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固城 李氏) /이중지(李中至) 미상∼1446년(세종 28). 조선 초기의 무신. 시호: 평정(平靖)
고성 이씨 (固城 李氏) /이중지(李中至) 미상∼1446년(세종 28). 조선 초기의 무신.
시호: 평정(平靖) 治而無眚曰平。寬樂令終曰靖。1446년(세종 28) 증시
일을 잘 다스려서 과실이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하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였다.
본관은 고성(固城). 이근(李懃)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 무과에 급제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려서 궁 밖의 조신(朝臣)의 집에서 양육될 때 자기집에서 함께 있던 관계로 수양을 보위하였다.
1419년(세종 1) 왜구가 경기도 고양군에 침입하였을 때, 당시 첨총제(僉摠制)였던 그는 충청도조전병마도절제사(忠淸道助戰兵馬都節制使)가 되어 왜구진압에 큰 공을 세웠고, 1421년에는 진하사의 부사(副使)로서 정탁(鄭擢)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제사가 되었다.
그뒤 1423년 좌군동지총제‧판의주목사를 거쳐, 1429년에 사은사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소임을 소홀히 하였다 하여 서흥에 유배를 갔다가, 곧 풀려나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23년 다시 이간(李侃)‧박용(朴用) 등의 일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435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벼슬은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중지(李中至)에게 제사를 내리니,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경(卿)은 의표(儀表)가 괴위(傀偉)하고 기우(器宇)가 뇌락(磊落)하였으며, 무예(武藝)에 능하고 또한 학식(學識)도 있었도다. 소고(昭考)를 섬기어 특별히 은악(恩渥)을 받았는데, 내가 더욱 은총(恩寵)을 기울여 갑자기 승진 발탁하였도다. 여러 번 변방의 장관[邊閫]에 임명되고, 네 번이나 상국(上國)에 조회하였도다. 곳에 따라 재능을 시험하니 성성과 공적[聲績]이 있었도다. 바야흐로 의임(倚任)하려 하니 갑자기 양병(養病)하기를 청하였다. 나아와 접견함은 비록 어기었으나, 은총을 베품은 더욱 간절하였도다. 장차 다시 일어나기를 생각하였는데 갑자기 죽음에 이르렀도다. 예전의 덕(德)을 추념(追念)하니 이에 상심(傷心)함이 더하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한 잔의 술을 드리게 하노니, 경이 혼령이 있거든 와서 음향하기 바라노라.”하였다.
○賜祭于知中樞院事李中至。 其文曰:
惟卿儀表魁梧, 器宇磊落。 長於武藝, 且有學識。 祗事昭考, 特承恩渥。 予益眷注, 驟加陞擢。 累任邊閫, 四朝上國。 隨所歷揚, 曰有聲續。 方期倚任, 遽請養疾。 晉接雖違, 眷注冞切。 謂將復起, 奄爾不淑。 追念舊德, 玆深傷聿。 爰遣禮官, 伻陳一酌。 卿其不昧, 庶(歲)〔幾〕歆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