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집안 행사를 하나 마치고 나니 피로가 온몸으로 몰려든다. 내가 한 것은 별로 없다 쳐도 집에서 30명 넘는 손님을 치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다들 떠나가고 난 자리, 딸아이까지 아기를 데리고 가고 나니 집안이 텅 빈 것 같다. 갓 돌 된 손녀를 조금 더 안아보겠다고 아내는 냉큼 아기를 안고는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내 의사완 관계없이 여인 3대가 내게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총총히 나가는 그 뒤를 나는 한 마디 항변도 못하고 그냥 따른다. 그렇게 아기까지 데려다 주고 와서인지 집은 더욱더 넓고 휑하다.
밀린 일이 많지만 도저히 지금 상황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둘러 목욕을 하고 아직 해가 하늘에 있건만 두 시간만 눈을 붙이자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아차 눈을 떠보니 자정이다. 깰 시간을 놓쳐 하루 밤 잘 양을 다 자버린 셈이다. 무얼 좀 하고 자자니 그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주 일어나버리자니 시간상으론 한 밤중 아닌가. 결국 갈등을 하다가 조금만 더 자고 일찍 일어나자고 마음을 정한다.
아내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그런데 한 번 깨어버린 잠이 쉬 올 리 없다. 피곤 기는 몰려오는데도 잠은 들 수가 없다. 수면 마스크를 써 보아도 별 효과가 없다. 거기다 온갖 소리들이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경쟁적으로 내 귀로 집중된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미세한 소리까지 어쩌면 그렇게 큰 소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슬리는 게 시계소리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처음엔 하나인 것 같더니 하나가 더해지고 또 하나가 더해진다. 가까이 멀리 선명하게 희미하게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집에 시계가 몇 개란 말인가. 지금 들려오는 소리만도 안방 벽에 걸려있는 시계, 새벽에 일어나려고 맞춰놓은 알람시계, 거실에 걸린 벽시계, 거실 장식장 위에 올려져 있는 탁상시계, 이것만 해도 네 개다. 저마다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으니 그 소리가 적막한 심야에 어찌 크지 않으랴. 그런데 집에 과연 시계가 몇 개나 될까 헤아려보니 정말 시계가 많다.
건넌방엔 미국에 가있는 아들 녀석이 선물 받았다는 자동차 타이어 모형의 시계가 걸려있고, 내 방에만도 몇 개가 되는 것 같다. 우선 벗어놓은 손목시계가 셋이다. 기분에 따라 약간 무거운 것, 가죽 끈이 달린 캐주얼하고 심플한 것, 주로 많이 차고 다니는 금박 줄무늬 있는 것을 골라 찬다. 책상 위엔 계산기와 펜 꽂이를 겸한 디지털시계가 있고, 책꽂이 옆의 작은 은색 탁상시계도 있다. 하나 더 있다. 두 은행의 합병기념으로 만들었다는 시계인데 그건 전지를 갈아주지 않아 쉬고 있는 중이다.
주방에도 까만색 벽시계가 걸려있는데 아내는 음식을 하다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고 냉장고에 탈착용 시계까지 붙여놓고 있다. 참 많기도 하다. 그런데 또 있다. 핸드폰마다 시계이지 않은가. 도대체 시간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려고 이만큼 시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전자렌지도 오디오도 다 시계다. 우리 집만 이러는 것일까.
현대인은 두 가지의 시계를 사용한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계라고 생각하는 바늘이 문자판 위를 돌아가며 시간을 알려주는 아나로그 시계다. 또 하나는 내 책상 위의 시계같이 숫자가 시간을 표시해 주는 디지털시계이다. 하루라는 스물 네 시간을 문자판에 공간화 하여 시침, 분침, 초침이 각기 돌아가면서 자기 몫의 시간대를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침에선 시간을, 분침에선 분을, 초침으론 초를 보지만 대개 시간과 분으로만 시간을 가늠한다. 그러나 바늘이 숫자로 바뀌어버린 디지털시계는 보는 시간이 읽는 시간으로 시간의 흐름보단 지금의 시간만 알려준다. 그래서일까, 디지털시계에선 깜박이고 있는 ‘지금’이라는 단절적이고 점멸적인 속성만 느껴지는 것 같다.
사실 시계라면 크고 작은 수많은 부품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생명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확대경을 끼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미세한 톱니며 나사못들은 공업이기 전에 가히 예술이었다. 시계가 고장 나 수리점에 갔을 때 뒤 덮개를 열고 보던 그 질서정연함, 톱니와 톱니가 서로 물려 돌아가는 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런데 요즘이야 대부분이 전자시계가 아닌가. 시계바늘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 모두 전자장치로 단지 시계바늘로 시간을 알려주는 방법과 숫자로 알려주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편리해 지고 좋아졌다고는 해도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내 어릴 적에는 마을에 시계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어디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으면 시계 있는 집으로 달려가 시간을 묻고 오기도 했다.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시간 측정은 해가 어디만큼 떠있느냐로 가늠하거나 기차의 기적소리로 시간을 헤아리곤 했었다. 그럼에도 큰 실수 없이 사람노릇 다 해가며 잘 살았었다. 그런데 시계의 숲속에서 살면서도 우린 참 많이도 시간을 놓치고 어기며 낭패를 당한다.
내가 처음으로 시계를 차 본 게 언제였을까. 아마도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였지 않나싶다. 그땐 디지털시계가 훨씬 인기였었다. 그게 마치 첨단의 시대를 가는 상징이나 되는 것처럼 시분초까지 정확하게 나타내 주는 시계를 보면서 내가 있는 지금이 몇 시인가를 자랑스럽게 확인하곤 했었다. 어떤 날 11시 11분 11초처럼 시분초가 일치하는 숫자가 내 눈과 만나면 나는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봐야 하루 중 다섯 번의 그런 기회가 있을 뿐이니 시계를 들여다 본 그 순간이 그런 시간이 된다면 기분이 좋아질 법도 하다.
너무 많다는 것이 어찌 우리 집 시계뿐이랴. 시계는 생활필수품이지만 때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로도 사랑을 받는다. 처음 시계를 차게 되었을 때는 누가 시간 좀 물어봐 주었으면 하고 기대를 하기도 했고, 시계를 볼 때도 갖은 폼을 다 잡으며 으스대거나 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안달을 했다. 하지만 요즘에 시계는 문명의 이기이면서 사람을 얽매는 기계이기도 하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사람을 기다리는 지루함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시계는 뭐하려고 차고 있느냐고 호되게 질책을 받게도 한다. 시계가 없을 땐 그런 건 큰 잘못일 수 없었다. 많다는 건 좋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도 좋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나는 그 너무 많이 가짐의 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밤은 어느덧 새벽으로 달려가건만 잠은 좀처럼 와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시계소리는 여전히 왕성하다. 그 많은 시계들이 서로 질세라 째깍째깍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정말 너무 많다. 내 삶 속에 너무 많은 것은 시계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욕심일까 무지일까. 언제쯤에나 적당히 가질 줄도, 놓아버릴 줄도 알게 될까.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때는 언제쯤이나 될까.
수필과 비평 2010. 2.3월호