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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송파문학> 통권 15호 특집으로 실린 원고지 100매 분량의 글입니다. 송파문화원 시창작반에 송파문협 회원들이 여러 분 계셔서 송파문협의 역사를 소개할 필요성을 느껴 2010년의 글을 소개합니다. 송파문협 회원이 아니신 분도 제목의 '심오함'을 바탕에 깐 채 내용을 뜯다보면 문인들의 주체할 수 없는 풍류에 동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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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기행(紀行), 문학 기행(奇行)
―송파문인협회 제15호 특집에 부쳐
이영숙
가령 어둑해진 복중 어느 날, 평상 밑으론 청량산의 계곡물이 흐르고 평상 위에서는 유파(酉派)와 술파(戌派)가 소주를 권커니 자커니 했다고 치자. ‘닭파’는 무방하나 ‘개파’는 정서적으로 좀 ‘거시기’하다 하여 ‘닭 유(酉)’와 ‘개 술(戌)’을 끌어들여 음풍농월을 읊은 것까지는 괜찮았다고 치자. 두루 상식이 부족하여 굵기는 가래떡만하고 길이는 한 뼘에 못 미치는 얼룩무늬 연체동물이 출현하자 민달팽이라고 우기는 이들과 이에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이 난분분하는 사이로 계곡물 소리는 점차 깊어가는데, 이번에는 누구라도 한눈에 척 알아볼 수 있는 용모의 왕두꺼비가 근처 바위에 출현했다고 치자. 과연 평상 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무시하거나 반기기일 텐데, 이때 이들이 어느 쪽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지에 다리를 놓는 것은 기존에 공유한 경험들이다. 이 자리에 동석하지 않은 그 누군가가 의당 이들 중 하나가 두꺼비를 갓난아이 품어 안듯 하고 극진하게 입을 벌려 소주 한 모금을 대접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더 나아가 두꺼비에게 소주를 먹이는 이가 누구라는 것을 단숨에 짚어낼 수 있다면 그는 이들과 녹록치 않은 세월을 같이 보낸 인물이다. 과연 두꺼비는 거부하는 몸짓이나 독을 내뿜지 않았으며 물가에 내려놓자 나무뿌리를 타고 오르면서도 가급적 만취한 표를 내지 않으려고 예를 갖추었던 것인데, 그러한 두꺼비를 배웅하면서 이들은 으레 세상 일이 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흥취를 더욱 도도히 돋우었던 것이다. 시간과 사람과 사건이 만나 또 하나의 경험으로 엮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느덧 서로의 행간을 읽을 수 있게 된 이들을 세간에서는 ‘송파문인들’이라 칭한다.
집행부의 행간읽기
올해로 창립 열여덟 돌을 맞으면서 열다섯 번째 <송파문학>을 내는 송파문인협회는 요즘 행사를 했다 하면 족히 5,60명은 모이는 규모를 자랑하지만, 태동기에는 김해성, 유재용, 박건호, 전경애, 김현숙, 한여선, 권남희, 김유권, 박영우 등의 지인들이 가끔씩 모여 술이나 한 잔씩 나누는 사적 교류의 장이었다. 그러다 당시 경남이나 마산 등의 지방 문학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비해 서울에는 구 단위의 문학단체가 한 군데도 없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 만남의 주제가 자연스레 문학회 창립으로 모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유권 시인이 자신의 일터를 문학회 사무실로 개방한 후, 회원확보를 위한 초기 멤버들의 알음알음작전과 문인주소록을 활용한 송파거주문인 색출작전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어 드디어 1992년 10월 13일, 송파문학회가 발족되었다. 이듬해 5월에 발간된 <송파문학> 창간호에 의하면 당시 임원은 36명이었고 작품이 실린 회원은 32명이었으니, 명예회원의 성격을 띠는 몇몇 임원을 감안한다 해도 ‘물 반 고기 반’을 압도하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전회원의 임원화가 조직에 탄력을 제공하는 가운데 1ㆍ2대를 역임한 김해성ㆍ김유권 체제는 문학회의 골격을 세우는데 주력하였다. 한편으로 예술 전반의 활성화를 위해 문화원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이들은 구청 문화체육과와 구청장실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송파문화원의 개원(94.10)을 주도하였다. 이는 장차 송파문학회가 가지게 될 정체성에 대한 상징적인 예고였다. 동시에 문학회가 동인 성격의 작품발표나 친목도모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문화와의 연계를 통해 송파지역의 예술적 위상을 높이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내적 다짐이기도 했다.
