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그리스 문명기행10일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위치해 있는 터키는 히타이트에서, 로마, 비잔틴제국, 오스만 대제국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거쳐간 곳이다. 초대교회의 흔적이 남아있어 많은 성지순례객들이 터키를 찾음과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화려했던 이슬람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는 이슬람국가로서 자리잡았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사랑의 신 에로스(eros) 등 고대 그리스 신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곳,지중해의 짙푸른 바다와 뜨거운 태양으로 지중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곳 그리스!!!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떠오르는 나라. 서양문명의 시발점이기, 고대 서양사에 있어서 그 확고한 위치를 가진나라. 그리스의 기행은 서양사상과 역사의 근저를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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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Cappadocia) |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카파도키아.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갖이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카파도키아의 참 매력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 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년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 m) 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 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습성을 지닌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바위를 깍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데린구유라고 불리는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은 이 지역 거주민에게 더없는 편의를 제공하였다.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응회암은 암석이라고는 하나 쉽게 깍이는 탓에 거주공간이 좁다 생각될 경우 주변의 돌을 더 파내기만 하면 되었을 뿐 아니라 돌로 만든 집은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기 때문이다. 지하도시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버섯집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이외에도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도 카파도키아에는 600개가 넘는 교회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중 최고 오래된 것은 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회화들은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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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레메 (Goreme) |
앙카라에서 네비쉬르를 거쳐 가다보면 괴레메라고 불리는 카파도키아의 마을이 하나 나온다.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파도키아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찾는 명소이자 제일 기억에 남는 장소로 손꼽히고 있다. 이 곳은 데린구유 지하도시와는 달리 지상으로 나있는 바위 동굴 속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본당으로 이루어진 이 곳의 교회들 대부분은 건축시기가 9세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의 벽면은 온통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이 그려진 성화로 장식되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들 성화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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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사르(Uchisar) |
괴레메 동굴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산으로 우치사르(Uchisar) 성채가 위치하고 있다. 과거 온통 응회암으로 뒤덮여 있었던 이 곳에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터널을 만들어 살았으나 부식작용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벌집모양의 바위산이 만들어졌다.13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한 우치사르는 황량하고 기괴한 주변풍경이 어딘가 매우 묘해 보이는 곳이다. 이 곳의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의 생성 원인은 이 지역이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이루어진 곳에 다시 화산활동이 있어 그 위를 화산재들이 덮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과 부식작용으로 마모되고 부서져 약한 부분은 모두 깍여나가고 가장 단단한 암석들만 남아 현재의 기기묘묘한 바위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수없이 뚫려 있는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이 구멍들은 비둘기 집이다. 이 집들의 주인이었던 비둘기들은 이 곳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에겐 귀한 손님이었다. 성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인 알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곳 사람들은 비둘기 알에서 염료를 얻어 석굴예배당의 성화를 채색하였다. 최근에는 성채에서 지하 100m 이르는 곳에 위치한 비밀터널이 발견되었는데 이 곳은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공급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이 특별한 장소를 이용한 호텔과 레스토랑들이 들어서고 있어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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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린구유 |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 도시이다. 이 곳의 형성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 시대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 곳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소수만이 공개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가 Nevsehir에서 29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린구유 지하도시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구유는 1965년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나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라한 통로 곳곳은 무너져내린 곳도 많지만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데린구유 지하 도시는 총 깊이가 55m에 달하는 8층으로 이루어졌다. 1층과 2층에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돌로 만든 두개의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 혹은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터널이 있다. 십자가 모양의 교회, 지하감옥 및 묘지는 지하층에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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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야(Konya) |
예전에 이고니온이라 불렸던 콘야는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520,000명의 주민이 사는 터키 중요도시 중 하나이다.지중해로부터 250KM 흑해로부터는 500KM,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해 콘야는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다. 그 외에는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11세가 셀주크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콘야로 몰려들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과 마나레 신학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콘야는 몇 년 전만해도 보수적인 메블라나교의 영향력으로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를 써야 했다. 하지만 2002년 현재에는 스카프를 쓰지 않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 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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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블라나 박물관(Mevlana Museum) |
