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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십자가와 사랑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서론 - 구원과 변화의 레시피
변화와 완전 구원의 문제에 왜 사랑이 꼭 들어가야 되는가? 왜 사랑인가? 사랑은 하나님의 품성을 아는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승리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물음에 정확한 답변이 될 것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사랑은 그리스도인 덕성의 최고봉인데 이는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근본 동기는 사랑이었다. 요한은 단순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말한다. 사랑은 그분의 품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1. 살아서 승천할 사람들에 대한 동경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 살아 있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성도들을 예표하였다. ”(선지, 227) 재림신자들은 14만4천인과 관련하여 재림 때 살아있어 승천하는 무리에 들고자 하는 동경이 은연중에 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 승천할 수 있는 믿음 / 승천할 수 있는 성품 / 승천할 수 있는 완전 이런 동경이 있다.
재림교회 안에서 완전론에 혼란을 일으킨 말씀들 / 재림교인들의 중심 성구는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1888년 이전 대다수의 재림교인들은 이 구절을 “예수님이 가진 믿음”으로 해석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완전히 죄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암시해왔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1, 4, 5). 이것은 매우 높은 표준이다. 그들은 “흠이 없”는 자들이다. 제임스 왕 역은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로 번역하였다. 이것을 완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충분한가? 아니면 144,000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흠이 없이 완전해야 하는가?” 만약 칭의 이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재림교회를 100년 이상 분열시켜온 주제이다.
3) 실물교훈, 69쪽의 구절은 재림교인들에게 완전 문제와 관련하여 큰 혼란을 일으킨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실물교훈, 69).
이 말씀의 핵심은 “품성이 완전하게 재현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재림교인들은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라는 구절을 읽을 때, 다소 감정적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1세기의 바리새인들처럼 재림교인들은 세세한 생활 방식의 완벽함을 통해 완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교인들은 건강개혁을 통해 완전해 지고자 한다.
조지 나이트의 과거 경험 - 19세 때 회심하고 과거의 회의주의자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칭의의 옷을 입었다. 그 옷을 입고보니 그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완전한 건강개혁자가 되기 위해서 처절한 싸움을 한다. 몸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완벽한 정신은 완벽한 몸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처절한 절제생활 3개월 만에 75 킬로그램의 체중을 55 킬로그램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그러다 죽는다는 염려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사울(바울)처럼 완벽한 바리새인이 됨
(2)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고행하던 루터가 됨 (3) 개심의 경험을 하기 이전의 갈등하고 투쟁하던 요한 웨슬리가 됨 (회심전의 사울) (4) 완전해지고자 하면 할수록 더 자기중심적이 되어감. (5) 완전해지고자 하면 할수록 더 비판적이 됨. (6) 완전해지고자 하면 할수록 더 가혹해지고 더 부정적이 되어감. (7) 완전해지고자 하면 할수록 더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 됨.
그리스도의 성품을 재현하려고 노력할수록 나이트 교수는 자신의 성품이 “마귀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는 경험을 했다. 교제불통의 실패한 완전주의자. 교회와 자신에 대해 좌절한 후 그는 목사 신임서를 반납하고 6년 동안을 방황하였다. 그러다가 기독교에서 답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완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와 같이 완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사망의 길로 인도한다. 불행하게도 요즘도 우리 재림교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한다는 미명하에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길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고안해낸 길이다. “너는 재림교인이긴 했으나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너는 모든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인 나를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이트 교수님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재림교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재침례를 받게 되었다.
2. 어떻게 사랑이 율법을 성취시키는가?
현재 재림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교리적인 진리와 ‘진리’(TRUTH)되신 구주와 연결된 구원의 기쁨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모심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그들은 교리적인 진리뿐만 아니라 ‘진리’(TRUTH)되신 구주도 함께 소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도 필요하고 교리적인 진리도 필요하다.
“외관적 의식과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이 바리새인의 의의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랍비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여진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의와 신앙을 분리시켰다. 의식의 준수에는 철저한 반면에 저희의 생애는 부도덕하고 저속하였다. 그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그런 의는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소망, 309)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장 20절). 율법이 거룩한 것은 분명하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를 지키는 것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로마서 10장 3절)함으로써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가르치셨다.”(보훈, 53-5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십계명 전체를 지키는 우리가 남은 자손이라고 믿는다. 과연 십계명을 모두 지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율법을 “사랑”이란 한 단어로 요약하시고, 율법을 사랑으로 읽으셨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자는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단순히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다.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사랑의 최소한’이다.