1995년 3월부터 시작해 3대ㆍ4대의 재임기간 동안 유재용ㆍ박영우 체제는 전 집행부가 세운 골격에 살을 붙이는 역할을 하였다. 총회를 정식으로 발동하고, 여름정기세미나 및 시낭송회 개최를 정례화 했으며, 그간에 <송파문학> 2~5호를 발간하였다. 김유권 시인 이후 권남희 수필가의 오피스텔이 문학회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문화원이 초기의 보건소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함에 따라 비로소 송파문인들에게 문학회 사무실이 분양(96.9)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문학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김성순구청장이 송파문학회 현판까지 만들어와 직접 붙이는 등 회원 모두에게 이처럼 독립적인 공간과 문학회 고유의 전화번호는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송파 문인들이 문화원 2층에 상주하면서 이 공간은 타 지역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까지 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송파문학회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송파에 가면 먹을 게 많다’는 소문이 압도적이었다. 물론 ‘먹을 게 많다’는 것은 ‘술이 많다’는 말이었고, 이는 ‘송파문인들은 풍류를 안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최초로 개최된 평창 세미나(96.8)에서 발제자로 첫 모습을 드러낸 유금호 소설가가 가세하면서 ‘먹을 것’과 ‘풍류’는 더욱 점입가경이 된다. 목포대학교 교수인 그는 목요일 오후면 비행기로 귀경하여 이태원 소설가가 이미 소집한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큰엄마네집(김웅 수필가가 운영한 음식점)으로 목포에서 사들고 올라온 낙지와 함께 자신을 ‘직송’하곤 했기 때문이다. 유재용회장이 송파문화원 2대 원장으로 취임(98.9)한 후 1층 원장실에 상재하면서 송파에는 ‘먹을 게’ 더 지천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회원들의 연임 간청에도 불구하고 새 집행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자리를 고사한 유재용회장의 의지에 따라 유금호 소설가가 일약 5대 회장으로 취임(`99.3)하면서 더욱 무르익는다. 선출 당시의 상황을 <송파문학> 6호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작 당사자인 유금호회장은 전혀 예상치도 않은 벼락감투였다. 강의를 마치고 귀경하는 공항에서 긴급한 모임이 있다는 전갈을 받고 문학회로 출두했다가 엉겁결에 감투를 눌러 쓴 것이다. 마치 몰이사냥을 당하듯, 그는 그렇게 송파문학회의 리더가 되었다.” 서정우 사무국장이 ‘회식 1차 이후 회비지출 불가원칙’을 고수하면서 항상 적자에 시달리던 문학회의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고, 회원 규모나 행사 진행에 틀이 잡히면서 회원들의 개별 작품집 출간도 활발해졌다. 이런저런 기념할 일들이 많아지자 개롱역 근처의 세꼬시집이나 구룡포과매기, 조끼조끼, 사께야 등은 단골로 길이 반질반질 나기 시작했다. 회원들이 ‘1회에 한하여 연임’이라는 회칙을 ‘2회 연임 가능’으로 고치면서까지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유금호ㆍ서정우 체제는 ‘엉겁결에’ 6년의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송파문학> 6~10집이 발간되었고, 다섯 차례의 정기세미나와 시사진전이 개최되었다. 또한 송파문학회를 송파문인협회로 개칭(04.4)하여 모임의 실질적인 내용과 형식에 걸맞은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면서, 명칭이 비슷하다하여 송파문인협회가 한국문인협회의 송파지부가 아니고, 송파구청의 지원금을 받는다하여 송파구에 예속된 것이 아닌 순수문학단체임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 것도 이때의 일이다.
사회적 담론이 되다시피 한 ‘젊은 피 수혈’의 바람이 송파구에도 몰아친 것은 8대 회장의 선출을 앞두고서였다. 유금호회장을 중심으로 한 그 또래집단이 담론의 진원지였다. 그 결과 시조분과위원장과 사무국장, 상임이사를 거치면서 문학회에서 잔뼈가 굵은 박영우 시인이 회장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05.1). ‘젊음’과 ‘잔뼈’를 겸비한 것은 여러 해 사무차장을 하면서 문학회의 궂은일을 도맡아온 김상미사무국장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문학회의 격을 높이면서 회장이 대내외적 사업과 행사를 적극적으로 챙겼다면, 사무국장은 일의 전후과정을 꼼꼼하게 챙겨 팀의 순항을 도왔다. 박영우ㆍ김상미 체제는 <송파문학> 10~14집을 출간하였고, 네 번의 정기세미나와 두 번의 송파가족백일장 및 문학낭송회와 시화전을 개최하였다. 잠실교보문고에 송파문인협회코너가 상시 설치되어 회원들의 작품집이 별도로 진열되게 된 것도 그간의 성과였다. 행사가 많아지면 가장 바빠지는 것이 사무국장인데, 그 와중에도 그녀는 짬짬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하면서, 바야흐로 탈(脫)사무국장의 자격으로 행사과정과 회원들을 ‘직업적으로’ 찍어대는 서정우 시인과 더불어 카메라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홈페이지 사진첩에 첩첩 쌓인 기록사진들은 문단사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 귀한 사료가 되는 것이기에 유의미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송파문학> 14호의 편집후기에서 “아마 제가 회장으로 있으면서 쓰는 마지막 편집후기가 될 듯합니다. 지난 4년 동안 특별히 한 일도 없이 종종걸음만 친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입니다.”라고 겸손한 고별사를 읊은 박영우회장은 차기회장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전직 회장들이 그랬듯이, 그러나 조금은 이른 나이에 명예회장의 반열에 올랐다.