메블라나교단은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메블라나 루우미(Mevelana Jelaleddin Alromi: 1207-1273)가 13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수피교단의 한 교파이다. 지금도 푸른 원추형의 탑이 아름다운 메블라나 박물관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교파를 세운 이래 1923년까지 메블라나교에서 성당과 사원등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1923년 터키에서 반종교정책이 채택되어 왕정의 절대지지 세력이었던 메블레냐 교단은 철퇴를 맞게 되어 교단은 헤체되고 메블라나 사원은 폐쇄되었다. 6,500평방미터의 부지내에 성당과 사원,수행장소등이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은 1927년이 되어서야 성당으로 쓰였던 장소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된다.이런 상황은 1950년까지 이어지다가 1950년에 행해진 메블라나 추모행사로 부활을 맞게된다.하지만 아직도 메블라나 박물관은 메블라나의 생활상과 교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쓰일 뿐 사원으로서의 기능은 하고 있지 않다. 메블라나 교단은 창시자 메블라나의 뜻을 받들어 신비주의적이며 참선중심의 대중적인 교리를 이어가고 있다. 메블라나가 새로운 종파를 세운 이유는 어렵고 형식에 치우친 코란의 율법이 대중들과의 격리감을 가중한다는 판단에서였다.이에 그는 이론적이고 현학적인 교리를 뛰어넘고자 가장 단순한 참선의 형태를 제시한다. 이것이 '사마춤'(Sama Dance)이다. 이 춤은 한 손은 하늘로 하고 다른 손은 땅을 향하여 계속해서 원을 도는 매우 단순한 춤이다. 이 춤은 원래는 "데쉬비"라는 사제들이 추는 춤이었으나 지금은 마블레나 교의 교인이라면 누구나 추는 춤이다. 이 춤은 이 단순한 원형돌기를 3시간 가까이 반복하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각성과 믿음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에 가면 메블라나가 남긴 말이 있다.
"알라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함께'(Beraber)가 아니다. 금전의 노예가 되지 말라. 부자가 되지 말라. 꾀를 부려 세상을 살아가지 말라. 성인의 말은 성인만이 알 수 있다"
는 구절이다. 이런 메블라나의 교리를 담은 '사마춤'(Sama Dance)은 지금은 터키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되어 매해 12월 첫째 주에는 대규모 사마춤 축제가 콘야에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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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칼레 |
파묵깔레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이다. 지면에서 뿜어 나온 석탄 성분을 포함한 섭씨 35도 온천수가 100m 높이에서 산표면으로 흘러나와 많은 수영장을 만들었다. 온천수가 수영장에 흘러 넘쳐서 크림색의 종유석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세계에서 둘도 없는 경관을 만들었다. 목면을 뭉쳐놓은 듯 보이는 환상적인 경관으로 인해 파묵깔레는 목면의 성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데니즐리에서 19km 떨어져 있는 이 신기한 토지에서는 심장병,순환기 질병,고혈압,신경성 장애,류머티스,눈과 피부의 질병,신경과 육체의 피로,소화기 질병,영양 장애에 효능이 있는 온천이 풍부하게 나오고 있다. 이 곳으로 오는 도로변에는 쿄우티쿠투가 울창하게 늘어서 있으며 휴양지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사람들을 느긋하게 만들어 준다. 파묵깔레는 석회붕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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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폴리스(Hierapolis) |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져 로마 시대의 온천지로서 2,3세기에 가장 번영했다. 히에라 폴리스의 유적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다. 이에 아래의 코스를 추천한다. 번화한 거리를 구경한 후 팔각형의 필립사도의 기념교회를 보고 야외 원형극장으로 가서 아폴로의 부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아폴로 신전 옆에는 '신성한 장소'가 있다. 이 곳에서는 지면에 생긴 깊은 구멍으로 부터 유독한 가스가 분출되고 있는데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겠지만 자신들은 괜찮다고 믿고 있었다. 이 내용은 '신성한 장소'의 옆에 있는 분수에 기록되어 있다. 파묵깔레 모텔의 수영장에는 로마 시대의 목욕탕에 있었던 거대한 대리석 석판이 있다. 이를 본 다음에 파실리카로 향해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길을 통해서 비잔틴 시대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기념문을 지나 서쪽에 위치한 로마식 목욕탕으로 나와 마지막으로 공동묘지를 보면 된다. 이 공동묘지는 2km에 달하며 이 곳에서는 특징적인 몇몇의 묘석 모양을 볼 수 있으며 아나톨리아 전 지역에서도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공동묘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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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Efesus) |
에페소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Androklos)의 지휘하에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현인들에게 그들의 새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현인들이 예언하기를 야생 멧돼지 한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그들을 새도시로 이끌것이라고 했다. 어느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고 이와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 죽이고 바로 그 자리, 즉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서쪽으로 1200미터 떨어진 고대 에페소가 있던 곳에 그들의 새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에페소는 키메르(Cimmerian)인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을 포함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이곳은 그리스의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기원전 6세기경 에페소는 리디아왕국의 군주 크로이소스(Croesus)의 지배를 잠시 받긴 하였으나 곧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크로이소스에 의해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 곳을 정복, 에페소는 평온을 되찾고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리시마쿠스(Lysimachos)는 피온산(Mt.Pion)과 코레쏘스산(Mt.Koressos) 중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 곳을 높이 10미터,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형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등의 유적은 이 당시 지어진 것이다. 기원전 88년, 에페소인들은 폰터스(Pontus)와 연합하여 로마인들에게 대항하였으나 로마의 세력 팽창이 엄청날 것을 알아차린 에페소인들은 곧 로마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에페소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아시아속주의 수도로 부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은 거대 항구가 있는 아시아 무역항로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영도 서기 17년에 일어났던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폐허로 변하였다. 