 민광훈(閔光勳)이 아뢰기를,
“산릉을 옮기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한데, 심명세는 술가(術家)의 말을 그릇 믿고 앞서서 허망한 소를 올렸습니다. 그 소는 본디 채용할 것이 못 되었지만, 그 중에 땅 속에 물기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 의논도 감히 그렇지 않다고 기필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다 마침내 막대한 역사를 일으켰으나 천장(遷葬)할 때 보니 바닥까지 건조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의 주모자가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신들이 의논하여 논계하려 하니 정언 이행건이 이론(異論)을 제기하였습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체척하여 주소서.”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處置)하여 행건은 체차하고 백창 등은 출사케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행건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으니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행건과 백창 등이 모두 재차 인피하니, 이에 대사헌 조익(趙翼), 집의 조방직(趙邦直), 장령 이유달(李惟達), 지평 심연(沈演)ㆍ정지우(鄭之羽)는 자기들의 처치가 온당치 못하였다 하여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양사 모두 체차할 혐의가 없으니 아울러 출사하게 하고, 이행건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행건은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는 또 함께 출사함을 혐의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행건이 직에 나간 후 혼자 아뢰기를,
“천하의 일은 반드시 양 쪽이 다 옳은 법은 없습니다. 신의 말이 옳으면 양사의 많은 관리의 의논은 필시 그를 것이고, 양사의 많은 관리의 의논이 옳으면 신의 말은 필시 그를 것입니다. 옥당이 신의 직을 체차토록 아뢰었으니 이는 옥당이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긴 것이고, 전하께서 체차하지 말라고 특명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신의 말을 그르다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양사의 많은 관리가 반드시 신과 구차히 같지 않으려 하고, 신 또한 반드시 양사의 많은 관리와 구차히 같지 않으려는 것이어서 형세가 결코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대간이란 인주(人主)의 이목으로 한 세상의 공론을 주도하니, 무릇 논할 것이 있으면 그 경중과 시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세를 논죄하는 이 일은 당초에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한 이상 대사가 이미 정해진 뒤에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니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단지 발언한 사람에게 죄를 씌우려고만 하지 허물이 조정에 돌아감은 모르고 있으니 그 논의가 구차하고 사리의 경중을 모름이 심합니다. 대사헌 조익, 집의 조방직, 장령 이유달ㆍ신계영(辛啓榮), 지평 심연ㆍ정지우, 대사간 정백창, 사간 김반, 헌납 이경의, 정언 민광훈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9년 신미(1631) 2월 20일(갑자)
홍서봉ㆍ정경세ㆍ장유ㆍ김상헌ㆍ이목ㆍ신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서봉(洪瑞鳳)을 좌빈객으로, 정경세(鄭經世)를 우빈객으로, 장유(張維)를 좌부빈객으로, 김상헌(金尙憲)을 우부빈객으로, 이목(李楘)을 부제학으로, 신계영(辛啓榮)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조흥빈(趙興賓)을 옥천 현감(沃川縣監)으로 삼았는데, 이는 고변한 공으로 상을 내린 것이다. 양사가, 흥빈에게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본읍에 임명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 고을 이민(吏民)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간쟁하자 이에 다른 고을로 바꿔 임명하였다.
인조 9년 신미(1631) 3월 21일(을미)
참찬관 이목이 지난번 이귀가 사서를 올린 것을 논하다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사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한재(旱災)가 너무 혹심하니 눈 앞에 닥친 급한 일로 이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실질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 경연에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가슴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언(求言)을 해도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이 일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구언을 하고 나서도 위에서 실제로 채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진언하는 것을 무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참찬관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국법을 일단 세운 이상에는 위배하면 안 됩니다. 모든 소장과 차자를 반드시 정원을 거치게 한 그 의도가 어찌 범연한 것이었겠습니까. 지난번 이귀(李貴)가 사서(私書)를 가지고 와 탑전(榻前)에서 올렸는데,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반드시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그 글을 정원에 내려 참견(參見)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목이 아뢰기를,
“전일 훈신(勳臣)들을 인견하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승지와 사관이 입시를 하지 않았으니, 무엇을 근거로 이 일을 사책(史冊)에 기록하겠습니까. 정원이 입시를 청하지 않은 것도 너무나 해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서도 불시에 불러 인견할 때에는 승지와 사관이 또한 참석하지 않았다.”
하였다. 검토관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인군의 거조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록해야 하니, 그 사체가 매우 엄합니다. 조종조에 승지와 사관이 참여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본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한재가 혹심한 때를 당하여 대신을 인견하면서 술을 내리기까지 한 것은 너무나 미안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였다.
인조 9년 신미(1631) 4월 24일(정묘)
장유ㆍ한필원ㆍ김세렴ㆍ신계영ㆍ이경증ㆍ유성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장유(張維)를 예조 판서로, 한필원(韓必遠)을 사간으로, 김세렴(金世濂)을 부응교로, 신계영(辛啓榮)을 교리로, 이경증(李景曾)을 부교리로, 유성증(兪省曾)을 수찬으로 삼았다.
인조 9년 신미(1631) 6월 29일(신미)
가도의 차인 유격 백계안을 접견하다
상이 가도의 차인 유격(遊擊) 백계안(白繼安)을 접견하였다. 처음에 가도에서 있었던 유흥치(劉興治)의 난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교리 신계영(辛啓榮)을 보내 난에 죽은 장사들은 조제(吊祭)하고, 겸하여 임시 수장(守將) 장도(張燾)ㆍ심세괴(沈世魁) 등에게 예를 올렸다. 황룡(黃龍)이 도독으로 와서 ‘가도의 무리들은 철수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유격 백계안을 차견하여 식량을 요청한 것이다. 상이 불러 보니, 계안이 말하기를,
“도중(島中)의 생령들이 대왕을 우러러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데, 위문관을 보내 죽은 자를 조상하여 유명(幽明)을 감격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총진(揔鎭)이 몸소 사례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나를 시켜 대신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 호병들이 아직도 국경에 있어 깊이 들어올 걱정이 없지 않으니, 밤낮으로 도독이 구제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계안이 말하기를,
“총진도 귀국이 배를 빌려주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적병이 만약 다시 침범하면 총진도 정병을 거느리고 협공하여 견제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의 뜻은 섬 안에 있는 무리들을 철수시키고자 하는데, 황 총진은 ‘수만은 군중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철수할 수는 없다.’고 여겨서 그대로 머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예물을 주라고 명하였다. 계안이 사례하며 절하고 물러갔다.
인조 9년 신미(1631) 8월 9일(경술)
홍문관 수찬 신계영을 형조 정랑으로 삼다
홍문관 수찬 신계영(辛啓榮)을 형조 정랑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이 ‘옥당에게 싸움에 관한 송사를 청리(聽理)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자 양사가 여러 차례 도로 거두기를 요청하니 상이 억지로 따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형조의 낭관에 결원이 생기자 상이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인조 9년 신미(1631) 9월 10일(신사)
삼남에 어사를 파견해 무재를 시험하다
삼남(三南)에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경오년 봄에 경상 좌수영 우후(虞候) 이응징(李應徵)이 상소하여, 남쪽에 근신(近臣)을 특별히 파견하여 무재를 시험하고 그 중에서 더욱 뛰어난 자를 골라 변장(邊將)을 제수하거나 재주에 따라 거두어 쓰기를 청하니, 병조가 회계하기를,
“본조 역시 재주를 품은 채 헛되이 늙어가는 탄식이 있을까 걱정하여 이미 각도로 하여금 무재가 있는 사람 각 세 명씩을 시취(試取)하여 계문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지금 이 상소를 보니 과연 크게 격려하는 일에 부합됩니다. 선조조(宣祖朝)의 예에 따라 근신을 특별히 파견하여 재주를 시험하고 논상케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서 윤계(尹棨)ㆍ심연(沈演)ㆍ신계영(辛啓榮)을 공청(公淸)ㆍ전라ㆍ경상 등 도에 파견하여 무재를 시험해 보고하고 차등 있게 논상토록 하였다.
인조 10년 임신(1632) 2월 12일(경진)
추숭 전례를 이유로 간원, 헌부가 인피하자 홍문관에서 윤계 등이 비판하다
장령 신민일(申敏一)이 인피하기를,
“이번의 이 전례(典禮)는 바로 막중한 거조입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物議)가 들끓어 대각(臺閣)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니, 결코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척(遞斥)하소서.”
하고, 대사간 김광현(金光炫), 정언 심연(沈演), 지평 윤효영(尹孝永),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김남중(金南重) 등도 역시 이로써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조빈(趙贇)이 아뢰기를,
“어제 추숭을 논계한 일로써 동료 및 간원과 함께 모이고자 하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상신(相臣)들이 헌의한 것을 보아가면서 논의해도 늦지 않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재상은 가하다고 말해도 간관은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니, 일이 참으로 논할 만한 것이라면 논하면 되지 어찌 반드시 대신의 의논을 기다리겠는가?’ 하였으나 동료들은 오히려 전의 말을 고집하므로 신이 자신의 소견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신민일이 인피하는 말을 보니 물의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체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이번 이 추숭하는 일은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르고 경솔히 예경(禮經)을 버려가며 사은(私恩)을 펴고자 한 것으로 종통(宗統)을 간범하였으니 임금의 잘못된 거조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전폐(殿陛)에 서서 시비를 다투는 자는 마땅히 일을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임금을 합당한 도리로 인도하여야 할텐데 오히려 늑장을 부리며 기다리자고 핑계하였으니, 간관의 직책이 어찌 진실로 그런 것이겠습니까. 모두 구차함을 면치 못하였고, 이미 소견이 있었는데도 굳게 지키지 못하였으니 역시 연약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는 별다른 잘못이 없으니 체직시키지 말라. 그 가운데 신민일은 물의를 가탁(假托)하여 소란스런 단서를 일으킨 죄가 있으니 체차하라.”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양사는 별다른 잘못이 없는데 부교리 윤계(尹棨) 등은 위엄을 세우고자 하여 사리를 돌보지 않고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라.”
하였는데, 이날 교리 윤계, 수찬 신계영(辛啓榮)이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서로 의논하여 아울러 출사하기를 청하는 차자의 초(草)를 이미 완성해 놓았었는데, 수찬 이명웅(李命雄)이 밖으로부터 와 논의가 매우 준엄하여 굳이 체차를 청하였다가 드디어 견책을 입은 것이다.
인조 10년 임신(1632) 6월 23일(기축)
추존을 반대한 윤계 등을 용서하다
전에 윤계(尹棨)ㆍ신계영(辛啓榮)ㆍ이명웅(李命雄)이 추존하려 할 때에 차자를 올려 그것이 예가 아님을 강력하게 아뢰었다. 그러자 상이 대노하여 성문 밖으로 방출하였는데, 이번에 심리하라는 하교에 따라 금부가 죄를 받은 자를 기록하여 아뢰자, 상이 윤계 등을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인조 11년 계유(1633) 10월 29일(무자)
접반사 신계영이 부총 정룡의 글을 아뢰다
부총 정룡(程龍)의 접반사 신계영(辛啓榮)이 치계하였다.