일정한 시기를 이러저러하게 구분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인간의 오래된 관습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20년 역사를 마저 채우면서 15번째의 <송파문학>을 출간해야 하는 10대 회장의 자리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숙고의 대상이었다. 이는 그간 송파문협에 응축된 내적 역량이 송파문협 자체와 지역사회, 그리고 세계화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일종의 분수령에 도달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정이라는 덕목이 절실해졌고, 회원들은 그 대안을 김진돈 수필가와 김상미 전사무국장에게서 찾았다. 그리하여 2009년 2월, 새 집행부가 탄생하였다. 김진돈회장은 회원의 저변확대, 회원 간의 소통을 통한 송파문협 활성화와 회원들의 창작활동 및 사회활동 지원, 송파문협 주최 백일장 개최 및 송파도서관과의 사업 연계, 범지역적인 문학상 제정 등을 사업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기획력의 귀재인 서정우 시인이 상임이사를, 정년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은 정문수 시인이 사무차장을 맡아 궂은일을 자처했으며, 막내격인 조병옥 수필가가 행사 때마다 운전사ㆍ짐꾼ㆍ무대장치요원을 망라하여 나섰다.
송파문협의 화두에 부응하듯 올 한 해 이들의 동선은 크고 왕래는 빈번했다. 3월의 정관 개정을 시작으로, 매월 송파문인협회가 주최하고 송파도서관이 후원하는 ‘2009 책 함께 읽자’ 행사를 개시하여 서기향, 유금호, 방현석, 박영우, 우선덕, 장기오, 고종목 등 시인ㆍ작가들의 낭송회를 열었고, 석촌호수의 벚꽃축제에서는 김정수 작가의 <쑥부쟁이> 문학강연과 낭송회 및 시화액자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송파도서관에 향토작가서재도 마련 중이다. 특히 한성백제문화축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송파문협 주최의 문학나눔콘서트는 새 집행부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시화전시회와 더불어 문학낭송과 노래ㆍ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이 되었을 콘서트는 개최 이틀 전에 신종인플루엔자 확산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때문에 한성백제백일장만 온라인으로 접수받아 진행된 것은 그에 들어간 시간과 공력 때문에 내내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더라도 이 행사를 위해 풀가동되었던 시스템이 다음 사업의 저력으로 이월될 전망이고 보면 고생한 보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진돈회장이 취임하면서 공약한 사업들은 일 년 새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성취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가장 큰 사업인 문학상 제정 문제도 단계를 밟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의욕적으로 일을 벌이는 10대 집행부의 특성상 앞으로 송파문협의 물꼬가 어느 방향으로 트일지, 공약 외적 사업들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집행부의 독주가 아니라 송파문인들이 가리키는 비전의 방향과 일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송파문학> 행간읽기
지금, 여기, 열네 권의 <송파문학>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송파문학특집이 기획되면서 어렵사리 한 자리에 모은 책들이다. 대부분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고 이가 빠진 몇 권은 송파문학회 사무실에서 보충하였다. 그러나 그때, 창간호와 2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초창기 멤버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사하면서 정리했거나 언제 잃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고종목 시인과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아, 2호를 갖고 계시다지 않는가. 득달같이 아시아선수촌 공원으로 달려가 시인을 만났고, 2호를 ‘모셔왔다’. 게다가 그로부터 구로구로 직장을 옮긴 지 여러 해라 달리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었던 김유권 초대사무국장의 전화번호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 역시 초대사무국장답게 창간호를 두 권이나 갖고 계시다지 않는가. 마음은 급했고, 토요일 오후였고, 전에는 송파문학회 사무실이었으나 이제는 송파문화원의 강의실로 용도 변경된 문화원 2층에서 오후 4시에 한성백제축제에서의 문학낭송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었고, 해서 오랜만에 회원들도 만나실 겸 이쪽으로 건너오시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그러겠노라고 하셨고, 그러나 김유권 시인이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도중에 비가 내렸고……. 그 비를 다 맞으며 그는 <송파문학> 창간호를 점퍼 속에 고이 ‘모셔왔다’. 그래서 지금, 여기, 열네 권의 <송파문학>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리고 보너스처럼 1997년에 송파문화원이 발간한 <송파문단>도 함께 있다.
일단 이들을 따라가 보자. 송파문인들의 문학적 삶을 스케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 주로 에피소드를 따라 평소에 발길이 닿지 않았던 오솔길로 걸어야겠다.
