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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과
성령이 주도하는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을 살피는 것만해도 우리들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준다. 어떠한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 따른다할지라도 멈추지않고 계속하여 선교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를 감동케한다. 사도바울의 선교정신은 오늘날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선교정신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놀라운 선교의 역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선교사역이었다. 성령이 주도하는 3차 선교여행은 어떠했는지 순례의 길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 경로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3차 선교여행 역시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이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다. 그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대답한다.
(행 19:12,6)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에베소교회 선교를 시작하면서 에베소교회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았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성령의 임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며 사역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제자들을 위해 안수 기도하자 성령이 임하였고 방언과 예언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순절 성령이 내려진 후에도, 사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에도 여전히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선교여행이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이라는 증거이다.
사도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이제는 다시 보지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고서 다음과같이 이야기한다.
(행 20:23-24)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두로 교회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막았다.
(행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까지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위험성을 전해주었다.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날밤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신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며 성령께서 주도하는 사역이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마무리되는 사역이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성령을 빼면 어떻게될까? 성령이 없는 선교여행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서 성령이 없는 선교사역은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사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에베소에 도착하게되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는 잠시 머물다가 안디옥으로 가기위해 에베소 교인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가이사랴로 이동한다.
(행 18:19-22)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지금껏 선교했었던 사도 바울의 열정으로 보았을때 에베소에서 선교의 의지를 보이지않고 일찍 떠난 것은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다.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이었기에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낼 수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에베소는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곳이다. 다른 지역에서 하지않았던 일을 에베소에서 실행한다. 어떤 일인가?
(행 18:19-22)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에베소에 와서 선교 동역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곳에 머물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선교지에 동역자를 머물게한 일은 처음이었다.
(행 18:24-26)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동역자를 두고갈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중요하였거나 보살핌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사랑스런 교회였을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서 있는 동안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를 가르쳐 주었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오기까지 에베소교회를 세우는데에 필요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또 특별히 챙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로 세운 것이다.
(딤전 1:3-4)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때는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친 후 로마에서 2년간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이다. 이 때에 디모데를 데리고 그레데 섬을 지나 에베소까지 왔으나 계속 동행하지 못하고 디모데를 그 곳에 남겨둔 채 마게도냐로 떠났다. 에베소에 사역자로 디모데를 두어 에베소교회를 돌보게한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중요하게 여겼었다.
다른 모든 지역도 사도 바울의 중요한 선교지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정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는 교회라는 것이다. 2차 선교여행의 마지막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곳에 두었고 3차 선교여행 때에 3년반을 머물면서 가르쳤고 3차 선교여행의 마무리단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특별한 시간을 보내었었고 로마로 간 이후에도 디모데를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 세운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정말 사랑받은 교회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는 사랑받을만한 사랑스런 교회였을 것이다.
2차 선교여행 당시 사도 바울은 에베소가 있는 아시아로 가서 선교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령이 막아 가지 못했었다가 3차 선교여행 때에 비로소 에베소를 찾는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와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한다. 그 질문은 무엇인가?
(행 19:1-2)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묻는 질문에서 바울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요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이요 성령이 함께하는 사역이요 성령이 인도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만큼 선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이 질문은 사도 바울이 성령의 임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후 에베소에서 성령의 임재의 역사들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사도 바울의 이 질문은 각 교회마다 상황이 다르고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에 사도바울은 교회에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고자 질문한 것이다. 과거엔 교회를 허물던 자가 이제는 교회를 세우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려는 사명자가 된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에게 안수기도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이 에베소 교회 제자들에게 안수함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임한 것이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다. 그러자 에베소에서 성령의 권능이 계속 임하였다.
(행 19:9-10)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에베소에서는 얼마나 머물렀었는가?
에베소 교회는 3년이상 열정을 다해 성도들을 가르칠정도로 애정을 쏟았었던 교회이다.
(행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에베소는 삼년 이상이나 바울의 사업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 교회가 세워져 번영하였으며 이 도시로부터 복음이 아시아 전역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 가운데 전파되었다.”(행적, 291)
에베소는 아시아 복음의 본부가 되었던 교회이다. 에베소교회의 선교를 통해 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9장 10절에서 에베소라고만 하지않고 “아시아에 사는”이란 표현을 통해 에베소뿐만 아니라 그 인근 지역 곧 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있을 때 세워진 교회들은 어떤 교회일까?