교회 역사에서 에페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바울로 인해 복음이 왕성히 전해지고 있다는 에페소로 오게 되었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곳은 카톨릭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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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 도서관 (Celsus Library) |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 유적가운데 전면이 원형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화려했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여러차례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재건되었고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에페소는 사도바울이 서기 53년 부터 이곳에서 2년간 전도활동을 하며 강론을 펼쳤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도바울의 방문 이후,이곳에는 교회가 부흥하였고, 이것이 성경상에 나타나 있는데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에 투옥돼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바로 '에베소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행전 19:9-10]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친것으로 나와있어 이 셀수스 도서관이 바로 성경상의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또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은 이곳이 두란노 서원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지만 역사상으로 이 셀수스 도서관은 사도바울이 에페소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없는 추측일 뿐이며, 사도바울이 셀수스 도서관과 같이 도시 중심에 위치한 화려한 곳이 아닌 변두리에서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에서 강론했을 것이라는 것이 좀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에페소는 이곳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져 부흥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성지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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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극장(Efes Theatre) |
2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이 야외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기 1-2세기경의 유적이다.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된 것은 클라우디우스(34-41 AD) 시대를 첫 시작으로 하였고 이후 극장의 , 3층이 네로 황제(54-68 AD)와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AD) 시대에 지어졌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이 곳의 실내 정면은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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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마리아의 집 |
에베소 3차 종교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예수가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의 남은 여생을 위해 산(크레소스 산; Mt. Korssos, 뷰불다; Blbldağı) 위에 작은 집(메르예마나 에비)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집은 후에 찾는 이가 없어 잊혀졌다.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에 따르면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이곳 터키 에페소로 피신해 와서 숨어 살았으며 당시 거처는 에페소 인근의 불불산 남쪽 기슭이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곳 불불산 남쪽 기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현재 에페소에 가면 실제 뷰불다(크레소스 산)를 구불구불 오르는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임종을 거둔 기억자형의 토담집이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이곳이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어을까 의문이 들 것이다. 여기에는 신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상기했듯이 베일속에 가려진 채 성모 마리아의 마지막 임종 장소는 세상사람들에게 알져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독일 베스트팔렌주의 돌멘이라는 시골 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수녀 캐더린 에메리히(Emmerich)가 1878년 환상(Vision)을 보게 되는데 그 환상에 예수 승천 후의 사도 요한과 성모 마리아의 에페소에서의 생애가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점은 에메리히 수녀는 12년이나 병상에서 보낸 사람이었으며 에페소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당시 시인 클레멘토 브렌타노는 에메리히 수녀의 환상(Vision)에 기초해서 '안나 캐더린 엠머리히의 비전에 의한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자를 펴내게 된다. 1880년 이 책이 터키 이즈미르에 있었던 라자로 수도회의 신부 줄리앙 구예에게 전해졌고 그는 책에 근거해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찾아내게 된다. 1891년 5월 우예곡절끝에 마침내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발견된 곳이 바로 지금의 장소이며 후에 교황 요한 23세가 1961년 이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1967년 교황 바오르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함으로써 성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현재 이 곳은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순례지로 유명해졌다. 매년 8월 15일에 기독교인에 의한 기념 제전이 이곳에서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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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요한의 교회(Church of St.John) |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기원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77-565 AD)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에페소가 아랍민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 8세기에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현재 여행객들이 출입하는 곳이 주 성문인데, 나머지 두개의 문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 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들의 먹이가 된 기독교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인 듯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 여겨 많은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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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Troy) |
트로이 (Troy)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트로이의 목마 전설과 트로이목마 바이러스 컴퓨터 바이러스중 트로이 목마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있는데 과연 트로이 목마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트로이 목마는 트로이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트로이의 성밖에 만든 큰 목마이다. 전쟁은 두 나라사이의 비슷한 전투력과 트로이의 강력한 요새로 인해서 끝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즈음하여 그리스는 선물이나 되는 듯 큰 목마를 성문앞에 만들고 마치 후퇴하는 것처럼 트로이를 떠난다. 트로이사람들은 이런 그리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목마를 만든 이유를 알기위해 점술사를 불러 물어본 결과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그리스에 재앙이 임하고 성밖에 방치해 두면 트로이에게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해석때문에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군이 배를 철수한 후, 견고한 요새의 문을 열고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그리스의 작전이었다. 큰 목마안에 그들의 군사를 잠입시켜두고 점술사를 매수하여 난공불락의 트로이의 성벽을 넘고자 하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고 승전의 축제를 벌이고 곤히 잠든 트로이 주민들에게 목마속에 잠입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나와 성문을 모두 열고, 후퇴하던 그리스 군사들이 모두 돌아와 결국 트로이는 점령당하고 만다.
