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왜 불법을 주체로 삼았는가? <개벽사상과 종교 공부> 중에서
백낙청 : 앞서 불법을 주체로 삼았다는 점은 후천개벽사상 중에서도 원불교의 특징이라는 이야기가 언뜻 나왔습니다. 이어서 그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소태산이 불법을 주체로 삼은 회상을 창립하신 데 따른 이점은 무엇이고 또 거기에 부담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었을까 하는 논의를 해보죠.
방길튼 : 소태산은 불법으로 주체를 삼겠다고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소대산의 일생 중 변산 주석기(駐錫期, 1919년 12월 말 변산 입산~1923년 8월경 하산)가 있어요. 당신이 불교에 직접 들어가셔서 단순히 불법을 아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직접 실행해보고 판단하시려고 그 기간을 가지셨죠. 이때 소태산의 입산 목적은 불법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었지요. 소태산의 발심과 구도의 주제인 '의심'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법과 상통합니다. 이런 점에서 소대산은 자신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가 많다(「대종경」 서품 2)고 회고한 듯합니다. 소태산은 "불법은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대종경」 서품 3)라고 밝힘으로써 불법은 성품을 드러내는 교법이자 생사와 인과를 밝히는 교법이며 또한 수행길을 잘 갖춘 교법이라고 명시합니다. 이처럼 소태산이 제시하는 불법은 마음을 깨달아 사용하는 마음공부법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부처 불(佛) 자는 각(覺)이라, 만법을 깬다는 뜻이다”라고 해설합니다. 즉, 불법은 역사적인 불교에 한정된 뜻이 아니라 깨달음의 가르침을 지칭합니다. 정산 종사는 "불(佛) 은 곧 깨닫는다는 말씀이요 또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만법의 근원인 동시에 만법의 실재"인 " 원(圓)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하였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다만 빈 이치에 불과한 것"(「정산종사법어」 정륜편 1)이라며 깨닫는 법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불법은 마음을 깨달아 사용하는 공부법입니다.
결국 불법의 불(佛)은 곧 깨닫는다는 말씀이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깨어 있는 마음으로서 ‘정신 차린 경지'이며 ' ‘정신을 챙긴 상태'입니다. 결국 불법은 마음공부에 전력하는 정신개벽의 중요한 요법입니다. 물질개벽 시대에 정신개벽을 할 때 불법이 마음공부에 효과적이면서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물질문명을 활용하는 데도 불법을 주체로 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판단입니다. 특히 도학과 과학을 병행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 집착의 팅 빈 마음일 때, 걸림 없이 깨어 있는 마음일 때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할 수 있으므로 과학 문명도 잘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결국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법, 마음공부에 효과적인 불법을 주체로 할 때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정전」 수행편 「최초법어」)하는 데도 수월하고, 또한 현대 사상 및 기독교와 회통하는 데도 용이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현대어로 말한다면 영성과 이성. 신성과 이성을 융합하고 통합하는 데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마음공부에 발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깨어 있는 동력이 미약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나약해진다는 점이 과제입니다.
백낙청 : 어떻게 보면 더 부담스러운 얘기지만, 그렇게 해서 불리한 점이라든가 더 힘들어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지도 조금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허석 : 원불교의 정체성과도 굉장히 깊은 관련이 있는데요. 대종사님께서는 불교가 분명히 미래 시대의 주교가 될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정산 종사께서는 마음을 제일 잘 밝히는 종교가 주교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때 말씀하신 종교 역시 불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갖고 있는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역사와 사상과 현대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하고요. 제 생각에 소태산께서는 불법을 주체로 하면서도 유불선 모두를 다 개벽하려고 하신 분입니다. 그건 이미 동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요. 다시 말하면 불법을 주체로 삼았지 이걸 그대로 따라가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대종사님께서는 불교 또한 개벽의 차원에서 새롭게 재구성하려고 하셨습니다. 만약 불법을 중심에 둔 점에만 치중하여 동학 이래의 개벽사상을 계승한 면모를 소홀히 하면, 이는 소태산이 혁신의 대상으로 삼은 과거 불교의 모습으로 회귀할 우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적으로는 교리 해석이나 교학 연구에서 ‘개교표어'나 '개교의 동기'의 의미를 간과하거나 그 본의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그 결과는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과 수행을 강조하는 출세간적 양상을 띨 수도 있구요.
원불교가 해외에서 교화하는 과정에 이런 경향이 나타날 우려도 있습니다. 가령 한반도 특유의 개벽사상을 강조하면, 보편적인 불법을 내세우지 않고 한국적 사상에 치중하여 원불교의 세계화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인식이 해외에 계시는 원불교인들에게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화의 방편상 당장의 편함이 있을지는 모르나, 소태산의 본의에서는 멀어지는 큰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대종경」에 대종사님의 이런 표현이 있거든요. "정당한 주견을 세운 후에 다른 법을 널리 응용하라."(수행품 27) 저는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교수님도 그런 표현을 하셨더라고요. 원불교인 스스로 줏대를 세우고 소태산의 본의를 파악하라는 것이겠죠. 소태산의 깨달음의 차원에서 불법을 주체로 삼고 거기에서 불법만이 아니라 유불선 그리고 과학까지 다 통합 활용하는, 널리 다른 법을 활용하는 그러한 교법 운영과 교단 운영을 해나가면 사실은 부담이 아니라 이점이겠죠. 그런데 원불교인으로서 그 줏대가 만약에 없어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약해진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백낙청 : 지금 국내에서도 불교와 원불교의 세력 차이가 너무 크고요. 더군다나 외국에 나가면 불교는 알아주지만 원불교 안 알아준단 말이에요. 그래서 속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원불교의 교무님이나 학자들 중에는 어떻게든지 그냥 불교에 편승해서 조금 더 쉽게 살아볼까 하는 유혹을 받는 분도 계실 것 같아요. 「교법의 총설」에서 첫마디가 "불교는 무상대도(無上大道)"라는 말씀이었지만, 무상대도가 절대적인 진리면 그냥 따르면 될 텐데. 「교법의 총설」의 말미에 가서는 "모든 종교의 교지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는 것이니라"라고 하신 만큼. 불교도 통합과 활용의 대상이지 절대직인 신앙의 대상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