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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
―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
박 진*동의대학교 철학과 교수.
요 약 문
이 글은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에 대한 고찰이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칸트 해석자들 사이에 상이한 시각 차이가 있어왔다. 이는 칸트가 비판에서 양자의 관계를 단지 병렬적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 명확한 관계해명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도 기인한 것이다. 페이톤(H. Paton)은 한 논문에서 양자의 관계문제를 제기하고 형식논리학이 초월논리학의 근거가 된다고 해석했다. 한편 라이에즈(R. S. Laiez)는 양자가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본다. 즉 “칸트의 논리학 개념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상호의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전비판기와 비판기에 있어 동일률에 대한 이해에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고, 비판에서 양자를 병렬시켜 설명하는가 하면 범주표의 도출을 위한 실마리를 형식논리학의 판단표에서 차용하고 있는 등 양자의 관계를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소지를 남겼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며, 필자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주석이 아닌 해석의 문제요, 자구 그대로의 의미의 드러냄보다 비판적인 교정을 통한 올바른 이해의 시도다. 즉 단편적으로 서술된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초월논리학의 본래적 과제는 무엇이고, 그 과제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필자가 보기에 초월논리학은 형식논리학에 의존하거나 병렬적인 또 하나의 논리학이 아니라 <논리학의 철학적 근거지움>으로서 간주되야 한다. 이에 대한 체계적 해명이 이 글의 과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초월논리학에 대한 해석의 역사와 칸트의 문제의식을 개관하고 구체적으로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 주요어 : 칸트, 초월논리학, 일반논리학, 종합적 통일, 분석적통일, 종합적 징표, 분석적 징표.
Ⅰ. 서 론
이 글은 칸트의 초월논리학과 일반논리학의 관계 문제에 대한 고찰이다. 칸트는 비판에서 일반논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보의 후퇴도 없었고” “학의 안전한 길을 걸어와” 더 이상 본질적인 것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완성된 학문”(B Ⅷ)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칸트가 스스로 비판에서 제시하고 있는 “초월논리학”(B81)과 일반논리학은 어떤 내면적인 관계를 지니며, 또 초월논리학의 원리는 일반논리학의 원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무엇이 무엇에 선행하는 우위를 지니는가? 형식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는 칸트 연구자들 사이에 서로 상이한 견해 차이가 있어온 매우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요, 초월철학의 사활이 걸린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는 칸트 해석자들 사이에 상이한 시각 차이가 있어왔다. 이는 칸트가 비판에서도 양자의 관계를 단지 병렬적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 명확한 관계해명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도 기인한 것이다. 페이톤(H. Paton)은 한 논문에서 양자의 관계문제를 제기하고 형식논리학이 초월논리학의 근거가 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적이 적절하다고 보인다. “오늘날 수학적 논리계산(die mathematische Logistik)의 진보와 지배적인 사태를 눈 앞에 둔 사람들은 형식논리학을 초월논리학의 평가를 위한 비판적 잣대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한편 라이에즈(R. S. Laiez)는 양자가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본다. 즉 “칸트의 논리학 개념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상호의존성(die fragliche Abhängigkeit wechselseitig)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전비판기와 비판기에 있어 동일률에 대한 이해에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고, 비판에서 양자를 병렬시켜 설명하는가 하면 범주표의 도출을 위한 실마리를 형식논리학의 판단표에서 차용하고 있는 등 양자의 관계를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소지를 남겼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며, 필자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일련의 글들을 통해 밝혔듯이 칸트가 자신의 철학 체계 구상을 표명한 1772년 이후는 물론 이전부터 오랜 기간의 반성 속에서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형이상학을 매개로 전승된 종래 스콜라적 존재론의 핵심 개념인 통일(unum), 진리(verum), 완전성(perfectum)과 같은 초월자(transcendentalia) 개념이 범주론의 체계화에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전 초월철학의 건축술을 완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종래의 칸트 연구가들에 의해 간과되어 왔다. 피히테, 헤겔 등이 이미 주목했듯이 칸트가 초월철학의 체계 구성에 있어 즐겨 애용했던 구별은 3분지(Trichotomie)로 특징지워진다.
비판에서 칸트는 당시 논리학의 판단표로부터 범주를 도출해낸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당시 논리학에서 2분법(Dichotomie)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고려해 볼 때, 판단표와 범주표의 체계화에 있어 그가 각각의 항목을 3분지로 나누고, 또 인식능력을 감성과 지성,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상상력으로 3분했던 점이나, 상위인식능력을 다시 지성, 판단력, 이성으로 3분했던 점 등에서 우리는, 칸트의 건축술적 사고를 규정하고 있는 근본원리가 형식논리적인 2분법이 아니라 오랜 전통을 지닌 초월자론의 3초월자들과 내면적인 연관을 지닌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헤겔 역시 “정신(Geist)의 영역에서는 3분법이 더 우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한, 헤겔의 사변적 반성과의 연관성도 밝혀야 할 숙제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주석이 아닌 해석의 문제요, 자구 그대로의 의미의 드러냄보다 비판적인 교정을 통한 올바른 이해의 시도다. 즉 단편적으로 서술된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초월논리학의 본래적 과제는 무엇이고, 그 과제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필자가 보기에 초월논리학은 형식논리학에 의존하거나 병렬적인 또 하나의 논리학이 아니라 <논리학의 철학적 근거지움>으로서 간주되야 한다. 일반논리학에서는 동일률과 모순율 및 충족이유율이 모든 사유가 필연적으로 그에 따라야 하는 사유의 근본 원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도대체 이런 원리들이 서로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원천 자체가 무엇인지는 더이상 물어지지 않았고, 일반논리학은 이들 원리들을 각각 자명한 것으로서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듯 자명한 것으로 하등의 문제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것을 결코 자명하지 않은 것으로 문제시함이 철학적 사유의 본질을 이룬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리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되물어 보아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 논리학은 비로소 철학적인 근거지움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듯 일반논리학에 대한 반성을 철학적 논리학, 또는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이라 부르기로 하자. 철학적 논리학은 논리적 사유의 원천과 그 원리들의 내적 연관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언표하는 사유활동으로서의 Logos자체의 근원적인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초월논리학의 이념은 칸트(I. Kant)를 거쳐 피히테(J. G. Fichte)에 의해 계승되며, 오늘날 후설(E. Husserl)의 현상학적 방법론에 의해 재차 시도되고 있다. 또한 하이데거(M. Heidegger) 역시 논리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그의 존재사유에로 나아가는 도약대로 삼고 있다.
본고는 이런 초월논리학에 대한 역사적-체계적인 고찰에 앞서 칸트의 반성 속에서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형식논리적인 반성은 개념들의 관계에만 관심을 지니며, 개념이 어디에서 유래했건 동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한 내용적 유래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월적 반성은 순수 개념의 대상관련성, 그 객관적 타당성을 문제삼는다. 바로 이점에서 초월논리학은 순수 사고의 形式을 다루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일반논리학과 그 접근 방식에 있어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이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와 그것들의 관계가 해명되야만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초월논리학에 대한 해석의 역사(II)와 칸트의 문제의식(III)을 개관하고 구체적으로 칸트의 개념론과 판단론을 중심으로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IV)를 해명하고자 한다.