초록색 바탕에, 오른쪽으로부터 ‘창간호-松波文學-송파문학회’가 세로줄쓰기로 되어 있는 창간호(93.5) 표지는 예스럽다. 표지를 넘기니 자못 의미심장한 창간사와 축사가 눈에 들어온다. ‘현대의 선비란 자부심을 갖고, 위대한 出發, 송파문학의 르네상스시대가 열리길, 지역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가 그것인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은 서로 통하는 걸까, 송파문협의 이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품들이 실린 후미에 송파문학회기구표와 회원주소록, 그리고 송파구 주요전화번호 안내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동사무소와 예비군동대, 국민학교ㆍ중학교ㆍ고등학교, 그리고 각 은행의 본점 및 송파구 내의 지점 전화번호들이 모두 네 쪽에 걸쳐 ‘소박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부록은 2호까지는 들어 있다가 3호부터는 자취를 감춘다. 앞뒤 속표지에 송파구청과 구의회 및 민주당, 국민당, 민주당의 ‘창간을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실려 있고, 책의 정가는 5,000원이다. 세월의 두께가 여러 곳에서 느껴지는 정경이다.
2호(95.10)에서는 편집후기가 눈에 띈다. “원고모집에서부터 발간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회원들의 원고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은 것과 발간 경비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회장단의 노고 덕택으로 몇몇 기업의 광고 협찬을 얻어 출판비를 마련하였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초기에는 송파구청, 규수방, 김지연 요리학원, 코리아나 화장품, 한화유통, 롯데쇼핑, 세진컴퓨터랜드, 권남희 문예창작실, 해정학원 등의 광고가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회원 자신의 사업체거나 인맥을 동원한 협찬이 대부분이었다. 한여선, 권남희, 김유권, 박영우 등의 맹활약은 “<송파문학>은 송파구 보조금 일부지원으로 제작되었다”는 안내문이 게재되기 시작한 4호(97.8)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되고 있다.
<송파문학>의 지면에 가장 심한 너스레가 등장한 것은 6호(00.4)인데, 아마도 글을 쓴 이는 유금호 소설가와 콤비를 이루는 김용우 소설가인 듯하다. 1999년 6월 남한산성 정기세미나에서의 에피소드로, “이날 유파와 술파는 처음 둘로 나뉘어 서로 개 닭 보듯 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단연 술파가 분위기를 압도하기 시작했는데 이 같은 상황에 불만(?)을 품은 유파의 여성시인들이 술파의 두목 유금호회장에게 보복적 차원에서 술잔에 골짜기에서 방금 잡아올린 싱싱한 올챙이를 담아 통째로 안주로 먹였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씩 유금호회장은 뱃속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데 이젠 제법 자라 분만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도대체 어디로 분만을 해야 할지 걱정 중이라는 소식이다.”라는 전언은 이들이 ‘한 풍류 한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살짝 귀띔을 하자면 이때 올챙이를 들이킨 사람과 이 글의 서두에서 두꺼비에게 소주를 먹인 사람은 동일인이다. 당시 송파문학회의 백말띠 네 명은 유금호, 홍성암, 이태원, 김용우로, 이들은 스스로를 ‘송파마피아(磨彼我)’라고 부르며 호기를 부렸고, 이는 이후 한여선, 전경애, 김영은이 주도한 ‘송파여피아’와 함께 대외적으로 송파문학회를 일컫는 낭만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더불어 행사 때마다 유금호회장이 조제해 전원에게 서비스하는 송파주(松波酒)의 소주 대 맥주 조합비율은 아직도 대내외적으로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해마다 많은 시인ㆍ작가들이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갖지만, 1999년 12월에 있었던 4인합동출판기념회는 ‘4인합동’이라는 특색도 특색이거니와 문단의 원로들이 대거 참석했다는 점에서도 시선을 끈다. 유금호ㆍ홍성암ㆍ최기인ㆍ김용우 소설가의 4인방을 위한 자리였는데, 구혜영, 최미나, 정연희, 박순녀, 김녕희, 윤병로, 신동한, 김병총, 안장환, 박양호, 황충상, 이광복 등의 작가들로 인해 한마당 잔치가 되었던 것이다.
4ㆍ5호에 이어 송파화가의 그림이 표지화로 실린 7호(01.12)에서는 지역문화와의 연계를 고려한 유재용 문화원장의 숨은 노고가 엿보인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장에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발행인ㆍ유금호’ ‘주간ㆍ박용우’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과연 ‘주간ㆍ박용우’는 누구란 말인가. 김용우 소설가인가, 박영우 시인인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인가. 이는 8호(02.11)의 앞부분에 소개된 스냅사진들 중 “몰래 데이트를 하다가 카메라에 잡힌 소설가 우선덕과 김영우”에서도 반복된다. 과연 ‘김영우’는 김용우인가, 박영우인가. 그러나 사진이 증거하는 바 ‘김영우’는 다름 아닌 김용우 소설가였다. 결국 ‘박용우’와 ‘김영우’는 김용우 한 사람으로 모아지는데, 세월은 실수도 유쾌해지게 하는지 미소를 머금으며 이 기회에 오래된 오자를 바로잡는다.