“신이 가산(嘉山)에 도착하니 부총이 신을 만나 보고 그의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나서 한 통의 글을 내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지니고 왔던 자문(咨文)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우리 조정에서 섬 안의 사기가 그전과 다르다는 것을 듣고는 나를 파견하여 비밀리에 탐사하게 하였고, 또 그대의 나라로 하여금 노적을 거절하여 배와 군량을 절대 빌려 주지 말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여순의 변란으로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였는데, 금년 겨울에는 오로지 귀국의 구제만을 믿고 있으니, 원컨대 연해변에 있는 각 고을로 하여금 양곡을 내다 팔게 하여 얼음이 얼기 전에 섬 안으로 군량미를 운반해 주었으면 한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제가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국왕에게 아뢰겠다.’ 했더니, 부총이 자못 불쾌한 기색이 있었습니다.”
인조 11년 계유(1633) 11월 6일(갑오)
접반사 신계영이 공유덕ㆍ경중명의 일에 대한 부총 정룡의 말을 보고하다
접반사 신계영(辛啓榮)이 치계하였다.
“부총 정룡이 파주(坡州)에 도착하였을 적에 신을 보자고 요청하더니 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병부의 차부(箚付)를 내보이며 손으로 ‘노역(奴逆)을 거절하라.’ 한 조목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나에게 소관된 것 중에서 가장 큰 일이다.’ 하였습니다. 차부의 내용 중에 ‘조선국이 노적에게 핍박을 당하여 위협이 더욱 심했는데도 우리를 배반하지 않은 것은 중국 조정에서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적이 배와 군량을 빌려 달라 하자 조선이 반은 미루고 반은 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여순을 빼앗기고 관군(官軍)이 좌절당하였으니, 조선이 그들의 뜻에 맞추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배를 모두 동원해 공유덕(孔有德)ㆍ경중명(耿仲明)에게 주어 등진(登津)으로 가게 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신이 이르기를 ‘소국이 중국 조정에 대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부자간의 은정이 있다는 것을 만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추로(醜虜)에게 핍박당하여 비록 백성을 살리기 위한 계책에서 유대 관계를 면치 못하고 있으나 벌써 사유를 갖추어 주달하였다. 소국의 군신들이 매양 병력이 약하여 의리를 내걸고 일어나 적을 무찌르지 못하고 이 노적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여순을 빼앗겼다고 하여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설령 나라가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하니, 정 부총이 말하기를 ‘부총 심세괴는 글을 모르는 무인인지라 지금 섬 안이 몹시 굶주려 대중의 감정이 근심 중에 있으니 만일 제때에 구제해 주지 않는다면 뜻밖의 환란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접반사가 이 사실을 빨리 위에 알려서 그들의 위급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조 12년 갑술(1634) 2월 20일(정축)
부총 정룡이 비단을 쌀로 교환하고자 하니 본도 감사 등이 편리한 대로 하게 하다
접반사 신계영(辛啓榮)이 치계하기를,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행리(行李)에 지니고 있는 비단으로 대소미(大小米) 50석과 교환하여 바다를 건너가는 데 노자로 쓰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값을 받고 양곡을 바꾸어 주는 것은 미안한 일인 듯합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일일이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니, 본도의 감사와 관향사가 편리한 대로 선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12년 갑술(1634) 5월 29일(갑인)
신계영ㆍ구굉ㆍ장현광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계영(辛啓榮)을 동부 승지로, 구굉(具宏)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장현광(張顯光)을 공조 판서로 삼아 가교(駕轎)를 타고 올라오도록 명하고 각도로 하여금 말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인조 12년 갑술(1634) 8월 2일(을묘)
정원에서 강석기 등을 내쫓는 일이 부당함을 아뢰니, 색승지를 파직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보건대, 전 대사헌 강석기와 전 대사간 조종호 등을 모두 삭탈 관작하여 내쫓으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경악하여 무슨 말을 해야 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양사의 논이야말로 한 나라의 공론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마음은 정성을 다하여 바로잡아 기필코 우리 임금을 과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만 불경(不敬)이라는 죄안(罪案)을 만들어 이렇게 극단적으로 갑자기 위엄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의 시대에 이렇듯 전에 없던 처사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들은 차라리 명령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을지언정 전하로 하여금 이런 잘못된 처사를 행하여 성덕에 하자를 초래하게 하고는 싶지 않습니다.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가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도구로서 사람마다 제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군상을 무시하고 대간을 구해 주느라 이미 내린 명을 즉시 봉행하지 않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이런 습관을 징계하지 않으면 임금은 위에서 손을 묶어 놓고 있고 붕당들이 아래에서 권세를 마음대로 흔들어 마침내는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것이다. 색승지 【색승지는 김남중(金南重)이다. 이때 승지는 이경헌(李景憲)ㆍ이덕수(李德洙)ㆍ신계영(辛啓榮)이었고, 도승지 김수현(金壽賢)은 아직 숙배하지 않았다.】 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형편없는 몸으로 후설(喉舌)의 직임을 맡고 있기에 군상의 잘못된 처사를 목도하고 보잘것없는 생각이나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벽력같은 위엄을 누그러뜨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다시 엄한 분부를 내려 ‘임금은 무시하고 대간을 구해 주려 한다.’고 하시니, 신하가 이런 죄를 짊어지고서 어떻게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며 살겠습니까. 이는 색승지 혼자서 한 일이 아닌데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는 명이 유독 해방(該房)에만 내렸습니다. 신들이 결코 혼자서만 모면할 수 없으니, 똑같이 벌을 내려 신하로서 불충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고 답하였다.
인조 12년 갑술(1634) 8월 2일(을묘)
강석기 등에 대한 삭출 전지를 정원에서 올리지 않자, 노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강석기 등을 삭출(削黜)하라는 전지(傳旨)를 여태까지 써서 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시종 명을 어기겠다면 그 곡절을 속히 써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강석기 등을 삭출하라는 전지를 봉입(捧入)하지 못하는 뜻은 이미 모두 진달하였기 때문에 새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윤명은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감히 받들지 못하는 뜻도 전계(前啓)에서 아뢴 바와 다름없습니다.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만번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그대들의 처사는 무리하기 짝이 없다. 속히 써서 들이라.”
하였는데, 정원이 여전히 명을 받들지 않자, 상이 노하여 하교하기를,
“전부터 미안한 일이 있으면 승지가 간혹 자신의 생각을 진달하는 때는 있었지만, 시종 거역하면서 거행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모든 일을 임의대로 따르거나 말거나 한다면 한 승지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할텐데 하필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고 대신이나 대관을 둘 까닭이 있겠는가. 지금 전지를 받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전고에 없던 변고이다. 색승지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당시 김남중(金南重)이 파직된 뒤로 우승지 이경헌(李景憲), 우부승지 이덕수(李德洙), 동부승지 신계영(辛啓榮)이 서로 의논하여 아뢰었는데,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리자 모두 금부에서 대죄하였으므로 정원이 텅 비었다. 사알(司謁)이 이 일을 아뢰니, 당시 아직 숙배하지 않았던 도승지 김수현(金壽賢)을 마침내 명초하였다. 김수현이 명을 받들고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경(二更)의 밤중이었다. 김수현이 아뢰기를,
“양사의 많은 관원을 삭출하라는 명과 윤명은을 멀리 유배시키라는 분부와 색승지를 잡아들여 추문하라는 전지가 모두 하루 사이에 내려져 모든 신료들이 경악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정원이 텅 빈 채 신 혼자만 있어 처치할 때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사의 관원이 입이 닳도록 극력 간쟁하고 후설(喉舌)의 신하가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군부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시에 모두 죄책을 받았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처사일 뿐 아니라 나아가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진노를 거두시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 명을 어긴 승지는 부도(不道)의 죄를 저질렀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5일(을해)
호조 참의 신계영을 강도에 급파하다
상이 호조 참의 신계영(辛啓榮)을 불러다 보고 일렀다.
“강도(江都)의 창곡(倉穀)을 급히 수습해야 하니, 그대가 속히 가도록 하라. 그리고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바야흐로 배를 수선하러 서쪽으로 갔으니, 연해(沿海)의 제도(諸島)가 약탈당할 염려가 없지 않다. 원손(元孫)이 지금 교동(喬桐)에 있고 백성들 중에도 섬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많으니, 이 뜻을 아울러 유시하여 즉시 옮겨 피하도록 하라.”
인조 15년 정축(1637) 윤 4월 28일(병인)
속환사 신계영이 백성의 속환에 비용을 더 줄 것을 청하여 윤허받다
속환사(贖還使) 신계영(辛啓榮)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소견하였다. 계영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관향은(管餉銀) 2천 5백 냥으로 족속이 없는 백성을 속환하여 오라고 하였는데, 어제 비국의 계사를 보았더니 호종 군사의 처자로서 포로가 된 자들을 속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수효가 아마도 7백 명은 될 듯한데 가지고 가는 것은 매우 적으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적당하게 첨가하여 주겠다. 그리고 이미 속환한 후에도 반드시 양식을 잇대어 줄 방법이 있는 다음에야 살릴 수 있을 것이니, 이 점도 대신과 의논해 정하고서 출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11일(무신)
신계영을 속환사로 삼아 심양에 보내다
신계영(辛啓榮)을 속환사(贖還使)로 삼아 속(贖)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거느리고 심양(瀋陽)에 가게 하였다.
인조 15년 정축(1637) 8월 8일(계묘)
신계영ㆍ권심ㆍ심대부ㆍ임담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계영(辛啓榮)을 좌부승지로, 권심(權淰)을 집의로, 심대부(沈大孚)를 교리로, 임담(林墰)을 수찬으로 삼았다.
인조 15년 정축(1637) 8월 23일(무오)
권도ㆍ권심ㆍ심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집의 권도(權濤)를 사인으로 옮겨 제수하고, 권심(權淰)을 집의로, 신계영(辛啓榮)을 행 좌부승지로, 윤이지(尹履之)를 경기 감사로, 신경류(申景柳)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인조 15년 정축(1637) 9월 1일(병인)
신계영을 강도 유수로 삼다
신계영(辛啓榮)을 강도 유수(江都留守)로 삼았다.