마치 무슨 선물이라도 되는듯이 보이는 메일을 열어보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그래서 그런종류의 바이러스를 우리는 이 전설에 빗대어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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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Istanbul)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역할을 다하여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 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 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지기때문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주거지역이 되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유적지가 모여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역은 유럽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지역에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가 모여있고 모두 이지역에 몰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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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바쟈르(GRAND BAZAR) |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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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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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성당 |
성소피아 박물관은 마치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여느 모스크와 비슷해 보인다. 간혹 사람들은 마주보고 있는 블루모스크와 아주 흡사하다고 느낄것이다. 하지만 성소피아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성소피아 성당이라는 가장 최초의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듯 이곳은 최초에는 성당이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에는 회칠로 덮여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성소피아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 75m X 70m 로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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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저수지 |
이스탄불은 많은 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충분한 물의 공급이 필요했던 도시였다.따라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지하 저수저를 많이 건축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저수저가 성 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위치한 지하궁전(Yerebatan Sarayi)이다. 물은 이스탄불로 부터 20km 떨어진 곳으로 부터 수로를 통해서 공급했고 기둥과 천장 장식이 화려하게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를 지하 궁전(saray : palace) 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336개의 기둥중 거의 모두가 비잔틴 코린트식의 기둥 머리를 가지고 있다. 저수저 전체의 크기는 70m 폭에 길이는 140m 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이스탄불 시는 이 저수지를 개축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기둥들 사이에는 나무를 재료로 도보길을 만들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써서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만들었다. 석고위의 수심 측정기의 눈금이 기둥머리에 까지 다다른 것을 보면 당시 이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가득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건물의 양 구석의 기둥의 받침은 메두사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이를 제조한 사람들이 이단을 믿지않는 기독교인임을 알 수 있다. 물 속의 잉어 조각은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인데 이는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어떤 이들은 비잔틴 인들이 실제 이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길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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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모스크 |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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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드럼 |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 개의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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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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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 |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7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게 되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이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투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원래 오투만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으로 한때 이 곳에는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터어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의 방도 보존되어 있어 그 흥미를 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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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Athens) |
그리스 본토의 남동부 살론만의 아티카 평야에 위치하며, 2개의 강을 끼고 동,서,북의 3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아테네의 피레우스로 향해 있다. 폴리스는 B. C 8세기에 성립하여 전 6세기에는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가 행해졌고 BC 5세기 경에는 최고의 전성기인 페리클레스시대를 맞이하였다. 소크라테스가 활약하고 파르테논 신전이 조성되었다. 그후 마케도니아, 로마의 지배 하에서 학문과 문예의 중심이 중세에는 완전히 쇠퇴하여 학문 높은 고대 유적도 파괴되었다. 그리스 독립 후 아테네는 수도로 되었고 오늘날 그리스의 중심이 되었다. 고대 아테네 시가는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링크모양의 수도였지만 현대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의 북부, 동부까지 넓은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시의 중심은 신티크마 광장으로 아크로 폴리스 주변을 제외하고는 현대화된 남유럽식의 현대도시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스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4백만의 인구가 밀집해 있고 그로 인해 대도시가 가지는 교통,주거문제등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여름에는 숨막힐 듯한 더위와 대기오염, 혼잡한 교통등으로 여행자들에게 불편을 주기도 하지만, 고대아테네를 상상해 본다면 앞으로 펼쳐진 에게해와 서양과 중동문화가 뒤섞여있는 아테네에서 아테네 만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올림픽의 요람이자,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린 그리스 아테네에서 2004년 올림픽이 열리는 것은 올림픽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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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신전 |