Ⅱ. 초월논리학에 대한 해석의 역사
앞서 언급했듯이 형식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는 상이한 해석의 시각 차이가 있어 왔다. 페이톤(H. Paton)으로 대변되는 입장은 초월논리학이 형식논리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입장이며, 이에 반해 필자는 형식논리학이 초월논리학으로부터 근거지워지고 이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이런 과제를 수행하기 앞서 우리가 칸트 해석의 역사를 돌아볼 때, 일찍이 헤겔(G. W. F. Hegel)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관념론의 사변적 형이상학의 몰락 이후 다시 칸트의 사상 자체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19세기에 신칸트 학파에 의해 주도된 적이 있었다.
코헨(H. Cohen), 하르트만(N. Hartmann), 카시러(E. Cassirer)로 대표되는 마부르그학파와 빈델반트(W. Windelband), 리케르트(Rickert) 라스크(Lask) 등으로 이어지는 서남학파로 나뉘어 전개되었던 신칸트학파의 해석에 의하면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분석론은 뉴튼 물리학의 정초론으로서 자연과학의 방법론이었고, 인식의 논리학 즉 인식론이었다. 마부르그학파의 대표자인 코헨의 경우, 감성적 직관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순수 “사유로부터 시작”하는 이른바 순수 인식의 논리학(Logik der reinen Erkenntnis)(1902)을 전개한다. 그는 직관과 개념의 칸트적인 구별을 폐기하고 근원적인 사고 일원론을 취하며, 초월논리학을 순수 사고에 의해 質料조차 과제로서 산출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철저한 순수 사고의 논리학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감성론의 성과를 무시하는 이런 해석에 의하면 자기의식이 대상의 실질적 소재까지 산출하는 독단적인 이성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고, 이는 칸트 초월논리학의 정신을 왜곡한 독단적인 해석이다.
이런 신칸트학파의 해석에 반발하여 칸트의 자기의식, 즉 통각의 통일 원리에 주목하여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정신을 보다 충실하게 계승하려는 입장으로서 라이히(K. Reich)의 해석이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리에 초월논리학을 정초시킨 칸트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로부터 일반논리학의 판단표들을 체계적으로 정초해 줌으로써 초월논리학이 일반논리학의 철학적인 근거지움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시도했다. 따라서 그의 해석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반논리학을 초월논리학에 정초시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칸트학파의 해석이 칸트 자신에 충실한 해석이지 못했다는 반성과 더불어, 1924년 분트(M. Wundt)가 형이상학자로서의 칸트 해석의 단초를 제시한 후, 크니터마이어(Knittermeyer), 하임죄트(H. Heimsoeth), 하이데거(M. Heidegger), 카울바하(F. Kaulbach), 마르틴(G. Martin) 등 존재론적 시각에서 칸트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칸트 철학의 의의를 전통과의 깊은 연관 속에서 밝혀 주고 그 올바른 정위를 수행했다는 적극적인 기여를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경향 속에서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문제에 대한 물음은 주도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헨리히(D. Henrich)는 일찍이 라이히(K. Reich)가 초월논리학의 최후 근거를 통각의 통일 원리에서 찾았던 시각과 유사한 궤도 위에서 칸트를 해석함으로써 2차대전 “전후의 가장 밀도있는 칸트 논쟁의 영역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헨리히의 해석의 문제점은 그가 단지 재판의 연역론에만 초점을 맞춰 자의식의 형식적 구조 분석에만 머물고 있고, 라이히가 수행하고자 했던 바, 초월적인 “자기의식으로부터 형식논리학을 도출”하고 정초하고자 했던 체계적인 시도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칸트 연구사에 있어 생산적인 기여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앞서 지적했듯이 “질적 통일”로서의 종래 스콜라적 초월자이론과의 연관성을 놓치고, 자기의식의 통일성을 한갓 “수적 동일성”(numerische Identität)과 같은 형식적 개념으로 해석함으로써, 질료적 대상 관련적인 인식의 가능성 해명을 의도했던 초월논리학의 이념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브란트(R. Brandt)가 지적했듯이 헨리히의 칸트 해석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오래전 라이히가 추구했던 길을 되살려 완성시키는 것이 훨씬 더 풍부하고 생산적인 결실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된다. 라이히의 해석의 유익한 점은 판단표를 비롯한 형식논리학의 원리들을 초월논리학의 최고 원리인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리에 의해 정초해 줌으로써 초월적 자아가 형식논리적인 분석에 앞서 근원적으로 능동적인 종합의 기능(operatio mentis)을 수행함을 확증해 준다는 데 있다. 즉 이런 해석의 관점에서 “인간은 개념[범주]에 따라 스스로 만들고 성립시킨 것만을 완전하게 통찰할 수” 있고, 따라서 “스스로 만든 것과 진리는 교환가능하다”(factum et verum convertuntur)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핵심이 잘 드러난다. 오늘날 개념, 판단, 추리와 같은 논리학의 고유한 내용들을 논리계산(Logistik)이나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논리학으로 환원시키는 형식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인 데 반하여, 오히려 논리적인 사고가 본래적으로 인식 주체의 대상관련적인 능동적 의식활동으로부터 파생된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논리학을 철학적으로 근거짓고 그 존재론적 연관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데 이런 해석의 중요성과 의의가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이하에서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를 규명하고, 일반논리학적인 분석적 사고일반이 어떻게 통각의 근원적 종합 통일작용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지를 해명함으로써 일반논리학을 초월논리학에 정초시키고자 한다.