앞서 8호의 스냅사진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송파의 문인들’ 45명의 흑백사진이었던 데 비해,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면 ‘문화유산의 해’인 1997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송파문단>의 표지는 가히 기념비적이다. 앞뒤 겉표지에 회원 33인의 칼라사진이 실렸는데,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의 풋풋한 모습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송파를 떠난 지 오래되었거나, 유명을 달리한 오찬식, 박건호, 이태원 등의 얼굴들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왠지 마음이 사방팔방으로 당겨진다. 매호마다 실리는 ‘여름세미나 지상중계’와 같은 화보나 각종 시상식에서의 기념사진 등도 마찬가지다. 공유한 추억들이 되짚어져 오래 책을 놓지 못하였다.
올해 발간되는 책을 포함하면 <송파문학>은 18년 간 15권이 발간되는 셈이다. 결호가 있었던 것일까. 송파문학회가 결성된 1992년부터 시작한다고 치고 <송파문학>을 발행순서대로 정렬해서 살펴보니 1992, 1994, 1999, 2005년이 비어있다. 창간호가 발행된 것이 1993년 5월이었으니 1992년분은 내용상으로 결호는 아니지만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결호인 셈이고, 2호가 발행된 1995년 편집후기에 “우여곡절 끝에 <송파문학> 제2집을 내놓는다.”라고 했으니 1994년분은 결호가 분명하다. 또한 2000년도에 발행된 6호의 편집후기에 “정식으로라면 지난 해 연말쯤에 나왔어야 했을 책이었다.”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결호가 분명하다. 그러나 2005년 12월에 발행된 11호가 2006년이라는 연도수로 표시됨으로써 2005년에 출간은 했으되, 2005년분의 실체는 없는 결과를 낳았다. 즉 결호는 송파문학회가 결성되던 1992년과 1994년, 1999년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수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송파문학>의 발행년도와 문학회의 행사일자 간에 심하면 2년의 갭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2007년도에 발행된 12호의 화보에서 2005년 12월 26일의 송년모임과 2006년 7월의 정기세미나 소식이 나란히 수록되는 양상이 그것이다. 정보가 늦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발행년도 수가 한 해를 앞지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송파문학>의 오솔길을 따라오다 보니 ‘편집후기’와 자주 동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 14호(09.12)를 보자. “송파문학의 교정지를 식당에서 펼쳐들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방이 없어졌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많은 송파 식구들이 들고나며 따뜻한 차와 그보다 더 따스한 이야기를 나누던 방이 없어져, 한동안 그 방이 있던 건물 전체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아, 정말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 같다. 더 좋은 우리들의 새방이 마련되기를 기대하며 오래된 그 방에 대한 미련을 이제 그만 접기로 한다.” 오은주 소설가의 편집후기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송파문협의 전용 사무실을 잃게 된 사연을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되찾기 위한 집행부의 노력에 채찍을 가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간 발간된 <송파문학>은 마치 옥쇄처럼 현 회장에게서 차기 회장에게로 넘겨지며 전량 보관될 것이다. 역사는 만들어 가는 것 못지않게 잘 보존되어질 때 재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카페에서의 여담 풍(風)으로
지금까지의 서술 형태로 미루어 <송파문학> 특집의 성격이 송파문인들의 문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독자들은 대충 눈치 챘을 것이다. 열네 권의 <송파문학>이나 송파문협의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을 열거하는 일은 가급적 지양했다. 연혁이나 행사일자, 출판된 작품집 소개나 출판기념회 소식, 수상 소식 등이 그것이다. 빈도수가 높은 반면 지면은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이 글은 문인들의 문학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도 개인보다는 송파문인이라는 공동체의 삶에 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사라질 것들에 대한 기록은 보이는 것, 의당 기록될 역사들과는 가치를 달리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송파문인 모두를 조명하지 못했음을 미리 밝힌다. 우선은 회원 수가 많기도 하거니와, 필자의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필자와 이러저러한 영역을 공유했던 회원들과, 이 글을 위해 긴급소집되거나 전화로 호출되어 취재를 ‘당한’ 몇몇 회원들의 진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소주제별로 나누어 본다.