인조 16년 무인(1638) 1월 24일(무자)
차왜가 말한 7조목에 대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의논하다
상이 차왜(差倭)가 말한 7조목의 일을 가지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홍주(李弘胄)에게 이르기를,
“경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아뢰기를,
“이번에 와서 청한 것이 과연 이상한 듯합니다만, 숙배하는 예에 있어서 단상에서 행하고자 하는 것은 대단히 따르기 어려운 청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자는 도주(島主)의 차왜인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예조 판서 한여직(韓汝溭)이 아뢰기를,
“저들은 우리 나라 사신을 예조의 차관으로 생각한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조의 차관이 바로 국사(國使)이다.”
하였다. 인하여 임광(任絖)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일본에 들어가면 어느 곳에서 절하는가?”
하니,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신은 관백이 앉아 있는 상단에서 절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숙배하는 예는 직책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니, 직책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억지로 시킬 필요가 없다. 이 뜻으로 언급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하니, 홍주가 아뢰기를,
“차왜의 뜻은 숙배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래밭에서 거행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길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의 규정을 바꿀 수 없다.”
하였다. 구굉(具宏)이 아뢰기를,
“도주가 조흥(調興)에게 모함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으로 발명할 터전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여이징(呂爾徵)은 아뢰기를,
“도주가 조흥에게 모함을 받아 이런 청이 이번에 있게 되었으니, 비록 준허(准許)할 수는 없더라도 한두 가지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7조목 모두 우롱하는 뜻이다. 이미 우리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비록 도주의 청을 준허하더라도 어찌 전쟁을 늦출 수 있겠는가. 우리가 취할 방법을 다하여 저들의 동정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구굉이 아뢰기를,
“우리가 취할 방도를 다하지 못하니 답답합니다.”
하고, 병판 이시백이 아뢰기를,
“옛날 뽕나무를 다투다 흔단을 낸 일이 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구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더라도 청나라 사람들이 와서 구원해 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가 왜구의 소유가 되면 강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니, 청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후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반드시 힘을 다해 구원할 것이다. 임진년 난리 때 명나라에서 와 구원해 주었던 것이 어찌 단지 우리 나라만을 위해서였겠는가. 그 형세가 그런 것이다. 지난해 신사(信使)가 돌아가자마자 순검사를 파견해 주사(舟師)를 신칙하였으니, 비록 실제적으로 거행한 일은 없었지만, 저들이 혹시 그들의 정형을 탐색하고 방비를 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등등의 일로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하였다. 홍주가 아뢰기를,
“‘봉진가’ 석 자는, 도주가 관백이 혹 그것을 보고 조선에 신복(臣服)한다고 여길까 염려하여 삭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시백이 아뢰기를,
“비록 삭제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값을 주었는데 감히 삭제하기를 청하니, 매우 터무니 없다.”
하였다. 부제학 이경석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호란(胡亂)을 치루자마자 또 섬 오랑캐의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으니, 반드시 감사는 어느 곳을 지키고 병사는 어느 곳을 지키도록 미리 구획을 요리한 뒤에야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의 소재지는 비록 고쳐 정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빨리 수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홍주는 아뢰기를,
“그곳의 지도를 보고 김신국의 말을 들으니, 고쳐 정하는 것이 어려워 예전대로 두느니만 못합니다. 유수 신계영(辛啓榮)은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김신국은 본디 재주와 국량이 있으니, 강도의 일을 한결같이 그에게 맡기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인조 16년 무인(1638) 2월 16일(경술)
김신국을 강도의 유수로 삼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강도를 경리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홍주(李弘胄)가 김신국(金藎國)이 재주와 지혜가 남음이 있어 강도의 일을 맡길 만하다고 힘껏 진달하여 이미 그를 유수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비국이 또 전 유수 신계영(辛啓榮)이 재주있는 젊은 사람이니 유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신국이 상차하기를,
“상처를 어루만지고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전날의 토대를 회복하는 것도 한가로운 사무가 아니니, 신의 직명을 체차하고 전임자에게 도로 제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국이 아뢴 것은 닭을 잡는 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느냐는 뜻이지, 경을 불가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가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 16년 무인(1638) 4월 8일(신축)
이홍주와 최명길을 면대하여 남한 산성의 군량에 대해 의논하다
이홍주와 최명길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홍주가 이성구(李聖求)를 도체찰사로 삼기를 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홍주가 아뢰기를,
“강도(江都)는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수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상(水上)의 세미(稅米) 6, 7천 석을 남한 산성으로 수송할 군사가 없습니다. 만약 배로 강도에다 운송해 들인다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남한 산성을 버리고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하자, 홍주가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는 군량을 일찍이 이미 수송해 들였습니다.”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중외의 인정이 모두 강도를 지킬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곳이 천험의 요새로 자위(自衛)하기에 충분하고, 또 배가 서로 통할 수 있어 외로운 섬이 쉽게 포위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변란이 있을 경우 사람들은 반드시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고 강도로 들어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변란이 일어난 뒤로 인심이 착하지 못한 것이 더욱 심합니다. 심지어 중국에서 일본에 유시하는 듯한 거짓 칙서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여 이 때문에 중외가 소란하니,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그 말의 근원지를 추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사해 내기가 용이하지 않을 듯하다.”
하자, 명길이 아뢰기를,
“이는 대체로 호서(湖西)의 선비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신계영(辛啓榮)이 그 말을 전한 세 사람을 알고 있으니, 조사해 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영남에 정인홍(鄭仁弘)의 남은 무리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처음에 남한 산성에서 나온 거조를 듣고서 소를 잡아 놓고 술을 마시면서 서로 축하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 악을 고치고 않고 조정을 원망하고 비방하니, 남방에 변란이 있을 경우 적에게 붙을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이들은 악역의 무리들이니 끝까지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역적의 자손으로 나이가 찬 자는 마땅히 죄에 따라 죄주어야 하는데, 금부에서 살피지 않아 혹 성 안에 살고 있는 자도 있으니, 속히 영을 내려 법에 따라 처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명길이 아뢰기를,
“전일 상께서 원수로 합당한 사람을 물으실 때, 신의 소견으로는 이시백(李時白)이 장사들의 마음을 자못 얻고 있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시위하는 것이 허술하고 또한 병조 판서도 적임자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시백이 과연 재략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됨이 근실하고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하니 이것은 취할 만한 점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시양(金時讓)은 재주가 쓸 만한데 지금 병으로 폐인이 되었고, 장유(張維)는 어진 재상이었는데 끝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죽은 것은 나라의 불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홍주에게 이르기를,
“체찰사의 임무를 경이 어찌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은 본래 재주와 지략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나이가 80이 다 되어 근력이 점점 다해가니, 어떻게 이 중임을 감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찰의 임무는 장수들이 병마 사이를 치달리는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감당하기 어렵기까지야 하겠는가.”
하니, 홍주가 아뢰기를,
“신이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공사간에 낭패를 당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인조 16년 무인(1638) 7월 26일(정해)
헌부가 부빈객 신계영, 유사 당상의 추고와 파직을 계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공정함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대소 신료들은 다만 자기 몸 아낄 줄만 알고 국가의 일이 위급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험하나 순탄하나 두 마음을 먹지 않는 의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재상들이 청나라에 가는 것을 사지(死地)라 여겨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부빈객(副賓客) 신계영(辛啓榮)은 비록 무릎병이 있으나 새로 임명됨을 사은 숙배한 뒤에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았고, 비국도 따라서 허락하였으니,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추고하고 신계영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신계영은 추고하라.”
하였다.
인조 17년 기묘(1639) 3월 7일(갑자)
좌의정 신경진이 대군을 모실 재신을 보낼 것을 청하다
이에 앞서 좌의정 신경진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세자는 지금 곧 나오게 되고 대군(大君)만 홀로 머물러 있게 되니, 모실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재신(宰臣) 한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이 오랫동안 회계하지 않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저번에 좌상의 계사로 인하여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전혀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그 의도를 알지 못하겠다. 대군은 다른 나라의 사람이 아니니, 영의정과 우의정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재신 중에 적합한 사람을 가려 보내라.”
하였다. 영상 최명길, 우상 심열이 빈청에 나아가서 대죄하였다. 이조에서 이행건(李行健)을 뽑아 아뢰니, 상이 고쳐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변삼근(卞三近)을 뽑아 아뢰니, 부빈객(副賓客) 신계영(辛啓榮)이 조리하여 들어가도록 명하였다.
인조 17년 기묘(1639) 3월 7일(갑자)
좌의정 신경진이 대군을 모실 재신을 보낼 것을 청하다
이에 앞서 좌의정 신경진이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세자는 지금 곧 나오게 되고 대군(大君)만 홀로 머물러 있게 되니, 모실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재신(宰臣) 한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이 오랫동안 회계하지 않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저번에 좌상의 계사로 인하여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전혀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그 의도를 알지 못하겠다. 대군은 다른 나라의 사람이 아니니, 영의정과 우의정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재신 중에 적합한 사람을 가려 보내라.”
하였다. 영상 최명길, 우상 심열이 빈청에 나아가서 대죄하였다. 이조에서 이행건(李行健)을 뽑아 아뢰니, 상이 고쳐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변삼근(卞三近)을 뽑아 아뢰니, 부빈객(副賓客) 신계영(辛啓榮)이 조리하여 들어가도록 명하였다.
인조 17년 기묘(1639) 11월 27일(경진)
김세렴ㆍ신계영ㆍ이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세렴을 이조 참의로, 신계영(辛啓榮)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빈(李彬)을 정언으로 삼았다.
인조 18년 경진(1640) 1월 2일(갑인)
좌부빈객 신계영이 사직하다
좌부빈객 신계영(辛啓榮)이 병을 이유로 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인조 19년 신사(1641) 3월 6일(신사)
심양에 들어가는 관직을 사양한 윤지ㆍ유심을 유배보내고 신계영은 체차하다
빈객(賓客) 윤지가 이미 체직된데다가 보덕 유심까지 모친의 병으로 소장을 올려 체직되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윤지와 유심이 젊은 나이로 조정에 올라 고관 미작(高官美爵)을 지푸라기 줍듯 쉽게 하였는데도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심양에 들어가야 할 관리가 되자 서로 잇따라 피할 궁리를 하여 기어코 체직되고 말았습니다. 인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윤지와 유심은 부모의 나이가 모두 칠팔십 세도 되지 않았는데, 혹 일시적으로 작은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것을 가지고 사직하여 군신의 대의를 망각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 귀양보내소서. 또 승지는 그 소장을 봉입(捧入)하였고, 전관(銓官)은 사정(私情)에 따라 회계하였으니, 모두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순천 부사(順天府使) 신계영(辛啓榮)이 전에 빈객이 되었을 때는 병을 핑계대고 교묘히 피하였는데, 지금은 풍요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그의 소원을 흡족하게 이루었습니다. 파직을 명하시어 그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조의 당상과 해당 승지는 추고하고, 신계영은 체차하라.”
하였다. 윤지와 유심을 먼 곳에 유배하는 일을 여러번 아뢰니, 따랐다. 마침내 윤지는 부안(扶安)에, 유심은 흥해(興海)에 정배하였다.