사랑이 어떻게 율법을 성취시키는가? 첫째, 사랑의 요구는 동기와 관련이 있다. 선행 그 자체는 율법을 충분히 성취시키지 못한다. 바리새인은 자선을 했지만, 주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나팔을 불었다(마 6:2). 그들은 기도했지만, 거리의 잘 보이는 곳에서 모든 사람이 그들의 경건을 볼 수 있도록 했다(마 6:5). 이런 선행은 무가치하다. 왜냐하면 그 배후의 동기가 자기 영광이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불의, 토색,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그는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냈다. 그러나 그의 선행은 무가치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켰지만, 성취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행치 않았기 때문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랑이 행동을 포괄하는 원리 규칙들은 부득이 하게 구체적이어서 간격들을 남긴다. 교회가 하라고 하는 모든 일을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모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법이 사람의 생애의 모든 법을 구체적으로 다 적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에 대한 교회의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원리에 입각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저런 것을 하라고 행동을 세세하게 규정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원리의 종교이다. 기독교의 언어는 끊임없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가 아니라 “사랑이 율법을 성취시킨다”이다.
셋째, 사랑이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은 그것이 규칙들 너머로 가기 때문이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조언에 젊은 부자 관원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라고 말했다. 율법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그는 그 자구를 철저히 지켰다. 예수님께서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막 10:21)고 요청하셨을 때, 그 젊은 부자 관원은 슬퍼하면서 돌아갔다. 그는 그저 율법의 사법적 요구만을 충족시켰을 뿐이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는 율법을 지키긴 했지만, 성취하지는 못했다. 사랑의 요구는 또한 규칙들을 넘어서 간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덜 묻고 중요한 것은 더 묻는다. 덜 제약적이고 더욱 더 많이 요구한다. 더욱 대가를 많이 치른다. 단순히 규칙들만을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을 구원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며,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이다. 전자의 순종은 노예 생활이요, 후자는 완전한 자유이다.
항상 문맥을 읽으라. 논란이 된 말씀 해석 - 실물교훈, 69쪽을 문맥을 통해 살펴보자.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생애에는 자라나는 일도 없고 열매 맺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그대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대가 그리스도의 정신 곧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의 정신과 그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정신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자라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품성에 무르익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의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그대의 신념이 더욱 확고해져서 그대의 사랑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순결하고 고상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 가운데서 그대는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욱 많이 반사하게 될 것이다”(67-68쪽).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69쪽) 라는 구절이 나온다.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실물교훈, 69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완전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반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품성은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이요, 완전이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신다
살면서 살면서 내가 가진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더이다.. 짐처럼 굳어진 내 것은 변하기 좋아하는 음식 같아서 금새 버릴수 밖에 환호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기에..그것들을 내려놓은 후에야 물같이 흐르는 당신의 사랑이 내 안에 흐를수 있음을 여러번 고통속에 아파본 후에야 알게 되더이다.. 살면서 살면서 신념처럼 믿었던 내가 가진 사랑으로 당신을 드러내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더이다..내가 가진것들은 욕심의 때와 세상의 이기심이 섞여 그것들을 붙잡았을 땐 참 평안이 없었음을 여러번 넘어진 후에야 알게되는 진리이더이다.. 살면서 살면서 보이지 않은 가치, 보이지 않는 사랑에 나를 맡기기란 정말 어려운 것을.. 우선 눈에 보이는 것들로 내 안을 채우려는 어리석음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참 쉽지가 않았음을 오랜세월 지낸후에야 차츰 깨닫게 되더이다.. 살면서 살면서 나를 비우고 사랑의 흐름으로 내 속을 채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이다. 빈마음으로 살아 가고픈 작은 소원이 있을지라도 내 속에 나를 이기고 비워내기란 참으로 힘겨운 투쟁과도 같음을 주님을 알아가면서 깨달아가는 진리이더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후5:14)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대한 능력을 극히 적은 부분이라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랑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1-4)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사랑으로 지킨다. 십계명의 전문(前文)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출 20:2)이다. 구원은 계명을 지킬 의무에 앞서서 주어졌다. 애굽에서 구출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굽에서 구출되었기에, 그들은 십계명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십계명에 대한 준수가 구원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신앙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저 율법의 자구만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명”하면 ‘의무’란 개념이 아니라, “사랑”이란 이미지가 먼저 마음에 떠올라야 한다. 계명을 지키는 백성은 사랑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품성의 완전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안식일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 철저히 드리고, 예배 철저히 참석하고, 십계명 철저히 준수하고, 건강개혁 철저히 할 때 이루어지는가? 엘렌 화잇은 품성 완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경건의 토대이다. 우리의 공언이 어떠하든지, 그의 형제에 대한 이기심 없는 사랑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순결한 사랑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시도함으로써는 결코 이 정신을 소유하게 될 수 없다. 필요되는 것은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는 것이다.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 몰입될 때, 사랑이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우러나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 복 주려는 충동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올 때 달성된다”(실물교훈, 384).