수천년간 웅장한 자태를 보여 주며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전쟁과 지혜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이기도 한 아테네 여신을 모시던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불리며 도리아 양식의 건축물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신전은 규모 면에서 아크로폴리스에서 최대이며 한때 아테네가 폴리스 동맹국 사이에서 제국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시기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이용되기도 했다. B.C 4세기경에 페리클레스가 설계를 하고 조각가 피아디아스가 총 15년이나 걸려 완성한 건축물로 현재 UNESCO 고적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이 곳은 신전에서 교회로, 그 이후에는 사원으로 사용되다 급기야는 터키인들의 화약고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87년, 베네치아인들이 쏘아 올린 대포로 인해 이 곳은 파괴되기에 이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예술적인 업적의 성과물이자 찬란했던 과거의 한때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 인류의 귀중한 보물이 같은 인간들에 의해 얼마나 짧은 순간에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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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이소스 극장 |
아크로폴리스 아래쪽으로 보면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고 그 옆에 바로 디오니소스 극장이 위치해 있다. 디오니소스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지어졌다. 신전에 사용된 직사각형의 초석은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Alkamenis에 의해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신상이 세워져 있다. 신전 옆으로 원형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위치해 있다. 이는 문명의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테나인들의 주 음악당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고대부터 근래까지 드라마 예술의 요람이 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곳에서 Aeschylus, Sophocles, Euripides의 비극과 Aristophanes와 Menandros의 희극들이 시연되었다. 디오니소스 극장은 예술가이자 연설가, 동시에 집정관이기도 한 Lykourgos에 의해 복구가 이루어져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검투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로마인들에 의해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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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티온 신전 |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의 하나라고도 알려져 있는 파르테논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건축물이 에렉티온 신전 (Erechtheion) 이다. 기원전 420-39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신전은 도리아식이 가미된 이오니아 양식을 띄고 있어 보기 드문 건축양식을 자랑한다. 에렉티온 신전이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2m 남짓한 높이로 조각된 6명의 소녀상을 기둥으로 한 주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기둥의 일부는 대영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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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 수도 : 앙카라(Ankara, 260만명)
2. 인구 : 약 6천 785만명(2000년 기준)
3. 면적 : 779,452㎢ (한반도의 3.5배)
4. 주요도시 : 이스탄불(Istanbul),이즈밀(Izmir),콘야(Konya)
5. 주요민족 : 터어키(Turkish,90%),쿠르드(Kurd) 및 아랍(Arab, 10%)
6. 주요언어 : 터어키(Turkish,90%), 쿠르드어(Kurdish) 및 아랍어(Arabic,10%)
7. 종교 : 전국민의 98%가 이슬람교도(수니파)이며, 그밖에 기독교, 유태교, 그리스정교 등
8. 지리 : 총면적은 780,5800㎢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에게해, 지중해, 마르마라해, 흑해를 접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나뉘어진다. 터키는 위치에 따라 흑해, 말마라, 에게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쪽 아나톨리아, 남동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9. 기후 : 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터키의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변화무쌍한 기후대가 나타나곤 한다. 흑해 연안부의 따뜻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가 하면 고산들로 가득한 산악지대에서는 연중 내내 새하얀 설경을 경험할 수 있다.
10. 사회,문화 : 기록에 의하면 터키는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터키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으로,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터키 국민들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해왔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여 터키인들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기 10세기 경이라고 한다. 중세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터키인들의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터키 국민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터키어는 문장 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는 점이다.
11. 종교 : 터어키 국민의 98%는 이슬람교도(Muslim)이며, 그외 아르메니아유태교캐톨릭그리스 정교 등이 있다. 터어키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세속화된 나라로서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종교적 규율 적용에는 엄격하지 않은편이다. 법률이나 사회기구가 이슬람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 된다.회교 국가이나 토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등 서구화된 면모를 가지고 있는것이 특징적이다.
12. 풍속 : 터어키는 종교 공휴일로서 쉐케르 바이람(Seker Bayram : Sweet Festival)과 쿠르반 바이람(Kurban Bayram : Sacrifice Festival)이 있으며, 매년 날짜가 다르다.바이람 전 한달동안은 라마단(Ramadan)으로 일출부터 일몰 시간까지 금식하는데, 가장 큰 종교 축제인 바이람 기간중에는 새옷을 입고 친척 방문 등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카드를 보낸다. 터어키인들은 친족과 가족의 유대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권위를 존중한다.
