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김영석
#설계 를 맡은 사람은 영국인 #건축기사 #존-레지널드-하딩 이었어요. 하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그리스풍 의 #신고전주의양식 으로 석조전을 설계했죠. 여기에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지역의 기후에 맞춰 베란다를 설치했죠.
지층을 포함해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의 장대한 규모였죠. 석조전은 조선의 궁궐이 왕의 #침소 와 #업무공간 으로 분리됐던 것과 달리 두 기능을 통합했습니다.
1층엔 #접견실 과 #홀
2층엔 황제와 황후의 #침실 과 #거실 이 있었어요.
◇궁궐 완성 석 달 전 나라는 망하고
1910년 12월 1일 석조전이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이곳으로 들어와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석조전이 완공되기 석 달 전인 8월 29일 일본과 #강제병합 되면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황후도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한제국이 건립된 해에 설계를 시작한 궁궐이 그 대한제국이 멸망한 해에 완공된 것입니다.
1907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 덕수궁을 거처로 삼고 있던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영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어요. 고종 입장에선 자신의 근대화 노력이 좌절된 #상징 으로 보였을지도 몰라요.
석조전에는 정식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조선시대 #궁궐 의 #전각 이름에는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경복궁 의 #근정전 (勤政殿)에 ' #부지런히정치함 ',
#덕수궁 의 #중화전 (中和殿)에 ' #치우치지않는바른성정 ' 이란 의미가 있죠. 하지만 석조전은 그냥 '돌로 지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던 우리 #전통건축물 과 다르다는 의미가 그대로 건물 이름으로 굳어진 셈이죠.
◇좌절된 근대화, 망국, 그리고 분단
이후 석조전은 #귀빈접대 나 #만찬 을 여는 건물로 가끔 사용됐고, 일본에 #볼모 로 가 있던 고종의 아들 #영친왕 이 잠시 고국에 올 때마다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1922년 5월 11일 이곳에서 #비극적인사건 이 발생했어요. 영친왕과 일본인 왕비 사이에서 난 장남이자 #왕실 의 #후계자 였던 #이진 이 생후 9개월도 되지 않아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세상을 떠났어요.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 으로 꾸미면서 석조전 옆에 새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서관(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을 지어 #이왕가미술관 을 만들었고, 원래 석조전에는 #일본 #미술품 들을 전시했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한반도 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미·소공동위원회 회의가 석조전에서 열렸습니다. #모스크바3상회 의 합의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 에서 벗어난 #한반도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의견대립 을 보인 끝에 1947년 결렬됐습니다. 좌절된 근대화와 #망국 (亡國)의 한을 품은 장소에 이번엔 분단의 아픔이 더해진 셈이죠.
출처: 프리미엄조선|[유석재]기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