그저 죄 없는 생애를 살아서 완전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것을 성취하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사도 바울이 그 비법을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바로 사랑의 방법이다. 성경은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요구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불로 연단한 금이 필요하다. 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남은 교회이 정체성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으로 바꿔 읽을 수만 있다면, 재림교회는 라오디게아 상황을 탈피할 수 있는 금, 즉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과학자인 아서 제이욘스(Arthur Zajonc)는 상자 안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 그 내부 표면은 그 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도록 장치하였다. 상자 내부에는 오직 빛만이 있었다. 만일 상자 내부에 있는 빛을 들여다본다면 무엇이 보일까? 오직 빛 자체만 존재하는 그 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완전한 흑암, 즉 텅 빈 공간에 어둠만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떤 물체에 반사되지 않는 한 그 빛은 보이지 않는다. 제이종크는 막대기를 상자 안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옆면으로부터 들어간 그 막대기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가는 빛줄기가 그 막대기를 비추는 듯이 보였을 뿐, 상자 내부는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다른 곳은 전혀 빛나지 않았다. 오직 막대기에서 반사되는 빛만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빛은 어둠이었다. 달에서는 아무리 많은 태양빛이 비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제이종크의 상자처럼 극히 제한된 빛만이 반사될 뿐이다. 왜냐하면 달에는 태양빛을 반사할 만한 공기나 습기가 없고 가스나 증기가 없기 때문에 화려한 빛깔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요점은 무엇인가? 반사하는 물체가 없다면 빛은 완전한 어둠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아주 오래전, 쌀쌀한 2월 어느 날, 뉴욕의 맨하탄 번화가에 남루한 옷을 걸친 어린 소년 하나가 몸을 움츠린 채 덜덜 떨며 커다란 구두가게 앞에 서서 진열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신발은 발가락이 보이게 헤어져 있었습니다. 때마침 멋진 마차를 탄 귀부인이 지나가다가 소년에게 말합니다. “애야 이 추운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네, 방금 하나님께 구두 한 켤레만 보내 달라고.. 기도하던 중이에요” 소년이 귀부인을 쳐다보며 수줍게 말 합니다. 부인은 남루한 소년의 손을 들고 따뜻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소년을 한 곳에 세워둔 채 주인에게 소년의 발에 맞을 구두와 양말 몇 켤레를 주문합니다. 그리고 상점 한 구석 의자에 소년을 앉히고 배달된 따듯한 물과 수건을 가지고 남루한 소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땟물이 자르르한 소년의 더러운 발이, 장갑을 벗은 예쁜 귀부인의 손에 뺏겨 구석구석 따사롭게 간지러워집니다. 그 발은 수건에 말려지고 새 양말 속으로 들어가 멋진 구두에 포장되더니 카운터에 들린 귀부의 손은 흔들리고 미소를 흘린 입술에서 포근한 시 한편이 흐릅니다. “애야, 이젠 발이 좀 따뜻하고 편했으면 좋겠구나” 그러자 소년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귀부인을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줌마, 아줌마는 누구세요?” “하나님 부인이세요?” "
결론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온전하리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8)
아무도 사랑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못한다. 사랑은 모든 창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신학이나 생활방식이나 신조나 믿음 등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분의 은혜를 힘입어 나타낼 수 있다면 아무도 감히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 때에 거기에는 강력한 영향력이 나타난다. 아무도 무아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반박할 수 없는 최종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온 우주가 하나님께 굴복한다. 숱한 의문과 도전들이 있다. 이것을 극복할 유일의 방법은 사랑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8: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예수의 마음, 예수의 기쁨처럼 이타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그 사랑이 역사하는 믿음이 완전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순수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한다. 그대들이 갈바리를 바라볼 때에 그대들의 영혼이 아무런 일도 행함이 없이 잠잠히 있거나 그대들 자신을 잠들도록 할 것이 아니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 곧 역사하는 힘이 있고 이기심의 타락에서 영혼을 순결케 하는 그러한 믿음을 창조해 줄 것이다. ”(2기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