(계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본부를 두고 아시아 일곱 교회를 복음화하였다.
에베소에서는 어떤 일들이 발생되었는가?
1)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행 19:11-12)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에베소 교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과 예언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날마다 말씀을 연구함으로 계속해서 성령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해도 병이 낫고 귀신도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교회에는 얼마나 큰 힘을 받게되었겠는가? 성령의 역사가 사도 바울을 통해 여러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교사역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도구가 될 뿐이다.
어떤 손수건과 앞치마가 기적을 만드는 힘이 있겠는가? 성령이 함께할 때 손수건과 앞치마에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할 때 손수건과 앞치마에도 성령이 따라가셔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듯 우리들이 성령과 함께한다면 성령께서는 그 무엇으로도 역사를 일으키게하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도구가 될 때 성령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기 전에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할 것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그분이 사용하도록, 그분이 사용하시기에 좋도록 우리 자신을 도구로 드려야할 것이다.
2) 바울의 사역을 보고 흉내를 내보려고 귀신을 좇아내려다가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에게 도망친 일이 있었다.
(행 19:14-16)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을 좇아내려다 오히려 귀신에게 도망친 것은 귀신을 좇아내는 일도 성령이 함께하지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과 함께할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성령께서 하시며 성령께서 함께 도우신다는 것이다. 선교사역을 우리만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함께 도와주시도록 간구하는 헌신과 봉사가 되어야할 것이다.
“영혼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은 항상 가장 해박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웅변이나 논리가 아니요 성령의 아름다운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는 조용하고 분명하게 성품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킨다. 하나님의 성령의 세미한 소리가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다.”(선지, 169)
우리들이 알아야할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 하나님의 사업이,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처럼 사도 바울과 똑같이 흉내를 내면 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다른 교회가 하기 때문에 똑같이 흉내를 내면 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성령이 없이,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으로는 결코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다.
등과 기름이란 재료만 준비했다고, 모양을 똑같이 갖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등잔의 심지에 불이 붙지않고는 밝게 빛이 나지 않는다. 등잔의 심지에 헌신이란 불이 붙을 때 성령께서 함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헌신없이 빛나는 등불은 없다. 성령이 함께하지않고 밝게 빛나는 등불은 없다. 우리들이, 교회가 성령이 함께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한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리지않고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가? 모든 변화와 모든 결과와 모든 열매는 성령의 열매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결과이다.
3) 마술사들이 예수님을 믿고 마술책을 불사르는 일들이 일어났다.
(행 19:19-20)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 변화들이 생겼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자 그들의 모든 삶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책 은 오만이나 되는 책들을 모아 불사르게된 것이다. 변화는 즉각 일어났다.
‘은 오만’에 대한 화폐 단위는 아마도 ‘드라크마’(Drachma)이었거나 아니면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Denarius)이었을 것이다. 이 두 화폐의 가치는 거의 같은 것으로서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이를 오늘날 액수로 환산한다면 약 8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것으로보아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 믿음이요 큰 결단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어떻게 이렇게 큰 금액에 해당하는 책들을 쉽게 불사를 수가 있었을까?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의 가치에 비하면 ‘은 오만’이나 되는 책자도 불에 태울정도밖에 되지않는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변화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4)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공이 자신의 업이 위협을 받자 소동을 일으켰다.
(행 19:24-28)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에베소 사람들이 섬겼던 아데미는 어떤 신인가?
에베소 사람들은 항해와 풍요의 여신 아데미 여신을 섬겼다.
아데미 여신의 신전은 신전의 길이 130m, 높이 20m, 기둥이 117개였었다.