Ⅲ. 초월논리학의 문제의식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체계를 크게 인식의 요소들(직관, 개념, 이념)을 다루는 ‘초월적 요소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과 사유의 훈련, 규준, 건축술, 역사 등을 다루는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lehre)으로 나누고, 요소론을 다시 크게 ‘초월적 감성론’(transzendentale Ästhetik)과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요소론의 2부의 표제를 이루는 바,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전통적인 일반논리학(allgemeine Logik) 내지 형식논리학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의 구조를 전통 논리학의 구조와의 연관 속에서 간략히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구조가 대체로 ‘분석론(Analytik)’, ‘변증론’(Dialektik), ‘장소론’(Topik) ‘방법론’ 등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반논리학의 구성 부분들과 일치하는 점이 발견된다. 즉 칸트도 ‘초월논리학’을 ‘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과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으로 구별하고 있고, 이때 전자를 다시 ‘개념의 분석론’과 ‘원칙의 분석론’으로 나누고, 이때 ‘개념의 분석론’에서는 지성의 순수개념인 범주들의 발견과 연역을 다루고, ‘원칙의 분석론’은 ‘판단력의 교설’(Doktrin der Urteilskraft)이라고 불리는 바, 순수직관과 순수사고의 결합과 매개(도식작용)에 의한 선험적 종합판단의 제 원칙들을 다루며, 변증론에서는 종래 영혼론에서 수행된 이성의 오류추리(Paralogismus), 우주론의 이율배반(Antinomie)과 신존재증명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전통논리학의 체계가 개념, 판단, 추리의 순서로 이뤄지고 있음을 볼 때 형식적인 구조에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면모도 발견된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칸트가 논리학에 앞서 질료(Materie) 내지 대상(Gegenstand)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수용적 직관의 기능을 다루는 ‘감성론’(transzendentale Ästhetik)을 그의 초월철학의 체계에 필수적인 중요한 것으로서 독립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념적 사고 내지 추리의 형식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개념과 전혀 이질적인 감성적 직관의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고 오히려 논리적 사고에 앞서 순수 수용성의 조건인 시간(Zeit)을 순수 사고의 선험적 質料(Materie)(B102)로서 전제하고 있고, 참된 대상(현상)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상상력의 매개에 의한 범주의 시간화, 즉 도식작용(Schematismus)을 다룬다는 점에서 초월적 반성 속에서 수행되는 칸트의 초월논리학이 전통적인 형식논리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통적인 논리학이 삼단논법적인 추리(syllogismos)를 중요시하여 그 형식들을 格과 式으로 세분하여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칸트는 ‘변증론’에서 일반 논리학에 기초한 전통 형이상학의 오류추리들을 사변적 이성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관심 속에서 단지 소극적, 비판적인 태도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칸트에 있어 ‘변증론’(Dialektik)이란 명칭은 플라톤의 ‘변증술’(dialektike)과 달리 참된 실재를 발견하기 위한 “眞理[眞像, idea]의 논리학”(Logik der Wahrheit)(B87)이 아니라 단지 종래의 독단적 합리론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한 “假像의 논리학”(Logik des Scheins)(B86)일 뿐이다.
이렇듯 개념, 판단, 추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형식논리학과 일치하는 칸트의 초월논리학에 있어 전자와 구별되는 중요한 문제의식은 ‘분석론’에서나 ‘변증론’에서도 공히 대상관련적 質料적인 인식의 문제가 주제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분석론’의 주된 과제는 단지 개념이나 판단의 형식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나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내용을 지닌 대상[眞像]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해명에 있다. ‘변증론’의 과제는 한갓 올바른 추론의 규칙이나 형식상의 오류를 해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내용의 대상[假像] 인식이 생겨나는 원천을 드러내어 밝혀줌으로써 이성의 본성상 생겨나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데 있고(BXXXI), 이렇듯 경험의 한계 넘어에로까지 이념의 구성적 사용을 감행했던 사변 이성에 가한 “소극적인 사용의 제한”은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는” 이념의 통제적-발견적 사용에 의한 경험의 내용적 인식들의 체계적인 통일을 가능케 하고, “실천적(도덕적) 사용”에 의해 초감성적인 것에로 나아가려는 이성의 본래적 목적의 실현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BXXV)
즉 우리가 간과해서 안될 것은 칸트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반논리학을 “완성된 학”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사고의 형식적 규칙들”(BIX)에 관한 학이라는 “제한된 한계 규정” 아래서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칸트에 의하면 일반논리학은 대상관련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준도 제시해 줄 수 없다. “일반논리학은 지성적 인식의 모든 내용과 그 대상의 차이를 도외시하고 사고의 순 형식만을 다룬다.”(B78) 칸트가 보기에 일반논리학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오직 이런 “논리학 자체의 제한성 덕분이었다”(BIX) 즉 형식논리학은 사고와 추론 형식을 다루는 데, 예컨대 3단논법의 형식들 가운데 1格의 AAA式의 추론형식; ‘모든 R은 Q다.’ ‘모든 P는 R이다.’ 따라서 ‘모든 P는 Q다’의 경우 여기서 P, Q, R은 모두 ‘변항’으로 어떤 임의의 개념 또는 대상들의 집합도 대입시킬 수 있고, 이때 이런 개념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또 각 개념이 대상들에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도외시되고 있다. 따라서 형식논리학은 지성의 사고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한, 제한된 범위 안의 확실성을 지닐 수는 있지만, 인식의 실질적인 내용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도외시한, 한갓 추상적인 기호들의 유희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미 초기 사유 속에서도 이런 일반논리학에 기초한 당대의 합리론적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식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관련적인 존재론의 방법으로서의 새로운 논리학, 다시말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B80) 실질적인 논리학으로서 “초월논리학”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Ⅳ. 일반논리학과 초월논리학의 관계
1. 분석적 통일과 종합적 통일
일반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Inhalt), 다시 말해 대상과의 모든 관계맺음(Beziehung auf das Objekt)을 도외시하고”(B79) 표상들 간의 관계에 있어 “논리적인 形式”만을, 즉, “사고 일반의 한갓된 形式”만을 다룬다.(B78) 즉 형식 논리학은 인식이 재료상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표상들의 “원천(Quelle)을 문제삼지 않으며, 개념들이 내용상 경험에서 유래했던[ex. 사과, 꽃],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건[ex. 용, 인어], 지성의 본성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던 간에[ex. 실체, 원인], 단지 주어진 표상들이 사고 속에서 [보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되는 방식만을 탐구한다.”
칸트에 따르면, 형식논리학이 도외시하고 있는 “재료상 한 개념이 경험적인지, 자의적인지, 또는 지성적인지 하는, 그 질료(Materie)와 관련한 개념들의 원천은 형이상학(Metaphysik)에서 탐구되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제를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논리학”에서 떠맡아 “초월적 반성”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학으로서 도래하게 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입문”(Prolegomena) 내지 “예비학”(Propädeutik)(B76. B878)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분석론”의 성과가 종래의 일반 형이상학 즉 존재론(Ontologie)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B303) 초월논리학의 이념 속에서 우리는 공허한 사유가 아니라 내용적인 사유, 대상관련적인 사유를 다루고자 하는 칸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따라서 칸트의 초월논리학은 존재론과의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여기서 칸트가 개념 일반을 내용상 어떻게 분류하고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개념은 그 “형식”(Form)의 측면에 있어서는 항상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재료에 있어서는”(der Materie nach) “주어지는 개념”(conceptus dati)이거나 “만들어진 개념”(conceptus factitii)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다시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개념”(conceptus empirici)과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개념”(Notio)으로 나뉘며, 이에 상응하여 후자 역시 “경험적으로 만들어지는 개념”과 “선험적으로 만들어지는 개념”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념들을 “재료상”으로 세분해 본다면, 1) 재료가 경험으로부터 주어져 “추후적으로 획득된”[추상된] ‘경험적 개념’(ex. 집, 사과) 2) 재료가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선험적으로 주어져 감각 경험을 기회로 “근원적으로 획득된” ‘순수지성개념’(ex. 실체, 원인), 3) 상상력이 경험 내용을 재생하고 이를 소재로 재료 자체를 가공하여 “자의적으로”(B757)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ex. 유니콘, 용) 4) 상상력이 순수 직관 속에서 재료 자체를 선험적으로 생산해 내어 “근원적으로 만든”(B758)[구성한] ‘순수 수학적 개념’(ex. √2, 점), 5) 상상력이 범주의 종합을 무제약자에로까지 확장[추론]하여 만들어낸 “상상의 촛점”(focus imaginarius)으로서 ‘이성의 순수 개념[이념]’(ex. 신, 영혼, 세계, 자유) 끝으로 6) 이런 개념 일반과 모든 직관을 포함한 표상 일반은 물론 마음의 능력[知, 情, 意] 일반과 대상 일반을 비교하고 반성하는 데 사용되는 비교․반성의 도구로서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인 반성개념들(ex. 동일과 차이, 일치와 모순, 안과 밖, 질료와 형식)로 크게 6가지로 분류된다.
