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 25일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밀어붙였고, 그 뒤에 다시 중국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 과정이었던 1952년 8월 5월에 제2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뤄졌다.
그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여겨지지만,
6.25전쟁을 하던 도중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파동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느냐, 간선제로 뽑느냐로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역사적 선례로 작용할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대통령 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의 문제와 같이 말이다.
야당 일각에서는 전쟁통에 총리였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돌아서려는 움직임도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나라가 분단의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바로 위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각제와 맞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야당은 장면 옹립 및 내각제 개헌시도를 했고, 이에 맞서 이승만은 1952년 5월 14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국민들의 의사를 물어보자는 취지와 동시에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여 전쟁을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부산정치파동도 터지면서 여러 논란이 되다가, 미국도 이승만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1952년 7월 4일에 국회는 재적의원 185명 중
166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립 표결한 결과 163명이 찬성, 기권이 3명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는 도입되었다.
이렇게 새 헌법에 의거해 8월 5일 시행된 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인 523만여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써 전시라는 국가가 절체절명하는 총체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그것도 간선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들이 우리나라의 민주정치가 보다 발전하도록 하는 데에 이바지 했다고 볼 수 있겠다.
18.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
- 반공포로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적인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남한의 모든 사람들은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이승만도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은 휴전협정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북한과 대신 협정을 체결하려고 했다.
즉, 우리나라의 의사결정권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자주적인 독립국임을 과시함과 동시에 반공포로들을 생각해서 독단적으로 석방을 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은 이제까지 공을 들여 온 휴전이 백지화가 될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그들을 석방하라는 친필명령서를 직접 전달했고, 1953년 6월 18일 0시에 개시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국군은 아군인 미군을 제압한 이후에 27,000명을 석방시키고 그들을 남한의 국민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이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조건부 성과를 미국으로부터 얻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19. 휴전협정 체결로 2억 달러 부흥 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 사단 증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
- 6.25전쟁 직후 국군은 크게 발전했다.
예컨대 해군은 전쟁 당시에 4개 정대에 33척의 함정으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휴전 무렵 해군은 6개의 전대를 기간으로 한 1개의 함대를 창설했고,
병력도 6,954명에서 12,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
공군도 1개의 전투비행단과 1개의 훈련비행단 등 2개의 비행단으로 성장했고,
비행기도 F-51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병력도 1,897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됐다. 이는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었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 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앞서 언급된 반공포로석방을 통해 미국에게 자주적인 권리를 천명했고, 또 자신들이 휴전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미국은 휴전을 성사하는 조건부로 이러한 각종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준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외교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 뿐만이 아니었다.
휴전협정에 찬성하는 대신에 이승만 대통령은2억 달러에 달하는 부흥 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 사단 증강과 같은 성과를 냈다.
이러한 것들은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약을 이승만이 체결하도록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어
확실한 군사적 안전 보장을 받아냈다.
즉, 미군을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 배치하여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여 북한군이 다시 남침을 한다면 자동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추가로 전후에 7억불의 차관을 얻어냈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여 얻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안정 및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업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못지 않게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며 우리가 득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 등을 준공하여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준공하였다. 그럼으로써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핵심적인 사업이 된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예컨대 당시에 중공업은 북한이 79%, 남한이 21%의 비율로 매우 비대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금속 공업의 경우엔 90% 이상이 북한에서 생산되었다. 남한에서는 오로지 방직공업 생산 부문에서만 북한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956년부터 수입대체산업 정책이 본격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국내 산업시설의 육성을 위한 기반, 즉 박정희 정권 때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느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지원금을 모두 문경시멘트공장, 충주비료공장, 인천유리공장 등의 발전사업 건설에 사용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격차가 현격한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초기에 반대함으로써 그후 일본경제에 대해 상대적 자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 이후인 박정희 정권에는 어느 정도의 구축을 해놓은 상태에서 국교를 재개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으로 그가 통치한 1953년에서 1960년 사이에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로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들의
평균성장률 4.4%를 조금 상회했다.
또한 제조업 성장률은 12.4%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자금을 착복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국가의 토대를 건설했고,
또 이러한 사회기반설비와 교육으로 만든 인적 인프라는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기에 아주 중요한 업적이라 하겠다.
21.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세계적인 원자력 국가의 토대를 닦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