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먼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어쨌든 한국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의 작품이 유수한 문학상을 받은 건
기쁜 일이다. 더욱이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꾸준히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개척해온 작가가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도 좋은 일이다. 많이 팔리는 것이 최고라고 우기는 요즘의 문학계 풍토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동세대, 혹은 아랫세대 작가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리라 믿는다. 상은 결국 격려의 의미가 가장 크다.
이 상이 한국문학에 보내는 격려인 것은 기쁘게 인정해야 한다.
2.
그렇지만 이번 수상을 두고 마치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이라도 딴 듯이,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보기
민망하다. 노벨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을 제쳤다는 등의 언급이 그렇다. 한마디로 촌스럽고 유치하다.
엄밀히 말해 문학에서 기준을 정해 상을 주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모든 문학적 판단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이다. '문학성'이나 '문학적 가치'의 판단기준에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므로 세계 3대
문학상 수상 운운하는 발언은 촌스럽다. 이런 발언은 결국 유럽문학의 헤게모니를 아무 유보 없이 수긍하는
발언이다. '그들'이 인정해줘야만 된다는 의식에서 한국문학도 이제 넘어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3.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 권위 있는 문학상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상이 '세계 3대문학상'이라는 말은 금시
초문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3대 문학상을 정하는지 궁금하다. 맨부커상(본상)은 1968년부터 영어권(영연방)
문학을 대상으로 운영되어온 상이다. 2005년부터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출판된 작품을 대상으로 별도로
운영된 상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다. 한마디로 비영어권 문학을 대상으로 영국에서 운영되는 문학상이다. 훌륭한
상임에는 분명하지만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다. 비영어권문학에 대한 대우와 인정의 표현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16일 영국 런던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맨부커상 시상식에서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오른쪽)과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
4.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번에도 작가 개인의 수상을 두고 한국문학의 경사라니, 한국문학에 빛이 보인다는
등의 호들갑이 보이기 때문이다. 경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한국문학의 위상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모든 걸 '국가대표'라는 프레임에서 보려는 탓이다. 좋은 작품이 좋은 번역자를 만나 좋은 문학상을 받은 것뿐이다.
이 하나의 사례를 두고 마치 한국문학의 중흥이 오기라도 한 듯이 떠들 일이 아니다. 한 나라 문학의 부흥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
5.
노벨상이든 맨부커상이든 상을 받는 건 기쁜 일이지만, 문학의 경우에 상은 한 작가나 작품의 성취가 인정받았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좋은 작품을 써도 그런 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노벨상을 받지 못한
유수한 작가들을 생각해보라) 문학상의 수상을 둘러싼 (정치, 외교, 문화적) 변수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더욱이 유럽에서 주는 문학상에 거대한 '권위'를 부여하고, 마치 한 작가가 그 상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한국문학이
뭔가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오른 것인 양 착각한다면, 그건 강하게 표현하면, 문화적 식민주의의 또 다른 양상
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좋은 일임은 분명하지만, 이 경우에도 평정심을 지키고, 오버하지 않는 게 필요하다.
6.
한 나라 문학의 성취는 외국에서 주는 어떤 상을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그 나라 문학과 문화 전체의 두께에서
판가름된다(고 나는 믿는다). 높은 산이 솟으려면 수많은 언덕과 야산과 산맥이 힘을 받쳐줘야 한다.
한국문학에서 그런 언덕과 야산과 산맥의 튼튼한 지형이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평지돌출의 한 성취에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노벨상 등의 수상 여부에 목을 매는 짓도 그만할 때가 되었다.

7.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보다는 [소년이 온다]가 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단지 후자가 '광주'를 다뤘다는, '소재주의'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강이 보여주는 시적 문체와
인간의 욕망과 폭력에 대한 탐구를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소설적 육체에 과연 부합하는지 하는 질문,
인간의 폭력과 욕망을 그것이 배치된 구체적인 역사사회적 조건 속에서 탐구하려는 태도가 [소년이 온다]에서
더 생생하게 표현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강의 시적 문체에 대해 의구심과 우려를 갖고 있다.
이것은 [소년이 온다]에도 해당된다. 시를 지향하는 소설의 운명에 대한 우려이다.
8.
[채식주의자]가 인정을 받은 건 역시 번역의 힘이다. 좋은 영어번역이 있었기에 수상이 가능했다.