13. 국민성 : 터어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며,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문제발생시 적극 도와주려 한다. 전통적으로 체면과 무예를 존중하며, 매우 정열적이고 다혈질이나 서두르지 않으며, 신앙의 전사(戰士)라고 불리는 가지(Gazi)의 정신을 윤리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터어키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동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갖고 있다.
14. 터키 일반정보 * 통화 : 화폐의 만성적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터키 정부는 2005년 1월 1일부로 1백만 터키 리라를 1 신 터키 리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래서 터키에서는 2005년 1월 1일부터 화폐 액면단위가 현재보다 100만분의 1로 바뀐 새로운 화폐가 구 터키 리라와 함께 통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구(舊) 100만 터키리라화는 새로운 1 터키리라화로 바뀌게 되었으며, 달러당 140만 터키리라이던 환율도 달러당 1.4 신(新) 터키 리라로 바뀌었다. 구 리라화는 2005년 말까지 새 화폐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모든 상품 가격에는 현재의 리라화와 새로운 리라화 가격 모두 표시된다.
* 전압 : 터키의 전원은 220V
* 전화 : 전화카드식 공중전화와 제톤(jeton)이라고 불리는 코인식 공중전화가 도시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3가지 종류의 코인과 전화카드는 우체국이나 가판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데, 국제통화를 해야 할 경우 우체국의 국제전화 서비스를 이용하면 가장 저렴하게 통화를 할 수 있다. ☞ 한국으로의 전화 -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 0 또는 9번(외부전화 접속, 호텔마다 확인 필요) + 00 + 82 + 0을 뺀 지역번호 + 집전화번호 - 공항 또는 시내의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를 이용할 경우: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 한국으로의 수신자부담 신청번호: 00800 + 828282 +전화안내원이 나옴
* 긴급연락처 ☞ 화재 110 / ☞ 구급차 112 / ☞ 경찰 155 ☞ 주 터어키 한국 대사관 - 주소: Cinnah Caddesi, Alacam Sokak No.5, Cankaya, 06690, Ankara, Turkey - Tel: 90-312-468-4822~3
15. 터키 여행시 유의사항 1) 터키는 자국어인 터키어를 사용하며, 입장지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나 유창한 대화가 될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2) 터키 환전은 달러와 유로가 모두 통용이 되시며, 입장지 에서는 외화도 받기에 환전소가 따로 없습니다. 대신 호텔에서 조금씩 바꾸어 쓰시는 것이 좋으며, 쇼핑장소에서는 달러나 유로 모두 받기에 불편함은 없습니다.
3) 8월의 터키는 비가 오지 않는 뜨거운 계절입니다. 옷은 반팔을 가져오시되 긴 팔의 얇은 자켓 종류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낮에는 40도에 이를 정도로 습도가 없이 더우나 저녁엔 기온차가 커서 쌀쌀하게 느껴집니다.
4) 파묵칼레에서는 온천욕을 호텔에서 하실 수 있사오니 타월과 수영장에서 신을 슬리퍼, 수영복을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5) 터키는 유럽과 비슷하여 식수를 따로 사셔 드셔야 하며 (수돗물은 석회수로 드실 수 없습니다.)
6) 휴게소나 입장지 근처의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실 경우 이용하신 비용을 받사오니 늘 잔돈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현지 돈은 호텔에서 필요하신 만큼 조금씩 환전을 하시어 가지고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7) 이스탄불 시내나 관광지에서 소매치기가 있사오니 늘 여권과 신분증, 귀중품, 카드 등은 몸에 소지를 하시되 간편한 여행용 가방을 몸에 꼭 붙이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귀중품이 든 가방을 잠시 버스에 놓고 내리셔도 주차장에서도 소매치기들이 있어 가져갈 수 있사오니 늘 소지 하시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8) 저녁 호텔에 투숙하시고 난 후에 따로 행동 하시는 것은 자제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나가시더라도 가이드 분이나 여행사에서 책임을 지실 수 없사오니 낮에 충분이 관광을 하시고 저녁엔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9) 의류 : 수건, 속옷, 양말 * 여름 : 반소매나 직사광선, 혹은 일사병을 피할 수 있는 얇은 긴 소매 옷이 좋으며, 챙이 있는 모자, 선글라스 등은 필수입니다.