장르 혼성의 힘
송파문협에는 현재 시ㆍ소설ㆍ수필의 세 개 분과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곳은 수필분과이다. 2000년 송파수필문학회를 결성하여 초대 권남희회장과 김영웅, 서승연, 김진돈을 거쳐 현재 김길연회장을 주축으로 하여 그간 세 번의 문학기행을 했으며, 매해 동인지를 발간해오고 있다. 올해 11월에 간행된 <흔들리지 않는 숲>은 이들의 10번째 작품집이다. 매해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여는 이들에게서는 결집된 힘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시분과는 일찍이 시합평회를 진행하면서 두 권의 동인지를 발간한 바 있다. <詩 2000>과 <시인공화국 2002>가 그것이다. <시인공화국 2002>을 출간하면서 ‘시인공화국 헌장 선포식’을 가졌으니, “우리는 송파를 수도로 하여 시인공화국을 건국한다. 우리 공화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하며 공화국 국민의 자격은 송파에 거주하거나 직장을 가진 시인들을 원칙으로 하고 국민적 합의에 따라 송파에 살다가 이사를 간 사람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 시인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의 제국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제국들이 모여 시인공화국 송피시인문학회가 개국하노라. 이에 우리 시인공화국의 국민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학 도시 송파에 정신적 파라다이스를 건설할 것이다.”가 그것이다. 자못 비장했지만, 시분과 모임은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했다. 소설분과 역시 소설가협회 모임으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분과별 모임이 쉽지 않다보니 송파문인들은 장르별 모임보다 장르 혼성모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갖가지 기행과 에피소드가 그때 생겨난다. 윤채한 시인의 별장에서 열린 평창 세미나(`96.8) 때의 일이다. 동안이어서 적어도 10년은 젊어 보이는 고종목 시인이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기 전에 갑자기 가발을 벗은 사건이 있었다. 그가 늘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이유를 가발 때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회원들 모두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시낭송을 하면서 그가 다시 ‘쨘’하고 가발을 벗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고조된 분위기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그 이후 그 자신과 회원들은 가발로부터 서로 자유로워졌다.
때로 여행의 에피소드는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하는데 김용우 소설가가 <월간문학>(98.5)에 발표한 「혼숙여행」이 그것이다. 김용우, 김영은, 권남희, 박영우, 이영숙이 소위 ‘번개팅’ 형식으로 떠난 홍천여행(98.1)을 밑그림으로 하여 탄생한 이 소설은 이후 ‘혼숙여행’의 로망을 퍼뜨린 장본인이 되었다. 또한 이때 나눈 정보를 통해 권남희, 박영우, 이영숙은 오창제, 서정우와 더불어 ‘119study’라는 논술전문사이트를 그해 12월에 개설했는데, 혼숙여행이 사업으로까지 이어졌던 셈이니 대단한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종목, 박건호, 심윤희, 박영우, 이영숙이 함께 떠난 2001년의 중국여행은 ‘안타깝게도’ 혼숙여행이 되지 못했다. 호텔을 이용했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이 여행은 작품으로도 사업으로도 이어지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남겨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문인들의 모임에는 술과 관련된 얘기들이 많다. 양평 세미나(97.8)에서는 송파문인들 이십여 명과 함동선, 김이연, 신세훈, 구혜영 등의 원로 문인들, 그리고 양평문협 회원들 10여 명이 참석하였다. 양평문협 회원들이 제공한 멧돼지 바비큐가 안주이다 보니, 술이 먼저 동나는 것은 거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나중에는 담배마저 떨어지자 대취한 가운데서도 젊은 축들은 밤늦게 술과 담배를 사러 다니느라 고생을 했다. 박유화 소설가가 비닐테이프를 잘라 어깨에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거나, 박영우 시인이 준비해간 10년 묵은 더덕주를 오찬식 소설가가 보리차인 줄 알고 훌쩍 들이켰다는 얘기는 두고두고 맛있는 안주감이 되었다.
이천문협회장인 박승렬 소설가의 초청으로 이천을 다녀온 것은 작년 8월의 일이다. 잘 가꿔진 잔디밭 뒤뜰에서 소주와 그릴에 구운 삼겹살로 거나한 잔치를 한 후 일부는 남고 일부는 귀경을 서두르게 되었다. 김영화 시인이 약시라서 야간운전을 조심스러워 하자 김진돈 수필가가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10m 전방에서 경찰들이 계엄군 같은 포즈로 음주측정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음주운전 중이던 그는 ‘전략적 직관’에 의해 차를 세운 후 내려 뒤 트렁크 쪽으로 다가갔고, 그 사이 김영화가 보조석에서 운전석으로 슬쩍 옮겨 앉았다. 김진돈이 내리는 것을 본 경찰 두 명이 득의양양해서 다가왔으나 상황은 이미 ‘오리발’을 준비한 이쪽에 유리했으니, 경찰이 다른 운전자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이들은 차를 몰고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를 가다가 다시 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경찰이 ‘어디 갔다 오느냐’고 김영화에게 물었던 것이고, 조수석에 앉았던 김진돈이 당황한 김에 “저기, 모임!”이라고 급히 말을 가로채는 바람에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서기향, 김상미, 서정우는 그 와중에도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문정동에 있는 서기향의 사무실에 도착해서 차 한 잔을 마시며 그제야 이천에 머물고 있는 박영우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알린 것이 새벽 3시였고, 이천 팀은 이를 안주 삼아 세 시간을 더 술을 마시다가 술과 담배가 동이 나자 ‘왜 술과 담배는 항상 동이 나는 것일까’를 되뇌며 할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후문이다.