인조 22년 갑신(1644) 1월 29일(무오)
신계영ㆍ홍희남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계영(辛啓榮)을 우부빈객으로, 홍희남(洪喜男)을 지중추부사로 삼았는데 희남은 곧 왜역(倭譯)이다.
인조 22년 갑신(1644) 6월 24일(경진)
빈객 임광의 졸기
비국이 아뢰기를,
“신계영(辛啓榮)을 빈객 임광(任絖)의 대신으로 삼았는데, 요즘에 ‘세자가 심양으로 돌아온 뒤에 들여보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세자가 심양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딜지 빠를지를 모르므로, 기다리고 있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신계영은 이미 떠날 준비를 차리고 있으니, 그를 먼저 보내고 김광욱은 제수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우선 여장을 차려서 뒤따라 가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광을 금년까지 그대로 더 있게 하라.”
하였다. 임광은 성품이 본디 강경하고 정직하여 매양 세자의 허물을 간하였으므로, 세자가 자못 그를 싫어하여 임금에게 하소연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끝내 해가 지나도록 심양에 머물게 됨을 면치 못하여 연경에서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
인조 22년 갑신(1644) 7월 14일(기해)
전임자 신계영의 사임으로 우부빈객을 김광욱으로 대신하게 하다
우부빈객 신계영(辛啓榮)이 덕산현(德山縣)에서 올라오지 않고 소를 올려 자신의 노쇠한 정상을 극력 진술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리니, 비국도 계영이 과연 먼 길 가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므로,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여, 다시 김광욱(金光煜)으로 대신하였다.
인조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은 다음과 같다.
“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인조 열문 헌무 명숙 순효 대왕(仁祖烈文憲武明肅純孝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니 원종 공량 대왕(元宗恭良大王)의 장자이시며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의 손자이시다. 어머님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는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이신데, 만력(萬曆) 을미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부(海州府)에서 왕을 낳으셨다. 해주는 원종(元宗)께서 제왕자(諸王子)로서 행재(行在)에 호종한 곳이다. 인조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일자(日者)가 점치기를 ‘모일(某日)에 탄생할 것인데 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였는데, 탄생하신 날에 붉은 빛이 밝게 빛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외조모 평산 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가 옆에서 졸다가 꿈에 붉은 용이 모후(母后)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여덟 자를 쓰는 것을 보았는데 말이 매우 신기하였다. 신부인이 기뻐하며 깨니, 왕이 탄생하셨다. 모습이 비범하고 오른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무수히 있었는데, 선조께서 보시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셨다.
겨우 2, 3세 때에 궁중에 있게 되었는데, 웃음과 말이 적고 장난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선조께서 더욱 기특하게 여기시고 돌보시는 것이 더욱 융숭하셨으니 친왕자(親王子)라도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소자(小字)와 휘를 지어주시니, 뜻을 붙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광해(光海)가 언짢아하였다. 5, 6세가 되어서는 총명이 특별히 뛰어나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문리가 갑자기 진취되므로, 선조께서 외부(外傅)에게 가서 배우도록 명하셨는데, 곧 외숙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의 집이었다. 왕은 안팎 존비간에 순조롭게 어울리고 조금도 독특하게 굴어 어그러지는 일이 없고 학문에만 부지런하셨다. 정미년에 품계가 올라 능양 도정(綾陽都正)이 되고 곧 군(君)으로 봉해졌는데, 다 자기 공로 때문이고 특이한 은수(恩數) 때문이 아니었다.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따님인데, 선조께서 또한 친히 간택하여 그 덕용(德容)을 알고서 왕으로 하여금 맞아들이게 하셨다.
원종께서 광해 때에 매우 의심받았고 왕의 세째 아우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이 약관(弱冠)에 법을 범하여 죽었으므로, 원종께서 드디어 근심하고 괴로워하다가 앓으시니, 왕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쳤으나 보람이 없었다. 이때 온 집안이 떨면서 왕을 위하여 두려워하였으나, 왕은 곡읍(哭泣)하는 예절을 그치지 않고 얼음ㆍ눈 위에 거처하며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고 상제(喪祭)를 반드시 예절대로 하시니, 듣는 자가 어려운 일로 여겼다. 그 뒤 광해가 무도한 짓을 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 천한 자나 귀한 자나 모두에게 뇌물받는 문호를 열어 놓았고, 산을 만들고 돌을 옮기는 데에 날마다 1천여 인을 동원했고 궁실(宮室)을 높이고 아로새기므로 백성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여 열 집 중에서 아홉 집이 흩어졌으며, 흉악한 무리들이 날뛰어 조정 내외에 세력을 떨쳤고, 모후를 유폐하여 서궁(西宮)이라 하고 골육을 찢어 죽이므로 죄 없는 자가 하늘에 호소하니, 나라가 망할 것을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다 알았다.
왕이 비록 재능을 감추고 자중하셨으나, 종국(宗國)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어 때때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씨의 사직(社稷)을 왕망ㆍ동탁(董卓)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래서 신경진ㆍ구굉(具宏)ㆍ심명세(沈命世)ㆍ구인후(具仁后) 등이 왕 가까이 있어 평소에 왕의 임금다운 도량에 감복하였으므로 김류ㆍ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최명길(崔鳴吉)ㆍ이서(李曙)ㆍ홍서봉(洪瑞鳳) 등 인망이 있는데 은퇴한 자를 소개하여 왕에게 천거하니, 왕이 한번 보고 뜻이 맞았다. 드디어 함께 눈물을 흘리고 왕을 추대하여 몸바쳐 일하기를 바랐다. 천계(天啓) 계해년 3월 12일 계묘에 왕이 의병을 일으켜 창의문(彰義門)으로부터 들어오시니, 광해의 궁을 지키던 장사(將士)가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곧 경운궁(慶運宮)에 가서 김대비(金大妃)에게 문안하고 이어서 두 번 절하고 엎드려 곡하시니, 뭇 신하도 다 곡하였다. 대비께서 선조(宣祖)의 허위(虛位)를 설치하도록 명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왕을 인도하여 들이게 하니, 왕이 두 번 절하고 종신(從臣)도 곡하였다. 대비께서 또 왕에게 국보(國寶)를 전하라고 명하였으나 왕이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대비께서 일어나 하교하기를 ‘신민이 사랑하여 추대하였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찌 유폐에서 벗어난 나에게만 복이겠는가. 종사의 복이다. 너는 왕위에 올라야하니 사양해서는 안 된다.’ 하셨다. 왕이 절하고 나아가 선조의 옛 별당(別堂)에서 즉위하시니, 대비의 명을 따른 것이다. 대비께서 또 교서를 내려 중외에 밝혀 고하기를 ‘왕은 총명하고 인효(仁孝)하며 또 비범한 모습이 있으므로 선조께서 옥궤(玉几)에 기대어 손을 잡고 탄식까지 하셨으니, 오늘날의 난리를 평정한 것은 실로 선조의 뜻을 이룬 것이다.’ 하셨다.
대비께서 또 하교하기를 ‘광해는 하늘을 업신여기고 행동하여 나의 부모를 형륙(刑戮)하고 나의 형제를 도살(屠殺)하고 나의 8세 된 어린 아들을 겁탈하여 잔인하게 죽였다. 내가 이제 다행히 해를 보게 되었는데 이 사람을 버려두어 형벌하지 않으면 《춘추(春秋)》의 복수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시니, 왕이 간하기를 ‘그가 무도하기는 하나 15년 동안 일국에 군림한 사람이니 형벌할 수 없습니다.’ 하셨으나, 대비께서 그래도 듣지 않으셨다. 왕이 유순한 낯빛으로 세 번 간절히 간하시니 대비의 뜻이 풀렸다. 왕이 곧 광해의 거처를 바꾸고 상식(尙食)을 시켜 주찬(廚饌)을 공급하게 하고 정원에 정계하기를 ‘오늘의 정신(廷臣)은 모두 전에 광해의 신하였던 사람이니 마음을 다하여 보호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하셨다. 안치하게 되어서는 왕이 폐비(廢妃)와 행희(幸姬)를 따라가게 하고 또 양식을 넉넉히 주고 옷을 때맞추어 주게 하여 중사(中使)가 잇따라 다니니, 백성이 듣고서 찬탄하였다.
왕이 또 사구(司寇)에 명하여 혼조 때에 죄가 있는 자를 토죄하고, 여우처럼 아양떨고 권세부린 궁첩을 주벌하고, 이이첨(李爾瞻)ㆍ한찬남(韓纘男)ㆍ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이위경(李偉卿) 등을 저자에서 환열(轘裂)하고, 범처럼 사나운 마음으로 포학을 도운 박엽(朴燁)ㆍ정준(鄭遵)을 그 소재지에서 효시(梟示)하고, 무신년 이후 꾸며 만든 옥사에 관련된 자를 모두 용서하고, 영건(營建)ㆍ조도(調度)와 외척ㆍ권귀(權貴)의 전장(田庄)의 면세 등 백성에게 해가 미치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다 폐지하고, 위훈(僞勳)을 삭제하고 차술(借述)을 죄주고, 내수사(內需司)의 종으로서 횡행한 자 두 사람을 참형에 처하여 전시(傳示)하고, 사방 백성이 미납한 조세를 탕척하여 거둬들이지 않으니, 중외와 먼 지방의 농부와 여자까지도 모두 기뻐서 서로 축하하며 ‘살아서 성세(聖世)를 만났다.’ 하였다.
왕이 친정(親政)하게 되어서는 맨 먼저 은둔한 곳에서 이원익(李元翼)을 기용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제주(濟州)에서 정온(鄭蘊)을 소환하여 사간으로 삼고, 광양(光陽)에서 정홍익(鄭弘翼)을 소환하여 대사성으로 삼고, 사천(泗川)에서 김덕함(金德諴)을 소환하여 사간으로 삼고, 선조 때의 구신(舊臣)으로서 도타운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쓴 윤방ㆍ신흠(申欽)ㆍ오윤겸(吳允謙)ㆍ이정구(李廷龜)ㆍ정경세(鄭經世) 등도 다 등용하고, 또 예우하여 장현광(張顯光)ㆍ김장생(金長生) 등을 맞이하여 모두 간쟁(諫爭)하는 벼슬을 제수하고, 그 밖에 효제하고 행실과 재능이 있는 선비도 모두 거가(車駕)를 보내어 타고 오게 하시니, 식자가 ‘천하의 정수하고 영특한 기운이 조정에 모였다.’ 하였다.