10) 세면도구 : 칫솔, 치약, 화장품, 클렌져, 여행용 샴푸세트, 드라이기, 빗, 면도기
11) 기타 : 카메라, 건전지, 필름, 필기구 등 * 상비약 - 소화제, 감기약, 두통약, 반창고 등
12) 병역의무자가 국외 출국 시는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병무신고소(3층)에 출국신고를 하여야 하고, 귀국 시에도 귀국신고를 해야 합니다. 병무신고 대상자 : 만 18세가 되는 해의 1월1일부터 만 35세가 되는 해의 12월 31일 사이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남자 (병역을 마친 사람, 제2국민역은 제외)
13) 여권-당일 여권을 꼭 소지하시기 바랍니다. 여권은 본인이 소지하는데 여행 중 분실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므로, 항상 주의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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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1. 수도 : 아테네(Athens/인구의 약 4백만명이 거주)
2. 정치 : 의회주의, UN, NATO, EU 가맹국
3. 인구 : 약 1100만명
4. 면적 : 131,986㎢ (한반도의 3/5)
5. 주요도시 : 아테네, 테살로니케, 피레우스, 델포이
6. 주요민족 : 희랍인(97%), 터키인 등 기타(3%)
7. 주요언어 : 그리스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8. 종교 : 그리스정교(Greek Orthodox : 98%), 이슬람교(1.3%)
9. 지리 : 유럽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로 둘러쌓여 있고, 2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리적 형태를 띄고 있다. 현재 도시화로 인하여 삼림자원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섬들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10. 기후 :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햇빛이 뜨겁지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그 열기를 식혀준다.하지만 건조한 날씨로 여름의 습기로 인한 불쾌지수의 영향은 없으며 저녁에는 시원한 편이다.이런 이유로 그리스인들은 보통 저녁 늦게까지 많은 활동을 한다. 여행시에는 가벼운 옷차림이라고 할지라도 저녁때 입을 스웨터나 잠바가 필요하며 가을은 우기이므로 우의를 준비해야 한다.
11. 사회 : 언어 - 그리스어를 말하지만,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벽촌에 가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독일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독일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리스어는 4000년 동안 구전되었고, 3000년의 문자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대 유럽어이다.
12. 인구 : 2003년 기준 총인구는 약 1,070만명인 바, 인구 구성은 연소층(0∼14세) 21%, 청소년층(15∼39세) 36%, 장년층 (40∼59세) 25%, 노년층(60세이상) 48%로서 인구증가율은 0.29% 이다. 인구분포는 평지(국토면적의 약 40%)인 대도시 및 해안지방에 집중되어 있음. 아테네 수도권(인근 피레우스 포함) 지역에 약 350만명, 북부지역의 테살로니끼시에 약 50만명이 거주하고있다.
13. 종교 : 그리스는 종교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국민의 98%가 그리스정교 (Eastern Orthodox Church of Christ)를 신봉하고 있음. 헌법에는 그리스정교를 Prevailing Relegion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사실상 국교와 다름 없다.
14. 언어 : 오늘날 그리스에는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고 있는 구어체(Popular Language)와 고전 그리스어에 가까운 문어체(Purified Language)의 두가지 언어가 병행되고 있다.
15. 사회보장 : 사회보장은 국가에서 관장하며 모든 국민은 의료혜택과 연금을 받는다. 모든 직장인은 의무적으로 IKA(국가사회보장기관)에 가입해야 하며, 매달 봉급의 43.86%(피고용자 15.90% + 고용주 27.96%)를 납부하고 퇴직후 연금으로 받게된다.