송파문인들이 다재다능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제는 정말 송파문협에 음악분과를 신설해야 하지 않을까. 1991년부터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여선 시인의 소개로 전경애, 박영우, 서정우 시인도 작사가를 겸업 중이다. 한국예술가곡연합회의 회원인 이들은 박건호 시인이 대중가요 작사가로 유명했듯이 가곡 작사가로 유명해지고 있는 중이며, 매년 공동 음반도 출시한다. 한여선이 작사한 「산이 날 부르네」는 고등학교 음악책(지학사)에 실렸고, 3,40여 곡 중에 「흘러라 청계천아」와 합창곡 「메밀꽃 필 무렵」이 유명하다. 2,30여 곡을 작사한 전경애의 대표작이 「금빛 날개」라면, 8곡을 세상에 내보낸 박영우는 「임진강의 노을」이, 6곡의 서정우는 「소쩍새」가 대표작이다. <송파문학> 8호(`2002.11)에는 박건호 시인이 쓴 ‘노랫말 강좌 ― 노랫말은 시가 아니다’가 실려 있으니, 읽고 영감을 받아 작사가의 길로 나서 봄직도 하다.
사건과 사고, 그리고 속설
유금호 소설가가 양평의 강민 시인과 술을 마시던 중에 박영우 시인에게서 전화로 경기대 교수 임용(04.2) 소식을 들었다. 송파문인의 행동양식에 의한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 그는 최고의 ‘사고’를 쳤다. 이른바 골든벨을 울리고 그 술집에 있던 사람들의 술값을 다 냈던 것이다. 교수 임용 소식을 듣고 김경실 시인은 대담한 문자를 보냈다. “영우야 축하한다!”
누구나 자신이 이런 사건(교수 임용과 같은)에 연루되고 싶고, 또 그로 인해 사고(골든벨을 울리는)를 치는 기쁨도 기꺼이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의미의 사건과 사고는 가급적 피하고 싶어 한다. 불행과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너무 어이가 없을 때 오히려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여기 있다.
송파수필문학회의 동인지 9집 <저 바람 속의 노래>의 출판기념회(08.11)가 성황리에 끝나고, 김진돈 수필가의 수필문학회 회장 임기도 만료되는 날 밤이었다. 개미출판사의 최대순 사장과 박영우 시인, 김진돈 수필가가 공식 행사가 끝난 후의 고즈넉함을 즐기고 있는 곳에 다른 곳에서 전작이 있는 서정우 시인이 합류하였다. 문제는 서정우(상황이 급박해질 것이므로 호칭은 생략한다)가 플라스틱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면서 탁자위의 맥주병을 쳤던 것인데, 더 큰 문제는 맥주병이 먼저 떨어져 깨진 직후에 왼손이 그것을 짚었다는 사실이다. 새벽 1시경이었나, 서정우의 손바닥에서 피가 콸콸 솟구쳤다.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자 다친 본인을 비롯해서 나머지 세 명도 혼비백산하였는데, 그때부터 동물적 본능이 이들을 행동하게 하였다. 병원을 수배하고 응급처치를 실시한 것은 김진돈이었고, 택시를 잡아온 것은 박영우였으며, 서정우를 업고 뛰거나 피를 많이 흘려 샛노래지기 시작한 서정우의 따귀를 “정신차려!”라는 ‘기합’과 함께 여러 대 ‘갈긴’ 것은 최대순이었다. 서정우의 후일담에 의하면 그땐 다친 손보다 따귀 맞는 얼굴이 더 아팠다고. 김진돈이 한의사답게 물수건 지압과 국소거양법을 처방한 후, 최대순은 서정우의 팔을 줄곧 지렛대처럼 받쳐 들었고, 술값과 택시비를 계산하는 등 뒷마무리를 깔끔하게 한 것은 박영우였으니, 각자의 능력과 개성이 발현된 환상의 역할분담이 아닐 수 없다.