5월에 배신(陪臣) 이경전(李慶全)ㆍ윤훤(尹暄) 등을 보내어 대비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봉전(封典)을 청하게 하였더니, 2년 뒤에 희종 황제(熹宗皇帝)가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왕민정(王敏政)과 어마감 태감(御馬監太監) 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왕의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내리고 칙유(勅諭)하기를 ‘조정이 번방(蕃邦)을 봉하는 것은 강역(疆域)을 지키기 위함이니,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나라의 임금을 정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대 나라의 소경 왕비(昭敬王妃)와 신민들이 그대가 윤서(倫序)가 맞고 인심이 돌아갔다고 아뢰고, 또 익대(翼戴)가 공순하고 군향(軍餉)을 보내어 도와주었으므로 특별히 그대를 조선 국왕에 봉하여 국사를 통령(統領)하게 하니, 우리 외번(外藩)을 견고하게 하고 그대의 봉강을 안정시키라.’ 하였는데, 곧 배신 박정현(朴晶賢)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가서 진사(陳謝)하게 하였다. 윤10월에 명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하여 김류 등 50인을 기록하였다.
갑자년 정월에 이괄(李适)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로서 군사를 일으켜 왕에게 반역하였으므로 대비를 모시고 호서(湖西)로 출순(出巡)하셨다가 장만(張晩)ㆍ이수일(李守一)에게 명하여 토평하고 2월에 환도하셨다. 여름에 일본 관백 원수충(源秀忠)이 그 아들 가광(家光)에게 전위하고 사자를 보내어 와서 조빙(朝聘)하였는데, 왕이 정립(鄭岦)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1백 40여인을 쇄환하였다. 겨울에 대비를 높여 명열 대왕 대비(明烈大王大妃)라 하여 진하하고 경덕궁(慶德宮)에서 진풍정(進豐呈)을 베풀고 인헌 왕후(仁獻王后)를 아울러 모시어 상수(上壽)하셨다.
을축년에 인성군 이공(仁城君李珙)이 죄 때문에 간성(杆城)에 안치되었다. 당초 공은 광해 때에 수의한 것이 부도하였으므로 반정한 뒤에 대비께서 크게 노하여 처형하려 하셨으나, 왕이 반복하여 쟁변한 데에 힘입어 면할 수 있었다. 이괄의 변란을 다스릴 때에 역적들이 공을 끌어댄 것이 한둘이 아니므로 유사가 여러 날 동안 논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이 비로소 안치하도록 윤허하셨는데 그를 위하여 슬퍼서 목메어 눈물을 흘리고 그 아들을 불러 보고 강원 감사에게 하유하여 특별히 대우하게 하셨으며, 얼마 후에 경중으로 소환시켰다. 유효립(柳孝立)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에 역적들이 또 공을 끌어대고 자지(慈旨)를 사칭한 일을 말하였으므로 대비께서 더욱 크게 노하시니, 왕이 드디어 어쩔 수 없이 자살하게 하셨는데, 그 뒤에 슬피 생각하여 마지않으시고 그 관작을 회복하고 그 아들을 벼슬시키게 하셨다.
4월에 정사(靖社)ㆍ진무(振武) 두 공신들을 거느리고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이어서 잔치를 내리고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니었다면 윤리가 무너지고 종사가 엎어졌을 것이니, 경들의 공이 참으로 크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능히 사욕을 버리고 지극히 다스려지도록 함께 꾀해야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셨다. 9월에 재변이 있었는데, 자기를 죄책하는 교서를 내리고 직언을 구하셨다.
병인년 8월에 인헌 왕후(仁獻王后)께서 승하하시니, 왕이 김포(金浦)에 묘역을 정하게 하여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방상(方上)을 언덕을 같이하고 무덤을 달리하여 이장하시니, 이것이 장릉(章陵)이다.
정묘년 정월에 금인(金人)이 무오년에 항복한 장수 강홍립(姜弘立)을 선도(先導)로 삼아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이 들어왔으므로, 왕이 강화(江華)로 거둥하고 원로 이원익(李元翼)에게 명하여 세자를 도와 호남(湖南)을 진수(鎭守)하게 하셨다. 왕이 행궁(行宮) 중문(中門)에 나아가 섬 안의 부로에게 면대하여 하유하고 또 연미정(燕尾亭)에 나아가 장사(將士)를 장려하시니, 백성들이 감격하여 울고 사인(士人)들은 임금을 사랑할 줄 알았다. 금인이 요동 사람 유해(劉海)를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는데 글 가운데에 남조(南朝)를 돕지 말라는 말이 있으므로, 왕이 의리에 의거하여 물리치셨다. 금나라 장수가 듣고 조선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협박할 수 없다 하고 다만 이웃을 맺고 화호하기를 청하니, 조정이 비로소 그 청에 응하였다.
3월에 환도한 다음 권첩(權怗) 등을 보내어, 침략당하여 위급해서 기미하였다는 정상을 천조에 주문하니, 예부가 회자(回咨)하기를 ‘성지를 받드니 대략 「통문(通問)하러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다. 군신의 대의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을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 하셨습니다.’ 하였다. 8월에 희종 황제가 승하하니, 왕이 뭇 신하를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이흘(李忔)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셨다.
기사년 여름에 대마 도추(對馬島酋)가 중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전례가 없다고 물리치고 다만 현방에게 물건을 더 내리셨다.
무진년 봄에 가물어서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왕이 수찰을 내려 하교하기를 ‘어공(御供)하는 물건을 거의 다 줄였으나 담비 갖옷만은 아직 줄이지 않았다. 서방 백성이 얼어 죽는 때에 내 몸에 가벼운 갖옷을 입으면 내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올해에는 담비 갖옷을 바치지 말라.’ 하셨다.
경오년 4월에 하교하기를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이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므로, 옛 임금은 혹 친림하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벼슬과 비단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제 내가 덕이 없어서 능히 천심에 응하지 못하여 7~8년 동안 병화와 기근이 잇따랐으니, 기로(耆老)를 생각하면 절로 부끄러워진다. 노인작(老人爵)을 두루 내리고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폐질(廢疾)이 있는 자에게도 귀천을 막론하고 쌀과 고기를 내리라.’ 하셨다. 홍서봉(洪瑞鳳) 등 재상(宰相)들이 잔치를 열어 그 늙은 어머니들에게 상수(上壽)할 때에 왕이 사람마다 풀솜 두 근을 내리게 하셨다.
5월에 가도 비장(椵島裨將) 유흥치(劉興治)가 반역하여 도독(都督) 진계성(陳繼盛)을 죽였다. 왕이 이서(李曙)ㆍ정충신(鄭忠信)을 보내어 죄를 성토하게 하시니 유흥치가 패주하였다. 중국 장수들이 이 사실을 듣고 의롭게 여겼다. 그뒤 관내(關內)가 병화를 입었을 때에 정두원(鄭斗源)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바쳐 진위(陳慰)하고, 또 병기(兵器)를 바쳤으며 또 고용후(高用厚)를 보내어 회복한 것을 축하하게 하셨다. 그 뒤 경중명(耿仲明)ㆍ공유덕(孔有德) 등이 무리를 데리고 금(金)에 투항하였을 때에 왕이 주사(舟師)를 내어 천장(天將)과 앞뒤에서 협공하게 하시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장유(奬諭)하였다.
임신년에 부왕을 추존하여 원종 대왕이라 하고 모비를 인헌 왕후라 하고, 홍보(洪靌)ㆍ이안눌(李安訥) 등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추봉(追封)을 청하게 하셨더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추봉하고 고명을 내리고 공량(恭良)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칙서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그대는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 일찍부터 충순(忠順)하다고 일컬어졌거니와, 그대의 아버지 휘(諱)는 습작(襲爵)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하는데, 이번에 추봉을 주청하니 효사(孝思)를 알 수 있다. 특별히 부의(部議)를 윤허하여 그대의 아버지 휘를 조선 국왕으로, 어머니 구씨(具氏)를 조선 국왕비로 추봉하여 고명을 내리고 시호를 주니, 그대는 이 영총(榮寵)을 받아 번복(藩服)을 빛내고 또 더욱 정성을 굳게 하여 전의 아름다움을 변하지 말라.’ 하였다.
계유년 여름에 한인급(韓仁及) 등을 보내 장자(長子) 휘(諱) 모(某)를 세자로 봉하기를 청하게 하셨더니, 이듬해에 황제가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노유령(盧維寧)을 보내어 고칙(誥勅)과 채단(綵段)을 가져와 칙서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왕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 오며 예를 지키고 의를 따랐으므로 공순한 전통을 반드시 능히 이어받을 것인데 봉강(封疆)에 일이 많으므로 빨리 주무(綢繆)해야 할 것이므로 이제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이 가르침을 명시하여 전례를 따르고 변하지 말아서 국가를 보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에 왕이 뭇 신하에게 조회받을 때 영의정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근일 백관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기강이 해이한 것은 실로 사욕을 따르고 붕당을 감싸는 데에서 말미암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병화(兵火)나 수한(水旱)의 재앙도 실로 당론(黨論)보다 심하지 않다. 이러한 무리는 보통 법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붕당을 감싸는 일이 발각되면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다.
을해년 12월에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셨다. 왕후는 곤위(壼位)에 13년 동안 계셨는데, 태임(太任)ㆍ태사(太姒)의 덕이 있으므로 문덕(文德)의 교화에 도운 것이 많았다. 왕이 태학사(太學士) 장유(張維)에게 명하여 유실(幽室)에 지(誌)하게 하셨다.
병자년 봄에 가물고 여름에 홍수가 있었다. 왕이 크게 놀라 교서를 내려 매우 자책하고, 각도를 시켜 그 해의 물선(物膳)과 공상지(供上紙)를 정파(停罷)하고, 또 재해를 입은 곳을 살펴서 진휼하게 하고, 또 양전(兩銓)에 명하여 수령과 변장을 신중히 간택하게 하며 이르기를 ‘백성을 교화하는 자는 수령이고 군사를 어루만지는 자는 변장이니,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군민이 어떻게 의지하겠으며 국가가 어떻게 믿겠는가.’ 하셨다.