이와 같이 칸트가 개념 일반을 재료상 “주어지는 것[획득된 것]”과 “만들어 지는 것”으로 대별한 것은, 칸트가 데카르트와 달리 일체의 본유관념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데까르트가 그 근원에 따라 관념 일반을 “본유 관념”(idea innata), “획득 관념”(idea adventicia), “내가 만든 관념”(idea a me ipso facta)으로 대별한 것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칸트의 입장에서 볼 때, 데카르트는 허용될 수 없는 본유관념을 용인하는 잘못을 범했다면, 반면 로크는 이렇게 그 재료적인 원천과 유래가 전혀 다른 개념들을 모두 일률적으로 경험으로부터 획득된[추상된] 것으로 간주하는 착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형식논리학이 논리적 반성 속에서 개념을 취급하는 방식과 초월논리학이 초월적 반성 속에서 개념을 다루는 방식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다 면밀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형식논리학에서는 주어진 개념들을 분석하여 그 안에 부분표상으로 포함되어 있는 징표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개념이 그 징표를 통해 하나의 대상(ein Objekt)을 규정하는 방식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의 개념들을 보다 상위의 개념 아래 포섭함으로써 개념들의 논리적인 포섭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징표들을 형식적[외연적]으로 비교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개념들의 형식적 관계만을 문제시하는 형식논리학에서는 개념의 내포인 징표들이 주제화된다 하더라도 각 개념의 내포가 한 대상의 고유한 속성들로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념의 징표들은 특정 대상과의 관련이 도외시된 채 단지 여럿에 타당한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형식적으로 비교되며 공통징표(notas communes)만 주목되고 나머지 징표들은 도외시됨으로써 보다 상위의 보편개념 아래로 포섭된다. 이렇게 상이한 개념들로부터 공통적인 일반 개념(conceptus communes)을 도출해 내기 위해, 상이한 표상들의 공통적인 징표를 반성하는 지성의 활동을 논리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논리적 反省”은 상이한 표상들을 -그것이 어디서 주어졌건 또 어떤 특수한 대상과 관계하건 상관없이- 분석적으로 비교․반성․추상함으로써 보다 일반적 개념 아래 포섭하거나 역으로 상위의 일반적인 개념을 종별화하여 하위 개념들로 세분화하여 규정하는 “분석적 통일”(analytische Einheit)(B105)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통일의 기능은 주어진 개념의 분석을 통해 성립하는 “분석판단”의 제 形式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분석적 판단의 최고원리는 “판단이 자신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는 “모순율”(principium contradictionis)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율은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는 한갓 형식적 원칙”(B191)인 한, 대상에 관한 내용적 인식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갓 개념들의 관계를 비교하는 논리적 반성 속에서 “판단이 아무런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판단은 대상이 초래하는 결과와는 다르게 개념들을 결합할 수 있으며, … 따라서 판단이 내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할지라도 거짓이거나 근거없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B190)
그러나, 초월 논리학은 이렇듯 인식의 내용과 대상과의 관련성을 배제한, 사고의 한갓 논리적 形式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 대상관련적 사고, 즉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문제삼는다. 따라서 일반 논리학이 다루는 “形式들”은 대상관련적인 내용이 도외시된 “사고일반의 形式”이며, 단지 개념들간의 포섭관계가 주제화될 뿐인데 反해, 초월논리학이 다루는 “形式들”은 그것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대상이 성립할 수 있는 “대상 일반의 形式”이며, 여기서는 직관된 내용이 어떻게 개념 아래 포섭될 수 있는지 또한 개념이 어떻게 감관의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가 주제화 된다.
그러므로 이제 초월적 反省이 주목하는 지성의 활동은, 직관 一般의 다양을 결합하여 한 대상에 관한 “개념에로 이끌어 가는”(auf Begriffe bringen)(B104)활동이다. 이는 상상력의 3중의 종합(syn-thesis)을 매개로 다양한 내용의 소여들을 포착․재생․인지하여 하나로 묶어 줌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대상을 성립시키는, 우리 의식의 “종합적 統一”(synthetische Einheit)(B105)의 활동이다. 칸트는 이러한 우리 의식의 활동을 “統覺의 근원적인 종합 統一”(B132), 또는 다양을 종합함에 있어 “統覺의 一貫된 同一性”(durchgängige Identität der Apperzeption)(B133)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상에 관한 우리의 모든 실질적 인식[종합판단]이 이러한 의식의 종합적 통일작용에 근거하는 한, “모든 종합판단의 최고 원리는 ‘모든 대상은 가능한 경험에 있어서 직관의 다양을 종합적으로 통일하는 필연적인 조건에 종속한다’는 것이다.”(B197) 나아가 “통각의 종합적 통일 활동은 그곳에 모든 지성 사용이, 또한 全 논리학이, 나아가 초월철학조차도 뿌리박고 있는 최고 지점(der höchste Punkt)이며, 이런 능력이 지성 자체이다”(B134 Anm.)
따라서 일반 논리적인 반성에 있어, 의식의 “분석적 統一도 이런 종합적 統一을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B133) 왜냐하면, “결합의 반대인 듯이 보이는 분해(Auflösung) 또는 분석도 항상 결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지성이 미리 아무것도 결합하지 않았다면, 지성은 또한 아무것도 분해할 수 없다”(B130) 그렇다면 이제 분석과 종합, 이 양자의 관계를 개념의 내용을 이루는 징표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예를 통해 살펴 보기로 하자.
