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원 선배의 강권으로 노인합창단원으로 참여했다. 늘그막에 합창단원이 되니 마음이 마냥 설레었다. 노래연습장에서 친구들과 흥에 겨워 음정 박자를 무시한 채 대중가요는 즐겨 불렀다. 악보로 하는 공부는 60여 년 만이다.
우리 합창단은 여성 소프라노와 알토, 남성 알토로 나눈 혼성합창단이다. 첫날, 지도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중간 자리에 앉았다. 창단 멤버가 아닌 탓에 엉거추춤 빈자리에 앉았는데 선임 단원이 정해진 좌석이니 다른 좌석으로 가라고 했다. 첫날이라 주눅이 들어 있는데 자리마저 쫓겨나니 기분이 씁쓰레했다. 평생교육원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터라 앞쪽 빈 좌석에 가 앉았다. 앞자리에는 합창하는 모습이 잘 띄어 핀잔을 받을 것 같아 내심 부담스러웠다.
집에 돌아와 서가에 꽂힌 음악 관련 책을 찾고 인터넷을 뒤져 합창에 관한 공부를 했다. 합창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고 타인의 소리에 자신의 소리를 섞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서로의 소리를 경청하여 어울리면서 음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도 터득했다.
저녁에 TV 채널을 돌리다 팝페라 경연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스물두 살 청년이 ‘넬라 판타지아’를 열창했다. 세 살에 보육원에 맡겨졌는데 폭행이 잦아 다섯 살에 탈출하여 갖은 시련을 겪고 자란 청년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말에 마음이 짠했다. 우연히 듣게 된 이 곡이 마음에 들어 막노동하면서 틈틈이 익혔다고 했다. 오랜만에 영화음악 ‘넬라 판타지아’를 합창으로 만나니 감명으로 다가왔다.
송원길 작사 곡 ‘말 한마디’를 합창할 때는 위로의 말 한마디 긴장을 풀어주고 용서의 말 한마디 치유를 가져온다는 노랫말에서 내가 살아오면서 뱉은 말 자취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향수’를 연습하는 날이었다.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고……” 이 가사를 부르다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사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릿거리는 환상으로 나타나 가슴이 뭉클거렸다. 지도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안경을 닦는 척하여 순간을 모면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었다. 살던 집은 폐허가 됐다. 옮겨온 곳에서 남의 집 아랫방에 기거하다가 다행히 마을에서 제일 큰 집을 장만했다. 초가집은 매년 지붕 갈이를 해야 했다. 큰 채, 아래채, 방앗간 채의 지붕 갈이를 하려면 이엉 오십 통이 필요했다. 여름 내내 아버지는 밤을 지새우며 이엉을 엮었다. 비가 오는 날 밤은 방에서 새끼를 꼬았다. 새끼로 이엉을 단단히 묶지 않으면 갑자기 불어오는 노대바람이 이엉을 뒤집어 놓기 때문이었다. 나도 새끼를 꼬았으나 늘 타박을 받았다. 다른 일은 시작하자마자 권태가 났지만, 새끼 꼬는 일은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내가 꼰 새끼로 이엉을 맬 수 있겠다는 합격판정을 받았다.
달 밝은 밤은 등불을 켜지 않아 사위가 적요했다. 사그락사그락 이엉 엮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마당에 피웠던 모깃불은 꺼져 있었다. 집 베개를 돋아 고이시고 삼베적삼 단추를 푼 채곤히 잠든 아버지가 처연했다. 낮 동안 마당 가 울타리를 덮은 환삼덩굴에 은신했던 모기들이 까맣게 달라붙은 것 같았다. 모깃불을 다시 피웠다.
“엊저녁에는 모깃불을 다시 피워 덜 뜯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내게 하신 가장 묵직한 칭찬이었다.
가곡 ‘향수’를 연습하고 돌아온 날 밤, 꿈에 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에서 나는 집에서 약 3Km 떨어진 물끼를 살피러 저수지 둑길을 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하얀 중절모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말쑥한 차림의 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어데 가노?”
“비가 올 것 같아 물끼를 보러 갑니다.”
그 말씀만 남기고 아버지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셨다.
“아버지, 어디 가십니까?”
황급히 물어도 대답도 없이 산자락 길을 따라 황급히 사라지셨다. 우두커니 선 채 아버지를 부르다가 잠이 깼다. 돌아가신 지 사십 년 만에 꿈에서 뵌 아버지는 뽀얀 피부에 차려입은 의상이 맑은 기운을 내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함자만 읽고 쓸 뿐 문맹이었다. 어릴 때부터 농사로 익힌 작물과 야생초에 관한 생태 지식은 고등학교에서 생물 과목을 가르쳤던 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잡초는 농작물과 공생하며 윤작에는 지력을 높인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가금류와 가축을 팔아 농비로 쓸 뿐 도축은 하지 않았다. 달걀을 부화시켜 어리에서 자라는 병아리를 아끼고, 닭과 반려견을 귀히 여긴 탓인지 삼계탕과 보신탕을 멀리하셨다. 살아 있는 나무는 좀처럼 베지 않았고, 솔가리, 삭정이, 고주박이가 땔감이었다.
겨울방학 때 귀가하면 헛간에 매달아 둔 지게를 내려놓고 말씀하셨다.
“방학 동안 갈비 한 베까리 해야지.”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명령이었다. 갈비 베까리의 크고 작음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이제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갈비 베까리’란 말이 진한 향수로 다가온다.
나도 적잖은 나이에 이르니 죽음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다. 친구들도 하나둘 홀연히 떠나는 것을 보면 성큼성큼 내 차례가 다가오는 듯하다. 죽음을 연구한 학자들의 주장에 관심이 가고 그들의 주장을 수긍한다.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꿈이나 근사체험처럼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육체와 영혼이 유리되어 또 다른 영적 세계로 가서 먼저 간 영혼들을 만난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아버지와 세 번째 만남이 될 것이다. 영원한 만남이 되어 이승에서 못한 자식의 도리를 마저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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