4월에 또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나라의 치란(治亂)은 군덕(君德)에 달려 있으므로 군덕의 경태(敬怠)는 흥망을 판가름한다. 내가 이 두려움 때문에 감히 태만하고 안일하지 않았다마는 기구(耆舊)가 남아 있지 않아서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점점 느슨해지니, 치령(治令)의 근원이 어찌 바를 수 있겠는가. 인심이 흩어지고 국가가 위태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하고, 또 삼사와 육조에 하교하기를 ‘삼사의 직무는 바로잡는 데에 있고, 이조의 직무는 선택하는 데에 있고, 호조의 직무는 절약해 쓰는 데에 있고, 예조의 직무는 학교를 흥하게 하는 데에 있고, 병조의 직무는 장재(將才)를 가리는 데에 있고, 형조의 직무는 형벌을 삼가는 데에 있고, 공조의 직무는 쇠퇴한 것을 일으키는 데에 있다. 모든 관사(官司)는 각각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폐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상형(常刑)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5월에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에 있고 치평(治平)을 이루는 데에는 어진이를 구하는 것이 급하다. 나는 세상에 인재가 모자라지 않으나 어진이를 구하는 도리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몸가짐이 바르고 덕행이 있는 자와, 의리에 잠심(潛心)하여 학술이 있는 자와,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나아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와, 기절(氣節)이 확고하여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와, 강포하여 선한 일을 막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봉공(奉公)에 굳세고 과감한 자와, 세상일에 통달하여 처사가 명민(明敏)한 자는 다 크게 쓸 수 있으니, 외방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을 시켜 각각 아는 자를 천거하게 하고 또 각도의 감사를 시켜 찾아서 아뢰게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예전부터 뛰어난 인재 중에도 스스로를 천거한 자가 있다. 음식을 만들거나 소를 먹이는 천한 사람 가운데 있었던 자라도 내가 목욕 재계하고서 정성을 다하여 등용할 것이다.’ 하셨다.
3월에 금인(金人)이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고쳐 청(淸)이라 한 다음 사신을 보내어 와서 고하였다. 이에 앞서 금이 폐물(幣物)을 늘리고 군사를 조발하라고 우리를 협박하였으나, 왕이 대의(大義)로 물리치고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으셨다. 이번에 사신이 나오자 백성이 다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을 분하게 여겨 금의 사신을 베어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사신이 탐지하여 알고서 달아났다. 국중(國中)이 비로소 의구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의리를 지키고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12월에 금인이 성을 내어 갑자기 침범하니, 대가(大駕)가 광주(廣州)의 남한 산성으로 피하였다. 적병이 날로 불어 우리를 두어 겹으로 에워쌌는데 때마침 날씨가 춥고 눈이 내려 장사(將士)가 혈색이 없었다. 왕이 한데에 서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빌기를 ‘하찮은 제가 힘을 헤아리지 않고 천하에 큰 의리를 알리려다가 이 큰 적을 만났으므로 스스로 구제되기는 바라지 않으나, 이 백관ㆍ만민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 죄다 얼어 죽은 귀신이 되겠습니까. 하늘에 바라건대 한위(寒威)를 조금 풀어 적의 침학을 돕지 마소서.’ 하고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닦으시어 어의가 다 젖으니, 삼군(三軍)이 모두 감격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 하였다. 왕이 또 입던 갖옷과 취피(毳被)를 벗어 조각조각 갈라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졸에게 나누어 주셨다.
고립된 성이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원병은 밖에서 패배하고 양식은 안에서 떨어졌으나 끝내 뜻을 돌리지 않았다. 적이 여러 번 화해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그 정예를 다하여 사닥다리를 많이 세우고 줄줄이 올라와 한 군데를 뚫으려 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잇따라 쳐서 물리치고 더욱 명을 받들었다. 뜻밖에 강도(江都)의 패보(敗報)가 갑자기 이르러 사람들이 다 낙담하고 일이 어쩔 수 없게 되었으므로, 영의정 김류,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예전에 한 고조(漢高祖)는 홍문(鴻門)에서 몸을 굽히고 당 대종(唐代宗)은 마수(馬首)에서 회흘(回紇)에게 친히 절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으로서는 국가의 만세를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 필부가 제 몸 밖에는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고, 세자도 눈물을 흘리며 청하기를 ‘임금의 재앙을 풀 수 있다면 죽는 것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나가서 인질이 되는 정도야 말할 것이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종사와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르셨다.
정축년 정월에 대가가 환도하니, 묘모(廟貌)와 궁궐이 예전과 같고 늙고 어려서 잡혀가지 않은 서울 백성이 날마다 점점 더 모여 왔다. 3월에 강도에서 패망한 세 장수를 잡아와 모두 처형하고, 전사한 군졸의 한데에 드러난 해골을 묻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만들어 제사하게 하고, 호조 참판 신계영(辛啓榮)을 보내어 호조의 금 3천 냥을 가지고 심양(瀋陽)에 들어가 잡혀간 남녀를 속(贖)하여 돌아오게 하시니, 인심이 기뻐서 죽고 싶어하던 생각을 잊었다.
무인년 12월에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갑신년 3월에 흉적(凶賊)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서 모반하여 먼저 심복 장사(壯士)를 호위(扈衛) 가운데에 두고 난을 일으키려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 심기원을 잡아 신문하니 반역한 정상이 상세히 드러났으므로 기시(棄市)하고 고발한 자를 상주었다. 왕이 심기원의 정사공(靖社功)을 생각하여 연좌된 자를 다 가벼운 법에 따라 처벌하셨다.
을유년 봄에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는데, 장자는 어리고 또 병이 많았다. 왕이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과 경대부에게 물어 방책을 정하고 봉림 대군(鳳林大君) 휘(諱) 모(某)를 왕세자로 세우시니, 연경ㆍ심양에서 들은 외인까지도 다 조선은 어진 세자를 얻었다 하였다. 명이 내렸을 때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두 번 글을 올려 굳이 사양하였으나, 왕이 두 번 수비(手批)를 내려 답하셨는데, 처음에는 ‘너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므로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예(禮)를 쓰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의 도리를 닦아 형의 아들을 네 소생처럼 여기라.’ 하고 두 번째에는 ‘내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계책을 물어도 다 같이 말하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도심(道心)을 공경히 지키라.’ 하셨다.
병술년에 폐빈(廢嬪) 강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처음 강이 심양에 있을 때에 참람한 짓을 하였고 돌아와서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말을 고치지 않고 또 고독(蠱毒)ㆍ저주(咀呪)를 행하다가 일이 드러났으므로 폐출하고 사사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윤리를 밝히고 근심을 막는 데에 뜻이 있다. 그가 만약에 마음 먹은 것이 작고 일이 의심스럽다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행하여 아이들이 날마다 울며 의지할 데가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어지럽히게 된다 하였으니, 내가 참으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은례(恩例)가 전혀 없을 수 없으니, 유사(有司)를 시켜 예장(禮葬)하고 3년 동안의 제수(祭需)도 관가에서 주게 하라.’ 하셨다.
정해년 봄에 크게 가물고 가을에 홍수가 있었는데, 호부(戶部)의 쌀 5만 석을 내어 백성의 공부(貢賦)를 갈음하고 진휼청을 설치하여 죽을 만들어 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시고,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옮겨서 굶주린 빛이 역력한 내외의 백성들로 하여금 고루 혜택을 입게 하셨다.
기축년 정월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諱) 모(某)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이때 나이 9세였는데, 기질(氣質)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모(禮貌)가 온화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5월 8일 병인에 왕이 병으로 창덕궁(昌德宮)의 정침(正寢)에서 뭇 신하를 버리고 세상을 뜨시니, 수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다. 왕이 임신년부터 상중에 계시면서 사모하여 지치고 야윈 것이 빌미가 되고 한습(寒濕)의 병을 더 얻어 계속되고 낫지 않은 지 17년인데, 무자년 겨울 이후에는 6~7개월 동안 병이 상당히 좋아져서 조정의 신하를 자주 만나 천재(天災)를 근심하고 시사(時事)를 염려하여 위엄 있는 얼굴 표정에 나타내시고, 남방과 서방의 근심거리에 대해서도 방책을 강구하시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국의 당상인 신하로서 성지(城池)와 병사(兵事)에 대하여 진언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있지 않고 장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천어(天語)가 간략하고도 절실하므로 신하들이 기뻐서 ‘우리 임금께서 거의 병이 나으시겠다.’ 하였는데, 한 달을 넘지 못하여 왕이 편찮으시더니 겨우 열흘 만에 드디어 위독하셨다. 그러나 대신이 문병하면 몸이 피로하다 하여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는 일이 없으셨고, 약방(藥房)이 사약청을 설치하기를 청하면 폐단이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으셨다. 옥성(玉聲)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승하하셨으니, 아, 애통하다.
9월에 뭇 신하가 시호를 올려 헌문 열무 명숙 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인조라 하였다.
이달 20일 병자에 장릉(長陵)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파주(坡州) 소재지로부터 북쪽 20리에 있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장사 때에 왕이 명하여 곡장(曲墻)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자각(丁字閣)도 중앙에 짓고 모든 상설(象設)의 제도도 다 효릉(孝陵)을 본떠 백성을 거듭 번거롭게 하지 말게 하셨다.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뒷걱정을 하신 것이 지극하셨으니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霸陵)을 검소하게 모두 와기(瓦器)로 치장하였지만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왕은 체모가 침착하고 엄숙하며 도량이 깊고 넓어서 동정 하나하나가 모두 법도에 맞고 가인(家人)ㆍ자제를 대하여도 게으른 모습이 없이 숙연하셨으니, 참으로 이른바 위의(威儀) 있는 임금이셨다.
학문을 좋아하시는 것은 천성이었다. 잠저(潛邸) 때부터 하루도 글을 버려두고 보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즉위하셔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닦아 일으키되 삼대(三代)와 같게 하려고 생각하여 현준(賢俊)을 맞아들여 등용하고 미천한 자 중에서도 채용하셨으며, 세월이 모자랄 듯이 경연에 부지런하여 하루에 세 번 인접하셨다. 선기 옥형(璇璣玉衡)의 세밀하여 알기 어려운 것과 주고 은반(周誥殷盤)의 아득하고 엄숙한 것에 대하여 모두 요령을 종합해 내고 풍아비흥(風雅比興)의 시(詩)와 전주(箋註)가 잡다한 곳에 대하여 모두 꿰뚫어 환히 아시니, 스스로 노숙한 사유(師儒)라 하여도 어렵고 의심스러운 물음을 받으면 입이 벌어지고 혀가 움츠려지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성효(聖孝)를 다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원종 대왕(元宗大王)과 인헌 왕후(仁獻王后)께서 위독하실 때에 다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바치고 3년 동안 어린아이처럼 부모를 사모하여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인목 왕후(仁穆王后)께서 성품이 엄하셨으나, 또한 왕이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성한 데에 감동되어 10여 년 동안 편안하고 참소가 감히 이간하지 못하였다. 신미년 정월 인목 대비의 병이 위급할 때에 왕이 근시(近侍)를 보내어 산천에 기도하고 원옥을 심리하게 하셨는데, 얼마 후에 대비께서 병이 나아 이르기를 ‘왕의 효성이 아니면 내 병이 위태로웠다.’ 하셨다. 임신년에 이르러 대비의 병이 다시 심해졌을 때에 왕이 약시중을 들되 늘 옷을 벗지 않으셨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을 본 후에 드렸으며 종사와 산천에 기도하는 것이 전보다 더하셨다. 대비께서 승하하시어 인경궁(仁慶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의장을 옮길 때에 왕이 소여(小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따라가신 것도 옛 임금이 행한 적이 없는 일이다.
