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년도 2019년
*수상횟수 제38회
*수 상 자 이정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와, 대단하다. 어떻게 저 많은 점들을 저 큰 화면에 다 찍었을까!”
젊었던 어느 날, 파란 바탕에 점들이 가득한 색다른 대형 추상화를 처음 보며 내가 지른 탄성이었다.
지난해 바로 그 그림, 수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다시 보았다. 예전에 느꼈던 단순한 호기심이나 놀라움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가슴 속에서 뭉클했다. 점 하나하나에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렸다는 화가를 생각하니, 만년 뉴욕생활에서 그가 느꼈을 외로움과 그리움이 내 살붙이의 그것인 양 가슴에 저미어 드는 것 같았다. 그가 생전에 다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이제 그마저 떠난 지가 오래인 지금쯤 모두가 크고 작은 별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서로 만나고 있지 않을까.
일찍이 한국적 서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도자기를 사서 모으고 즐겨 그렸던 수화. 또한 우리의 산과 달을 사랑했기에 이를 작품에 수없이 담아냈던 화가. 우리의 서정미를 추상미술로 완성한 일 세대 추상화가로 추앙 받는 수화 김환기. 이제 나도 삶의 여정을 웬만큼 돌아온 시점에 서 있어서인지 그의 그림이 어느 때보다도 짙은 연민과 우수로 다가왔다. 어쩌면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는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태어난 배경은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다.
3천석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였지만 전면점화全面點畵를 그리던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고달픈 시절이었다. 날마다 수인囚人처럼 작품 창작에만 전념하며 살았으나 경제적으로 쪼들렸고 작품은 잘 팔리지 않았다.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쳤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30대 이후 내리 반려인 김향안 여사가 있었다. 수화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일찍 결혼해 세 딸을 두었으나 10년만에 이혼하고 앞서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과 재혼했다. 그녀는 김환기와 재혼을 결심하면서 화가의 아호였던 향안을 선물로 요구해 필명으로 쓴 인텔리 여성이었다. 끝까지 헌신적으로 그의 작품활동을 뒷바라지하고 그의 건강을 보살폈으며, 화가의 사후 ‘김환기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환기미술관을 열어 그의 업적을 기려오다 세상을 떠났다.
수화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을 대쪽 같이 지킨 화가였다. 서울대 교수로 또 한때는 홍대 학장으로 비교적 안장된 삶에 만족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창작에의 열정은 뜨거웠다. 아직 그림을 이해하고 사랑하기에 모든 여건이 척박했던 고국을 벗어나 넓은 세상인 프랑스에서 미국에서 한국적 서정미를 펼쳐 보이고 싶었던 작가였다. 그는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그러기에 아홉 살 아래인 그를 두고 절친했던 근원 김용준은 수필 <육장후기>에서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라고 평했을 것이다.
뉴욕에 살던 수화는 1970년 2월 고국의 한 신문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공모전에 작품을 응모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멈칫거렸다. 김 여사의 마음은 몇 배 더 착잡했다. 도미 전에 한국미술가협회 이사장이라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던 그에게 출품이 아니고 응모하라니! 그러나 그는 침체된 한국화단에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전前해 말 친구인 이산 김광섭이 연하장과 함께 보내준, 그의 신작시 <저녁에>가 실린 잡지를 펼쳐 다시 읽었고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그의 마음에 꽂혔다. 이튿날 그는 시를 읊조리며 대형 화폭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바라본 가을하늘 색깔이며 바다 빛깔이기도 한 코발트색을 바탕으로 한없는 그리움을 담아 알알이 찍어 나갔다.
그가 그리워하며 점으로 형상화했던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작품에 영감을 준 김광섭이 맨 먼저였을 것 같다. 향안과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아끼던 노시산방을 헐값에 내어준 김용준을 떠올리며 또 한 점 찍었겠지. 결혼식 사회를 본 정지용 <<문장>> 창간호를 보내준 길진섭을 떠올리며 두 점 보태지 않았을까. 피카소 화법을 설명하고 작품에 있어서 독창성과 상상력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후지타 쓰구하루 교수도 한 점, 자신에게 향안을 소개해주었던 시인 노리다케 가츠오도 한 점으로 찍었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또 두 점, 그리고 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네 점을 보탰을 수화. 딸 셋을 그리워하며 또 찍었을 점 점 점.
대형 화폭을 가득 채운 무수한 작은 점들은 한데 어우러져 은하銀河와도 같고, 우주宇宙와도 같다. 광활하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롭다. 그 점들을 일일이 감싼 흰 색 바깥테두리. 세밀한 바둑판을 이어 놓은 것도 같고 누군가의 표현대로 ‘말없음표의 나열’같기도 한 독자적인 구성과 색채의 은밀함은 이전의 어떤 그림과도 달리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수화만의 경지, 김환기만의 아우라가 짙게 느껴지는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 작품은 공모전에서 한국미술대상을 수상한 후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더불어 소멸과 윤회의 기원을 담은 제목이 주는 정서적 느낌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아닐까.
시인의 절창 한 구절이 한 화가에게 명화를 탄생하게끔 영감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타고난 예술적 소양과 도타운 우정이 한없이 부럽고 아름답게만 여겨진다. 동시에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인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들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지금껏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한때 만나 정다웠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오래 소식 없이 지내온 이들도 있다. 그들과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까.
