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에 갔다와서
지난주에 대선때 국정원등 국가기관의 불법선거개입에 항의하며 40대 이남종씨가 자기 몸에 불을 붙였고 결국은 허망하게 죽었다. 내가 대학다닐때 91년도에는 신입생이던 강경대가경찰에 맞아 죽었고 그때부터 1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 놓았다. 눈물이 마를새 없이 연이은 죽음에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정부의 공권력에 맞서 항의를 했다. 졸업후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었으면 했지만 아직도 밀양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남종씨는 같은 40대이기에 더욱더 마음에 쓰렸다. 남들은 먹고 살기 바쁘다고 사회현실에 애써 눈감고 사는것이 당연한데 미련스럽게도 몸을 불살랐기에 토요일에 열리는 꼭 영결식에 가서 그분의 넋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토요일은 너무 바쁘기에 어제 밤에 후배들과 연락해서 가게 된 것이다. 대학때는 1년에 한번씩 갔던 광주를 졸업하고 20여년만에 간다고 하니 해운대에서 광주 망월동까지 280Km의 거리만큼 부담도 많이 되었다.
그렇지만 몸뚱아리 전체를 불사른 사람도 있는데 하면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 명절에 가는 마산까지는 길을 잘 알고 있지만 졸업후 한번도 가지 않았던 하동, 순천, 광주등 왠지 어색했다.
3시간만에 드디어 망월동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TV에서 만 보았던 두손을 모은 조형물을 보니 드디어 80년 5월 광주의 숨결이 느껴졌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80년 5월의 비명소리와 무참히 우리 시민들을 쏘았던 군인들의 총알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피묻힌 태극기과 돌들을 보니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큰 희생속에서 이루어 졌는가를 알수 있었다. 먹고 살기 바쁘다고 잊혀졌던 아픔들 물론 중1때 부마항쟁을 마산에서 있었다고 듣었지만 그 슬픔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와 오늘의 목적인 이남종씨와 부산대 후배인 양영진이 누워있는 곳을 관리자들에게 물어보니 시민공원묘지에 있다고 하였다. 국립묘지를 뒤로 한 채 후문으로 가니 88년 처음으로 왔던 광주 망월동 3묘역에 갔다. 묘비위에 붉은 머리띠를 보니 호흡이 가빠온다. . 머리띠의 주인들을 가까이에 가서 보니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던진 40여명의 이름이 있었다.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대학신입생때 경찰에게 맞아 죽은 강경대. 시인인 김남주, 명동성당에서 조국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자살한 조성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사연을 읽다가 호흡이 멎는듯 하여 읽기를 그만두었다.
후배가 이남종씨의 묘역을 찾았다. 어제 이곳에 묻었기에 땅이 얼었지만 국화꽃들은 아직 싱싱하였다. 뒤에 그분의 큰 영정을 보면서 저렇게 앳된 사람이 그 큰 결심을 했을때의 고민,번뇌가 떠오르며 속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잠시 묵념을 하였지만 쉽사리 입이 떼지지 않았다.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고 사랑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어떤 어머니와 중딩되는 아들을 데리고 우리가 묵념을 끝마칠때 묵념을 하셨다.
이남종씨 묘역을 나와 40여명의 민주투사들을 찾아뵈었다, 조심스레 그분들이 영면을 하고 있는 모역을 찾아보다가 부산대 후배인 양영진의 묘를 보니 더 마음이 흔들렸다. 엄마가 계신 부산에 있지 너는 왜 여기에 있노 누가 너를 찾아오느냐라고 묻고 싶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옆에 있는것이 좋겠지만 홀로계신 어머니한테는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이곳의 묘역들은 대부분 가족,고향을 등진채 80년 5월에 희생되신 분들과 함께 땅속에서 영면하고 싶어서 전국에서 오신것이었다.
문득 무명열사의 묘를 보게 되었다. 아무런 이름도 없이 차디찬 땅속에 34년동안 누워계신 저분은 누구일까 라며 저 죽음으로 도대체 무엇이 이루어 졌느냐라며 속으로 되뇌었지만 마음만 아파왔다. 특히 19세가 눈에 띠어 한 무덤가로 가보니 91년 보성고 3학년인 김철수의 묘였다. 91년 3월 문과수석이라는 글자밑에 5월 분신이라는 글자가 마음을 더 힘들게 한다. 이번에 수능을 친 내 큰딸도 19세인데 만약 수능공부를 안하고 몸에 불을 지른다면 애국투사 이전에 우리 가족들에게는 절대 지워질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될 것이다. 묘역을 멀리서 보니 태극기가 반으로 게양된 조기가 되어 3묘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냥 부산으로 가려다 이남종씨의 모교인 조선대를 가보고 싶었다. 물론 20여년전 영호남대학생들이 모인 조선대 후문근처의 식당에서 부산과는 다른 수많은 음식의 기억이 떠올라 조선대로 갔다. 예전에는 정문도 없었는데 이제는 정문을 통과하니 주차요금표시가 뜨는것을 보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수많은 학생들이 모였던 공터에는 이제는 인조잔디가 깔려 야구부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대의 상징인 아시아에서 제일 큰 본관모습은 그대로였다. 20여년이 지나니 내 모교인 부산대같이 빈공간마다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잊혀진 옛기억은 사라졌다. 그냥 나오니 그렇게 좋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어도 학원자주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현수막에 그대로 적혀있었다.
재단과의 갈등등 지난 87년 조선대의 아픔이 아직까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시대는 급격히 변해가는데 소통보다는 불통이 우리나라와 대학에는 아직 그대로인것 같아 씁쓸했다.
부산으로 오면서 해운대에서 광주까지 오늘 그래도 8시간의 강행군이었지만 마음의 응어리와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풀수 있어 좋았다, 물론 다 풀려면 나 자신이 좀더 적극적으로 20대 청춘때의 열정으로 더 분노하고 싸워야 하겠지만 .....
첫댓글 넘치는 열정에 탄복.
살아있는자의 부끄러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