구족(九族)을 친목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능원 대군 이보(綾原大君李俌)와 우애가 깊으셨는데 그에게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이현(梨峴)의 별궁(別宮)을 내리셨다. 부마(駙馬)와 종실(宗室) 집 남녀 중에 정축년 난리 때에 잡혀간 자가 있었는데 많은 값을 내어 속(贖)하셨다. 친척 중에 부고가 있으면 행소(行素)하되 편찮다 하여 그만두시지 않았다. 인흥군 이영(仁興君李瑛)이 어머니의 복을 입었을 때에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려 국가에서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를 구별하시고, 인성군 이공(仁城君李珙)의 자손도 거두어 돌보셨다. 광해(光海)와 폐동궁(廢東宮)에게 다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어릴 때에는 늠료(廩料)를 주어 기르게 하고 자라서는 출가시키되 전토와 노비를 많이 주어 편안하고 부유함을 누리게 하셨다.
대신을 공경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 늙고 병들어 잘 걷지 못하니 궤장(几杖)을 내리고 명하여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에 나오게 하고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셨다. 그가 치사해서는 현관(顯官)에게 명하여 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이불과 베요를 내려 그의 뜻에 맞게 하셨다.
직신(直臣)을 용납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온(鄭蘊)이 곧기는 곧으나, 전하를 접때에 견주었으니, 신하의 의리에 어그러집니다.’ 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경우 걸주로 임금을 견준 자가 있었는데, 정온의 말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이명준(李命俊)이 곧바로 궁인(宮人)을 지적하여 상소한 말이 매우 강경하였는데, 왕이 특별히 칭찬하셨다. 유백증(兪伯曾)ㆍ강학년(姜鶴年) 등이 바르게 말하기는 하였으나 지적한 것이 맞지 않았는데, 왕이 용납하고 또한 죄주지 않았다.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정묘년 난리 때에 남이흥(南以興)ㆍ김준(金浚)이 안주(安州)에서 죽고 최몽량(崔夢亮)이 의주(義州)에서 죽었는데, 포증을 더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셨다. 병자년의 난리 때에 상신 김상용(金尙容), 도정(都正) 심현(沈誢), 장령 이시직(李時稷) 등이 잇따라 충렬(忠烈)을 행하였는데, 왕이 명하여 그 문려(門閭)에 정표하고 묘액(廟額)을 내려 충렬이라 하셨다. 김응하(金應河)의 충성을 생각하여 그 집에 은 수백 냥을 내리셨다. 판서 김상헌(金尙憲), 참판 정온(鄭蘊)이 국난에 임하여 의분이 북받쳐 칼로 찔러 죽으려 하였는데, 왕이 낯빛이 변하여 의관(醫官)을 보내어 약을 가져가서 구완하게 하셨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가 죽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듯이 하였는데, 왕이 가엾게 여겨 마지않고 그 집을 특별히 돌보셨다.
형옥(刑獄)을 삼가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번번이 역옥이 일어나면 왕이 이르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그 우두머리만을 주벌하고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고, 사죄에 들어갔더라도 정상이 애매하면 이미 승복한 자도 많이 평번(平反)하셨다. 이 때문에 반역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나라 안에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천위(天威)를 두려워하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신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는데, 재이를 당하면 반드시 내 허물이다 하시고 반드시 조정의 신하를 시켜 과실을 죄다 아뢰게 하고 원옥을 심리하게 하셨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거친 베옷을 입고 앉아 뭇 신하를 불러 각각 말을 다하게 하고 자책도 매우 진실하게 하셨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비가 크게 쏟아졌다. 왕이 일찍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라 하여 내 몸이 다친 듯이 돌보고 때맞추어 부리셨는데,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勅使)의 수요일지라도 오로지 민간에 요구하지 말게 하고 각사(各司)의 저축을 비워서 쓰고 때로는 내부(內府)의 저장으로 돕게 하셨다.
검덕(儉德)을 숭상하고 교화를 도타이 하시는 것은 이러하였다. 모도독(毛都督)이 앵무새를 보내왔는데, 왕이 해도(海島)에 놓아보내게 하셨다. 일찍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조정의 신하가 다 청검(淸儉)하여 욕심이 없다면 치평(治平)이 어찌 멀겠는가.’ 하셨다. 몸소 검덕을 행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시어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쓰지 않고 여름에는 삼베를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싫어하시고, 염습(斂襲)할 때에 이르러서 태서(太胥)가 옷을 살펴보니 명주로 만든 것이 많았다. 계해년 처음에 명하여 《오륜가(五倫歌)》를 번역하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인쇄하여 모두 중외에 반포하게 하시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소학》을 인쇄하여 뭇 신하에게 나누어 내리셨다. 또 예조를 시켜 동몽을 가르치는 데 오로지 《소학》을 숭상하게 하며 이르기를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셨다. 삼경(三經)과 《언해심경(諺解心經)》ㆍ《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양계(兩界)에 보내어 초학자들을 권면하셨다. 근년에 서북의 문풍이 융성해진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사대(事大)하는 정성으로 말하면 한결같이 선조(宣祖)를 모범 삼아 귀복(歸服)하는 일념은 잠시 위급한 때라도 바꾸지 않았다. 포위된 성 안에서도 망궐례를 행하고 환도한 뒤에도 대궐 안에서 홀로 행하여 외인이 모르게 하셨다. 경연에서 《시경(詩經)》의 소아(小雅)를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진수(鎭守)한다.’ 한 데에 이르러 왕이 크게 탄식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니, 좌우가 다 흐느끼며 감히 우러러 보지를 못했다.
아, 신하로서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가까이 모신 지 20여 년 동안에 뛰어난 문덕(文德)을 입고 일월(日月)의 빛을 가까이한 것이 또한 많거니와, 삼가 천지를 헤아리고 고금에서 살펴보면 대행 대왕의 공덕과 규모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때보다 나을 만하니, 뭇 행사가 성대한 것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불행히 병자년ㆍ정축년의 험난을 당하셨으나, 비유하면 문왕(文王)의 명이(明夷) 및 공성(孔聖)의 화산(火山)과 같은데, 저 두 성인도 면하지 못하였으니, 우리 대행 대왕에게 무슨 흠이겠는가. 말년에 더욱이 뒤를 잇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 전하를 얻어 2백 년의 종통을 맡겼는데, 그 귀에 대고 말하고 면전에서 명하여 간절히 가르친 방도는 인심(人心)ㆍ도심(道心)에 관한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으로써 먼저 하고 은감(慇鑑)이 멀지 않고 혼조(昏朝)에 있다는 것으로 거듭하고 도이(島夷)는 죽이기를 좋아하여 전세가 짧다는 것으로 끝냈으니, 그 간절히 반복하여 경계한 말씀은 성인이 서로 전수하는 사이에 세 가지 뜻을 전한 것이다. 대저 어찌 험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성인의 대지(大知)를 볼 수 있었겠는가. 한 소열제(漢昭烈帝)가 선이 작다 하여 하지 않거나 악이 작다 하여 하지 말라 한 것은 어지럽게 셈할 것도 못 된다.
일국의 신민이 누구나 다 반드시 오래 사시리라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성인보다 모자라고 설용(泄庸)과 종려(鍾蠡)같은 보좌가 지금에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하늘에 허물을 돌리는 것은 본디 당연하겠으나, 임어(臨御)하신 27년 동안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피부와 뼈에 스며들어 향기를 빚어낼 것이며 깜깜해진 세상에 강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해와 달처럼 늘 밝을 것이니, 어찌 나라를 오래 다스려 왕자(王者)가 되고 패자(覇者)가 되려 꾀한 뭇 임금이 여기에 미칠 수 있겠는가. 아, 아름다우시다.
왕의 원비(元妃) 한씨(韓氏)는 세 아들을 낳으셨다. 맏이는 소현 세자 이왕(昭顯世子李㞷)
)인데 일찍 졸하였고, 다음은 금상전하(今上殿下)이시고, 다음은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李㴭)이다. 귀인(貴人) 조씨(趙氏)는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아들 중 맏이는 숭선군 이징(崇善君李澂)인데 승지 신익전(申翼全)의 딸을 취(娶)하였고, 다음은 낙선군 이숙(樂善君李潚)이며 딸은 효명 옹주(孝明翁主)인데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소현 세자에게 세 아들과 세 딸이 있다. 아들 둘은 죽었고 하나는 어리며 세 딸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 우리 중전(中殿) 장씨(張氏)는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따님이신데, 세 아들과 다섯 딸을 낳으셨다. 아들 왕세자 휘(諱) 모(某)는 처음에 세손에 봉해졌다가 이제 저위(儲位)에 올랐으며 딸 중 맏이는 숙안 공주(淑安公主)인데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숙명 공주(淑明公主)이고 그 다음 세 공주는 다 어리며 아들 둘은 일찍 졸하였다. 인평 대군은 증 영의정 오단(吳端)의 딸을 취하여 다섯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이욱(李栯)이고, 다음은 이정(李楨)인데 의창군(義昌君)에게 출계(出繼)하였고, 그 아래 세 아들은 다 어리다.”
효종시대
효종 3년 임진(1652) 5월 29일(기해)
이시백을 사은사로, 신계영을 부사로, 권령을 서장관으로 삼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을 사은사(謝恩使)로, 신계영(辛啓榮)을 부사로, 권령(權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뒤에 신유(申濡)로 신계영을 대신하였다.】
효종 7년 병신(1656) 2월 4일(계축)
홍명하ㆍ이일상ㆍ곽성귀ㆍ홍무적ㆍ신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명하(洪命夏)를 형조 판서로 탁배하고, 이일상(李一相)을 대사성으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삼았다. 홍무적(洪茂績)은 정헌(正憲)의 품계를, 신계영(辛啓榮)은 가의(嘉義)의 품계를 더하니, 모두 나이가 80에 찼기 때문이다. 송준길(宋浚吉)을 이조 참의 겸 찬선으로 삼았다.