2. 분석적 징표와 종합적 징표
예컨대, “의식의 분석적 통일은 모든 일반개념 자체와 결부되어 있다. 가령, <빨강 一般>(rot überhaupt)을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을 통해 (징표로서) 어느 곳에선가 발견될 수 있거나, 또는 다른 표상들[ex. 붉은 장미, 빨간 사과]과 결합되어 있을 수 있는 어떤 성질을 표상한다. 따라서, 나는 미리 생각되는 가능한 종합적 통일에 의거해서만, 분석적 통일을 표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상이한 표상들에 공통적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하나의 표상[ex. 빨강]이 공동 징표 이외에 어떤 상이한 것을 그 자체에 지니는 표상들[ex. 빨갛고 새콤한 사과, 붉고 아름다운 장미]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따라서 하나의 표상을 일반개념으로 만드는 의식의 분석적 통일을 그 표상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기 이전에, 이 표상은 다른 표상들(비록 단지 가능한 표상들이라고 하더라도)과의 종합적인 통일 속에서 [생산적인 상상력의 기능에 의해] 미리 생각되어져야만 한다.”(B133 Anm.)
칸트는 마이어(G. Fr. Meier)의 저서 “이성론의 발췌본(Auszug aus der Vernunftlehre)”(1752)에 자필로 방대한 분량의 메모(Handexemplar)를 남기고 있는데(E. Adickes에 의해 칸트 전집 XVI권에 논리학에 관한 반성들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음), 그 가운데 아래와 같은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즉 “부분개념[징표]은 생산적 상상력(produktive Einbildungskraft)의 능력에 의해 모든 비교에 앞서(vor aller Vergleichung) 인식의 근거로서 선험적으로(a priori) 표상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 속에서 이미 생각하고 있는 나의 현실적인 개념의 부분개념들[징표들]은 분석적이요, 단지 (또 다른 여러 징표들의 종합을 통해서) <가능한> 전체 개념의 부분개념들[징표들]은 종합적이다.” 따라서 위에서 인용된 순수이성비판의 B133 주석의 괄호 속에서 칸트가 언급한 “단지 <가능한> 표상들”이란 곧 생산적 상상력에 의해 표상될 수 있는 어떤 개념의 <가능한> 부분표상들[징표들]을 말한다. 이는 칸트의 분류에 따르면 <분석적 징표>가 아니라 <종합적 징표>다.
칸트는 논리학 강의 속에서 볼프학파의 논리학자들이 개념의 분석을 통해 한갓 분석적 징표들을 열거함을 통해 개념을 명료하게 만들고자 시도했음을 지적하고, 그러나 이는 이미 주어진 개념 속에 있는 징표들에 <분석적인 명료성>을 줄 뿐, “<가능한> 전체 개념의 부분으로서 비로소 개념에 속하게 되는 징표들과 관련된 명료성을 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명료성은 분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상력의 종합에 근거하여] 징표들의 종합을 통해서만 생겨나는 <종합적 명료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대상에 관한 “명료한 개념을 만드는 것[종합적 통일]과 (이미 주어진) 개념을 명료히 만드는 것[분석적 통일]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종합에는 대상의 명료화가 속하지만, 분석에는 개념의 명료화가 속한다.” 그러므로 개념들을 분석하여 명료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자체가 한 대상에 관한 인식들인 개념들을 전제한다. 그런데 한 대상에 관한 명료한 인식의 내용을 이루는 징표들은 모든 비교에 앞서 “대상이 현재없이도 직관 속에서 표상할 수 있는”(B150) 생산적 상상력의 종합작용에 의해 표상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과의 관련성을 사상한 채 개념들의 포섭관계만을 분석했던 종래 형식논리학에서와 달리 대상관련적인 개념의 내용적인 형성의 원리, 따라서 개념의 내용을 이루는 징표들 자체의 가능성을 문제삼는 초월 논리학에서 <상상력의 종합작용>이 <개념의 내용적인 형성>, 나아가 모든 <대상 인식>에 필수적인 기능으로 도입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즉 초월철학의 정점으로 간주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 원리도 “영혼의 근본능력”(A124)인 상상력의 종합작용을 “자기에 앞서” 또한 “자기 안에” 지님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갓 개념들을 분석하고 추상적으로 비교하여 그 형식적인 분류와 체계화만을 문제삼는 <지성의 논리>, <분석의 논리>였던 <일반논리학>과 뚜렷히 구별짓기 위해 칸트의 <초월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을 단적으로 <대상 형성의 논리>, 상상력에 의한 <종합의 논리>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제 필자는 개념의 최초의 내용적 형성을 문제삼는 초월논리학이 초월적 반성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핵심적인 구분인 의식의 <분석적 통일>과 <종합적 통일>, 개념의 <분석적 징표>와 <종합적 징표>의 관계를 앞서 인용한 귀절(B133 Anm.)을 실마리로, 구체적인 예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우리가 표상들을 분석하여 그 안에 내포된 징표[분석적 징표]를 비교․반성․추상하여 예컨대 “빨강”이라는 일반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런 징표가 내포되어 있는 “빨간 사과”, “빨간 장미”와 같은 상이한 표상들이 분석의 재료로서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재료들은 그 자체가 서로 다른 특수한 대상들과 관계 맺는 상이한 내용[종합적 징표]을 지닌 표상들 - 예컨대 “여기 내 방 탁자 위에 놓인 빨갛고 새콤하고 둥그런 모양의 사과”, “꽃잎은 빨갛고 아름답지만 줄기는 가시가 돋힌 집앞 뜰에 핀 저 장미”- 이며, 모든 비교와 분석에 앞서, 생산적 상상력의 종합작용을 매개로 직관의 다양을 포착․재생․인지하여 통일하는 의식 활동에 의해 이미 형성된 (내지 형성될 수 있는) 한 대상에 관한 인식들이다.
이때 한 개념의 내포를 추후적으로 분석해서 얻어지는 징표들을 <분석적 징표>라고 한다면, 그것을 통해 내가 비로소 한 대상을 실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다시말해 특수한 대상의 속성을 지칭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징표가 <종합적 징표>다. 따라서 개념 분석을 통해 우리는 개념의 분석적 징표들을 명료하게 하고 그것들을 매개로 개념들의 포섭관계를 모순 없이 체계화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작업은 모든 직관적인 내용이나 대상과의 관련을 도외시한 채 한갓 무모순적인 사고속에서 추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개념의 유희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을 통해 얻어진 징표들의 <분석적 명료성>이 곧 그 징표들로부터 애초에 인식될 수 있었던 (또는 단지 상상해 볼 수 있는) 한 대상의 명료성을, 다시말해 <종합적인 명료성>을 초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역으로, 한갓 개념 분석과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징표들의 분석적 명료성은, 이미 모든 분석과 “비교에 선행하는” 생산적 상상력의 종합에 의해 획득되었거나 (또는 획득될 수 있을) 한 대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징표들의 종합적 명료성을 전제한다. 따라서 일반 개념의 분석적 징표들은 이미 하나의 특정한 대상에 관한 인식에 의해 최초로 성립하는 종합적 징표들로부터 파생된 것일 뿐이다.