삼성의료원에 의사가 없어 다시 송파의 수병원으로 건너와 응급조치 수준의 접합수술을 받고 일단 서정우를 집에 ‘인계’한 후 다시 셋이서 소주로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박영우의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새벽 3시였다. 남겨진 최대순과 김진돈이 오뎅에 소주 한 잔 더 걸치고 귀가함으로써 악몽 같은 상황에 종지부가 찍히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날 진단을 받아보니 서정우는 손가락의 신경과 혈관을 다 다쳐 전치2년을 선고받고 바로 입원을 하고 말았다. 같이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이들이 서정우의 가족에게 죄인의 심정이 된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그날 오후 김진돈이 문병갔을 때 공교롭게도 서정우의 직장동료인 일신여중 선생들 몇이 들어왔다. 그들이 서정우에게 “누구랑 술 마셨어?”라고 묻는 품이 같이 술 마신 사람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누군지 알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는 말로 들려 김진돈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전직 일신여중 교사인 박영우에게는 좀 더 직접적인 화살이 날아왔다. 아는 선생이 전화해서는 “어제 정우하고 술 마셨지!”하고 다그쳤을 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왼손바닥을 몇이라고 셀 수도 없이 여러 바늘 꿰맨 서정우는 왼손이 더 자유로운 양손잡이인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낙천가가 되기로 맘먹었다. 하지만 물리치료의 일환으로 당구를 치라는 의사의 처방이 있은 후에 그렇게 좋아하던 당구가 고역이 될 줄이야!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왼손을 틈 날 때마다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그의 요즘의 여가거리였는데,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최근에 한 소식이 들려왔다. 화장실에서 넘어지면서 이번에는 오른손을 20여 바늘 꿰맸다는 것이다. 위로 차 전화했더니 그는 “지난 번 꺼의 팁이지요.”라며 심상하게 받아넘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난다’라고 솔직히 고백했더니, “들으면 누구나 다 웃어요. 나도 우스운데요 뭐.”라고 그는 ‘낙천가’답게 말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송파문협에는 ‘술 마실 땐 의사를 대동하라.’는 속설이 하나 더 생겼다. 한의사인 김진돈회장의 응급처치가 요긴했기 때문이다. 의사 대동 운운은 ‘사무국장 하고 나면 집 산다.’와 ‘요즘은 빨라져서 상임이사 되기만 해도 차 바꾼다.’편의 기록 갱신이라고 하겠다. 모두 서정우 시인과 관련된 것으로, 그가 사무국장을 마친 시기와 집을 산 시기, 상임이사가 된 시기와 차를 산타페로 바꾼 시기가 우연하게 맞물린 우연성 때문에 생긴 말이다. 속설 얘기가 난 김에 유금호 버전을 소개하자면 먼저 ‘각자 제 나이 찾기 운동’이다. 양력과 음력 생일을 합쳐 일 년에 두 살씩 먹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다음은 ‘결혼 후 15년 이상 지난 부부는 근친이다’와 ‘장르가 같은 남녀가 사귀면 안 된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누가 나이보다 심하게 젊어 뵐 때는 ‘나이 찾기 운동’을 들이대고, 모임에서 누군가가 자기 배우자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면 ‘근친설’을, 남녀 시인이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장르 불가설’을 둘러대는 식의 애교 어린 속설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번 송파문인은 영원한 송파문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송파를 떠난 지 오래된 문인들이 여전히 송파문인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속설에는 주술적인 힘마저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문학의 향기
지난 11월 송파도서관에서 열린 고종목 시인의 시낭송회에서 그는 두 시간 남짓 동안 ‘연출 고종목, 연기 고종목, 낭송 고종목’의 자작시낭송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예의 ‘각설이타령’도 등장했다. 빈틈없는 준비와 무대를 장악하는 연기력과 놀라운 순발력의 종합예술이었다. 바느질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 살아온 그가 바느질 연작시를 쓰고, 시집을 출간하고, ‘조각보와 시의 만남’ 전시회(07.3)를 열면서 보여 주었던 시적으로 사는 삶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게 하는 기회였다. 그는 과연 칠순을 넘기기나 한 것인가.
고종목 시인 뿐 아니라 송파문인들은 점점 더 젊어지고 있다. 1917년에 태어나 2008년에 영면한 구름재 박병순 옹(박영우 시인의 부친)은 86세가 되는 해인 2003년에 11번째 시조집 <먼길바라기>를 출간한 바 있다. 젊은 회원들은 물론 정년퇴임을 앞두었거나 이미 퇴직한 회원들도 이제야 시간이 좀 났다는 듯 작품집 출간이 줄을 잇는다. 송파의 힘이다.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유불선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과 접촉하여 이를 감화시킨다”고 한 ‘풍류’가 이들의 문학과 삶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8년 동안 <송파문학>은 정가 오천원에서 만원이 되었고, 190쪽에서 277쪽으로 쪽수가 늘었으며, 주소록의 회원수도 101명에서 196명으로 증가하였다. 여러 회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이들이 송파로 옮겨와 신입회원이 되기도 했다. 몇 군데의 단골 술집과 음식점이 문을 닫고 새 가게가 들어섰으며, 시간은 가속도가 붙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회원들은 저마다 작품집들을 내고, 이런저런 수상을 하거나 상금을 타 가끔씩은 꽃에 둘러싸이고, 상금의 일부로 기꺼이 술 한 잔을 사기도 했다. 가까운데 먼데로 여행을 하고 때론 몇 개월씩 글을 쓰기 위해 두문불출하기도 하면서 가끔씩 송파문인들을 만나 또 여전히 청년처럼 젊은 웃음들을 나누곤 하였다.
김진돈회장의 사업목표와 새로운 비전들이 전환기에 선 송파문협을 이끌고 2009년에서 2010년대로 넘어서고 있다. 그 수레를 뒤에서 함께 밀면서 송파문인들도 새로운 시절을 맞는다. <송파문학> 20주년 기념, 30주년 기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문학의 향기가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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