16. 그리스 일반정보 * 환율 : 1유로(EUR) = 1189.49원 / 1달러(USD) = .83유로(EUR)
* 시차 : 썸머타임 실시기간 : 한국시각=아테네시각+6시간(3월말-10월말) 썸머타임 미실시기간 : 아테네 시각 + 7시간(11월-3월말)
* 통화 : 통화단위는 유로(Euro)로 2002년 01월부터 사용되었다. 주화는 1, 2, 5, 10, 20, 50 유로센트 그리고 1 ,2 유로 8종이며, 지폐는 5, 10, 20, 50, 100, 200, 500, 유로 7가지가 있으며 구분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지폐의 종류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 100유로 이상의 고액 지폐는 사용을 거절당할 수 있으니 최고 100유로짜리로 환전을 하는 것이 좋다. 일반 가게에서는 USD를 받지 않는 곳도 있으니 유로로 환전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 은행 근무시간 : 월-목 : 08:00-14:30, 금요일 : 08:00-13:30
* 전압 : 220V, 50Hz로서 한국의 220V, 60Hz와 차이가 있다. (TV, Video System은 PAL System)
* 전화 ☞ 한국으로의 일반전화 공중전화는 카드식이며 전화국이나 담배가게 등에서 구입 -그리스에서 서울 720-1234 으로 전화시(0082+2(서울코드)+720-1234) -한국에서 주 그리스 대사관으로 전화시(0030+210(아테네 코드)+698-4080) ☞ 한국으로의 수신자부담 이용전화 008-0012-6653 + 1111 + # 를 누르면 한국교환원 연결
* 현지연락처 - 주그리스 한국대사관 115 26, 124 Kifissias Ave, Athens, Greece (신타그마 광장에서 출발하는 전차 3번, 13번,지하철 Panormou 역에서 하차, 도보로 5분) 전화:(30-210) 698 4080-2, 팩스:(30-210) 698 4083
*근무시간 월요일 - 금요일 08:00-16:00(단 7-8월은 08:00-15:00) 점심시간 : 월-금 12:00-13:00(단 7-8월은 점심시간 없음) -데살로니키 명예영사관 154, N. Egnatias Ave., 54621, Thessaloniki, Greece 231-029-1770, 팩스 : 231-029-1721
* 쇼 핑 : 대형 백화점은 없고 소규모의 전문점 형태의 상점으로 되어 있으며, 지역별로 분배되어 있고 슈퍼마켓이 잘 발달되어 있다. - 일반상점 영업시간 : 월, 수, 토 : 08:00-15:00,화, 목, 금 : 08:00-14:00, 17:30-20;30 - 수퍼마켓 : 월-금 :09:00-20:30, 토 : 09:00-18:00, 일요일 휴점 ㅇ 주유소 : 06:00-21:00
17. 그리스 여행 유의사항 1) 그리스는 우리나라와 90일 관광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어 있습니다.
2) 통화단위는 유로(Euro)로 2002년 01월부터 사용되었습니다. 100유로 이상의 고액 지폐는 사용을 거절당할 수 있으니 최고 100유로짜리로 환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 가게에서는 USD를 받지 않는 곳도 있으니 유로로 환전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3) 관광객 대상의 범죄(핸드백 날치기, 소매치기)등은 아테네의 관광명소, 사람들이 붐비는 대중교통 시설, 에서 비일비재하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치안사정은 전반적으로 양호하나, 동구 및 중동 난민들에 의한 절도, 들치기, 소매치기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각별한 주의가 요망됩니다. * 아테네 중심지인 신타그마, 옴모니아 광장 주변 및 해변가에서 범죄행위가 수시로 발생함. * 여권, 현금, 신용카드 보관에 유의가 요망됨. * 특히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 또는 취침 중 소지품을 도난 당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함. (뷔페 식사를 위해 이석중 의자에 걸어놓은 가방/핸드백이 사라짐) * 현금이나 신용카드를 분실할 경우, 여행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므로, 현금은 나누어 보관함이 바람직함.
4) 낯선 사람 경계 요망 - 현지에서 친해졌거나, 낯선 사람들이 음료수나 음식을 권할 경우 신변안전에 유의해야 합니다. * 이들은 한 두 마디의 한국말을 구사하거나, 한국전 참전용사가족, 또는 한국에 많은 호감이 있는 것처럼 친근감을 표시하며 접근합니다. 이들은 수면제가 든 음료수 등을 마시게 하여 절도행위를 자행하며, 이들이 준 음료수를 호의로 잘못 알고 마신 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함. * 경찰관을 사칭, 신분증 조사 또는 위조지폐 검색한다며 소지품을 강탈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으니 주의가 요망됨.
5) 건강 유의사항 *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저온다습하며, 봄. 가을은 한국기후와 유사하나 기간이 짧습니다. 여름 온도가 39-40도까지 가끔 상승하므로, 탈수 및 일사병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 풍토병은 없고, 특별한 전염병 예방주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 수돗물보다는 가급적 생수 이용 (수돗물에는 석회성분 함유) 하시기 바랍니다. * 의약분업으로 의사 처방제를 첨부해야 약 구입이 가능하므로 구급약 등 상비약 사전에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감기약, 두통약, 반창고 등)
6) 기타 - 야간 아테네 술집을 이용 시, 외국 여행객에 바가지를 크게 씌워 피해를 보는 경우가 빈발하니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7) 병역의무자가 국외 출국 시는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병무신고소(3층)에 출국신고를 하여야 하고, 귀국 시에도 귀국신고를 해야 합니다. 병무신고 대상자 : 만 18세가 되는 해의 1월1일부터 만 35세가 되는 해의 12월 31일 사이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남자 (병역을 마친 사람, 제2국민역은 제외)
8) 여권-당일 여권을 꼭 소지하시기 바랍니다. 여권은 본인이 소지하는데 여행 중 분실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므로, 항상 주의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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