이렇듯 모든 분석적 절차에 앞서 하나의 對象에 관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상상력의 포착․재생․인지하는 종합작용을 매개로 하는 統覺의 근원적 종합 통일의 활동이다. 이때, “다양의 종합을 통각의 통일에로 이끌어 가는” 사고 활동의 “규칙들”(B145)로서 “지성이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지니는 종합의 순수 개념들”이 범주다. 즉 “지성은 이런 순수 개념들에 의해서만, 다양한 직관에 있어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말해 직관의 대상을 사고할 수 있다.”(A81)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범주는 어떻게 의식의 종합적 통일의 규칙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모든 개념의 사용은 판단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에 관한 인식인 판단 속에서 판단을 구조지우는 범주의 초월론적 기능을 살펴보기로 하자.
3. 판단과 대상
칸트는, 일반논리학에서 단지 개념들의 형식적 연관 즉,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포섭관계에 기초한 결합으로 간주되어 온 “판단”의 본질 구조를 내용적 대상과의 관련을 문제시하는 초월논리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명하고 있다. 한갓 개념들의 관계 규정인 의식의 <분석적 통일>이 대상관련적인 <종합적 통일>을 전제한다는 사태는 또한 주어와 술어의 결합인 판단(Urteil)에 있어서도 성립한다.
논리학자들이 판단 일반에 관해 제시하는 설명에 나는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판단은 두 개념들간의 관계의 표상(die Vorstellung eines Verhältnisses zwischen zwei Begriffen)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런 관계가 어디에서 성립하는지가 여기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각종 판단에 있어,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보다 면밀히 탐구해 볼 때, ‥‥ 판단이란 주어진 인식들을 統覺의 客觀的 통일에로 이끌어 가는 방식(die Art, gegebene Erkenntnis zu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이외 다름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판단에 있어, 연결어 ‘ist’는 바로 이런 客觀的 統一을 노리는 것이다. 예컨대, ‘Der Körper ist schwer.’와 같은 경험적 판단에 있어서도, 연결어 ‘ist’는 주어진 표상들의 근원적 통각에로의 관계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두 표상이 직관들을 종합함에 있어 통각의 필연적인 통일에 의해 서로 관계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때, 두 표상은 그로부터 인식이 생겨날 수 있는 한에서, 統覺의 초월적 統一의 원칙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는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리(범주들)에 따라 서로 관계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주어진 표상들의 관계로부터 客觀的 타당성을 지닌 관계, 즉 판단이 성립한다.(B140ff)
칸트는 일반논리학이 판단을 단지 개념들의 분석에 의한 포섭 관계로서만 다루는 데 불만을 표시하고 인식의 최초의 내용적 형성을 문제 삼는 초월논리학적 입장에서 판단의 원천을 직관의 다양한 내용을 상상력을 매개로 의식이 근원적으로 통일하는 활동 속에서 찾았다. 일반논리학에서는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개별 내지 특수와 보편의 포섭관계에서 본다. 그러나 이런 일반 “형식논리학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근본 의도는 본래 개별적 실체의 참된 파악에 있었다. 즉 그의 논리학의 근저에는 존재론적 요구가 깃들여 있었던 것이요,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판단은 主語(subjectum, hypokeimenon) 즉 근저에 놓여있는 실체[사물 자체]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속성에 의해 규정됨을 의미한다. 어디까지나 주어일 뿐이요 술어일 수 없는 실체를 참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그의 중심 과제이었다. 여기서는 술어는 그 자신 자립적인 것이 못되고, 오히려 주어 속에서만 그의 존립을 가진다. 즉 술어는 주어에 내속한다. 따라서 술어가 주어와 구별되는 경우에 술어는 단지 주어의 개별화된 하나의 규정성이요, 주어의 특성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주어 자신은 구체적인 것이요, 술어처럼 개별화된 하나의 규정성이 아니라 그들 다양한 규정성의 총체인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서 주어의 파악을 목표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주어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어의 논리는 판단의 본질을 개념의 내포에 있어서 보려는 존재론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내포적인 존재론적인 성격이 捨象되어 오직 그의 외부[외연]적 관계만을 다루게 된 것이 다름아닌 일반적 형식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모든 분석과 분열에 앞서 주어와 술어를 관계지우는 판단기능의 근거를, 상상력의 “초월적 기능”(A123)을 매개로 직관의 다양한 소여를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對象으로 성립시키는 우리 의식(통각)의 근원적인 종합 통일 활동 속에서 찾았다. 이는 주어지는 다양한 소여들을 결합함에 있어, “나의 意識의 일관된 동일성”(B135)이외 다름 아니다. 對象의 동일성은 바로 이러한 결합하는 “Ich denke의” “自己활동성의 作用”(Aktus seiner Selbsttätigkeit)(B130)에 의해 산출된다. 즉, “통각의 초월적 통일은 그것을 통해 직관 속에 주어지는 모든 다양이 한 대상의 개념으로 결합”되어지는 한, “客觀的 統一”(B139)의 활동이며, 그런 한에서 그 활동 形式들인 범주는 한갓된 사고形式이 아니라, 한 대상의 개념을 가능케하는 “객관적 규정의 원리”일 수 있는 것이다.