아데미 여신 신전은 에베소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
“은감실은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 신전의 작은 은제 모형을 말하며 은장색이란 은감실을 만드는 은 세공업자를 말한다. 에베소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을 사길 원했다. 에베소의 은세공업자들은 이것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바울의 전도 때문에 점점 판매고가 떨어지고 수입이 줄어든 은장색들의 시위로 큰 소동이 일어나자 바울은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에베소를 떠남으로 3년동안의 에베소 전도는 끝나게 되었다.”(사도행전 김기곤저, 118)
사도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되자 아데미 여신을 믿는 자들이 많이 줄게되었다. 그러므로 아데미 여신의 신상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게되고 그 결과 은장색공들의 수입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그들의 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된 것이다. 결국 이 은장색공들이 선동을 일으키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행 19: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이때 바울은 어디에 있었는가? 왜 바울을 붙잡지 못하였는가?
“그들의 분노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 폭도들은 바울과 같이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가지고 이들과 함께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울이 숨은 장소는 그리 멀지 아니하였고 그는 곧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의 위험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행적, 293)
소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매년 한 번씩 에베소에서는 여신 아데미를 영화롭게 하는 특별한 예식이 거행되었다. 이 예식에는 그 도의 각 지방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이 절기 동안에 가장 장엄하고 화려한 축제들이 거행되었다.”(행적, 291-292)
“ 바울의 전도는 이교 숭배에 현저한 타격을 주었고, 그 결과 거국적 축제에 참석하는 숫자와 예배자들의 열심은 눈에 띄게 하강하였다”(행적, 292)
“또한 다른 불만의 원인이 있었다. 에베소에서는 신전과 아데미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작은 감실(龕室-사당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과 우상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규모가 크고 이익이 많은 사업이 발달해 있었다. 이 사업에 재미를 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이익이 감소되는 것을 알고 모두 연합하여 그 달갑지 않은 변화를 바울의 전도의 탓으로 돌렸다.”(행적, 292)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가?
(행 19: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그들이 모여서 2시간동안 아데미를 위해 외쳤다는 것은 대단한 열정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우상에게도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열정은 얼마나 더해야하겠는가를 깨닫게해준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의 열정은 어떠한가? 무가치하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열정으로 투자하는 시간에 비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지 않는가?
누가 아데미 여신에 대한 소동을 잠재웠는가?
(행 19:35)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행 19:40-41) 『[40]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41]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서기장이 소동을 멈추게하였다. 생각지않는 자로부터 도움을 받게된 것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아데미 여신의 소동을 잠재우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역사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한 관원을 일으켜서 당신의 사도를 옹호하게 하시고 소동하는 폭도들을 제지하게 하셨다. 바울의 마음은 그의 생명이 보존되었고 에베소에서의 소동으로 그리스도교의 평판이 떨어지지 않은 데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충만하였다.”(행적, 295)
에베소에서 머무는 동안 특별히 한 일은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편지를 썼다.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하고 있던 동안 후반에 기록하였다. ”(행적, 298)
에베소의 선교가 어떠하였는가?
(고후 1:8-10)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에베소가 있는 아시아 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교를 하였다. 선교가 쉬웠던 것은 아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정말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였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선교가 쉽게 선교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을 정도니 그 핍박과 압박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까지 갔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이다. 이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이러한 핍박과 압박, 죽음의 위협, 생사를 왔다갔다하는 “심한 고생”,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통을 통해 전해진 것임을 잊지말아야할 것이다.
에베소에서 다음 행선지는 어디였는가?
(행 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마게도냐로 갔다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다음 헬라지역으로 간다.
헬라는 어디를 말하는가?
(행 20: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헬라=그리스이며, 아테네와 고린도지역인 아가야지역을 말한다.
헬라 지역인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쓴 편지서는 무엇인가?
“제3차 전도여행 중 바울은 고린도에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쓴다.”(사도행전 김기곤저, 121)
“바울이 그처럼 엄숙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갈라디아 사람을 경고하고 권면하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지시를 통하여 된 것이었다. 바울은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고 확고한 신념과 절대적인 지식의 보증을 가지고 편지하였다. ”(행적, 386)
헬라에서 마게도냐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
(행 20: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헬라에서 석 달동안 복음을 전하고 수리아로 떠나고자하는데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헬라지역과 가까운 마게도냐로 육로를 통해 도망을 가게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복음을 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로 건너간다.
