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상망(長毋相忘)(2)
누구나 평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교유를 통해 사랑과 우정을 나눈다. 자주 만나지 못하거나 아니, 아예 만날 수조차 없어도 애타는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지난 1978년도 겨울 무렵에 「석전(石田) 이 병주」(李丙疇)교수의 『세한도』에 대한 글을 처음 접하고 나서 그 후에 관련된 글을 매우 심도 있게 읽었다. 처음으로 그림을 대한 것이 1980년대 중반이었으니 어언 40년이 지난 셈이다. 지난 5월 초에 두 번째로 『세한도』를 감상한 이후 다시금 잔잔한 감동을 안고서 지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취석(翠石) 송하진(宋河珍)」 전 지사가 한 분을 천거하였다. 『완당 평전』을 썼던 「유 흥준」 교수가 자문을 구하는 추사연구의 권위자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이전에 난초학(蘭草學)의 최고 전문가인 「이 종석」 교수에게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서지학자(書誌學者)라는 말을 들었으며 언젠가 만나기로 했던 「박 철상」 선생이었다. 곧 바로 이교수님과 통화하여 박 선생이 최근에 출간한 『세한도』란 책을 접하게 되었다. 매우 새롭고 희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수작(秀作)이라 흥미롭게 정독하였다.
그동안 수차례 예산의 추사고택을 방문했는데 여러 지인들은 물론이고 막 사회에 진출하려는 아들을 데려가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발문에 적힌 세한(歲寒)의 의미에 대해 감동하여 이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한 글을 쓰기도 하였고, 많은 후배들에게 그 참다운 정신에 대해 강의하기도 하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염량세태(炎凉世態)의 풍조를 가감 없이 표현한 「추사」의 올곧은 마음에 흠뻑 취한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림의 오른편 하단부에 있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글귀를 좋아한다. 그림에는 4개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오랫동안 서로가 잊지 말자”라는 뜻으로 언제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화려한 수사(修辭)를 쓰지 않은 담담한 표현의 정수이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속에서는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애틋한 바람이 서려있다. 이 글귀는 내가 마음으로 아끼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평생을 좋은 인연으로 지내면서 서로를 기억하는 정성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지난해에 ‘장무상망’에 대한 글을 쓴 일이 있다. 그 말의 의미, 『세한도』의 제작의도와 그 과정, 그림의 소개와 그 바탕에 깔린 교훈, 일본에서의 귀환과정, 『세한도』의 존재를 알게 된 사연, 이 인장을 그림에 찍은 사람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박철상」의 『세한도』를 읽고서 이 용어에 대한 관심을 재 상기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의 사용 연대는 전한(前漢) 시대로 올라간다. 후대에 당시의 와당(瓦當)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발견하여 두루 알려진 문구다. 아마도 노역에 동원된 무명의 와공(瓦工)이 문득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나 처자 그리고 친구를 그리워하며 무심코 새긴 글씨가 남아 전해진 것일지 모른다. 진즉에 중국에서 발견되어 많은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했는데 조선의 선비들도 익히 잘 알고 지내던 용어였다.
사실 그동안 이 용어에 대한 관련학자들의 주장하는 내용이 달라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이 인장을 누가 찍었느냐의 문제였다. 그림을 그린 「추사」인가, 아니면 그림을 받은 「우선」인가?
우리나라에서 추사체연구의 산실은 바로 ‘간송(澗松) 미술관’이다. 희귀한 자료가 많고 체계적인 연구 성과도 탁월한 곳이다.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최 완수」 실장이 오랫동안 연구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학예연구관을 지냈으며 서울대 교수인 「오 주석」(吳柱錫)교수는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란 책에서 이 인장이 금석학에 조예가 있던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북경에서 돌아와 추가로 찍은 인장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오」 교수 외에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세한도』를 그린 추사가 전체 여백의 공간미를 고려하여 찍은 것으로 필자를 포함한 다수가 이해하고 있었다. 더구나 인장의 사용법을 모르면 이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
현재 최고의 서예가/전각가인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에 의하면 전각(篆刻)은 금이나 상아, 또는 옥이나 나무 등과 같은 굳고 단단한 재질에다가 조형성(造形性)을 더해서 인간의 정신과 생명을 불어넣는 동양 특유의 예술 장르이다. 진나라의 문자인 전서(篆書)를 쓴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다른 해서나 예서, 그림이나 문양 등을 새기기도 한다. 전각은 보통 사방 한 치, 즉 가로와 세로가 각각 3.3센티미터 가량 크기인 돌에 문자를 새겨 넣는 작업이기 때문에 흔히 ‘방촌(方寸)의 예술’ 혹은 ‘서화의 꽃’이라고 불린다.
동양예술에서 낙관(落款)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줄임말로 작가가 작품을 마친 뒤 그 완성의 표시로서 작가의 인장(印章)을 찍는 과정으로 이렇게 낙관을 할 때 쓰이는 인장을 전각(篆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전각은 글씨를 새겨 넣는 작업이나 그 결과로서의 인장 모두를 뜻한다.
그런데 전각의 종류에는 첫째로 이름이나 호를 새기는 「성명인」(姓名印)과 「아호인」(雅號印)이 있고, 두 번째로 「한장인」(閑掌印)이 있는데 「한장인」은 평소에 좋아하는 시구나 격언, 잠언 등을 새겨서 작품의 여백에 찍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책의 보관을 위한 「수장인」(守藏印)이나 「감장인」(鑑藏印) 등도 있다. 다만 인장은 서예작품에서 최대한으로 아껴서 찍어야 한다고 한다. 붉은 색 인장이 강렬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인장도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당시에 지식인들 사이에 ‘장무상망’이란 용어는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권돈인」이 「완당」의 『세한도』를 본받아 그린 『세한도』에도 원형의 인장이 찍혀있다. 그는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로 바꾸어 송죽매(松竹梅)가 어울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완당」의 『세한도』는 제자인 「허소치」로부터 배운 갈필(渴筆)을 많이 구사했지만 「권돈인」의 『세한도』는 윤필(潤筆)을 강조하여 온후한 느낌을 준다. 훗날 「완당」은 「권돈인」의 그림을 보고 “공의 시는 높은 경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그러하다”라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다. 또한 제자인 「소치」도 「완당」의 『세한도』를 방작(倣作: 진품을 따라서 그대로 그리거나 만듦)한 산수화를 여러 폭을 그렸다.
여하튼 이 인장의 낙관을 누가 했느냐에 대한 각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나의 소장품임을 강조한 측면에서 보면 「이 상적」이 찍은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추사연구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의 학예연구가의 주장이 그만큼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까 이 인장은 「한장인」(閑掌印)으로 평소에 좋아하는 시구나 격언, 잠언 등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최초의 작가는 가능한 인장은 적게 찍고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풍조에 따르면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또한 『세한도』에 찍힌 인장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 그림과의 조화를 위해서였다면 아마도 「원형」이 제격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무상망이 주는 뜻에는 평소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잔잔한 꿈이 담겨있다. 평생을 가슴에 묻고 잊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또한 내 자신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토록 잊지 못할 추억과 우정을 나눈 친구는 누구인가. 과연 서로의 품격을 수용하고 격조가 있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있는가. 더구나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하고 그나마 가슴에 묻어둔 사람은 하나 둘씩 떠나고 없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그리운 일인가.
하지만 아무리 대외적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타인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인연을 유지한들 한 평생 가정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는 조강지처(糟糠之妻)의 역할만 하겠는가.
(2024.7.18.작성/11.6.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