*약력
1947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은 부모의 기도 가운데 자라면서 책 읽기를 좋아했다. 남원여중 1학년 때 첫 소풍을 다녀와 기행문을 쓴 적이 있다. 선비 같던 국어선생님이 우리 반에서는 별 말씀 안하시더니, 다른 반 다른 학년에 가서는 내 글을 크게 칭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훗날의 수필가에게 좋은 출발점 혹은 계기가 될 뻔 했는데, 오히려 나는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그 이후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주여고를 거쳐 서울문리대 독문과에 진학했다. 시대적 가정적으로 상황이 어려운 때여서인지 문학공부는 별로 하지 못했고, 졸업 후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아들과 딸이 유학을 떠날 즈음이던 2003년, 갑자기 허허로워진 마음에 임헌영 선생님의 수필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같은 해 말에「산행」,「메모에 관한 단상」을 실어『한국수필』로 등단했다.
2006년 창간된 『에세이플러스』, 지금의 『한국산문』의 초창기 멤버이자 지금까지 10여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물푸레나무」로 한국산문문학상을 탔고, 2011년 첫 수필집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일들』을 상재한 후 운 좋게 제6회 남촌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2018년에 두 번째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를 엮어 냈다.
탁월한 자질과 열정적인 자세로 많은 글을 쓰는 작가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 나름으로 꾸준히 글을 쓰고 각종 문예지에 발표해왔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수필문우회 회원, 그리고 한국산문작가회 이사로 문학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수상소감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에게 이런 큰 상을 안겨 주시다니요!
먼저 제 작품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그리고 여기 이 자리에 서기까지 오래 지켜봐 주고 격려해 주셨던 수필문단의 많은 선후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03년이 사위어가던 어느 날, 눈이 흩뿌리던 날이었지요.
등단 추천을 받고 신문로에 있던 한국수필 사무실을 찾아가 한국수필문학계의 대모이신 조경희 선생님을 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차가운 제 두 손을 따뜻이 잡아주며, “이제 시작이니 무엇보다 꾸준히 노력하기 바란다.”고 당부하시더군요. 그때의 설렘과 따스함을 오늘 다시 떠올립니다.
다작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의 권고대로 꾸준히 글을 써왔습니다.
수필을 쓴다는 것이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50대 후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저 자신을 치유하는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비교적 무난했던 제 삶에 중요한 무엇이 빠져 있다는 자각,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끼어들기 시작했지요.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심경을 스스로 위무하고 싶은 마음, 그런 바탕에서 저의 글쓰기는 비롯되었습니다. 불평즉명(不平則鳴), 편안하지 않으면 울게 되어있다는 한유(韓愈)의 문학론으로 풀이해도 되겠는지요.
그런 처음의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었습니다. 초심을 잃은 건 아니나, 이젠 한 걸음 더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과 소통하고 그들의 마음 밭갈이에도 거름이 되고 싶습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기엔 미치지 못한다면 쌈박한 재미나 웃음이라도 선사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작은 깨달음이라도 다면적인 사유를 통해 삭히고 녹여 정갈한 논리의 틀 속에 앉히되, 매체가 되는 언어와 문장만큼은 음악적 리듬감과 회화적 절제미를 갖추어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습니다.
직접 저 스스로 제38회 한국수필문학상에 응모하면서 가졌던 소망과 기대와는 달리, 수상 통보를 받고 난 후 처음에는 오히려 부끄러움과 책임감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 잘 일구어진 텃밭에서 더욱 싱싱한 잎을 피우고 꽃을 맺고 싶다는 새로운 다짐으로 서서히 기쁨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나아갈 길은 아직 멉니다. 출발했던 시점에서도 제법 멀리 와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길 위에 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의미 있는 상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더욱 새로워지고 깊어지도록 애쓰겠습니다. 그것이 이 자리에 오셔서 진심으로 축하해주신 여러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저의 약속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심사평 - 이정희의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이정희 수필가의 작품집은 고루 튼튼한 문장력과 탁월한 작가정신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의미를 천착하는 남다른 시각을 지녔다. 까닭에 독자를 감동시키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수필 <한여름밤의 풍경화>등 진중한 이야기 전개로 독자의 가슴을 여는 남다른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이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떠난 지 오래전이며 해마다 여름이면 복날은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유년의 앨범 속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따뜻해지는 풍경화를 되풀이 떠올리고 있는 화자를 만나게 된다. 정이 많고 자상했던 부모님과 평상에 둘러앉았던 동기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그리운 저녁이라고 수필<한여름밤의 풍경화>는 아름답게 회억하고 있다. 이정희수필가의 스승이신 임헌영 선생께서는 ‘이정희 문학은 몽테뉴적이기 보다는 파스칼적인 세계관에 가까우며, 이 작가의 수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매우 이지적이다.’라고 하셨다. 이성과 지혜로 묶인 깊은 성찰의 세계로 세상과 겸허히 마주서고 있는 작가의 차분한 목소리는 지성의 표피를 여는 정겨움이 흐른다. 서울대학교 독어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활하던 이정희수필가는 2003년 월간 <한국수필>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수필문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산문>초기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2011년 첫 수필집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일들>을 출간하였다. 또한 ‘한국산문 문학상’과 ‘남촌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심사위원 정목일 . 지연희 . 장호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