범주는 그것을 통해, 대상의 직관이 판단에 있어 논리적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 것으로 보여지게 되는 對象 一般의 개념이다. 예컨대, ‘모든 물체는 분할 가능하다’는 정언 판단의 기능은 주어가 술어와 관계맺는 기능이었다. 그러나, 지성의 한갓 논리적 사용에 있어서는, 두 개념들 중에 어느 개념에 주어의 기능을 부여하고, 어느 개념에 술어의 기능을 부여할 것인지가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간의 분할 가능한 것은 물체다’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물체라는 개념을 實体의 범주 아래 가져간다면, 경험 속에서 물체의 직관은 항상 단지 주어로서만 보여지게 되며, 결코 한갓된 술어로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실체의 범주를 통해 규정된다.(B128)
즉, 인식의 모든 내용(직관)과 대상관련성을 사상한 지성의 논리적 사용에 있어서는 예컨대 “물체”, “가분성”이라는 두 개념이 임의의 판단 속에서 관계맺어진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관계는 분석적 통일에 의해 그 포섭관계가 반성됨으로써 재차 換位 가능한 것으로 다뤄진다. 왜냐하면 한갓 무모순적인 사고 속에서 개념들의 논리적인 포섭관계만이 다뤄지는 형식논리학에서는 “모든 물체는 가분적이다”는 판단의 주어-술어의 위치를 바꿔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다”라고 환위시켜도 아무런 모순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 장에서 논의된 바대로, 개념의 대상과의 연관을 도외시하고 단지 개념의 분석을 통해 얻어지는 <분석적 징표>만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체”, “가분성” 개념을 구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경험 속의 한 대상에 적용시켜 현실적인 대상 인식을 통해 획득된 (내지 단지 상상 속에서라도 표상될 수 있는 가능한) <종합적인 징표>로서 이해할 때, 예컨대 “물체”를 딱딱하고, 다리가 4개이고,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쇠톱으로 분할될 수 있는 등등의 여러 성질들을 지니고 있는 “여기 이 방 안에 놓인 탁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가분성”을 “여기 이 방 안에 놓인 탁자의 한 성질”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모든 비교와 분석에 앞선 이 탁자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비록 그것이 쇠톱에 의해 분해될 수 있는 한, 다리가 4개라는 규정이나 직사각형이라는 규정과 같은 우연적인 성질들이 변화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지속하는 “이 물체는 (딱딱하고, 다리가 4개고, 직사각형의 모양이며, 쇠톱에 의해) 가분적이다”는 판단 형식으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추후적인 분석과 논리적 반성에 의해 두 개념의 위치가 환위될 수 있겠지만, 이 최초의 (직관적 내지 단지 상상적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특수한 대상에 대한 종합적 인식 속에서 “가분성”은 여타의 규정들(ex. 딱딱함, 직사각형임, 다리가 4개임)과 더불어 실체인 이 “물체”에 귀속하는 성질(종합적 징표)로만 보여지며, 따라서 그 자신이 주어 자리에 올 수 없고 단지 주어를 서술하는 술어 규정으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칸트에 있어 개념에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대상은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 감각적으로 주어진다. 또한 2) 단지 <가능한 경험>에 있어 대상은 상상력의 도식화(Schematismus)를 통해 개념에 주어질 수 있다. 전자는 현실적인 경험의 대상으로 감각을 재료로 주어지는 1차적 의미의 현상이요, 이는 아직 범주의 규정을 받지 않은 무규정적인 대상으로 인간의 수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후자 즉 상상력의 종합작용을 통해 개념에 주는 대상은 단지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시간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상상력의 작용을 통한 감각적 경험의 구조화[즉 도식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이는 시간지평 가운데서 하나의 ‘그림’으로 규정되고 구조화[조직화]된 대상이며, 이렇게 대상의 현재 없이도 상상력이 직관 속에 그려 보여 주는 대상은 인간의 자발성 혹은 능동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실체(Substanz)는 만약 지속성(Beharrichkeit)의 감성적 한정[Schema]을 배제한다면 (결코 다른 것의 술어가 됨이 없이) 오직 주어로서 사고되는 어떤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데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표상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제1의 주어로서 타당해야 할 그 물체가 어떤 규정을 갖는가를 이 표상은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식이 없는 범주는 개념에 대한 [형식] 논리적 기능에 그치고 아무런 대상도 표상하지 못한다. 이런 [대상적인] 의미는 [상상력의 매개에 의해] 감성이 지성을 제한(restringiert)하면서 동시에 실현(實在化 realisiert)하는 것에 의해 감성으로부터 범주에 부여되는 것이다.”(B187)
4. 범주와 통각의 종합적 통일
따라서 직관되는 상이한 내용들을 한 대상의 속성들로서 이해하고, 하나의 주어를 서술하는 술어 규정으로서 묶어 주는 우리의 의식활동[감성의 다양한 직관들을 상상력의 도식작용을 매개로 통각이 개념적으로 통일하는 활동]이 대상에 관한 실질적인 인식이며, 이를 수행하는 데 규칙으로 작용하는 것이 범주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자기촉발을 통해] 만들어 낸 알파벳[시간]을 토대로, 우리가 지닌 문법[범주]에 따라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언어체계[도식]로써 “현상을 경험으로 읽을 수 있도록 철자화한다(buchstabieren)”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컨대 실체-속성의 범주를 대상에 적용하여 실재적으로 사용함에 의해, 비로소 판단에 있어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對象에 있어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서 확립되고, 이로써 우리의 판단은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판단의 논리적 구조[S-P]와 현상사물의 존재구조[실체-속성]의 일치를 가능케 해주는 근거가 “초월적 圭觀”(B404)의 근원적 종합 통일의 활동이다. 즉, 표상들을 결합하는 활동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산출하는 “Ich denke”는, 판단의 기능 속에서 모든 술어들의 담지자인 主語의 기능으로서 대변되며, 또한 現象의 구조에 있어서는, 다양한 성질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일적으로 지속하는 基体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즉,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이미 스스로 그 속에 投人(hineinlegen)했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며, 사물에 관해 판단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난다.”
이때 판단의 논리적 주어와 사물의 실재주어와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즉 “전자는 술어들을 定立하는 논리적 근거를 포함하고, 후자는 偶有(Akzidenz)와 결과를 定立하는 實在 근거(어떤 다른 것 그리고 적극적인 것)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 속에서 술어들의 근저에 놓인 주어(Sub-jekt)는 실재에 있어 우유들의 근저에 놓인 實体(Sub-stanz)와 유비적으로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응(Ent-Sprechen)은 양자의 근저에 놓인 근원적으로 언표하고 定立하는 自我(das beide zugrundeliegende denkende und sprechende und setzende Ich)가 판단의 주어에 술어들을 정초하고 통일하는 기능을 부여하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우연적 성질들의 근거 줌과 통일의 과제를 실체적인 대상에 위임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판단의 논리적 주어와 사물의 실재주어, 이 양자를 근거지우는 초월적 圭觀은 대상의 대상성을 자기 앞에 세우는(vor-stellen) 판단활동 속에서 스스로 자기 동일적으로 세워지는 자기 定立의 활동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렇듯 모든 주어의 토대를 이루는 “궁극적인 주어”로서의 “Ich denke” 는 그 자체 대상적인 내용으로 파악될 수 없고,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도 술어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우리의 의식의 내용들에 선술어적으로[비명시적으로] 동반하고 그것들을 범주에 의해 조직화하고 대상화하여 규정하는 활동인 통각이 자기 자신의 틀인 범주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대상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일반적으로 객관을 인식하기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 자체를 객관으로서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A402) “초월적 주관은 그것의 술어인 사고작용에 의해서만 알려지며 이런 사고작용이 없이 단독으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월적 주관의 주위를 항상 헛되게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초월적 주관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자면 우리는 항상 이미 ‘나’라는 표상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B404) 그러므로 “범주들의 주체는 이 주체가 생각함을 통해 범주의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범주를 사고하자면 주관은 자기 자신의 순수한 자기의식을 이미 전제해야 하지만 이 순수한 자기의식이 바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422)
따라서 그것의 무엇임을 규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의 “있음”도 데카르트(R. Descartes)와는 달리, 실체적인 사물로서의 있음이 아니라, “Ich bin” 은 “대상의 모든 표상에 선행하는 [초월]논리적 작용이며,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定立하는 동사(ein Verbum)다.” 즉, 단지 “자신의 술어들인 생각들을 통해서만 의식될 수 있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공허한 표상인 Ich에 관해서는 심지어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개념들에 동반하는 한갓된 의식일 뿐이다.”(B404) 즉 “사고하는 이 나(dieses Ich), 그(Er) 또는 그것(Es)은 단지 사고의 초월적 주관(ein transzendentales Subjekt = X)으로서 밖에 표상될 수 없다.” 따라서, 능동태의 동사(verbum activum) “Ich denke”는 그것을 통해서만 도대체 어떤 것을 내가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표상일반의 形式인 한에서 “항상 주어로서만 타당하며, 사고에 종속하는 술어로서 간주될 수 없다.”(B407)
이와 유사하게 후설(E. Husserl)은 현상학적 반성 속에서 반성을 통해 결코 드러나지 않는 반성하는 자아를 “익명적 자아”(ein latentes Ich)로서 특징지우고 있고,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도 초월적인 자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적인 자아는 [현상적인] 인간이 아니며, 인간의 신체도 아니며, 또는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의 마음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형이상학적 자아요, 세계의 한계(die Grenze der Welt)이지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그것은 세계의 한계다.” 이는 “눈과 시야의 관계와 같다.” 우리의 눈은 모든 것을 보지만 “눈을 보지는 못한다.
