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자식'에 대한 우리 말 유래 사전에 보면, '배운 데 없이 제 멋데로 막 자라서 교양이 없는 놈'을 지칭할 때
호로자식이라 부른다. 이의 원 말은 홀의 자식이다' 같은 뜻으로 '중국 북방의 이민족의 흉노(凶奴)를 일컫는
호로(胡虜)를 가르킨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첫 말인 '홀의 자식'은 아비 없이 홀로 자라서 예의 범절도 모르는 자식이겠으나,
'호로자식'의 호로란 동북지역에 거주했던 우리 동이족을 일컬음이며
한(漢) 족들이 흉노라 폄하하여 부르던 말이다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만주지역은 고조선의 강역이었고, 여진족은 고조선을 이어 받은 고구려 족이었으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대진국(발해국)을 수립했던 우리 민족의 태동지가 아니었던가.
거슬러 올라가면 여진족은 숙신,주신, 말갈 등으로 불리었으나 이는 고조선의 통칭이다.
호(胡)자는 멀 호의 뜻도 있으니, 세월이 참으로 오래된 나라이다
대조영의 대진국(발해국)이 14대 228년을 이어 오다가 926년 거란(요)에 멸망하고,
요는 1125년 금(金)나라에 멸망하는 역사의 악순환기를 거친다.
금(金)나라는 1115년 완안아골타(阿骨打)가 세운 나라로 고려 평주인인 김행(金幸) 4세손으로 되어 있다.
아골타의 7대 조인 '함보금사세기(函普金史世紀)'에는 김함보(金函普)가 金나라의 시조(始祖)로 되어 있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함보(函普)가 신라종성(新羅宗姓)인 김씨(金氏)이므로
국호를 금(金)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女直, 渤海本同一家)'라는 기록도 보이니, 동이족이다
金나라는 1234년 몽골과 남송에 의해 멸망한 뒤 1616년 누루하치가 金나라를 이어받아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통일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면 '호로자식'은 언제부터 지칭되어 왔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보자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청태조 누루하치는 선조임금에게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 수장시키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으나, 조선은 청의 도움을 거절했다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광해군 때의 明과 청나라 사이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숭명반청(崇明反淸) 정책을 씀으로 하여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고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후 청은 형제국에서 군신 관계로 고칠 것과 신사를 강요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으며,
인조는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청과 결전할 의사를 보이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같은 결정은 조정안에 주화론자(主和論者) 보다는 척화론자(斥和論者)가 득세, 청의 요구를 묵살한 것이다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 태종은 1636년 (병자) 12월9일 12만 대군을 일으켜 처들어 왔다.
인조는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며, 강화도의 함락 등 전세의 불리함이 계속되자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향단에서 굴욕적인 항례를 하게 되며, 이후 청나라에 복속되고 만다
이 참혹한 전쟁의 결과는 수 만 양민의 납치와 고아의 양생을 가져 왔으며,
이후 부녀자들의 환향(화냥년)에 따른 이혼 문제 등이 사회, 정치적 문제로 크게 대두된다
볼모로 잡혀갔다가 환국한 소현세자는 독살되고,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 계획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소현세자는 볼모 생활 중 독일인 신부였던 아담 샬(Johanne Adam Schall, 1599-1666)과 조우, 친교를 맺게 된다.
마담 샬은 복음서, 신학입문서와 과학서 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세자는 1644년 2월 신부가 준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신자였던 청나라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8년 만에 귀국하나
그 해 4월 34살의 짧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 선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마담 샬과 세자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던 조선 왕실과 민중을 위한 원대한 교화의 꿈은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서양 문물을 접하고 시대에 뒤진 조선 사회를 선진화 사회로 개혁하고자 했던
세자의 이 계획은 기득권 세력 유지와 변혁을 두려워한 유교 중심의 집권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사악한 이단자요, 반역자였을 뿐이었다
수 천 년간 하늘민족(天孫民族)의 터전이었으며,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나던 드넓은 중원의 고토 회복과 평등사회를 꿈꾸었을 소현세자.
370여 년 전 이미 복음서의 내용을 보며 오늘을 보고 있음이리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호세아서 4;6)"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어져서 깨닫지 못함이라(사 44; 18).
세자는 이 백성이 다시 봉기하여 동북공정에 맞서 다물을 하고자 염원한다면,
정략에 희생된 짧은 생애이나 '내가 이 땅에 헛되이 태어나지 않았었다'고 자위하지 않았을까
조선을 부모의 나라라 칭했던 청나라, 사대주의와 붕당정치로 병란을 자초하여 나라를 망친 조정.
고조선 이래 동이 후예들이 부침을 거듭하며 다시 일어났던 청의 침략은 처절한 동족상잔이었다
청나라 조정은 1667년 이후 산해관, 희봉구 등 9곳에 변문을 설치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경계로 삼아 한족(漢族)의 출입을 금지한다.
유조변(柳條邊 ; 버드나무 방책)은 산해관을 시작으로
동북으로 장춘까지 그리고 개원에서 압록강 하구까지 약 1320 Km에 이른다
버드나무는 신령스러운 신목(神木)이었으며,
고조선의 성역(聖域)을 한화(漢化)로 부터 지켜내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고조선 강역 일부인 요동과 만주를 지키려 안감힘을 쓰던 청나라 조정,
허나 한반도 조선은 소중화사상을 자청하고 형제들을 오랑캐로 불러왔다
역사는 현재를 사는 이들의 교훈이다
행촌 이암(杏村 李암) 선생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역사를 잃음은 곧 나라의 혼을 잃음과 같다' 고 피맺친 절규를 하고 있다
,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는 침탈 당하고, 제자리를 잃고 헤메는 이 싯점에
역사 인식을 통한 민족사의 회복이 바로 다물이다.
한 시대를 거울 삼고, 낱말 하나에서도 가려 쓰는 지혜를 가져야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들을 '호로자식'이라 부르고 있음을...
-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한문수 2008. 1. 17. 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