(이게 좋든 싫든 '제국의 언어'로서 영어의 힘이다) 내가 주목한 건 이 작품의 번역자가 자발적으로 한국어를
배워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작품을 골라 번역했다는 점이다. 한국정부에서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는 한국문학
국제화 운운하는 '사업'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 자발성이나 애정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지만, 문학과 예술에서
창작자, 비평가, 번역자의 자발성과 애정이 갖는 힘을 문득 느낀다. 굳이 이런 말을 적는 이유는, 행여 이번 수상을
계기로 또 국가가 나서서 무슨 상 수상을 위한 '국책사업'으로 행여나 '창조문학번역사업'(sic!)을 벌이는 해묵은,
촌스러운 작태를 보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9.
작가는 국가나 민족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글을 쓴다. 그 글쓰기에 여러 가지 것들이 담길 수 있겠지만,
그 성취는 그 개인의 것이다. 그러니 한 작가의 외국문학상 수상을 두고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들먹이는 촌스러운
짓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수상으로 한국문학의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유치한 말도 그만하자.
작가는 그런 인정을 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대표해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그냥
자기가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한 개인으로서 글을 쓰는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쓴다. 그렇게 쓴 작품을 남이 알아주고 말고는, 어떤 상을 받고 말고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는
'세계문학공화국/제국'의 역학이, 혹은 운이 작용하는 일이다.
10.
다시 한 번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앞으로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넘어서는 좋은 작품을
써주기를 기대한다. <끝>
출처: 오영길.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46) 옆에 스물아홉 살 영국인 데버러
스미스가 나란히 섰다.
그는 16일(현지시간) 발표된 수상작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번역가로, 권위 있는 문학상의 영예와 상금 5만 파운드
(약 8천600만원)를 나눠 갖게 된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맨부커상은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고려해 작가와 번역가에게 공동으로 수여된다.
스미스는 심사위원장 보이드 턴킨으로부터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독창적"이라는 평을 들은 '채식주의자'를
번역하면서 문학적 뉘앙스를 잘 살려 작품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BBC 방송, 일간 텔레그래프 등 영국의 주요 언론은 질 높은 번역을 한 스미스가 불과 6년 전인 2010년 한국어를
독학으로 시작했고 첫 번역을 '한 낱말 건너 한 낱말씩' 사전을 뒤져 가며 했던 번역가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보도에 따르면 스미스는 21세까지 오직 모국어인 영어만 할 줄 알았던 영문학도였다. 특히 한국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는 "나는 한국 문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한국인을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스미스는 그러나 영문학 학위를 마치고 나서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때 영국에서 한-영 번역가가 적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번역은 읽기와 쓰기를 모두 하는 일이기에 번역가가 되고 싶었고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며 "이상하지만
한국어가 확실한 선택인 것 같았다. 이 나라에서 공부하거나 아는 사람이 사실상 거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미스는 자신의 한국어 회화 수준을 "딱 교재로 배운 사람이 하는 것 같은" 정도라고 자평했다.
2년가량 공부하고 나서 그는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첫 번역 때는 "사실상 단어를 하나 걸러 하나씩 찾아봐야
했던, 끔찍한" 실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가량 지나 영국 유명 출판사 포르토벨로가 출간하기에 적합한 책이 있는지 문의했을 때 다시 번역을
시도했다.
결국 그는 안도현의 '연어',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 '서울의 낮은 언덕들', 한강의 '소년이 온다' 같은
동시대 한국 문학 작품을 다수 번역하는 번역가가 됐다.
특히 스미스는 소셜미디어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자신에게 '채식주의자'는 '결정적 기회'(big break)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 번역가로서의 길을 열어줬다는 뜻이다.
'채식주의자'를 읽고 매료된 그가 번역본 일부를 포르토벨로에 보내 출간이 이뤄진 것이 영국에 한강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화다.
턴킨 심사위원장은 '채식주의자'를 가리켜 "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책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 꿈에까지 나올 수 있다"며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은 스미스의 번역은 매 순간 아름다움과 공포가
묘하게 섞인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평했다.
스미스는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에 특화한 비영리 목적의 출판사 '틸티드 악시스'도 설립했다.
스미스는 3월 연합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번역할 때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말하느냐'라면서 "번역은 시를 쓰는 일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감수성"이라며 문맥에 맞는 두 음절 형용사를 찾으려 며칠간
머리를 쥐어짠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