현종시대
현종 6년 을사(1665) 4월 14일(경오)
영부사 이경석이 거둥을 맞는 백성들에게 은전을 베풀 것을 청하다
영부사 이경석이 뵙기를 청하니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경석이 먼저 머리를 감고 나서 쉰 후에 몸을 씻어서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방지하도록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들이 지금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다가 또 성상의 거둥을 맞게 됐으니 비록 폐단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어찌 백성들에게 폐가 미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각읍의 원곡(元穀)을 방출하여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부(節婦)ㆍ효자를 각도에서 매년 예조에 보고하여 정부로 보고되고 있는데, 정부에 일이 많아 거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른 도는 비록 모두 시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충청도만은 거둥 시에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사실대로 보고하게 한 다음 정문을 세워주거나 관직을 제수하고, 청백리와 전쟁에서 순절한 자의 자손에게도 모두 똑같이 포상을 시행한다면 어찌 한 도의 인심을 고무시키지 않겠습니까. 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 역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조(仁祖) 때의 구신(舊臣)이 연로하여 조정에서 물러나 지금 충청에 살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부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신계영(辛啓榮)이 일찍이 삼사(三司)를 거치고 전직 참판에서 물러나 예산에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나이 80세가 되면 가자(加資)하여 가의(嘉義)로 올랐는데 특명이 있어야만 비로소 품계를 올려 가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또 조종조에서는 특별히 과거를 베풀어서 인심을 고무시켰다는 고사를 들었는데, 지금 어가가 머무를 때 특별히 시행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조그만 종이에 써서 올리라 명했다. 경석이 물러나 짧은 차자를 올리면서 조그만 종이에다 그가 말한 것을 죽 쓴 다음 승지에게 주어 전달하게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현종 6년 을사(1665) 4월 23일(기묘)
영상 등과 과거 대상자 선정과 부로에게 하사하는 일 등을 의논하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 오로지 충청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인데, 만일 수행관들과 어가를 모시고 온 무사들에게 과거를 보라고 허락해 준다면 충청도의 사람들이 합격할 수 없게 될 터인데 이게 어찌 과거를 실시한 본뜻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어가를 수행한 무사들은 따로 기록해 놓았다가 환도하신 후에 따로 시험을 보여 선발한 다음 정시(庭試)에 추가로 넣어주고, 수행관들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같이 한다면 무사들 또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무과의 기준을 높이자고 청하면서 아뢰기를,
“만약 기준을 높이지 않으면 환궁하시기 전에 반드시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1백 명을 선발하되 기준은 유엽전(柳葉箭)을 1회에 두 번 명중시키는 것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은 인조조의 시종신으로 물러나 예산(禮山)에 사는데, 나이가 90에 가깝고 병으로 행궁에 나와 알현하지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은전을 베푸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연로한 사람들도 일일이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방금 감사로 하여금 부로들을 초계(抄啓)하라고 하였는데, 음식물을 넉넉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연로한 이들에게 관직의 유무를 묻지 말고 모두 노직첩(老職帖)을 주시면 그들의 감동과 기쁨은 반드시 음식물을 받는 것보다 배나 더 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신계영은 이조로 하여금 특별히 가자(加資)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대사간 이경억이 충신과 유현(儒賢)들의 묘소에 제사지낼 것을 청했다는데 이순신(李舜臣)만 빠졌습니다. 그의 사당이 아산(牙山)에 있으니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와 허적이 아뢰기를,
“호적의 금령은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하였거나 문ㆍ무에 합격했더라도 한성부의 호적을 조사하여 발견되면 방(榜)에서 빼고 벌을 주어 징계의 본보기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는 환도하신 후에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군(禁軍)에도 직부(直赴)할 수 있는 자들이 많은데 식년과(式年科)가 아직 멀어 저들이 매우 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별시(別試)나 정시(庭試) 때에 직부했던 적이 있었으니, 이번 무사들을 따로 기록해서 환도하신 후에 별도로 시험을 보여 선발하면서 이 무리들도 직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선징에게 이르기를,
“송시열은 공주에 머물러 있고 송준길은 병 때문에 도로 돌아갔다.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가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니 병이 조금 나아지길 기다렸다 와서 보라는 뜻으로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현종 6년 을사(1665) 4월 25일(신사)
전 참판 신계영이 노병으로 뵙지 못한다고 소를 올려 대죄하다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이, 노병(老病) 때문에 나아가 뵙지 못한다고 소를 올려 대죄(待罪)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현종 6년 을사(1665) 5월 6일(신묘)
신계영ㆍ신한선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박춘화 등에게 자급을 올려주다
신계영(辛啓榮)을 지중추로, 온양인 신한선(申翰宣)을 경릉 참봉으로 삼고, 온양 노인 박춘화(朴春華) 등 15인은 자급을 올려 주었다.
현종 7년 병오(1666) 4월 25일(을해)
영상 정태화 등을 인견하여 본도 역의 견감, 노인들의 가자 등을 논의하다
영상 정태화, 우상 허적, 호판 정치화, 충청 감사 임의백(任義伯)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역(役)을 견감하는 일을 어떻게 정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특명을 내려 견감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에는 얼마나 견감하였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온양은 전세(田稅)를 모두 감하였고 먼 읍은 수미(收米) 2두(斗)를 견감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역민(役民)이 작년의 배나 되니 한결같이 작년의 예에 따라 견감하고, 경기도 그와 같이 견감하라.”
하였다. 의백이 힘써 수군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진달하고 추후에 변통하는 방도를 계문하겠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노인들의 가자(加資)는 한결같이 작년의 예에 따르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로 하여금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계영(辛啓榮)은 인조조(仁祖朝)에 삼사(三司)에 출입했던 신하인데, 지금 나이가 아흔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계문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 1품에 초승(超陞)하라.”
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과 판중추 김집(金集)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도승지 김수흥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현종 8년 정미(1667) 윤 4월 8일(임오)
판부사 신계영이 알현하다
상이 행궁 편전에서 신하들을 인견했다. 판부사 신계영(辛啓榮)이 예산(禮山)으로부터 와서 알현했는데 당시 나이 아흔이었다. 상이 어린 환관으로 하여금 부축하여 들어오게 했는데, 계영은 무리없이 절하고 무릎을 꿇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렇게 늙은 나이로 어렵고 먼 길을 오다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신이 곧 죽을 나이로 이런 대면하는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노신은 시골에 물러나 있고 이미 망령이 들었으니, 무슨 진달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여덟 명의 간쟁하던 신하가 양이해주는 조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매우 은덕있는 일입니다. 상께서는 이들을 완전히 풀어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매우 황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일어나 앉아서 나를 보도록 하라.”
하니, 계영이 머리를 들고 자세히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현종(개수실록) 6년 을사(1665) 4월 23일(기묘)
문ㆍ무과 정시 응시 자격ㆍ노직첩 수여ㆍ이순신 사당 제사 등을 의논하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 오로지 본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인데, 만일 수행관들과 어가를 모시고 온 무사들까지 과거를 보라고 허락해 준다면 충청도의 사람들이 합격할 수 없게 될 터인데 이것이 어찌 과거를 실시한 본뜻이겠습니까. 어가를 수행한 무사들은 따로 기록해 놓았다가 환도한 후에 따로 시험을 보여 선발한 다음 정시(庭試)에 추가로 넣어주고, 수행관들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같이 한다면 무사들 또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무과의 기준을 높이지 않으면 환궁하시기 전에 반드시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1백 명을 선발하되 기준은 유엽전(柳葉箭)을 1회에 두 번 명중시키는 것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은 인조조의 시종신으로 나이가 90에 가깝고 병으로 행궁에 나와 알현하지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은전을 베푸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연로한 사람들도 관직의 유무를 묻지 말고 모두 노직첩(老職帖)을 주시면 그들의 감동과 기쁨은 반드시 음식물을 받는 것보다 배나 더 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계영은 이조로 하여금 특별히 가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듣건대, 간신(諫臣)이 충신과 유현(儒賢)들의 묘소에 제사지낼 것을 청했다는데 이순신(李舜臣)의 묘도 도내에 있고 그의 사당이 아산(牙山)에 있으니 일체로 제사를 지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앞서 이경석이 청대하여 훌륭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하였으니, 상께서 예우하여 이르러 오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우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송 우찬성 및 송 대사헌의 집에 사관을 보내어, 내가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니 병이 조금 나아지길 기다렸다 와서 보라는 뜻으로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송시열은 우찬성이었고 송준길은 대사헌이었다.】
현종(개수실록) 6년 을사(1665) 5월 6일(신묘)
신계영을 지중추로 삼고, 온양 노인 15인의 자급을 올려 주다
신계영(辛啓榮)을 지중추로 삼고, 온양 노인 박춘화(朴春華)등 15인의 자급을 올려 주었다.
현종(개수실록) 7년 병오(1666) 4월 25일(을해)
온천의 효험 및 온양의 요역, 노인 우대 등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영상 정태화, 우상 허적, 호조 판서 정치화, 충청 감사 임의백을 인견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어가를 돌릴 날짜가 수일밖에 안 남았는데, 안질이 더욱 나아지는 효과가 있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당히 나았다마는 지난해처럼 통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자전께서는 목욕하시고 나서 뚜렷한 효험을 보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 앓아오던 습열의 증세는 쾌히 근치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보기에는 신기한 효험이 있는 것 같다.”
하고, 태화 등에게 묻기를,
“본도의 요역을 견감해 주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의논해 정하였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특별히 견감해주라고 명하시어 은혜의 뜻을 보이셔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견감해 준 것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온양은 전세를 완전히 감해 주었고 나머지는 두 말을 감해 주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역시 일체 지난해처럼 견감해 주되 경기도 똑같이 감해 주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가 입시하였으니, 말씀드릴 만한 백성의 폐막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임의백이, 수군의 신역이 너무나 무거워서 유지할 수 없는 폐단에 대해 말하고, 또 아뢰기를,
“엊그제 재이로 인하여 백성의 폐막에 대해 하문하시고 또 인재를 구하셨는데, 때마침 거둥하신 때를 당하여 미처 장계를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뒤에 조목조목 열거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해 본도의 노인에게 가자할 때에 80세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79세된 자들이 그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올해에 이르러 기대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뽑아 아뢰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에게 가자를 하였으나, 올해에 90이 찼으니, 이 사람에게 별도로 은전을 베풀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어떤 관작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지중추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1품으로 올려 주라.”
하였다.
현종 8년 정미(1667) 윤 4월 8일(임오)
판부사 신계영이 알현하다
상이 행궁 편전에서 신하들을 인견했다. 판부사 신계영(辛啓榮)이 예산(禮山)으로부터 와서 알현했는데 당시 나이 아흔이었다. 상이 어린 환관으로 하여금 부축하여 들어오게 했는데, 계영은 무리없이 절하고 무릎을 꿇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렇게 늙은 나이로 어렵고 먼 길을 오다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신이 곧 죽을 나이로 이런 대면하는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노신은 시골에 물러나 있고 이미 망령이 들었으니, 무슨 진달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여덟 명의 간쟁하던 신하가 양이해주는 조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매우 은덕있는 일입니다. 상께서는 이들을 완전히 풀어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매우 황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일어나 앉아서 나를 보도록 하라.”
하니, 계영이 머리를 들고 자세히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영조시대
영조 45년 기축(1769) 6월 29일(기묘)
고 영부사 서지수ㆍ판부사 신계영에게 시호를 추증하다
김용(金容)을 사서로, 윤급(尹汲)을 좌참찬으로 삼았으며, 고 영부사 서지수(徐志修)에게 문청(文淸)의 시호를, 판부사 신계영(辛啓榮)에게 정헌(靖憲)의 시호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