(행 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배를 타고 건너가서 일주일을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중까지 강론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행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바울은 마지막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자 하였다. 이제 드로아에서도 마지막 작별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 이제 드로아에서 떠나기 전 성도들에게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자 모인 것이다.
드로아 성도들이 적지않는 위로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행 20:9,10,12)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드로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고별설교를 듣던 중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창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이다. 바울이 유두고를 다시 살려주므로 그곳에 모인 모든 성도들이 위로를 받게되었다.
드로아를 지난 다음 행선지들은 어느 곳인가?
(행 20:14,15)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을 지낸후 앗소로 가고 앗소에서 배를 타고 미둘레를 지나 기오섬과, 사모섬을 지나 밀레도에 이르게된다.
밀레도에서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1) 아시아에서 지체하지않기위해 에베소를 지났기 때문이다.
(행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2) 앞으로 잘못된 교리로 에베소교회를 어지럽힐 일에 대해 경계를 하기위해서이다.
(행 20:28-30)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앞으로 교회에 닥칠 위험을 깨닫게해주셨다. 그 위험에 대하여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엄습하게 될 위험들이 사도에게 알려졌다. 사도는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장래를 내다보면서 교회가 안팎의 원수들에게 당해야 할 공격을 보고 교회를 위하여 몹시 걱정하였다. 그는 진정한 열심을 가지고 깨어 그들의 거룩한 임무를 지키라고 형제들에게 명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 중에서 행한 자신의 불요 불굴의 수고를 예를 들어서 지시하였다”(행적, 395)
3)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위해서이다.
(행 20:22-25)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을 하고 고소, 로도, 바다라를 지나 두로에 도착한다.
두로에 도착한 후 어떤 일이 있었는가?
(행 21:3-4)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서 7일을 머물게되었는데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입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한다. 이러한 일은 바울의 선교여행이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사역이란 증거이다.
두로에서 작별후 돌레마이에 들려서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가이사랴로 갔다.
가이사랴에서는 누구를 만났는가?
(행 21:7-8) 『[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아가보 선지자가 어떤 예언을 하였는가?
(행 21:10-12)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아가보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와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결심하였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 바울은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필요하다면 감옥과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였다.”(행적, 397)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무리들을 충동함으로 붙잡히게 되었다.
(행 21:27-28)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행 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이 가장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시고 사도 바울을 보호하셨다.
(행 21:31-32) 『[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로마의 군대로하여금 사도 바울의 목숨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전히 보호를 받는 사도 바울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죽이고자 계획을 세웠다.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꾸몄는가?
(행 23:12-15) 『[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합법적인 재판을 통하여 바울을 죽이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자 유대인들이 암살단을 조직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생질이 이 사실을 알고 바울에게 고하고 바울이 백부장에게 청하여 천부장에게 그 비밀을 전달되어 그 계획은 무산이 되었다.
(행 23:16-17)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그럼, 바울의 생질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동맹한 자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 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였다.
이와 같은 잔인한 음모를 견책하는 대신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이 일에 열렬히 동조하였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였을 때에 그는 사실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사건에 개입하셨다.”(행적, 413-41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살인 계획을 세우기 전날 밤에 먼저 사도 바울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계획을 세우셨다. 얼마나 감사한가?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살인계획을 세우기 그 전날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신다고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의 생명에 대한 보증수표인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도 바울은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로마에까지 가는 모든 여정이 힘들고 험난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안전하게 도착하였다.
(행 28: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로하여금 로마로 직접 압송하는 배를 타게하시고 배에서 환대를 받으며 로마에 입성하게하셨고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게하신 것이다. 이로써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이 예루살렘에서 마치게하시지않고 로마에까지 가게하셔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게하셨다.
(행 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많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역이었으며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었다. 결코 멈추지않고 끊임없이 달려온 이유는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어떤 핍박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목회 사업에서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가 선포한 진리는 성령이 그에게 나타내신 것이다.”(행적, 401-402)
“바울은 그의 전 목회 사업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의 지도를 구하였다. ”(행적, 402)
지금도 이 선교여행이 멈추지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선교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마다 선교사역이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 된다면 결코 멈추지않는 사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