이런 초월적 주관, 반성의 주체인 근원적인 자아는 결코 내용적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지시체가 없는 한 “초월적 자아”라는 용어 자체가 엄밀히 말해 내포와 외연을 지닌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하나의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언급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이런 자아를 언급하면서 “눈”에 비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상징적 또는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의미있게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의 영역, 경험의 세계인 “현상계”를 수많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바다”에 비유하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영역을 “하늘”에 비유한다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인 현상계를 가능케 하는 근거이자 한계인 “초월적 주관”은 모든 물고기들의 삶을 가능케 하고 그것들을 담고 있는 바다의 한계인 “수평선”과 생생한 유비가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유비적인 이해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우리 언어의 중요한 기능이며, 오히려 개념적 인식보다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우리 언어에 보다 풍부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제 우리는 범주와 판단과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한 판단에 있어, 상이한 표상들(주어와 술어)에 통일을 주는 동일한 기능이 또한 한 직관에 있어 상이한 표상들의 한갓된 종합에 통일을 준다. 이런 기능을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순수지성개념이라고 부른다. 즉, 지성이 분석적 통일에 의해 개념들에서 판단의 논리적 形式을 성립시켰던 그 동일한 활동들을 통해 직관 一般에 있어 다양을 종합적으로 통일함으로써, 자신의 표상들에 초월적인 內容을 가져온다. 바로 이 때문에, 이런 표상들을 순수지성개념들이라고 부르며, 이런 개념들은 선험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지만, 일반논리학은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없다.(B105)
Ⅴ. 맺음말
이 글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초월논리학은 일반논리학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무엇이 무엇에 선행하는 우위를 지니는가? 그 결론은 초월논리학이 일반논리학을 기초지우는 근거로서 기능할 수 있는 한, 선행하는 우위를 지니며 후자는 전자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이미 한 논문에서 밝혔듯이 형식논리학의 근본 원리인 동일률은 초월논리학의 근본 원리인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리로부터 파생된 “분석적 통일”의 기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통각의 종합적 통일 원리는 “지성의 모든 사용과, 모든 논리학이, 또한 초월철학이 그에 결부되야 할 최고 정점”(B134 Anm.)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논리학에서 내용적 차이를 도외시한 채 동종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개념들은 그 원천상 고유한 인식의 대상과 관계되는 서로 상이한 내용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개념의 분석에 의해 얻어진 “분석적 징표”들은 그 원천상 직관적인 내용을 상상력이 결합함으로부터 성립하는 “종합적 징표”들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또한 “모든 분석은 종합을 전제한다”는 초월논리학의 명제에 기초해 볼 때, 모든 분석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통각의 분석적 통일 기능은 종합적 판단의 원리인 통각의 종합적 통일 기능을 전제하며, 후자로부터 전자는 파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다음과 같다. 독일 관념론의 전개사 속에서 칸트의 초월논리학과 헤겔의 사변논리학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칸트의 초월논리적 반성 속에서 발견되는 통각의 통일성에 대한 반성의 심화 과정이 독일 관념론의 전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칸트가 “초월철학의 정점”으로 간주한 “통각의 종합 통일 원리”를 주어와 술어, 특수와 보편, 주관과 객관, 존재와 사유, 정신과 자연과 같은 이종적인 요소들의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ät)”이라는 “참된 사변적 이념(eine wahrhaft speculative Idee)”으로 해석함으로써 초월논리학의 이념 속에서 사변 논리로의 싹을 발견했던 헤겔(G. W. F. Hegel)은, 그럼에도 칸트가 이런 단초를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한 채 모순율에 기초한 추상적 사고를 다루는 형식 논리와 병렬시켜 다루고, 또한 형식논리학의 판단표로부터 범주를 도출해내는 등 형식논리학을 초월논리학의 준거점으로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형식 논리적 사유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헤겔은 이런 관점에서 “내용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주관성의 추상적 형식들만을 다룬다”고 칸트철학의 추상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외관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변논리학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 예컨대 범주의 초월적 연역, 선험적 종합의 문제, 생산적 상상력에 의한 직관과 사유의 매개, 자의식의 근원적 종합 통일 등 칸트의 초월논리학의 핵심적인 주제와 문제 의식으로부터 헤겔은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이는 초월 논리와 사변 논리의 관계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주제들이다. 대상 경험의 가능성을 정초하고자 하는 칸트의 선험적 종합의 문제 의식을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의 “절대적 동일성(absolute Identität)”으로서 자신의 “사변적 이념”에 의해 해석하고, 그 싹을 온전히 전개시키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헤겔의 비판은 칸트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정당한 평가로 간주될 수 있는가? 과연 헤겔의 비판은 칸트철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칸트와는 다른 전제에 기초한 일방적인 해석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초월논리학과 사변논리학의 관계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논제들이며, 앞으로 수행되어야 할 연구 과제로서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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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Allgemeine und Transzendentale Logik
― Park, Jin ―
Die Absicht der vorliegenden Abhandlung ist das Verhältnis von allgemeiner und transzendentaler Logik zu aufklären, und den wahrhaften Sinn der transzendentalen Logik Kants im historischen und systematischen Zusammenhang auszulegen.
Auf der einen Seite behauptet H. J. Paton, daß die allgemeine Logik den Vorrang hat, und auf der allgemeinen Logik die transzendentale Logik beruht. Auf der anderen Seite betont R. S. Laiez, daß im Hinblick auf Kants Begriff von Logik die fragliche Abhängigkeit wechselseitig ist.
Aber ich habe darauf hinzuweisen versucht, daß die transzendentale Logik die philosophische Begründung der allgemeinen Logik ist, und auf der transzendentalen Logik die allgemeine Logik beruht .
Um eine Annährung an den Kern dieses Verhältnis zu aufklären, habe ich vier Themen untersucht.
1. analytische Einheit und synthetische Einheit
2. analytische Merkmale und synthetische Merkmale
3. Urteil und Gegenstand
4. Kategorie und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 Schlagwörter : transzendentale Logik, allgemeine Logik, synthetische Einheit, analytische Einheit, Apperzeption, K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